韓國史 文獻史料集

고도를 기다리며

吾心竹--오심죽-- 2009. 1. 7. 17:39

들어가는 말

  제가 에레훤(Erehwon)을 여행할 때의 이야기입니다.1) 바람이 휘몰아치는 황량한 벌판에서 나는 여러 명의 병정들이 줄을 맞추어 걷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곳에 무엇을 지키려고 저러는 것일까? 저는 몹시 궁금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병정에게 물었습니다.

  "이봐요, 군인 양반, 당신들은 왜 이 벌판을 왔다 갔다 하는 건가요?"

  그 병정이 대답하였습니다.

  "글쎄요, 저희는 잘 모르죠. 오래된 일이에요. 아무리 못되어도 오백년 이상은 이렇게 하고 있긴 하지만 … … 우리는 그저 우리 소대장님 명령만 따를 뿐이죠. 높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의문을 뒤로 한 채, 저는 그 황량한 벌판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도 그 벌판과 그 병사들에 대한 기억이 제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잡초 무성한 벌판,
  훈장을 단 장교들의 군화 소리,
  여기저기서 들려왔던 호각 소리 ……

  몇 년의 세월이 또 흘렀습니다. 저는 엘리너 파아전(Eleanor Farjeon)2)의 낡은 서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네, 옛날 그 곳에 어느 아름다운 왕비가 있었지. 어느 날 그 왕비는 왕궁을 잠깐 벗어나 산책을 하고 있었고 그녀는 아름다운 장미꽃밭을 발견했지, 왕궁으로 돌아온 왕비는 왕에게 그 꽃밭을 지키게 해달라고 부탁하여 병정들이 그 꽃밭을 지키게 되었다네. 세월이 흘러 왕과 왕비 모두 죽었고 그 왕궁도 비좁아져서 다른 곳으로 옮겼지. 그러나 왕의 그 '명령'만은 계속 내려오게 되었다네. 사람들은 왕비의 그 소망이 무엇인지도 잊어버렸고 그 꽃밭도 이미 없어진 지 오래지만 오늘도 그 병정들은 그곳에서 왔다 갔다 하는 거라네."
  

▲ [그림 ①] 엘리너 파아전의 낡은 서재와 저서 표지

  (1) 고도(Godot)를 기다리며

  『일본서기(日本書紀)』유라쿠 천황 20년(475)조에 보면, "고구려왕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쳐서 멸망시켰다."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열도(일본)에서는 이 해를 백제의 멸망 시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부연·설명하는 주석이 달려있습니다. 이 주석은 지금은 없어진 『백제기(百濟紀)』에 나타난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한번 보시죠.

  "개로왕 을묘년(475) 겨울에 오랑캐(고구려)의 대군이 큰성을 칠일 밤낮을 공격하여 왕성이 함락되고 드디어 위례국(慰禮國)을 잃고 말았다."3)

  이상한 일이죠? 우리는 백제를 온조왕 이후 의자왕까지 700여년을 굳건히 유지된 국호라고 알고 있는데, 『백제기』에는 국가가 멸망하는 중대 시기의 기록에 백제라는 말은 없고 위례국이라는 말만 나옵니다. 즉 백제가 멸망한 것이 아니라 위례국이 멸망한 것이죠. 이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개로왕 당시까지도 백제라는 말과 위례국이라는 말이 같이 사용되었거나 아니면 백제라는 말이 제대로 사용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박은용 교수는 260~370년 사이 즉 3세기 후반에서 4세기에 '백제(百濟)'라는 말이 성립되었다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4)

  특히 여기에서 인용된 『백제기』는 『일본서기』의 원자료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고민이 깊어집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른 바 '백제삼서(百濟三書)'라고 불리는『백제기(百濟記)』,『백제본기(百濟本記)』,『백제신찬(百濟新撰)』등이 많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이 책들은 현재까지 전하여져 내려오지는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일본의 황실 도서관에는 필사본(筆寫本)이 분명히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언젠가 한국과 일본 간의 역사적 앙금이 풀리고 고대사의 비밀이 모두 드러나게 되면 이 책들도 해금(解禁)이 될 것입니다.

  (2) 위례(慰禮)로 가는 길

  위례성은 반도 사학계가 말하는 백제의 시조라고 하는 비류·온조집단 등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했던 곳입니다. 그런데 그 동안의 연구에 따르면, 위례라는 말이 나라의 이름인지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사기』나 『백제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본다면 위례는 도읍의 이름이자 나라 이름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이 위례성은 어디일까요? 『삼국유사』 따르면 "위례성은 사천이라고도 하는데 지금의 직산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5) 이 기록은 위례성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종 11년(1429)에는 직산에 백제 온조왕묘가 세워지기도 했다고 합니다. 직산은 현재 충청도에 있습니다. 현재의 서울(Seoul)과는 다소 거리가 멉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위례성은 한강유역 즉 현재의 서울 지역으로 한강 이북 지역이라는 설이 대세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것은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선생, 김정호(金正浩 : ?∼1864) 선생 등에 의해 충분히 고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후 다시 위례성의 위치는 현재 경기도 광주(廣州)라는 견해가 유력한 설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헌 기록과 그 지리적 형세가 일치하는 요소가 많고 유적과 유물도 고증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역시 서울에 가까운 곳입니다.
  
▲ [그림 ②] 경기도 광주 전경(시청 홈페이지 자료)

  그러면 이 위례(慰禮)라는 말은 어디서 온 말일까요? 그 동안 이 말의 기원은 ① 백제의 왕성과 왕호(王號)을 중심으로 파악하려는 시도, ② 위례는 우리(cage)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조선 후기의 학자들의 견해를 중심으로 보는 견해, ③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에서 파생되었을 것이라는 견해 등의 세 가지 방향에서 연구되어왔습니다. 현재는 아리수에서 나왔다는 것이 정설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이 견해를 지지합니다.

  구체적으로 본다면 ①의 견해는 "백제의 왕성은 부여씨이고 왕을 '어라하'라고 부르고 사람들은 '건길지'라고 하였다."라는 『주서(周書)』등에 나타나는 '어라하(於羅瑕)'나 건길지(鞬吉支)를 중심으로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라하'와 위례의 관련성을 검토하는 것이지요. ②의 견해는 『훈몽자회(訓蒙字會)』등에 나타나는 "울히<우리(笠)"라는 말에서 기원을 추적하여 위례와의 관계를 보는 것입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본다면, '위례'란 사방이 어떤 조형물로 둘러싸인 것을 '위리(圍謙)'라고 하는데, '위례'는 이 '위리'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상의 두 가지 견해는 다소 적절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먼저 임금님의 호칭을 나라이름으로 삼는 것은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면 마립간국 이사금국이라는 표현은 없기 때문에 어라하국, 건길지국도 적절한 표현이 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유리왕(『삼국유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유리(琉璃), 유류(儒留), 누리(累利), 유리이사금 등 고구려나 신라는 왕의 이름을 정하는 것도 주로 태양(햇빛)과 누리(nuri : 세상)를 표현하는 말을 사용합니다.6) 한자로 말하면 세종(世宗) 또는 세조(世祖)라는 식입니다. 그런데 백제의 경우에는 이런 표현들이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루(婁)라는 돌림자를 많이 사용하고 있지요.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는 어렵지만 아마도 누리(nuri) 즉 세상과 관련된 말로 추정이 됩니다. 만약 그러하다면 고구려나 신라와도 별로 다르지 않지요.

  다음으로 위례가 '우리(cage : 笠)'에서 나왔다는 견해도 수용하기가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 '우리'라는 말을 나라이름으로 삼기에는 부적절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우리'라는 말이 위례의 상고음(上古音)으로 추정되는 말과는 다소의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위례의 현대 발음은 웨이리[wèilǐ]이고 상고음은 대체로 '이워리'로 추정되는데7) 우리의 고대어인 '울(울ㅎ)'과는 거리가 있지요.
  
▲ [그림 ③] 아름다운 아리수 풍경

  그러면 이제 한강의 옛 이름인 '아리수'를 중심으로 간략히 살펴봅시다. 그 동안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아리수'를 중심으로 연구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병도 박사는 아리수(阿利水)와 욱리하(郁里河)는 한강의 옛 이름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8)

  백제어 전문가인 도수희 교수가 추정하는 아리수의 '아리'의 상고음이 '아리이'가 가까울 것이라고 합니다.9) 그래서 대체로 이 말이 위례(이워리)와 비교적 일치한다고 합니다. 참고로 도수희 교수는 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나는 엄리대수(奄利大水)와 압록강(鴨綠)의 모양이 비슷한 점과 헤이룽강(黑龍江) 즉 아무르 강의 어원을 만주어의 암바무리(大河)에서 아무르가 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합니다. 즉 아무르강이나 압록강이나 한강이나 모두 아리수라는 것이지요.10) 구체적으로 본다면, 흑룡(黑龍)에서 거믈미리 < 검미리[kәmiri]에서 'ㄱ'이 탈락하여 '아(어)미리'<아무르 등으로 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대체로 위례도 아리수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리수란 넓고 크고 깨끗한 강을 의미하고 한강(漢江)이라는 말도 '큰강[대하(大河)]'라는 의미입니다.

  필자 주

  (1) 이 글은 김운회 『역사변동에 대한 일반이론』(신학문총서 : 1990)의 서문을 재구성하여 인용.
  (2) 『보리와 임금님』의 저자. 이 책의 원래의 제목은 『작은 책방』.
  (3) "百濟記云。盖鹵王乙卯年冬。狛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遂失尉禮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日本書紀』雄略紀 20年) 즉 유라쿠 천황 20년의 사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인용하고 있는 『百濟紀』에 나오는 내용이다.
  (4) 박은용「百濟建國說話의 吏讀的 考察 - 百濟=온조=廣/寬-」『常山李在秀博士還歷紀念論文集』( 1972) 219∼238쪽.
  (5) 『三國遺事』王曆 1 百濟 온조왕.
  (6) 도수희.『백제어 어휘연구』(제이엔시 : 2004) 83쪽.
  (7) 도수희. 앞의 책, 19쪽.
  (8) 이병도.『譯註 三國史記』(을유문화사 : 1980) 393쪽.
  (9) 도수희. 앞의 책, 24쪽.
  (10) 구체적인 내용은 김운회 『대쥬신을 찾아서』(해냄 : 2006) 140~155쪽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