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史 文獻史料集

페르시아-동아시아 문명의 고리

吾心竹--오심죽-- 2009. 1. 7. 16:53

<육조문화탐방> ③페르시아-동아시아 문명의 고리

2007년 01월 17일 (수) 06:03   연합뉴스

▲ 난징 선학관 출토 유리잔
▲ '로만글라스' 유리잔
▲ 육조시대 청자호자
남경시박의 '커트 글라스', 신라가 최대 보유국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난징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라면 난징박물원(南京博物院)과 난징시박물관(南京市博物館. 이하 난징시박)의 두 군데를 꼽을 수 있다. 전자가 장쑤성(江蘇省)의 성립(省立)인데 반해 후자는 시립이다. 따라서 둘 관계를 상명하복이라 생각하기 쉬우나, 난징시박 관계자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면서 "그들은 그들, 우리는 우리"라고 강조한다.

육조시대 전축분(塼築墳. 벽돌무덤) 전문가로 국내에도 간혹 초청되는 난징시박 고고학 주임 왕쯔가오(王志高.39)씨는 "그들(난징박물원)이 우리를 간섭할 수 없으며 우리는 독자적으로 움직인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난징시 구역 내에서 일어나는 고고학 발굴조사는 어떻게 주체가 정해질까? 왕 주임은 "난징시에서 고고학 발굴허가 기관은 우리하고 난징박물원, 그리고 난징대학의 3군데가 있다"면서 "난징시내에서 일어나는 발굴은 현장을 먼저 발견하는 기관이 임자이며, 사전 허가 등의 절차는 없으나, 국가문물국에는 사후 보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징대학은 두 박물관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유적의 조사를 맡는다고 한다.

난징박물원은 1933년에 개관한 유서가 깊은 곳으로 소장유물 또한 많지만, 우리에게는 백제 유민 출신으로 당군에 투항해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는 흑치상지(黑齒常之) 묘지명 실물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이곳에는 그의 아들인 흑치준(黑齒俊) 묘지명도 있으나 두 유물 모두 상설전시는 않는다.

한국 고고학계는 박물원보다 난징시박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한반도 고대문화와 밀접한 육조(六朝)시대 문물을 다수 소장한 데다, 전시 또한 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난징시문물보관위원회가 1978년에 명패를 바꿔 단 난징시박은 시내 중심 신가구(新街口)에 위치한 조천궁(朝天宮)이라는 공간을 차지한다. 기록에 의하면 조천궁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홍무(洪武) 17년(1385)에 편액을 내린 건축물이라 하지만, 지금 건물은 청말인 동치(同治) 5년(1866)에 중건된 양식이다. 박물관이 독차지한 조천궁 전체 면적은 약 4만㎡.

입장에 앞서 인솔단장 격인 이한상 동양대 교수는 난징시박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했다. 전시유물은 좋으며 대부분이 육조시대 작품이다. 사진은 마음대로 찍을 수 있다. 전시실은 전통 건축물을 그대로 이용하며 1-2층 2개 공간으로 구분된다. 모든 전시유물 사진을 찍는다 해도 1-2시간이면 관람에 족하다. 대강 이런 말이었다.

폐관시간인 오후 5시까지는 1시간30분 정도가 남았으니, 다소 여유롭게 유물도 촬영하고 감상도 할 수 있겠구나 하고 안심했다. 백제시대를 중심 테마로 하는 한국고고학자 몇 명이 조직한 '육조문물연구회' 회원으로서 이 박물관을 이미 여러 번 다녀갔으며, 가장 최근에는 2005년 1월에도 왔다는 이 교수의 말을 철석 같이 믿었다. 하지만 이내 이 말이 화근이 되어 돌아왔다.

어떻든 이 교수의 말에 안심하고 정문을 통해 경내로 들어서니, 확 트인 광장이 나타나고 우람한 청대 건축물이 마주한다. 이곳이 전시실이라 한다. 건축물 안내판을 보니 이곳이 대성전(大聖殿)이다. 공자를 모시던 신성한 공간이 이제는 박물관으로 바뀌어 시민의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통 건축물을 최대한 살린 박물관은 사실 일반적이다.

하지만 대성전이란 간판은 내리고 대신 그 자리에는 '육조풍채'(六朝風彩)라는 팻말을 내걸었다. 육조시대 문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공간이라는 의미일 터다. 난징은 육조시대의 왕도가 자리한 곳이기에 자연 여기서 산출되는 문화유산으로는 이 시대 제작품이 압도적이다.

대성전을 활용한 박물관을 보면서 한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박물관을 위한 별도 건축물을 서구식 아파트 모양으로 무조건 크게만 지어놓고 규모가 세계 6번째에 속한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일삼는 국가는 OECD 회원국 중에서는 아마도 한국이 유일할 것이라 생각하니 몹시도 씁쓸하다. 경복궁 근정전이라고 박물관으로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익히 듣던 대로 '대성전 전시실'은 그동안 국내에서는 도판으로만 보던 육조시대 문물이 대부분이었다. 전시공간이 워낙 비좁은 관계로 전시품 수량은 많지는 않았으나, 하나하나 뜯어보면 모두가 한국고대문화, 특히 백제-신라문화와는 밀접한 관련을 지닌 것임에 틀림없다.

1층 입구에는 남조 능묘(陵墓) 조각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석조 기린(麒麟) 조각상과 버섯 모양 신도비(神道碑)가 거대한 자태로 서 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서 옮겨온 실물인 줄 알고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누르자니, 모조품인데 뭣 하러 촬영하느냐는 이 교수의 핀잔에 김이 빠져 버렸다. 정말 그런지 확인하기 위해 성인 키 두 배 만한 기린상 가슴을 손으로 툭툭 쳤더니, 퉁퉁 하는 소리가 났다.

전시실은 전반적으로 조명이 너무 어두웠다. 시설 또한 낙후하다는 인상을 짙게 했다. 거기에다 청자나 도기류가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전시품 대부분이 고분 출토품이니 을씨년스럽다는 느낌까지 준다. 하지만 백제 유적에서 더러 출토하는 양형청자(羊形靑瓷)는 이곳에서는 흔해 빠졌다.

우리는 신주단지 모시듯 하는 유물이 이곳 전시실만 해도 대충 헤아려도 5점 이상 된다. 뿐만 아니라 1점만 출토되어도 우리 같으면 언론이나 학계에서도 비중있게 취급하는 호형청자(虎形靑瓷)라는 호랑이 모양을 본뜬 남자의 소변통만 해도 3점이나 열을 지어 관람객을 맞는다.

이 육조풍채 전시품 중에는 60년대 이후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0기가 떼를 지어 발견되고 발굴된 동진(東晉)시대 왕씨(王氏) 가족공동묘지인 상산고분군(象山古墳群) 출토품이 비교적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 유적 발굴성과는 삼국시대를 테마로 삼는 한국고고학계에서는 빠질 수 없는 것으로 꼽힌다. 그 출토유물 중에서도 '로만글라스'라 일컫는 유리잔은 특히 중시된다.

한데 이 육조풍채 전시실에는 같은 동진시대 난징 소재 무덤이지만 고씨(高氏) 가족묘지로 밝혀진 선학관(仙鶴館) 고숭(高崧) 가족묘지 출토 유리잔이 전시 중이다. 이는 제작기법상으로는 유리 겉면을 깎아낸 '커트 글라스'로 분류된다.

이 유리제품이 중국 본토산이 아니라는 사실은 명백하며, 세계 학계에도 그렇게 통용된다. 로마산이라는 추정 혹은 주장이 대세를 점했으며, 그렇기에 동진시대 당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동아시아 문명과 지중해 일대 문명이 교류했음을 입증하는 일대 유물로 평가되곤 한다.

한데 이 '커트 글라스'의 놀라운 면모가 최근 드러났다. 남경시박이 재질 분석을 실시한 결과 페르시아산 유리제품으로 밝혀진 것이다. 페르시아 아랍 문명과 남중국 문명이 직접 접촉했는지, 아니면 중계무역을 거친 '다단계 접촉'이었는지는 불확실하나, 어떤 식으로건 이미 서기 300년대 무렵에 아랍문명은 해양을 매개로 교류하고 있었음이 재삼 확인된 셈이다.

하지만 이 '커트 글라스'를 둘러싼 가장 큰 미스터리는 한반도 고대문화와의 관련성이다. 도대체 어떤 특성이 있기에 '커트 글라스'를 우리가 주목해야 할까? 선학관 유적 출토 유리잔은 중국에서는 파편까지 합쳐야 현재까지 7점 안팎이 보고됐을 뿐이다. 난징 외에는 서기 415년에 사망한 북연(北燕) 풍소불(馮素弗) 묘(랴오닝성 소재) 출토품이 대표적이다. 일본에서는 나라현 가시하라시 인근 소재 미이자와덴쓰카(新澤千塚) 고분에서만 실물이 나왔다.

그런데 고대 한반도 유적에서는 지금까지 '커트 글라스'가 모두 24점이나, 그것도 대부분이 완연한 형태로 발굴됐다. 경남 합천의 옥전 M1 고분 출토품을 제외한 모두가 경주 소재 신라 적석목곽분 출토품이다. 황남대총 남분과 북분, 금관총,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등 지금까지 발굴된 경주시내 적석목곽분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이 유리제품을 부장한 것으로 나타난다. 옥전 고분 또한 신라적 색채가 농후해 실상 한반도 출토 '커트 글라스'는 모두가 신라가 독점한 현상을 보인다.

지금까지 성과로만 보면 신라는 동아시아 최대의 '커트 글라스' 보유국인 셈이다.

그 원산지가 페르시아건, 로마건, 외래계 유물임을 부인할 수 없는 '커트 글라스'의 이와 같은 출토 현상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줄까? 종래의 한국 고고학계나 고대사학계가 지닌 고질 중 하나로 '고구려 중심주의'를 들 수 있다. 신라시대 고분에서 외래계 유물이 나오기만 하면 덮어놓고 그 유입 경로로 고구려를 지목하곤 했다. 고구려는 선진국이었고, 신라는 당시 고구려에 신속하다시피 했으므로 선진문물은 대부분 고구려를 통해 받아들였다는 '종교적 신념'과도 같은 믿음이 학계를 배회한다.

하지만 '커트 글라스'는 신라라는 왕국이 이미 서기 300-400년 무렵에는 남중국으로 통하는 항로를 개척하고 있었고, 이를 매개로 삼아 '커트 글라스'와 같은 이역(異域)의 문물을 활발히 수입하고 있었음을 웅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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