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종산 제단유적

吾心竹--오심죽-- 2009. 1. 7. 16:56

<육조문화탐방> ①제단/절터 논란 '종산제단유적'

2007년 01월 16일 (화) 06:02   연합뉴스

▲ '육조시대제단유적'
▲ 육조제단제단 출토 와당
▲ 난징 종산 자하호
※ 편집자주 = 백제 무령왕릉은 중국 남조(南朝)에서 직수입한 유물이나 그 영향이 매우 짙은 유물을 잔뜩 쏟아냄으로써 한반도 고대문화가 절해고도(絶海孤島)에서 저절로 이룩된 것이 아니라 세계와 끊임없이 교류하면서 성립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웠다. 연합뉴스는 동양대박물관(관장 이한상)이 무령왕릉 발굴 35주년에 즈음해 기획한 난징(南京) 일대 '중국남조문화탐방'(1.10-13)에 동행ㆍ탐방한 성과를 8회에 걸쳐 소개한다.

2000년 중국 10대 발굴, 제단유적 발표 한국 고대사찰 근거로 '절터' 반론 제기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량이나 다름 없던 '반란 수괴'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정월에는 마침내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난징(南京)인 응천부(應天府)에서 황제로 즉위하고는 연호를 홍무(洪武)라 하고 국호를 대명(大明)이라 선포함으로써 새로운 왕조를 개창했다.

1398년 음력 6월24일, 향년 71세로 사망할 때까지 철권통치를 휘두른 그는 사후 태조(太祖)라는 묘호(廟號)와 개천행도조기입극대성지신인문의무준덕성공고황제(開天行道肇紀立極大聖至神仁文義武俊德成功高皇帝)라는 매우 긴 시호(諡號)를 얻고는 응천부 동쪽을 가로 막은 종산(鍾山)이란 야산 남쪽 기슭에 묻힌다.

응천부를 천하의 중심으로 삼고자 한 그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도래한 피비린내나는 왕위쟁탈전 끝에 북경파가 승리함으로써 북경으로 옮겨가게 되지만, 이런 볼썽사나운 모습을 지켜볼 리 없는 그는 어떻든 지금까지 효릉(孝陵)이라 일컫는 종산 능원에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

자금산(紫金山)이라고도 일컫는 종산 일대는 명효릉에 힘입어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 목록에까지 등재되기에 이른다.

칭하이성(靑海省) 서부 커커시리(可可稀立) 산맥에서 발원한 양쯔강(揚子江)이 서해를 향해 6천㎞나 달리다가 바다로 진입하기 직전에 강안 남쪽에 형성한 드넓은 충적평야지대에 형성된 도시가 난징이다. 종산은 최고봉이자 주봉(主峰)인 두타령(頭陀嶺)이 해발 468m에 지나지 않는 그야말로 야산에 불과하지만 강이라기보다 차라리 바다로 불러야 할 양쯔강 물길조차도 북쪽으로 밀어낼 만큼 위풍당당하다.

남경 일대에서는 거의 유일한 산인 종산(면적 약 20㎢)에는 효릉(孝陵) 외에도 현대중국의 아버지라는 쑨원(孫文)이 묻힌 중산릉(中山陵)이 있으며 최근에는 삼국시대 오(吳)나라 건국주인 손권(孫權) 무덤까지 발견돼 발굴을 기다리고 있다. 나아가 이곳에는 영곡사(靈谷寺)라는 유서깊은 사찰과 양(梁)나라 무제(武帝)가 대통(大通) 원년(527)에 세운 동태사(同泰寺) 자리에는 계명사(鷄鳴寺)라는 또 다른 불교사찰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런 지리적ㆍ역사적 전통은 종산을 서울의 남산에 비길 정도지만, 효릉을 왼편으로 해서 경관이 수려한 산 경내로 본격 진입했을 때는 기대만큼 많은 사람을 만날 수는 없었다. 이런 분위기는 이미 경내 입구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목적지인 종산 중턱 소위 '육조제단유적'(六朝祭壇遺跡)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입장권을 사야 한다. 한데 입장료가 1인당 자그마치 80위안에 달했다. 한국돈 1만원에 육박한다. 중국 물가 수준을 고려할 때 '바가지 요금'인 셈이다. 명효릉만 관람하고자 하는 이는 50위안을 내면 되지만 이 또한 중국 서민들에겐 엄청난 부담이다.

유적지 안내를 위해 현지에서 합류한 난징사범대학 문박계(文博係) 주임 저우위싱(周裕興) 교수는 "(입장료가) 비싸 (난징) 시민들이 이곳에 올 엄두를 내기 힘들다"고 했다. 왜 이렇게 입장권이 비쌀까? 명효릉이 세계문화유산이 되는 바람에 입장료를 이렇게 올렸다고 저우 교수는 전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가 막상 그 유산을 시민들에게서는 떼어놓는 역효과를 빚은 듯했다.

경내를 걸어 200m 가량을 들어가니 넓은 호수가 나타나고 그 뒤편으로 주봉을 비롯한 종산의 윤곽이 완연하게 드러났다. 이 호수 한 쪽 귀퉁이에는 '천지'(天池)라는 붉은 글씨를 새긴 돌안내판이 서 있다. 하지만 각종 안내판이나 소개 책자에 이 호수는 '자하호'(紫霞湖)라는 이름으로 올라있다.

호숫가를 따라 가다가 중년 남성 서너 명이 무리를 지은 모습이 보였다. 이내 그 중 한 명이 팬티만 남긴 채 옷을 훌훌 벗어버리고는 호수로 뛰어들어 수영을 했다. 수은주가 0도 가까이 곤두박질친 이 날씨에 체력단련을 위해 물로 뛰어든 것이다.

이런 장면을 뒤로 하고 호수가 끝나고 산 정산을 향해 직선으로 마련된 시멘트 계단식 등산로 입구에는 '육조북교단'(六朝北郊壇)이란 간판을 내건 건축물이 나타났다. 그 곁에는 국가문물국 인장이 찍힌 유적 안내판이 서 있다. 거기에는 "난징시문물연구소와 중산능원관리문물처가 공동 발굴한 '남경종산육조단류건축유적'(南京鍾山六朝壇類健築遺跡)이며 2000년 '전국 10대 고고 신발굴'에 입선됐으므로 이를 증명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국가가 공포한 정식 유적 명칭이 꽤 번삽하다. '남경의 종산에 소재한 육조(六朝)시대 제단 종류의 건축물 유적' 정도로 풀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북교단이란 북교(北郊)라는 제사를 지낸 단이라는 뜻이다. 북교란 도성 북쪽에 제단을 마련해 놓고 중국 역대 왕조(황제)가 주관한 대규모 천지제사의 일종으로서 도성 남쪽에 마련하는 남교(南郊)와 대비된다.

어떻든 오(吳)ㆍ동진(東晉)ㆍ송(宋)ㆍ제(齊)ㆍ양(梁)ㆍ진(陳)으로 이어지는 육조시대 북교 제단 유적 발견을 중국 고고학계가 어떻게 평가하는지는 그 발견을 당당히 중국 전체를 통틀어 2000년도에 진행된 발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을 지목하는 징표인 10대 발굴에 꼽았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북교단 유적은 수 백 개 등산로 계단을 올라간 종산 중턱 지점에 있었다. 이곳 해발은 260m 가량 된다고 한다. 이 유적은 발굴 공포 직후 한국 학계에도 널리 알려져 난징을 찾는 관련 연구자는 한 번쯤 둘러보는 명소가 되었다. 이번 탐방을 기획한 이한상 동양대 교수 또한 이번이 초행길은 아니었다.

계단에 오르기 시작한 지 30여 분만에 도달한 '북교단'은 유적 정비가 꽤 진행된 편이었다. 정비된 현재 상태를 기준으로 할 때 '제단'은 한 변 길이 50m 가량이며, 높이는 2m 안팎이었다. 깬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그렇다면 이곳은 과연 제단일까? 이런 견해에 가장 비판적인 연구자가 공교롭게도 현장을 안내한 저우위싱 교수였다. 현장에 도착한 그는 나뭇가지를 꺾고는 땅위에다가 '제단'의 도면을 제시했다.

이 도면도에 의하면 동서남북에 방향을 맞춘 정방형 '제단' 안에는 남쪽 정중앙에는 정방형 건물이 위치하고, 그 뒤로는 거의 규모가 같은 다른 정방형 건물 3기가 동서쪽으로 열을 지어 배치된다. 그 뒤편 북쪽 담에 인접한 지점 중앙에는 또 다른 정방형 3단짜리 석축물이 자리한다.

이런 도면을 제시한 저우 교수는 "이는 제단이 아니라 절터임을 입증한다"고 강조했다. 그 근거는 무엇일까? 뜻밖에도 저우 교수는 한국과 일본의 고대 사찰터를 방증자료로 제시했다.

"한국과 일본의 고대 절터 발굴성과를 보면 대체로 이 '제단' 유적과 같은 건물 배치를 보입니다. 즉, 남쪽 정중앙 방형 건축물은 탑이 있던 자리며, 그 뒤 건축물들은 금당입니다. 따라서 이곳은 절터이지 제단터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한상 교수가 보충설명을 했다. 저우 교수가 말하는 구조는 바로 한국과 일본 고대사찰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1탑3금당식을 말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경주 황룡사가 대표적이다.

저우 교수는 나아가 이른바 '제단' 유적이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즉, 그 자신이 탑지와 금당 자리로 지목하는 곳은 발굴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 제단 현장 안쪽 구역에서는 시굴조사를 위해 발굴단이 파 놓은 시굴구덩이인 트렌치 한 곳만이 눈에 띄었다.

저우 교수는 한남대 초청으로 6개월간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한국 유적을 답사하기도 했다. 한국 고고학에 대한 이런 견문이 '제단'을 거부하고 '절터'설을 제기하게 만든 셈이다.

하지만 저우 교수는 이런 주장을 공표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그 이유를 무엇인지 물었으나 별다른 대답은 없었다. 그렇지만 '제단설'을 제기한 발굴조사 책임자인 허윈아오(賀雲고<皐 羽) 난징대학 역사계 교수와의 인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저우 교수 그 자신은 허 교수와는 절친한 친구라고 소개했다.

제단설에 대한 공식 반격은 저우 교수가 아니라 다른 연구자가 제기했다.

허 교수가 중국의 저명한 고고학잡지인 '문물'(文物) 2003년 제7기에 자신이 발굴한 종산 유적이 유송(劉宋)의 효무제(孝武帝) 대명(大明) 3년(459)에 세웠다는 북교단(北郊壇) 터라고 주장한 데 대해 현재 일본 교토대학에 연수 중인 난징대학 역사계 고고학 전공 장쉐펑(張學鋒) 교수는 같은 잡지 2006년 제5기에 기고한 논문에서 제단설을 부정하고 절터설을 주장한 것이다.

장 교수 또한 '남산 종산 남조단류 건축물 유적의 성격을 논함'(論南京鍾山南朝壇類建築遺存的性質)이라는 논문에서 "이 유적은 불교유적이며 구체적으로는 남조시대 정림상사(定林上寺)라는 사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 역시 절터로 본 것이다.

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무엇보다 흥미로운 대목은 그들의 논의에 한국 고고학 발굴성과가 가장 중요한 전거로 언급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종산을 내려와 다시금 자하호 주변을 따라 걷자니, 새로운 중년 남자가 길이 100m는 족히 됨직한 호수를 헤엄쳐 횡단하는 모습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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