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한국고고학 흔드는 전문토기

吾心竹--오심죽-- 2009. 1. 7. 16:51

<육조문화탐방> ④한국고고학을 흔드는 전문도기(錢文陶器)

2007년 01월 17일 (수) 06:03   연합뉴스

▲ 동오시대 전문도기(錢文陶器)
▲ 동오시대 청자혼병( 靑瓷魂甁)
▲ 동진시대 계수호(鷄首壺)
동오(東吳)시대 유물 연이어 출현 풍납토성-몽촌토성 연대관 재검토 (난징=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난징시박물관 전시실은 오직 '육조풍채'(六朝風彩)만 있는 줄 알고 느긋하게 그곳만 관람하던 우리를 난감하게 만든 소식이 들려왔다. 이곳 박물관 관계자들과 평소 친분이 있고 미리 방문 사실을 통보한 이한상 동양대 교수를 '영접'(?)하기 위해 박물관 관계자들이 육조풍채관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박물관에서는 여성인 바이닝(白寧) 관장이 직접 나와 우리를 맞았다. 한데 다른 박물관 관계자들이 사무동이 아닌 다른 공간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했다. 그곳으로 들어서니 맞은편 벽면에는 '용반호거'(龍蟠虎踞)라는 큼지막한 안내판이 나타난다. 용이 웅크리고 호랑이가 걸터 앉았다는 뜻으로 삼국시대 촉(蜀)나라 승상 제갈량이 손권의 오(吳)나라 수도 금릉(金陵), 즉, 지금의 난징 형세를 묘사한 말이라고 해서 지금도 난징을 선전할 때면 항용 동원되는 문구다.

육조풍채와는 구별되는 또 다른 전시실인 셈이다. 이 용반호거 전시실의 성격은 그 안내판 밑에 붙은 '난징역사문화진열'(南京歷史文化陳列)이라는 선전문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선사시대 이래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난징 역사를 전시한 코너가 바로 이곳인 셈이다.

어찌된 일인지 우선 이 교수를 추궁하듯 쳐다보며 통역을 통해 박물관 관계자들에게 물었더니, 2006년 초에 새로이 개관한 곳이라 했다. 전시실은 눈대중으로 100평을 헤아릴 듯했으며, 전시구성이나 전시품은 육조풍채관과는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세련됐다. 통사실이라 30만년 전 인류화석이라는 '난징인'(南京人) 인골 모조품을 필두로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난징의 역사를 증언할 만한 다양한 유물들을 내놓았다. 이 넓은 공간, 저 많은 유물을 제대로 관람하기에는 박물관 폐관까지 시간을 도저히 맞출 수가 없다.

그런데 더 난감한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 문을 연 전시실은 이뿐만 아니라, '청자실'이 또 있다는 것이었다. 듣자니 '육조청자'(六朝靑瓷)라는 간판을 내건 제3의 전시실은 불과 두 달 전인 2006년 11월에 개관했다고 한다.

시간이 모자라 두 전시실은 그야말로 주마간산 격으로 지날 수밖에 없었다. 용반호거관에서 다소 특이한 점은 기존에는 수장고 신세를 질 수밖에 없던 상산고분군 출토품들이 대거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교수에 의하면 새로이 전시를 시작한 이들 유물은 기존에는 박물관 수장고에 직접 들어가서야 관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육조풍채관에서는 만날 수 없던 상산고분군 출토 '커트 글라스' 유리잔 또한 이곳에 똬리를 틀고 있고, 그 외에도 한국 고고학계에서 자주 인용하는 같은 고분 출토 청자계수호(靑瓷鷄首壺. 닭모양 주둥이를 장식한 청자 항아리)도 바로 옆에 전시가 이뤄지고 있었다. 나아가 상산고분군과 축조연대가 거의 같은 동진시대 사씨(謝氏) 가족묘, 안씨(顔氏) 가족묘 출토품도 대거 전시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 두 전시실은 모두 사진촬영 불가 안내판을 붙여 놓았으나, 박물관에서는 우리 일행에게 그것을 허가한 것은 물론 친절하게도 특히 중요한 유물들을 짚어 가면서 그 의미를 간략히 설명하고, 나아가 사진촬영을 권유하기도 했다. 용반호거관 출품작 중에는 육조시대 도로 유적을 그대로 옮겨놓은 유물이 인상적이었으며 동오(東吳)시대 목간도 10점 가량도 나와 있다. 그 중 한 목간에는 언뜻 보기에 북두칠성 등의 별자리를 붉은 물감으로 그려 놓은 것도 있다.

우리 일행을 더욱 놀라게 한 곳은 육조청자실이었다. 용반호거관 만한 넓은 공간에 끊없이 펼쳐진 육조시대 청자의 향연에 눈이 아찔할 뿐이었다. 이번 육조문화탐방에는 마침 도자사 전공인 국립공주박물관 정상기 학예사도 동행했는데, 무수한 육조시대 청자 실물자료에 그의 감탄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공주박물관에서만 7년을 근무하고, 무령왕릉 출토품을 중심으로 고대 한반도 출토 도자기에 대한 관심이 누구보다 높을 수밖에 없는 그에게 이번이 첫 방문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방문 때보다 육조시대 도자기 실물을 이번에 많이 접한 것은 사실이다.

한데 전시품들을 빙 둘러본 그가 툭 던진 말은 묘했다.

"이렇게 좋은 도자기가 많은데, 왜 백제인들은 볼품 없는 것들만 골라 수입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가 특히 의아하게 여기는 육조시대 중국 청자는 무덤에 집중 매장했으며 중국에서는 '퇴소관'(堆塑罐)이라 부르는 유물. 한국에서는 일본학계 용어를 그대로 빌려다가 혼병(魂甁)이라 부르는 퇴소관은 몸통이나 주둥이 쪽에 인물이나 동물, 심지어 가옥까지 형상화한 각종 장식을 화려하게 붙여놓았다.

이런 퇴소관 청자류에서 다소 뜻밖인 점은 5세기 후반대에 축조된 신라 적석목곽분에 집중 매장되는 이른바 '토우장식 장경호'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이다. 서진시대 청자 중에는 신라 장경호처럼 뱀을 장식하기도 했다.

이런 지적에 이 교수는 "아무래도 그런 것 같지요?"라고 맞장구를 치면서 "이제는 중국청자를 공부해야겠다"는 다짐 아닌 다짐을 하기도 했다.

육조청자실에서 더욱 관심을 끈 유물은 전문(錢文), 즉, 동전무늬를 잔뜩 넣은 동오시대 청자였다. 유물 안내판에는 '청자전문대개관'(靑瓷錢文帶盖罐)이라는 명패를 내걸었다. 청자로서 동전무늬를 마치 띠처럼 두른 항아리라는 뜻이다. 출토지는 난징 강녕상방(江寧上坊)으로 돼 있다. 박물관 관계자에게 더 자세한 정보를 캤더니, 지난해 출토됐다고 했다. 발굴책임자는 이곳 난징시박 고고학 주임 왕쯔가오(王志高.39)씨라고 했다.

강녕상방 출토품으로는 이 외에도 여러 점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이들을 살펴본 이 교수는 "동오시대 유물임이 틀림없는 듯하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이런 전문도기(錢文陶器)는 한국고고학계가 매우 주목하는 유물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고대 유적, 그 중에서도 백제 영역권에서만 출토되며, 더구나 중국에서의 수입품임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종래에는 이 전문도기가 중국에서는 3세기 중ㆍ후반 서진(西晉)시대 중국 강남지역 일부에서만 제한적으로 제작됐다고 보았다.

그렇게 되고 보니, 전문도기를 출토하는 백제유적은 모두 서진 시대에 맞추어 연대가 매겨졌다. 그 대표적 사례가 서울 송파구 몽촌토성. 인근 풍납토성과 함께 한성도읍기 백제기의 가장 중요한 성곽 유적임이 명백한 몽촌토성은 1980년대 발굴조사를 근거로 고고학계에서는 그 축조시기를 3세기 중ㆍ후반으로 확정하다시피 했다. 그 근거는 오직 성벽조사에서 출토한 전문도기 파편이었다.

나아가 1999-2000년 풍납토성 경당지구에서도 전문도기가 다량으로 출토함으로써 풍납토성 축조연대 또한 이에 끼워 맞춰 3세기 중ㆍ후반이라는 견해가 대세를 점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전문도기는 그것과 함께 출토하는 토기 등의 각종 백제 유물 또한 연대를 확정하는 가장 결정적 근거를 제공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정은 일변했다. 서진시대 강남지역에서만 제작됐다고 보던 전문도기가 중국에서 다량으로 보고되고 그 출현 연대나 존속기간 또한 엄청나게 긴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전문도기는 220년에 망한 후한시대 유적에서도 보고되는가 하면, 후한시대를 뒤이은 동오시대 유적에서는 다량으로 보고가 이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난징시박 육조청자실에서 만난 전문도기 또한 동오시대 유물이었다. 서진시대에만 제작됐다고 보던 전문도기가 외려 그 집중적인 제작시기를 동오시대로 끌어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소멸된 연대 또한 6세기에 존재한 양(梁)나라 시대까지 확대되는 형국이다.

종래 백제의 유적과 유물 연대를 확정하는 절대 잣대로 군림한 전문도기가 그 위력을 급격히 상실함으로써, 그에 맞추어 눈금을 매긴 한국고고학 편년 또한 타격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전문도기와 관련해 재미있는 대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중국 본토 학계에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은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전문도기 외에도 각종 1급 도자기 유물로 주체할 수 없는 중국학계가 그다지 품격도 높지 않은 이 유물을 주목할 까닭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한국과 일본학계 연구자들이 너도나도 전문도기를 찾아 밀려드니, 중국학계 또한 그 분위기에 편승해 이 도자기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보면 역시 역사는 지금의 역사가들이 창조하는 것임을 여실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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