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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 문화재 탐방-15...복구정~연춘역 터~용화사전륜법인상, 3층석탑~언양김씨 김의연 정려~목천현 관아 터

吾心竹--오심죽-- 2012. 12. 28. 10:46

<<< 천안 문화재 탐방-15...복구정~연춘역 터~용화사전륜법인상, 3층석탑~언양김씨 김의연 정려~목천현 관아 터 >>>

 

* 복구정(伏龜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 243-29

 

* 복구정은 누가 언제 창건했는지 알 수 없다. 이상(李翔)의 「복구정기(伏龜亭記)」에는 땅속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묻혀 있어 ‘복구’라 이른 것이라 하였다. 복구정 주변은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성거산~중구봉에서 뻗은 산맥이 연춘리의 하천에 거북이가 엎드린 형상과 같다고하여 풍수지리상 복구혈(伏龜穴)이라고 한다.

 

위례성, 부소산에서 발원한 하천이 있는 정자 큰 바위가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것처럼 생겼다. 조선시대 선조 때 세웠는데 수석이 매우 아름다우므로 영조 때 문장 신광수, 죽동 이인실, 만화 유진한, 구정 이세희가 모여서 시를 지으며 놀았다. 그 후 장마로 없어졌는데 1964년 강릉김씨 종중에서 다시 세웠으며 바위 옆면에 숙종 때 학자 이재의 시가 새겨져 있다. 도암 이재(陶庵 李縡 숙종6년1680~영조22년1746)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庵)

 

* 복구정 주점 : 임진왜란 후 재정난으로 원을 폐하고 주점을 둘 때 이곳에도 복구정 주점이 있었는데 주점이 번창하였다 한다.

 

 

 

 

 

 

 

 

 

 

 

 

* 연춘역(延春驛)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203-1, 2, 8, 10, 11, 204-2 일대 추정

 

*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 :

성환역(成歡驛)의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금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목천현 : 【역원】 연춘역(延春驛)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 연춘역(延春驛) : 신증동국여지승람 직산현에는 영춘(迎春)이라고 적혀있다.

목천 동리 용화사(龍華寺) 입구의 앞들이며, 임진왜란 이후에 연춘역(延春驛)이 있던 골이라 역골이라 불리었으며, 1970년초 까지만 해도 마을이 있었다. 연춘리 마을 서쪽 냇가에 있었는데 이곳에 선정비 밑 송덕비가 여러개 있었는데 현재는 없어지고 역촌 사람들이 당제를 지내던 당집도 있었으나 농지정리로 논밭으로 변해 버렸다고 한다.

 

 

 

 

 

 

 

 

 

* 연춘역 추정지에서 본 흑성산성 //

 

 

 

* 용화사 전륜법인 여래 입상(龍華寺 轉輪法印 如來 立像)

*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동리 178-2 용화사

 

용화사 전륜법인 여래 입상(龍華寺 轉輪法印 如來 立像)은 불두 1개, 불신1개 합체된 형태이다. 주지스님의 말에 따르면 어느 교수가 와서 보고는 “나한입상”이라고 했다고 하여 그간 용화사 나한입상으로 불렸다. 그러나 부처님의 손모양은 전법륜인(轉法輪印)으로 부처가 성도하신 후 다섯 비구니에게 첫 설법을 하며 취한 수인(手印)으로 정확한 명칭은 <용화사 전륜법인 입상-龍華寺 轉輪法印 如來 立像>이라 함이 옳다. 전륜법인은 시대에 다라 약간씩 다른데 우리나라에서는 그 예가 많지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부처가 깨달은 후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에서 다섯 비구와 중생들에게 최초로 설법할 때의 수인이다. 양손을 가슴 앞에 올린 채 왼쪽 손바닥은 안으로, 오른쪽 손바닥은 밖으로 향하게 하고 각각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맞붙여 마치 불교의 법륜(法輪)을 상징하는 것 같은 모양이다. 이 수인은 시대나 지역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어 일정하지 않다. 보통 정토교에서 말하는 상품중생인(上品中生印)에 해당되며 단독의 아미타상에도 나타난다.

 

원래 용화사(龍華寺) 전륜법인 여래 입상(轉輪法印 如來 立像)은 절 뒷편 고갯마루 언덕에 와불(臥佛)상태로 누워있던 것을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여 세웠으며, 불두(佛頭)는 용화사 앞의 산방천(山方川)에서 수습하여 합체하였다고 주지 자성스님은 말한다. 불두는 어느 시기에 예리하게 톱으로 잘린 것처럼 일정하게 잘려 나갔는데 최근에 다시 몸체와 합성하였다. 불두와 몸체가 각기 다른 재질로 보이는데 이는 머리 부분이 산방천 뚝방에 오랫동안 흙속에 파묻혀 외견상 색깔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같은 석재의 재질과 조형미를 갖추고 있어 원형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더욱 자세한 것은 재질분석과 목 부분의 잘린 상태를 면밀히 재검토하여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오른쪽의 용화사 석조여래입상(龍華寺石造如來立像)은 1976년 1월 8일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58호로 지정되었다. 천안시 목천읍 동리 운봉산에 있는 용화사 경내에 있다. 용화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6교구 본사인 마곡사의 말사로서, 자세한 연혁은 알 수 없지만 발굴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에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 주변에 원형 주좌(柱座)가 새겨진 사각형의 주춧돌이 7점이나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이 불상을 모신 불전(佛殿)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 효열 언양김씨 정려(孝烈 彦陽金氏 旌閭)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덕전리 213-1, 213

 

효자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 정문의비문(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旌門義碑文)

김의연(金義淵)은 사간(司諫) 동연(東淵)의 아우인데 언양인(彦陽人)이다. 이조참판(吏曹參判) 자(赭)의 11대 손이다. 부 병환에 명의를 찾아 눈이 쌓인 겨울에 영남(嶺南)으로 갔는데 의원은 이미 죽은 뒤였다. 돌아오는 길에 여관에서 하루를 묵는데 한 노인이 첩약을 주어 가지고 와서 달여 드렸더니 병이 나았더라. 그 후 어머니 병에 양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렸더니 3일 더 사시고, 공은 손가락 에 창이 나서 돌아가셨다. 예조(禮曺)에서 증직하여 줄 것을 건의하였다. 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는 참판 준진(參判 俊盡)의 증손녀인데 통덕랑 김의연(通德郞 金義淵)의 부인이다. “남편이 어머니 병환 시에 손가락 자른 것이 잘못되어 창이 나서 못 살게 됨을 알고 내가 남편의 죽음을 어찌 보리요.” 하고는 남편보다 며칠 앞서 돌아가셨다. 효자로다. 열녀로다. 예조(禮曺)에서 정문을 내릴 것을 건의하였다. 옛날 정문(旌門)이 있던 곳은 목천군(木川郡) 읍내면(邑內面) 와룡리(현, 목천면 서흥2리 저수지 근처)에 있었는데 1880년(경진) 3월에 불이 나서 정문이 전소되었다. 그 후 1968년(단기 4301무신) 3월에 현손 주현(玄孫 周鉉)이 5세손들에게 명하여 자금을 마련하고 협력해서 목천면 덕전리 중리 예전 덕전초등학교(티에스이연수원) 뒤편에 중건하였다. 단기 4301년 무신 3월 재립(再立) 방 5대손 붕수(鵬洙)가 짓고 현손 주현(周鉉)이 세움.

 

☯ 김의연(義淵) (1731년 6월 11일 ~ 1781년 12월 11일) 통덕랑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通德郞 贈 童蒙敎官 朝奉大夫)효자공의 비

묘소 : 천안시 목천읍 석천리 먹방 큰 산소 왼쪽 건좌(乾坐)

 

☯ 효자 동몽교관 조봉대부 언양 김의연 묘갈명 (孝子 童蒙敎官 朝奉大夫 彦陽 金義淵 墓碣銘)

공(公)의 휘(諱)는 의연(義淵)이요. 언양 사람(彦陽人)이다. 경순왕(敬順王)의 일곱째 왕자 선(鐥)의 후손인 위열공 취려(威烈公 就礪)의 17세손(十七世孫)이요, 정열공(貞烈公) 윤(倫)의 14세손(十四世孫)이요, 참판공 자(參判公 赭)의 11세손(十一世孫)이요, 충신 응상(忠臣 應祥)의 6세손이요, 사간공 동연(司諫公 東淵)의 아우(弟)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비범하고 본성(本性)의 효성이 지극하셨다. 자라서는 (成長) 예를 다하여 부모를 섬기고 모부인 와병에 백약이 무효한데 영남 (嶺南)에 명의가 있음을 듣고는 엄동설한에 도보로 여러 날에 의원을 찾 았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귀로에 날이 저물어 유숙하는데 근심 하 는 용모가 방인을 감동시켰고 한 노인(老人)한테 선약을 구하여 달여 드 리니 쾌히 나았다. 사람들은 효성(孝誠)의 감동으로 천지신명께서 도와 주 신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아버지 상시에는 공이 묘막에서 시묘 살이를 하였는데 허리에 종기가 생기여 걸을 수가 없어 그 고통으로 사경에 이르자, 형인 사간공 동연께서 극구 말류에도 불구하고 삼년시묘를 마치였다. 절하던 자리는 활처럼 움푹 파였다. 초하루 보름으로 성묘하며 묘 앞에서 사경을 암송하기를 죽는 날 까지 하였으며 지하에 계신 부친이 들리게 하였다. 현감이 와서 보고 칭송하며 뒤에 사람들은 김효자의 효행을 방해 말라는(後人 勿入 金孝子 侍墓之村) 목비(木碑)를 세워 칭송하였다. 그 후 호랑이가 홀연히 나타나 항시 호위 하였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고 슬퍼한 나머지 16일 후 부인 이씨가 졸 하고 5일 후에 공이 졸(卒)하였다. 10년 후 모친 병환에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드렸으나 구명치 못하고 상을 당하자 순사할 것을 결심하고는 음식을 전폐한데다가 손가락의 종창으로 끝내 별세하셨다.

부인 고성 이씨(固城 李氏)도 효열의 정성이 있어 부군이 손가락을 자르는 거사를 보고 손가락 상처가 점점 심해져 구원되지 못할 걸 알게 되자 울면서 말하기를 “내 어찌 부군의 죽음을 보리요.”하고는 음식을 전폐하고 부군보다 육일(六日) 앞서 서거하셨다. 효자로다, 열녀로다. 공의 효(孝)와 부인 이씨(李氏)의 열이 한 가문에 모였으니 이것은 옛적에도 희유(稀有)한일이다. 효와 열(孝烈)의 찬란한 행실이 드러났도다. 순조 시(純祖 時)에 예조에서 증직(贈職)할 것을 명(命)하여 정문(旌門)을 세우고 공(公)에게는 증 동몽교관 조봉대부(贈 童蒙敎官 朝奉大夫) 부인 고성 이씨(夫人 固城 李氏)에게는 영인(令人)을 추증(追贈)하였다. 이 석물은 5대손(五代孫) 현수, 흥수, 태수(賢洙, 興洙, 泰洙) 삼형제(三兄弟)가 합심으로 봉행하였으며 이 비(碑)를 세워서 후손들에게 교훈이 되게 하리라.

서기 1989년 2월(서기 1989년 2월) 6대손 현수, 흥수, 태수 삼형제 합심하여 봉행〔賢洙, 興洙, 泰洙 三兄弟 合心奉行〕하고 6대손 종식(六代孫 鍾植)이 씀.

<출처 : 국봉 김종식 제공>

 

 

 

 

 

 

 

 

 

 

 

 

 

 

 

 

 

 

 

* 목천현 관아 터(木川縣官衙址)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서리 1 (2길31번지), 113번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목천현]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性)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한다.

 

* 목천은 원래 백제 때는 대목악군, 신라 때는 대록군, 고려 때는 목주(木州)라 하다가 조선 태종 13년(1413) 때 목천(木川)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이곳은 이때부터 목천현의 관아가 되어왔으며 1907년 설립된 의숙이 1908년 보명학교로, 1913년 4월 1일 공립목천보통학교 일부로 이용되다가 1914년 조선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한 행정구역 통폐합시 건물은 철거되고 보통학교가 들어서며 관아의 모습이 없어졌다. 또한 정조의 사부이며 실학자인 순암 안정복(1712-1791)이 목천현감으로 목천관아 용회당에 있으며 동사강목, 목천읍지인 대록지를 편찬하였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에, “서원(西原 청주(淸州)) 잔치 파할 때 아직도 이른 아침이러니 목성(木城)으로 돌아오는 길 다시 멀고 머네. 흑산이 아득한데 구름은 절을 막았고, 푸른 들판 넓고 넓은데 물이 다리[橋]를 치네, 늙어 가니 자못 벼슬 재미 적은 것 알겠고, 술 깨서 나그네의 혼이 녹아나네. 늦게 공관(公館)에 들어가니 거처가 고요한데, 떨어지는 버들개지와 나는 꽃 함께 적막하네.” 하였다.

 

 

 

 

 

* 목천현 관아 터...순암 안정복선생이 목천현감으로 부임시 용회당에서 동사강목과, 대록지를 완성했다 // 

 

 

 

* 목천현 관아 터를 지키는 오형제 느티나무.

...최근 목천초등학교 건물 신축시 수많은 기단석, 주춧돌이 상당히 많이 있었으나 조경업자의 손에 반출되어 매우 안타깝다.

...고양이에게 생선 맡기듯...당시 교장 선생님은 저 세상으로 떠났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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