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스크랩] 가장 오래된 당간지주는 분황사 당간지주

吾心竹--오심죽-- 2012. 7. 9. 15:33

 

가장 오래된 신라 당간지주는 분황사당간지주

 

분황사 당간지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192호인 이 당간지주의 남쪽에는 황룡사지가 있고 북쪽에는 분황사가 있다

즉 황룡사의 뒤쪽이 되는 동시에 분황사의 앞쪽에 당간지주가 위치하고 있어서 이 당간지주의 소속을 두고학자들이 견해를 달리하고 있었다.

황룡사의 당간지주인지 분황사의 당간지주인지 모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동네이름을 앞에 붙여 구황동당간지주라고 지금까지 불러왔으나  최근에 분황사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에 소속된 당간지주로 거의 확정하고 있으나 정식 명칭은 아직 바뀌지 않고 있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분황사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芬皇寺) 남쪽 담장 너머 남남서쪽으로 36m(분황사 모전석탑의 중심에서 62m)되는 지점에 있다.

한 쌍의 돌기둥이 70cm간격을 두고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지주의 전체 높이는 3.7m이며, 너비는 아랫부분이 65cm, 윗부분이 50cm이고, 두께는 아래가 40cm인데 위로 갈수록 줄어들어 안쪽으로 비스듬히 깎인 형태이다.

지주석은 별 다른 장식없이 바깥쪽의 모만 접었으며 당간을 세워 고정시킬 수 있는 지름 15㎝ 되는 3개의 간공(竿孔)이 1.25m간격으로 뚫어져 있다.

 

 

 

 

두 지주는 같은 수법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간대석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일반적으로 네모난 간대석에 원공만 새겨져 있으나 분황사 당간지주는 정교하지는 않지만 귀신(龜身)와 귀부(龜頭)가 있고 귀부의 윗부분에는 동서쪽에 연화문을 장식한 네모모양의 간좌(간대)를 하나의 돌로 조각하여 설치하였다, 그리고 간좌 위에는 사각형의 원공을 새겨 당간을 받칠 수 있도록 조각하여 놓았다.

 

 

분황사 당간지주의 귀부 간대(앞)

 

 분황사 당간지주의 간대 윗면

네모난 당간받침이 약간 북편으로 쏠려 있고 물빠짐을 위한 홈이 뒷쪽으로 파여 있다

 

 

귀부는 머리를 동쪽으로 향하고 목은 움츠린 상태이며 오른쪽 앞다리와 왼쪽 다리 부분이 크게 깨어졌고 겁에 질린 듯 목을 잔뜩 옴츠리고 있다. 등에는 귀갑무늬가 없으며 간좌 위에는 사각형의 원공을 새겨 당간을 받칠 수 있도록 조각하였다.

당간을 놓는 자리는 가운데가 아니고 약간 북쪽으로 치우쳐져 있다.

 

받침석에 귀부를 조각한 것은 이 곳이 유일하며 귀부의 조각형태를 보아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원공에는 고인 빗물이 흘러내릴 수 있도록 낙수홈을 파 놓았는데 원공에 고인 빗물은 귀부의 뒷등을 타고 흘러내리도록 뒤쪽에 파 놓있다.작은 부분까지 세심하게 고려한 선조들의 지혜가 놀랍다.

 

당간지주의 간공은 지주의 상 중 하 세 곳에 원형으로 뚫혀 있으며 서로 마주보는 지점에 관통하도록 되어 있다

 

분황사 당간지주

원형의 간공이 3개 있다

 

 

당간지주는 보통 일주문 밖에 있는데 두 개의 돌기둥이다. 당간지주 사이에 세우는 당간(幢竿)은 절의 행사를 멀리서도 알 수 있도록 당(幢) 또는 번(幡)이란 깃발을 높이 매어 달기 위하여 나무, 쇠, 돌 등으로 만든 깃대를 일컷는 말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크기와 모양은 서로 달라도 82기의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당간지주에 명문이 없고 고서에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언제 어디서 세워지기 시작되었는지 연원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황이며  양식의 변화를 추정하기가 어려운 매우 실정이다.

 

다만 백제 성왕이 552년 일본에 여러 가지 귀중한 물건을 보냈을 때 번을 함께 보냈다는 내용이 있고, 623년 신라가 일본에 관정번과 소번을 보냈다는 기록, 그리고 신라 지장대사가 643년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번당(幡幢)을 가지고 왔다는 기록 등에 따라 번이나 당을 걸기 위한 당간과 당간지주는 삼국시대부터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러한 기록에 근거해 당간지주가 통일신라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해서 고려때까지 유행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 위덕대 박흥국교수가 당간지주의 시대별 변천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였다.

논문에 따르면, 당간지주의 시대구분은 구멍의 형태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고 한다.

사찰의 창건 연대에 따라 당간지주의 간공이 3개의 원형에서 원형과 사각형이 함께 나타났다가 이후 사각형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한다.

이후 구멍의 수가 줄어들거나 없어지는 대신 지주의 꼭대기에 홈을 파는 형식으로 변해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분황사의 당간지주는 관통하는 세 개의 원형이 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확인된다고 한다

 

여하튼 분황사 당간지주는 경주에 있는 당간지주들과 비교하였을 때 통일신라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당간을 받치는 거북모양의 받침돌이 있는 특이한 양식으로 이 시기 당간지주를 연구 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인양 중초사지 당간지주-신라 흥덕왕때 세웠다는 명문이 있다

 

※  당간지주에 조성 배경이나 시대를 알 수 있는 명문이 남아 있는 것으로는 경기도 안양의 중초사지 당간지주가 유일하다.

보물 4호로 지정된 중초사지 당간지주의 서쪽 지주 바깥면에 6행 123자, 해서체로 씌여진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에 따르면 신라 흥덕왕 1년(826) 8월에 돌을 골라서 827년 2월에 건립했다는 내용이 있다.

당간지주에 문자를 새기는 것 자체가 희귀한 예로, 조성한 연도를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당간지주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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