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천안 성거산(聖居山) 천흥사(天興寺) 동장(銅檣)은 당(唐)의 척경비(拓境碑)인가? 강계비(疆界碑)인가?

吾心竹--오심죽-- 2012. 6. 6. 17:19

제목 :  천안 성거산(聖居山) 천흥사(天興寺) 동장(銅檣)은 당(唐)의 척경비(拓境碑)인가? 강계비(疆界碑)인가?

 

* 천안 성거산 천흥사 동장(銅檣-구리돛대)은

  사찰(寺刹) 당간(幢竿)이 아닌 당(唐)의 척경비(拓境碑)인가? 강계비(疆界碑)인가???

 

1. 서론

 

2. 본론

 

3. 결론

 

* 글 쓸 준비중입니다. 죄송합니다~!!!

 

<오심죽...천안 성거산(聖居山) 천흥사(天興寺) 동장(銅檣)은 당(唐)의 척경비(拓境碑)인가? 강계비(疆界碑)인가?...2012.6.6>

 

 

 

* 첨부파일 참조 //

 

 

 

동장기(구리돛대)...수산 이종휘(1721~1797).hwp

 

 

 

 

 

 

*1872년 직산현지도...천흥사 동장 //

 

 

 

* 직산현...성거산 천흥리...천흥사???...동장(銅檣)...구리돛대 기둥석...

 

기존 사찰 당간의 대나무처럼, 죽순 뻗듯한 모양과 사뭇 다른 특이한 형식의 구리돛대. 기존 용머리(용두)가 아닌, 봉황머리가 아닌 보주와 그 아래 둥그런 육환장같이 생긴 모양.

 

백제를 평정하고 세운,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세운 웅진도독부 서북경계...당나라의 疆界碑인가? 백제 첫도읍지 직산 하남위례성 아래, 고대 당항성로의 큰 길가에 세운 동장...구리돛대...

 

...김정호, 대동지지...총 24마디며, 1마디 10척, 꼭대기에 수 백근의 은으로 화려하게 장식했다. 24마디가 통으로 연결되어 마치 하나처럼 보인다.

 

...수산 이종휘...동장기...네가닥 철노(철노끈)으로 꼬아 감은 것이 높이가 수장이며 매우 견고하다.

 

...중국 당나라, 현장(600~642, 삼장법사)의 유가종(瑜伽宗), 법상종(法相宗) //

...신라의 원측, 그 제자 도증 692년 신라 귀국하여 유가종 전하고...

 

천흥사에 기록에 남아 있는 고려 고승 김덕겸(1083~1153) 묘지명 기록과,

최관오(1096~1158)의 묘지명에도...고려 인종 15년(1137) 관오가 주지로 있었다...천흥사는 유가종의 사원으로 묘지명에 있듯 12세기 중엽까지 현존했음을 알 수 있다...단국대 고고미술사학회(성환문화원, 1997년)

 

...유가종...미륵불, 호법...백제 무왕은 익산 금마저에 미륵사를 창건하고...

 

...모든걸 종합하여 판단하면

...당나라 웅진도독부의 척경비, 강계비, 강역비, 위령비...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 부여 부소산, 사비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의 첫도읍지 직산 부소산 온조왕의 하남위례성에

...기념비처럼 세운 당나라 강계비인가?

...고대 당항성로...삼남대로변, 신라와의 접경지역에

...당나라, 황제국의 상징적인 척경비, 강계비, 강역비, 위령비를 세운 것으로

판된된다. //

 

 

* 이것이 성거산 천흥사??? 당간??? 지주라고...보물 제99호...충남 천안시 서북구 성거읍 천흥리 소재 //

 

 

 

 

* 1917년... 천흥리 동장 //

 

* 청주 용화사 당간 // 

 

* 청주 용화사 당간 //

 

 

* 천안 성거산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물 제99호 안내판 //

* 대한민국 역사서 그 어디에도 천흥사 당간(幢竿)이란 명칭은 보이질 않는데...

   ...천안 부소산 위례성 동장(銅檣-구리돛대)지주...보물 제99호...명칭을 변경해야 옳을듯...//

 

 

 

 

 

 

 

* 동장기-銅檣記...수산 이종휘(1731~1797)...1751년 신미년 作

 

동장(銅檣-구리돛대)이라는 것은 중국인의 세움으로 전국에 많이 서 있다. 대개 한나라 마원(BC14~AD49)장군이 동주(銅柱-구리기둥)를 세움으로 비롯되었다. 천흥사는 직산현 동남쪽 십리에 있는데 천흥사 문 밖에 서있는 동장의 높이가 수 길인데 네가닥 철노(끈)를 꼬은 것이 매우 견고하다. 사지(寺誌)에는 당나라 때 세운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묘년(1751년) 모월 모일에 이 고을에 살고 있는 몇몇 사람들을 따라 성거산에 올라 위례성을 바라보고 잠시 천흥사 서쪽에 있는 누대에서 쉬어 두루 고적을 보면서 동장 아래에 서성거리다가 보니 탄식만 나오는데 방금 서산에 햇빛이 반조되어 광채가 붉은 금빛처럼 찬란해짐으로 그것이 천년 전 물건이라 보기에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도서나 기록을 참고해 보면 누가 만들어 세운 것은 알 수 없고 또한 유민이나 고로(古老)들의 전해온 말도 없지만 동국사기의 말에 의하면 당나라 장수가 서해로부터 건너와 호서 호남 접경으로 들어왔다고 하는데 백제 의자왕 당시 당나라 장수인 소정방이 대장으로서 사비성을 평정하고 의자왕과 장사들을 항복케 하고 바로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그 군사들이 아산과 직산까지 당도하지 못했으니 동장은 아마도 소정방이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소정방이 돌아감에 왕자 풍을 다시 왕으로 세웠으니 그의 장수 도침, 흑치상지, 사타상여 이 분들이 각 성(城)에 분거하면서 또 당나라 사람들과 이삼년을 교전하였는데 그 후 당나라 장수인 유인궤가 대중의 힘으로 근근히 승전하게 된 것이다. 당나라 군사가 들어올 때 그의 장수인 유백영, 풍사귀, 방효공, 유인원, 왕문도 등 뿐만 아닌데도 다만 동국사기에 소정방과 유인궤 두 명만 알려진 것이다. 유인궤가 또 머물러 있으면서 수년간 웅진(熊津)을 다스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에 유인궤의 명성을 학사들이 간혹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유인궤가 동국(東國)을 떠날 적에 당태종의 정삭(正朔) 묘휘(廟諱)를 청하려고 반포령까지 내렸으니 그의 소행이 어찌 공명(功名)에 자희(自喜)한 자세가 아니겠는가. 그때 백제 왕자 풍을 쫓아내고 서상관을 항복시켰으며 공명을 이루고 뜻을 얻어 천만년 명성을 드날리기 위하여 구리를 녹여 높게 기둥을 세우면서 자신의 공적을 복파(伏波) 마원장군에 비교하려 하였으니 이와 같은 행위는 매우 희귀한 처사라 할 수 있다. 그런즉 동장을 만들었을 것을 그때의 물건으로만 볼 수 없고 그때 인물로 추구해 본다면 유인궤 이외의 사람도 아닐듯하다. 옛날 양양은 한골인데 양두는 그 고을을 잘 다스림으로 모두 오나라를 평정한 공적을 신임하면서 원개에게만 유독 비석을 두 개를 만들어 하나는 산속에 두고, 하나는 물속에 던져 버렸음으로 오늘날 전해지지 못하지만 양숙자의 명성은 천만년 가도록 아직도 양양 사람들이 존모(尊慕)하는 생각이 원개보다 더하고 있다. 대개 원개는 전공으로 명성을 얻었고, 양숙자는 덕만으로서 명성을 얻은 분이기에 이와같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사에 의하면 유인궤가 우리나라에 있으면서 치안하던 이때에 백제의 경내에는 시체가 풀잎 쓰러진 것처럼 많았기에 유인궤가 비로소 시체를 묻어주고 호적을 정리해 주었으니 이와 같은 소행으로 볼 때 인궤가 전쟁 할 적에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덕(德)으로 유회하면서 서서히 진정하지 못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천하의 많은 구리를 수집하여 동주를 높이 세웠으니 당시 위세만은 가상하다고 하겠지만 무엇이 양숙자의 덕정을 베풀어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지 않고 사모하는 것만 하겠는가. 의당 그 동장이 황초야전(荒草野田) 속에 빛을 가리듯 우뚝 서있어 누구의 작품인지도 모르나 공연히 과객으로 하여금 의심만 하게하는 것인가. 한나라 때 마원이 교지(交趾-베트남)를 정벌한 일은 반역하는 자들을 정벌하였기에 위덕이 다같이 행하였으므로 지방 사람들이 마 자(字)로 성(姓)을 하였고, 염주를 지나는 사람들이 지금도 동주(銅柱)를 보고 절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그분의 공덕이 아니겠는가. 나도 이점에 있어 또한 유감스럽기만 하다. 천흥사 위에는 옛날 위례성이 있다. 자손들이 교만하고 방탕하므로 온조왕의 공덕을 생각하지 못하고 유연황망(流連荒亡)하여 바닷가에 누대를 높이 세워 바라보며 안일하게 있다가 당나라 군사로 하여금 졸연간 들어와 성읍이 페허가 되어 천년이 되도록 황폐하고 쓸쓸해졌는데 동주만은 아직도 남아 있으니 남은 수욕(羞辱)을 지울 수 없으니 슬프기만 하구나. 이로써 반드시 국가를 소유한자의 귀감일 것이요 어찌 오로지 백제만이 그러하리오. 혹자는 말하기를 부도가(浮屠家=佛家,불교)에서 세워 그 탑을 보도록 했다 하기도 하고, 혹자는 중국사람들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에 명장이 많이 배출되어 동장을 세워 지맥(地脈)을 제압했다고 하지만 이 두 사람의 말은 모두 믿을 수 없기에 돌아와 동장기(銅檣記)를 쓰노라. 이때 함께한 일행들은 최진보, 진사 염치주, 최흥석, 동자 최윤보 그리고 그분의 종자 수득이다.

 

< 번역 : 한학자 임용순 翁 // 교정 : 오심죽...2012. 6. 5 >

 

 

※ 이종휘(李種徽) 1731(영조 7)∼1797(정조 21). 조선 후기의 학자.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덕숙(德叔), 호는 수산(修山). 아버지는 병조참판을 지낸 이정철(李廷喆)이다. 조선 후기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의 폐쇄성을 비판하였으며, 역사서인 『동사(東史)』를 저술하였다. 또한 역사와 지리를 결합하여 해석하고 고증해감으로써 실학파 역사 연구의 일환으로 중요한 업적이 되었다. 신채호(申采浩)는 그의 역사 인식에 대하여 “단군 이래 조선의 고유한 독립적 문화를 노래했으며, 김부식(金富軾) 이후 사가(史家)의 노예사상을 갈파하였다.”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문집으로는 『수산집(修山集)』이 있다.

 

<동장기-銅檣記>는 1751년 장인(丈人)이 부임한 직산현감 최보흥(崔普興)의 명에 의해 <온왕사기-溫王祠記> <成歡驛, 척수루기-滌愁樓記>를 직산관아에 머물며 기록하였다.

 

 

 

< 銅檣記 >..修山集 卷之三 記. 이종휘 //

 

 

...성거산 천흥사 당간(聖居山 天興寺 幢竿-보물 제99호)으로 알려짐.

 

 

銅檣者。華人所立。八域多有之。盖漢馬援銅柱之流也。天興寺在稷之東南十里。寺門之外。銅檣高數丈。鐵索以四維之者甚牢。寺誌。唐時所立。辛未某月某日 從邑中二三子。登聖居。望慰禮城。憇寺之西樓。周覽古蹟。而徘徊歎息於銅檣之下。方西日返照。而光射赤金。燦然如新。不卞其爲千年前物也。然考諸圖記。不知所立者爲誰。又非遺民故老所可得以傳說。然以東史言之。唐之將帥渡海。入兩湖之界。惟百濟義慈時。而蘇定方以大將。及平泗泚。與降王將士。卽西歸。其兵初不及今牙稷之間。則檣固非定方樹也。定方之還。王子豐。復立爲王。其將福信,道琛,黑齒常之,沙吒相如。分據諸城。復與唐人苦戰三二年。其後唐將劉仁軌。以大衆僅乃克之。故唐兵之來。其將劉伯英,馮士貴,龎孝公,劉仁願,王文度等。不爲不多矣。然東史獨稱蘇定方,劉仁軌。仁軌又留治熊津數年而後返。故仁軌之名。學士猶或知之。且仁軌之東。請唐正朔廟諱。將以頒行於東國。此其意豈非自喜功名者邪。及其走豐而降常之也。功成志得。又爲千載之名。而冶銅爲柱。以自附於馬伏波。此固無甚怪者。然則檣之爲其時物無疑。而欲求其人。則又無出於仁軌之外者。昔襄陽一郡而羊杜繼治。皆任平吳之功。元凱獨爲二石。一置之山。而一投之水。然碑今不傳。而羊叔子之名。至于千萬年。而猶爲襄人之慕過於元凱。盖元凱以功。叔子以德。此其所異也。史稱仁軌留鎭之日。濟之境內。殭尸如莽。軌始爲之瘞骸籍戶。以此觀之。軌之疾戰力征。多殺人命。不能以德綏懷。徐而定之者可知矣。雖收天下之銅。立柱齊雲。當時非不爲威。孰能久而不忘如叔子之爲乎。宜其荒草野田之中。翳然獨立。而不知爲誰氏之物。徒資過客之疑爾。馬援征徵。則徵貳威德並行。土人至於以馬爲姓。廉州之界。過者。至今拜銅柱。此豈非其驗歟。余於是。又有感焉。寺之上。故慰禮城也。子孫驕逸。不念溫王之烈。而流連望海之樓。使唐兵猝入。而城邑爲墟。及其千載。荒煙零落。至於銅柱尙存。而遺羞不泯。嗚呼。用此可爲有國者之鑑。豈獨百濟也哉。或曰。銅檣者。浮屠家所建。其用視㙮。或曰。華人謂我東多出名將。銅檣所以壓地脉。是二者。皆不可信。及歸而爲之記。從行者崔鎭普,進士廉致周,崔興碩,童子崔潤甫及其從子粹得。

 

 

 

* 중국 한나라 마원의 동주(銅柱) 기록 // 

 

 

 

 

 

 

당간 [ 幢竿 ]

정의 : 당(幢:법회 같은 행사가 있을 때 절에 다는 기)을 달아두는 장대.

 

 

내용

사찰의 입구에 세우는 깃대의 일종으로, 찰간(刹竿)·장간(長竿)·정간(旌竿)·기간(旗竿)·치간(幟竿)·번간(幡竿)·범장(帆檣)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주로 나무·돌·구리·쇠 등으로 만든다.

당간의 끝에는 보통 당을 달아두지만 현재 당이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당간을 지탱하는 지주(支柱)만이 남아 있다. 당간 또한 오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도괴되고 파손되어 그 유례가 많지 않다.

 

현존하는 당간의 유례는 갑사철당간(甲寺鐵幢竿, 보물 제256호)을 비롯하여 용두사지철당간(龍頭寺址鐵幢竿, 국보 제41호) 등 철제당간 2기와, 석제당간(石製幢竿)으로는 나주동문외석당간(羅州東門外石幢竿, 보물 제49호)·담양읍내리석당간(潭陽邑內里石幢竿, 보물 제505호)과 비지정 당간이 몇 기 있다. 위의 네 곳의 당간 중 갑사철당간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나머지 3기는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3기의 당간 중 용두사지철당간은 철제로서 20개의 원통형 주철(鑄鐵)을 상하가 서로 물려 이어지게 쌓아올렸는데, 특히 밑에서 세 번째 원통 표면에 양주(陽鑄)된 393자의 용두사당간기(龍頭寺幢竿記)에 962년(광종 13)이라는 주조연대를 밝히고 있다. 이 당간기에 의하면 애초에는 30단의 주통이었으며 높이는 60자(181.8m)였음을 알 수 있다.

 

당간은 파사현정(破邪顯正 : 邪道를 파괴하여 正法을 드러냄.)의 뜻을 가지고 있으며, ≪범어사사적 梵魚寺事蹟≫에 의하면 절(節)은 33범천(梵天)을 상징하여 33단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고려도경≫ 흥국사조(興國寺條)에는 개성 흥국사에는 10여장(丈), 즉 30여m 되는 동주당간(銅鑄幢竿)이 법당 뒤 마당에 세워져 있었는데, 당간 표면에는 황금칠을 하고 당간 정상에는 봉황의 머리장식을 하였으며 그곳에 비단으로 된 당을 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978년(경종 3)에 세운 보원사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는 당간을 절 마당에 세웠으며 범패(梵旆 : 기)를 그 위에 달았음을 말해 주고 있다.

 

이상과 같은 기록에 의하여 당간의 양식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특히, 간두(竿頭)에는 봉황두(鳳凰頭) 장식을 하였다고 하나 그 예는 없고, 경상북도 영주시 순흥에서 발견된 금동제 당간용두식(金銅製幢竿龍頭飾)을 비롯한 금동제당간이 호암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어 그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현존하는 당간두식(幢竿頭飾)의 예는 나주동문외석당간과 담양읍내리석당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자는 팔각의 보개(寶蓋)와 보주(寶珠) 장식을 남기고 있으며, 후자는 금속제의 보륜(寶輪)이 이중으로 장식되고 풍경(風磬) 장식을 늘어뜨리고 있는데 현재 두 개가 남아 있다. 정상에는 삼지창(三枝槍)과 같은 철침(鐵針)이 솟아 있어 피뢰침의 인상을 주고 있다.

 

한편, 돌·구리·철제의 당간 외 목제당간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담양읍내리석당간 옆에 세워져 있는 비문에 의하면 현존하는 석제당간은 1839년(헌종 5)에 중창한 것으로, 원래는 나무당간이었으나 큰 태풍으로 동강나 석제로 대치하였다고 한다.

보통 당간의 아랫부분에는 육중한 당간을 받치기 위하여 연화문을 조각한 받침돌을 놓거나 기단형식의 대(臺)로 받치고 있다. 또한, 당간을 바로 세우기 위하여 좌우 양쪽에 지주로써 당간을 지탱하여 주고 있다.

 

 

참고문헌

慶州地方幢竿支柱의 硏究(朴洪國, 慶州史學 4,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國史學會, 1985)
統一新羅法幢의 復元的考察(姜友邦,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紀念論叢Ⅱ, 一志社, 1987)
慶州を中心とせる新羅時代幢竿支柱論(藤島亥治郎, 史蹟名勝天然紀念物 8-11, 1933)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통일신라 의상대사 화엄10찰...// 

 

 

 

 

1. 우리나라의 당간과 동장,철장, 석장, 솟대...글 모음 //

 

 

각론(01)//당간지주 남도불교미술

2005/07/11 17:17

 

복사 http://blog.naver.com/hbbss/80014925257

 

 

//   당 간 지 주   //

 

 

당간지주(幢竿支柱)란 돌받침기둥 지주에

돛대(檣) 세우 듯이 깃발(幢) 장대(竿)를 높이 세운 구조물이다.  

찰간지주(刹竿支柱)라고도 한다.

이 장대인 법당(法幢)의 재료에 따라 석장(石檣, 돌당간), 동장(銅檣) 철장(鐵檣)이라고 불렀다. 

이 구조물은 사찰의 경계나 깃발을 내걸어 종파를 나타내는 기능을 담당한다.

이같은 당간지주는 대부분의 사찰에 건립되었다.

그러나 사찰의 풍상이 오랜 세월이었으므로 거의 장대가 없어진 채

사찰 안에서 기둥돌인 지주를 들여와 보존하는 경우가 많다.

역시 남도 사찰에는 온전하면서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당간지주가 거의 없다.

 

 

영광읍에서 조금 떨어진 월평리(月坪里)

법다배미에는 천작사(天作寺)가 있었다고 전한다.

여기에는 천작사에서 유래된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소재 하는데,

행정구역상 단주리(丹朱里)에 속한다.

또한 이 곳은 월평사터와

동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 들녘의 논 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에

버팀 기둥돌 지주 밑부분이 흙속에 파묻혀 있다.
이 ‘장대’ 당간은 높이가 5.02m이며,

이를 지탱하는 버팀 기둥돌인 지주는

2.62m에 달한다.

그러나 흔히 ‘짐대’라고 불리운 장대는

본래 12.12m로서

중앙 하단부의 윗부분은 없어지고 말았다.

이 장대는 언뜻 전체적으로 4각인 듯 하지만 각 모서리를 살짝 깎아 8각이 되도록 하였다.

버팀 기둥돌의 윗 부분은 약간 활모양의 호형(弧形)으로 다듬어 모서리의 각진 부분을 없애고,

각 모서리를 죽여 부드럽게 처리한 흔적이 뚜렷하다. 

따라서 천작사가 이 거대한 당간지주에 어울리는 거찰(巨刹)이었음을 쉽게 알려준다.

비록 화강암 재질이 나쁜 탓인지 좀은 투박한 느낌을 주지만 고려후기에 조성된 것으로서

나주의 동문밖 석당간과 마찬가지로 본래 몇 개의 돌을 잇댄 것이었다.

이처럼 남도의 독특한 사례에 속하는 돌당간이므로 1987년에 유형문화재 제153호로 지정되었다.

특히 이와 유사한 당간지주가 대웅전 등의 앞에도 있으나 이는 괘불(掛佛)을 걸기 위한 것으로

사찰경계를 나타내는 성격과는 다르다. 또한 남도에는 사찰과 아무런 관련 없는 당간지주가 있다.

 

 

 

 

 

나주시 동북동에는 높이가 11m에 이르는 보물 제49호인

나주 동문밖 돌당간늘 주위 아래를 둘러본다.

본래 당간이란 사찰의 경계나 종파를 표시한

깃발을 거는데 사용했던 장대를 말한다.

그리고 이 장대를 지탱하는 버팀목인 지주와 합하여

흔히 당간지주, 찰간지주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돌당간은 사찰의 것과는 달리

고려초기에 행정체제를 확립할 때  

나주의 행주형(行舟型) 지세(地勢)를 안정시키기 위해

돛대 모양으로 세웠다고 전한다.

이 때 나무 당간도 함께 세웠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그만큼 이 돌당간은 처음부터 마을의 안정과 풍요를 기원하는

나주 사람들의 의지와 소망이 깃들여져 있다.

이와 유사한 배경에서 세워진 것으로는

쇠와 돌로 만든 담양의 철석(鐵石) 당간지주가 있다.

나주 돌당간은 당간과 지붕돌(玉竿石),

"모든 소원을 이루어 주는 구슬"을 상징하는 보주(寶珠) 여의주까지 전체가 원래의 모습대로 갖춰져 오늘에 이르른다.

당간은 지주와 같이 화강암 석재로서 5개 돌을 연결하여 당간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과 보주를 올려놓은 형태를 취한다.

이 5개의 돌은 1개 돌의 절반에 해당하는 돌로 깎아 맞붙이고,

그 아래 위에 둥근 구멍을 뚫어 쇠를 건너지르고

다시 그 바깥에 철테를 둘러묶어 단단히 고정시켜 놓았다.

특히 이 당간은 거의 둥글게 보이나 이를 찬찬히 보면 팔각으로 다듬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하여 이를 지탱하는 지주는 2m가 되는데, 아무런 조각이 없이

매우 간결 소박하면서도 언뜻 보기에, 멀리서 보아서도 아주 견고한 느낌을 준다.

지주의 윗부분은 평평하지만 앞뒤에서 보아도 밖으로는 곡선미가 두드러진다.

이 당간은 고려시대의 양식으로 보이는데, 팔각을 이룬 지붕돌은 그 모서리가 들려있다.

 

 

 

 

 

담양읍 읍내리 석당간은 객사리에 소재한 보물 505호이다.

오른쪽에는 보물 506호인 오층석탑(보물 506호)이 있다.

단층 기단(基壇) 위에 지대석(地臺石)을 겸한 장방형으로

옆면에 아무런 새김이 없다.

중앙의 1단 받침으로 당간을 세운 자리(臺座)와 두 기둥을 떠받치고 있다.

장대는 가늘고 긴 8각으로 된 돌장대 3개를 연결하고 

그 위에 둥그런 장대를 올려놓아 마디마디에 표시가 난다.

장대의 윗부분 상단부에는 금속제의 보륜(寶輪)이 이중으로 장식되었으며,

풍향(風響) 같은 장식이 현재 2개가 남아있다.

현재까지 장식 부분이 잘 보존되어 최고 윗부분에는 철침(鐵針)이 솟아있다.

특히 옆의 비석에는 당간의 중건에 관한 기록이 쓰여져 있다.

그 내용은 "석도를 세운 연대를 알 수 없다(石棹之立年不可攷) 

대개 읍을 설치할 때 비롯되었을 것이다.(盖自設邑始幾)

갑인년에 이르러 대풍으로 꺾여

나무로 대신 세웠다.(年至甲寅爲大風折以木代立) 

작년 봄에 다시 훼손되어 지금 처음과 같이 중건했으니, 

기해년 3월이다.(昨春又頹今則如初重建歲己亥三月也)

숭정 기원 후 4기해 3월 일에 부사 홍기섭이

기록하다(崇禎紀元後四己亥三月日知府洪耆燮記)"라고 되어있다.

그 뒷면에는 당간 건립을 담당했던 유사(有司)와 호장(戶長), 읍리(邑吏) 등의

직책과 성명이 음각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해, 이 석당간이

1839년(헌종 5)에 중건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2개의 돌받침대 양식이 고려시대로 추정되므로

당시 파손된 부분 등을 다시 만들고 고쳐 중건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군지/문화재도록

 

 

 

***수미산 도솔천, 천하대안의 땅...

    성거산 천성사~천흥사...법상종, 유가종 사찰...당나라 현장법사,

    신라 고승 원측(613~693)...당나라 측천무후는 원측을 살아있는 부처처럼 공경하였다함.

...백제 무왕, 익산 금마저에 미륵사지를 창건하고...

...천안 부소산 위례성 100리 드넓은 평야와, 서해바다가 보이는 이곳...성거산(도솔천)

...신라의 당항성로 큰 길에 서있는 구리기둥, 구리돛대...동장  

...백제의 미륵 사찰 한개쯤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성거읍 천흥리...

 

...과연 동장(구리돛대)이 당나라 때 만들어졌다면, 수백근 은으로 장식된 찬란한 동주를

...고려 태조 왕건도 직산현 수헐원(시름새)에서 이를 바라다 보았을 것이고

...삼국통일의 패업을 이룬 오룡쟁주지세 천안, 성거산 왕자산(王字山)

...고려는 금동보살입상 천성사(1002년), 천흥사 동종(1010년)을 새로 만들며

...천성사(天聖寺), 천흥사(天興寺)를 창건하였는가??? 크게 다시 중창하였는가???

...무엇이 동장(당간)지주의 통일신라 초기양식이며, 중기양식이며, 퇴화되어 고려초기의 양식인가???

 

 

 

미륵하생경(彌勒下生經)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부처님께서 거룩한 비구 1천 2백 5십 인과 함께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에 계실 때였다. 아난이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께서는 깊이 살펴보시니 무엇이든 모르는 것이 없사옵니다.

그래서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환하게 두루 아시옵니다. 그리하여 과거세에 성불하신 모든 부처님의 이름과 그를 따르고 배우던 제자와 보살이 얼마나 많았는지, 또 적었는지를 다 아시고, 일 겁, 백 겁, 무수 겁 전의 일들을 다 환히 관찰하시옵니다. 또한 다음 세상의 일도, 어떤 나라의 임금은 인품이 어떠하고, 대신은 누구이며, 백성들의 이름과 생활 형편이 어떤지 까지 다 아시니 지금 사는 나라의 국경이 어디고, 형편이 어떻다는 것을 아시는 것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많은 세월이 지나간 후에 미륵부처님이 오셔서, 등정각을 이루신 일에 대해 듣고자 하나이다. 미륵부처님을 따르는 제자는 얼마나 되며, 그 세계는 얼마나 풍족하고 안락합니까? 또 그 법은 얼마 동안이나 세상에 머물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아난이여 ! 자리에 돌아가 내 말을 들을지어다. 미륵불의 세계가 얼마나 풍족하고 안락한지, 또 그 제자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잘 생각해서 마음속에 받아 지닐 지니라."

아난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제 자리에 들어와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세계에는 계두성이라는 큰 도읍이 생길 것이 다. 동서의 길이는 12유순, 남북은 7유순인데, 그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풍족해 많은 사람들이 유복하게 살아 거리마다 번화하기 이를 데 없다.

그 때 수광이라는 용왕이 있어서 밤이면 항상 향수를 비처럼 내려 거리를 적시고, 낮에는 온 성안을 화창하게 하리라. 또 모든 것을 법에 따라 행동하고 바른 가르침을 어기지 않는 섭화라는 나찰 귀신이 있는데, 이 나찰은 밤중이면 더러운 물건을 치워 두고, 향즙을 땅 위에 뿌려서 온 성안을 모두 향기롭고 깨끗하게 하느니라.

아난이여 ! 그 때, 염부제의 땅 넓이는 동서남북이 10만 유순이나 될 것이다. 산과 개울, 절벽은 저절로 무너져서 다 없어지고, 4대해의 물은 각각 동서남북으로 나뉘어 지느니라. 대지는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곡식이 풍족할 뿐만 아니라, 인구가 번창하고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이 잇따라 있어 닭 우는소리가 서로 들리느니라. 아름답지 못한 꽃과 나쁜 과일, 시들한 나무는 다 씨가 마르고, 더러운 것은 다 없어진다. 그래서 감미로운 과일 나무와 향기롭고 아름다운 풀, 나무들만이 자라느니라. 저 세상의 기후는 온화하고 화창하며, 사계절이 순조로와 백여덟 가지의 질병이 없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도 마음 깊이 있을 뿐,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도 어긋남이 없이 평화롭다. 그래서 만나면 즐거워하고, 착하고 고운 말만 주고받으니, 뜻이 틀리거나 어긋나는 말이 없어서 울단월세계에 사는 것과 같으니라.

이 때 염부제 사람들의 몸은 서로 크고 작은 차이가 있지만, 목소리는 그런 차이가 없이 다 같으니라. 또 대소변을 보고자 할 때는 땅이 저절로 열리고, 땅이 저절로 닫히느니라. 또 쌀은 심지 않아도 저절로 거둘 수 있는데, 껍질이 없고 향기로우며, 먹고 나면 앓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없느니라.

또 금. 은. 보배와 자거. 마노. 진주. 호박이 땅 위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어도 주워 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느니라. 오히려 그 때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옛 사람들은 이것 때문에 서로 싸우고, 죽이며 잡혀가고, 옥에 갇히는 등 수없는 고생을 하지 않았는가 ? 오늘날에 와서는 이런 것들이 흙이나 돌과 마찬가지, 탐내거나 아끼는 사람도 없도다'라고."

그 때가 되면 양거라는 법왕이 나서 바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이다. 그 왕에게는 일곱 가지 보배가 있을 것인데, 천하를 정복하는 금륜보, 광명으로 빛나는 여의주와 절대 미인인 옥녀보, 칠보를 만들어 내는 수장보와 코끼리. 기병. 전차. 보병 등을 만들어 내는 전병보와 왕이 타고 천하를 두루 다니는 최고의 마보, 그리고 물위로 걷는 상보를 말한다.

양거왕은 이 일곱 가지 보물로 천하를 다스릴 뿐, 무기나 권력으로 억누르지 않아도 모든 적으로부터 저절로 항복을 받느니라.

또한 네 개의 보배 창고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건타월국에 있는 이라발 보배 창고인데, 온갖 진기한 보물과 기이한 물건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둘째는 미제라국에 잇는 반주 창고인데, 역시 이곳에도 진기한 보배가 가득하다. 셋째는 수뢰타대국에 있는 진기한 보배 곳간이다 넷째는 바라나국에 있는 양거의 큰 보배 곳간이니. 이곳 역시 한량없는 진기한 보물이 가득하리라.

이 네 곳의 보물 창고는 다 저절로 생긴 것인데, 창고를 지키는 책임자들이 왕에게 와서 이렇게 말하느니라.

'원하옵건데 대왕께서는 이 많은 보물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어 보시하십시오.'

그러면 양거왕은 보물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나누어 보시해 다시 자신이 가지지 않으므로, 영원히 재물에 대한 생각이 없을 것이다.

또 그 때 염부제에는 옷이 나무에 저절로 열리는데, 특히 얇고 부드러워서 사람들은 누구나 힘들이지 않고도 좋은 옷을 나무에서 거두어 입게 되리라. 그것은 마치 울달원의 사람들이 나무에서 옷을 따 입고 사는 것과 같으니라.

그 때 양거대왕에게는 수범마라는 대신이 있는데, 그 둘은 어려서부터 서로 친하고, 특히 서로를 존중하고 믿는 사이니라. 수범마는 모습이 단정하고, 알맞은 키에 몸은 너무 뚱뚱하거나 마르지 않았으며, 희거나 검지도 않으니, 지나치게 늙어 보이거나 젊어 보이지 않는다.

수범마에게는 범마월이란 아내가 있는데, 옥녀들 중에도 몹시 뛰어나게 아름다운 하늘 임금의 왕비 같으니라. 이 여인의 입에서는 우바라 꽃향기가 나오고, 몸에선 전단향이 퍼지며, 여자가 갖추어야 할 마흔 네 가지 훌륭한 태도를 지녀, 질병이나 산란한 생각이 없느니라.

미륵보살이 그 때 도솔천에 있으면서 수범마 내외가 늙지도 젊지도 않은 것을 보고 그들을 부모로 삼아 범마월 부인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다.

내가 오른쪽 옆구리로 태어난 것같이, 미륵보살도 그 어머니의 오른쪽 옆구리로 나올 것이다. 그리고 나면 도솔천의 하늘은 미륵보살이 사바세계에 내려가 탄생한 경사를 노래하고 찬탄하느니라. 수범마는 아들의 이름을 미륵이라고 할 것이다.

미륵보살은 32상과 80종호를 갖추었고, 몸은 황금빛으로 빛나리라.

또 그 때의 사람들은 수명이 아주 길어 병으로 앓는 일이 전혀 없이 8만 4천세를 살며, 여자들은 5백세가 되어 시집가게 될 것이다. 미륵보살은 얼마간 집에서 자라다가 출가해 도를 닦을 것이다. 곧 계두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높이 1유순, 둘레가 5백 보 되는 용화라는 큰 나무가 있을 것인데, 미륵보살은 그 용화수 아래 앉아서 무상도를 이루느니라.

미륵보살이 깨달음을 이뤄 부처님이 될 때,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갈래로 진동하며, 천신들은 이렇게 말한다.

'미륵보살께서 이제 부처님이 되시었도다.'

또한 그 메아리가 사천왕의 궁전에까지 울려서, 그들도 미륵보살의 성불을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33천과 염마천. 도솔천. 화락천. 타화자재천과 범천에 이르기까지 그 기쁨이 전해져 다음과 같이 기뻐하느니라.

'미륵보살께서 드디어 성불하셨도다.'

그 때, 대장이라는 마왕이 있어 바른 법으로 하늘을 다스릴 것인데, 여래의 이름이 울려오는 소리를 듣고, 춤추며 뛰어오를 것이다. 또, 기쁨에 겨워서 7일 낮 7일 밤을 잠들지 못하다가, 욕계의 많은 천인을 이끌고 미륵 부처님이 계신 곳에 와서 공경, 예배할 것이다.

그러면 미륵 부처님은 많은 대중들과 있으면서 불법의 미묘한 이치를 차례로 연설할 것이다. 그 내용은 남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야 한다는 보시와, 깨끗한 계행을 지켜야 한다는 계율,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일과 욕심은 깨끗하지 못한 생각이란 가르침이다.

미륵불은 모든 사람들이 기꺼워함을 보고,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설법하신 고집 멸도의 사성제를 천인들에게 말해 줄 것이다. 현실은 그저 모습만으로 나타나 있을 뿐, 기실 괴롭기 짝이 없는 것이라는 고제와, 괴로움의 원인은 애욕과 업에 의한 것이라는 집제, 괴로움의 세계를 벗어난 절대의 세계가 열반이라는 멸제와, 열반의 경지를 성취하기 위한 수행 방법에 대한 가르침인 도제가 이 법문의 내용이다.

그리하여 그 자리의 8만 4천 천인들은 모든 번뇌를 여의고 진리를 보는 법안을 얻을 것이다.

그 때 대마왕이 저 세상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리라.

'그대들은 어서 출가하라. 미륵 부처님이 오늘 열반의 피안에서 그대들을 구하시리라.'

그 때 계두성 안에 있는 선재라는 장자가 마왕의 말과, 미륵불이 성불할 때 땅이 울리는 소리를 듣고 8만 4천 대중을 이끌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갈 것이다. 부처님께 엎드려 절하고 한편에 물러나 앉아 법문을 들을 것이다.

그 자리에선 미륵 부처님이 뜻 깊은 법문을 설하실 것이다. 보시해야 하는 법, 계행의 법, 참되게 수행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는 법, 욕심을 버리고 항상 깨끗한 마음으로 생활해야 하는 법을 말할 것이다. 미륵불은 대중들의 마음이 열려 법문에 대한 이해가 깊은 것을 보고, 많은 부처님들이 이미 말씀하셨던 것처럼 고집 멸도에 대하여 모든 하늘의 대중들에게 그 뜻을 분별해 말해 주느니라. 그리하여 대중 가운데 8만 4천 인이 번뇌를 끊고 깨끗한 법안을 얻을 것이다.

선재동자는 8만 4천 인과 더불어 부처님에게 출가하여 열심히 수행해, 아라한도를 얻을 것이다. 미륵불은 그 처음의 법회에서 8만 4천인을 제도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하느니라.

그 때 양거왕이 미륵불이 성불하셨다는 말을 듣고, 곧 미륵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달려와 법문을 듣고저 하므로 미륵 부처님은 왕에게 법문을 설하실 것이다. 그 설법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끝이 다같이 거룩한 말씀이고 심오한 진리이다.

그 말씀을 들은 양거왕은 왕위를 태자에게 물려 준 뒤, 머리를 깎고 스승에게 진기한 보물들을 바칠 것이다. 또 다른 많은 보배들을 여러 범지들에게 보시하고는 8만 4천 대중을 거느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가서 수행자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도과를 얻어 아라한이 되느니라.

미륵불의 아버지 수범마 장자는 아들 미륵이 부처님이 되셨다는 소문을 듣고, 8만 4천 범지를 데리고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는 다같이 수행자가 되어 아라한의 도과를 얻을 것이다. 그들 중 수범마는 몸과 마음을 얽매어 괴롭게 하는 세 가지 번뇌, 즉 탐욕과 성냄, 어

어리석음을 끊고 괴로움의 경지를 아주 여의느니라.

미륵불의 어머니 범마월부인도 8만 4천 명의 시녀를 이끌고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사문이 되어 모두 아라한과를 얻을 것이다. 그 가운데 범마 월 부인은 번뇌를 다 여의고 수다원과를 얻느니라.

그 때 많은 찰제리 부인들도 미륵불이 출현하여 등정각을 이루었다는 소문을 듣고, 수천만 대중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찾아와, 땅에 엎드려 절하고 물러나 앉을 것이다. 그리고 각각 마음으로 이미 사문이 되어 도를 배우기를 청하리라.

어떤 이들은 차례를 뛰어넘어 한번에 깨달음을 얻고, 또 어떤 이는 차례를 뛰어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느니라. 아난이여, 그 때 차례를 뛰어 넘지 않고 깨달음을 얻는 이는 모두 일찍부터 불법을 받들어 오던 사람이니, 일체의 모든 세상일들을 즐겁게 생각하거나 매달리지 않는 사람이니

라.

미륵 부처님은 그 때 네 가지 큰 진리, 사성제를 듣고 해탈을 이룬 성문승과 스승이 없이도 12인연의 이치를 깨달은 연각승, 육바라밀을 닦아 자기도 해탈하고 남도 해탈케 하여 다같이 성불의 길을 닦게 하는 보살승 등 삼승에 대한 가르침을 하실 것이다. 그 말씀은 지금 내가 설하고 있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느니라.

미륵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대가섭이란 제자가 있어, 열두 가지 수행, 12두타행을 잘 닦을 것이다. 가섭은 과거에서부터 많은 부처님에게 가르침을 받아 깨끗한 행을 잘 닦는 사람으로 미륵 부처님을 도와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리라. 부처님께서 돌아가실 날이 멀지 않은 때에 이르면,

가부좌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있으리라."

그 때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내 이제 늙어 8만 세가 넘었도다. 그러나 이제 네 명의 큰 성문이 있어 교화의 임무를 잘 감당하리라. 그들은 지혜가 다함이 없고, 온갖 공덕을 두루 갖추었느니라. 네 성문은 대가섭 비구와 군도발탄 비구. 빈두로비구. 나운비구이다. 이들 성문은 내 법이 소멸된 뒤에야, 열반에 들도록

하라. 석가여래의 제자 대가섭도 열반에 들지 않고, 미륵불이 세상에 나오기를 기다리느니라. 그것은 미륵불이 교화하는 제자는 모두가 석가여래의 제자인 까닭이다. 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는 모두 다 내 교화를 받아 온갖 번뇌를 여의는 때문이니라. 가섭도 지금 마갈다국 비제촌에 있는 영취산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느니라.'

 

미륵 부처님이 수많은 대중들을 거느리고 저 산에 가면 여러 귀신들이 부처님의 은혜로 문을 열어 줄 것인데, 대중들은 가섭이 선정에 들어 있는 굴속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때 미륵 부처님은 오른쪽 손을 펴서 가섭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시리라.

'이 사람이 오랜 옛날에 계셨던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섭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고행하는 수행이 제일이다.'

대중들은 이 광경을 보고, 전에 없던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며, 많은 중생들이 번뇌의 때를 여의고, 진리의 눈을 얻을 것이다. 또 어떤 중생들은 가섭의 몸을 보기도 하느니라. 이 모임을 첫 번째 법회라 하는데, 이 때 96억 인이 아라한이 되느니라.

'이들은 다 내 제자였던 사람들이니, 아라한을 쉽게 이룬 것도 내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이다. 또 네 가지 공양을 한 인연과,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사랑하고,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한 수행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난이여, 그 때에 이르면 미륵부처님은 가섭의 가사를 받아 입을 것이다. 그런 다음 가섭의 몸은 바로 별처럼 흩어지리라. 미륵부처님은 갖가지 꽃 과 향으로 가섭에게 공양할 것이니, 그것은 모든 부처님들이 바른 법을 지극히 공경하고 받드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미륵부처님도 내게

바른 법의 교화를 받아서 무상 정도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난이여, 그대는 알지어다. 미륵부처님의 두 번째 법회에서 94억 대중이 아라한도를 얻을 것이다. 이들 또한 내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로 네 가지 공양을 하는 행을 잘 닦은 이들이니라. 또, 미륵 부처님의 세 번째 법회에도 92억 대중이 아라한도를 얻을 것이니, 이들도 내 교화를 받은 제

자들이니라.'

미륵 부처님의 세상에서는 모든 비구들의 성을 자씨라고 하리라. 그것은 마치 오늘날 모든 성문들이 석가의 제자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 때 미륵 부처님은 제자들을 위해서 이렇게 설법하실 것이다.

'너희들 비구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라.

세상 모든 것이 다 덧없도다. 즐거움 속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숨어 있으니, 참 나를 살펴볼 때로다.

실다운 것은 아예 없고, 모든 것이 다 공하여 없으며, 이 몸이 죽고 나면, 몸은 빛깔이 변해 퍼렇게 멍이 들고, 배는 부풀어오르고, 음식조차 삭일 수 없어 피고름만 흐를 것이다.

이 세간 온갖 것은 즐겁기만 한 것이라곤 하나 없도다.'라고.

'비구들이여, 왜 그런가 하면 이런 열 가지 생각은 과거세의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너희들에게 모든 번뇌를 여의고, 해탈을 얻게 하기 위해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 있는 모든 대중들은 모두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로, 과거세로부터 깨끗한 수행을 닦아 오늘 이 자리에 온 이도 있으며,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삼보에 공양한 공덕으로 이 자리에 온 이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아주 짧은 순간에 자

신이 닦은 착한 일로 인하여 이곳에 태어난 사람도 있느니라.

또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한량없는 중생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 주는 자. 비. 희. 사 네 가지 마음을 닦은 인연으로 오늘 이곳에 태어났다.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오계를 받아 지니고, 삼보에 귀의한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다.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도량을 새로 세운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으며, 또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 계시던 곳에서 법당을 고친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느니라.

또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던 곳에서 팔관재법을 받아 지킨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고, 어떤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시던 곳에서 향과 꽃으로 공양한 공덕으로 이곳에 태어났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온 마음을 다해 법문을 들은 인연으로 오늘 이곳에 태어났다.

어떤 이는 목숨이 다하도록 계율을 지킨 인연으로 오늘 이곳에 태어났느니라. 또 어떤 이는 목숨이 다하도록 범행을 한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으며, 어떤 이는 경전을 읽고 쓰고 외운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으며, 혹 어떤 이는 부처님을 섬기고 공양한 인연으로 이곳에 태어났느니라.'

미륵 부처님은 또 게송으로 이렇게 말씀할 것이다.

 

계행과 법문 듣고

독경과 선정 익히고

거룩한 행을 닦아서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보시와 기쁜 마음 떨쳐 일으켜

마음의 깊은 근원 닦으며

다른 망상 전혀 없어서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평등하고 거룩한 마음 얻고자

모든 부처님을 받들었고

많은 성현들께 공양했기에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계율과 경전을 항상 외우고

남들에게 정성껏 설명해 주어

법의 근원 밝혀 왔기에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부처될 모든 이 잘 교화하였고

부처님 사리에 공양 올리며

법을 위해 몸과 마음 바치었기에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경전을 쓰고 인쇄하여

세상에 널리 펴 보시하고

공양한 공덕 있기에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고운 비단 온갖 것

탑과 절에 공양하고

염불 정진 지극하여서

오늘 바로 이 자리에 이르렀노라.

 

과거 현재 삼세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 이는

선정을 닦아 평등한 마음 이루어

더하고 덜한 마음 아주 없나니.

 

부처님 깊은 법에 들어와

성현네를 받들고

삼보를 정성으로 섬기면

하염없는 열반 언덕 이르고 말리라.

 

아난이여 알지어다. 미륵 부처님이 이렇게 게송으로 설법하고 나면, 대중 가운데 하늘과 사람들은 열 가지 진리를 생각하고 11해의 수많은 사람들은 번뇌의 때를 여의고 거룩한 진리의 눈을 얻게 되느니라.

미륵 부처님의 세상에서는 천 년 동안 모든 수행자가 부정한 행위를 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다음의 한 게송만으로 금하는 계율을 삼을 뿐이니라.

 

입으로나 마음으로 나쁜 짓 말고

몸으로도 또한 범하지 말라.

이 세 가지 악을 여의고

나고 죽는 생사의 문, 어서 벗어나라.

 

이렇게 천 년이 흐른 후에는 계율을 범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계율을 다시 정하게 될 것이다. 미륵 부처님의 수명은 8만 4천 세이고, 열반에 든 뒤에 불법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은 8만 4천 년이 되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그때의 중생들은 아주 뛰어난 자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그때 선남자, 선여인들은 미륵 부처님과, 세차례의 법회에서 깨달음을 얻은 성문들을 찾아뵈오려 하느니라. 도읍인 계두성과 양거왕의 진기한 네 가지 보배 곳간이 가득 차며, 음식을 먹고자 하면 저절로 쌀이 생기고 옷을 입고자 하면 저절로 옷이 생기며, 목숨을 마치면 곧 하늘나라에

태어나느니라.

저들 선남자, 선여인은 부지런히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으니, 모든 법사의 가르침을 잘 받들고 갖가지 공양 거리를 끊이지 않게 하느니라. 이와 같으니 아난이여, 마땅히 배울지니라.'

그 때 아난과 모든 대중은 부처님의 이 말씀을 듣고 기쁨에 넘쳐 받들어 모시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 자씨 미륵보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자세히 들을지어다. 큰 위신력과 가장 높은 공덕을 다같이 갖추어 중생들로 하여금 악도에서 해탈케 하고, 아주 거룩하고 묘한 즐거움만을 받도록 하는 자씨보살의 다라니가 있느니라.

자씨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바라옵건대 말씀하여 주십시오."

 

나모 바아바제 사키야 모나제 다타 아다야 알하제 삼먁삼못다야다냐타 아니제 아니 다야네제 바라바라모다라 바로기제 가라가라 마하삼마야

싯제 바라바라 모지만나니 사마라 사마라 사마라 아사마가 삼마야 모지모지 마하모지 사바하

 

자씨보살은 부처님께서 이렇게 다라니를 말씀하시자 다음과 같이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다라니는 큰 이로움이 있어 중생들로 하여금 악도를 벗어나게 할 것입니다."

자씨보살은 다시 원을 세우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미래세의 말법시대에 사는 어떤 중생이 이 다라니를 받아 지니고 외운다면, 그 사람은 설사 아비지옥에 떨어져야 할 숙세의 죄업이 있을 지라도, 제가 성불하면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꼭 구해 내겠습니다.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겠나이다."

자씨보살은 이렇게 말씀하시고 부처님의 발아래 절한 다음 기뻐하시며 물러나시었다.

 

<출처...대한불교 법상종 홈피 >

 

 

 

 

 

* 법상종(法相宗), 유가종...유식종 //

 

유식(唯識)은 대승불교의 심층심리학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법상종(法相宗)의 가르침으로 깊고 정밀한 인간통찰과 심리분석을 내포한 학설로, 산스크리트로는 비지냐프티마트라타(vijapti-mtrat)이다.

비지냐프티는 우리들의 인식(vijna)의 표상(表象)을 말한다. 마트라는 <다만> <뿐>을 나타내며 -t는 추상명사를 만드는 접미사이다. 따라서 유식이란 자기와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우리들의 인식의 표상에 불과하고, 인식 이외의 사물은 실재(實在)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십지경(十地經)》에서, ?이 3계는 심식(心識)에서 이루어지는 것에 불과하다?라고 하고 있다. 우리들에게 인식되고 있는 세계는 자기의 인식 안에 있는 것이고, 한편 자기의 인식 밖에 있는 것은 알 수 없기 때문에 세계란 자기 인식의 세계에 불과한 것이다.

 

 

1. 유식의 기원

유식학은 불타의 계통을 이어 받았지만 보다 넓은 시야에서 말한다면 인도의 명상의 전통 안에서 생겨난 학문이다.

인도에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좌선, 명상, 요가수행의 장구하고 심오한 정통이 있었으며, 불타이래 아득한 옛날부터 몇백 년 동안 끊어지지 않고 맥을 이어 숨쉬고 있었기 때문에 결코 불타가 창시자라거나 불교의 전매특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유식학을 형성했던 사람들은 학문적으로는 유가행파(瑜伽行派), 또는 유가행유식파(瑜伽行唯識派)라고 불려지고 있다. 유가(瑜伽)라고 하는 것은 요가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음의 한역(漢譯)이다. 즉 유가행파는 유식이 불교적인 요가, 명상실천을 오랫동안 쌓아오면서 싹튼 이론임을 나타낸다.

이를테면 유식의 기본적이 개념인 ‘아라야식’이나 ‘마나식’도 실제수행의 체험 안에서 생겼다. 다시 말해서 ‘임상(臨床)의 지(知)’이지 단순한 이론적 요청에 의한, 머리에서 나온 이론이 아니다. 유식이 오늘에 와서는 방대한 문헌을 가진 복잡한 이론체계로 변했지만 초기에는 수행자들의 ‘현장(現場)의 지혜(智慧)’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식은 그 안에 담긴 체험과 실제의 느낌을 알기 쉽도록 전문용어를 최소화하고 핵심적인 내용을 정확하게 설명하면 누구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으며, 명상을 조금이라도 체험하면 그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실감 있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있다.

 

 

 

2. 유식의 변천

유식의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말해서 마음이고 유식(唯識)이라고 하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것을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마음이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가를 심도 있게 추구한 이론이다.

불교는 붓다 이래 ‘마음’의 문제에 초점을 맞춘 사상이다. 원시불교나 대승불교의 중관(中觀)․공사상(空思想)에서는 마음을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5가지 감각과 의식(意識)의 육식(六識)구조를 파악하고 있다. 부파불교의 전개 속에서 심층 심리적인 통찰이 진전되어 유식에 이르러서 처음으로 6식에 ‘마나식’과 ‘아라야식’을 더해서 8식 구조론이 확립되었다.

 

유식의 중요한 용어인 ‘아라야’라고 하는 말은 원시경전인 『아함경』에도 있으므로 새롭게 만들어진 용어는 아니다. 그러나 유식사상이 확실하게 형성된 것은 기원 1세기에서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심밀경』으로부터이다. 그 외 부파불교의 아비다르마를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해석한 작자 불명의 『대승아비달마경』이 있으나 산스크리트 원본도 한역본도 남아있지 않다. 따라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해심밀경』이다.

그리고 보다 나중 것으로 추측되는 『능가경』이 있다. 이 경전은 달마 등, 초기 선종에서 상당히 중요시되었으며 선(禪)에는 의지하는 특정 경전이 없지만 만약 정한다면 『능가경』이라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후 3세기와 5세기에 걸쳐서 미륵(270-350)의『유가사지론』, 무착 (310-390)의 『섭대승론』, 세친(320-400)의『구사론』, 『유식20론』, 『유식30론』등 유식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이 출현했으며 유식학의 체계가 완성되었다.

 

유식은 본래 무명, 번뇌로부터 깨달음이라고 하는 의식․인격의 변용과정과 의미를 밝히는 실천적, 실용적인 이론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집대성되고 나서부터는 점차 실천으로부터 멀어져서 필요이상으로 난해하고 자기폐쇄, 자기충족적인 순수이론체계로 되었으며 문헌해석, 주석, 교리상의 의론(議論)이 전개되어질 뿐, 보다 실질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은 사라지는 경향이 강해졌다.

 

중국으로 들어가서 명상, 선정은 밀교, 천태, 그 중에서도 선의 전매특허가 되었으며 특히 선종에서는 『능가경』을 중시하는 파가 쇠퇴하면서 8식을 설하지 않는『금강경』을 중시했으며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를 표방하고 이론화를 혐오하는 파가 성행하게 되었고, 현장이 전한 법상종의 유식은 점점 순수이론이 되면서 임상과 이론의 생산적인 상호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선의 대표적인 존재로 간주되는 임제만 하더라도 선에 들어가기 전에 유식을 배웠으며 『임제록』의 설법에는 그 영향이 보인다. 그러나 임제의 경우도 실천에 치우쳤으며 유식을 기초로 한 선의 실제체험을 통하여 한층 더 깊고 상세한 심층심리학적 통찰을 전개하지는 못했다.

 

 

3. 무아와 윤회

유식에서 인간은 왜 생노병사의 고통을 되풀이하는 윤회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가? 어느 정도의 명상, 수행단계에 도달하면 해탈이 실현되는가의 탐구로부터 아라야식의 발견에 이르렀다. 유식에는 ‘윤회’라고 하는 사고 유형이 ‘아라야식’이라고 하는 개념의 토대가 되어있다.

 

인도에는 전통적으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한 번 죽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형태를 취해서 다시 태어나므로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윤회(輪回)의 개념이 있어, 고대 인도의 종교가들은 실체로서 변화하지 않고 그것 자체로 존재하는 아(我-Atman)가 환생을 거듭하여 고통에 찬 윤회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것으로부터 해방되어 탈출하는 ‘해탈(解脫)’을 목적으로 수행(修行)을 하였다.

하지만, 석존은 아트만(Atman)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무아(無我)’를 주장하여, 불교가 독자성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석존이 ‘윤회’라고 하는 인도의 전통적 사고방식에 대해서는 분명한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것 같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전통에 강한 구속을 받고 있는 이후 불교도들에게는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래서 후의 불교사상가들에게는 ‘실체가 없는 것이 어떻게 윤회하는가’라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아트만(Atman)이 있다면 윤회(輪回)는 부사의(不思議)한 것이 아니다. ‘아트만은 동일하지만 형태만 바뀌어서 어느 때는 소가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곤충이 되기도 하지만, 아트만은 일관되게 변화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석존은 아트만(Atman)은 없다고 주장하였으므로, 그 원칙은 부정할 수 없어, 아트만(Atman)과 같은 것은 없어도 윤회는 있다는 이 두 가지 명제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겼다.

 

‘윤회하는 것은 없다’고 말해 버린다면 이론은 간단해지겠지만, 그렇게 되면 중요한 사실도 동시에 지나쳐버리게 된다. 그것은 상당히 신화적이지만 생태학적인, 모든 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의미 깊은 직관을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고대 인도사상과 불교는 처음부터 단순한 개인을 초월하여 ‘초개인’적인 시점에서 인간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석존 이후의 불교사상가들은 윤회라고 하는 인도사상의 전통을 무시하지 못했으며. 석존의 ‘무아(無我)’라고 하는 사고방식은 불교의 근간이기 때문에 떼어놓을 수도 없었다. 이 두 사상의 모순을 조화시키기 위해서 가능했던 생각이, 이 생으로부터 다음 생으로, 또 그 다음 생으로 생명을 보전해서 가는 것이 무아(無我), 즉 실체(實體)는 아니라고 하는 사실과 모순되지 않는 형태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즉,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확정지을 수 있는 실체는 아니지만 생명을 보전해 가는 것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부파불교 안에서는 파에 따라서 ‘근본식(根本識)’, ‘유분식(有分識)’, ‘궁생사온(窮生四蘊)’등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렀다. 이것을 유식학파, 유가행파에서는 ‘아라야식’이라고 불렀다. 즉 실체로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생명의 순간에 행한 선악의 ‘업(業-karma:카르마)’을 다음 생(生)에 전하고 그 생(生)에서 또다시 다음 생(生)으로 전하는 윤회(輪回)의 매개인 카르마(karma)를 전하는 모체로서 ‘아라야식’을 상정함으로써 이론의 모순을 조화시켰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유식은 ‘임상(臨床)의 지(知)’일 뿐만 아니라 ‘이론적 요청’이기도 하다. 윤회(輪回-생명의 연속성에 대한 직관)와 무아(無我-존재의 비실체성에 대한 자각)를 통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이론적 요청에 의해 아라야식(생명정보에 대한 이론)이 탄생해 온 것이다. 이것이 유가행 체험을 하기 위해서 상정된 것뿐이라면 이론적 요청에 의한 공허한 억지일 것이다. 그러나 ‘아뢰야식’은 체험이 뒷받침된 임상적인 지식이 포함된 것이다.

 

 

4. 구사(俱舍)와 유식

석존 이후 기원전 3세기에서 2세기경 불교는 부파로 분열되었으며, 여러 부파 안에서 비교적 평이한 석존의 말들은 종교 철학적으로 세밀한 분석이 가해져서 체계화되었다. 이것을 ‘아비다르마’라고 부른다. ‘아비(대해서)’ ?다르마(법, 존재)?라는 의미다. 현대적으로 말하면 ?존재에 대한 분석?이다.

이 흐름의 대표적인 문헌을 『아비다르마 고샤(아비다르마의 장)』한역(漢譯)으로는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약해서『구사론(俱舍論)』이라고 부른다. 한국에서는 이 구사론과 유식(唯識) 30론(三十論)의 주석서인 『성유식론(成唯識論)』이 불교의 이론적 연구의 기본 문헌으로 되어 왔다.

구사론(俱舍論)에서 이루어진 상세한 심리분석은 유식에 거의 완전하게 취급되어 있다. 구사론과 유식 30론이 동일한 저자(著者)인 세친(世親)에 의해 쓰여졌다는 통설에 의하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론을 따지지 말고 침묵하고 앉으라’고 하는 선과는 달리 구사․유식의 흐름은 다소 지나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론적으로 분석, 설명하려 한다. 그러나 초기 유식에서는 실천(實踐)과 이론(理論)사이에 상당한 균형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번잡한 이론체계로 되고 임상, 수행과는 멀어졌으며 게다가 그 반동(反動)으로 선(禪)은 이론경시, 임상편중의 방향으로 향하게 되었다.

 

 

5. 대승불교와 유식

서기 1-2세기경 부파불교에 대응해서 ‘대승불교’가 흥성했다. 법화(法華)사상, 반야(般若)사상, 공(空)사상, 화엄(華嚴)의 유심(唯心)사상, 정토(淨土)사상, 그리고 대승사상으로서 대단히 중요한 여래장사상 등이 일제히 출현했다. 유식사상은 이와 같은 대승불교의 제조류(諸潮流) 중(中)에서도 주로 보살사상, 공(空)사상, 화엄경의 유심사상과 부파불교의 아비달마의 전통을 흡수, 집대성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불교사의 통설이다.

 

유식(唯識)은 우주의 궁극적 실체는 오직 마음으로 외계의 대상은 단지 마음이 나타난 결과라는 불교사상이다. 여기서 유식의 '식(識)'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말해서 마음이고 유식이라고 하는 말은 글자 그대로 '오직 마음''모든 것은 마음에 의한 것이다'라고 하는 이 학설의 기본적인 주장을 요약한 명칭이다. 유식은 모든 것을 마음의 작용으로 보고 마음이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가를 심도 있게 추구한 이론이라는 의미에서 진정한 심리학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이는 마음의 구조와 그 심리작용 등을 잘 인식하고서 활동하면 궁극적인 목적인 성불(成佛)의 단계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원리와 그 수행(修行)을 강조한 내용이라고 할 수가 있다.

 

세친(世親)의 《유식삼십송》에서 정립된 사상으로 유가학파의 근본 철학인 유식사상은 일반적으로 바깥에 있다고 생각되는 대상들은 인식작용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고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에 저장되어 있는 종자로부터 생긴 것으로 견분(見分)이 상분(相分)을 인연하여 생긴, 결국 자기 자신의 인식수단으로 자신을 보는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상은 결정적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인식을 통해 비로소 존재되는 것으로 생각되는 2차적(二次的)인 현상일 뿐이다.

 

유식설의 특징은 마음을 8종으로 분류하여 안식(眼識)․이식(耳識)․비식(鼻識)․설식(舌識)․신식(身識)․의식(意識)․말나식(末那識)․아뢰야식 등 8식을 세웠다. 이중 앞의 5식을 전오식(前五識)이라 하고 뒤의 3식을 각각 제6식․제7식․제8식이라고 한다. 제7식(말나식)․제8식(아뢰야식)은 무의식의 영역에 속한다.

유식관은 구체적인 관찰법으로 요가수행을 통해 교리적으로 조직되고 체계화된 것으로, 모든 존재의 양상을 마음속으로 환원하여 앞에서 말한 3종으로 분류해 3성설(三性說)을 내세우고 있다. 3성은 마음의 본래적 양상인 동시에 포괄적으로는 존재의 본래적 양상이다. .

 

이중에서 가장 큰 특징은 아뢰야식을 온갖 존재를 낳는 근본식(根本識)으로 삼고, 그 위에 말나식과 의식을 세운 점이다. 아뢰야식이란 장식(藏識)으로 번역되고 일체종자식(一切種子識)으로 별칭되듯이, 그 속에 과거에 지은 업의 영향이 종자로 보존되는 동시에 현재․미래에 걸쳐 자기의 심신 및 자연계를 낳는 근원체이다. 마음 이외에 사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식설에서는 마음을 객관인 소취(所取)와 주관인 능취(能取)로 이분하는데, 능취로서의 마음인 견분(見分)이 사물의 모습으로 유사하게 드러난 소취로서의 마음인 상분(相分)을 바라본다고 한다.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마음이 마음을 본다는 인식구조설에 근거하여, 모든 것은 마음의 드러남에 불과하며 자기 및 외계를 실체라고 보는 마음에서 괴로움과 오류가 생긴다고 주장한다.

 

이밖에 3성(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의타기성:依他起性․원성실성:圓成實性)을 부정적으로 표현한 상무성(相無性)․생무성(生無性)․승의무성(勝義無性)의 3무성설도 유식설을 구성하는 중요한 사상이다. 유식설은 식(識) 이외의 존재를 부정하여 ?식만 있고 대상세계는 없다'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을 주장하지만, 궁극의 경지에서는 그런 식마저도 존재하지 않는 식무경무(識無境無), 즉 ?식도 없고 대상세계도 없다'는 입장에 서서 반야(般若)의 공사상(空思想)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다만 요가라는 실천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도달하고자 하는 근본자세에서 보면, 수행단계에서는 적어도 마음, 즉 식의 존재를 인정하며 그 식이 존재하는 양상을 수행에 의해 오염된 상태로부터 청정한 상태로 변혁하기를 추구한다. 이런 의미에서 아뢰야식 속의 온갖 오염된 종자를 소멸하고 청정한 종자만으로 가득 채우는 전의(轉依)가 유식설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세친의 10대 제자인 호법(護法)과 안혜(安慧) 등은 주석서를 만들었으며, 호법은 《성유식론(成唯識論)》을 지어 유식사상의 기반을 다졌다. 이것이 중국에 전해져 현장(玄)과 그의 제자 규기(窺基)가 창립한 유식종(唯識宗)을 법상종(法相宗)이라고도 한다. 유심사상(唯心思想)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은 있으나 유심사상이 《화엄경》과 기신론의 진여연기설에 기초를 두었다면, 유식사상은 아뢰야식의 나타남에 근거한 인식론적 철학적 해명이며, 유심사상은 우주론적인 존재인 진여(眞如)에 근거한 존재론적인 경향을 띠고 있다.

 

한국의 경우 신라시대 일찍이 유가업(瑜伽業)이라는 유식학문이 화엄업과 함께 정립되어 유식사상의 대가를 배출하는데, 원측(圓測)․원효(元曉)․태현(太賢) 등이 그들이다.

 

<출처...대한불교 법상종 홈피 >

 

 

 

 

* 육환장(六環杖), 석장(錫杖)...중국 당나라 현장, 삼장법사 동상 //

 

육환장(六環杖)은 지옥,아귀,축생,수라,사람,하늘 육도를 상징하며, 육도를 윤회하는 뭍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또한 지옥문이 한 해에 한번 열린다는 우란분절일에 육환장으로 지옥문을 열어 지옥중생을 구제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습니다. 구세구난 뿐 아니라 뭇 생명에 대한 자비와 법을 상징하며, 전쟁을 갈무리하는 승군지장(勝軍地藏)의 형상도 출현하였다.

 

* 구리돛대(동장)의 모양과 형태는 당나라, 현장, 삼장법사의 육환장과 흡사함...승군지장(勝軍地藏)을 형상화???

 

 

◉ 보물 제99호...천흥사지 당간지주에 대해서 궁금한데요.

 

1751년 수산 이종휘선생의 <동장기-銅檣記>에서

불교의 당간이 아닌,

한나라 마원동주(馬援銅柱-교지...베트남지역)처럼 국경,접경지역에 세운

강역비, 강계비, 척경비, 정계비, 위령비로 이해합니다.

중국에서는 국경의 접경지역에 이런 동주(銅柱),동장(銅檣-구리돛대)을 세운걸로 이해되는데...

 

한국의 역사학계에서는 무조건 당간으로 해석하는데

무리한 해석이 아닌지요???

 

전쟁에서 죽은자를 위로하고,

흉흉한 민심을 안정시키고...

천안 보협인석탑처럼(국보209호) 중국 전홍숙이 전쟁에서

억울하게 죽은 영혼을 달래고 천하대안을 위해서...

위령비+강계비+척경비의 개념이 강합니다.

 

이에 대해서 궁금한데 한 수 지도 바랍니다.

그리고 윗글...“대다수 남한 땅, 옛 백제의 영역에 남아있다”에 대해

더욱 자세히 보충설명을 바랍니다.

 

천안 성거산 천흥사 당간...동장(銅檣)의 위치는

1. 신라와의 국경 접경지역

2. 백제 첫도읍지 위례성 바로 밑

3. 신라 대당교역로...당항성로 교통의 요충지입니다.

 

* 보물 제99호...천흥사 <동장기> 원문과 해석은

제 블로그에 글을 올렸습니다. 감사합니다.

 

吾心竹...(http://blog.daum.net/js8888)

 

 

 

 

동주 [ 銅柱 ]

 

구리로 만든 기둥이라는 뜻으로 길잡이와 국경(國境) 등을 표시하기 위해 세우는 기둥을 말함.

≪후한서(後漢書)≫ 마원 열전(馬援列傳)에 마원이 교지(交趾)를 정벌하여 평정하고 동주를 세워 한 나라의 땅임을 표시한 일이 있었음. [유사어] 동표(銅標).

 

 

용례 :

 

임금이 말하기를, “유원외가 하는 말이 ‘나도 마땅히 해야 한다. 또 부산에다 동주를 세워 마원의 고사와 같이 해달라.’ 하기에, 내가 농담으로 ‘부산은 왜노가 우글거려 세울 만한 곳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하였다. ; 上曰 劉員外謂我亦當爲 且立銅柱於釜山 如馬援故事云 予戱答曰 釜山倭奴遍滿 無可立之地 [선조실록 권제52, 6장 앞쪽, 선조 27년 6월 3일(경술)]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동장기(구리돛대)...수산 이종휘(1721~1797).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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