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천안삼거리(천안대로, 일명-마틴의 거리)...6.25전쟁 천안지역 회고

吾心竹--오심죽-- 2012. 5. 15. 09:52

<<< 천안삼거리...6.25전쟁 천안지역 회고...천안대로, 일명-마틴의 거리-한국전쟁, 천안 7.8전투 기념탑 >>>

  

* 6.25전쟁 회고... 천안지역, 천안 7.8전투...아래 첨부파일 다운로드 참조하세요 //

 

 

6.25전쟁 회고.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hwp

 

 

 

* 삼남의 관문...오룡쟁주형 천하대안의 땅 천안, 천안삼거리 // 

 

 

* 도리티고개 방향 // 

 

* 천안박물관의 모습 // 

 

* 천안삼거리...일명, 삼룡(마틴)사거리 // 

 

* 천안 7.8전투, 마틴공원 기념비 // 

 

 

 

 

 

 

 

 

 

 

 

 

 

 

 

 

 

 

 

 

 

 

 

 

 

 

* 천안 마틴공원 // 

 

 

 

* 천안 7.8전투 사망자 및 실종자...98명의 명단...사망,실종자가 129명으로 최종 확인됨 // 

 

* 1950.7.8 마틴대령과 천안전투 전황 안내 // 

 

 

 

* 한국전쟁(6.25) 천안전투 전몰 미군장병 기념비 // 

 

 

 

 

 

 

 

 

 

 

 

 

 

* 천안삼거리와 접란 마틴공원...6.25전쟁, 한국전쟁...천안 7.8전투 기념탑 // 

 

 

 

 

 

 

 

* 천안삼거리 비 // 

 

 

 

*1950년 6.25(한국전쟁) 7.8 천안 전투전황 안내비...마틴대령 전사 //

 

 

 

 

* 천안박물관 전경 // 

 

 

 

 

* 천안삼거리초등학교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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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 6. 25 전쟁이 일어나서 1953. 7. 27

 

휴전협정이 조인되는 3년 동안 인명피해 실상이다.

 

 

 

천안지역 사망자는

폭격사망 95명, 좌익측 사망 78명, 우익측 사망 52명,

천안 군경 전사자 215명이다.

학살자 64명(전국 6만명 중), 납북자 282명(전국 8만명 중)

 

그리고 전국 사망자는

국군전사자 25만7천명, 유엔군 15만명(미군 4만명),

민간인 사망자 24만5천명, 양민학살 13만명,

민간인 행방불명 30만명, 피난민 700만명,

전쟁고아 10만명, 전쟁미망인 30만명,

인민군 사망자 52만명, 중공군 사망자 90만명이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국토를 유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래가 기준이 될 과거까지 삼켜 버린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반성도 할 수 없고 혁신도 할 수 없다 <징비록>

 

 

아픈 상처를 겪고 깊이 멍들고 피 맺힌 마음들을 용서와 화해 화합으로 아물게 하려는 뼈저린 노력은 입에 담기도 어렵다.

아픈 상처를 입지 않은 당사자들이 아닌 어느 누구도 입에 담기 괴로운 사실이다. 역사는 아프게 기억 되어야 한다.

다시는 6.25전쟁 같은 비극 민족상잔은 없어야 한다.

 

 

 

6월25일 새벽 북한은 조국통일 해방전쟁이란 남침적화통일 전쟁을 불법으로 도발하였다.

 

6.25전쟁, 6.25사변, 한국동란이란 민족상잔 전쟁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란 국가가 같은 민족 대한민국을 불법, 남침 도발한 것이다.

 

천안은 7월8일 인민군에 점령되어 9월 25일까지 점령되어 79일 동안 인공치하에서 공산당 빨갱이들의 만행을 겪었다.

 

6월28일 3일만에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하는 어이없는 일방적인 전쟁이다.

아직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은 대한민국이 북침하여 일으킨 전쟁이라 우겨대는 럭비공같은 정권이다.

 

유엔과 세계는 북한의 남침을 불법 침략전쟁으로 규탄하고 즉시 7월1일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보병 제24사단 제21연대 스미스 특임부대를 한국 서부전선으로 이동 7월3일 오산전투에 투입한다.

 

국군은 평택에서 부터 동부, 중부 전선을 분담하고 경부선을 중심으로 서부전선은 미국 육군의 지연작전 지역이 되었다.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 당하고 한강이 폭파되고(9/28) 수원이 적진에 들어가고 계속 인민군에 밀리는 전황에서 후퇴작전이 지시 되었다.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은 경찰대원 234명을 완전무장하여 전투병력체제로 정비하고 피난민을 가장한 후방 인민군을 검색하여 처리하면서 주요시설물 경계 이동순찰 경비체계 민심안정계도 지서 보안조치를 강화하면서 치안 확보에 총력을 다 하였다.

 

천안 유치장에 수감되어있는 범범자들 85명과 보도연맹 22명을 처리하라는 지시였다. 천안경찰서 김종대 서장은 전향 각서를 받은 좌경인물들인 보도연맹 소속 관리 대상자들을 지혜롭게 가려 처단하라는 지시를 받고 모두 훈방조치 했다고 한다.

 

평택, 성환, 안성방면에서 후퇴하는 미군육군 보병 제24사단(사단장 딘소장) 제21연대와 제34연대 병력은 읍내를 지나 도리티고개 쪽으로 철수하였다.

아산방면으로 우회 침입하는 인민군 병력은 탱크를 앞세우고 백석동 신방동 방면과 후퇴하는 미군을 뒤따라 성거방면에서 천안읍내로 진입하면서 성환방면 부대리 쪽에서 읍내로 철수하는 미군 제34연대 3대대를 포위 압박하였다. 제21연대 미군들은 안성으로부터 성거방면에서 전투없이 도리티고개로 철수하였다.

 

7월7일 밤 천안읍내는 철수하지 못한 제34연대 3대대 병력을 돕기 위해 도리티고개에서 포병들이 포탄과 조명탄을 쏘아 불야성을 이루었다.

삼성리 주민들의 전하는 말에 따르면 포탄피가 산더미를 이루었다고 한다. 전쟁 후에는 탄피가 큰 돈이 되었다고 한다.

 

마틴 연대장은 7월8일 아침까지 철수하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부하들을 구출하기 위해 직접 작전에 뛰어 들어야 했다. 아침 8시 마틴대령은 구성동길 민가 앞에서 인민군 탱크와 접전하면서 바주카포로 대항하였으나 탱크에서 마주 쏜 포탄에 맞고 온 몸을 구성동 길거리에 흩어져 산화하였다. 연대장은 임명 받은지 14시간만에 전사하였다.

 

6.25전쟁 최초 전사한 연대장 대령이었다. 연대장을 잃은 제34연대 3대대는 7월8일 아침 천안읍내를 인민군에서 빼앗기고 구성동, 삼룡동 천안삼거리를 지나 도리티고개로 일부만 철수하였다.

 

천안 7.8전투에서 인민군에게 포위되어 철수후퇴하지 못한 미군 34연대 3대대 장병 168명이 포로되어 천안읍사무소 이층에 감금했다가 북쪽으로 이송되었다.

 

인민군과 피난민을 구별할 수 없는 이런 전투이었고 부대간 서로 연락하는 통신망 전선이 피난민들 보따리 묶는 끈으로 사용하기 위해 절취되는 이런 전투였다.

 

일본에서 항공편으로 급파된 미군보병들은 인민군의 전력과 전황을 너무 가볍게 오판했다는 실수를 인정하는 전투였다. (극동사령관 맥아더장군)

 

천안경찰서 대원들은 7월7일 미군들과 같이 후퇴하여 연기군 금남면 전투에서 미군들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고 인민군들과 첫 전투에 참전한다.

이 전투에서 오인영, 유인용, 임치수, 서태석 순경이 전사하고 윤재용, 전봉학 순경이 부상을 입었다. 천안경찰서 대원들은 대구에 집결하여 충남 전투 경찰대에 편입되고 낙동강전투에 합세한다.

 

천안은 7월8일 아침8시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에게 완전 점령되었다. 처음보는 인민공화국(북한) 붉은 기가 천안읍내를 비롯해 면면촌촌에 79일 동안 내 대에 꽂혀졌다.

 

천안군 인군위원회가 조직되고 면 단위마다 인민위원장이 임명되면서 공산치하가 실시되었다.

 

먼저 1946년 2.9의거에 앞장섰던 태극동맹대원 인사들이 체포, 감금, 고문을 겪어야 했다. 태극동맹 관련 가족들은 갖은 위협을 당했다.

 

공산당 빨갱이들은 월남가족, 공무원, 군경가족, 기독교인, 지식인 인텔리 유지와 우익인사들을 닥치는 대로 체포, 구금, 고문, 테러, 협박, 살상 갖은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리고 인민위원회 정치작전대, 내부서, 인민청년대, 농민위원, 노동당, 여성동맹, 문화연맹, 예술동맹, 학생동맹, 군사위원회, 정치보위부 등의 빨갱이 조직에서 활동시킬 대상자들을 강제로 포섭하여 가담시키고 붉은 완장을 띠고 공작 선동작전에 활동하도록 지시하였다.

 

천안읍사무소 이층회의실(동남구청 회의실)에 읍내 면촌에서 연행해 온 우익인사 150여명이 수감되었다.

 

야간에는 어린이와 노약자 부녀자들을 부락단위로 매일 소집시켜 순한글로된 인민일보 신문을 나누어 주고 김일성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젊은이들과 장년들을 선발하여 북괴의용군에 강제로 징집하여 보내고 전쟁 보급물품을 운반하도록 강제 노역시켰다.

 

시내주변과 주요 도로변 산야에 지하통로와 전투참호를 구축하는 노역에 강제 동원했다.

 

부녀자들은 취사노역에 동원하고 의사와 약사들도 인민병원과 인민군 전상자 치료에 동원되었다.

 

공산당 빨갱이들은 남한으로 밀고 내려만 오면 논밭뙈기 하나 없고 헐벗고 굶주린 농민들이 인민군전쟁에 동조 합세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공산당 빨갱이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때마침 전쟁이 터지기 몇 년 전에 한국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논밭 없는 농민들에게 농토를 이미 나누어준 것이다. 농촌인구가 85% 이상인 농촌실정에서 농토없는 농민들은 지주의 농토를 빼앗아 나누어 주겠다면 공산당의 선심 공세에 모두 넘어갈 줄 알았다.

남한 농촌 인심은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머슴이나 남의 집살이하는 이들이나 재산이 전혀없는 이들만 무엇인지 모르고 붉은 완장을 띠고 앞잡이 노릇을 하였다.

 

남한 농촌 인심은 농민위원회 위원들이 현물세를 걷으려는 작태를 보고 더 확실하게 등을 돌렸다.

 

농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에 현물세를 부과한다는 것이다.

논밭에 경작되어 결실 중에 있는 곡식 이삭의 알맹이를 하나하나 세어 기록하는 모습은 농민들에게 완전히 외면하게 만들었다.

 

공산국가에서는 개인 소유농사를 인정하지 아니하고 협동농장에서 각종 농산물을 공동노력으로 재배하여 수확 후 우선 현물세를 내야 한다. 협동농장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현물세 62.5%는 공산당이 징수하고 나머지를 경작농민에게 분배한다. 그것도 경작한 현물로 모두 분배받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의 형편에 따라 다른 농작물로 분배되는 것이다.

 

현물세는 총생산량에서 종자대 3%, 사료대 1%, 화학비료대 4%, 농기계 사용료 2%, 관개사용료 4%, 농기구 구입비 10%, 협동농장시설 확충비 30%, 관리운영비 7%, 원호기금 1.5% 등 총계 62.5%이다.

 

땅을 소유하고 있는 농민들은 어이없는 놀음에 기가찰 지경이었지만 꿀 먹은 벙어리였다. 불만을 터트리면 반동으로 즉시 체포 당하기 때문이다.

점령자 공산당 빨갱이들의 횡포가 날로 심해지자 읍내는 모두 시골 산촌으로 피난하여 텅텅 비어 있어 노역 동원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읍내를 떠나 산촌으로 피신한 피난민들은 읍내로 들어오지 않고 계속 산촌에 은신하고 동태만 살피고 있었다.

 

전투현장에 쌓여있는 폐허 잔재들을 치울 수 있는 일꾼들이 전무하였다.

인민군들과 공산빨갱이들은 노획한 차량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농촌부락을 순회하며 설득 권고 공갈 협박하는 방송을 계속하였다.

 

길목 검문소에는 인민군과 인민위원회에서 배치된 검문관이 읍내에서 시골로 자유롭게 왕래할 수 없게 하였다.

신분을 따지고 트집을 잡아 반동계급으로 몰아 세우면 곤욕 수모를 겪게 된다.

 

인민위원회에서 발행하는 공민증만이 인정되는 실정이다. 외모나 말씨 말트집을 잡아 신분을 분석하였고 손을 만져보고 노동자 농민과 자본가 지식인 인텔리를 구분하기도 하였다.

 

손이 부드럽고 깨끗하면 자본가, 인텔리, 지식인, 공무원으로 판단하였다. 손바닥이 거칠어지게 만들려고 흙속에 손을 묻어서 부르트고, 터지게하여 노동자, 농민의 손같이 만들어야 했다.

 

인민군 보급의용군으로 징발되지 않으려고 공산당원의 눈을 피하거나 눈에 거스르지 않도록 눈치를 보기도 했다. 심지어는 반동분자 가족들로 감시받는 이들은 산촌으로 숨거나 피신하고 땅굴 속에 숨어 지내야만 했다.

 

전혀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남한을 단숨에 속전속결 무력으로 밀어부처 공산화통일을 하려는 통일전쟁 전략은 힘겹게 되어 갔다.

 

낙동강 이남 부산만 남겨놓고 곧 끝낼 전쟁인 것 같았지만 전황은 인민군에게 힘겨운 전쟁 양상으로 돌변하였다.

 

유엔과 세계는 북한인민군이 일방적으로 벌인 남침도발 전쟁을 침략 전쟁으로 규정하고 유엔군이 신속하게 참전하게 되었다.

무기병력 참전 16개국과 물자 의료 인도적 지원국 6개국이 자유 대한을 북한공산당 인민군으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자유 평화 세계정신으로 속속 부산에 도착하였다.

 

세계는 유엔이 합법정부로 인정하는 자유 대한민국을 저버리지 않았다.

7월3일 일본 규슈(九州)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 육군보병 제24사단 제21연대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제일 먼저 오산전투에 투입되었다.

 

호주 비행기라는 쌕쌕이 제트기와 미국 공군 무스탕전투기가 천안상공을 누비고 지나 북쪽으로 향했다. 인민군 공군 비행기는 처음에는 보였으나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완전히 유엔군이 제압하였다.

 

호주 비행기라는 쌕쌕이 제트기가 흑성산 상공에서 방향을 천안읍내 쪽으로 향해 내려 꽂으며 기관총을 쏘아대고 폭탄을 내려 뿌려대었다. 조금후에는 천안 역사가 불타고 인민군 보급물자를 실은 화물차량들이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검은 연기가 타올랐다. 천안역 근방에서 불 타오르는 화기와 연기는 천안근방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다.

 

태극동맹 우익청년들은 암암리에 산속에 숨어들어 서로 동정을 살피고 전황을 서로 알려 주었다. 태극동맹 청년대원들은 국군과 유엔군이 전승하는 전황을 라디오로 듣고 입소문 작업을 통해 민심을 안정시켰다.

 

천안역 철로반에 소속되어 있는 동지들은 화물열차 작전을 감행하여 인민군 수송작전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7월까지면 인민군 통일남침전쟁이 모두 끝날 것이라는 전황은 전혀 다르게 돌변했다. 낙동강 전선이 무너진 인민군들과 인천상륙작전으로 후방전선이 혼란에 빠지면서 인민군들은 퇴각명령을 지시하게 된다.

 

퇴각작전으로는 체포 감금해 놓고 있는 우익인사들 무차별 모두 처형하라는 작전이 지시로 되었다. 알려진 날은 26일에 우익인사 모두를 처형시킬 계획이었다. 소식이 입소문으로 들려오면서 천안읍내는 긴장이 고조되었다. 마침내 이틀을 당겨 9월25일에 국군과 유엔군이 병천 방면에서 천안으로 입성하면서 천안읍내는 공산당 치하 79일이 해방되었다.

인민군들은 모두 북쪽으로 도망가고 일부는 산속으로 잠입하였다.

 

아직 경찰이 입성하지 않은 치안공백을 태극동맹 우익단체들이 접수하게 됐다. 천안읍사무소에 구속되어 있는 우익인사들은 살해 당하기 하루 전에 모두 태극동맹 청년대원들에 의해 석방됨으로 제2의 인생을 다시 살게 되었다.

 

9월25일 천안이 해방되면서 태극동맹 우익단체들은 악랄한 공산당 빨갱이들을 모두 체포해서 천안읍사무소에 이층에 구금하였다.

구속된 공산당 빨갱이들은 천안경찰서에 인계되었고 천안경찰서는 전향각서를 받고 훈방하고 석방조치하였다.

 

1946년 2월9일에 우익인사들을 테러하려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구속된 좌익 빨갱이 공작원들을 태극동맹 단원들은 소탕하여 천안경찰서에 인계하였고 천안경찰서는 지혜롭게 전향각서를 받고 훈방하였었다.

 

몇몇 좌익 빨갱이들은 소탕현장을 탈출하여 북한으로 도주하였다. 7월8일 드디어 천안에 다시 나타난 빨갱이들은 2.9반공의거 인사들에게 보복 만행을 저질렀다.

 

인공치하에서 2.9의거 21명 동지들이 공산당 빨갱이들에 체포되어 언제 어디서 학살되었는지 알 수 없이 당한 사실은 어처구니없는 비극이었다.

 

천안지역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좌우익 보복사건은 거의 없었다. 그런대로 평화적인 좌우익 격돌이었다.

 

후퇴하면서 만행을 저지르는 인민군 패잔병들을 토벌하고 공산당 빨갱들의 보복으로부터 우익인사들의 생명을 지켜낸 광덕면 결사대 의거는 기억될 사실이다.

 

좌익들이 들어와 우익을 도살하고 우익들이 들어와 좌익을 보복 살해하는 보복 톱질 살상살해는 6.25전쟁에서 숨길 수 없는 비극적인 뼈아픈 사실 이었다.

 

6.25톱질 비극은 동족상잔의 비참한 뼈아픈 역사다.

아픈 상처를 겪고 깊이 멍들고 피 맺힌 마음들을 용서와 화해 화합으로 아물게 하려는 뼈저린 노력은 입에 담기도 어렵다.

 

아픈 상처를 입지 않은 당사자들이 아닌 어느 누구도 입에 담기 괴로운 사실이다. 역사는 아프게 기억 되어야 한다.

다시는 6.25전쟁 같은 비극 민족상잔은 없어야 한다.

평양을 탈환한 국군과 유엔군은 국토통일의 꿈을 이루기 직전 중공군 수십만이 압록강을 넘어 오면서 전세가 바뀌었다.

 

인해전술로 전세를 잡은 중공군은 남쪽으로 밀어 부쳤다.

1.4후퇴를 해야 했다.

 

인공치하 79일을 겪은 백성들은 모두가 들고 일어나 남쪽으로 피난길에 올랐다.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가면 살 수 있다는 생각은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천안읍민들도 천안역으로 몰려 들었다. 남쪽으로 향하는 기차면 무조건 올라 타고 보았다. 치안질서가 부재한 상태에서 피난행렬에 끼어들어 남쪽으로 마냥 걷기도 했다. 역전에 있던 천안경찰서는 피난민들의 휴식처였고 피난 행선지의 정보 교환소였다.

 

전혀 천안 근처의 지형 사정을 모르는 피난민들에게 안내 역할을 하면서 협조하였다. 잃어버린 가족들을 찾을 수 있고 만날 수 있는 곳이 경찰서였다. 역전에 있는 천안경찰서는 피난민 수용소였다.

 

천안경찰서 대원중 이석종 중대장 등 20여명은 미8군 경비경찰대 소속으로 수복지 외곽경비에 투입되었다. 김병일 경사와 12명 대원들은 미8군에 편입되어 개성까지 북진하는 전투에 참여하였다. 천안경찰서 대원들은 전후방 없는 전황에서 지혜롭게 대처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6.25 피난 때에는 인민군들도 한민족 동포인데 못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 해서 가까운 곳으로 피난했었으나 인민군 빨갱이들의 만행을 겪은 백성들은 힘없는 나라의 설움을 머금고 더 멀리 피난길에 오르려 했다.

철도길, 도로길 모든 남쪽으로 가는 길은 차고 넘치고 보따리 들고 이고, 메고, 지고 우마차에 타고, 구루마를 끌고 남쪽만을 향하였다. 남쪽만이 살 길 이었다. 우리들이 겪는 두 번째 피난 길이였다.

 

역사를 잊으면 미래는 없다.

전쟁은 사람을 죽이고 국토를 유린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미래가 기준이 될 과거까지 삼켜 버린다.

과거를 잊어버리면 반성도 할 수 없고 혁신도 할 수 없다 <징비록>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북한) 그 만행을 일으킨 대상국이 결코 감상적인 대상이 될 수 없다.

럭비공같은 상식으로 판단할 수 없는 안보절대 대상국이 그때 모습으로 우리 앞에 존재하고 있다.

 

공산주의 발톱을 사회주의 주체사상이란 허울로 화장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존재하고 있다.

 

무조건 북한을 옹호하면서 평화를 내세워 국방력을 약화시키고 안보의식을 해이하게 조장하는 종북세력을 분쇄해야 한다.

 

모호한 대북관, 안보관은 건설적일 수 없다.

안보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다.

자유와 평화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평화는 누릴 자격이 있는 나라와 민족 백성에게 주어진다.

 

안보 없으면 민생과 복지도 없다.

통일은 그 후에 있다.

통일은 우리 민족 백성들의 비젼이다.

 

 

 

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

실 장 김 성 열

 

 

 

 

6.25전쟁 회고.천안시역사문화연구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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