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安歷史文化硏究

윤이빙, 윤헌규, 윤영진...파평윤씨 태위공파 문중 문서...홍주 유림 정문초

吾心竹--오심죽-- 2012. 5. 31. 11:50

<<< 윤이빙, 윤헌규, 윤영진...파평윤씨 태위공파 조부님 문서>>>

 

...홍주군 유곡면 대부동-현재:홍성군 장곡면 대현리...홍주 유림 정문초 첨부 //

 

* 윤이빙<尹以聘, 1650.11.4~1733.10.10, 파평윤씨 태위공파 25세손(24대) > //

  ...절충행룡양위 겸 조산대부 부호군(折衝行龍讓衛 兼 朝散大夫 副護軍)

  ...묘소 : 충남 홍성군 장곡면 상송리 반송부락

  ...부인 : 令人 晉州柳氏(1648.11.15~1714.3.9)

  ...형 윤기빙, 동생-윤주빙, 윤상빙, 윤탕빙 //

 

 

 

 

 

 

 

 

 

 

 

 

 

 

 

 

 

 

 

 

 

 

 

 

 

 

 

 

 

 

 

 

 

 

 

 

 

* 윤헌규<尹憲圭, 휘-德成, 1817.8.9~1872.4.27, 30세손(30대)>

...증 통정대부 돈녕부 도정(贈 通政大夫 敦寧府 都正)

...충남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홍주군 유곡면 대부동-洪州郡 酉谷面 大釜洞)

...유곡면 대곡동 화민(酉谷面 大釜洞 化民) 윤헌규...오심죽의 5대 조부//

...화민-예전, 자기 조상 산소 있는 백성 고을 대하여 자기 이르던 말.

 

 

 

 

 

 

 

 

 

 

 

 

 

 

 

 

 

 

 

 

 

 

 

 

 

* 오심죽의 조부...윤병문(휘-학성...1893~1974)께서

  조부(윤영진)님 글...홍주 유림 정문초...책으로 다시엮어 만듬 //

 

* 홍주 유림 정문초(洪州儒林呈文草)...1880년 경진년, 고종 17년 작성, 42세 //

...윤영진-尹英鎭, 諱 泰熙, 國賢, 1839.1.2~1892.6.14, 54세...태위공파 31세손(30대)...오심죽 고조부 //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묘소-성환읍 학정리...탄약창 부대공사시 이전 실전됨 //

...부인 : 정부인 밀양손씨(1841.4.20~1911.3.4...묘소-직산현 여단 남쪽...화장모심)

 

 

 

 

 

 

 

 

 

*금년 정월 자면내(今年正月自面內)...1880년 경진년, 고종17년 작성함...윤영진, 고조부 나이 42세 //

 

 

 

홍주유림정문초...尹英鎭 作...1880년.hwp

 

 

홍주 유림 정문초(洪州儒林呈文草)

 

 

삼가 생각컨대 사람이 지행(至行)의 의덕(懿德)이 있으면 반드시 공경하여 우러러 보고 듣는 것이라 비록 먼 후세에 있었던 일이라도 또한 흠모하여 흥기(興起)하는 것이니 이것은 본 바탕에 있는 인정에 모두 함께 있는 것 입니다.

 

하물며 한 고을에서 같은 시대 사람으로 보고 들어 알고 있는 것을 조금도 속이지는 못할 것 입니다. 그리하여 그 사람을 표창하여 현양(顯揚)하려고 하오니 국가에 보고하여 이 사람으로 하여금 후세 모범이 되게 하는 것이 아마도 공적(公的)인 마음인줄로 아옵니다.

 

백성과 같은 시골에 살고 있는 황여윤(黃汝潤)으로 말하자면 효도하는 도리를 다한즉 본래 천성적으로 그러합니다. 본래 궁벽한 고을에서 살아 가난하게 살아 생활형편도 고단하기 짝이 없고 또한 학문조차 배울 힘이 없었으나 오직 그의 어버이를 사랑하는 일념이야말로 지성에서 나왔습니다.

 

그가 일찍이 어머님을 여의고 오직 아버님에 의탁하며 신성혼정(晨省昏定) 하는 범절과 하선동온(夏扇冬溫) 하는 절차를 억지로 하려는 것이 아니고 옛사람에 비할만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그의 아버지께서 병환이 있어 도무지 아무것도 보이지 아니하여 황여윤은 좌우로 부축하며 보호하기를 어릴 때부터 늙기에 이르기까지 하루같이 하였으니 이웃 사람들이 보고서 모두 칭찬하였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장병에 무효자라-긴 병에 효자 없다” 고 하였는데 이 사람으로 말하면 그런 곳이 없으니 참말로 지극정성을 다하는 효자 입니다.

 

대개는 사람들이 집에서 어버이를 봉양한다는 것이 부모님 돌아가신 후에나 반드시 삭망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받들기를 하는데 도무지 살아 생전에 봉양하는 것이 효도하는 것이라 하면서 그 분은 집이 비록 가난하였지만 반드시 반찬을 갖추어 삭망으로 특별히 대접하여 매월 예를 삼아 한 번도 빼먹은 적이 없으니 이것이 비록 어버이를 봉양하는데 사소한 일이지만 가히 그 효성에 지극한 것을 보니 하나하나 글로써 형언하지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병환이 있으면 근심하는 모습이 얼굴에 나타나 잠을 이루지 못하고, 옷고름을 풀지 아니하며, 아버지의 똥이 달고 쓴 것을 맛보고, 그 병에 차도를 짐작하기도 하였으며 정성을 다하여 천지신명께 기도하며 몸으로 대신할 것을 기원하였으니 이것은 유검루(庾黔婁)의 사실과 더불어 상부 (相符) 함이다.

 

하루는 그의 아버지께서 졸지에 면종(面腫-얼굴에 생긴 종기)으로 몹시 고통스러웠다 상처를 터트려 종기가 더욱 곪아 의사도 치료하기가 어렵다고 하는데 비몽사몽간 꿈속에 홀연히 사람이 있어 알리기를 송이버섯을 주면서 속히 면종에 사용하라고 하였다. 그의 지시에 따라 시험한 즉 과연 감쪽같이 면종은 사라졌으니 이것은 효성에 감응하여 병환이 나으시니 김비(金鎞)의 치료한 고사와 더불어 무엇이 다르겠는가?

 

또 한가지는 병중에 담이 성하여 음식을 전폐하며 홀연히 과채를 먹으면 입안이 시원할까 하였는데 계절은 한겨울이라 백초가 다 말라버렸다. 효자는 부르짖어 울면서 애타게 과채를 구한 결과 겨우 조금 구했고 과일은 산중에서 구한 것이 흡사 새로 딴 것 같아 가지고 와서 드린즉 병환이 즉시 쾌유하였으니 이것은 맹종(孟宗)으로부터 감응한 것이나 비슷합니다.

 

그의 아버지 또한 중풍으로 전신이 부어있는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임질까지 겹쳐 소변마저 불통하여 안절부절하며 베개에 엎드려 있어 도무지 구원할 길이 없는데 별안간 섣달 밤 비가 많이 내려 평지 수심이 아마 한 자나 됨직하게 내리니 급하게 내달려 집안으로 들어 오니 집안에 온통 물난리라 병중의 아버지를 짊어지고 밖에 나가 당황하던 중 온몸의 부기는 눌려서 더하고 신낭(腎囊-불알)은 쭈그러져 고통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옛날에 들었던 일을 생각하며 임질(淋疾)을 입으로 모두 빨아내니 즉시 효과를 보게 되었다. 신낭에 피고름이 고이기 시작하면서 재차 입으로 피고름을 빨아냄으로써 임질과 부종이 즉효를 거두게 된 것이니 일전에 때아닌 겨울비는 바로 그분을 위해서 온 것이니 틀림없다.

 

또한 그가 평생 일거일동을 어버이를 생각하는 정성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외출하였다가 진미를 보게되면 차마 자신만 먹을 수 없어 문득 소매속에 꾸려 넣었다가 아버님에게 드리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바로 육공(陸公)의 감귤을 꾸어다가 어머니에 드린 것과 비슷합니다.

어느 날 하루는 고관 집에 방문하게 되었는데 마침 진수성찬이 나오니 여러 사람들은 모두 맛있게 먹고 있으나 그는 머뭇거리며 먹지 못하자 주인은 그 까닭을 물었다. 효자는 대답하기를 “집에 노부께서 계서서 혼자 먹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더니 주인은 칭찬하며 가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그대의 아름다운 행실을 들은지 오래되었지만 지금에 바로 이 행동을 보면서 그 사실을 인증하리라.” 고을사람들은 “아마도 이 사람의 이 행실을 관아(官衙)에 알리지 못한다면 무엇이 풍속을 후하게 한다고 하겠느냐“ 하면서 그분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을 손수 싸서 주니 효자는 그 음식을 가지고 돌아와 아버님께 공양하였다.

 

그가 어느 사람을 막론하고 기경(起敬)하는 정성이 어느 곳에 가던지 모두다 그러하니 비단 이뿐만 아니라 비록 조그만 것도 반드시 싸가지고 와서 우선 가묘(家廟)에 천신하고 아버님 께 공양한다. 이것을 조상을 받들고 효도를 생각하는 성심에서 한 것이다.

 

형제간이 세분이다. 그 막내아우가 몹시 가난하여 의식을 나누어주며 담락(湛樂)을 가히 견줄데가 없다. 끝내는 그가 나누어 받은 전답을 미루어 주기도 한다. 그의 아버님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너는 참으로 효자라구나. 잘 나의 뜻을 따라 심지어 이렇게까지 한단 말이냐?” 하였다. 이야말로 그의 양심, 오직 재물이라는 것은 쉽게 얻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 집안 간에 한그루 나무를 가지고 다투는 사람들을 볼 때 참으로 순임금이냐? 도척이냐? 하는 구분이 뚜렷하다. 돈독히 그의 순수 근신하는 성품, 행동거지에 충만하여 언제나 길에서 노인을 만난다면 문득 말에서 내렸다가 가며 말하기를 우리 부모를 생각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그것은 너무 과공(過恭)한 일이라고 한다. 이야말로 자기 부모를 존경하는 마음에서 다른 사람의 노인을 존경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노인들을 존경하는 도리이며 무엇이 인간성에 손상되리요.

 

황여윤 효자의 아버지가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나시고 황여윤 역시 50세로 근력이 쇠진 한데도 불구하고 집상(執喪) 3년에 오로지 예법을 좋아하여 조석(朝夕)으로 애호(哀號)하는 모습에 옆 사람들까지 덩달아 감동한다. 당초 빈염할 때부터 소대상과 담제(禫祭) 때 곡읍(哭泣)하는 예절과 전궤(奠饋)하는 범절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하지 아니할 수 없다.

또 그 장지(葬地)의 거리가 집에서 8마장(약 16km) 됨직한데 3년 복상이 끝난는데도 날마다 성묘를 간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중지하는 법이 없으며 또한 한겨울에도 눈이 많이 내려도 반드시 빗자루를 가지고 가서 묘정의 눈을 쓸어 내려서 한 점도 산소에는 눈이 없게 한다.

 

그 제사(祭祀)에는 풍성하고 정결하게 하여 성의가 있고 돌아가신 조상 섬기기를 살아 생존한 것처럼 하였으니 반드시, 낱낱이 기록하지 아니하였어도 자연히 그의 행적은 그 속에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중에도 더욱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있었으니 그의 나이 70세가 넘었는데도 불행히 국상(國喪)을 당했을 때 반드시 소복(素服)으로 갈아 입고 석달간 나라를 위하는 지극정성을 보이며 나라에 오히려 보답하려는 그의 마음이 이와 같았다.

 

황여윤 효자의 자제들이 그가 너무나 쇠약해서 병이 날까 염려하여 고기로써 입맛을 돋우려는데 나무라며 먹지 않고 물리친다. 그의 집은 세도가의 집도 아니고 한갓 초야에 사는 백성으로 일편단심 나라를 위하는 정성은 늙었어도 변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타일러서 하였겠습니까? 아니 그 어찌 무엇을 바라는 것이 있어서 했겠습니까?

 

이런 것만 살펴 보아도 그의 충효정신(忠孝精神)를 알고도 남습니다. 국가에서는 충신을 구하려면 반드시 효자의 가문(家門)에 있다함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어진 사람의 일선일행(一善一行)이 있으면 추천하는 것이 진실로 군자(君子)의 마음이거늘 지금 세상은 그러하지 못합니다.

비록 가행미덕(嘉行美德) 이 있어도 만일 그 사람이 미천한 집이라면 높이 권장해 주려고 노력하는 뜻이 없으니 어찌 슬픈 일이 아닙니까?

 

아~!!! 황여윤 효자가 죽은지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표창하고 또 표창하지 아니하는 것이 어찌 구천(九天)에 있는 영혼과 더불어 관여 되겠습니까? 오직 그의 집과 마을을 표창하여 그 미풍양속을 세워주는 것은 나라에서 우선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특히 한사람을 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하여 이와같이 앙달(仰達-우러러 고함)한 일이 있습니다.

 

요전번 기묘년(己卯年-1879년, 고종16년) 여름에 낱낱이 이 황여윤 효자의 사실을 적어서 관전(官前)에 아뢰었는데 관가에서 지령(指令)하신 대답한 내용이 진실로 가상한 일이다 다시 방문하여 표창(表彰) 하겠다고 운운한지가 어언 30년이나 가도록 아직 포상을 내리지 못하여 우리 민가(民家)에서는 다같이 비참함을 금치 못하여 또 금년(경진년, 1880년) 정월에 유곡면(酉谷面-현재 홍성군 장곡면)내로부터 다시금 논의(論意)가 되어 보고한 결과 지시에 의하면 고을의 공론(公論)에 따라 마땅히 처치사행 (處置事行)하겠다 하였습니다. 관가에서 지령되어 온 것은 이미 한 고을에서 모두 알고 있습니다.

 

 

 

< 國賢 尹英鎭 書...1880年 1月> 

 

 

◎ 尹英鎭(1839.1.2~1892.6.14)

휘 : 국현(國賢), 譜名 : 태희(泰熙), 본관 : 파평(坡平), 태위공파(太尉公派)

부친은 윤헌규(憲圭, 譜名-德成, 號:송암(松菴), 贈通政大夫敦寧府都正)이며,

모친은 숙부인 경주김씨이다.

벼슬은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이며,

부인은 정부인(貞夫人) 밀양손씨(密陽孫氏)이다.

자손은 장남 완식(完植-후손이 끊김)과 차남 창식(昌植, 諱-聖天)이 있다.

충청도 홍주군 유곡면 대부동(충남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에서 출생.

1881년(辛巳年) 직산현(천안시 서북구 직산읍)으로 장자(長子) 완식(完植) 이거(移居)

2차 1894년(甲午年) 청일전쟁 중에 차자(次子) 창식(昌植) 이거(移居)함.

홍주유림정문초(洪州儒林呈文草)는 1880년(고종17년, 경진년) 1월 42세 때 씀.

묘단은 천안시 서북구 직산읍 남산리 옥녀봉 남록(南麓) 추모단에 봉안.

 

 

 

 

 

 

 

 

 

 

 

 

 

 

 

 

 

 

 

 

 

 

 

 

 

 

 

 

 

 

 

*1880년(경진년 1월,고종 17년)...연대를 추정할 수 있음...원고지 하단 금년 정월에 면으로 부터...//

 

 

 

 

* 오심죽 ...가계보 //

 

 

 

 

<<< 오심죽...윤이빙, 윤헌규, 윤영진...파평윤씨 태위공파 조부님 서류...2012.5.31 >>>

 

 

 

홍주유림정문초...尹英鎭 作...1880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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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유림정문초...尹英鎭 作...1880년.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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