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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2세기말 이전 축조

吾心竹--오심죽-- 2010. 9. 3. 13:46

풍납토성 2세기말 이전 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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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토기 발전 과정에 대한 연구 결과 풍납토성 축조시기는 늦어도 2세기말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부여문화재 연구소 학예연구사인 신종국씨는 2002년 성균관대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백제토기의 형성과 변천과정에 대한 연구’에서 원삼국 시대부터 한성 백제 주거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6,000여 점을 분석한 후 이런결론을 내렸다.

풍납토성 출토토기나 주거지 분석이 아닌 백제토기 전체를 대상으로 분석해 풍납토성 축조시기를 비정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7년 풍납토성 발굴에 참여한 신씨는 풍납토성에서 백제토기 성립 이전(BC 100년~2세기 말)에 사용된 경질무문(硬質無文)토기와 더불어 기원 전후에 출현하는 단경호(短頸壺ㆍ목 짧은 병) 등의 타날문토기(문양을 새겨넣은 토기)가 동반 출토되고 있는 점 등을 들어 시기를 2세기 말 이전으로잡아야 한다고 밝혔다.

이는 백제토기 성립 시기나 풍납토성의 축조 시점을 고배(高杯)와 삼족기(三足器) 등이 출현한 3세기 중반 이후로 봐야 한다는 박순발 교수(충남대) 등의 기존 학설을 뒤엎는 것이다.

신씨는 그러한 결론을 입증하기 위해 원삼국 시대부터 한성 백제의 주요토기 출현 및 소멸 과정을 크게 8단계로 구분하고 아래로 갈수록 다양한형태로 발전했음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풍납토성 토기는 2단계와 4단계에해당되는 데 비해 몽촌토성 토기는 8단계까지 내려가므로 풍납토성 축조시기의 상한 연대를 상대적으로 몽촌토성보다 올려 잡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구체적으로 풍납토성은 2세기 이전에 1차 축조되고 나머지 토루와 외벽역시 서기 200년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가 끝났으며 몽촌토성은 출토 토기의 형태와 문양 등을 종합할 때 4세기 중엽 이후로 늦춰 잡는 게 타당하다고 보았다.

최진환기자 choi@hk.co.kr

 
 

풍납토성 서쪽 성벽서 폭 16m 자갈층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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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성벽 가운데 한강(올림픽대로 방향)과 인접한 서쪽 성벽에서 폭 16m 이상인 자갈층이 확인돼 그 기능에 대한 비상한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레미콘업체인 삼표산업이 사옥 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서쪽 성벽 일대를 발굴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는 성벽 중앙부를 기준으로 한강과 인접한 바깥쪽 성벽을 절개한 결과 6일 현재 성벽 가장자리 부근에서 용도 미상의 거대한 자갈층이 확인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자갈층은 바깥쪽 성벽 중에서도 가장 바깥쪽 부근에서 시작돼 해자(성벽 바깥을 두른 도랑 겸 연못), 혹은 한강과 맞닿았을 만한 방향을 향해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이날 현재까지 확인된 폭만 웬만한 고대 성곽의 폭과 맞먹는 16m에 달한다.

조사단은 강자갈을 매우 세밀하고 촘촘하게 깐 이 자갈층의 정확한 성격에 대해 "그것이 성벽 바깥쪽 어디까지 확장되는지 그 끝을 확인하는 한편, 절개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같은 성벽 자갈층은 지난 99년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조사한 풍납토성 동쪽 성벽(육지로 들어간 쪽) 두 군데에서 성벽 안과 바깥쪽 가장자리에서 모두 확인됐으나 그 폭은 5m 남짓했다.

당시 조사단은 이러한 성벽 자갈층에 대해 "성벽 토사의 흘러내림을 방지하는 한편, 배수기능을 겸한 것으로 판단된다"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서쪽 성벽 자갈층은 해자가 있었을 곳으로 강력히 추정되는 곳으로 계속 확장해 내려가고 있는데다, 이곳이 풍납토성 전체 성벽 중에서도 한강과 바로 인접한 곳이라는 점에서 성벽이 강물이나 해자를 흐르는 물에 씻겨내려감을 방지하기 위한 일종의 제방 같은 시설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나오고 있다.

한편 첨예한 논란을 빚고 있는 풍납토성 축조시기와 관련해 조사단은 "3세기 중후반 이후일 것이라는 일부 견해는 이번 서쪽 성벽 발굴을 통해 근거가 없음이 재확인됐다"고 말했다.

조사단은 그 근거로 성벽 중심에서 약간 바깥쪽으로 비켜난 곳에서 경질무문토기와 제일 이른 시기 타날문토기만이 집중 출토되고 있는 점을 들었다.

조사단은 "이러한 토기는 풍납토성 안쪽 주거지 발굴성과를 종합할 때 이 토성에서 가장 이른 시기 유적층에서만 집중 확인되는 것이고, 그 시기는 기원전후-기원후 200년 무렵"이라면서 "따라서 풍납토성은 아무리 늦춰 잡아도 서기 200년 이전에는 거의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위용을 갖췄다고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사진 있음>

taeshik@yna.co.kr
 

풍납토성,초기백제 최대 판축토성 판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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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백제초기 왕성터의 유력한 후보지 가운데 하나인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이 늦어도 기원후 3세기쯤에는 축조가 끝난 백제 초기 및 한국최대 판축토성임이 밝혀졌다.

이번 발굴결과는 백제가 고구려에 밀려 온조왕 이후 475년 문주왕 원년 수도를 웅진(공주)으로 옮기기까지 493년간 한성 백제의 왕성이 풍납토성이었으며 백제가 적어도 3세기 이전에 강력한 왕권을 갖춘 고대국가였음을 사실상 확정하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허구가 아님을 입증하는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지난 6월부터 현재까지 이곳을 발굴중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조유전)는 12일 발굴현장에서 설명회를 갖고 현재까지 확인된 풍납토성이 폭 40m,높이 9m에 달하는 백제 초기,나아가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임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판축토성이란 사방에다 나무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흙을 차곡차곡 다져만든 성을 말한다.

발굴단은 따라서 이번 발굴결과는 고대 토성의 축초방법과 한성백제(BC 17∼AD 475년)의 실체를 파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말했다.

발굴단이 풍납토성 동쪽벽 일부 구간 중 2개 지점을 골라 성벽을 절단해 본 결과 ▲성벽 가장 밑쪽에 뻘을 깔아 기초를 다진 뒤 아래쪽 폭 7m, 높이 5m 가량 정도의 사다리꼴 모양으로 중심 토루를 쌓았으며 ▲그런 다음 안쪽으로 사질토와 모래, 점토다짐흙과 뻘흙을 위주로 한 판축토루를 비스듬하게 덧붙여 나간 뒤 ▲마지막으로 토루 위에 강돌로 된 3단의 석렬(돌을 열로 지어 쌓은 것)과 할석(깬돌)렬 1단을 쌓아 마무리한 사실을 밝혀냈다.

이런 석렬은 토사가 흘러내리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물을 빼내는 기능도 겸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발굴단은 말했다.

특히 뻘흙으로 이뤄진 토루에서는 판축에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목재들이 얽혀있는 상태로 단을 이루며 같은 간격으로 출토돼 당시 판축방법 및 성축조 기술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발굴단은 현재까지 확인된 규모만 보더라도 성벽의 폭이 약 40m, 높이가 9m가 넘는 거대한 규모이고 현재 노출된 부문이 성벽의 윗부분임을 감안할 때 아래쪽으로 내려갈 수록 그 규모가 더욱 커질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한편 이곳에서는 경질무문토기, 타날문토기, 회색무문토기를 비롯한 다양한 토기와 동이조각 등이 출토됐다.

이런 사실로 미뤄 풍납토성은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축조가 끝나 성으로서 기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발굴단은 당시의 인구규모나 사회조직, 권력구조 등을 종합할 때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이미 이와같은 거대한 규모의 토성이 축조완료됐다는 점은 백제의 고대국가 성립과 발전연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사진

있음)

taeshik@yonhapnews.co.kr
 
 
 

삼국사기 초기기록 논쟁 끝낸 풍납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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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12일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개최한 서울 송파구 풍납동 풍납토성 발굴현장 설명회는 고고학 뿐만 아니라 한국 고대사학계에 일대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올 전망이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일단 그 규모면에서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한강을 북쪽으로 끼고 반타원형 모양으로 3.5㎞를 빙두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풍납토성은 현재 남쪽을 중심으로 2.2㎞ 가량만 남아있다.

그런데 문화재연구소가 현존 성벽 2곳 부분을 절개한 결과 현재까지 확인된 것만 해도 성벽 아래쪽 폭이 40m, 높이가 9m에 이르는 거대한 규모다.

문제는 이 풍납토성의 조성시기가 과연 언제냐는 것.

이날 발굴설명회에 참가한 이형구 선문대 교수와 최몽룡 서울대 교수, 심정보 대전산업대 교수 등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여기서 출토된 경질무문토기와 심발형토기,연질타날문토기를 비롯한 출토유물들을 근거로 적어도 이 성벽 축조시기가 기원을 전후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늦어도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공사가 끝난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박순발 충남대 교수 같은 일부 고고학자는 이들 유물이 길게 잡아도 3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없으며 따라서 풍납토성도 3세기 초,중엽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지난 97년 발굴된 풍납토성안 주거지에서 발굴된 유적의 방사선탄소연대측정 결과 기원전으로 나온 점을 미뤄볼 때 이날 공개된 풍납토성도 적어도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에 들어간 것만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쓰다 소우키치(津田左右吉)와 이마니시 류(今西龍) 등 일본학자들과 이병도에서 비롯된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이 그 신빙성을 의심하고 있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이 맞아떨어지고 있음을 입증하는 더없이 좋은 증거가 된다.

지금까지 한국고대사학자 대부분은 건국이 기원전 18년이며 이미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강력한 절대왕권을 갖춘 것으로 기록한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허구라고 비판하면서 이병도를 따라 대체로 3세기 중반 고이왕 이후부터 역사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날 모습을 드러낸 풍납토성은 그 축조시기가 「삼국사기」가 백제 건국연대로 기록한 기원전 18년을 즈음한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뿐만 아니라 늦어도 기원후 200년을 전후한 시기에는 축조가 완료된 것으로 밝혀졌다.

물론 이날 일부 고고학자들은 풍납토성이 한강을 끼고 있는 점을 들어 초기수도인 하남위례성의 성벽이 아니라 제방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는 신중론을 제기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현재의 풍납토성이 백제초기 수도라는 하남위례성이든 혹은 제방이든 현재 남아있는 거대한 풍납토성을 축성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인력동원이 있어야 하며 또 이를 위해서는 절대왕권이 성립돼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늦어도 기원후 200년 무렵에는 축조가 끝난 풍납토성을 축조했던 주인공은 누구인가?

백제 밖에 없다.

그러나 현재 대부분의 한국고대사학자들처럼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을 믿지 않고서는 연인원 수십만명이 동원돼도 완성에는 적어도 수십년 이상일 걸릴 것으로 보이는 풍납토성 축조를 도대체 설명할 수는 없다.

설사 박순발 교수의 설명처럼 풍납토성이 기원후 3세기 중엽쯤에 만들어졌다고 해도 대규모 공사와 이를 위해 필요한 대규모 인력동원이 3세기 중엽 어느 때 순간적으로 이뤄질 수는 없는 만큼 이미 그 이전부터 백제는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를 중심으로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이룩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따라서 풍납토성은 지난 1세기 동안 한국고대사학계를 주름잡았던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에 대한 불신이 잘못됐음을 입증하는 단적인 증거가 된다.

taeshik@yonhapnews.co.kr
 
 

풍납토성 해자 흔적 첫 확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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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초기백제 왕성터임이 확실한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에서 성벽 바깥을 둘러 판 일종의 도랑 겸 연못 방어시설인 해자(垓字)가 처음으로 확인됐다.

이 해자는 성벽을 쌓으면서 같이 축조한 인공해자인지, 샛강을 최대한 활용한자연해자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초기백제 유물과 후기 조선시대 유물을 함께 출토하는 것으로 보아 최근세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었던 것이 확실해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최근 현존 풍납토성 성벽 중에서도 한강과 인접한 서남쪽성벽 바로 바깥 지역인 풍납동 309의 6 등 5필지, 대지 1천200여평에 레미콘 업체인삼표산업(대표 김호)이 추진하는 '풍납동 삼표산업사옥' 신축 터를 시굴조사한 결과물길이 흐른 해자 흔적을 확인했다고 8일 말했다.

조사결과 강물이 흐른 밑바닥층임을 증명하고 있는 강자갈층은 현존 지표 9m 아래 지점에서 확인됐다.

이 강자갈층에서 위쪽으로 1-2m 구간에는 강물이 흐르면서 퇴적된 시커먼 뻘층이 두텁게 형성돼 있었다. 이러한 검은 뻘층 위에는 홍수 등으로 퇴적된 것으로 추정되는 황색 뻘층이 다시 확인됐다.

맨 아래쪽 검은 뻘층에서는 풍납토성 성벽 안쪽에서 이미 수없이 확인된 타날문토기와 삼족기, 백제 기와조각을 비롯한 한성시대 백제 유물과 백자 등 조선시대 유물이 동반 출토됐다.

이로써 이 일대에는 풍납토성이 축조돼 활용되고 있었을 한성도읍기(BC 18-AD 475년)에 해자가 있었으며, 더구나 그러한 해자 흔적이 조선시대까지도 샛강 등으로활용됐음이 밝혀졌다.

둘레 3.5㎞에 달하는 현존 한반도 최대 평지토성인 풍납토성은 성벽 바깥 주위를 따라 해자가 있었을 것으로 강력히 추정됐으나 그러한 흔적이 발굴조사로 드러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하지만 이 해자가 자연 강물을 이용한 것인지, 아니면 성벽과 함께 축조된 인공해자인지는 추가 발굴을 기다려 보아야 확인될 전망이다.

연구소 관계자는 "이번에 확인된 뻘층이 해자임은 분명하며, 성벽과의 좀더 확실한 연관성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성벽과 연결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함께 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면확대 발굴 여부는 문화재위원회가 결정하게 된다. <사진 있음> taeshik@yna.co.kr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