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羅

신라의 대당전쟁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9:02

신라의 대당전쟁 1 - 불타는 북쪽 전선과 호로하의 혈전

2008.11.20 15:30 | 영토 수호戰 | 히스토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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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대당전쟁 1
-  불타는 북쪽 전선과 호로하의 혈전
  
 문무대왕 재위 11년이 되던 671년 유월의 여름, 당나라의 군사원조를 받아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던 신라에게 매우 곤혹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죽지장군이 이끈 신라군이 가림성(加林城:지금의 충남 부여인근)석성(石城:가림성 주변성)등지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만명과 격전을 펼친끝에 대승을 거둔 것이다.

 이때 당군은 전사자만 5300명으로,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거둔 최초의 일대 쾌거임에는 분명하였지만, 문제는 아직 신라가 당나라를 상대로 전면전을 펼치기에는 역부족하였다는 것에 있었다. 더구나 사로잡힌 적장중에는 백제출신 장군이 2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 결국 백제부흥세력중 일부가 지난날의 원한을 갚기위해 일본은 물론 중국과의 연합도 마다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총관 설인귀(薛仁貴)는 문무대왕에게, 백제원정 당시에는 군사원조요청을 하였다가 지금에와서 배신했다는 내용의 강력한 항의를 하자, 백제의 잔적과 합류하여 신라를 위협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공격하였다는 명분이 되어 주었다.



 그리고 옛 백제땅을 신라땅으로 선포하는 상징적인 조치로 사비성(지금의 부여扶餘)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여 아찬(阿飡)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하였다. 신라가 이렇게 강경자세로 나오자, 당나라역시 한반도 주둔 병력을 대폭증강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9월 당은 장군 고간을 평양에 파견하는 한편 말갈병 4만명을 증원하여 평양에 참호와 성루를 구축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지원책으로 엄청난 양의 군수물자를 실은 대규모 선단을 파견하였다. 하지만 신라역시 그해 10월 서해를 건너오던 당의 조운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100여명을 사로잡고 전군을 괴멸시켜 버리는 대승을 거두었다.

 10월 해전의 승리에 고무된 문무대왕은, 옛 백제땅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에 대해서도 공격을 시작하였다. 그 결과 12월 고성성 전투에서는 승리하였지만, 다음해 2월에 벌어진 가림성 전투에서는 패배하는 등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가림성은 죽지장군에 의해 탈환된 성이었지만, 이후 죽지장군은 문책성에 가까운 인사조치로 각종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아마 죽지장군이 물러난 이후 당군에 의해 재점령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옛 백제땅에서의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는 동안,  고간(또는 고보)은 정예 1만명을 거느리고 이근행이 이끈 3만명과 합류하여 7월달 평양에 8진영을 만들어 주둔하였다.  백제 땅에서의 전투가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4만명이나 되는 당군의 평양증파는 신라에게 엄청난 압박이 되었다.  8월에 이르러 한시성마읍성이 이따라 격파당하자, 신라 단독의 힘으로는 당군의 남진을 막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문무대왕편 12년 8월 백수성(白水城)전투의 기록을 보면,  신라 군사가 고구려 군사와 함께 마주 싸워 당군 수천 명을 참살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즉 한곳에 몰려 있는 당군을 향해 신라와 옛 고구려 군사들이 합동작전을 펼쳐 양면 공격으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백수성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는 분명 큰 승리였지만, 여전히 숫적으로는 당군이 우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군은 승리를 너무 성급하게 낙담하여 당의 진영 깊은 곳까지 추격하여 들어가고 말았다. 결국 석문(石門)에서 당군의 역습을 받은 신라군은 대아찬 효천(曉川)등이 전사하는 등 크게 패하였으며,  옛 고구려 군사와 모처럼 구성한 연합전선 마저도 상당히 약화되고 말았다.

 이렇게 북쪽 전선이 위태롭게 되자, 신라는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는 등 자구책을 마련하는 한편 시간을 벌기위애 굴욕적인 외교도 감수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에따라 문무대왕은 당나라에 사죄표문을 올리며 금 120푼 은 3만 3500푼(10푼=3.75kg) 구리 3만 3천 푼등 총 6톤에 달하는 광물을 비롯 엄청난 양의 조공품을 받쳐야만 했다. 또 별다른 자연재해가 없었음에도 그해 곡식이 귀하여 기근이 들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공품목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신라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식량착출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문무대왕은  굴욕을 감수하면서까지 벌은 시간을, 철저하게 당나라와 펼칠 대격전을 준비하는 기간으로 사용하였다. 우선 재위 13년 모반을 일으켜 당나라로 붙으려던 대토(大吐)일당을 처단하는등 친당파 세력들을 강력하게 제거하였다. 그리고 국원성을 시작으로하여, 국내의 주요성곽들에 대해 대대적인 증측과 보수공사를 단행하는등 전쟁준비에 만전을 기울였다.
 아울러 서해상에 병선 100척을 증파하여 당군의 해상지원을 막는 한편, 북변에 대한 병력도 증강시켰켜 안동도호부에 대한 견제도 강화하였다.

그러자 당나라도 말갈족과 거란족을 앞세운 대규모 병력을 북쪽 전선에 투입하였다. 이제 문무대왕으로서는 굴욕을 참으면서 1년에 걸쳐 준비한 성과가 전쟁이라는 시험대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호로하(瓠瀘)의 혈전, 당군의 남하를 막다.

 문무대왕 13(673년)년에 단지 신라의 북변이라고 나왔을 뿐, 언제 어디서 벌어졌는지 정확치 않다. 그러나 전투는 매우 격렬하여 무려 9차에 걸친 대격전이 벌어졌다. 전쟁의 상황은 초반에는 매우 불리하여 호로강(=호로하瓠瀘)인근지역까지 내려 온 것으로 보인다. 호로강에 대해서는 현재 임진강의 지류로 보는 견해가 다수의 의견이다. 

 기록으로보면 《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이 지역에서 고구려와 신라,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고 나와있다. 특히 호로강 위에 있는 호루고루 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의 축성수법이 모두 확인되고 있고, 신라계는 물론 고구려 계의 토기편이 다수 발견되어 대동지지의 내용이 사실임을 확인할 수 있다.

 호로고로 성은 어떤 곳인가? 당나라의 고구려 침공이 한창이던 662년, 김유신 장군이 평양까지 당나라의 군량수송을 갔다가 고구려군에 쫓기던 중, 이곳에서 어렵사리 반격에 성공하여 참패를 모면한 곳이기도 하다. 즉 신라군에게는 매우 익숙한 지역이었다.

 임진강이 서쪽으로 꺽어지면서 형성된 28m의 현무함 지대위에 설치된 이 천연 요새에서, 당군을 막지 못한다면 전선은 한강까지 순식간에 밀릴 것이다. 그리고 한강이 열리게 되면 중국과의 뱃길이 연결되어 신라로서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놓이고 만다.

 아마도 9차에 걸친 대 혈전중 대부분은 이곳을 중심으로 펼쳐졌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신라군은 복잡하게 얽힌 임진강의 지류와 지형을 십분 활용하여, 대승을 거둘 수 있었다. 기록에는 수급을 벤 자만해도 2000여 명에 이르렀으며 호로하에 빠져 익사한 당군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고 하였으니, 단순한 육지전만 아니라 살수대첩과 같은 수공작전도 펼쳐 졌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라의 대승이었다. 또한 굴욕을 참으면서 군사를 배양하고 때를 기다렸던  우리민족의 반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신라는 삼국통일과정에서 외세에 의존하였다는 점과 영토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곤한다. 그러나 신라는 한치의 땅이라도 내어주지 않기 위해 그토록 많은 피를 흘렸으며, 민족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그토록 격결한 전쟁을 치뤄 낸 것이다.
 따라서 통일신라의 역사를  더이상 대륙영토를 잃었다는 부정적 관점에서가 아닌, 중국과 당당하게 맞서싸워 이 땅과 민족 그리고 우리역사를 지켜냈다는 긍정적 관점에서 서술하고자 한다.

 

 

신라의 대당전쟁 2
-나당전쟁의 분수령 천성전투

신라는 나당연합의 성과에 힘입어 660년에는 백제를, 668년에는 고구려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것에 만족하지 않고, 고구려땅 전체를 복속하기 위해 평양에 (安東都護府)를 설치한데 이어, 백제 땅마저 차지하기 위해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였다. 그뿐 아니라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아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려 하였다.
따라서 신라는 우선 자국의 백성과 영토 그리고  왕조를 유지하기 위해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아가 우리나라의 역사와 민족의 생존을 수호하기 위해 반드시 승리해야만 되는 전쟁을 치루어야 했다.


  신라의 대당전쟁은 670년 3월 고구려왕족인 고연무와 함께 1만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 ,말갈병을 앞세운 당군을 공격함으로써 나당전쟁은 시작되었다. 후일 발해의 성립으로 신라의 영토가 대동강이남으로 고착화 되었지만, 이 기록으로 볼 때 신라가 결코 북방영토를 가볍게만은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격적인 전투는 671년 6월 죽지장군이 가림성에 주둔하고 있던 당군 1만여명을 선재공격하여 5300명을 참살하는 대승을 거두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후전개되는 나당전쟁에서 천존, 죽지, 김원술같은 비교적 젊은층의 장수들은 물론 승전을 기록한 대부분의 장군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나당전쟁의 기록은 오히려 상당히 축소된 부분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당시 당나라는 설인귀(薛仁貴)가 있는 평양 안동도호부를 거점으로 삼아 남하하여 한강유역을 확보한 후, 중국과의 뱃길을 열어 병력을 집중투입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전략이었다.
 그리하여 총 병력 2만 정도의 안동도호부였지만, 671년 9월에 말갈병 4만명을 증원하였으며 672년 정월에는 이근행과 고보를 장군으로 삼아 총 4만명을 추가로 파병하였다. 따라서 안동도호부의 총 병력은 10만에 달하였고, 그로인해 한시성과 마읍성이 격파당하기도 하였다.

비록 전선은 상당히 뒤로 밀려나긴 하였지만, 신라는 격전을 거듭한 끝에 임진강전선을 끝까지 사수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전투가 674년 8월에 있었던 호로강(=임진강의 지류)의 전투였다.이렇게 당나라의 남하전략이 신라군의 강력한 방어전술에 의해 막히게 되자, 675년부터는 해상작전과 병행하여 우선 한강유역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바로 675년 9월에 있었던 천성(泉城- 경기도 파주 일대로 추정)전투와 매초성(경기도 양주 일대로 추정) 전투가, 한강유역을 장악하여 한반도를 양분시키려는 당나라의 계획과 이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신라의 전략이 맞부딪친 전쟁이었다.



재평가 되어야 할 천성전투

 675년 접어들어 당나라가 거란 말갈병등을 동원하여 총공격이 있을 것이란  소식은 기정사실로 굳어지고 있었다.   문무대왕역시  고구려 백제출신의 병력들까지 흡수하여 새롭게 편제된 9군을  중심으로 총력전 체제를 완비하였다. 이제야 말로 삼국을 통일한 진정한 힘을 발휘할 때였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등장하였다.  설인귀는 신라에서 죄를 지어 사형당한 김진주의 아들 김풍훈을 끌어들여 신라침공의 앞잡이로 삼았던 것이다.
 그리고 김풍훈을 앞세운 당군의 목적지는 천성이었다. 지금까지는 천성전투에 대해 매초성전투의 전초전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높았지만, 최근 들어 이 천성전투의 중요성을 재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높다. 즉 천성전투의 승리가 없었다면 매초성 전투의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다는 것이 재평가의 핵심이다.

 또 천성전투는 나당전쟁에서는 드물게 승전장수 이름 문훈(文訓)이 전해지고 있다. 그만큼 확실한 승리라는 뜻이다. 9월 문훈은 천성전투에서 설인귀를 상대로 격전을 펼친끝에 1400여 명의 수급을 베고 적선 40척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얼핏보면 그리크지 않는 승리같지만, 자세히 보면 엄청난 대승이다.

 우선 당군이 천성을 장악하려던 이유는,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대군의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천성전투의 승리로 인해 당나라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한편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 대군을 고립시키는 이중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더구나 노획한 적선만 40척에 이른다. 그렇다면 파손되거나 격침된 적선은 그보다 훨씬 많을 수 있다는 뜻이다.  

또 14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는 기록으로 당시 당나라 군사의 전사가가 그 정도에 그쳤으리라고 단정하기엔 무리이다. 재차 언급하자면 수급을 베는 행위는 전투가 마무리 된 뒤에 주로 행해지는 것이다. 즉 적의 시신을 확인 할 수 있는 경우에 제한되어 목이 베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성의 경우 전쟁상황으로 보아 배가 정박하고있는 항포구 혹은 강포구까지 전투지역이 확대되었음이 분명하고, 이럴경우 상당한 익사가 발생하게 되는데 익사자의 경우는 숫자를 파악하기 어렵다.  

 또한 설인귀가 무려 40척이나 되는 선박을 버려두고 도망가야 될 만큼 다급한 지경이었음이 분명하다.  결국 천성을 거점으로 삼아 매초성의 주력군을 지원하려던 설인귀의 작전은 문훈에 이해 완벽하게 격파당하였으며, 당의 수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양국의 운명을 판가름할 매초성 전투이다

 

 

 

 

신라의 대당전쟁 3
 20만 대군을 격파한 매초성 전투

 신라는 한반도 전체를 중국의 영토로 만들려는 당제국의 계획에 맞서,  670년 3월 부터 7년간에 걸친 대격전을 치루게 된다. 
 이 7넌간의 전쟁중에서도 특히 675년 9월에서부터 676년 11월까지 14개월동안은 절정을 이루었다.
 하지만 신라는 676년
9월(음력) 천성전투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의 수군을 격파하는등,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특히 당나라의 남하전략이 임진강전선에서 막힌데 이어, 해상과 수로를 통한 수송로 확보계획마저 천성전투의 패배로 차단되자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던 20만의 대군은 사실상 고립상태에 이르게 된다.

  매초성 전투에 대한 논란

 그런데 매초성 전투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너무 짧다.

삼국사기는 "문무왕 13년(675년)9월 29일 당나라 장수 이근행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초성에 주둔했는데 우리의 군사가 공격해 쫓아버리고 전마(戰馬) 3만380필을 얻었으며 그 밖에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 됐다."는 간략한 내용만을 전하고 있다. 획득한 군수물자에 대한 언급만 있을 뿐 사망자수도 참여한 장군의 이름도 나와있지 않다.

개인적으로 매초성 전투는 많은 부분이 축소되었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을 증명할만한 역사사료는 전무한 편이어서 입증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고증작업과는 무관하게 매초성 전투는 신라가 당나라와의 전투에서 거둔 승리중 최대의 승전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최근 중국 학자들을 중심으로, 이 매초성 전투를 과연 신라의 승리로 볼 수 있는가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입장이 있다. 주장의 핵심은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동원된 신라군의 병력 수나 지휘관, 전투의 상세한 경과 등이 기록에 전혀 나오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나당전투에서는 전사자의 수가  구체적으로 언급되었는데 비해 유독 매초성 전투만은 전사자 수가 전혀 언급되어있지 않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이와관련하여 중국의 바이겐싱 섬서 사범대 교수는 극단적으로 '매초성 전투에서 신라의 승리라고 할 만한 사건은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 매초성 전투에서 이근행이 참패했다면 중국 측 기록에 처벌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이근행이 676년 적석도 경량대사로 임명돼 토번 토벌전에 종사할 뿐 처벌 기록이 전혀 없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또 바이 교수는 "결국 매초성에서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다는 증거는 없으며 이근행은 중국 조정의 명령에 따라 자주적으로 철수했거나 아니면 전투가 벌어졌어도 피해 규모가 크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대만 학계에서도 나당 전쟁에서 당군이 물러난 것은 당의 군사력이 토번의 팽창 방어에 집중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하는 견해가 있다. 결론적으로 토번 등 더 위급한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 당군이 이동 배치된 것일 뿐 신라에 군사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이 중국권 학자들의 주장이다.

 국내 학계에서도 675년 9월에 벌어진 천성 전투에 주목하며, 매초성 전투가 중요하긴 하지만 천성전투의 승리로 인해 부수적으로 얻은 승리정도로 평가하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두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비록 매초성 기록이 축소되었다는 것을 직접적으로 증명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매초성 전투를 회의적으로 보는 중국어권 학계의 주장이나 일부 국내학계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근거는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매초성에 주둔하고 있는 당군의 피해가 그리 크지 않았다는 견해에 대해서 되짚어 보자. 당시 신라가 노획한 전마만 3만필이 넘는다. 그것이 그리 크지 않는 피해란 말인가? 현대로 생각하자면 경전차 3만대를 노획한 거와 같은 규모이다. 이 세상의 어떤 군대가 그런 엄청난 물량의 군수물자를, 적에게 그냥 넘겨 준단 말인가? 또 고대의 정서상, 전마는 일반 보병 병력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될 수 있다.

 보병병력 3만명을 희생해서라도 전마를 살릴 수 있다면 차라리 그것을 선택할 가능성이 높다. 3만필의 전마와 3만 여 기의 병장기를 버려두고 후퇴해야 되었던 상황....  물론 철군 전략상, 신라군의 추격속도를 늦추기 위해 고의적으로 병장기를 버려두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 하더라도 매초성으로 추정되는 경기도 양주일대와, 당나라군의 철군 주무대가 되었을 항포구 사이의 간격이 너무 조밀하다.

 무려 20만명의 병력을 일시에 철군시키는 일이 불가능한 이상, 신라가 공격을 시작하였다면 어떠한 경우라도 대규모 접전은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또 병장기는 의도적으로 버려두었다고 해도 3만필에 이르는 전마까지 포기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같은 패배를 당하였다면 과연 이근행에 대한 처벌 기록은 왜 없는가라고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답은 간단하다. 즉 토번 토벌전에 종사하였다는 그 자체가 문책성 인사조치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는 것이다. 만약 이근행에 정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중앙정계에서 활동해야 되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겠는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그리고 척박하기 그지없는 변방 토번(현재 티벳지역)에 투입되었다는 것을 결코 지나쳐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로 왜  매초성 전투에 참전하였던 신라장수 이름이 단 한명도 거론되지 않느냐는 문제이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의 이름이 유일하게 나온다. 그는 당과 벌인 석성전투에서 패전에 책임을 지고 관직을 박탈당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잃어버린 역사의 실마리가 나올 수 있다. 즉 그는 관직이 없었기 때문에 이름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직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차후 나당간의 외교관계를 고려하여 공식적으로는 거론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비록 나당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였다고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상하관계의 조공행위가 유지되는 이상 굳태어 당나라가 패배를 자인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수나라때 처럼 패전장수에게 책임을 묻는다면 패배를 자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른 여러전투에서는 당나라의 수급을 벤 숫자가 정확하게 나와있는데, 유독 이 전투에 대해서만 전사자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는가란 마지막 의문이 남는다.  그러나 평양주둔군과 옛 백제지역군은 혼성군이었는데 비해 매초성에 주둔해 있는 당군은 순수 당나라 출신 정예군이었다.  어차피 묻어버리기로 한 역사의 현장에서 굳이 사망자를 언급하여 중국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가 있었겠는가? 

  요약하자면 매초성 전투는 예상을 뛰어넘는 승리였을 뿐더러, 다른 지역의 전투와는 성격이 다른 전투였기 때문에  역사속에 살아있는 체로 묻히는 비운을 맞았던 것이다.



675년 9월 29일 매초성 전투의 복원

 그렇다면 이제부터 이 역사속에 묻혀 버리고 만 매초성 전투를 복원해 보자. 다만 이에 대한 해석은 개인적인 관점에서 이뤄진 것임을 밝힌다.

 상대는 20만명에 이르는 대 병력,  그러나 신라로서는 앞으로 얼마만큼이나 당나라의 더 전쟁을 치뤄야 할지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해야만 돼었다.
 더구나 당군이 매초성안에 있는 이상, 숫적으로도 열세인 신라가 선제공격을 통하여 해법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당군이 먼저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대대적으로 공격에 나선다면 자칫 한강전선마저 붕괴될 수 있었기 때문에 공격시기를 기다릴 수 만도 없는 상황이다.

 앞으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렵고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수는 더욱 없는 675년의 음력9월 늦가을, 임진강 전선은 그렇게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천성전투에서의 승리로 인해 해법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육로와 해로를 통한 군수물자의 보급의 모두 차단된 상태에서, 20만이나 대는 대군이 좁은 매초성에서 겨울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그들은 어떤 식으로던 그 성을 나올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신라로서는 유리한 소식이 몇가지 더 들려왔다. 당의 남서쪽에서는 티벳이  북쪽에서는 돌궐이 그리고 동쪽에서는 대조영이 급속하게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당나라는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는 병력중 다수를 철군 시킬 수 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여기에 20만에 이르는 주력군이 매초성에 갇혀 집단 아사의 위기에 몰렸다는 소식은 더욱 철군을 서두르게 하였을 것이다.

 이제 기회는 왔다. 바로 9월 29일이다.  김원술을 비롯한 수많은 역전의 용사들은,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어떠한 명예나 대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이면서도, 또다른 한편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유지해야 되는 문무대왕의 고충을 잘 이해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매초성 전투에 참가한 대부분의 용사들은, 무대왕이 태자 법민의 자격으로 백제원정에 참여하였던 660년부터 15년간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전우들이기에....그의 심정과 고민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화랑용사들이라면, 명예나 영웅심 그리고 보상따위을 바라지 않는다. 그곳이 그들이 있어야 할 곳이고, 그곳에서 그들이 행하는 일이 우리의 생존과 역사를 지키는 일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매초성에 주둔해 있던 당군이 철군을 위해 성문을 열고 나와 우왕좌왕 할 때가 기회였다. 한참 철군준비로 부산한 당군에게 있어 맹렬하게 공격해 오는 신라군을 막기엔, 아무리 숫적인 우외에 있다고 해도 불가능 하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수만필의 전마와 수만 여기의 병장기를 챙길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20만에 이르던 당군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고, 전투가 끝났을 때는 신라군조차 믿을 수 없는 결과가 펼쳐지고 말았다.
 하지만...끝내 이날의 승리는 온전하게 기록되지 못하였다. 다른 전투였다면, 말갈이나 거란무리 혹은 백제무리와 함께 신라를 공격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외교적 논리로 풀 수 있었지만, 매초성에 주둔해 있던 20만 대군은 당의 주력군이지 않은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는 1차적으로 돌궐이나 일본같은 적대세력을 견제할 수 있을 뿐더러, 2차적으로는 신라인 모두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 수 있었다. 비록 외교문서를 작성할 때 굴욕감과 자존감을 참아야 하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고대의 관점에서 보면 그 정도의 외교적 절차는 감수할 수 있는 수준이다.

 적의 수급을 베는 일은 승전 후 논공행상을 위해서이다. 이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의 수급에 대한 언급이 없었던 것은 다만 논공행상이 이루어 지지 않았기 때문일 뿐이지, 그것만으로 매초성 전투를 평가절하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매초성 전투는 수많은 신라의 장군들과 9군의 군대가, 명예는 물론 마땅히 받아야 할 포상까지도 포기하면서 걷은 승리였기에, 오히려 가장 명예로운 전투였다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대당전쟁 4 - 한반도 중부의 대혈전

 서기 675년 문무대왕 재위 15년 음력 9월 29일 신라는 당의 20만 주력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매초성을 공격하여 전마 3만8천필을 노획하는 등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것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병력중 주력을 철수시켜 돌궐이나 티벳의 확장을 막으려던 당나라를 자극 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대동강 이북지역은 물론, 우리나라 서해안 전역을 점령하고 나아가 신라마저 합병시키기 위해 겨울철의 대공세를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675년의 겨울 한반도의 중앙은, 그곳을 지키려는 우리나라 사람과 그곳을 차지하려는 자들의 피로 얼룩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중국 전통적인 책략인 이이제이(夷以制夷)  전술에 따라 말갈과 거란족을 동원하여, 그들의 방패막이로 활용하는 한편 한반도 중부인 경기도 지역을 집중 공략하였다. 

  기마전술에 익숙한 말갈과 거란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한강과 임진강등이 결빙되는 겨울철이 더 유리하였다
.


그러나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한강전선이 돌파될 경우, 전선은 어디까지 남하 할지 예측조차 하기 힘들정도였다.
 또 말갈족의 경우 고구려시대 때도 겨울철을 나기 위해서나 봄철 춘공기 때 신라의 국경을 자주 침범하였던 경험이 있다. 따라서 겨울철의 전쟁은 신라로서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우선 당나라 군사는 말갈과 거란족을 동원하여 신라의 중요 요세인 아달성(阿達城)을 약탈하였다. 그런데 아달성 성주 소나(素那)는 아달성 인근지역이 약탈당하는 것을 두고 볼 수없었던지, 수성전이 아닌 직접공격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역전(逆戰)하다가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 해 준다. 결국 당나라의 유인책에 말려 패한 것이다.

 이렇게 아달성을 점령한 기세를 타고, 당군은성 칠중성(七重城)을 공략하였지만, 칠중성은 고구려군의 맹공에도 함락되지 않은 견고한 성이었다.  당군은 말갈과 거란병까지 동원하여 포위공격하였지만, 결국 패하고 말았다.그러나 칠중성을 지키고 있던 소수(小守:지방 관원) 유동(儒冬)이 전사하는 등 신라군의 피해역시 만만치 않았다.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重城山)에 위치. 6.25당시 참호구축으로 인해 상당부분 훼손되었다고 함.

 이렇듯 칠중성에 대한 공략이 쉽지않자, 이번에는 적목성(赤木城)으로 공격목표를 바꿨다. 그리고 적목성의 전투는 칠중성의 전투에 비해 더욱 치열하였다.  적목현의 현령 탈기(脫起)는 최후의 한명까지 결사항전 하였지만, 말갈족을 동원한 당나라의 집중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전멸당하고 말았다.

 적목성이 함락되자 석현성역시 위협당하였다. 하지만 석현성의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석현성을 지켰다.
 이렇듯 당나라 군대는 적목성과 석현성을 함락시켰지만, 승리에 비해 피해가 너무 컸다. 이 당시 당나라 군대와 말갈족이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작은 규모의 두성을 공략하는데 너무나 많은 인적 물적 피해가 누적되면서, 가지고 있던 전력역시 상당히 약해지고 말았다.

 이렇듯 당의 군대가 작은 두성에 발목을 잡히자, 이번에는 신라가 반격할 차례였다.  675년 최후의 격전장이 어디인지 전해지지 않지만, 경기도 일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전투에서 신라군은 당의 군대와 18차례에 걸친 혈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당의 군대는 이미 많이 지쳐있었을 뿐더러, 사기역시 많이 떨어져 있었다. 결국 18차례의 혈전은 신라군의 승리로 끝났으며, 이 전투에서 신라는 무려 6047급의 적의 목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결사항전하다 죽음을 맞이한 장수의 이름은 나와있지만, 승전을 이끈 장수의 이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점이 삼국사기의 한계이자 신라 삼한통일의 한계로 보인다.
 승리를 하였음에도 당당하게 승리를 주장할 수 없었던 신라..... 물론 명분론에 치우쳐 신라가 추구하였던 실리적인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좀 더 자존감을 드러낼 수 있는 조치가 취해지지 못한점은 아쉬운 부분이다.

 

 

 

신라의 나당전쟁 5...기벌포해전과 못 다 이룬 역사

 서기 670년 압록강 너머 개돈양에서 시작된 나당전쟁은 671년 4월 석성 전투를 거쳐 675년 천성성 전투와 매초성 전투를 기점으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러나 신라는 가장 치열하였던 675년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반도 중부전선을 지켜냈다.
 그리고 이제 최후의 676년이 다가오고 있었다.


 676년이 되자 당의 도림성 공격으로 인하여 현령 거시지가 전사하는등, 전황은 신라에게 다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다만 당나라 역시 돌궐족이나 거란족의 확장을 막아야했으므로, 한반도 공략에 전력을 투입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따라서 당나라로서는 최대한 빠른시일내에 한반도 서부지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결정적인 대공세가 절실하였다.

 그리고 그 목표지점이 현재 충남장항 금강입구 일대로 알려져 있는 기벌포였다.  그렇다면 당나라는 왜 기벌포를 목표지점으로 삼았는가?
 우선 기벌포는 660년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하여 백제를 침공할 당시 13만명에 이르는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켰던 경험이 있었다. 따라서 주변 해류의 흐름은 물론 지형지물등에 매우 익숙한 지역이었다.
 또 흑지상지를 비롯하여 671년 석성전투에서 당나라측에 참여한 백제출신장군 2명등, 옛백제땅에는 여전히 반신라세력들이 상당수 있었다.
 이들을 회유하고 포섭한다면 옛 백제땅에 당나라 기지를 건설하고 장기전체제로 이끌어 가는 것도 가능하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안동도호(安東都護)  설인귀(薛仁貴)가 기벌포해안에 나타난 것은 변화무쌍하며 차가운 겨울바람이 부는 음11월이었다.   660년 원정당시는 날씨가 온화한 음 5월에서 6월 사이였다. 그렇다면 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병선들은 공격시기를 잘못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숫적으로 매우 열세에 있었던 신라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신라는 즉시
 사찬(沙飡) 시득(施得)이으로 하여금 신라 병선을 이끌고 기벌포 앞바다로 나가게 하였다.

 당시 신라병선의 규모는 정확치 않다. 다만 660년 나당연합당시, 당나라 군사에게 군량등을 전달해주기 위해 동원되었던 병선이 1백척인점을 고려해 본다면, 기벌포해전당시 동원되었던 병선은 적어도 2~3배 규모는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나라 수군은 10만여 명을 일시에 상륙시킬 수 있을 정도로 해전에 능숙하였다. 설인귀가 이끈 당나라 수군의 규모역시 전해지지 않지만 숫적으로 신라수군을 충분히 앞도하였을 것이다.

 사찬 시득은 결국 월등한 숫적열세를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시득이 해전에서 거둔 전술상의 이익은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즉 신라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인해, 당나라는 예상보다 많은 전력상의 손실을 입었을 것이며, 이것은 육지에 상륙하고서도 정상적인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해전에서 지칠대로 지친체 힘겹게 상륙한 당나라군에 대해, 신라는 맹렬한 공격을 퍼붇기 시작하였다.
 무려 22회에 걸친 치열한 격전, 신라는 이 전투에서  4,00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재차 말하자면 수급을 베는 행위는, 전투가 끝난 후 농공행상등을 위해 확인할 수 있는 적의 시신에 대해서만 제한적으로 이루어 진다.
 
 하지만 기벌포 해전은 해전과 육지전이 병행하여 이루어 졌는데, 해전의 경우 발생하는 익사자에 대해서는 수급을 베거나 그 숫자를 파악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기벌포전투의 경우 실제 전사자는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이며, 당나라는 기습적인 전략으로 옛 백제땅을 점령하려 하였지만, 오히려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체 두번다시는 한반도 땅을 복속할 계획을 철회할 수 밖에 없었다.

 676년 한 겨울철에 벌어진 기벌포대첩을 끝으로 신라와 당나라가 벌였던 6년간의 치열한 전쟁도 막을 내렸다. 기벌포 전투는 앞서도 지적하였듯, 기록에서 나타나는 것보다 당시의 전투규모가 훨씬 컸을 것으로 예측되고, 또 나당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승전이라는 점에서 대첩으로 평가된다.

 문무왕은 옛 백제땅을 지킨것뿐 아니라,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신라영토를 확정하고, 중국의 한반도 진출을  저지하였다는 점에서 신라역사상 최고의 제왕으로 평가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뿐만 한반도 주둔 당의 주력군을 격파함으로 인해, 평양지역에 설치하였던 안동도호부를 더이상 유지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로 인해 안동도호부는 요양지역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와 만주 일대는 다시 우리민족의 주측이 된 남북국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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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대왕왕이라고 부름)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미터 떨어져 있음


 문무왕은 나당전쟁이 끝난지 5년 후인 서기 681년 재위 21년만에 사망하였다. 유언에 따라 불교의 법식으로 화장하였으며, 동해에 묻으면 용으로 환생해서라도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문무왕의 위업은 거기에서 끝났다. 개인적으로 문무왕을 높게 평가하지만 위대한 제왕이라고 칭할 수는 없다고 본다.
 단지 당나라와 치열한 전투끝에 한반도를 지켜냈으면서도, 다시 친당정책으로 전한한 것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실리와 경제를 생각하는 측면에서 충분히 고려되야할 정책이다. 문무왕도 언제까지 영토확장에만 혈안이 되어 백성들을 끝없이 전쟁에 내몰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점을 고려 한다 하여도 안동 도호부가 철 수 한 평양땅에 대해, 어떠한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너무도 아쉽다.
 신라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대동강에서 원산만까지 확보한 것은 분명 최선을 다한 결과이긴 하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제왕이 되기 위해서는 최선의 결과를 넘어서는 위업이 필요하다. 

 또 삼한통일이라는 대업의 의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평양수복계획은 반드시 필요했다. 실리적인 측면을 고려 한다 해도 발해나 말갈족을 비롯한 북방유목민족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대동강이나 청천강보다는 압록강을 경계로 삼는 것이 효율적이다.

 적어도 삼국의 도읍이라도 병합해야, 삼한통일의 대의를 완성하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문무왕의 역사는 미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북방으로 진출하는 것이 발해의 성립으로 힘들었다면, 그 후대 왕이라도  설성왕 7년이후 점차 일본영토로 편입되었던 대마도에 대한 원정계획이라도 세웠어야 마땅하다. 그일은 문무왕이 유조로 남겼던 왜구의 해적행위 근절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일 것이다.

 이미 지나간 역사는 돌이킬 수 없고, 역사는 또 가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신라는 비록 최선을 다한 최상의 결과를 이루어 냈지만, 우리가 꿈꾸는 그리고 우리가 이루고 싶었던 그이상의 결과를 개척하여 나가지 못하였기에,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