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麗

조선의 북방경계 공험진(公險鎭)

吾心竹--오심죽-- 2010. 9. 2. 18:04

조선의 북방경계 공험진(公險鎭)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은 재위 4년인 서기1404  5월, 계품사 김첨을 명나라에게 파견하였다.  당시 중화문명의 확장을 추진하던 명나라는, 두만강 이북지역 전체까지 영유권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태종은 태조 이성계로부터 내려오던 고려영토 전역에 대한 승계방침을 굽히지 않았으며, 북방영토에 대한 조선의 입장을 밝히기 위해 주본과 함께 지도를 동봉하여 보냈다.

 전통적 봉건관계로 인해 영락(永樂)제에게 허락을 구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그 주본의 핵심내용은 공험진 이북은 요동에 환속시키더라도, 공험진 이남에서 철령까지는 조선에 환속시키겠다는 것이었다.
 또 공험진에 대한 영유권의 근거로,
1356년에 이르러 공민왕(恭愍王)이  공험진이남을 환속(還屬)시키고 관리를 정하여 관할하여 다스렸다는 것과,  그 이후 공험진으로부터 ·함주(咸州)에 이르는 영토도 조선의 영토로 관리하여 왔다는 것등을 들었다. 



*철령과 관련된 지도를 이것밖에는 구하지 못하였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이 철령을 경계로 북쪽을 함경도로 남쪽을 강원도로 정하였습니다.*

 이에대해 조선실록 세종 15년 1433년 3월 20일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선덕(宣德)제가
고황제(高皇帝=영락제)조선 지도(地圖)를 보고 조서(詔書)하기를, 공험진(公險鎭) 이남은 조선의 경계라. ’고 하였으니, 경들이 참고하여 아뢰라.”는 말을 하였다고 나온다.

 당시 조선과 명나라의 봉건관계를 고려해 볼 때, 중국황제의 공식적인 입장을 허위로 기제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험진 이남에 관한 영토문제는 양국의 합의아래 조선의 영토로 최종확정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동북경계는 두만강이 아니라 공험진이다.
 
 그렇다면 조선의 동북경계였던 공험진은 어디였는가?
 우선 세종실록 함길도
(咸吉道)에 보면 파아손(把兒遜)착화(着和) 등이  50여 호(戶)와 함께  공험진 이남 경원(慶源) 지방에 살고 있다고 나와있어, 공험진은 적어도 경원 이북지역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경원지역은 두만강 바로 아래쪽에 있지 않은가? 더구나  경원 위쪽으로 온성과 종성등이 두만강을 따라 위치해 있기 때문에 공험진은 두만강 이북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아래지도 참조, 파아손 착하등은 여진족 일원으로 생각됨*


  공험진까지 영유권에 관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 함경도편에 있다.

  함경도편에는 고려예종(睿宗) 2년  윤관(尹瓘)원수(元帥)로 삼아 군사 17만을 거느리고 동여진을 쳐서 몰아내고, 함주(咸州)에서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9성(九城)을 쌓아서 경계를 정하고, 비석(碑石)을 공험진선춘령(先春嶺)에 세웠다는 것이다.


 또 함경도에 대하여 동쪽은 바다에 접하고 서쪽은 평안도와 황해도에 접하였으며 북쪽은 야인(野人)의 땅에 연하였는데, 남쪽 철령으로부터 북쪽 공험진에 이르기까지 1천 7백 여 리라고 나온다.
 더구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백두산(白頭山)에서부터 철령(鐵嶺)에 이르는 준령이 천여 리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험진은 두만강이나 백두산 북쪽 7백여리 지점에서 찾아야 마땅하다.
 
  1439년 8월 세종대왕은 동북경계를 보다 확실하고 구체적으로 확정하기 위해 김종서에게 공험진의 위치·비 등 동복지방에 대해 아뢰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종실록 지리지에 나와있는 내용이 매우 구체적인 것으로 보아, 김종서는 실제답사한 내용을 토대로 보고하였음을 알 수 있다.

 우선 공험진(公險鎭)과 선춘령(先春嶺)을 지난다는 소하강(蘇下江)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른다고 되어있다.  더구나 이 강은 거양성(巨陽城)이라는 곳에서 동쪽으로 1백 20리를 흘러서 수빈강과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고 나온다. 거양성이 어느곳인지 현재로선 정확하게 추측하기 힘들지만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으로 흐르다가 다시 동쪽으로 꺽여지는 강을 한반도 내에서 찾을 수는 없다.

 공험진을 가기위해선 우선 선춘현(先春峴)을 지나야 하는데, 선춘현까지 가는 길을 다음과 같이 나와있다,
동림성(東林城)->북쪽35리->회질가탄(會叱家灘)에서 두만강을 도강 ->10리->현성 ->북쪽방향 90리-> 어라손참(於羅孫站)->북쪽30리->허을손참(虛乙孫站)->북쪽 60리->유선참(留善站)->동북쪽 70리 ->거양성(巨陽城: 윤관이 쌓은 성으로 나옴)->서쪽60리-> 선춘현(先春峴)


 공험진으로 가기위한 출발지인 동림성은 경원부에 속에 있는 성이다. 물론 현재평안북도에도 동림성이 있긴 하지만, 경원부에 속해 있는 동림성과는 전혀 관련없는 지역이다.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동림성(東林城)동쪽으로 두만강을 끼고 있으며, 태종 원년에 그 성을 수축하여 경원부의 산성(山城)으로 삼았다고 나오므로 의심할 여지없는 경원부 내의 성이다.  또 아오지 고성(阿吾知古城)이 동림성남쪽에 있다고 하여, 동림성의 위치가 아오지 인근임을 알 수 있다.
 즉 선춘현은 경원부 인근에서 두만강을 건너 북쪽으로 190리를 가다가 유선참에서 방향을 틀어 동북쪽으로 70리 이상을 더 올라간 후 서양성에서 서쪽으로 60여리를 가야한다. 

 선춘현의 위치에 대해서 이처럼 자세하게 기록한 것은, 그곳에 윤관이세운 비(碑)가 있기 때문이었다. 원래 이 비의 4면에 글이 새겨져 있었으나, 호인(胡人)이 그 글자를 깎아 버렸지만, 비석밑에 새긴‘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글자만은 온전하게 보존되어져, 세종대왕의 북방 국경선 확장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제 선춘현까지 왔지만, 선춘현은 공험진으로 가기위한 중간 지착지에 불과하다.

선춘현(先春峴)에서 수빈강(愁濱江)을 도강 ->소다로(所多老)->북쪽30리 -> 어두하현(於豆下峴)->북쪽 60리->동건리(童巾里)->두만강탄(豆滿江灘)도강->북쪽 90리->오동 사오리참(吾童沙吾里站)->북쪽60리->하이두은(河伊豆隱)->북쪽100리->영가 사오리참(英哥沙吾里站)->북쪽방면 소하강(蘇下江) ->공험진도착

 즉 선춘현에서 공험진까지의 거리도 340리가 되므로,  두만강을 건너 공험진까지는 북쪽으로 총 540~600여 리가 된다.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철령에서 백두산까지 가는 거리보다 경원부로 가는 거리가 더 멀다. 따라서 철령에서 백두산까지의 거리가 1천리이고 공험진까지의 거리는 1천 7백리라는 세종실록 지리지의 기록은 사실과 상당부분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영가 사오리(英哥沙吾里)에서 서쪽으로 60리를 가면 백두산(白頭山)이라고 나온다. 이것은 앞의 공험진까지 가는 여정과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이점을 들어 중국은 수빈강을 문헌상에만 등장하는 가상의 강으로 규정하고, 공험진을 한반도내로 국환시키거나 백두산 동쪽 60리 이내로 비정하고 있다.

  과연 이 한가지 기록만으로 앞서 상세한 모든 기록을 완전히 부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앞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기록상의 착오에 불과한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편찬자들의 의도적인 왜곡이었던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자 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이 총 4개 나온다. 동쪽은두만강(豆滿江), 북쪽은소하강(蘇下江) 남쪽은,압록(鴨綠)이 되고, 서쪽은 흑룡강(黑龍江)이 각각 그것이다. 
 이것은 백두산을 중심으로 뻗어가는 우리나라 영토의 형세를 고려하여,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뻗어가는 강의 방향역시 다소 관념적이라도 맞추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백두산인근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압록강과 합류하는 강을 흑룡강으로 비정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압록강은 남쪽으로 흐르다가 서쪽으로 꺽여 흐르므로 기록이 전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해석이 영가사오리참의 기록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위 내용을 보면 알겟지만, 백두산은 실측적인 자료라기 보다 다소 관념적이면서도 영토의 聖山(성산)으로서 상징적인 의미도 동시에 있는 곳이다. 따라서 영가사오리참과의 실제 거리는 6백리 이상이지만, 우리영토에 포함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다만 지리지에 나와있는 백두산을 아예 요동방면의 산이나 흑룡강성의 산에서 찾으려는 주장도 있긴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주장으로 보인다.



세종 실록 지리지에는 공험진의 위치에 대해서는 북쪽으로견주(堅州)에, 남은 구주(具州)·탐주(探州)에 접해 있었다고 기록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문헌비고(文獻備考)》등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견주와 구주 탐주등은 모두 두만강 동북쪽에서 발견되는 지역명칭이다. 따라서 이 모든 역사적 자료를 종합적으로 볼 때, 공험진 현재 북한 아오지에서 북쪽으로 최소 200km(500리)이상 올라간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최종판단은 각자의 몫이겠지만 조선 영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 서북피아 양계 만리 일람지 전도애 표시된 고려경은, 조선시대 북방경계가 결코 두만강에서 끝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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