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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대 우왕 (禑王 1364∼1389 / 제33대 창왕 (昌王 1380~1389)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8:07

제32대  우왕 (禑王 1364∼1389(공민왕 13∼공양왕 1))

고려 제32대 왕(1375∼88). 아명은 모니노(牟尼奴). 신돈(辛旽)의 시비(侍婢) 반야(般若)의 소생으로, 1371년(공민왕 20) 궁중에 들어가 우(禑)라는 이름을 받고 강녕부원대군(江寧府院大君)에 봉해졌다. 백문보(白文寶)·정추(鄭樞) 등에게 학문을 배웠다. 1374년 공민왕이 시해된 뒤 이인임(李仁任)·왕안덕(王安德) 등에 의해 옹립되어 10세에 즉위했다. 즉위 초부터 중국 명(明)나라와의 복잡한 외교문제가 발생하고 왜구의 약탈이 극심하여 불안한 정세를 맞았다. 그러나 정사는 돌보지 않고 사냥이나 유희를 즐겼다. 1388년 명나라에서 철령위(鐵嶺衛) 설치를 통고해 오자 최영(崔瑩)의 주장에 따라 요동정벌(遼東征伐)을 단행했는데, 이성계(李成桂)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요동정벌은 실현되지 못하고 최영이 실각하자 우왕은 폐위되어 강화도(江華島)에 안치되었다. 여흥(驪興;지금의 驪州)을 거쳐 강릉(江陵)으로 이배되었다가 공양왕 때에 서균형(徐均衡)에게 죽음을 당했다.


 

 

제33대 창왕 (昌王 1380∼1389(우왕 6∼공양왕 1)) 
 

 

고려 제33대 왕(1388∼89). 이름은 창(昌). 우왕의 아들로, 1388년(우왕 14)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후 이성계(李成桂)가 우왕을 폐위하고 강화(江華)로 추방하자 조민수(曺敏修)와 이색(李穡)의 추천으로 정비(定妃;공민왕비)의 교지(敎旨)를 받아 즉위하였다. 그해 도평의사사·사헌부·판도사(版圖司)로 하여금 토지제도를 바로잡는 방법을 보고하게 하고 뇌물을 금지시켰으며 형벌을 신중히 처리하게 하였다. 또 전왕인 우왕을 강화에서 여흥군(驪興郡;지금의 驪州)으로 옮겼으며 최영(崔瑩)을 충주(忠州)로 귀양보냈다가 죽였다. 한편 전선법(銓選法)을 복구하여 문무의 전주(銓注)는 이부와 병부에서 맡게 하였고, 정방(政房)을 폐지하고 상서사(尙瑞司)를 두었으며 급전도감(給田都監)을 설치하였다. 1389년 사관(史官) 8명을 두되 사초(史草) 2부를 작성하여 뒤에 증거로 삼게 하였고, 주(州)·군(郡)에 의창(義倉)을 설치하였으며, 전객령(典客令) 김윤후(金允厚) 등을 보빙(報聘)을 목적으로 유구국(琉球國)에 보냈다. 또 경기(京畿)땅은 사대부에게 지급하고 그 밖의 땅은 모두 공상(供上)과 제사 용도에 충당하여 녹봉과 군수(軍需)의 비용을 충족하게 하였으며, 산기(散騎) 이상의 처로 명부(命婦)가 된 자는 재가를 금하였다. 또한 전왕인 우왕을 여흥군에서 강릉부로 옮겼다. 그 뒤 이성계 등에 의해 폐위되어 강화로 쫓겨났다가 그해 12월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