天衣無縫

이안눌 (조선 문신) [李安訥]

吾心竹--오심죽-- 2009. 11. 25. 18:50

            四月十五日

                                    東岳 李安訥

 

四月十五日  平明家家哭  天地變蕭瑟  凄風振林木

驚怪問老吏  哭聲何慘怛  壬辰海賊至  是日城陷沒

惟時宋使君  堅壁守忠節  闔境驅入城  同時化爲血

投身積屍底  千百遺一二  所以逢是日  設尊哭其死

父或哭其子  子或哭其父  祖或哭其孫  孫或哭其祖

亦有母哭女  亦有女哭母  亦有婦哭夫  亦有夫哭婦

兄弟與姉妹  有生皆哭之  蹙額聽未終  涕泗忽交頤

吏乃前致詞  有哭猶未悲  幾多白刃下  擧族無哭者

                                 萊山錄 卷 8


                  사월십오일

                                    동악 이안눌

사월십오일  평명가가곡  천지변소슬  처풍진림목

경괴문노리  곡성하참달  임진해적지  시일성함몰

유시송사군  견벽수충절  합경구입성  동시화위혈

투신적시저  천백유일이  소이봉시일  설존곡기사

부혹곡기자  자혹곡기부  조혹곡기손  손혹곡기조

역유모곡녀  역유여곡모  역유부곡부  역유부곡부

형제여자매  유생개곡지  축액청미종  체사홀교이

이내전치사  유곡유미비  기다백인하  거족무곡자

                                 래산록 권 8



처凄 - 쓸쓸하다,

진振 - 떨치다,

참慘 - 참혹하다, 비참하다,

달怛 - 슬프다, 놀라다,

합闔 - 문짝,

축蹙 - 가까이 대들다, 궁지에 빠지다, 오므라들다,

체涕 - 눈물, 울다,

이頤 - 턱, 기르다, 봉양하다,

송사또는 宋象賢을 말합니다.


이안눌은 1571년 6월 한양에서 태어났습니다. 1592년 4월 14일 왜구가 부산포에 상륙하고 선조는 4월 30일 새벽 한양을 버리고 피난길에 오릅니다. 이안눌도 함경도로 피난을 갑니다. 임란을 겪고 1599년 정시에서 12韻 排律 ‘인정전’을 지어 을과 제1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라 피난길 마을들로 부임해 다니다가 1607년 12월 21일 東萊 부사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 작품은 동래 東軒에 쓴 작품입니다. 



         4월 15일

                            동곡 이안눌

새벽 집집마다 곡을 하니

천지가 온통 쓸쓸하게 변하고

스산한 바람이 숲을 뒤흔든다.

놀라고 기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지

“통곡 소리 어찌 이리 참혹한가?”

“임진년 왜구가 이르러

이 날 성안이 함몰 되었소

다만 이때 송 사또만 있어서

성벽을 굳게 닫고 충절을 지키니

경내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몰려들어

동시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쌓인 주검에 몸을 던졌으니

천 명 중에 한 두 명만 살아났지요.

이 때문에 이 날에는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아버지가 자식위해 곡하기도 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곡하기도 하고

할아비가 손자 위해 곡하기도 하고

손자가 할아비를 위해 곡하기도 하고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을 하고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을 하고

또 아낙네는 남편 때문에 곡을 하고

또 남편은 아내 때문에 곡을 하고

형제와 자매까지

산 자는 모두 곡을 한다오.“

찡그린 채 차마 다 듣지 못하는데

눈물이 문득 뺨에 가득하네.

아전이 앞에 나와 다시 말하기를

“곡할 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요,

얼마나 많은데요, 퍼런 칼날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할 이 조차 없는 사람이“

 

이안눌 (조선 문신)  [李安訥]
 
1571(선조 4)~1637(인조 15).
 
조선 중기의 문신.
 
이안눌 /이안눌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자민(子敏), 호는 동악(東岳). 증조할아버지는 행(荇)이고, 아버지는 진사 형(泂)이다.
이식(李植)의 종숙(從叔)이다.
18세에 진사시에 수석하여 성시(省試)에 응시하려던 중 동료의 모함을 받아 과거 볼 생각을 포기하고 문학에 열중했다.
이때 동년배인 권필(權韠)과 선배인 윤근수(尹根壽)·이호민(李好閔)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갖기도 했다.
 
1599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언관직(言官職)을 거쳐 예조와 이조의 정랑으로 있다가 1601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직강(成均直講)으로 옮겨 봉조하(奉朝賀)를 겸했다. 1607년 홍주목사·동래부사, 1610년 담양부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병을 이유로 돌아왔다.
 
 3년 후에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동부승지와 좌부승지를 거쳐 강화부사가 되었다. 어머니의 3년상을 마치자 인조반정으로 다시 등용, 예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했다.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에 방관했다는 이유로 유배되었으며,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사면되어 강도유수(江都留守)에 임명되었다. 1631년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고, 예조판서 겸 예문관제학을 거쳐 충청도 도순찰사에 제수되었으며 그후 형조판서 겸 홍문관제학에 임명되었다.
 
병자호란 때에 병중 노구를 이끌고 왕을 호종하다가 병세가 더하여 결국 일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도학(道學)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문학에 힘쓰되 평생
"뜻을 얻으면 경제일세(經濟一世)하고 뜻을 잃으면 은둔한거(隱遁閑居)한다"는 의지를 가지고 살았다.
특히 시작(詩作)에 주력하여 문집에 4,379수라는 방대한 양의 시를 남기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으면서도 작품창작에 매우 신중해서 일자일구(一字一句)도 가벼이 쓰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시에 대해서 독실히 공부하는 태도를 견지하여 두시(杜詩)는 만독(萬讀)이나 했다고 하며, 여기서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을 듣고 지은 절구(絶句) 〈문가 聞歌〉가 특히 애창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다음 동래부사로 부임하여 지은 〈동래사월십오일 東萊四月十五日〉은 사실적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시는 절실한 주제를 기발한 시상으로 표현한 점에서 높이 평가되며, 그가 옮겨다닌 지방의 민중생활사 및 사회사적 자료를 담고 있다. 특히 그의 생애가 임진왜란·병자호란의 양란에 걸쳐 있으므로 전란으로 황폐해진 당시의 상황을 그의 시를 통하여 추적해볼 수 있다.
 
저서로는 〈동악집〉이 있다. 의정부좌찬성 겸 홍문관대제학·예문관대제학에 추증되었으며,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과 면천의 향사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