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청주 상당산성

吾心竹--오심죽-- 2009. 11. 6. 12:01
한민족 공동체는 산성에서 시작됐다
<최진연의 우리 터 우리 혼>삼국에서 조선후기까지 수명 가장 긴 상당산성.
최진연 기자 (2008.09.08 10: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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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벽아래로 청주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최진연 기자

조선은‘성곽의 나라‘ 라 할 만큼 전국각지에 남아 있는 산성들은 저마다 각 지형에 따라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청주 땅 지킴이 상당산성도 꼬불꼬불한 산 능선을 타고 넘는 성벽은 도시와 농촌이 끝없이 내려다보이는 정겨운 길이다.

지난 7월 하순 세계문화유산 등재신청을 위한 한국성곽학회 학술대회가 열렸다.

상당산성을 주제로 발표한 노병식(충북문화재)연구원은 상당산성의 예찬론자다.

◇ 호박넝쿨 뒤편으로 동문이 보인다. ⓒ최진연 기자
그는‘우리나라에서 산성이 밀집돼 있는 중부내륙에 상당산성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 지역 산성들은 고대에 축성됐고, 산성들은 역사 발전과 함께 사회와 경제적인 위치에 따라 변천돼 왔습니다. 군사적 전술도 시대의 변화로 소총, 대포 등 신식무기로 바뀌어졌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국내산성들은 성곽의 기능을 잃었고, 폐성되면서 원형마저 멸실됐습니다. 하지만 축성에서 조선후기까지 1500여 년간 산성의 역할을 다 한곳은 상당산성이 유일합니다. 우리선조들은 나라를 위해 곳곳에 산성을 쌓았고, 성벽이 무너지면 인근백성들을 동원해 새로 쌓고 쉼 없이 보살펴왔습니다. 나라의 안녕을 위해 산성 높은 곳에 천제단을 만들어 하늘에 제를 올렸습니다. 또한 산성 한적한 곳에는 성황당을 지어 백성들의 안위를 빌었습니다.성곽안에서 오천년 역사를 지켜왔습니다. 한민족의 문화와 공동체 의식이 산성에서 시작됐습니다´라고 말했다.

전국에서 모인 회원들은 학술대회를 마치고 상당산성을 답사했다. 폭염에 누구 할 것 없이 구슬땀에 온몸이 범벅이 됐다.

청주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동행한 성곽학회 회장 차용걸 교수는‘산 아래 토성으로 쌓은 우암산성이 있고 시가지에는 청주읍성이 있습니다. 그 너머에 부모산성이 청주를 막아섰습니다. 3중의 방어시설 배후에 상당산성이 자리 잡았다고´ 했다.

◇ 밖에서 본 동문 ⓒ최진연 기자

상당산성이 있는 곳은 청주읍성에서 서쪽으로 5km 떨어진 가장 높은 산 정상부와 계곡을 휘감아 쌓았다.

외부에서는 성 내부를 전혀 볼 수 없는 지형으로 유사시 인근 백성들의 피난처였다. 삼국시기에 청주를 가장먼저 차지한 세력은 백제였다. 한때 고구려도 북쪽지역을 점령했고 그 후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이곳을 지배 했다. 궁예와 견훤의 치열한 격전지도 청주였다. 후 삼국을 통일한 고려 왕건은 청주지역에 직접 행차하여 나성을 쌓았다.

조선시대 효종은(1651)청주지역이 경상, 전라, 충청 삼남의 요충지 되자, 충청도 54개 고을을 총괄하는 충청도병마절도사 병영을 해미에서 청주로 옮겼다.

◇ 홍예의 남문을 들어서는 관광객 ⓒ최진연 기자
상당산성의 초기축성은 기록이 없지만 백제의 고성, 또는 신라가 쌓았다고만 전해진다.

초기에는 토성으로 쌓았다. 시대가 다른 보수한 성벽도 곳곳에 나타난다.

현재의 석성은 1716년 숙종 42년에 대대적으로 개축했다. 전체 산성둘레가 4.2km, 높이 3~4m. 면적 22만여 평의 거대한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바깥은 수직에 가까운 인공암벽을 쌓고 그 안쪽은 흙을 쌓아 내탁공법으로 축조했다. 동·서·남 3곳의 성문은 원형 그대로 이며, 성문위의 누각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인 1978년에 복원했다.

산성의 정문인 공남문을 제외한 동문과 서문은 네모반듯하게 설계했다. 산성 정상에 동장대와 서장대를 두었고, 동과 서쪽에 암문, 3곳에 치성을 두었다. 수문 하나와 3개의 수구가 현재까지도 물을 뿜어낸다.

성안에는 큰 사찰 2곳도 있었으나 변란시 모두 타버렸고 지금 저수지 위쪽으로 관청 터와 군 창고의 건물지의 흔적이 남아 있다.

성곽은 성벽만으로 축조되는 것이 아니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에 갖가지 부대시설과 보호시설을 마련해야 한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시설물로는 여장, 치, 해자 등을 꼽을 수 가 있다. 여장은 성벽 위에 설치한 낮은 담장과 같은 구조물로 총안과 타구 화살을 쏘기 위한 구멍을 말한다. 치성은 성벽외부에 돌출시켜 적의 접근을 빨리 발견하고 적이 성 아래로 접근하면 정면, 측면에서 격퇴시키는 구조물이다.

◇ 산성의 정문인 공남문(남문) ⓒ최진연 기자

해자는 성벽 바깥쪽이나 안쪽에 도랑을 만들어 물을 저장해 적의 접근을 막기 위한 시설물이다. 성벽이 몸통이라면 성문은 얼굴에 해당된다. 성문은 성안에 사는 사람과 물자의 통행을 편리하게 하는 곳이며 유사시에는 적의 주공격 대상이 되고 만다. 그래서 성문은 장중한 구조의 문루와 높은 대를 세우고 성문 주변에 옹성이나 적대를 설치했다.

◇ 서남 암문에서 성곽학회 회원들 ⓒ최진연 기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있던 상당산성은 이제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산성입구에서 보면 마치 잘 단장된 공원 같다. 계단을 올라가면 산성의 정문인 공남문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성문은 안과 밖에 석축의 홍예를 둘렀고, 홍예위에는 누각을 올렸다. 성문 벽면 4곳에는 성곽개축 당시 책임자의 이름과 시설물을 기록해 놓은 각자(刻字)가 새겨져 있다.

상당산성에는 다른 성곽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조물이 있다. 성문안쪽의 옹성이다. 옹성은 성문 바깥에 축조하는 것이 원칙인데 이곳은 국내서 유일하게 성문안쪽에 옹성을 만들었다. 성문 앞에 옹성을 축조할 공간이 부족해서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 미호문(서문)의 아름다운 자태 ⓒ최진연 기자

남문에서 어느 정도 오르면 편편한 성벽이 이어진다. 이곳에서 청주의 발전된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청원 땅의 드넓은 평야가 눈 아래로 펼쳐진다. 맑은 날은 50km 떨어진 음성의 망이산성도 조망된다. 시리도록 파란 하늘에 핀 뭉개구름은 온갖 아름다움을 수놓고 있다.

남문에서 서문, 그리고 동문 가는 성벽 길은 독특한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성벽 길은 어린이도 쉽게 갈 수 있도록 정비를 해 놓았다. 군데군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시설도 만들어져있다. 역사향기 가득한 상당산성은 특히 아베크족들에게 인기코스다.

지정 - 상당산성(사적212호).
위치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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