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찾아서

吾心竹--오심죽-- 2009. 11. 4. 16:57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찾아서

2007년 6월 11일, 한 주일의 첫 근무일인 월요일이지만 주말 근무로 인한 대휴로 월,화요일은 집에서 쉴 수 있는 날이었다. 주말에는 시간적 제약때문에 먼 곳을 여행하지 못했지만, 평일은 고속도로에 차도 많지 않을 것이고 사람도 없는 그런 날이기에 평소와는 달리 장거리 여행 계획을 잡았다. 이번에 가고자 하는 곳은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 한국의 대표적인 3대 산성 중 하나이기에 왠지 모르게 구미가 당겼다.

오전 10시 반에 출발한 나는 1시 반 정도에 삼년산성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많이 늦었는데 경부고속도로 기흥IC에서 사고 여파로 차가 많이 막혔고 또 하나는 새로 산 네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목청껏 부르다 진입해야할 청주IC를 훌쩍 건너뛰었기 때문에 예상시간 보다 1시간이 더 소요되었다. 눈물을 머금고 40km를 더 가서옥천IC로 진입해서 보은으로 향했다.

옥천IC에서 보은으로 가는 길은 30km 정도로 왕복 2차선 도로이고 제한속도는 50km 이다. 사실 더 이상 엑셀레이터를 밟고 싶어도 밟을 수 없을 정도로 길이 구불구불하다. 길 곳곳에 설치되어 친절하게 단속구간이라고 알려주는 표지판을 보니 내 오른발의 힘이 저절로 빠진다. 40분 정도 구불구불한 길을 가니 보은시가지가 나왔다. 삼년산성은 보은 군청 바로 앞에 있다. 보은정보고등학교 뒤편의 길을 따라 1분 정도 차를 몰고 올라가니 목적지인 삼년산성이 어느덧 내 눈앞에 나타났다.

삼년산성이 만약 사람이라면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해야겠다. 처음 본 순간 산 능선 위에 석재를 보기좋게 야적해놓은 줄 알았다. 겉보기에는 성곽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위 사진 중간에 있는 날렵하게 잘 빠진 치(雉)가 이 돌무더기가 성벽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삼년산성 진입로에는 위의 돌 무더기가 산성이라고 알려주는 표지판도, 심지어 입장료를 받는 곳도 없었다. 물론 주차장도없다. 길 가에 차를 세워놓고 조심스레 올라가 본다. 삼년산성 아래에는 민가가 3~4채 정도 있었다. 궁금한것을 물어보려 했지만 인기척을 찾아볼 수 없고 그 자리는 소의 울음소리가 대신하고 있었다.


위로 올라가니 더욱더 난감해졌다. 삼년산성으로 올라가는 길이 없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산성이라는 삼년산성에 올라가는 길 조차 없다니. 상주에 있는 병풍산성(屛風山城)을 탈 때 길이 없던 느낌이랄까. 병풍산성은 성벽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다행히 삼년산성은 아래에서도 성벽이 또렷히 잘 보이니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쉰다. 주차장에서 길을 따라 위로 올라가서 왼쪽에 보면 자그맣게 삼년산성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 있다. 
 


삼년산성의 족보

삼년산성은 우리나라 산성 연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부분의 산성은 축성년도, 축성 소요시간과 동원 인력 등 축성 시 정보가 없는데 비해 삼년산성은 지은 시기와 축성 시 소요시간, 동원 인력 등 축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남아있기 때문이다. 삼년산성은 삼국사기(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新羅本紀)에 따르면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 축성을 시작하여 3년만에 공사를 마쳤다. 그래서 삼년산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간단 명료하고 정직한 작명 센스가 아닐 수 없다. 이후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이찬(伊 )인 실죽(實竹)을 제수하여 장군으로 삼아 일선군(一善郡)지역의 장정 3천명을 징발하여 삼년산성(三年山城)과 굴산성(屈山城)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당시 건축한 성은 비단 삼년산성 뿐만이 아니었다. 과거 한국의 '개발독재의 상징'으로 불리우는 박정희를 능가할 정도로 온 국토를 건축현장으로 만든이가 있었으니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재위 458-479년)과 그의 아들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재위479-500년)이 주인공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보자면 자비마립간은 재위 11년(468)에 이하(泥河, 오늘날 강릉 북부)라는 곳에 성을 쌓은일을 시작으로, 앞서 밝혔다시피 2년 뒤인 13년(470)에는 충북 보은에 삼년산성(三年山城)을 쌓았다. 그 이듬해(471)에는 다시 모로성(芼老城)을 쌓았고 16년(473) 가을에는 명활성(明活城)을 수리한다. 이어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漢城)을 함락시키던 475년에는 일모성(一牟城)ㆍ사시성(沙尸城)ㆍ광석성(廣石城)ㆍ답달성(沓達城)ㆍ구례성(仇禮城)ㆍ좌라성(坐羅城) 등을 연거푸 쌓았다.  이 정도 건축규모라면 온 백성을 동원하여 성을 수축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건설 한국'의 신화는 괜히 생긴게 아니었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지마립간은 재위 7년(485) 봄에 구벌성(仇伐城)을 새로 만들더니 이듬해(486)에는 삼년산성과 굴산성(屈山城)을 동시에 수리하고, 재위 10년(488) 도나성(刀那城)을 쌓고, 12년(490) 봄에는 비라성(鄙羅城)이란 곳을 수축했다. 게다가 재위 15년(493)에는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嶺鎭)의 두 진(鎭)을 설치함으로써 왜적에 대비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이 멀다하고 성을 수축한 이유는 고구려와의 친선관계가 깨졌기 때문이다. 450년은 신라의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 34년인 450년7월에 실직(悉直, 오늘날의 삼척 지방)까지 내려와 사냥을 하던 고구려의 장수를 하슬라(何瑟羅, 오늘날의 강릉 지방) 성주였던 삼직(三直)이 몰래 죽인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장수왕은 매우 노했다. 사신을 보내 꾸짖으며 한편으로는 군대를 일으켜 신라의 서쪽 변경으로 진격케 하였다. 그 사건은 신라 왕이 사죄하여 일단락 되었지만, 결정적으로 틀어져버린 관계는 결국 원상태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시각각 고구려의 위협이 커짐에 따라 이에 대한 방비를 강화하고자 온 동네를 공사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방비의 중심에 삼년산성이 있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다른 성을 쌓은 것은 짤막하게 서술하였으나, 삼년산성은유난히 자세히 기술하였다. 그 기록은 단지 삼년산성을 쌓을 때 3년이 걸려 이름을 그렇게 불렀다는 재미있는 일화를 전해주는 것이아니다. 온 신라 영토가 공사판이던 이 시기에 축조된 성들 가운데 가장 심혈을 기울여 쌓은 성이 삼년산성 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시기 수축한 수 많은 성 중에 삼년산성에 시선이 집중되어 있을까? 


삼년산성을 통하지 않고는 삼남을 지배할 수 없다


소백산맥이라는 천연의 울타리에 둘러 쌓여있는 경상도로 넘어가려면 3가지 길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중부고속도로가 지나고 있는 죽령(경북 풍기)를 넘는 방법이 그 첫 번째이다. 두 번째는 과거 '영남대로'로 불리던 교통로가 있는 계립령을 넘어 문경을 거쳐넘어가는 방법. 세 번째는 보은 지방을 거쳐 화령을 넘어 상주로 넘아가는  방법이 있다.

 이 중 보은 지방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고 조선시대까지 최고의 고속도로인 한강 상류와 금강 상류가 시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서 삼년산성을 주목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곳에 우뚝 서있는 삼년산성은 경상· 전라· 충청 교착 지점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곳을 점령하지 않고서는 그 어느 쪽도 진출할 수 없는 삼남의 요충지였다. 삼년산성을 중심으로 상주방면으로는 관기산성이 상주방면과 청산방면을 막는 한편, 금계천이 합류되는 보청천을 통해 청산의 산계리토성(굴산성)과 통하게 되는 지리적 이점을 갖고 있다. 삼년산성의 서남쪽으로는청산방면을 거쳐 영동·옥천 방면의 많은 성들과 연결된다. 북으로는 바로 마주 건너다 보이는 보은읍 학림리의 함림산성을 거쳐창리의 주성산성, 미원의 성재산성과 연결되고 여기에 청주의 상당산성과 구녀산성으로 이어지도록 되어 있다. 또 북동쪽으로 백현산성을 거쳐 청천, 괴산 방면으로 이어진다.

삼년산성을 쌓은 사실은 단순히 성을 수축했다는 사실 그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소백산맥 안쪽의 작은 국가에서 머무르던 신라가 드디어 신라가 밖으로 그 힘을 뻗어나가는 전략 거점을 확보했다는 의미이다. 훗날 김유신 군대는 삼년산성 - 산계리토성(옥천) - 장군재(옥천) - 구진벼루(옥천) - 군서(옥천) - 마전 금산 - 탄현을 경유 황산벌로 진격하여 계백이 거느린 백제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이게 된다.



삼년산성에 오르다

6월 중순, 햇볕이 한창 뜨거울 시기이다. 하지만 마치 나에게 어서 오라고 유혹하듯 성곽을 향해있는 길의 양 옆에는아름드리 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시원한 바람이 산 위에서 불어오고 있었다.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서 바람을 맞으니 정말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극락의 기분도 잠시, 곧 삼년산성의 성문에 이르렀다. 


성문 치곤 좀 넓은데.. 위 사진이 서문지(西門址) 이다. '서문의 터'라는 뜻인데 원래는 문이 있었으나 미처 복구가 안된듯 하다.












이제 삼년산성의 특징에 대해서 설명할 때가 되었다. 삼년산성은 성벽이 동·남·북의 능선을 두르고 서쪽의 계곡을 감싸고 있는 전형적인 포곡식 산성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1,680m이다.

직접 잰 너비는 5m~8m, 높이는 13∼20m로 다른 산성과 마찬가지로 지형을 따라 수축했기 때문에 지형에 따라 다르다. 성의 길이는 성의 내외벽은 장방형의 길고 납작한 자연석으로 다른 산성과는 다르게 '+' 기호 처럼 한 켜는 가로쌓기를 하고 한 켜는세로쌓기를 하였다. 어떠한 공격에도 바위처럼 강인하게 견뎌낼 수 있을 것만 같다. 돌의 크기는 다양한데 서문지의 돌의 크기는 보통 40 x 20 cm 내외였다. 





성벽이 높고 거의 수직으로 쌓여있기 때문에 하중이 막대하여, 아래의 남서쪽 치와 같이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해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하단부를 계단식으로 쌓았다. 많은 성을 다녀봤지만, 삼년산성처럼 견고하고 높고 넓은 성벽은 처음본다. 신라가 혼신의 힘을 다해서 쌓은 흔적을 돌 하나 하나마다 확인할 수 있었다. 


서문 바로 안쪽에는 여성의 눈썹같이 아름다운 연못이라는 뜻의 아미지( 眉池)라는 연못이 있다. 한 때 산성 내부의 우물이 모두 흘러들어 성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의 소중한 식수원이었을 이 곳은 지금은 자연의 미물들을 품고있는 자그마한 연못이 되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하고 있었다.


서문에서 몸을 왼쪽으로 틀어 북쪽으로 향했다. 굉장히 더운 날씨라 몇 발자욱 걷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약 10여분 동안 올라갔을까, 어느 순간 경사가 완만해지면서 한 줌의 평지가 있었고 더 이상 올라가는 계단은 보이지 않는다. 가뿐 숨을 잠시 가다듬고 주위를 둘러봤다. 서문과 북문 사이에 있는 능선인데, 울창한 나무 숲에 가려 성 내부를 볼 수 없었기에 내가 서있는 위치가 제일 높은 봉우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상당히 높았다. 높은 만큼 서문지보다는 성벽이 낮은 편이었고 안을 흙으로 내탁을하여서 성벽에 오른다기 보다는 마치 다이빙하기 위해서 높은 곳에 선 수영 선수의 느낌이랄까. 그 만큼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경사는 매우 가파른 만큼 눈 앞에 펼쳐진 풍경은 저절로 탄성을 자아냈다. 

이제 왜 삼년산성이 이 곳에 세워졌는지 그 이유를 알 것같다. 삼년산성이 뿌리박고 있는, 내가 밟고 있는 산은 오정산으로 해발 325.5m 에 지나지 않는 평범한 야산이다. 그러나 눈에 아른거리는 산 보다는 낮지만 주위에서 가장 높은 산으로서 넓은 평야지대를 끼고 있고 사방을 한 눈에 감시할 수 있는 곳에 위치해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 고적에 따르면『오정산성(烏頂山城)은 현 동쪽 5리 지점에 있으니 즉 삼년산성(三年山城)이다. 그것을 쌓는데 삼년에 공사를 마쳐서 그렇게 이름붙인 것이다.』라는 기록이 전해져 온다. (원문 : 新增東國輿地勝覽 報恩縣 古跡 . 烏頂山城, 在縣東五里, 卽三年山城也.築之三年訖功, 故名.)



시선을 북쪽으로 돌려 몇 발자욱 움직이니 
내리막과 함께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내려 마치 무덤처럼 보이는 돌무더기가 보였다. 

아까서서 둘러본 곳도 머리 위에 머리카락이 나듯이 성벽 위에 수풀이 무성하여 성벽의 노쇠화를 더욱도 가속시키고 있었는데 북문으로 향하는 성벽도 또한 그러했다. 성벽 위에 무성히 자란 풀과 세월의 모진 풍파를 온 몸으로 맞은 성벽은 몸의 일부가 무너져 마치 폐허가 된 초가집을 연상케했다
.

성벽은 산의 지형을 따라 이어져 있었으며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낮은 곳도, 높은 곳도 있다. 이는 우리나라 성곽의 대표적인 특징의 하나로, 자연지물을 그대로 이용하여 성을 쌓았기때문에 중국의 성곽처럼 자로 잰 듯이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이라거나, 혹은 일본의 성곽처럼 천수각이 주위를 압도하는 웅장한 위용을 뽐내는 것과는 달리, 마치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칫하면 못보고 지나칠 수 있을 정도로 수수하다.

△ 북문지 근처의 성벽. 북문지와 동문지 사이에 있으며 직접 잰 높이는 12m 나 되었다(!)

백제 성왕의 꿈을 좌절시킨 신라 삼년산성 출신의 도도 

한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백제의 부흥을 꿈꾸던 성왕(聖王)이 신라를 공격하다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백제 성왕이 전쟁터에서 전사한 시점부터 신라가 백제보다 우위에 서며, 백제는 그 이후로 계속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성왕이 삼년산성에서 전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삼년산성 출신의 도도(都刀)라는 장수가 성왕의 목숨을 거둠으로써 그 이후의 한반도 역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았다. 

성왕의 전사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551년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76년만에 한강 하류 6군을 점령한다. 그러나 2년 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공격하여 백제는 눈물을 머금고 한강 하류 6군을 신라에게 넘겨줄 수 밖에 없었다. 이에 원한을 가진 성왕은 가야, 왜와 더불어 신라를 공격하였다. 

신라본기 진흥왕 15년의 기록을 보면 초반에는 이 연합군의 기세가 대단했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管山城, 현재 충북 옥천)에 쳐들어왔다. 군주(軍主) 각간(角干)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 등이 이들과 맞서 싸웠는데 불리하였다

이 연합군을 이끄는 총 사령관은 태자인 부여창이었다. 551년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를 수복할 때 백제군을 이끈만큼 어느정도 군을 지휘할 수 잇는 능력있는 사람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딱 3년 후인 554년, 이 연합군에 뭔가 문제가 생긴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명왕(明王 - 백제 성왕)은 여창이 오랫동안 행군하느라 고통을 겪고 한참 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고자 하였다. 

성왕이 너무나 자식을 아끼는 자애로운 아버지여서 정벌군에 아무 문제가 없어도 직접 가서 위로하고자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야밤에도 정벌군이 주둔하고 있는 방향으로 말을 달려야 했을가? 아래는 백제본기 기록이다. 

성왕 32년(554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라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정벌군 내에 급박한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성왕이 직접 가야 할 만큼. 그런데 신라는 성왕이 백제군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음은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신라는 명왕(明王- 백제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일본서기는 성왕의 죽음을 상세하기 기술해놓았다. 
신라는 명왕(明王- 백제 성왕)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때 신라에서 좌지촌(佐知村) 출신의 사마노(飼馬奴, 말을 기르는 사람)  고도(苦道) - 다른 이름은 곡지이다.-에게  

"고도는 천한 노이고 명왕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 라고 하였다. 

얼마후 고도가 명왕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하옵니다" 라고 청하였다. 
그러자 명왕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 
고 하니 고도가  "우리나라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 
라고 하였다. 

- 다른 기록에는 "명왕이 호상에 걸터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에게 풀어 주어 배게 했다"라고 하고 있다. 

명왕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 라고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 당했다. 

고도는 머리를 베어 명왕을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도도의 칼날 아래 백제 부흥의 꿈은 성왕과 함께 사라져버린다. 이후 신라군의 총 공격에 백제군은 처참한 패배를 당하고 태자인 부여창은 겨우 탈출하여 성왕의 뒤를 잇는다. 이가 위덕왕이다. 

신주군주(新州軍主) 김무력이 주(州)의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급히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4명과 군사 2만 9천 6백명을 목 베었고 한 마리의 말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 - 신라본기 진흥왕 15년

여창(부여창)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이 국조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
- 일본서기 흠명천왕 15년 12월조 (서기 554년) 記事

이후로 대성(大性) 8족(族)이 발호하여 왕권이 크게 위축되었으며 위덕왕 말기에 가서야 가까스로 국력을 회복하였다. 


삼년산성을 내려오다


시내를 바라보는 서문지와 그 근처 성벽들은 겉보기에는 나름대로 복원되었지만 실제로 돌을 살펴보면 성을 쌓은 돌과 다른 돌도 많아서 영 어색하다. 그나마 나머지 부분은 군데군데 무너져서 복원을 기다리는 곳도 많았고 북, 동, 남문지는 아직까지 발굴작업이 끝나지 않은것 같았다. 성을 한 바퀴 천천히 돌고오니 시계는 오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6월의 해는 길지만, 사람들의 퇴근 시간은 언제나 일정하다. 퇴근 차량때문에 경부 고속도로가 막힐까 두려워 서둘러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