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山城 探訪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파사성(婆娑城)

吾心竹--오심죽-- 2009. 11. 4. 16:58

온 세상의 잎 위에 가을이 스며드는 10월 중순, 경기도 여주시에 있는 파사성(婆娑城)을 찾았다.
따가운 햇살과 차가운 빗방울이 번갈라가며 차창을 때리는 변덕스러운 날씨 속에 파사성을 향해 악셀레이터를 밝기를 1시간 30여분. 남한강변 저 멀리 뱀처럼 구불구불 쌓인 돌 무더기가 시야에 들어왔다.

파사성에 오르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밤과 도토리로 뒤덮힌 산길을 따라 20여분을 올라가니 파사성의 성벽 끄트머리가 보인다.

처음 본 파사성 성벽은 세월의 무상함이 가득했다. 파서성 성문 옆 성돌 사이사이에는 여름동안에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삐죽삐죽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심지어 성문 옆 일부 성벽은 무성하게 자란 덩쿨이 덮어버려서 성벽을 이루는 성돌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세월의 무상함을 이기지 못해 흩어진 퍼즐 조각처럼 무너진 성벽도 보인다. 

과거 성문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이 분명한 성벽과 성벽이 끊어진 곳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가니 안내 표지판이 내 앞을 가로막는다. 이 안내 표지판에서는 파사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성의 전체 둘레는 943m 이다. 성벽은 잘 다듬어진 돌로 정연하게 차곡차곡 쌓았는데 삼국 시대에 쌓은 부분과 조선 시대에 다시 쌓은 부분이 구분될 정도로 축성 방법에 차이가 있다. 삼국 시대에 쌓은 부분은 바른층 쌓기로 아랫돌과 윗돌이 정연하게 맞물리도록 쌓았지만 조선시대에 다시 쌓은 부분은 성을 쌓은 상태가 조잡하고 각 층이 흐트러져 있으며 상당 부분 붕괴된 상태이다. 

 성내의 시설로는 동문과 남문 등 2개의 성문과 배수구,우물지, 건물지 등이 있다. 동문에는 성문을 보호가기 위한 ㄱ자형의 옹성(甕城)이 구축되어 있다. 이곳 파사성은 다른 성에 비해 물이 부족한 것이 흠이다. 성을 쌓은 방식이나 출토되는 유물로 미루어 삼국 시대에 쌓은 이후 계속 사용되다가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서애 유성룡이 황해도 승군 총섭 의엄에게 다시 쌓도록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즉, 내가 들어왔던 문은 파사성의 남문이었다. 그리고 안내 표지판에 적혀있는 말이 사실이라면 무너진 성벽은 조선시대에 증축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내 표지판은 파사성의 역사 외에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설에 대해서도 적어놓았다. 
"신라 5대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는데 남 장군은 나막신을 신고 중국에 다녀오고, 여 장군은 파사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여 장군이 성을 다 쌓기 전에 남 장군이 먼저 중국에서 돌아왔다. 여 장군은 개군면 석장리까지 가서 돌을 치마폭에 담아오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치마폭이 찢어지면서 돌이 떨여저서 그 마을에 돌담이 만들어졌고 그 때문에 파사산성은 미완성 상태라고 한다." 

전설은 그냥 전설인 모양이다. 신라 5대왕인 파사왕(재위 80~112) 당시 신라의 영역은 고작해야 경남 거창(옛 가소성) ,경북 청도(옛  마두성)과 경주 주위였다. 남한강변인 여주까지 와서 파사성을 쌓을 국력이 되지 않았다. 24대 진흥왕(재위 540~576)에 이르러서야 신라는 한강 유역에 진출한다. 혹자는 파사국이 위치한 자리라서 파사성이라는 명칭을 붙였다고 얘기하기도 한다. 

남문을 뒤로하고 성벽 위를 따라 발걸음을 옮긴다.세월의 무상함이 가득했던 성문과는 달리 근래에 복원했는지 견고하게 서있는 성벽이 산 정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사성 굴곡의 역사
현존하는 최고의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서 파사성의 기록은 선조실록(宣祖實綠),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에서만 찾을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파사성(혹은 파사산성)의 기록은 선조 61권 28년(1595년) 3월 1일에서 처음 찾을 수 있다. 

비변사가 승려 의엄(義嚴)을 도총섭(都摠攝)으로 삼아 파사 산성(婆娑山城)을 수축하게 할 것을 계청(啓請)하였다. 

 그런데 선조는 의엄이 못미더웠나보다. 같은 해 8월 6일  비변사에 명하여 사람을 보내서 성을 살펴보고 (성을)짓는 방법을 가르치라고 한다. 이에 비변사는 관리 한 명을 보내 파사성의 기초 설계도를 그려오고 다시 지시하여 수축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니 선조가 이에 따른다. 

같은 해 8월 22일의 기사를 보면 당시 파사성은 쌓지 않은 곳이 1천 5백척(약 454미터)였다고 한다. 의엄은 승군 500명을 징발하여 성을 수축하겠다고 하였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은 일이었다. 1596년 4월 12일, 의엄은 선조에게 상소하여 역군이 100명도 되지 않아 성곽 건축이 쉽지 않다고 하소연한 걸로 봐서 1년이 지나도록 파사성 개축이 지지부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지부진하던 파사성 개축은 대략 1596년 가을~초겨울 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1월 26일 유성룡이 선조에게 아뢰는 말 중에 "파사성을 수어(지키다)"한다는 말이 있으며, 12월 5일에는 파사성을 지키는 의엄에게 군수품을 보급해주라는 전교를 내리는 기사가 있다. 

그런데 정작 성은 완성되었으나 사람들이 파사성에는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 1597년 2월 25일 기사를 보면 파사성의 군수보급 상황을 묻는 선조의 질문에 노직(盧稷)이라는 신하가 답하기를 

대포와 소통(小筒)은 황해도로부터 왔으나 그 나머지 활이나 화살 등도 역시 자못 갖추어졌고 군량은 거의 3천 석에 이릅니다. 단지 물이 부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성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독성(禿城)에는 수원(水原)사람들이 모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독산성에 대해서 알고있는 사람이라면 머리를 갸우뚱 할 답변이다. 권율이 흰 말에 쌀을 부어서 왜군을 속였다는 세마대의 전설이 생길만큼 물이 없기로 소문난 곳이다. 그런데 파사성은 들어가기 싫어하고 독성(독산성)에는 들어가고 싶어하는 것을 보니, 물 부족 외에 사람들이 꺼리는 다른 요소가 있는 모양이다.  


△ 해동지도 상의 파사성. 파사성 앞에는 현재 이포대교 자리인 이포진이 보인다.

물 때문인지 또 다른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파사성은 임진왜란 이후 다시 버림받았다. 1603년 10월 17일 기사를 보면 선조는 용진(龍津)과 파사성이 폐기된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보수하라고 지시를 내린다. 

...(전략)... 용진(龍津)과 파사 산성(婆娑山城) 두 곳은 당초 인력을 많이 들여 겨우 성취시켰는데 중간에 보살피지 않아 군사가 죄다 흩어지고 수장(守將)도 자주 바뀌어 한갓 군기(軍器)만 유치해 두는 빈 성이 되었으므로...(후략)...

이에 6일 후인 10월 23일,  비변사는 선조의 지시에 대해 용진과 파사산성에 대해서 군사를 주둔시켜서 성을 잘 활용하겠다고 답한다. 

과연 그 후로 파사성은 온전히 유지되고 있었을까?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성 안으로 모이지 않았고 수리도 이루어지지 않아서 폐성 직전이었다. 파사성을 보수하라고 선조가 지시한 지 2년 후인 1605년 7월 11일, 비변사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아뢴다. 

....(전략).... 그러나 파사성은 의엄(義儼)이 역사(役事)를 파한 뒤 여주(驪州)의 관원만으로 감호(監護)하게 하고 조정에서는 잊어버린 듯 조처하지 않았으므로 성중에 모여 들었던 자들도 거의 모두 흩어지고 성첩(城堞)은 허물어지고 기계(器械)도 산망(散亡)하여 몇 년 지나지 않아 폐기될 지경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입니다. ....(후략)...
  
광해군도 파사성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지만 결국 광해군일기를 마지막으로 파사성의 기록은 사라진다. 광해군 2년(1610년) 1월 11일 광해군은 비변사에 영을 내려 파사성을 보수하고 지키게 한다. 

전교하기를,
 
“파사 산성(婆娑山城)을 지금 누가 지키고 있는가. 선조(先朝)에서 설치하여 축조할 때 많은 백성의 힘을 소비하였는데 지금 만일 무너지고 황폐해진다면 매우 애석한 일이다. 그러니 본사는 도 체찰사와 상의하여 완전하게 수선하게끔 조처하고 장수를 뽑아 지키게 하여 선조에서 규획한 곳을 포기하지 말도록 〈비변사에 말하라.〉”
 
하였다.【파사 산성은 여강(驪江)가에 있는데 도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이 축조하였다. 협소하고 샘이 없어서 축조된 후 곧 무너진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이 지시가 있은지 6일 후인 1610년 1월 17일 비변사는 여건상 불가하다고 답한다. 즉 독산성 등 기타 8곳의 산성에 비해 파사성의 가치가 떨어져서 수리할 대상에 올려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이후의 실록에서 파사성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한강 이남의 방어 거점으로서 남한산성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파사성은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성벽을 향해 오르다 뒤를 돌아보니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이 곳, 파사성에 서서 아래를 내려보니 하이얀 성벽, 파란 산 그리고 굽이치는 남한강과 여주의 너른 논밭이 어우러진 한 폭의 풍수화 같은 풍경이 발 밑에 펼쳐진다. 이 멋진 경치는 자신을 찾아준 사람에 대한 파사성의 작은 선물이 아닐까. 

정상 부근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니 선조와 광해군이 왜 그렇게 파사성에 관심을 가졌는지 십 분 이해할 수 있었다. 파사성에서는 남한강을 지나는 배를 감시할 수 있고 이천, 여주의 너른 평야와 저 멀리 양평의 일부도 감시할 수 있다. 다만 성 뒤쪽에는 높은 봉우리가 몇 개 있어서 성 내부의 동태를 쉽게 파악할 수 있는게 단점이었고, 따라서 비변사에서도 파사성에 대해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내려가는 길에
파사성에 석양이 비치기 시작한다. 산성을 오를때에는 평소보다 일찍 내려와야한다. 도시보다 해가 일찍 지기 때문이다. 성에서 내려가면서 문득 성을 오르다 "마주친" 두 그루의 소나무가 떠오른다.

특이하게도 성벽 사이로 소나무가 우뚝 서있었다. 마치 성벽을 뚫은 것 처럼.  왜 두 그루의 소나무가 머릿속을 맴돌까. 모진 역경을 이겨내고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그 기백이 마음에 들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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