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단군한검'의 첫 도읍지<아사달>은 어디인가?

吾心竹--오심죽-- 2009. 10. 30. 19:37

'단군한검'의 첫 도읍지<아사달>은 어디인가?
북한 대동강변의 대박산 단군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윤복현 저널리스트
 
 

일연의[삼국유사]기록에 보면 단군한검의 단군한국(3한을 통치하는 단군천제가 거주하는 진조선)의 도읍지는 아사달.평양성.백악산 아사달.장당경.아사달로 차례로 이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처음 도읍지와 마지막 도읍지가 아사달이라는 의미다. 그리고,<단군한국>의 수도이전과 관련한 이러한 [삼국유사]의 내용은 [한단고기]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한단고기]에는 아사달, 백악산아사달, 장당경의 순으로 이동하였다.  아사달(요서지역의 조양), 백악산아사달(녹산=장춘), 장당경(요동지역의 심양=개원)이다.


나라의 수도란 본래 적의 경계지역으로 부터 후방 깊숙히 위치하는 법이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수도이전은 권력을 바꾼 단군들의 중심지역과 연관된다. 단군한검은 곰족의 나라 단허국이 위치한 지역과 연관되고, 쿠테타를 일으킨 색불루 대단군도 자신의 중심지역인 백악산아사달(장춘)을 도읍으로 삼는다. 서기전426년에 우화충의 반란이 일어나자 진압하고 5가들의 추대로 단군에 올라서 국호를 대부여로 바꾼 백민성 욕살 구물 대단군도 자신의 중심지 장당경(심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승 일연이 편찬한 『삼국유사』에는 우리 민족의 태고사는 중국인들이 동북방(만주-한반도) 한국인들의 역사와 문명에 대한 열등감을 덮기위한 역사기법으로 사용한 신화같이 서술되고 있는데, 『한단고기』는 중국인들이 사용한 신화적 기술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기술하여 한민족의 찬란했던 고대사를 밝혀주고 있다. 본래 심리적으로도 당당하고 떳떳하면 단순명료하게 사실을 기술하지만, 열등감이 많고 숨길 많으면 괜히 문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포장을 하는 법이다. 예컨대, 중국인들이 시조로 삼는 반고도 거불단 한웅으로부터 제후되기를 간청하여 승인을 받아 중국 삼위산아래에서 나라를 열었는데, 중국에서는 반고를 천지창조신으로 신격화하여 뻥튀기를 하고 있는 것과 같다.  이런 『한단고기』가 당연히 한국사학계의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는 이병도 후학들인 식민사관론자들이나 중국의 동북공정론자들에게는 '위서'로 취급당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일제에 의해 죽임을 당하여 대동강에 시신이 버려 졌다는 계연수 선생이 홍범도.신채호 선생 등의 후원과 도움으로 전해 내려 온 고서들을 정리하여 편집된[한단고기]에는 지금부터 약 9200년 전,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여리에 달하는 12연방의 환국이 있었다는 기록과 이를 이화한 7세 한인이 등장하고, 천부경, 삼일신고, 참전계경의 경전과 삼륜, 오계, 팔조, 구서 등의 계율과 덕목이 나오며, 한웅천황이 개천하여 삼신으로 종교를 창설했다는 이야기, 태고시대에 문자가 있었다는 기록, 중국의 유교사상으로 알고 있는 오행사상, 18세 한웅과 배달국에 대한 기록, 단군왕검과 47세 단군에 대한 역사, 그밖에 상하무등, 남녀평권, 분권관경제니 하는 민본주의적인 표현, 청나라 때 생긴 지명이라는 영고탑 등 도저히 현대적인 상식과 짧은 지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러나,[한단고기]가 위서가 될 수 없는 사료적 근거는 [조선실록]에 세조가 전국의 관찰사들에게 고서들을 수집해서 중앙으로 보내라는 명을 내려서 [한단고기]에 실린 <삼성기> 등의 책들이 수집되었다는 기록이다. [한단고기]이전의 우리 민족사를 기록하고 있는 고서로는 신라 박제상의 [부도지]가 있다. 따라서 [부도지][한단고기][규원사화] 등 고서들은 하나의 책으로 묶여서 전 국민에게 우리 역사를 알리는 사료로 사용되야 한다.

[부도지],[한단고기] 등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대한민국 국통맥은 마고-한인 한국-한웅 배달국-단군조선-해모수 부여-고추모 고고리-대조영 대진국-왕건 고려-이성계 조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나라들의 서울이 위치한 중심지역을 정리하면 한반도 서남해(마고)-만주 천산지역(황궁씨.유인씨)-바이칼 호수(한인씨)-흑룡강.백두산지역(한웅씨)-요서 등 만주지역(단군한검씨+색불루.해모수.고두막.고추모를 배출한 고씨족+대진국을 개국한 대씨)-한반도(백제.신라.고려.조선)이다.

그럼 단군한검의 첫 도읍지 <아사달>은 어디일까? 우린 보통 북한<평양>이라고 인식해 왔다. 그러나 그건 '평양'이라는 의미를 몰랐거나, 조선민족은 열등하다라는 역사관을 주입시키려 했던 일제 식민사관론자들의 역사교육때문이였다. 그리고, 단군조선도 중국지역에서 망명해 온 기자와 위만에 의해 단군조선의 중앙권력이 장악되고 마치 기자.위만조선이 한반도 평양지역에 나라를 개국했고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되어 한4군이 설치된 것 처럼 인식해 왔다. 바로 반도사관이였다.

바이칼호수지역을 중심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연방국가를 건설했던 한인의 12한국과 송화강과 백두산지역을 중심으로 신시(피라미드) 배달문명을 건설했던 한웅의 신시배달국 문명을 청동기문명으로 계승발전시킨 단군한검의 단군한국은 유라시아지역에 걸친 거대한 9환족의 영역을 통합한 후에 3신1체[석3극 무진본]천부경 사상에 따라 3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진한(진조선)에 해당하는 만주.몽골.시베리아지역은 아사달(요양)을 왕검성으로 삼고 단군한검이 직접 통치하고, 마한(마조선)에 해당하는 한반도.일본은 북한 평양을 왕검성으로 하여 웅백다 부단군으로 단군한검의 명령를 받아 통치하고, 번한(번조선)지역에 해당하는 요서.산동-양자강유역까지는 치우족의 후예들이 거주했기 때문에 치우천황의 후손 치두남을 부단군으로 삼아 창려를 왕검성을 삼고 통치하게 했다. 통치구조는 단군한검을 모든 제후국들이 3한(조선)의 제사장과 통치자로 삼고, 8조법 이행과 세금납세와 제사의무(한인.한웅.한검 3신에 대한 제사)를 이행하는 것을 전제로 각 제후국들이 자율적으로 통치하는 지방자치제였다.  한국에서 조선으로 국호를 바꾼 시기는 고구려 시조 고등의 손자 22대 색불루 단군이다.

1만년이전에 육지였던 한반도 서해지역에서 '마고'라는 여성통치자를 중심으로 마고문명을 건설했던 마고후예 곰족의 모계문화(여신상.신전.옥문화.곰문양 등)와 역시 마고의 후예들로써 마고성을 떠나 북쪽 천산지역(중앙 아시아 천산산맥이 아니라,바이칼 호수와 가까운 만주의 천산지역일 가능성이 높다.12한국은 바이칼 호수 동쪽이 중심지역이라고 '한단고기'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으로 이동하여 도를 닦은 황궁씨.유인씨.한인씨의 후예인 한웅족의 하늘숭배문화(원형의 제천단 등)가 결합되어 소위, 역사적 사실을 상징적으로 함축하고 있는[단군신화]의 역사적 사실성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요서지역의 조양(아침의 태양이 뜨는 땅=아사달)은 유라시아 초원으로 나가는 교통의 중심지로 중국 역사상 한족과 북방 이민족간의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지역이다. 
 

 

 

[KBS역사스폐셜 자료]고인돌 분포도(북한 평양지역보다 요동지역이 더 정교하고 연대가 빠르다)


단군조선의 상징하면 보통 고인돌, 청동검, 온돌이다. 고인돌은 한반도 남부 화순지역의 경우 8천년전까지 존재하는 것 보면 단군조선시대이전부터 내려온 무덤양식으로 본다. 세계 고인돌은 주로 해안주변에 분포하는 것으로 보아 고대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양을 통하여 동남아시아-인도-유럽까지 전파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남 창녕군에서 발굴된 세계최초 최대규모의 선박이 바로 고대 한반인들의 해양족이였음을 증명한다. 울산의 반구대에 그려진 고래잡이그림도 이를 증명하고, [한단고기]에 단군께서 마조선(한반도.일본열도) 단군에게 선박을 제조하라는 명을 내리고, 일본열도에 반란이 일어났을 때 마조선의 수군500여척으로 진압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대부터 한반도인들은 바다를 지배한 해양족이였음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이전부터 내려온 고인돌 무덤양식은 고인돌속에 비파청동검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군조선시대에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하늘숭배신앙을 가지고 산악지역에서 수렵생활을 한 한국인들은 고인돌무덤양식을 피라미드로 변형시켰고, 초원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한 한국인들은 적석목곽분 양식으로 변형시켜서 사용했을 것이다. 
 


[KBS역사스폐셜 자료]단군조선의 상징-북방 비파청동검(몽골에서 북한 청천강이북까지 분포)
 

 

 
[KBS역사스폐셜 자료]단군조선의 상징-청동검 분포지역(요동 조양과 북한 평양에 집중 분포)

청동검은 전쟁때 사용하는 무기가 아니라,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벌하는데 지원한 왜왕에 대한 감사표시로 하사한 '칠지도'처럼 단군왕검을 천제로 삼는 제후들에게 하사한 통치력의 상징물이였다. 겨울을 따뜻하게 날 수 있게 하는 온돌 또한 한민족의 독창적인 주거문화다. 그런데, 청동검.온돌은 만주.산동.한반도.일본열도를 제외하고는 중국지역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즉, 단군조선의 영역표시로 삼아도 되는 표식과도 같다는 의미다.

그런데, 비파청동검이 가장 많이 출토된 지역이 조양일대다. 조양지역에서 비파형동검이 발굴된 곳은 모두 60여 곳이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모은 곳이 12대영자유적이다. 12대영자 유적은 발굴 결과 기원전 8세기경 청동기 유적으로 확인됐다. 그런데 다양한 청동장식 유적들과 함께 단군조선 대표유물 비파형 동검이 발굴됐다.

이 요서지역에서 요동지역으로 전파된 비파형동검은 이어서 길림과 한반도 북부지역(청천강이북까지)으로 확산되고 이런 과정을 거친 다음에 나중에 여러 가지 문화적인 중간 지역을 거쳐서 한반도북부 청천강이남부터 세형동검 문화로 확대 발전된다.

 

 
 

[KBS역사스폐셜 자료]조양지역 비파 청동검 출토 유물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상징인 청동검의 발전과정상 세형청동검이 비파청동검을 앞설 수 없음으로 단군조선의 초기 수도는 한반도가 될 수 없고, 중국문명의 시원지가 되는 홍산배달문명이 일어난 요서지역의 요양(아사달)이라 할 수 있다. 중국문헌에도 고구려.부여족은 맥족(수렵.유목족)으로 요서지역에서 청동기문화를 일으켜 요동지역의 예족(어로.수렵족)에게 전파한 직계선조가 단군족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자치통감강목]의 진왕 정(政)3년조의 기록에는 요양이 옛 조선의 수도였다는 사실이 명확히 기록되어있고, 같은 책 원봉 2년(BC109년) 한무제 때는 요동에 왕검성이 있었고 거기가 바로 조선의 구도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단군조선의 왕도도 요동에 있던 왕검성으로부터 다른데로 옮겼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한단고기]에도 거불단 한웅과 신시배달국의 제후국이였던 곰족의 나라 단허국왕의 공주(웅녀)사이에서 출생한 단군왕검은 곰족의 나라 단허국왕의 비왕으로 단허국왕이 된 후 9한족을 통합하여 단군한국을 개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요서지역은 곰족의 문화와 바이칼 호수지역에서 남하한 한웅족의 천신숭배문화가 결합된 문명이니 마땅히 곰족의 나라 단허국은 요서지역에 위치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리고 평양이라고 할 때는 북한 평양만을 의미하지 않고 고대에는 큰 평지를 모두 평양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 말 '평야'로 이해하면 된다.
 
그럼 북한 대동강변의 대박산 단군릉의 주인은 누구인가?





 



[자료]북한 평양 대박산 단군릉
 
그리고, 북한 평양의 단군릉의 주인은 단군조선을 개국한 단군한검이 아니라, 5대 대단군 구을(丘乙)(16년간 재위)이다. 그 배경을 보면

[한단고기]에 "첫해(壬戌 - BC2099)에 명을 내려 태백산(太白山)에 단을 쌓게 하고 사자를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2년 5월에 황충(蝗 )이 크게 번져 밭과 들을 덮었다. 4년에 처음으로 갑자(甲子)를 써서 역서(曆書)를 만들었다. 8년에 신독인(身毒人)(0)이 표류하여 동해의 해변에 이르었다. 16년에 친히 장당경(藏唐京)에 행차하여 삼신단(三神壇)을 쌓고 환화(桓花)(1)를 많이 심었다. 7월에 임금이 남쪽으로 순시하여 풍류강(風流江)을 거쳐 송양(松壤)에 이르러 병을 얻으니 얼마 안되어 세상을 떴다. 대박산(大博山)에 장사 지내고 우가(牛加)의 달문이 뽑혀서 대통을 이어 들어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내용 중 <신독인(身毒人)>은 인도(印度)사람. 당시 인도에서 한반도까지 이어지는 해로가 있었다. 고대 한반도인들은 선박술과 항해술이 뛰어난 해양족이였다. 한반도 고인돌이 그 원형인 동남아.인도.유럽.영국 등지의 고인돌문화는 바로 고대 한반인들의 항해를 통하여 전파된 것이다. 그리고 <환화(桓花)>는 무궁화(고대 중국지리서 '산해경'에는 훈화초로 기록되어 있다.

최근 북한 강동군(江東郡)에서 발굴한 대박산(大朴山) 단군릉(檀君陵)에 대한 뒷받침으로서 이보다 정확한 기록은 없을 것이다. 강동군의 대박산에 단군릉이 있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다. 또한 강동현의 옛군명이 바로 송양군(松壤郡)이었다는 것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다. 풍류강은 대동강의 북지인 비류강으로 보아 무난할 것이다.

북한도 정치차원에서 단군릉을 이용하지 말고 역사적 진실을 밝히는 차원에서 남북 역사학자들이 연구교류를 통하여 9환족이 분포하여 살았던 유라시아를 포괄하는 처원에서 민족사적으로 규명해야 할 것이다. 마고-한인-한웅-한검(단군왕검)이 우리 민족에게 내린 사명이 바로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의 정치.경제.문화적 교류를 통하여 한민족공동체를 형성하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 길은 오로지 역사적 뿌리를 찾기위해 터키까지 역사자료를 구하러 다녔을 만큼 역사찾기에 혼신을 다했던 대진국의 대조영의 동생 대야발과 같은 역사뿌리 찾기에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