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가장 큰 무역항 대진(大津:唐津)

吾心竹--오심죽-- 2009. 10. 10. 17:28

당진의 인물들2 >복 지 겸
2부. 황해바다의 강력한 해상세력 복지겸
박 철 준 (朴哲濬) (예) 공군대령
2009년 04월 13일 (월) 15:26:51 당진신문 webmaster@ijdnews.co.kr

   
해상세력과 지방호족

9세기 이후 약 100여년 동안 황해를 중심으로 당과 신라는 총체적인 불안정국이 진행되었다.
당은 안사의 난 이후 율령체제의 파탄과 절도사들의 발호로 중앙왕실의 지방통제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또한 과중한 세금 압박과 체제를 거부하던 일부는 관향을 떠나 유망하는 경우가 빈번하였다.


한편,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는 8세기 후반부터 정치·사회·경제·사상 등에 전반적인 변화가 오고 있었다.
예컨대 골품제도의 동요로 연속적인 왕위의 쟁탈전과 지방반란이 일어났고, 9세기에는 백성들이 살길을 찾아 국내외를 떠돌아 다녔다.


헌덕왕 8년(816년)에는 170명의 신라인이 굶주림을 참지 못해 당나라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극심한 천재지변과 굶주림, 진성여왕(887~897)의 실정 등을 견디다 못해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또한 각지에서는 독자적인 세력가들이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 유이민 가운데 일부는 해적성향을 가진 해상세력가에게 투탁하여 해적이 되어,당시 동아시아 해역을 빈번하게 왕래하던 민간무역선을 약탈대상으로 삼아 크게 번성하였다.


바다에서 해적들이 橫行하던 시기에 한반도 서ㆍ남해안 곳곳에는 해상활동을 통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고 군사력을 키운 이른바 해상호족들이 웅거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합법적 교역과 불법적 약탈을 병행하였는데, 9세기 후반 일본 해역에서 벌어지고 있던 신라 해상(海商)들의 해적활동이 그러한 사실을 잘 말해 준다.


9세기 말 후삼국의 정립과 더불어 호족들 사이의 각축전이 보다 치열해졌다. 이에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주위 인민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해상호족을 포함한 지지세력들은 공리적(公利的) 이념을 내걸고 그것을 실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종전의 해적행위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관할영역에서 활동하던 불법적인 해적을 토벌하여 민생 안정을 도모하였다.


그 과정에서 일부 해적들은 해상호족에 흡수되거나 해체되었고, 또 다른 일부는 스스로 공리적 이념을 내세우며 호족화하였다. 이처럼 해상호족의 해적행위 중지와 해적토벌 그리고 해적들의 호족화로 인하여 마침내 한반도 해역에서 해적이 사라졌다. 호족들 역시 고려왕조로 귀속됨으로써 점차 독자성을 잃게 되었다.


가장 큰 무역항 대진(大津:唐津)

통일신라 이후 조선술의 발달 등으로 대외무역이 크게 번성하자 지방세력들은 자기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았다.
원래 대외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국가간에 행하여 왔었지만, 세력을 점차 증대시켜 온 지방의 사상인(私商人)들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해상호족들은 해안이나 강의 포구에 웅거하여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축적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증강시켜 주위의 인민들을 포섭함으로서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항포구가 발달되어 있고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상 배후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와 백제땅이었으므로 반신라적인 의식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도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다.
지리적으로는 중국과의 왕래가 편리하여 국제무역을 통한 경제력 확보가 용이하였다.


특히 혜성( 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이 지역을 포함한 현재의 충남 내포지방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진번군이 해상루트를 통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되며, 낙랑군과 해상으로 밀접하게 교섭했던 서해항로의 요충지였다.


혜성에는 삼국시대에 백제가 가리저(加里渚) 동쪽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을 설치하였다.
후에 신라는 혜산( 山)의 동쪽에 화경관(禾京館)을 지어 신라와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과 상인들의 숙박과 상거래에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최대 무역항인 당진은 신라 조공무역항으로서 대진(大津)이라고 불렸다.


서해안의 강력한 호족 복지겸·박술희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를 들 수 있다.
복지겸의 선조 복학사(卜學士)는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건너와 거주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하였다.


복학사가 언제 어떤 연유로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해적을 소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해상세력가였음이 틀림없다.
박술희 역시 혜성군 사람으로 박술희의 아버지인 득의(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대승(大丞)의 벼슬을 하고 있었던 점은 박술희 가문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수 있다.


또한 혜성군이 대중국 해상교통로의 요지로 많은 상인과 사신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박술희 가문 역시 유력한 해상호족이었음을 일수 있다. 고려초 강감찬(姜邯贊) 장군에게도 대승(大丞) 직위를 추증하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술희의 부친 박득의 역시 아들 박술희와 함께 고려초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득의와 술희 부자 모두 상당한 벼슬에 올랐으며, 혜성지방의 강력한 호족이었음을 알수 있다.


문무를 겸비한 복지겸

복지겸에 학자들은 공통적으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학문의 연마를 통해 행동하기 전에 생각하고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인물이었다.
만일의 사태에도 대비하는 용의주도한 성격을 갖고 있다.


그리고 대단히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리고 함부로 나서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태도는 선천적인 성격에다 깊이 학문을 연마한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그 때문에 그는 궁예 밑에서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었다.


복지겸이 병부령(현재의 국방장관)직을 수행하였으며, 감찰직을 수행하였던 것으로 연구되어지고 있다.
물론 복지겸에 대해서는 기록에 별로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그가 학식있고 신중한 인물인 것은 틀림없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서 복지겸의 선조는 당나라에서 온 것으로 되어 있다.
복학사(卜學士)라 칭하는 자가 중국으로부터 이곳에 정착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지역민들을 보호하였는데 복지겸은 그의 후손이라고 되어있다.


학사라는 칭호로 보아 어느 정도 학식이 있었던 가문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런 면에서 그도 은인자중하는 성격과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그의 성격으로 인해 왕건을 왕위에 추대하여 개국 1등 공신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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