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마한 목지국은 예산에 있었다

吾心竹--오심죽-- 2009. 8. 25. 16:43

목지국 낙서장

2008/07/25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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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한 목지국은 예산에 있었다.

1.사료의 정리

 우리 고대사에 있어서 여러 가지 풀지 못한 수수께끼가 다수 있으나 기록에 남아있으면서도 찾지 못하는 것은 바로 백제의 초도, 위례성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초도 위례성을 알 수 없다 하였지만 그 후에 나온 삼국유사 왕력조에 일연이 직산이라고 지목하였다. 이로 본다면 일연은 삼국사기의 저작팀이 발견하지 못 한(개경과 가까운 서울이었다면 찾을 수 있었을 것이나 직산에 잇엇기 때문에 찾지 못햇을 것이다.) 초도 위례성을 조사하여 왕력조에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 후에 아무런 이론이 없이 조선시대로 이어져 왔다. 역사서에 아무런 반론이나 이론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 16 직산현조 서거정의 제원루기에 기록되어있는데 
 서거정의 시서에 
“사신으로 영남에 갈 제 직산을 지나게 되었다. 직산 객관 동북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이름을 무엇이라 하는가?’ 하니 주인이 알지 못하여 온조가 부아악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찾다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으니 이 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거정은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역에서 200리 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능히 살 만한 곳이라 잡을 수 있으리요. 또 이른바 하남이라는 곳은 어느 물을 말하는 것인가? 거정은 이 곳을 지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 길이 바빠서는 한 번도 들르지는 못 하고 바라다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세가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되어 마음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지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곧 지금의 광주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곧 지금의 한도이다. 뒤에 금강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 또 사비하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나라 성제 때로부터 당나라 고종 때를 거쳐 대개 500여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한 중에서 능히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능히 그럴 수 있었겠는가? 그 뒷대에 와서는 여러번 그 나라를 옮겨 강한 것을 믿고 군사쓰기를 좋아하여 순치의 보차의 형세를 강한 적과 싸움을 얽어 세력이 날로 줄어드는 데다가 더욱이 의자왕은 어둡고 음탕해서 아첨하는 자의 말만 받아들이고 성충의 간하는 것을 거절하다가 당나라 군사가 바다를 건너자 나라가 곧 망하였으니 아 슬픈 일이로다. 이에 누에 오르니 감개를 이기지 못 하고 시를 지어 조상한다. 
 시에 
 ‘백제 옛 터에 풀이 절로 우거졌네. 
내 여기 오니 감개하여 마음 상하네. 
다섯 용 천안부에서 싸워 파하고 한 쌍 봉황 위례성에서 울었네.
시조의 사당이 깊은 데 단풍나무 가리웠고 
성거산이 옹위 했는데 푸른 구름 비꼇서라. 
누에 올라 가을바람에 나는 생각 
어느 곳에서 철적소리 들려오는가?’ 하였다.”했다.

 이 제원루기의 내용을 보면  당대 문장의 거장이었으며 역사가였던 서거정도  직산 위례성설은 매우 의심하였으나 삼국사절요를 편찬하면서 여러 참고문헌을 보고서야 위례성임을 확신하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 후 조선후기까지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다가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에서 위례성을 북한산 동쪽으로 보았고 온조 14년에 천도했다는 하남 위례성을 남한산성 북쪽인 광주군 동부면 춘궁리(현 하남시) 일대로 비정하면서 그 설은 근세학자들의 직산위례성설을 전면 부정하는 자료로 이용되었다. 
 근세에 우리 고대사학계의 태두로서 추앙받았던 이병도가 이 설을 따르면서 우리나라의 고대사학계는 직산 위례성설을 전면부정하는 학설로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또한 이병도는 마한 목지국을 직산으로 비정하였다. 여기에서 한국고대사는 엄청난 과오와 오류의 늪에서 빠져나오질 못 한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원년 조에
 드디어 한산에 이르러 부아악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바라보았다.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하였으나 열 명의 신하가 간하기를 “생각한데 이 하남의 땅은 북은 한수를 띠고 동은 고악을 의지하였으며 남은 옥택을 바라보고 서쪽은 대해를 접하였으니 그 천험지세가 얻기 어려운 지세라 여기에 도읍을 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로 보익을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니 이 때가 전한 성제의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이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안 갈 수 없었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았는데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신민이 모두 위례에 돌아왔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북대한수와 부아악을 어디로 보는가 하는 문제다. 정약용은 부아악을 삼각산 인수봉으로 보아 초도 위례성을 삼각산 동록으로 보았고 이병도는 정약용이 비정한 지역에 유적이 발견되고 있지 않음을 증거로 들어 세검동 일대를 비정하였다. 그리하여 고대사학계의 경향은 백제 초도 위례성을 지금의 서울부근으로 보고 있다. 이에 대하여 재야사학계와 향토사가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있으나 역사의 오류를 바로 잡을 힘이 없다. 그런데 서거정의 제원루기를 보면 조선시대에는 부아악을 북한산으로 해석한 것 같다.  이는 조선 왕도를 무학대사가 한성으로 잡으며 온조가 처음 위례성을 잡을 때와 같은 맥락에서 북대한수 지형을 찾았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온조가 찾았던 부아악은 인수봉이 아니라 용인 부아산으로 보아야 한다. 부아악이 인수봉이라는 어떠한 자료도 찾을 수 없지만 용인 진위현지에는 부아산이 나온다.  인수봉에서의 조망이 사료에 부합하지 않으나 용인 부아산에서의 조망은 사료와 합치한다

 삼국사기 온조왕 24년조에 
24년 7월에 왕이 웅천책을 세우니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어 나무라기를 “왕이 처음 하수를 건너 용족(발디딜) 할 곳이 없자 내가 동북 100리의 땅을 떼어 안거케 하였으니 왕을 대우함이 두터웠다 할 것이다.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이 있어야 할 것이거늘 이제는 나라가 완전하고 인민이 많이 모여들어 대적할 자가 없다고 크게 성지를 만들고 우리의 강역을 침범하니 의리에 그러할 수 있겠는가”
라 하였다. 왕이 부끄러이 여겨 드디어 책을 헐었다.  

 위의 기사에 의하면 당시의 백제 영역은 충청도까지 미치지 못했으므로 웅천은 금강이 아니라 안성천으로 비정되는 것이 타당하다. 웅천은 백제의 관할이었으며 이 하천을 경계로 마한과 경계를 이루었고, 하류 어느 지점에 책을 세웠을 때 심각한 위협을 느낄 수 있는 지형은 바로 현재의 아산시 인주면 지역이다. 이곳은 삽교천 하류로 이곳에 책을 세운다면  삽교천 내륙지역의 부족세력들은 중국, 낭랑과의 무역에  심각한 위협을 받을 수밖에 없다.
 위의 기사로 보면 마한 목지국은 위례성의 서남방에 있어야 하고 그 지점은 삽교천 유역 어느 곳에 있어야 한다. 이병도가 주장한 목지국이 직산이라면 위례성은 용인 쪽이 되어야하는데 충돌할 하천이 없는 것은 자명하다. 여기에서 이병도의 직산 목지국 설은 비상식적인 발상이다. 또한 위례성이 서울이라면 목지국은 남양부근이 되어야 하므로 백제 초도 한성설도 견강부회의 주장이다. 모름지기 학자라면서 사서의 기록을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편의대로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식이다. 이것이 바로우리 사학계의 단면이다.  
 일부 양식 있는 학자들이 이병도 학설을 부정하고 있는데, 천관우, 이기동 등이 삽교천 유역설을 주장하고 향토사학자인 연기 김재붕은 임존성 주변설, 덕산 박성흥은 삽교 성리 목시부락을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음이 비슷하거나 추상적 가설일 뿐 구체적 증거는 내세우지 못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기 위하여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 유적인 고인돌에서 그 근거를 찾고자 시도 하였다. 그러나 예산지역의 고인돌 조사는 문화유적지표조사(1995 공주박물관)에서 신양3곳 대술 1곳 신암1곳 등 5곳 밖에 조사되어 있지 않아 역사자료로서는 어떠한 추정자료로도 사용할 수 없었다. 천안지역은 향토사연구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고인돌이 조사되어 있으나 온양은 1곳만이 조사되어 있다. 그리하여 필자는 1995년부터 2000년까지 고인돌 조사에 착수했는데 숱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예산군 21곳에서 고인돌 무리를 조사 자료화 했다. 
그 결과 신암 예산읍 신양 대술에서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하였다. 혼자서 틈틈이 조사하였지만 결과를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예산읍 지역에서의 다수의 고인돌 발견은 나를 흥분시켰다. 영원히 역사 속에서 잊혀질 뻔하였던 유적을 발견하면서 천혜적 입지를 갖추고 있는 예산읍 고대 문화권의 추적이 가상에서 현실화한 것이다. 사실 나는 향토사를 하면서 예산읍의 지정학적 위치를 예의 주시하기 시작하였다. 현대에는 꽉 막혀 발전할 수 없는 곳이나 고대 문화권에서는 이보다 살기 좋은 적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수많은 답사를 하면서도 고인돌을 발견할 수 없었다. 고인돌은 생각지 않았던 곳에서 발견되었던 것이다.  

    2.예산 지역의 고인돌 

 1. 예산 3리 고인돌 
 예산문예회관 좌측으로 70여m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 고인돌은 발견 당시에 아카시아 찔레나무 등 가시덤불에  가려져 있어 수차례의 조사에서도 확신할 수 없어 애를 먹었다. 2000년 12월 성혈을 발견하면서 고인돌로 확인하였고 1곳에서 지석도 발견하였다.   필자가 가장 중요하게 취급하는 고인돌로 별자리 형태의 고인돌로 추정하고 있다. 오리온자리의 삼태성을 상징한 고인돌로 추정한다.  가장 큰 돌에 2개의 성혈과 문양이 새겨져 있다. 지석은 한군데서만 보인다. 6기가 있다. 
 2.예산4리 고인돌
 예산읍 교남동 공원산 우측 계곡에 있는데 현재 30여기가 남아 있다. 1930년대 금오산에서 정남진이 찍은 사진(예산초등학교 80년사)을 확대해 보면 지금 남아 있는 고인돌은 공원산에 가려 사진에 나타나 있지 않으나 그 밑에서 수많은 바위들이 보인다. 70년대 까지도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상당히 있었다 한다. 지금은 주거지로 바뀌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대략 80여기 이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95년 조사당시보다  지금은 5-6기가 사라졌다. 가운데는 사람하나가 누워있을 수 있는 크기의 대형 고인돌이 있는데 이곳이 조장(鳥葬)을 지낸 곳은 아닌가 추정한다. 채석장은 계곡 위쪽에 있다. 
 3. 예산읍 산성리 고인돌. 
 산성리 거무실 최재철씨 과수원에 있다. 정확한 숫자는 파악하지 못했으나 대략 80여기 가량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70년대 개울을 석축하느라 일부 파손되고 정원석으로도 일부 사용되었다 한다. 이 과수원 지대에는 조선시대 기와가 무수히 발견되고 있다. 50여m 위쪽에 고인돌 1기와 채석장이 있다. 과수원 하느라 굴착을 하여 묻혀 있고 변형되어 지석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4. 예산읍 향천리 고인돌. 
 향천리 전 6번지  만석골 고랑에 있다. 60년대 예산천 제방을 축조하느라 고인돌을 파괴하여 지금은 원형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지석만 남아 있다. 지석 분포를 보면 20에서 30기 가량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0년대 중반 고등학교때  봄 소풍을 갔다 이 고랑으로 해 시르미 고개로 걸어 집에 온 적이 있는데 그때 바위가 즐비한 기억이 있다. 그때는 고인돌에 대하여는 전혀 몰랐지만 이상한 배열로 늘어선 바위에 궁금증이 생겼던 기억이 있다. 위쪽 밭에도 채석된 바위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일대에 고인돌이 흩어져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5. 신양면 연리 고인돌 
 연리 밤개 주유소 옆 솔밭에 있다. 필자의 동네로 필자가 고인돌 조사의  동기를 만들었던 고인돌이다. 공주대의 조사로는 5기가 있으나 정밀조사결과 8기 가량이 보이는데 일부는 묘지에 묻혀있다.  가운데에 창녕성씨 묘가 있는데 연화부수형이라하여 명당지라고 지관들은 말한다. 묘지가 있어 파손을 면하여 가장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다. 200여 년 전에는 밭이었다고 한다. 80년대 까지도 솔밭에 밭두둑 자욱이 남아 있었다. 동네에서는 거문배라고 부른다. 
 어느 별자리 형태의 고인돌로 추정된다. 지석은 한군데만 보이고 성혈은 없다. 
 6 연리 윗바구니 고인돌 
 연리 윗바구니에서 시왕리 넘어가는 잘피고개 좌측에 있었는데 지금은 원형이 파괴되었다. 1기가 있었는데 부근에서 석촉이 발견되었다. 고분 앞을 파니 화살촉 3개가 나왔다고 한다. 또 한사람은 70년대 예비군 호를 파다 5개의 화살촉을 발견했다고 한다. 
 7. 신양면 귀곡리 고인돌 
①귀곡 2리 덕의정에 있었다 . 7-8기 있었는데 해방후 밭을 만드느라 불도져로 밀어 파괴되었다 한다. 지금은 큰 바위 하나만  이동되어 남아 있고 묘 제절에도 또 하나가 있다. 묘지 위로 조그마한 둔덕에 늘어서 있었다 한다. 바위가 전혀 나오지 않는 곳이라 고인돌로 추정된다. 
②또 한군데는 2리 회관 위쪽에 성채기씨 논에 6-7기가 있었는데 1995년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작은 돌은 묻어버리고 큰 돌 하나는 밀어 내어 필자가 확인하였다.  60여미터 좌측에도 도랑에 1995년 조사당시 3기의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가 있었다. 이곳이 채석장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③무드리라는 논이 있는데 이곳에 2기의 고인돌이 있었다. 70년대 말 경지정리로 없어졌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작은 돌이 고여 있었다.
 8.신양면 시왕리 고인돌
 시왕리 중불운리 좌측 경사진 밭에 있다. 성혈이 2곳이 있고 지석이 보인다. 특이하게 2기 만이 있다. 
 9. 신양면 서계양리 고인돌. 
 성주동에 있는데 7-8기씩 두곳에 있다. 하나는 대흥면 금곡리 가는 고개 밑에 있고 하나는 성주동 서쪽 산 아래 기슭에 있다. 이 성주동에서는 돌칼이 다수 수습되었고 돌화살촉은 70년대 까지 나무하다보면 상당히 수습되어 곱돌개에서 성주동 넘어가는 고개를 화살재라불렀다 한다. 
무근논 이라는 곳에서는 길이 7,80cm 가량 되는 돌로 된 환도가 발견되었고 고분에서도 돌칼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한다. 50년대 냇가 방천에서 큰물이 가면서 수많은 화살촉이 발견되었다 한다. 
 10.신양면 신양리 2리 고인돌
 백석에 있는데 민가 장광에 있다. 4기가 있고 묻혀있는 3기의 바위와 연결하면 북두칠성을 상징한 모습이다. 
 11.신양면 대덕리 고인돌.
 ①칠성바위라는 지명이 있는데 32호 국도를 내면서 그 바위가 없어졌다 한다. 
고인돌로 추정. 
 ② 대덕 2리 말골 8-9기가 있는데 민가에 있다. 이 동네에서 고분이 발견되었다. 
 12.신양면 만사리 고인돌 
 ①만사리 솔모랭이 2기가 있는데 하나는 채석으로 거의 파손되어 있고 하나도 정으로 쪼다 만 흔적이 역역하다. 7-9기가 60년대까지 있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60먹은 사람도 2기 밖에 못 보았다고 하여 헷갈린다. 분명한 것은 어떠한 목적으로 채석하다 2기가 남은 것인데  어느 분은 70년대 초 제방공사로 채석했다고 한다. 
 ②또 한군데는 만사리  바위박이에 있는데 주올에서 당미로 넘어가는 고개에 있었는데 60년대까지 5-7기가 있었다한다 . 수로 공사로 일부 지석만이 서너 개 수로 둑 옆에 방치되어 있다. 공주대 지표조사에서 기록되어 있다. 
 13. 대술면 화천리 2리 고인돌 
 화천리와 마전리 경계 능선에 9기가 있다. 공주대 조사에서는 7기가 조사되어 있다. 성혈은 1곳에 있고 지석도 한곳만 보인다. 주민들은 7성바위라고 부르는데 정밀조사 결과 2기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동쪽으로 800여m 골짜기에서에서 묘지를 쓰다 돌화살촉 5개를 발견하였다 한다. 북쪽으로 500m지점에 유명한 문석이라는 선돌이 있는데 1945년 8월 장마에 떠내려 가 땅속에 묻혔다. 전설에 이곳이 물이 닥치면 8무당이 난다 했는데 며말에 9무당이 나왔다 한다.
 14. 대술면 궐곡리 고인돌
 궐곡리  계변말에 있다. 2000년 5월 31에 발견한 것으로 대술지역에서 고인돌 답사후 6년만에 찾았다. 계변말 동네에 있어 찾지를 못했고 또한 거의모두 채석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추정 불가능인데 대략80- 100여기 가량 되지 않았나한다. 주민들이 지석을 캐내었고 채석된 시기는 불명이다. 아무도 주민들 생전에는 보지 못했다 한다. 일제시대 32호선 개설시 축대용으로 반출된 것으로 추정한다. 
  15. 신암면 오산리 고인돌
 화암사 입구에 있는 것으로 예산군내 현재 남아있는 고인돌 중에서 가장 크다. 5기 가량 있다. 가장 큰 것은 둘레1250cm 성혈은 없고 지석은 가장 큰 고인돌에 1개가 보인다.
 16. 신암면 조곡리 고인돌. 
공주대 쪽의 조사에선 1곳만 조사되어 있으나 위쪽에 2기가 더 있다.(2004년 현지 조사에서 3기가 민묘 축조로 사라져 있음을 발견했다. ) 남쪽 능선 50m지점에 4기가 있고 그 아래 는선을 따라 2기씩 쌍을 이루어 충남 목장 있는 곳까지 20여기가 연결되어 있다. 
 17. 고덕면 대천리 고인돌
 대천리 3리 별아미 동네 산부리에 7기의 바위가 배열되어 있다. 
  18. 삽교읍 성리
 목시 남쪽 두루머리 쪽에 2기의 바위가 있었는데 경지정리로 사라졌다. 
 19. 광시면 구례리 
 강쟁이에 있는데 2005 2월 정낙훈 선생의 제보로 현지 확인 결과 1기가 확인되고 또 다른 1기도 확인이 되었으나 축사를 지어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어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었다. 지석이 있다.      

  3. 예산지역 고인돌의 특징

 예산지역의 고인돌은 특이하다. 우리가 흔히 교과서에서 배워 고정관념화 되어 있는 남방식이니 북방식이니 하는  이분법 구도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그렇다고 매장부도 보이지 않는다. 변형고인돌인 개석식으로 보기도 딱 맞지 않는다.
 전영래 교수는 ①지상에 수매의 판석으로 석관을 짠 형태 ②상석 주변에 개석을 두른 지상형 ③지하에 구조가 없고 한쪽에 판석을 괸 3지석 식 등을 개석식으로 분류하고 있다. 다만 바둑판 상석을 3~5개, 또는 그 이상의 지석을 괴고 지하 구조가 있는 것은 이에 속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한 지상에 다석식으로 석관을 짠 것은 북방식으로부터 변이된 것이고 이것이 다시 변화하여 개석식으로 바뀌어 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이상에서 전영래 교수의 설을 따른다면 ③의 예와 가까우므로 예산지역의 고인돌은 북방식에서 변형된 후대의 고인돌로 보아진다. 그런데 향천리 고인돌 지석은 3개의 지석이 남아 있는 것도 있으나 5개의 지석이 있는 것도 있다. 폭90cm 이상의 대형지석은 3개였으나 작은 지석은 5개정도였다. 밭을 경작하는 과정에서 작은 지석은 옮겨져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궐곡리 고인돌은 주민들이 지석을 캐내는 것을 확인해 보니 두 곳 모두 3개였다. 정밀조사는 필자의 영역 밖이나 파괴된 고인돌은 지석을 확인 할 수 있고 나머지는 알 수 없으며 무지석 식은 한번 파괴되면 고인돌인지도 추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예산의 고인돌은 언제부터 축조되었을까? 

 사기 조선열전에 의하면 중국에서 진. 한교체기에 혼란이 계속되자 연왕 노관이 흉노땅으로 망명하자 연, 제, 조의 지방에서 많은 유랑민이 동방으로 이동하여 기자조선의 영토에 정착하였다 한다. 후에 연인 위만은 군사를 일으켜 고조선의 준왕을 공격하자 무방비상태에 있던 준왕은 남쪽으로 망명하였다. 이리하여 위만이 왕검성에서 왕위에 오르니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위만에게 ?i긴 준왕과 조선상 역곡향 등 수천인이 남방의 진국으로 망명하였는데 진왕은 준왕을 보호해 주었다. 그런데 이 준왕이 상륙하였던 지점이 어디였는가  하는 점이문제다. 혹자는 전북 익산을 말하지만 필자는 삽교천 유역인 예산지역으로 보고자 한다. 역곡향이 교류하였던 삽교천 유역의 부족국가들이 더 우호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예산의 고인돌은 분명 북방식 , 남방식이 아니다. 또한 그것은 북방식 계통의 개석식의 변형으로 보아야 한다.  위의 준왕의 망명에서 본다면 고인돌 문화가 없던 예산지방에 갑자기 변형고인돌의 출현과 결부 시켜도 무리가 없다. 이미 시대가 흐르며 전형적인 북방식은 쇠퇴하고 무덤방조차 없는 개석식이 북쪽에서 일부 정착했을 때인데 그 묘제가 준왕의 망명으로 예산지역에 갑자기 이식된 것으로 추정한다. (그런데 이로 추정하면 고인돌 축성연대가 짧아진다. )보령 웅천 고인돌을 답사 했을 때 한 곳은 분명 무덤방이 있었다. 도지정문화재라고 안내문이 있는데 시대설명도 잘못되어 시정을 요구하였다. 북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개석식 이었다. 나머지는 우리 지역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였다. 
 고창의 고인돌을 보면 중앙부는 분명 무덤방이 있지만 가에로 가면 지석만 세운 고인돌이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 무덤방은 점차 사라지고 지석만 있고 나중에는 무지석식으로 변형되다가 관을 이용한 석실 분묘가 정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대흥 동서리 출토 유물의 시기를 보면 기원전 2세기 중엽으로 보는데 이 시기에 고인돌 축조는 끝나고 석실분묘가 지배층으로부터 이 지역에도 정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동검을 본 딴 돌칼이 신양지역에서도 다수 출토되고 있음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는데, 일부 고분에 돌화살촉과 함께 껴묻거리로 매장되었을 것이다. 이로 본다면 예산 지역의 고인돌은 기원전 2세기 중엽에 축조가 중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돌칼이 발견된 곳 일부는 흙속인 것으로 보아 일부 서민은 석실 외에 토광에 시신을 그대로 묻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예산지역의 고인돌 편년이 확인된 것은 한 곳도 없다. 강원도 양구에서 방사선동위원소 측정된 것은 3000~4000(+-200)년 인 것으로 보아 이곳은 약간 늦은 3000여년전 경부터로 필자는 추정한다. 기원전 3~4세기경 북방계의 대거 유입으로 인하여 진국사회가 뿌리채 흔들리면서 삼한으로 분화하고 마한은 54국으로 분화하였다. 그 수장격인 목지국은 진국의 중심과 같은 지역이다. 진국의 중심은  신암 용산지역, 마한 목지국은 예산읍 예산리, 산성리로 추정한다.   

3. 예산지역은 마한 목지국의 왕도

필자는 마한 목지국의 영역을 신암 용산과 예산읍 지역으로 비정하고자 한다. 
그 근거를 제시하는바.
 1. 삼태성을 상징한 고인돌. 
 금오산 남쪽의 삼태성을 상징한 고인돌은 아직 전국 어디에도 발견된 적이 없다. 
이는 왕을 상징한 것이며  신성시한 것이다. 따라서 금오산은 신성한 산 이라는 뜻이다.
 2. 신암 용산 뒤 조곡리에 있는 산 능선에 있는 용을 상징한 특이한 고인돌이다. 이러한 형태의 고인돌이 일부 타지역에서 발견 보고가 있다. 그러나 조곡리 고인돌은 완벽한 용의 형상을 상징한 것으로 용산의 유래와 합치한다. 화암사도 원래는 용산사였으나 바위가 화려하다고 원래의 의미와 다른 뜻으로 변질되었다. 용산 부근에서 수많은 돌화살촉이 발견된 것은 예산읍 지역의 목지국이 망한 후 이곳에서 격렬한 전투가 있었음을 반증한 것으로 추리된다. 
 3. 예산읍 수철리의 용굴봉. 
 본래 청동기 시대의 진국은 용< 물. 무르>을 뜻하는 말이다.  고구려에는 당시 동굴신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마한은 기록이 없지만 진국은 용을 상징한 나라임으로 용이 승천한 지형이 있어야 한다. 
 충청지역에서 산에 용이 승천한 형상을 찾아보면 예산읍 수철리 용굴봉이 유일하다. 조선시대 예산현지에 현감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한다. 400여m의 산 에 용굴이 있고 용난소가 있어 물이 흘러나온다. 지금도 무속인들이 의식을 행하고 있다.  기와편이 나오는데 수십년전 누가 절을 지으려고 하다 일이 생겨 중단하였다 한다. 절을 지어서는 안 되는 신성한 곳이다. 용굴봉도 같은 금오산 줄기다. 이 산들이 수천년간 혼령이 깃든 곳이다. 백제시대 오산이라 불렀던 것은 신성한 산이라는 뜻인데 금까마귀 전설도 사실은 신성하다는 뜻의 의미가 왜곡된 것이다.
 4. 관향산은 마산(馬山)즉 마상산(馬像山)이다. 
예산읍 남부 순환도로를 관향로라 하지만 이는 명백한 잘못이다. 유래를 보면 활을 쏘던 과녁산이 변하여 관향산이 되었다고 하는데 본래의 고지명은 마산이다. 말 형상을 한 산이다. 필자는 최근에야 깨달았지만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후 이곳을 마진현이라고 개명하였던 것은 바로 마산의 말을 닮은 형상 때문이었다. 당은 마한시대의 이름과 비슷하게 많은 지역을 개명하였다. 그렇다면 마한이라는 말은 어데서 나왔을까? 일부 학자들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마리한 머리한에서 왔다고도 해석하나 천만의 말씀이다. 고지명을 연구하다보니  백제시대의 현은 모두 형상에서 따온 말이고 조선시대 지명도  형상에서 지어진 이름이 대부분임을 알았다. 마한은 바로 왕도(王都)에  말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산이 있다는 뜻이다.
마한 목지국은 충청도에 있었으므로 충청도에서 말의 모습을 한 지형을 찾으면 마한 목지국의 왕도를 찾을 수 있다. 그곳이 어디인가? 바로 예산읍 밖에 없다. 
 5. 마한 목지국은 성이 없었다. 
일부 향토사학자들의 글을 보면 토성을 마한시대의 성으로 비정하여 곤혹스럽게 한다. 백제위례성에 준하여 마한 제 부족도 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마한 제부족은 자연스럽게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온조와 웅천책 문제로 논쟁을 벌인 사실에서 마한은 도리로서 나무랐음을 보면 마한 목지국은 성을 쌓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위례성은 성이 있었다.  중국측 기록에 마한은 성이 없고 진한은 성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백제 온조는 성을 쌓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 사냥을 핑계대고 군사를 동원하여 목지국을 기습하여 멸망시켰다. 손 한번 못쓰고 목지국은 망하였다. 변방인 신암 용산부족들이 결사적으로 항거하였으나 철기로 무장한 백제군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청동기 문화에 성도 없었으니 막을 재간이 없었다. 또한 신양 불운국과 여래비리국 백성들이 서계양리 성주동에서 반란을 일으켜 백제와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성주동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성처럼 되어 있는데 여러 곳에서 백제군이 공격하였다. 무수한 돌화살촉이 70년대까지 발견되어 화살재라고도 하였다 한다. 또한 서계양리 무근논에서는 길이 70~80cm가량의 돌로 만든 칼이 발견되었다 한다. 
이곳에 무근이라는 장수가 죽었다고도 주민들은 전설처럼 말하는데....... 글쎄 묻혀진 역사는 알 길이 없다. 
 예산군에서는 용산지역과 서계양 두 곳에서 만이 돌화살촉이 다량 발견되었다.             6.성리목시라는 지명에대하여
 박성흥 선생은 삽교 성리목시를 음이 목지국과 비슷하다하여 목지국의 왕도로 비정하고 있다. 그리고 토성이 존재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지역 향토사학계는 이를 지지하고 있으나 필자는 반대한다. 먼저 지형적으로 성리천이 범람하던 지역이며 중국측 사서의 성이 없었다는 기록과 배치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지명을 고덕 덕산지역에 어느 부족국가가 있었는데 이곳이 목지국의 영토였으므로 교통의 관문이었던 이곳을 목지라고 부르다 목시라고 하지 않았나 추정한다. 지금도 군계의 경계지역에 첨양뜸이니 홍주뜸이니 하는 지명이 있듯이 말이다. 이곳에 경계석인 거대한 선돌이 있는 것은 이곳이 목지국의 관문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7.목지라는 지명에 대하여
 목은 우두머리라는 말이며 지는 나라 지로 해석하여 단지 우두머리 나라라고 풀이하나, 필자는 대흥의 고지명 지분촌 지삼촌을 연구하면서 지는 하천을 의미함을 발견하였다. 
 즉 지분은 대흥 앞 무한천이 신양과 광시에서 하나로 합쳐지므로 지분이란 둘로 갈라졌다는 뜻이고, 지삼촌은 두 하천이 하나로 합쳐지니 셋이라는 뜻이다.  결국 하천을 가지고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목지국은 삽교천 유역 부족국가의 우두머리라는 뜻이다. 월지국이라고도 하는데 달은 닫의 연철이므로 산을 뜻하는 말이라 한다. 그렇다면 산과 하천이 어우러진 예산읍과 용산지역이 적지가 아닌가? 
먼저 예산읍의 목지국, 대흥 지침국, 홀성 장곡면 상성리의 사로국, 신양 불운국 여래비리국, 대술 고사분국(?), 고덕 감해비리국(?) , 덕산 감개국(?)등 삽교천 유역에 다수의 부족국가가 존재하고 있었을 것이다. 
 8. 대술면의 고지명 대지동촌
 대술면은 조선 후기 대지동면과 술곡면으로 나뉘어 있었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편찬 때만 해도 대지동촌이었다.  한갓골 다시 말하면 큰 갓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2000년 궐곡리 계변말에서 대규모의 고인돌을 발견하면서 의문이 제기 되었다. 고인돌 규모는 예산군 최대급이었다. 그런데 선돌의 분포를 보면 시산리 사우디주유소 앞 1기 화천리 2리 1기로 경계석 구분이 확연하다.  예산 현의 변두리로 한갓골로 보기에는 너무나 계변말(거변)의 고인돌은 규모가 크다.  필자는 이로 미루어 예산읍 목지지국 개념에 대한 변방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져 한다. 아무리 고인돌 규모가 커도 결국은 변두리인 것이다. 한갓골은 이러한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고덕 지역도 대지동이 있는데 이도 결국 목지국 예산 중심적 사고로 그곳에 독립된 어느 부족 국가가 있었어도 변두리라는 개념의 지명이 생긴 것으로 풀이된다.   결국 목지국의 동쪽 경계는 시산리 , 서쪽 경계는 삽교천 성리 목시로 추정된다. 남쪽 경계는 예당저수지 부근 복산이다. 북쪽은 웅천책 문제로 백제에 항의한 것으로 보아 삽교천 유역을 포함한다. 
 4. 맺음말 
필자의 ‘마한목지국의 위치비정에 관한 조사연구’는 2002년에 작성된 것이다. 위의 글들은 그 논문을 요약하고 일부 보완한 것이다. 그해 여름 갑자기 건강에 이상이 생겨, 나는 죽음을 생각했다. 고인돌 조사자료를 서둘러 정리했다. 3개월간에 걸쳐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배를 움켜지고 고인돌을 찾아 조사를 하면서 나는 극심한 고통에 정신마저 혼미할 때가 하루에도 몇 차례 씩 계속되었다. 무심하던 고인돌이  내년에 다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의미가 깊었다. 고인돌에 드러누워 홀로 눈물도 많이 흘렸다. 몇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나였지만 그때는 갑자기 당한 사고였지만, 죽음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까먹는 기분은 참으로 숨막히는 고통이었다.  그래도 나는 생업을 위하여 시장에 20여리를 경운기를 끌고서 다니며 채소를 팔았다. 아내와 큰애는 병원에 가자고 애원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이미 늦었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완성한 원고는 전국 향토문화 공모전에는 응모했으나 접수할 때부터 난색을 표명했다. 기존 학설을 뒤집을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마지막 유고집이 될 것 같아 딸애한테 내 자료를 정리해 나중에 여유가 생기면 발표해 달라고 했다. 후에 윤용혁 교수의 도움으로 공주 <웅진문화 15집 2002>에 실릴 수 있었다. 
 그 후 내 체중은 엄청나게 줄었고 현기증과 숨이 막혀 뒷산에도 오르지 못할 정도로 쇠약해졌다.  나의 답사는 2년간 중단되었다. 오류를 시정할 수도 없었다. 논문의 탈고는 완성이 아니라 새로운 문제의 시작이다. 지난해 10월 약간 건강이 회복되자 전국향토문화공모전에 ‘월경지조사’로 20일동안 조사하여 응모하여 장려상을 받았다. 학계와 마찰을 일으킬 소재가 아니라 입상할 수 있었다
 마한목지국 문제는 아직도 많은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고 있다. 정황증거는 충분하지만 결정적 단서는 없다. 또한 이병도 학설을 부정해야 한다. 웅천책 문제,14년간 도읍했던 위례성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 직산지역서 위례성지를 찾기위한 발굴조사가 진행되지만 희망은 없다. 이미 도시화 산업화 과정에서 없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예산지역에서 목지국의 유적을 찾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만약에 후에 내 자료를 가지고 누가 다시 박사학위 논문을 써 통과될 때야 마한 목지국의 예산설은 빛을 볼 것이다. 그것도 고인돌이 그 때까지 존재해야 한다. 
 아니면 공주대 박물관이나 어느 고고학자가 예산의 고인돌 자료를 조사하여 고고학계에 보고한다면 마한 목지국 예산설은 생각보다 빨리 힘을 얻을 수 있다. 아직까지 삽교천 유역에서의 고인돌 조사는 중앙 고고학계에 보고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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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결론적으로 백제의 위례성이 직산에 있으나, 기존 사학자들의 반발과 도시화에 따른 개발로 인하여 이를 밝히기 어려우니, 목지국이 예산에 있었다는 내용을 통해 역으로, 위치상 위례성은 직산에 있다고 말씀하고픈 것입니다..... 07.09.08 18:53

[출처] 목지국|작성자 다비도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