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풍납토성>> 사성

吾心竹--오심죽-- 2009. 8. 25. 16:40

풍납토성>> 사성 낙서장

2008/07/25 22:41

복사 http://blog.naver.com/12345uuuuu/70033409648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7        >>>  1934년 작성된 지도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6        >>>  1937년 작성된 지도

 

 

1. 이 당시 가장 멀쩡했던 암사동 토성은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암사동 토성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본래부터 한강변 쪽의 토성벽이 존재하질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몽촌토성만 보아도 토성은 부분적으로 존재한 것 같고....

 

 

특히나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신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하지만 1934년 고지도를 살펴보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알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학설 중에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다고 합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내용]

 

한성백제기 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약시굴을 담당한 발굴기관(건국대팀)은 “별다른 문화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다른 전문가들과 이 문화층에 대한 성격논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
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연 천호대교 좌측 한강변에 뻘흙과 같은 흙들이 두텁게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그 거무스레한 뻘흙을 파내는 공사가 예전(작년 말?)에 있었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무스레한 흙들을 파내고, 모래흙을 높게 쌓아 올렸었던 그 공사로 운동하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얼마전 연못에서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지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가 우물이라고 했던 것의 바닥 사진을 보셔도 거무스레한 뻘흙과 같은 흙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해자여서 뻘흙과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이 범람해서 그런 흙들이 발견되는 것이라 최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질좋은 흙들로 인해 풍납동이 도요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명칭에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배암드리'라는 말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1934년의 지도를 통해 풍납토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에 뭍으로 밀려들어 오는 뱀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한강쪽의 토성벽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풍납토성이 왕성으로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 잡고, 이로 인해 침해받는 주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1. 신문, 방송사 홈페이지 기사제보란에 글을 남기고,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는 등 언론에 제보를 하고, 각 포털싸이트에 글을 올립니다......

 

2. 지역구 국회의원과 문광위 소속 국회의원께 알려드리고, 이를 질의 회신토록 요청합니다....

 

이때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하거나 면담을 합니다....

 

3. 청와대홈페이지 신문고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을 넣습니다....

 

4.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국회의원, 대선후보, 대통령께 편지도 써보고, 면담도 추진해 봅니다....

 

5. 마지막 내용은 적지 않겠습니다...(책임추궁, 감사 및 처벌관련 내용으로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만...)

 

관련 대법원판례 하나만 적어본다면...

 

[ 대학의 실험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실험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제3자를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1967.12.26. 67다591) ]

 

'실험'을 '연구'로 '제3자'를 '풍납동주민들'로 바꿔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대학의 연구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연구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풍납동주민들을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다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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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연구 결과의 발표 낙서장

2008/07/25 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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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닌 것 같다 라고 풍납동 주민들과 다른 사학자분들의 의견은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제는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주장하시는 사학자님들의 차례입니다.....


확실한 연구와 신념 하에서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를 발표하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발표하셨으나 왕성이 아니라는 것이 훗날 밝혀진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셔야 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풍납동주민들을 비롯한 국민들과 다른 사학자들이 신중을 기해달라 이미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묻지 않으나, 이제부터는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 풍납동주민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아래 대법원 판례를 통하여,, 고의가 있으면 형사책임이 문제될 수 있고,  과실만 있더라도 액수산정 불가능한 민사책임이 지워질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혹시나 모르셨다면 아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 보았습니다....


[ 대학의 실험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실험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제3자를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1967.12.26. 67다591) ]


'실험'을 '연구'로 '제3자'를 '풍납동주민들'로 바꿔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대학의 연구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연구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풍납동주민들을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기간이 최소한 1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한번 더 고민하여 연구, 발표해 주십사하는 바램으로만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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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백제 문화제 낙서장

2008/07/25 2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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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하여,,


한성백제의 위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서울시와 송파구청이 주최하는 한성백제 문화제가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한성백제의 생활중심지는 한강유역으로써,,


서울시와 송파구가 주체가 된다는데 이의를 걸 이유도 없고,,


오히려 하남시까지 참여하여 더 크고 융성하게 치루어지면 좋겠습니다....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중요하다면 한성백제문화제를 풍납토성근처에서 주최해보았어야 하겠지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풍납토성이 왕성인지 여부와 한성백제문화제는 별개로 잘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풍납동문제가 잘 해결되고 나면 한성백제문화제에 자원봉사하러 나가야겠습니다...

 

 

풍납토성은 사성으로 군사용토성과 제방의 역할을 하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이다.... 낙서장

2008/12/2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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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대 김운회교수님의 최근 글 중 발췌.....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인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의 꼬임에 빠져 바둑으로 세월을 탕진하다가, 도림의 강력한 권유로 한강(아리수)의 돌을 가져다가 선왕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성곽을 새로이 수리하고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현재의 금단산[숭산(崇山)]에서 풍납리[사성(蛇城)]에 이르는 긴 제방을 만들어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은 파탄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이 제방이 오늘날의 풍납토성이라고 합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학자들은 풍납토성의 서북쪽 성벽이 이 때 쓸려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1917년 다이쇼(大正) 6년에 작성된 풍납토성 일대지도를 보면 서북쪽 성벽이 나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18년 지형도를 통해 보아도 1925년 고지도와 같이 제방의 흔적은 있어도 서북쪽 성벽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925년 고지도를 보아도,, 풍납토성의 서북벽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1918년 고지도와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1925년 홍수로 서북벽이 사라졌다는 말은 일본인 학자의 생각을 단순히 옮겨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수에 유실되어 안보인다는 암사동 방향 서북벽은 한강에 멀리 있고,,
지금도 잔존하는 잠실방향의 서남벽은 오히려 한강에 무척 가깝게 위치해 있었습니다.......


서벽은 본래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홍수로 인한 한강물 범람으로 인해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한강에 보다 근접한 잠실방향의 서벽이 먼저 유실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고 보고 그려진 고지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길보다 높게 있는 자연제방(둔덕)을 착각하였거나,,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암사동토성을 보고서 추측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1934년 고지도를 보아도,, 

 a 암사동토성 / b 풍납토성 / c 몽촌토성

b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말한 이들은,,
풍납토성의 서쪽 한강변 토성벽이 을축년 대홍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지도를 확대해 본 결과....
멸실되었다는 한강변 토성벽과 이어져 있었을 토성벽이 암사동쪽과 잠실쪽으로 남아있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즉, 대홍수로 완전히 멸실되었다는 토성벽이 벌어진채로 왜 남겨져 있을까요??
그것만 남기고 무려 1.5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벽은 멸실되어 없어지고,,
바깥쪽은 남기고 안쪽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요??


1937년 고지도를 보면 1934년에 한강물에 잠긴 서남쪽 토성벽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시말해서 1925년에 존재하고 1934년에 한강물에 잠겨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서남쪽 토성벽은,,
1937년 한강물의 수위가 낮아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풍납토성의 서벽은 홍수나 한강물로 유실되는 것이 아니라,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즉 한강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릴 그 위치이기 때문에 서벽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제하의 필지구분을 통해 서북쪽 성벽이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데,
1934년 지도를 통해 한강물에 잠긴 지역은 필지가 포락(물에 잠겨 개인소유권이 상실됨)되었으므로,
토성벽에 의해 필지가 구분된 것이 아니라,
그 부근 토지는 한강과 홍수에 의해 포락 멸실(소유권상실)이 되었다가 다시 멸실 회복(소유권회복) 되는 식으로 필지가 구분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북쪽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토성벽은 물의 흐름에 맞서지 않고 평행하게 있으며,
뻘흙을 쪄서 견고하고 수백만톤의 흙이 들어갔다는 토성벽은 1~2미터도 아닌 무려 1.5킬로미터이상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요? 본래부터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설 중에 왕성이 아니라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여러 고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습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지금의 잠실지역은 과거에 풍납동까지 이르는 '잠실도'라는 섬이었습니다....

한강이라는 큰 폭의 강물이 잠실도를 만나 갑자기 강폭이 줄어들게 되니 그 물이 풍납동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막아내기 위해 풍납토성의 일부는 평행하게 일부는 안쪽으로 들어오게 토성이 쌓여지고,
잠실방향 풍납토성의 일부 잔존하는 서남벽은 흘러들어오는 강물을 일차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존재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 물로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그 곳의 토성벽이 먼저 없어졌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모로 보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본래부터 없었을 것같은 생각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의 서벽이 무너져 풍납동 위에 쌓인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풍납토성 바깥쪽 벌말의 높이와 안쪽 성안말의 높이가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토성만 빼면 안팎의 높이가 똑 같으니 토성벽이 무너져 풍납동에 쌓인 것이라는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풍납토성 이외에 다른 곳의 유적지도 죄다 현재의 땅 밑에 존재하는데,
그럼 전국토가 토성벽이 무너져 유적지가 땅밑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닌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암드리'에 관하여.....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풍납토성 자체 아니면 제방과 함께 뱀의 형상을 한 것을 일컫는 것이거나,

아니면 풍납토성 인근에 뱀이 많았던 것을 통하여 배암드리, 한자로는 사성이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재에도 장마철 비가 내리는 때에는 커다란 지렁이가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으로 군사용토성과 제방의 역할을 하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지,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 모습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 생각이 이러할 뿐이고, 나머지는 사학자님들과 고고학자님들께서 밝혀주셔야 할 몫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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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에서 안보이는 서벽에 대한 논란..... 낙서장

2008/12/18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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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성벽·해자 인공여부 논란 “연구소 경솔한 발굴” 비난 쏟아져


서울 풍납토성을 발굴조사해온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홍역을 치르고 있다. 지난 12일 한성 백제시대의 거대성벽과 해자유적이 발견된 것으로 발표한 풍납토성 남서쪽 삼표산업 사옥터 유적의 성격을 놓고 학계에서 이례적으로 비판적 견해를 내놓았기 때문이다. 발굴된 거대 자갈무더기 층과 윗쪽 둔덕을 인공해자와 성벽시설로 추정했던 연구소쪽 해석에 대해 상당수 고고학자들은 “근거가 미흡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애초 연구소쪽은 언론에 성벽 기초부분과 이와 연결된 인공해자 흔적으로 보이는 자갈층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설명회 뒤의 추가발굴에서 이런 가설은 일부분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자갈층 표면에서 조선시대 자기와 백제토기 조각들이 뒤섞인 채 발견된데다 자갈층 아랫쪽을 갈라본 결과 모래층과 자갈층이 뒤섞인 자연 퇴적층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이는 곧 현재 드러난 자갈층 표면이 백제시대 해자바닥이 아니며 성벽시설과도 인공적으로 연결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한다.

성벽 기초로 추정한 부분도 흙을 층으로 다져 쌓은 판축 흔적이 없는 상황에서 섣불리 인공벽으로 단정했다는 지적이다. 실제로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권오영 한신대 교수 등은 성벽이 자연제방이며 성벽 안에서 나왔다는 1∼2세기 백제토기도 성벽보다 오래된 제방 위의 주거지터 유물일 공산이 크다고 주장한다. 연구소쪽은 문화재청에 낸 약식보고서에서 해자와 성벽 기초 추정부분이 자연지형일 수도 있다고 견해를 수정했으나 해석이 경솔했다는 비판은 계속되는 형편이다.

발굴을 담당한 신희권 학예사는 “성벽 기초부 끝자락에 99년 동벽 발굴 때 나온 것처럼 돌을 박은 인공석렬흔적이 나왔고, 성외벽 보강용으로 입힌 듯한 점토층 덩어리도 보여 성벽으로 추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자갈층도 바닥돌 가운데 손으로 깬 할석들이 있어 자연퇴적층이라고만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 31일 서울·경기 고고학회 모임에서는 성벽의 실제 여부를 놓고 신 학예사와 이영훈 고고부장이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연구소쪽은 성벽 실체 확인을 위해 터 동쪽 추가발굴을 계획중이나 이번 논란으로 국가기관의 공신력에 적지않은 상처를 입게됐다.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해석 논란을 떠나 발굴과정에서 세부준비가 다소 미흡했다. 사전에 지질학자 등 전문가 자문을 듣지않은 것이 아쉽다”고 했다. 누구나 공감할 실증적 단서 확보가 발굴의 금도임을 재확인시켜준 셈이다. 노형석 기자

===============[연구소의 반론]==========================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부지 발굴조사 관련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장

내용 한겨레신문(4월 3일자 39면)에 게재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풍납토성 발굴조사 관련기사 내용중 일부가 사실과 다르게 보도된 부분이 있어 이를 바로잡고자 하며, 또한 최근 일부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논란이 일고 있는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 신축부지 발굴조사 결과와 관련하여 국립문화재연구소의 공식적인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밝힙니다.

한겨레신문(4월 3일자 39면) 기사에는 "자갈층 하부를 갈라본 결과 후대의 조선시대 자기와 백제토기 조각들이 섞여 나와 교란된 퇴적층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명됐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사실과 전혀 맞지 않는 내용입니다.
지난 3월 12일 개최한 현장설명회 당시 노출된 자갈층(연구소에서는 이를 '부석유구'로 표현한 바 있음) 사이에서 백제시대 토기편과 함께 조선시대 자기편 등의 유물이 함께 출토되어 이를 확인하기 위해 자갈층 하부를 절개해 본 결과 맨 위층의 자갈층을 제외한 그 아래층으로의 현재까지 밝혀진 바로는 1m 이상의 자갈과 모래가 섞인 퇴적층내에서 순수한 백제시대 토기편만이 출토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문화재청에 제출한 약보고서와 현장설명회 자료에서 밝힌 바와 같이 백제시대에 조성된 혹은 백제시대에 존재했던 추정 해자가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자갈층 형성 시점 이후에 현재와 같은 퇴적 양상이 유지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한편 성벽 기저부의 성격과 관련된 인공성 여부 논란은 현재 어느 입장에서도 명확한 증거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에 막연히 자연제방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에게 제기하고 싶은 몇 가지 문제를 제시하는 바이며(별첨자료 참조),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이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성격을 구명하기 위한 풍납토성 서남벽 일대의 학술 발굴조사를 계획하고 있음을 또한 알려드립니다.

다만 이같이 학술적으로 뚜렷한 결론이 도출되지 않은 시점에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발굴이 경솔한 발굴조사라는 등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단정지어 보도하고 국가연구기관의 공신력을 문제삼는 일부 언론의 공정치 못한 보도 행위는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기사를 기대하는 국민들의 입장에서 볼 때 심히 우려되는 바이며, 금후부터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학술적인 토론과 논의의 장이 펼쳐지기를 기대하는 바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반격]-------------------

문화재연구소 "풍납토성 성벽.해자 유적 확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한강과 인접한 풍납토성 서쪽 성벽 일대에서 최근 발굴된 '성벽' 및 자갈층은 성곽이나 해자의 흔적이 아니라 자연제방 및 자연도랑의 흔적이라는 고고학계 일부의 주장에 대해 발굴단인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봉건)가 "타당성 없는 억측"이라며 정면대응에 나섰다.

연구소는 충남대 박순발, 한신대 이남규 교수와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을 비롯한 일부 학자와 몇몇 언론이 이런 요지의 주장을 펴고 있는 데 대해 연구소측의 당초 발표대로 이 유적들은 인공성벽과 해자의 흔적이 확실하다고 7일 말했다.

연구소는 '풍납토성 삼표산업 사옥부지 발굴조사 관련 국립문화재연구소 입장'이라는 글에서 성벽 바깥쪽으로 폭 20m 이상이 확인된 자갈층의 하부 일부를 절개한 결과 유물로는 백제시대 토기편만이 확인됐다고 설명했다.

반면 자갈층 상부에서는 백제유물과 조선시대 유물이 혼합돼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갈층은 백제시대에 존재한 추정 해자가 조선시대까지 존속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되는 것이며, 조선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자갈층 형성 시점 이후에 현재와 같은 퇴적 양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또 자갈층 안쪽에서 확인된 대규모 흙벽이 자연제방이며, 인공성벽으로 볼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인공성벽이라는 데 아무런 의심이 없는 풍납토성 동쪽 성벽에서 확인된 것과 동일한 모티브의 층위가 서벽에서도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연구소는 이와 함께 나아가 자연제방이라고 학계 일부가 주장하는 성벽 기저부 점토층 곳곳에서 목탄편과 기원 전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풍납동식 무문토기편이 출토되고 있다고 덧붙이면서 "만약 이 층이 순수한 자연제방이라고 한다면 이같은 현상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앞서 박순발 교수 등은 문화재연구소가 인공성벽 및 해자 흔적이라고 발표한 내용에 대해 자연제방이나 단순한 강벽퇴적층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한편 '성벽'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또한 자연제방 위에 조성한 취락유적일 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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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대응하는 문화재연구소


“우리 해석에 찬동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왜 공신력에 상처를 입었다는 거죠”

초기백제 도읍터로 유력한 서울 풍납토성 서쪽 삼표산업 사옥터 발굴을 맡은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는 이런 불만을 터뜨렸다. 지난달 발견된 인공연못(해자)과 성벽 추정 유적의 인공축조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학계 반론을 소개한 〈한겨레〉 기사(3일치 39면)를 겨냥한 항변이었다. 연구소 쪽은 한술 더 떠 4일 “일부 언론이 사실과 다른 내용을 단정짓는 불공정 보도를 한다”는 자료도 배포했다.

애초 연구소 쪽은 지난달 12일 현장설명회 보도자료에 ‘처음 대규모 해자 확인’이란 제목을 달았다. 3세기 전의 성벽과 해자를 확인했으며, 해자 바닥시설인 듯한 자갈층(부석유구)도 축조됐다는 내용이었다. 연구소 쪽은 취재진에게 “성벽까지 연결된 인공해자가 확실하며, 성벽 안 발굴토기들은 의식용 도구”라는 설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이후 풍선이 바람 빠지듯 쪼그라들고 있다. 이영훈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최병현 숭실대 교수 등이 인공성벽의 증거인 흙다짐층이 없다는 견해를 제기했고, 자갈층 아래쪽도 자연퇴적층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국 연구소는 “성벽 기초부와 자갈층에 대한 모든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식으로 약식보고서를 써야 했고, 지난달 31일 서울·경기고고학회에서도 자연제방 가능성을 수긍하기에 이르렀다.

사실 학계 비판은 국가기관이 발굴 과정에서 보인 신중하지 못한 대응을 문제삼은 것이다. 성벽과 해자추정 유적이 복잡한 퇴적층인 만큼 지질 전문가와 학계 자문을 구하고,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열어놔야 했다는 의견들이다. 현장설명회에 갔다는 한 연구자는 “단정적 해석의 위험성을 짚은 지적들인데, 연구소 쪽이 감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고 했다.

노형석 문화생활부 기자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종래 없었으나 발견되었다면서 서벽으로 추정했던 부분이 미래마을 부지의 도로, 얼마전 항아리, 중국제 청자가 발견되었던 창고시설, 건물지 옆을 관통하고 있는데 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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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풍납토성 출토 항아리와 청자에 대한 연구와 고민이 필요합니다.... 낙서장

2008/12/18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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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에 대하여 진정한 연구와 고민은 없고, 언론플레이에만 급급한 것 같습니다....

며칠전 풍납토성 미래마을에서 대규모 창고시설을 발견하였고,

중국제 청자 음양각연판문완을 발견하였다는 대대적인 언론의 발표가 있었습니다.....

제작연대를 한성백제시기인 5세기 중후반대로 보고있어

기존발굴유물들과 제작연대가 상충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한번 곰곰히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미래마을 발굴층위는 기존 한성백제의 도로로 추정하는 부분과 층위가 다르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즉, 그 발굴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해당하는 연대가 다른 것은 아닌지 고민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관련기사 ; 또한 장방형 수혈 주변에는 남북과 동서방향으로 지나가는 구상유구(도랑유구)들이 확인된다. 이 구상유구는 기존에 확인되었던 동서도로의 축과 연결되며, '97년에 조사된 경당지구 남쪽의 구상유구들과도 연장선상에 위치해 있다. 만약 이 유구들이 같은 성격의 것이라면 확인된 구상유구의 총 길이는 260여m에 달하며, 토성 내부를 동서로 가로 지르는 양상이 된다. 현 조사지역이 주변지역보다 과거 지형이 높음을 감안할 때 상부의 도로면이 후대에 파괴되고, 도로의 측구시설(배수시설)만 잔존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이 구상유구들이 도로의 부속시설일 가능성과 함께 도시계획 상에서 토성 내부를 남북으로 구획하기 위한 목적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에 발굴된 중국제 청자 완은 기존에 발굴된 유물들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유물의 형태에 대한 대략적인 언급만 있을뿐, 제대로 규명되진 못한 것 같습니다.....

관련기사 ; 이번에 출토된 청자와 유사한 것으로는 천안 용원리고분군의 장방형 석실분 출토품(서울대학교박물관 소장)이 있다. 크기는 풍납토성 출토품 보다 크지만(구경 16.4cm, 높이 9cm) 전체적인 형태나 연판문의 시문(새겨넣는) 기법 등이 유사하다. 다만 용원리 출토품은 전체적인 유색이 연녹색을 띠고 있어 맑은 청색을 띠는 풍납토성 출토품과는 차이가 있다. 참고적으로 중국의 연대를 알 수 있는 무덤에서 출토된 자료 중 남조의 송(宋) 영초 원년(永初 元年 ; 420년) 출토품과 원미(元微) 2년(474년) 출토품을 놓고 볼 때, 연판 중앙부에 새겨진 세로로 된 음각선이 없다가 생기고 있어 풍납토성 것은 두 유물의 사이에 해당하는 5세기 중반경 월주요(越州窯)에서 생산된 제품으로 생각된다.

중국청자나 우리의 초기 청자들은 연녹색이나 황색을 띠는 것이지, 맑은 청색이 아니라는 것이 촛점입니다....

또한 풍납토성에서 기존에 발굴되었던 유물들은 아래와 같이 대개 유약을 바르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풍납토성을 왕궁의 위치로 올려 놓은 대부토기와 비교해보아도....
조악하게 음각된 대부토기와는 차원이 다른 것 같습니다.....


대부명이 발견된 9호 유구는 수 차례에 걸쳐 유물이 퇴적된 양상인데 각 충마다의 시기차는 그리 크지 않으며 출토된 유물은 5세기 중 후반대에 해당한다.
5세기 중 후반대는 백제의 개로왕대에 해당된다.

비슷한 시기의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항아리와 비교해보아도....
형태등에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 출토 청자 완과 비교제시된 용원리고분 출토청자 발과 중국 청자를 보기 전에 꼭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유약입니다....

위; 풍납토성출토청자, 아래; 용원리출토청자

중국청자

 


청자는 최우선적으로 유약을 먼저 살펴본다고 합니다....

용원리 출토 청자와 삼국시대 청자, 그리고 중국 청자가 연녹색과 황색으로 유사한 유약의 색채를 지닌 반면,

풍납토성 출토 청자는 맑은 청색으로 색채가 다른 차이점이 발견됩니다.....


즉, 풍납토성 출토 청자와 나머지 청자들과 시기적 차이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형태면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출토된 용원리 청자와 풍납토성의 청자가 서로 매우 유사하고,

삼국시대 청자와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자는 서로 유사하나, 풍납토성과 용원리 출토 청자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이러한 형태적 차이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 고유의 청자일 가능성을 열어두고 그 특색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청자에 대하여 대략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청자를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몇 가지 기술적 단계를 극복해야 한다.

우선 고화도(高火度)번조기술(燔造技術)에 의한 경질도기(硬質陶器)의 단계를 거치고,

다시 그 위에 고화도유약(高火度釉藥)을 씌운 회유도기(灰釉陶器)의 단계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청자를 제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기원전 15세기 경에 회유도기를 만들 수 있었지만

자기질(磁器質)에 가까운 초보적 청자는 기원후 4세기경이 되어야 만들어졌다.

그 이후 중국은 제작기술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7~8세기가 되어야 청자를 완성시키고 보편화 시킬 수 있었다.

중국에서 7~8세기에 완성한 청자를 우리나라에서는 9~10세기에 만들기 시작했고, 곧이어 흑자(黑磁)와 백자(白磁)도 제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중국 월주요 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가치와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남북국시대 신라지역의 안압지,황룡사지,미륵사지,부여 부소산 등에서 월주요 청자와 형주요.정요.백자가 발견되고 있어서 청자.백자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보인다.


중국의 청자가 유약을 두껍게 발라 투박하게 보이는 데 반해,

우리의 고려청자는 유약을 엷게 발라 날렵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
이라고 볼 수 있을것 입니다.


고려 문종(1047-1082), 선종(1082-1094) 사이에 귀족정치 체제가 확립된다.

귀족의 청자 수요가 늘어나면서 중국(북송)으로부터 수입이 활발해진다.

중국을 본뜬 청자 생산에 힘을 쏟아서 생산이 왕성해진다.

(이때 나타나는 압출양각, 철화 등은 중국의 영향이다.)


도자기 생산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조잡한 도자기도 나타난다.

가마는 칸이 없는 올림 통가마 형태이다.

음양각의 연판문 청자가 증가한다.(불교의 영향)


대략 10세기 후반부터 그릇 장식을 위한 문양이 나타나는데 중국에서 전래된 국화당초문과 연판문 등을 고려적인 모습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대체로 10~11세기 경에는 그릇과 형태와 함께 문양 또한 중국 북송 시대의 도자 문양과 금속공예 문양이 지배적이었다.

이후 앞서 열거한 다양한 문양소재들이 기면 장식에 이용되었으며 대접과 접시 등에는 대체로 안쪽 면에 한정되어 나타난다.

이 가운데 특히 연꽃과 모란꽃이 많이 등장하며 절지 형식이나 당초문과 어울려 청자 문양이 중심을 이룬다.


고려 청자에 시문된 식물문은 대개 연판문이나 국화당초문, 연화문 등이 뒤를 따른다.

동물 문양으로는 앵무새, 원앙, 물고기, 그리고 용과 봉황 등 상상 속의 동물들이 구름과 파도와 어울려 나타나 다양한 기형에 중심 문양으로 이용되며 이와 함께 뇌문, 당초문, 여의두문, 연판문대 등이 보조문양으로 장식되면서 구성도 복잡해진다.

보조문양으로서의 이들 문양은 음·양각 기법이나 도범으로 찍은 양인각기법 등으로 표현되며 한편으로는 철화 기법도 함께 사용하여 청자에 채색 문양을 넣는 등 그릇 장식이 다양화된다.


11세기말에서 12세기 전반에 걸쳐서는 이러한 특징을 갖춘 상형청자(象形靑磁 동물이나 식물및 인물모양의 청자)가 널리 제작되어집니다.

이처럼 다양하고 세련된 기형을 지니면서 푸른색의 유약은 광택이 은은하고 안정감을 주는 반투명의 비취색을 띠게 됩니다.


고려시대에도 청자로 만들기 어려운 장독과 같은 큰 항아리는 토기로 만들 수 밖에 없었다.


(1) 중국청자의 색채와는 전혀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습니다.....

즉, 중국청자나 우리의 초기 청자들이 지닌 연녹색이나 황색의 색채가 아니라 맑은 푸른 빛을 지니고 있습니다......


(2) 중국청자는 유약을 두껍게 바르나 고려청자는 얇게 바르는 것이 특색입니다.....

중국의 청자가 유약을 두껍게 발라 투박하게 보이는 데 반해, 우리의 고려청자는 유약을 엷게 발라 날렵한 자태를 간직하고 있는데,

곧, 중국은 유약이 두꺼워 불투명하고, 우리는 얇아 투명하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라 합니다.....


(3) 음양각 연판문은 언제 주로 나타났는지를 살펴보니........

고려 문종(1047-1082), 선종(1082-1094) 사이에 귀족정치 체제가 확립되면서, 귀족의 청자 수요가 늘어나 중국(북송)으로부터 수입이 활발해지고,

중국을 본뜬 청자 생산에 힘을 쏟아서 생산이 왕성해지며, 음양각의 연판문 청자가 불교의 영향으로 특히 더 증가했다고 합니다......


(4) 비교 제시되는 다른 토기와 달리 음각된 선이 너무나 뚜렷합니다.....

물론 보존상황에 따라 다를 수는 있겠지만, 비교제시된 청자들과 비교해보아도 너무나 뚜렷한 선을 지니고 있어 그보다 후대에 제작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술잔이나 찻잔이 왜 항아리에 있는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 합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대규모 저장시설로 보고 있고, 술을 담은 항아리로 보고 있는데,

그 안에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가라앉을 더구나 깨어진 술잔 내지는 찻잔을 넣어두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합니다.....

술이 맛이 없어서 안으로 던져 넣어버린 것일까요?

대개 시골에 가면 장독이 있고 그 안에 깨어진 그릇이 놓여져 있습니다......

그릇을 사용하다가 이가 나가거나 부분적으로 깨어지면 그것을 독안에 넣고 사용하는데.....

깨어진 청자 완을 이런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를 토대로 나타난 의문점을 살펴보면......

(1) 최근 발굴된 중국제 청자 완이 한성백제시대에 사용되었다면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 들여 온 대부토기를 왕궁에서 사용하는 유물로 볼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중국제 청자 완의 정교히 음각된 선과 조악하게 그어진 대부자를 비교해보시면 이해가 되실 것 같습니다.....

과연 대부토기를 통해 왕성으로 추정되어질 수 있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고 있는 대부토기등 기존 발굴유물의 제작연대를 5세기 중 후반대, 백제의 개로왕대에 해당된다고 보면서,

최근에 발굴된 중국제 청자완 역시 동일한 시기인 5세기 중후반 경으로 보고 있는데.....

이 유물들 사이에 드러나 보이는 시대적, 기술적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2) 기존에 발견된 경당지구의 토기들은 주둥이를 인위적으로 깨어뜨린 것이라는데, 이번에 발견된 미래마을의 항아리들 역시 모두 주둥이가 깨어져 있습니다....

제사유적지로써 인위적으로 깨어뜨린 것이 아니라, 교역지와 도요지로써 깨어진 토기들의 폐기장이었거나, 토기들의 저장시설이 맞지 않을까 생각 됩니다.......


(3) 풍납토성 안이라면 발굴 층위와 아무런 관련 없이 모두 백제의 유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기존에 발굴된 풍납토성의 항아리와 지금의 항아리의 큰 형태적 차이점에 대한 고민이 없습니다......



(4) 풍납토성의 발굴유물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백제 고유 유물이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수입된 중국제 유물이라 하는데,,

풍납토성의 보존 일변도를 위한 대한 언론플레이와, 시대만 빠르게 올리려 하는데 급급할 뿐 제대로된 고민과 연구가 부족한 것 같습니다.....

실제 이번 발굴에 대하여 사학계나 고고학계의 교수님들의 언급이 없다는 것도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제 의문은 이러한 것이고, 사려깊으신 사학자님이나 고고학자님들의 이에 대한 올바른 연구와 발표를 기다려 봅니다.......

 

 

마한왕의 허락을 받았던 백제초기의 수도라면 삼성동,몽촌,풍납동,암사동,귀산토성의 보호와 중심에 놓인 이성산성에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풍납토성은 사성으로 군사용토성과 제방의 역할을 하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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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풍납동... 공부하는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 낙서장

2008/09/16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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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후 풍납동... 공부하는 동네 만들기 프로젝트.....
http://cafe.daum.net/windcome/HSh9/1178

 

국내에 몇 안되는 영어마을이 위치한 풍납동은 이외에도....

 

 

미래마을에 최신식 도서관을 세울 예정으로 의원님들께서 예산안을 상정하시는 등 노력을 경주하고 계십니다....

 

송파구의 미래주역들이 미래마을에 위치한 미래도서관에서 미래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를 하게 될 것입니다....

 

 미래도서관에는 필요하다면 유적전시관을 지하및 저층에 위치시키고,

 

그 관리및 운영에 사학계의 관련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후에 삼표레미콘이 이전하면 조사 및 발굴완료 후 그 부지에 자사고, 특목고나 국제중학교가 유치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이경우에도 필요다면 유적전시관을 함께 만들어, 그 관리및 운영에 사학계의 관련자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진행 중이기에 주민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금 현재 진행중에 있는 미래도서관의 건립을 위해,,

 

송파구청, 송파구의회, 서울시청, 서울시의회, 문화재청에 요청을 해야 합니다.....

 

교육전문가이시며 풍납동을 지역구로 하시는 박영아 의원님께서도 도움을 주시리라 생각됩니다....

 

 

글을 잘 쓰실 필요도, 길게 쓰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짧게 아이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풍납동 미래마을에 도서관을 설립해달라고만 하셔도 됩니다....

 

 

영어마을, 미래도서관, 자사고/특목고/국제중 등 교육인프라의 확충에도 힘써야 할 때입니다.....

 

 

올림픽 대교와 천호대교, 광진교를 조망하고, 한강공원을 앞마당으로 하여 송파구를 대표하는 국내 최고의 도서관 중 하나가 지어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글 하나가 풍납동을 변화시킵니다....

 

 

 

 

** 아래는 천호동에 위치한 해공도서관 관련 글입니다..... 

천호동공원 ‘해공도서관’ 문열어
강동구, 국회의원·주민등 500여명 내일 개관식 참석

강동구(구청장 이해식)가 26일 오후 3시 천호동공원(천호동 360)에서 국회의원, 시·구의원, 새마을 문고회원, 주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공도서관 개관식을 개최한다.

24일 구에 따르면 이번에 개관하는 해공도서관은 지역간 정보 및 문화 수혜 격차를 해소하고 주민들이 생활 속에서 도서관 접근을 편리하도록 한다는 취지에서 건설됐다.

해공도서관은 ▲지하 1층-문화교실 ▲지상 1층-유아 및 어린이 자료실 ▲2층-종합자료실 ▲3층-디지털자료실과 72석의 일반열람실 등을 갖추고 천호·암사지역에 초·중·고등학교가 13곳으로 많다는 지역특성을 고려, 학생들에게 필요한 자료는 물론 영어원서 부문을 특화해 1만9300권의 장서를 구비했다.

또한 건물 후면을 이패나무로 만든 나뭇가지 형상으로 에워싸 공원 주변 나무들과 조화를 이루도록 했으며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안락한 휴식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도서관 1층에 공원과 연계된 아담한 카페가 마련된다.

도서관의 운영은 주민 편의를 고려해 7월1일부터 종합자료실의 경우 밤 10시까지, 일반열람실은 밤 11시까지 개방된다. 도서관을 이용하는 주민들은 최첨단의 RFID 시스템 구축으로 사서의 도움 없이 자가 대출과 반납이 가능하며, 상호대차시스템 도입으로 회원카드 하나로 구립도서관간 도서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한편 권역별 도서관 사업을 진행하고 있는 구는 지난해 성내·둔촌권역에 성내도서관을 개관했으며, 2009년 상반기 중 강일권역에 강일동복합청사내 도서관을 조성하게 된다. 또 암사권역의 암사도서관은 부지(암사동 471-37 외)를 확보하고 현재 설계용역 중에 있어 이르면 올 연말 경 착공에 들어가게 된다.

/차재호 기자

 

강동구 천호공원 內 ‘해공 도서관’ 착공

곽수근 기자

 

옛 빠이롯트 공장부지에 세워진 서울 강동구 천호동공원 안에 자연과 어우러진 도서관이 들어선다.
 
조감도

지난달 성내도서관을 개관한 강동구는 해공도서관(천호권역)에 이어 내년 상반기 암사도서관(암사권역)을 착공, 권역별 구립 도서관을 완비할 계획이다.
 

 

주민들이 언제 어디서나 독서를 즐기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즉 유비쿼터스 패러다임을 실현해 나가겠다는 야무진 문화강동의 밑그림을 열심히 그리고 있다라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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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명탄 발전위원장님, 파파스머프방장님과 함께 논의된 내용을 올립니다..... 08.09.02 14:50
다비노프님의 글은 현재 우리 주민들 모두가 원하는 바를 그대로 나타낸것으로 생각 합니다.공지로 올립니다.도서관 유치는 우리 회원님 다수의 의견으로 어제 구의원님 면담시에도 저 역시 가장 강조한 부분 입니다.송파구에서 가장 변변치 못한것이 도서관 시설 아닌가? 생각 합니다.가장 중요시 되야 할 부문이 가장 뒤쳐저 있는 듯 합니다.요즘 다른 지역의 도서관 시설은 그야 말로 첨단식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풍납동에 송파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첨단식 도서관이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주민들 모두의 절실한 소망이라고 생각 합니다. 08.09.02 22:53

아겠습니다..즉시..무조건 의무라고 생각하고 실천합니다...무슨 방법이든지..다..동원하여..풍납동 발전을 이루어야 겠습니다. 어제 비도 많이 내렸는데..활동 하시느라..너무나..고생이 많으셨습니다...다시한번..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08.09.02 15:47

우리 주민들 대부분은 도서관 시설을 원하는것으로 우리 카페에서 이미 여론조사가 있었어요. 08.09.02 15:59

우리끼리 백번 말이나 모임 보다,조명탄님 말씀 처럼 자신 명의로 송파구청이나 문화재청에 한번의 민원 제기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문대위가 모임을 수없이 가졌어도,젊쟎고 핵심을 찌르는 민원 한마디를 그들에게 전하는것이 훨 효과가 더 좋을수가 있다고 생각 해요. 몇줄 몇마디 인터넷 민원조차 올리는것 조차 힘든다면.....모임 조차도 힘들지 않을까요? 모여도 몇명 안 모일것 같고....몇명 모여 집회를 해야 인정도 안 할꺼고..... 08.09.02 16:36
소닉님 말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저도 모임에 그토록 적극적으로 참여는 못했습니다. 위원장님 및 다른 회원들처럼 인터넷 민원도 제대로 올린적이 없습니다. 이런 활동을 소극적으로 했다하여 소극적일 필요가 없다 생각합니다.중요한건 어떤 방법이 옳다.그르다기 보다는 민원을 올리던 모임을 하던 토론회든 방송 진정건이던 야외.집회 활동이던 풍납 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방법을 우리 주민들이 함께 강구하여 나가는 것이 주민의 화합으로 진정한 발전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어떤 방법이던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이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 보다는 모든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할 수있는데 까지 해보는 것이 08.09.02 17:07
어떨까 생각 합니다..중요한건..회원들께서..모임이나..어떤 활동에..부담가지지 말고..자기 스스로의..판단으로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아마..풍납동의 싸움은..쉽지 않을 것입니다. 점점더..중요한..많은 회원님들이..나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희망이 보입니다. 소닉님 말씀처럼..민원도..많은 회원님들이..올려야 겠습니다..저도..노력을 하겠습니다. ...소닉님의..활동을 쭉..지켜보았습니다..참 부지런 하시더라구요.. 노고에..감사드립니다... 08.09.02 18:15
소닉님 의견이나 발전님의견 다 옳은의견입니다. 민원도올려보고 집회도 한번 동민적인 집회를 추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하여튼 발전님 주장대로 문제 해결을위해 할 것 다 해봅시다. 08.09.15 13:49

우리 카페 메뉴 -바로가기(글쓰기 가능)에 보시면 익명으로도 글을 올릴수도 있습니다.우리끼리의 글도 외부에서 알아야 무슨 의미가 있져.쓰기 어려운 분은 복사라도 하셔서 올립시다. 08.09.02 16:15

소닉님이나 발전님 모두 우리 주민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으니,여러 회원님들과 힘을 한곳으로 모아 그 열정으로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08.09.02 20:32
위원장님 글이..정답입니다..어떠한 의견이던...그것은..단하나..우리동네..우리풍납동을 위한..순수한고..헌신적이며..봉사정신에서 나오는 훌륭하신 의견입니다. 위원장님께서는..들어나지 않는 곳에서...많은 실천들을 하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을 믿고 함께 함에..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08.09.03 09:17

위원장님,다비도프님,발전남 ,소닉님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풍납동이 살 맛이 난답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08.09.03 13:44
오프라인에서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08.09.03 14:28
dhminky님도..이쪽 저쪽서..참 부지런하십니다..뵙고 싶습니다. 08.09.03 19:53

언젠간 만날 기회가 오겠지요. 뜻이 같으니가요, 08.09.03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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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에 없는 서벽의 진실은? 낙서장

2008/09/16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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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축년 대홍수1925년 이전인 1917년에도 본래 풍납토성의 서쪽벽은 없었다.....
http://cafe.daum.net/windcome/HSh9/1194

 

을축년 대홍수  


1925년은 간지로는 을축년(乙丑年)이었다. 이 해 여름 한강하류 일대 중부 지방에는 두 차례 홍수가 있었다. 1차는 7월 9~12일에 있었고 2차는 물이 채 빠지기도 전인 같은 달 15~19일에 일어났다. 당시 기상청 자료에 따르면, 이 해 7월 7일 필리핀 부근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 북상 시작 4일 만인 11일에는 서해안까지 진출했다. 이렇게 되면 태풍은 대체로 한반도나 중국 대륙으로 북상을 해 열대성 저기압으로 약화된 뒤 소멸해 버리곤 한다.

그런데 1917년 다이쇼(大正) 6년에 작성된 풍납토성 일대지도를 보면 서북쪽 성벽이 나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서북쪽 성벽이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이미 없어졌다는 증거다.

풍납토성의 서벽은 본래부터 없었다?......

 

 

 

 

a 암사동토성 /  b 풍납토성 / c 몽촌토성

 

 

b의 풍납토성을 잘 들여다 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말한 이들은,,

 

풍납토성의 서쪽 한강변 토성벽이 을축년 대홍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지도를 확대해 본 결과....

 

멸실되었다는 한강변 토성벽과 이어져 있었을 토성벽이 암사동쪽과 잠실쪽으로 남아있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즉, 대홍수로 완전히 멸실되었다는 토성벽이 벌어진채로 왜 남겨져 있을까요??

 

그것만 남기고 무려 2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벽은 멸실되어 없어진 것일까요....

 

바깥쪽은 남기고 안쪽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요??

 

한강변 토성벽은 없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평지에 왕성을 짓기 위해서는 암사동토성과 같이 둘러쌓은 성이어야 하는데,,

 

풍납토성은 그렇게 지어진 성, 즉 왕성이 아니라 방어를 위하여 만들어진 사성일 뿐입니다.....

 

 

지도와 함께 지난 글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당시 가장 멀쩡했던 암사동 토성은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암사동 토성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본래부터 한강변 쪽의 토성벽이 존재하질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몽촌토성만 보아도 토성은 부분적으로 존재한 것 같고....

 

 

특히나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하지만 1934년 고지도를 살펴보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암사동토성이나 몽촌토성을 보아도 단순히 홍수로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1934년 작성된 고지도는 끝부분이 한강변으로 벌어져 있고,

그 후 작성된 1937년 고지도는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암사동 토성을 보고 풍납토성도 비슷한 모양으로 추측하여 일제가 그려놓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토성벽은 물의 흐름에 맞서지 않고 평행하게 있으며, 뻘흙을 쪄서 견고하고 수백만톤의 흙이 들어갔다는 토성벽은 1~2미터도 아닌 무려 2킬로미터이상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요? 본래부터 없었다는 것이 맞을 것입니다....

 

 

학설 중에 왕성이 아니라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다고 합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내용]

 

한성백제기 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약시굴을 담당한 발굴기관(건국대팀)은 “별다른 문화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다른 전문가들과 이 문화층에 대한 성격논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
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연 천호대교 좌측 한강변에 뻘흙과 같은 흙들이 두텁게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그 거무스레한 뻘흙을 파내는 공사가 예전(작년 말?)에 있었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무스레한 흙들을 파내고, 모래흙을 높게 쌓아 올렸었던 그 공사로 운동하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얼마전 연못에서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지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가 우물이라고 했던 것의 바닥 사진을 보셔도 거무스레한 뻘흙과 같은 흙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해자여서 뻘흙과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이 범람해서 그런 흙들이 발견되는 것이라 최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질좋은 흙들로 인해 풍납동이 도요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풍납동이 도요지였던 것을 모르시진 않으시죠?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명칭에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은 사성 곧, '배암드리'이다.....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면 암사도 풍납동, 잠실도 풍납동, 반포도 풍납동이 되어야겠지요.....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1934년의 지도를 통해 풍납토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에 뭍으로 밀려들어 오는 뱀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이고, 또한 한강쪽의 토성벽이 없다는 즉, 둘러 쌓인 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성(蛇城)이라 한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며,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홍수로 잠기는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 모습을 갖고 있고,

 

이는 또한 군사적으로도 학익진의 모습이 발현되어 있어, 적의 침입시 양 옆과 뒷쪽에서 포위, 협공하여 섬멸시킬 수 있는 진법이 투영되어 있으며,

 

납토성이 교역지의 뒤에 위치함으로 해서 교역지를 포함하여 한강변에 위치했을 때에 발생할 수 있는 이방인(적)들의 기습과 내통을 방지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이며 제방으로도 쓰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이다......

 

풍납토성 내부, 외부하는데, 사성인 풍납토성의 내부는 성내동(성안말; 성안쪽 마을)이고, 외부가 풍납동(벌말; 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그런데 왕성설 주장자들은 이걸 반대로 생각하고 있죠..... 미래마을 과 경당부지는 풍납토성의 외부(바깥쪽)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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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문화재 연구소가 어떻게 이런 답변을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이 지도를 포함한 당시의 지형도들을 볼 때, 풍납토성은 1925년을 전후하여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의 성벽 잔존 양상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17년에도 이미 풍납토성의 서벽은 없다고 하는데 완전히 다른 것 아닙니까?? 08.09.13 22:32

이런 사실을 여기에 말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여태 왕국이라고 주장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와 헌법 소원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 !!!!!!!!!!!!!!!!!!!!!!!!!!!!!!!!!!!!!! 08.09.14 23:06

 

1. 발굴은 잃었던 우리의 역사를 되찾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며, 매장문화재인 유적과 유물들을 대부분 땅속에 묻혀 있기 때문에 매장문화재 분포지역은 각종 건설행위시 관련법에 의해 당연히 보호되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매우 반대

 

동의/ 반대여부 확인하는 내용으로 보호가치를 평가하여 즉, 공익과 사익을 비교형량해서 판단해야 하지 당연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발굴이 완료된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공연히 방치할 것이면서 최상위법인 헌법이 보장하는 소중한 기본권을 쉽사리 침해해서는 절대 안될 것입니다....

 

 

2. 최근 한성백제시대 왕성으로 추정하고 있는 풍납리토성의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3) 낮다

 

높냐/낮냐 평가하는 내용으로 풍납토성은 사성이며 풍납동은 도요지이면서 교역지이므로, 무려 5만여명의 기본권을 박탈하면서 보존해야  할 풍납토성은 하물며 왕성도 아니어서 그 가치를 낮게 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3.풍납리토성으로 인하여 귀하가 피해를 입고 있다고 생각하는 정도를 표시해주기 바랍니다.

주거환경의 쾌적성 - 많은 피해 

주거환경의 편리성 - 많은 피해

현실적 재산가치 - 많은 피해

잠재적 재산가치 - 많은 피해

 

피해의 정도가 많냐/ 적으냐 하는 내용으로 풍납동은 건축규제로 말미암아 노후주택이 많고, 내부는 소방도로가 확보되지 못하고 있는 등 운전에도 상당한  불편을 주고 있으며, 문화재에 따른 제약으로 이주 수요가 감소하였는 바, 서울에서 가장 소외받아 오는 등... 쾌적성과 편리성은 엄청나게 침해되어 왔고,  재산적 가치는 지금이 바닥인 상태입니다...하지만, 그럼에도 풍납동은 그 자체로써 많은 편의성과  장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건축규제가 완화되어 개발이 허용된다면 풍납동의 미래가치는 가히 폭발적으로 상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근래 부동산 전문가들은 풍납동을 주목하고 있습니다.....과거 잠실보다 나앗던 풍납동입니다.....    

 

 

4. 백제문화의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풍납리토성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개발행위에 대한 제한이 불가피하다. 라는 의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매우 반대

 

1번과 같은 내용으로써, 동의/ 반대여부 확인하는 내용으로 그 보호가치를 평가하여 즉, 공익과 사익을 비교형량해서 판단해야 하지 당연히 보호되어야 하는 것과 제한이 불가피한 것은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발굴이 완료된 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합니다...공연히 방치할 것이면서 최상위법인 헌법이 보장하는 소중한 기본권을 침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5. 풍납리토성 지구의 사적 지정방식 중 바람직하다고 보는 것은?

(1)현행대로 소유자 신청에 따른 지정

(2) 발굴조사 결과와 유적 분포상황 및 중요도에 따라 권역별 지정

(3) 풍납리토성 내부 전체를 일괄 지정

(4) 기타 방식

 

개인적으로는 토성이외에는 사적지정을 해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게 안되면 (1)을 주로 하면서 (2)를 종으로 하는 혼합형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지만,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고, 사학자들의 무대포식 전횡이 존재해서는 안되기에 (1)의 방식으로 선회합니다.....

 

 

6. 귀하께서 현재 풍납동에 거주하는 이유? 모두 표시

(1) 쾌적한 환경

(2) 직장 접근성

(3) 일반적 접근성( 지방 연고지로부터의 교통편의 등)

(4) 자녀 교육

(5) 주택 구입비

(6) 주택 임대비

(7) 주거비용

(8) 가족부양

(9) 역사유적지의 가치

(10) 선대로부터 거주해온 역사

 

 

7. 귀하께서 부득이 이주를 해야 한다면 어떠한 형태의 보상을 원하십니까?

(1) 현금 일괄보상

(2) 현재 소유한 토지와 상당한 가치의 토지로 지역게 관계없이 토지교환

(3) 현재 소유한 토지와 상당한 가치의 토지로 송파구 인근 지역 토지교환

(4) 이주방안을 우선 합의한 후 향후에 보상방안 결정

(5) 기타 - 현재 소유한 토지와 같은 면적의 토지로 송파구 내 토지교환 -본인 기재

 

 대개 (3)을 선택하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상당한 가치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풍납동이 현재와 같이 저평가된 상태 그대로의 가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제가 (5)에 기재한 내용과 같은 의미를 지닌 것인지 반드시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예를 들자면, 풍납동 1평 2000만원의 토지를 가지고 있다면 (3)은 잠실 1평에 못 미치는 토지와의 교환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고, (5)는 잠실 1평과 교환한다는 의미입니다.....  

 

 

8. 현행 풍납동 내부지역 건축행위 범위( 지상 건물높이 15m이내, 지하2m내/외, 15m이상의 건축물은 기존 건물 높이 범위내에서 개축)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문화재 경관과 지하유규 보존을 위해 적절한 조치 임

(2) 과도한 규제이나 문화재 보존을 위해 불가피한 조치 임

(3) 과도한 규제이므로 완화해야 함

(4) 문화재 경관과 지하유규 보존을 위해  더욱 강화해야 함

(5) 잘 모르겠음

 

한성백제 박물관이 올림픽공원에 지어져 풍납동은 발굴 후 그 박물관에 유물을 제공하는 역할 내지는 중요유구에 대한 전시관을 세우는 수 밖에 더이상 기대할 것이 없습니다....그렇다면 이제는 과감히 건축규제를 완화하여 기나 긴 세월동안 침해받아 온 기본권을 회복시켜 주어야 합니다.... 

 

 

9. 현행 서울시 도시계획법상의 건축행위 범위(지상건물 높이 20m/ 7층, 지하2m) 로 완화하는 방안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찬성

(4) 기타 - 더 완화해 주어야 합니다 ; 본인 기재

 

대개 (1)이 선택될 것으로 생각됩니다....하지만 더 완화되어야 한다고 생각때문에 (4)에 따로 기재하시는 분들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 (1)과 (4)로 나뉘어서 결과적으로 (2) 현행규제 유지가 많다고 발표할 우려가 있기에 일단 (1)에 표기하고 이에 대한 확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10. 문화재보호법과 도시계획법에 의한 현행 건축행위 범위를 20층까지 확대해 달라는 의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찬성

 

말이 필요 없습니다..... 건축범위가 20층으로 확대되면 풍납동은 바로 잠실 수준이 되거나, 이를 뛰어 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풍납동은 전지역이 공원으로 둘러쌓여 있고, 특히 잠실보다도 한강접근성이 좋습니다....더블 역세권으로 지하철, 올림픽대로, 천호대로, 올림픽대교, 천호대교, 광진교등 교통의 편익성과 백화점, 이마트, 아울렛등 대형마트뿐만 아니라 국내 최대 아산병원을 필두로 성심병원과 모든 종류의 병원, 모든 은행과 거의 모든 증권회사가 근접하여 있기 때문에 이는 잠실보다도 우수합니다.....잠실처럼 건물이 밀집되어 답답하지도 않습니다....잠실에는 없는 영어마을도 갖고 있습니다....

 

 

11. 영어마을이 풍납동 주민에게 혜택을 얼마나 주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1) 많음

 

 교육시설은 그 자체로써 필수적인 요소입니다...지금 실질적인 이용이 적거나 없다고 하여 그 가치와 혜택이 없다고 보아서는 절대 안됩니다....향후 풍납동의 발전이 어느 정도에 다다르면 그 이상의 발전을 가져다 줄 것이 바로 영어마을입니다.....

 

 

12. 영어마을의 용도를 바꿔 풍납동 주민에게 더욱 큰 혜택을 줄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 기타 -  용도를 바꿀 필요 없다 ; 본인 기재

 

위와 같은 이유입니다....영어마을은 반드시 존치시켜야 합니다.....다른 곳은 없어서 난리입니다.....

 

 

13. 풍납동에 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풍납동 주민에게 큰 혜택이 될 것이다

(2) 풍납동 주민에게 혜택이 없더라도 상징적인 가치는 있을 것이다

(3) 풍납동 주민에게는 실질적인 혜택이 없을 것이다

(4) 기타

 

사실 개인적으로는 (3)을 택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하기도 하지만, 보존과 개발을 병행하고 과거와 현대를 공존시키기 위해 (2)를 택합니다....

 

 

14. 미래마을, 경당연립부지 등과 같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상절차가 완료된 지역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1) 유적복원, 녹지조성 등 야외전시장으로 활용하는 사적공원화

(2) 박물관, 전시관 등 문화시설

(3) 주민편의시설(주차장, 체육공원 등)

(4) 기타 - 박물관 및 전시관등의 시설과 도서관 및 공원화된 시설이 함께 건립되었으면 합니다 ; 본인 기재

 

보존과 개발의 조화.....

 

 

15. 풍납토성내 단독주택 주거지역을 우선적으로 보상하는 방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 찬성

 

보낼 분은 보내고, 더 나은 풍납동을 만들어 갑시다.....기존에 계획이 잡힌 세장지공원화 사업은 계획대로 이루어져야 하고, 레미콘공장 등의 이전조치도 병행시켜야 합니다....

 

 

16. 문화재는 우리 문화적 전통에 대한 상징이며,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해 주고 있기 때문에 국가 이미지와 가치를 높여주는 중요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풍납리토성의 보존 및 활용(풍납동 발전 방안 포함 등)과 관련, 건의사항이 있으시면 자유롭게 기재하여 주십시오.

 

(1) 사람과 문화재,  과거와 현대의 공존을 위해 보존과 개발이 병행되어야 합니다

(2) 지하 및 저층에 유적 및 유물을 전시할 수 있도록 하고, 아울러 그 위층에는 주거 및 사무실 등이 위치할 수 있도록 하였으면 좋겠습니다.

(3) 백제풍의 건물을 되도록 고층으로 지어 만들어질 유적전시관 등에 재정적 보탬이 되었으면 합니다....

 

 

설문에 대한 문의사항이 있으시면 문화재청 사적과(042-481-4840), 송파구청 문화체육과(02-410-3411)로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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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도프님! 수고하셨습니다. 08.08.18 17:39

수고하셨습니다 설문네용이 복잡 합니다, 다비도프님 의견에 동의 합니다. 16번 건의사항: 문화재청은 주거지역 사적지정 해제하고 서울시는 2종 일반주거지역으로 건축규제 해제하고 재건축 재개발 허용해야 한다.보상하려면 아파트.연립 등기 평형 사천만원 주댁大地평당 사천만원 일시불 지급하라.제2의 고향 죽어도 떠나고 싶지않다.형식적인 설문조사는 누구을 위하는 것인가 왕궁터란 확증없이 10년동안 착한국민 괴롭히고 경당지구 한장소을 연못. 목탑, 우물,이라고 말바꾸기 언론프레이를 주도한 교수와 문화재위원은 처벌받아야 합니다.(보상비는 10년전 잠실과 천호동 매매가와 현 매매가를 기준한것임) 08.08.18 22:26
아닌 것을 기다고 거짓말한 사학자들 콩밥 먹도록 주민들이 나서서 영창보냅시다. 08.08.18 22:15

다비도프님께....박수를 보내드립니다..수고 하셨습니다....중요한 것은..이런 형태의 설문조사는..저 갠적으로는 뭐하러..하는지..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아니..명백히..왕성이라는..확증된...입증할 수 있는..자료도 전무하고..과학적..역사적..연구 분석시..10년동안..가치성 없는..유물만..내놓은 상태에서..설문조사를 한다는 것은..참으로..답답한 심정입니다..아버지의 DNA가..다른데..아들이라..우기면...내 핏줄이..되는 겁니까..뭐라도..맞아 떨어야지..설문을 하든 뭐를 하든..참여를 하지요...짜가를 두고..짜가를 끌어안고..설문조사를 한다면...국가적..사회적..무슨..의미가..있겠냐..말입니다. 08.08.18 21:00

다비도프님 수고 많으셨습니다.우리 주민들을 위한 모범 답안에 상세한 해설 까지 작성하여 주시고 어제 밤늦도록 구의원님을 모시고 함께 풍납동 제반 문제를 토의하였지만,님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열정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08.08.18 20:45

누구하나...자기 개인만의 이익을 위해..솔직한..사람이 없다. 이말입니다...지금의...시급한 해결 방안은..풍납동..문화재에 대한 거짓으로 둘러싼..모든 발굴 행위 및..결과물에 대해서..진실의 여부를 관계된..모든 이들이..나서서 ..왜곡 되어진..역사 문화재를...한치의..거짓 없이...밝혀 내어..문화재 오판을 져질른..관련된..이들에 대해서도..그에 상응한..법적..조치를 취해햐 하는 것입니다. 08.08.18 20:48

또한 설문항목 내용을 볼때면...풍납동을..한성백제왕성으로...확정짖고..설문을 하는 것 같아..기분이..안좋네요.. 설문내용이..저러면..안되지요...예를들어...현재..입증되지도..않는 상태에서..왕성으로..추정하고..하는 설문과... 주민들이..왕성으로..얼마나...인정하고..하는 설문은..전혀 다른 것입니다..그것은..중요한..데이타가..될 수 없다..이말입니다. 08.08.18 20:57
동상 말씀이 구구절절 내마음에 닿습니다. 풍납동에 국민혈세 낭비한 서울시와 문화재 위원들에 쇼가 진행되는 것임니다. 공직자에 전형적인 무책임.10년동안 발굴하면서 정답은 나왔습니다, 풍납동을 2000년도로 되돌려 주면됨니다, 08.08.18 21:32

설문조사 하나 마나 한 것 같습니다. 먼저 풍납리 토성이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인지 그것부터 규명을 해야 될 것으로 사료됩니다. 찬.반사학자들을 한자리에 모셔서 공영방송인 KBS를 통해 대 토론회를 개최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기위해선 풍납주민들의 의지가 담긴 진정서를 방송사에 제출하게 되면 가능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수년간 발굴을 하고 있지만 왕성을 입증할만한 물증들이 나오지 않고 있지않습니까. 그런데도 계속해서 부분적으로 이주시키고 발굴하겠다는 저사람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도 함께 규명해야 할 것 같습니다. 08.08.18 22:05
그렇습니다..이런 형태의..설문 보단..국가적 문화 유산으로서 가치성이..대단하다고..믿고 있는..사학자와..그렇지 않는 전문가 및.주민대표...관계자분들의...대토론도..매우..고무적인..발상입니다. 08.08.18 22:13

다비도프님 수고하셨습니다.어제 늦은 시간까지 수고하시고 오늘 해설까지 곁들여서 조사내용을 올려주신 다비도프님께 감사한 말씀 전합니다. 08.08.18 21:53

역시 설문내용을 보니 TF팀의 문화재위원들의 입김이 상당히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네요 끝까지 풍납동을 자기들의 철밥통으로 끌어안고 가겠다는 수작으로 보입니다. 발전님 말씀처럼 확실하지도 않은 것을 왕성이라는 전제를 깔아놓고 설문조사 내용을 작성했네요 아무튼 다비도프님 작성하신 설문답을 모범답안으로 모두 프린트해서 설문에 응했으면 합니다. 설문 대상도 무작위 추출방식이 아닌 전체 주민을 대상으로 해야겠지요 08.08.18 22:05
방장님의..현실적 판단에..공감합니다... 08.08.18 22:18

저도 다비도프님의 모범 답안을 모두 외워서 설문 조사에 응하겠슴다. 08.08.18 22:09

혹시 몰라 강조드리지만, 저는 풍납동에 토지 1평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구요.....이주하면 거리에 나앉을 어르신들이 많기에 걱정이 되어서 글을 올리는 것 뿐입니다....잘해봐야 공시지가보다 좀 높게 받고, 현시가 만큼 받지도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전세, 월세 빼주고 나면 어디로 가실지 솔직히 걱정됩니다....대토 역시 쉽지않고...동일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죠....특혜를 기대하기 어렵다면 어떤 길을 가야 할까요??.... (--);;~~ 08.08.18 22:54
다비도프님의..글을 접해본..분이시라면..님의..순수성을 가진..적극적..열의에 찬 글 내용에..지지와 함께..공감을 같이합니다..다비도프님도..위원장님을 뵈서 아시겠지만..그 어느 누구도..왜곡된..문화재로 인해..국가적으로..엄청난..시간과..경제적 낭비로..세월을 보내고..있는게..현실이고..안타까워 하는분들이..많습니다....풍납동엔..각자..다양한..현실적..원칙이 무너진.. 상황에서...대한민국 국민으로서..누려야할 기본적 권리가..같은 구에서도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이지요...거기에는..시멘트.분진에서 나오는 건강에..치명적인.. 시멘트공장..철수도..시급히..해결해야할...상황의..하나입니다.. 08.08.19 00:57
설문조사라는 것은..풍납동..현안에 대한..전반적인..것이 첨부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그것이..이루어져야만..설문다운..설문...더 나아가..복합적..풍납동..주민들이..안고 있는 ..피해들의 적극적이고..현실 타파적인.대안을 마련한다는..국가적 차원으로..개입하는..해결책이야말로..진보된. .대안책으로서..시급하면서..먼저라..생각합니다.. 08.08.19 01:03
다비도프님의..글에서..풍납동 변화에..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다비도프님..같은 분들이..많기에..분명..풍납동은..반드시..이루어 냅니다... 08.08.19 11:00

다비도프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08.08.18 23:04

문화재청 앞잡이가 된 송파구청은 풍납동의 현실을 알고 저런 유치한 내용을 가지고 설문조사를 한다니 한심 합니다.내용사안들이 풍납동을 문화재로 만들려는 그간 봐 왔어도 유물가치성도 없고 혈세만 낭비하는 저들인데 ..문화체육과장은 풍납동의 현실을 알고 나 하는지..ㅉㅉ 08.08.18 23:13

댓글로 모든 분께 감사인사 드리자니 너무 많은 것 같아 이 글로 대신합니다...감사합니다..... 아울러 설문지를 전해주신 노승재의원님과 조명탄님께 감사드립니다.... 08.08.18 23:10

서울 특별시가 뉴-타운으로 발전되고 개발 되고 있는데 무슨 김밥옆구리 터진 駒 소리인가 사적지정해제하여라 설문 10번 大 贊成 이로소이다 08.08.21 12:06

이주하시려는 분들도 결국 위와 같은 내용으로 설문 결과가 나와야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을 과연 인지하고 계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막연히 아무 생각없는 이주.....정말 걱정됩니다..... 08.08.22 15:25
당신이 이사보내고 싶은데, 이사가겠다는 사람과 이사 안가고 더 살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어느 쪽에 더 신경이 쓰이고, 달래주거나 설득시켜야 할까요? 이주대책위는 제발 고민 좀 하시면서 일을 진행시키시기를 바랍니다..... 08.08.25 15:48

오늘 우리 카페 -바로가기-문화재청에 들어가보니 위의 글이 그곳 문화재청-국민광장-국민의 소리난 3663번 글에 위원장님 이름으로 올려져 있네여. 08.08.24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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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은 사성이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다...... 낙서장

2008/07/26 15:58

복사 http://blog.naver.com/12345uuuuu/70033427695

지도를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7        >>>  1934년 작성된 지도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6        >>>  1937년 작성된 지도

 

 

1. 이 당시 가장 멀쩡했던 암사동 토성은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암사동 토성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본래부터 한강변 쪽의 토성벽이 존재하질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몽촌토성만 보아도 토성은 부분적으로 존재한 것 같고....

 

 

특히나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하지만 1934년 고지도를 살펴보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암사동토성이나 몽촌토성을 보아도 단순히 홍수로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1934년 작성된 고지도는 끝부분이 한강변으로 벌어져 있고, 그 후 작성된 1937년 고지도는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암사동 토성을 보고 풍납토성도 비슷한 모양으로 추측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학설 중에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다고 합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내용]

 

한성백제기 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약시굴을 담당한 발굴기관(건국대팀)은 “별다른 문화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다른 전문가들과 이 문화층에 대한 성격논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
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추가 1.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연 천호대교 좌측 한강변에 뻘흙과 같은 흙들이 두텁게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그 거무스레한 뻘흙을 파내는 공사가 예전(작년 말?)에 있었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무스레한 흙들을 파내고, 모래흙을 높게 쌓아 올렸었던 그 공사로 운동하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얼마전 연못에서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지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가 우물이라고 했던 것의 바닥 사진을 보셔도 거무스레한 뻘흙과 같은 흙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해자여서 뻘흙과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이 범람해서 그런 흙들이 발견되는 것이라 최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질좋은 흙들로 인해 풍납동이 도요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추가 2.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명칭에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추가 3. '배암드리'라는 말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1934년의 지도를 통해 풍납토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에 뭍으로 밀려들어 오는 뱀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이고, 또한 한강쪽의 토성벽이 없다는 즉, 둘러 쌓인 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성(蛇城)이라 한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며,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 모습을 갖고 있고, 이는 또한 군사상으로도 학익진의 모습으로 발현되어 있었다 할 것인바, 적의 침입시 양 옆과 뒷쪽에서 포위하여 섬멸시킬 수 있는 진법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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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경의 구조가 이상해.... 낙서장

2008/07/25 23:06

복사 http://blog.naver.com/12345uuuuu/70033410437

1. 한강이 있고 마을이 있으며 왕경이 위치하면서 산이 있는 것(배산임수형)과,,

2. 한강이 있고 왕경이 있으며 마을이 있고 산이 있는 모양새(한강조망형)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2에 의하면 왕성은 마을 쪽으로 문이 나야 하고, 안쪽으로 뜰이 있으면서 왕궁은  더욱 한강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밑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다면 수해가 날 위험성이 더 커지고, 군사적으로도 더욱 위험해 집니다....

 

또한, 적군을 바로 뒤로 두고 왕궁이 있는 형태에 마을쪽으로 경비를 서는 이상한 형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2의 형태...

***적군*************************                            

***한강*************************

***궁궐(벌말; 벌판이 있는 마을 포함)

***주작대로

***궁궐문

***마을(성안말; 성 안쪽 마을)

***산성*************************

 

1의 형태

***적군************

***한강************

***방어용토성(벌말)

***마을(성안말)

***궁궐문

***주작대로

***궁궐

***산성************

 

미래마을에서 도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2번 형태도 아닌 더 이상한 모습이 됩니다...

대궐문이 한강방향이라고 추단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토성안에 벌말이라 벌판이 있는 마을이 있어야 하는데 벌말이 있으면 왕경은 한없이 작아집니다....

오히려 벌말이 있다는 것은 방어용진지로써 군사훈련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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