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이 백제왕성이 아닌 것 같다 라고 풍납동 주민들과 다른 사학자분들의 의견은 분명하게 제시되었습니다.... 이제는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주장하시는 사학자님들의 차례입니다..... 확실한 연구와 신념 하에서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이를 발표하시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오히려 장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발표하셨으나 왕성이 아니라는 것이 훗날 밝혀진다면 그에 따른 책임을 지셔야 되는 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분명 풍납동주민들을 비롯한 국민들과 다른 사학자들이 신중을 기해달라 이미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묻지 않으나, 이제부터는 얘기가 다르다는 것이 풍납동주민 대다수의 의견입니다.... 아래 대법원 판례를 통하여,, 고의가 있으면 형사책임이 문제될 수 있고, 과실만 있더라도 액수산정 불가능한 민사책임이 지워질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을 혹시나 모르셨다면 아셔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적어 보았습니다.... [ 대학의 실험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실험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제3자를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1967.12.26. 67다591) ] '실험'을 '연구'로 '제3자'를 '풍납동주민들'로 바꿔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대학의 연구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연구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풍납동주민들을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
관심을 갖고 연구하신 기간이 최소한 10년 가까이 되기 때문에, 한번 더 고민하여 연구, 발표해 주십사하는 바램으로만 적어봅니다.... |
2008/07/25 22:41
낙서장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7 >>> 1934년 작성된 지도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6 >>> 1937년 작성된 지도
1. 이 당시 가장 멀쩡했던 암사동 토성은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암사동 토성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본래부터 한강변 쪽의 토성벽이 존재하질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몽촌토성만 보아도 토성은 부분적으로 존재한 것 같고....
특히나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신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하지만 1934년 고지도를 살펴보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알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학설 중에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다고 합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내용]
한성백제기 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약시굴을 담당한 발굴기관(건국대팀)은 “별다른 문화층이 없다”는 결론을 내려 다른 전문가들과 이 문화층에 대한 성격논쟁을 벌이고 있다.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약시굴을 맡은 최무장 건국대 교수는 “재건축부지 4곳 모두에서 별다른 문화유적층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최교수는 “발견된 뻘층은 풍납토성이 축조되기 이전에 홍수 등으로 한강 범람이 이루어짐에 따라 생긴 것”이라면서 해자와는 관련이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는 또 “풍납토성은 주거형태를 위한 것보다는 한강물 범람 방지를 위한 제방과도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제토기편이 발견된 곳은 교란층이므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게 최교수의 주장이기도 하다.
최교수는 “풍납토성은 왕성이 아니라는 게 개인적인 생각”이라면서 “만약 해자가 있었다면 현재 토성 동벽과 강동빌라 사이에 나 있는 10m 도로 정도의 폭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연 천호대교 좌측 한강변에 뻘흙과 같은 흙들이 두텁게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그 거무스레한 뻘흙을 파내는 공사가 예전(작년 말?)에 있었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무스레한 흙들을 파내고, 모래흙을 높게 쌓아 올렸었던 그 공사로 운동하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얼마전 연못에서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지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가 우물이라고 했던 것의 바닥 사진을 보셔도 거무스레한 뻘흙과 같은 흙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해자여서 뻘흙과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이 범람해서 그런 흙들이 발견되는 것이라 최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질좋은 흙들로 인해 풍납동이 도요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명칭에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배암드리'라는 말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1934년의 지도를 통해 풍납토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에 뭍으로 밀려들어 오는 뱀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이고, 따라서 한강쪽의 토성벽이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풍납토성이 왕성으로 잘못 알려진 내용을 바로 잡고, 이로 인해 침해받는 주민들의 기본권을 보호하기 위해....
1. 신문, 방송사 홈페이지 기사제보란에 글을 남기고, 기자에게 메일을 보내는 등 언론에 제보를 하고, 각 포털싸이트에 글을 올립니다......
2. 지역구 국회의원과 문광위 소속 국회의원께 알려드리고, 이를 질의 회신토록 요청합니다....
이때 인터넷 홈페이지를 이용하거나 면담을 합니다....
3. 청와대홈페이지 신문고와 국민고충처리위원회에 민원을 넣습니다....
4. 주민들의 서명을 받아 국회의원, 대선후보, 대통령께 편지도 써보고, 면담도 추진해 봅니다....
5. 마지막 내용은 적지 않겠습니다...(책임추궁, 감사 및 처벌관련 내용으로 개인적으로는 반대합니다만...)
관련 대법원판례 하나만 적어본다면...
[ 대학의 실험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실험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제3자를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1967.12.26. 67다591) ]
'실험'을 '연구'로 '제3자'를 '풍납동주민들'로 바꿔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 대학의 연구실에서 진리와 가치를 탐구하기 위하여 연구를 하고 그 결과를 발표하는 것이 학문의 자유에 속한다 할지라도, 그 연구결과가 잘못되었는데도 이를 사회에 알려서 선의의 풍납동주민들을 해친다면, 이는 학문의 범위를 넘어선 것으로 허용될 수 없다. ]
두서없이 적었습니다... 모든 일들이 다 순조롭게 잘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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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왕성이 아니다하여,, 한성백제의 위상이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서울시와 송파구청이 주최하는 한성백제 문화제가 타격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한성백제의 생활중심지는 한강유역으로써,, 서울시와 송파구가 주체가 된다는데 이의를 걸 이유도 없고,, 오히려 하남시까지 참여하여 더 크고 융성하게 치루어지면 좋겠습니다....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중요하다면 한성백제문화제를 풍납토성근처에서 주최해보았어야 하겠지요...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풍납토성이 왕성인지 여부와 한성백제문화제는 별개로 잘 진행되어 갈 것입니다....
풍납동문제가 잘 해결되고 나면 한성백제문화제에 자원봉사하러 나가야겠습니다...
[출처] 해결방법을 고려하면....|작성자 다비도프 |
2008/12/26 22:45 동양대 김운회교수님의 최근 글 중 발췌..... 1925년 을축년 대홍수로 학자들은 풍납토성의 서북쪽 성벽이 이 때 쓸려 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1918년 지형도를 통해 보아도 1925년 고지도와 같이 제방의 흔적은 있어도 서북쪽 성벽은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1925년 고지도를 보아도,, 풍납토성의 서북벽은 없었습니다...... 아울러 1918년 고지도와 동일한 형태를 지니고 있어, 1925년 홍수로 서북벽이 사라졌다는 말은 일본인 학자의 생각을 단순히 옮겨온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홍수에 유실되어 안보인다는 암사동 방향 서북벽은 한강에 멀리 있고,, a 암사동토성 / b 풍납토성 / c 몽촌토성 다시말해서 1925년에 존재하고 1934년에 한강물에 잠겨 사라져 버린 것 같았던 서남쪽 토성벽은,,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닌 것 같은 생각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암드리'에 관하여.....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풍납토성 자체 아니면 제방과 함께 뱀의 형상을 한 것을 일컫는 것이거나, 아니면 풍납토성 인근에 뱀이 많았던 것을 통하여 배암드리, 한자로는 사성이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현재에도 장마철 비가 내리는 때에는 커다란 지렁이가 상당히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으로 군사용토성과 제방의 역할을 하였고, 풍납동은 교역지이며, 도요지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을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지,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 모습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낙서장
개로왕은 장수왕이 보낸 첩자인 도림(道琳)이라는 승려의 꼬임에 빠져 바둑으로 세월을 탕진하다가, 도림의 강력한 권유로 한강(아리수)의 돌을 가져다가 선왕의 무덤을 새로이 만들고,
성곽을 새로이 수리하고 백성들의 가옥이 떠내려가지 않도록 현재의 금단산[숭산(崇山)]에서 풍납리[사성(蛇城)]에 이르는 긴 제방을 만들어 국가재정을 고갈시키고 민생은 파탄상태에 빠지게 됩니다(이 제방이 오늘날의 풍납토성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1917년 다이쇼(大正) 6년에 작성된 풍납토성 일대지도를 보면 서북쪽 성벽이 나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잔존하는 잠실방향의 서남벽은 오히려 한강에 무척 가깝게 위치해 있었습니다.......
서벽은 본래 없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홍수로 인한 한강물 범람으로 인해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한강에 보다 근접한 잠실방향의 서벽이 먼저 유실되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존재한다고 보고 그려진 고지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물길보다 높게 있는 자연제방(둔덕)을 착각하였거나,,
타원형으로 둘러싸인 암사동토성을 보고서 추측하였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1934년 고지도를 보아도,,
b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보이지 않습니다.....
분명히 풍납토성이 왕성이라고 말한 이들은,,
풍납토성의 서쪽 한강변 토성벽이 을축년 대홍수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지도를 확대해 본 결과....
멸실되었다는 한강변 토성벽과 이어져 있었을 토성벽이 암사동쪽과 잠실쪽으로 남아있는 것이 육안으로 확인될 것입니다....
즉, 대홍수로 완전히 멸실되었다는 토성벽이 벌어진채로 왜 남겨져 있을까요??
그것만 남기고 무려 1.5킬로미터에 달하는 토성벽은 멸실되어 없어지고,,
바깥쪽은 남기고 안쪽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인가요??
1937년 고지도를 보면 1934년에 한강물에 잠긴 서남쪽 토성벽이 그대로 잔존하고 있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1937년 한강물의 수위가 낮아지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입니다.....
즉, 풍납토성의 서벽은 홍수나 한강물로 유실되는 것이 아니라, 잠겼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즉 한강물이 불어나면 잠겨버릴 그 위치이기 때문에 서벽이 없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일제하의 필지구분을 통해 서북쪽 성벽이 남겨져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데,
1934년 지도를 통해 한강물에 잠긴 지역은 필지가 포락(물에 잠겨 개인소유권이 상실됨)되었으므로,
토성벽에 의해 필지가 구분된 것이 아니라,
그 부근 토지는 한강과 홍수에 의해 포락 멸실(소유권상실)이 되었다가 다시 멸실 회복(소유권회복) 되는 식으로 필지가 구분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서북쪽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토성벽은 물의 흐름에 맞서지 않고 평행하게 있으며,
뻘흙을 쪄서 견고하고 수백만톤의 흙이 들어갔다는 토성벽은 1~2미터도 아닌 무려 1.5킬로미터이상을 뒤에서 받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과연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을까요? 본래부터 없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학설 중에 왕성이 아니라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여러 고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습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지리적으로 보면 지금의 잠실지역은 과거에 풍납동까지 이르는 '잠실도'라는 섬이었습니다....
한강이라는 큰 폭의 강물이 잠실도를 만나 갑자기 강폭이 줄어들게 되니 그 물이 풍납동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물을 막아내기 위해 풍납토성의 일부는 평행하게 일부는 안쪽으로 들어오게 토성이 쌓여지고,
잠실방향 풍납토성의 일부 잔존하는 서남벽은 흘러들어오는 강물을 일차적으로 막아내기 위해 존재한 것 같습니다.....
만약에 그 물로 서벽이 유실되었다면 그 곳의 토성벽이 먼저 없어졌야 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모로 보나 풍납토성의 서벽은 본래부터 없었을 것같은 생각입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풍납토성의 서벽이 무너져 풍납동 위에 쌓인 것 아니냐는 말을 했다는데,
그렇다면 풍납토성 바깥쪽 벌말의 높이와 안쪽 성안말의 높이가 차이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토성만 빼면 안팎의 높이가 똑 같으니 토성벽이 무너져 풍납동에 쌓인 것이라는 말은 좀처럼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풍납토성 이외에 다른 곳의 유적지도 죄다 현재의 땅 밑에 존재하는데,
그럼 전국토가 토성벽이 무너져 유적지가 땅밑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없듯이, 말이 안되는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이러할 뿐이고, 나머지는 사학자님들과 고고학자님들께서 밝혀주셔야 할 몫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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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 성벽·해자 인공여부 논란 “연구소 경솔한 발굴” 비난 쏟아져
서울시는 9일 “토성외곽 재건축부지 4곳에 대해 건국대에 약시굴을 의뢰한 결과 토성 서벽 외곽에 있는 삼표산업 부지, 즉 풍납2동 309의 6번지 4~5m 깊이의 땅속에서 두께 2m 가량의 거무스레한 개흙층(뻘층)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서울시는 또 토성의 동벽 외곽에 있는 동산연립 재건축부지(409의 3번지)에 대한 2차 시굴 결과에서도 6종류의 백제토기편이 발굴됐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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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에 대하여 진정한 연구와 고민은 없고, 언론플레이에만 급급한 것 같습니다.... 기존발굴유물들과 제작연대가 상충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위; 풍납토성출토청자, 아래; 용원리출토청자 중국청자
마한왕의 허락을 받았던 백제초기의 수도라면 삼성동,몽촌,풍납동,암사동,귀산토성의 보호와 중심에 놓인 이성산성에 자꾸만 눈길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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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노프님의 글은 현재 우리 주민들 모두가 원하는 바를 그대로 나타낸것으로 생각 합니다.공지로 올립니다.도서관 유치는 우리 회원님 다수의 의견으로 어제 구의원님 면담시에도 저 역시 가장 강조한 부분 입니다.송파구에서 가장 변변치 못한것이 도서관 시설 아닌가? 생각 합니다.가장 중요시 되야 할 부문이 가장 뒤쳐저 있는 듯 합니다.요즘 다른 지역의 도서관 시설은 그야 말로 첨단식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우리 풍납동에 송파구에서 가장 큰 규모의 첨단식 도서관이 들어섰으면 하는 바람은 우리 주민들 모두의 절실한 소망이라고 생각 합니다. 08.09.02 22:53
아겠습니다..즉시..무조건 의무라고 생각하고 실천합니다...무슨 방법이든지..다..동원하여..풍납동 발전을 이루어야 겠습니다. 어제 비도 많이 내렸는데..활동 하시느라..너무나..고생이 많으셨습니다...다시한번..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08.09.02 15:47
우리끼리 백번 말이나 모임 보다,조명탄님 말씀 처럼 자신 명의로 송파구청이나 문화재청에 한번의 민원 제기가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요?문대위가 모임을 수없이 가졌어도,젊쟎고 핵심을 찌르는 민원 한마디를 그들에게 전하는것이 훨 효과가 더 좋을수가 있다고 생각 해요. 몇줄 몇마디 인터넷 민원조차 올리는것 조차 힘든다면.....모임 조차도 힘들지 않을까요? 모여도 몇명 안 모일것 같고....몇명 모여 집회를 해야 인정도 안 할꺼고..... 08.09.02 16:36
소닉님 말에 공감하는 부분이 있습니다.저도 모임에 그토록 적극적으로 참여는 못했습니다. 위원장님 및 다른 회원들처럼 인터넷 민원도 제대로 올린적이 없습니다. 이런 활동을 소극적으로 했다하여 소극적일 필요가 없다 생각합니다.중요한건 어떤 방법이 옳다.그르다기 보다는 민원을 올리던 모임을 하던 토론회든 방송 진정건이던 야외.집회 활동이던 풍납 발전에 도움이 되는 모든 방법을 우리 주민들이 함께 강구하여 나가는 것이 주민의 화합으로 진정한 발전을 이루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어떤 방법이던 장단점이 있을 겁니다. 이건 아니기 때문에 이렇게 하자 보다는 모든 것을 긍정적인 관점에서 할 수있는데 까지 해보는 것이 08.09.02 17:07
어떨까 생각 합니다..중요한건..회원들께서..모임이나..어떤 활동에..부담가지지 말고..자기 스스로의..판단으로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아마..풍납동의 싸움은..쉽지 않을 것입니다. 점점더..중요한..많은 회원님들이..나서 주시는 것 같습니다...희망이 보입니다. 소닉님 말씀처럼..민원도..많은 회원님들이..올려야 겠습니다..저도..노력을 하겠습니다. ...소닉님의..활동을 쭉..지켜보았습니다..참 부지런 하시더라구요.. 노고에..감사드립니다... 08.09.02 18:15
소닉님 의견이나 발전님의견 다 옳은의견입니다. 민원도올려보고 집회도 한번 동민적인 집회를 추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하여튼 발전님 주장대로 문제 해결을위해 할 것 다 해봅시다.
![]() 우리 카페 메뉴 -바로가기(글쓰기 가능)에 보시면 익명으로도 글을 올릴수도 있습니다.우리끼리의 글도 외부에서 알아야 무슨 의미가 있져.쓰기 어려운 분은 복사라도 하셔서 올립시다. 08.09.02 16:15
소닉님이나 발전님 모두 우리 주민들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있으니,여러 회원님들과 힘을 한곳으로 모아 그 열정으로 우리의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08.09.02 20:32
위원장님 글이..정답입니다..어떠한 의견이던...그것은..단하나..우리동네..우리풍납동을 위한..순수한고..헌신적이며..봉사정신에서 나오는 훌륭하신 의견입니다. 위원장님께서는..들어나지 않는 곳에서...많은 실천들을 하고 있습니다. 위원장님을 믿고 함께 함에..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08.09.03 09:17
위원장님,다비도프님,발전남 ,소닉님 정말 수고가 많으십니다. 당신들이 있기에 풍납동이 살 맛이 난답니다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적극 참여하겠습니다. 08.09.03 13:44
오프라인에서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08.09.03 14:28
dhminky님도..이쪽 저쪽서..참 부지런하십니다..뵙고 싶습니다. 08.09.03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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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개 :addDaumUcc()", "javascript <INPUT id="f_cdepth" type="hidden" value="0000100000" name="f_cdepth"> <INPUT id="l_cdepth" type="hidden" value="0000500006" name="l_cdepth"> <INPUT id="n_cdepth" type="hidden" value="0000500007" name="n_cdepth">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어떻게 이런 답변을 남겼는지 모르겠습니다....>>이 지도를 포함한 당시의 지형도들을 볼 때, 풍납토성은 1925년을 전후하여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벽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의 성벽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양상은 현재 남아있는 풍납토성의 성벽 잔존 양상과도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17년에도 이미 풍납토성의 서벽은 없다고 하는데 완전히 다른 것 아닙니까?? 08.09.13 22:32
:viewReply(1); return false;" href="http://cafe231.daum.net/_c21_/bbs_read?grpid=14jS9&mgrpid=&fldid=HSh9&page=1&prev_page=0&firstbbsdepth=000Iqzzzzzzzzzzzzzzzzzzzzzzzzz&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JG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1194#">답글 ![]() ![]() 풍납토성은 타원형의 왕성형태가 아닌 끝이 벌어진 사성인 것입니다...... 08.09.13 22:08
:viewReply(2); return false;" href="http://cafe231.daum.net/_c21_/bbs_read?grpid=14jS9&mgrpid=&fldid=HSh9&page=1&prev_page=0&firstbbsdepth=000Iqzzzzzzzzzzzzzzzzzzzzzzzzz&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JG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1194#">답글 ![]() ![]() 대단하십니다.그리고 감사합니다.사학자들도 놀라겠군요. 08.09.14 11:55
이런 사실을 여기에 말해 무슨 소용이 있나요. 여태 왕국이라고 주장한 학자들을 대상으로 손해배상 청구와 헌법 소원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 합니다. ! !!!!!!!!!!!!!!!!!!!!!!!!!!!!!!!!!!!!!! 08.09.14 23:06
다비도프님 위 기사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알려주세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반박자료로 활용가치가 있어보입니다.
![]() 방장님....이제야 보았습니다....위 내용은 기사는 아니고, 사학자가 쓴 글입니다.....
![]() :viewModify(6); return false;" href="http://cafe231.daum.net/_c21_/bbs_read?grpid=14jS9&mgrpid=&fldid=HSh9&page=1&prev_page=0&firstbbsdepth=000Iqzzzzzzzzzzzzzzzzzzzzzzzzz&lastbbsdepth=zzzzzzzzzzzzzzzzzzzzzzzzzzzzzz&contentval=000JG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1194#">수정 ![]() |
지도를 보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7 >>> 1934년 작성된 지도
http://cafe.naver.com/yeswon.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16 >>> 1937년 작성된 지도
1. 이 당시 가장 멀쩡했던 암사동 토성은 지금 어찌되었을까요?
암사동 토성과는 달리, 풍납토성은 본래부터 한강변 쪽의 토성벽이 존재하질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몽촌토성만 보아도 토성은 부분적으로 존재한 것 같고....
특히나 토성벽이 있었는데 멸실되었다는 주장을 하시려면 이런 것을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한강물의 흐름....
토성벽이 강물의 흐름과 직각인 경우와 평행인 경우를 비교해 보아야 합니다....
만약에 홍수로 인하여 멸실될 정도라면,,
한강에 평행하게 놓여진 토성벽보다는 직각으로 놓여진 토성벽의 멸실이 더 심해야 하겠지요....
적어도 풍납토성의 토성벽이 무너질 정도이면, 암사동 토성 역시 어느 정도는 멸실되었어야 겠죠??
하지만 1934년 고지도를 살펴보면 그러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암사동토성이나 몽촌토성을 보아도 단순히 홍수로 무너졌을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1934년 작성된 고지도는 끝부분이 한강변으로 벌어져 있고, 그 후 작성된 1937년 고지도는 안쪽으로 들어와 있는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암사동 토성을 보고 풍납토성도 비슷한 모양으로 추측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판축기법으로 흙을 쪄서 지어, 일명 콘크리트기법으로 정말 견고하다던 풍납토성,,
한강물에 평행하게 지어졌다면 그 토성벽이 왜 전혀 안보일까요?
학설 중에 방제용 토성(제방)이라는 의견이 왜 나왔는지도 이해가 될 듯 합니다.....
지도를 통해 한강변 쪽으로는 토성벽이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렇다면 더욱 왕궁으로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왕궁은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를 위해 왕궁 전체를 토성으로 둘러 쌓았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2.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였었습니다....
어느 사서를 보더라도 한성백제기에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지만, 백제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은 없다고 합니다....
1934년 지도를 보면 풍납토성은 바로 한강에 접하고 있어 바라보기만 해도 그 위태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민가는 왕궁보다 한강에 인접하였을 것인 바, 지도를 통해 볼 때 민가는 한강에 잠수될 자리에 있습니다...
만약 민가가 왕궁의 뒤에 위치한다 가정하면, 당연히 왕궁이 먼저 피해를 입었어야 하겠죠.....
이정도로 한강에 가까웠다면, 설령 한강변에 토성벽이 존재했었다고 가정한다 해도 왕궁이 홍수의 피해를 받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관련내용]
한성백제기 왕성이 틀림없는 풍납토성의 외곽지역 재건축부지에서 해자(垓字·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파놓은 도랑이나 연못)로 추정되는 두꺼운 뻘층과 백제토기편들이 확인됐다.
>>> 추가 1. 곰곰히 생각해보니 과연 천호대교 좌측 한강변에 뻘흙과 같은 흙들이 두텁게 있었습니다....
포크레인으로 그 거무스레한 뻘흙을 파내는 공사가 예전(작년 말?)에 있었던 것을 많은 분들이 기억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거무스레한 흙들을 파내고, 모래흙을 높게 쌓아 올렸었던 그 공사로 운동하다가 직접 눈으로 확인했었습니다......
얼마전 연못에서 동아시아 최대의 목탑지로 대대적으로 방송되었다가 우물이라고 했던 것의 바닥 사진을 보셔도 거무스레한 뻘흙과 같은 흙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해자여서 뻘흙과 같은 것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한강이 범람해서 그런 흙들이 발견되는 것이라 최교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고, 그 질좋은 흙들로 인해 풍납동이 도요지가 되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추가 2. 풍납토성이 물을 막아 보호하려는 곳이 바로 '성안말(성 안쪽 마을; 성내동 )'입니다....
풍납토성 안에 있는 마을은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입니다.....
이 명칭에서도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 있는 바, 예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다른 왕경들에 비하여 1/10 정도로 작은 풍납토성이 왕성이고, 그만큼 대단했다면,,
단순하게 토성 내부에 벌판이 있었을리가 만무하고(왕경이 한없이 더 작아지므로), 그 명칭도 '벌말'이라고 하기 보다는 더 중요한 그곳이 오히려 '성안말'이 되어야 할 것이며, '성안말'은 오히려 '성밖말'이 되어야 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풍납토성 안쪽 '벌말'이 '성안말'이 아닌 것으로 부터도 풍납토성의 한강쪽 토성벽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둘러 쌓은 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름 장마엔 제방의 역할을 하고, 다른 때에는 벌말을 통해서 벌판에 군사를 훈련시키기 좋은 곳이라는 것을 그 명칭만 봐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추가 3. '배암드리'라는 말도 괜히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을에 바람드리성, 즉 풍납리토성이 있으므로 '바람드리' 또는 한자음으로 '풍납리(風納里)'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일설에는 이 토성을 사성(蛇城)이라고도 하는데,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또 '드리'는 납(納)의 뜻이 아니라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며 그 발음은 '들'이외에 '들' '드라' '드레' '다라' '달래' '드르' 등 방음이 많다. 따라서 '바람드리'는 사성(蛇城)을 말하는 '배암드르' 혹은 '배암드리'의 와전이며, 백제시대에는 한자로 사성(蛇城)이라 썼지만 구두(口頭)로 방음을 사용한 것이 '바람드리'로 되어 일제 시대에 '풍납'으로 표기되어진 것이다.
한강공원에서 운동하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풍납동 보다도 오히려 잠실의 바람이 더욱 거세고, 암사동이 더 차갑습니다.....
모두 한강에서 바람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즉, 바람이 들어와서 풍납이라는 말은 한강변 동네에 있어서 전혀 특징적인 것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1934년의 지도를 통해 풍납토성을 보시기 바랍니다....
강물에 뭍으로 밀려들어 오는 뱀의 모습이 형상화 된 것으로 보이고, 또한 한강쪽의 토성벽이 없다는 즉, 둘러 쌓인 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성(蛇城)이라 한 것입니다.....
>>> 결론적으로 풍납토성은 암사동토성, 몽촌토성과 삼성동토성으로 이어지는 방어라인으로 볼 수 있고, 이 토성들은 아울러 한강물에 의한 침수 피해를 방지하는 제방의 역할도 가졌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볼 때, 한성백제의 왕궁은 이 거대한 라인을 통해 방어하고자 하는 곳에 위치했을 것이며, 풍납토성 내의 조그마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풍납동은 한강을 이용한 교역지이며 도요지로써 무수한 토기류가 발견되는데. 이 교역지를 위해 방어라인 중 하나인 풍납토성은 안쪽으로 들어간 모양의 잘라진 육각형 모습을 갖고 있고, 이는 또한 군사상으로도 학익진의 모습으로 발현되어 있었다 할 것인바, 적의 침입시 양 옆과 뒷쪽에서 포위하여 섬멸시킬 수 있는 진법이 투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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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강이 있고 마을이 있으며 왕경이 위치하면서 산이 있는 것(배산임수형)과,, 2. 한강이 있고 왕경이 있으며 마을이 있고 산이 있는 모양새(한강조망형)를 비교해보시기 바랍니다... 2에 의하면 왕성은 마을 쪽으로 문이 나야 하고, 안쪽으로 뜰이 있으면서 왕궁은 더욱 한강에 가까워지게 됩니다.... 밑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렇다면 수해가 날 위험성이 더 커지고, 군사적으로도 더욱 위험해 집니다....
또한, 적군을 바로 뒤로 두고 왕궁이 있는 형태에 마을쪽으로 경비를 서는 이상한 형태가 되는 것 같습니다...
2의 형태... ***적군************************* ***한강************************* ***궁궐(벌말; 벌판이 있는 마을 포함) ***주작대로 ***궁궐문 ***마을(성안말; 성 안쪽 마을) ***산성*************************
1의 형태 ***적군************ ***한강************ ***방어용토성(벌말) ***마을(성안말) ***궁궐문 ***주작대로 ***궁궐 ***산성************
미래마을에서 도로가 발견되었다는 것은 오히려 2번 형태도 아닌 더 이상한 모습이 됩니다... 대궐문이 한강방향이라고 추단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 토성안에 벌말이라 벌판이 있는 마을이 있어야 하는데 벌말이 있으면 왕경은 한없이 작아집니다.... 오히려 벌말이 있다는 것은 방어용진지로써 군사훈련에 적합할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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