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안중읍 용성리

吾心竹--오심죽-- 2009. 8. 24. 15:48

안중읍 용성리
굽이굽이 산길과 옛 농촌 모습 간직 산세 수려하고 과거엔 군사요충지
[285호] 2005년 08월 10일 (수) 00:00:00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고려 건국 후
‘용성현’이라는
지명 처음 사용해
지금까지 이어져…

 

단일마을로는
평택지역에서
가장 많은
산성보유

 

   
▲ 용성리 강길마을

■ 용성리가 소도(蘇塗)였다고?
용성리는 고려시대 용성현(龍城縣)의 중심 마을이다. 용성현은 지금의 용성리, 후사리, 덕우리, 옥길리 일대에 있었다. 이곳은 고구려 때 상홀현(上忽縣)으로 불렸다가 통일 후 신라 경덕왕 때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차성현(車城縣) 또는 거성현(巨城縣)으로 바뀌어 당은군(현 화성군 남양지역)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그러다가 고려 건국 후 태조 23년(940)에 용성현(龍城縣)이라는 지명을 처음 사용하였고, 현종 9년(1018)에는 수주(수원)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용성현이 고을로서 지위를 상실한 것은 조선이 건국하면서다. 조선은 건국 후 새로운 국가체제에 맞게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소규모 행정단위나 향, 소, 부곡, 장, 처와 같은 특수한 행정구역을 통합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용성현도 폐현(廢縣)되어 수원부에 편입되게 된 것이다.

문헌에는 용성현의 지명으로 상홀, 차성, 용성과 함께 ‘수릿골’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예컨대 신증동국여지승람 수원부 조에 “용성현(龍城縣)은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성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수릿골)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차성(車城)이라 고치어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 부(府)에 예속되었다.”라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수릿골’은 고구려 지명인 ‘차홀(車忽)’의 순 우리말로 보여 진다.

‘수릿골’에서 ‘수릿’은 ‘동막’이나 ‘황새울’, ‘안골’만큼이나 흔한 지명으로, 24절기에도 나오는 전통명절 가운데 하나다. 예컨대 삼한시대에 ‘단오’의 옛말로 쓰인 ‘수릿날’이 그것이다.

사전에는 이 날이 중국 초나라의 충신 굴원이 멱라수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은 날로 ‘해가 정수리에 오는 날’이라고 해서 ‘단양(端陽)’ 또는 ‘천중(天中)’이라고도 하고, 수리치로 떡을 해 먹에서 ‘수릿날’로 부른다고 쓰여 있다.

우리민족은 이 날이 되면 모내기를 끝내고 앵두편과 증편을 만들어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祈豊)제를 올리고, 창포로 머리감고 흥겹게 놀았다. 그렇다면 수릿날은 ‘수리치로 떡을 하여 먹고 기풍제를 올리며 흥겹게 놀았던 날’로 정의할 수 있는데, 삼한시대 이와 같은 일은 정치적 지배자인 군장(君長) 또는 제사장인 ‘천군(天君)’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다.

그렇다면 용성리는 삼한시대 성읍(城邑)국가로 군장(君長)이 거주하는 정치적 중심지거나 천군이 거주하는 ‘소도(蘇塗)’로 추정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추정일 뿐이지만.
 

   
▲ 설창마을 홰나무
■ 산성(山城)이 지켜주는 마을
용성리는 청룡(1리), 강길(2리), 설창(3리) 마을로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1987년 안중읍(면)이 분리되기 전만해도 청북면에 속하였다. 본래 청북면이라는 지명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청룡면의 ‘청(靑)’과 수북면의 ‘북(北)’에서 한 글자씩 취한 것이어서 안중보다는 청북과 인연이 깊은 셈이다. 청룡마을은 옛 수원군 청룡면의 중심지다.

마을 사람들은 ‘청룡티’라고 불렀는데, ‘티’는 ‘터’에서 온 말로 ‘동네’, ‘마을’을 의미한다. 2리 강길은 오뚜기라면 바로 아랫동네다. 이 마을은 39번 국도가 지가나면서 갈라놓아 3개처럼 보인다. 3리 설창은 비파산 아랫동네이다. 설창(雪倉)이나 ‘사창(司倉)’, ‘해창(海倉)’처럼 지명에 ‘창(倉)’이라는 글자가 들어간 곳은 근대 이전 조창이 설치되었던 마을이다.

마을 주민들도 옛부터 조창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했는데, 설치시기는 옛 용성현 시절로 추정해야 할 것이다.

용성리에는 산성(山城)이 많다. 아마 단일 마을로서는 평택지방에서 가장 많은 산성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다. 우선 서쪽에는 병풍처럼 설창마을을 감싸고 있는 자미산성과 비파산성, 무성산성이 있다. 또한 설창마을 입구에는 용성리성이 있으며, 강길마을에도 강길마을성이 있다.

이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자미산성과 비파산성이다. 비파산성은 1600여 미터나 되는 포곡식 산성이다. 이와 같은 산성은 산봉우리 정상부를 빙 둘러 쌓은 퇴뫼식에 비해 월등히 큰 규모다.

경기도박물관 발굴조사에서 이 산성은 고려시대 용성현의 읍치(邑治)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설창마을 주민 주석태(71)씨에 따르면 비파산성은 병자호란 때 임경업 장군이 쌓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지금도 산 정상부 큰 바위에는 임경업 장군이 손을 짚은 자국과 오줌을 눈 자국이 움푹 패어 있다고 하는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나도 모르겠다.

자미산성은 평택지방에서는 드물게 돌로 쌓은 석성(石城)이다. 우리나라의 산성은 목책(木柵)에서 토성(土城)으로 그리고 석성(石城)으로 발전과정을 거쳤는데, 석성(石城)을 쌓으려면 노동력도 많이 들지만 주변에서 쉽게 돌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평택 서부지역은 지질이 충적토여서 돌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그렇다면 축성(築城)에 사용된 돌은 내륙을 통하여 몇 십리를 운반했거나, 배를 이용하여 옥길리 방면으로 실어 날랐어야 했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축성되다보니 산성은 주변 백성들에게 하나의 불가사의였다. 민중들에게 불가사의한 일은 전설로 남는다.

민중들은 자미산성이 백제시대 왕릉을 지키기 위해서 축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성곽 안에는 기와집도 있었고 항상 말 탄 병사들이 성곽을 지켰다고 한다. 하지만 민중들에게 경외감을 주었던 산성(山城)도 시대의 변화는 감당하지 못했다. 돌이 귀했던 주민들이 남의 눈을 피해 슬쩍슬쩍 빼다가 방구들이나 토방을 놓으면서 거의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 새로 건축한 약산사 대웅전
■ 왜구의 침략이 잦았던 용성리
용성리에 성곽이 많은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바닷가에 위치한 마을이다 보니 왜구의 침입이 잦았던 것이다. 왜구는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일본 해적세력이다.

이들은 지방 세력으로 전락한 호족, 무사계급, 밀무역 집단 등으로 이뤄졌는데, 일본 무로마치시대에 지방 통제력이 약해지자 적게는 10여 척에서 많게는 백여 척에 달하는 배를 타고 우리나라, 중국 등 주변국의 연안지역을 노략질하였다.

이들의 노략질은 곡물에 집중되었다. 그래서 세곡을 운송하는 조운로나 조창이 있는 지역에 자주 출몰하였는데, 고려시대 전국 13대 조창이 있었던경양현(팽성읍)이나 설창이 있었던 용성현이 자주 습격을 당했던 것도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면 용성현 지역의 왜구 출몰 사례를 알아보자. 먼저 문헌상으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사례는 1358년(공민왕 7)의 일이다. 왜구는 당진의 면주(천)을 노략질 한 뒤 여세를 몰아 용성현을 습격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즉시 군대를 파병하여 적선 2척을 노획하였다. 하지만 2년이 지난 1360년(공민왕 9)이 되면 상황이 달라졌다.

평택, 아주(산), 신평(당진)을 약탈한 왜구는 용성현 등 평택 서부지역 10개 군현을 습격하여 불태웠다. 사정이 이렇게 되면서 개경까지 위협받게 된 조정은 유탁을 경기도통사,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으로 판군기감사 겸 서강병마사로 삼아 대비케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371년(공민왕 21) 용성현에 침입한 왜구는 방어사로 나선 양광도순문사 조천보를 격퇴하고 전사시키고 다시 한 번 고을을 약탈하였다. 왜구는 그 이후에도 우왕, 공양왕 때를 거치면서 용성현을 비롯하여 심지어 깊숙이 있는 송장부곡(송탄), 진위현, 영신현(동삭동 일대)까지 침략하여 약탈과 방화를 일삼았다.

   
▲ 설창마을 전경
■ 고난의 세월을 신령님께 빌고
용성리는 예부터 농업이 발달한 마을이다. 작물은 주로 벼를 심었고 보리, 콩, 채소 등을 조금 심었다. 하지만 토지 대부분이 건답(메마른 논)이어서 생산력은 높지 않았다. 심하게 가물 때는 평소에도 물이 잘 고이는 수렁논조차 메말라버렸다.

그렇다고 농사를 작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비를 기다리다 정 안 오면 호미모를 심었고, 그마져 안 되면 메밀을 심었다. 그래서 마을에서 가장 흔한 것은 메밀이었다.

요즘에야 메밀하면 냉면이나 막국수, 메밀묵이 생각나고 혹 강원도 정선이라도 갈라치면 손으로 누르는 메밀국수가 간절해지겠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메밀은 먹기에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주석태(71)씨에 의하면 설창마을 사람들은 메밀은 껍질째 맷돌에 갈아서 수재비를 만들어 먹거나 죽을 쑤어 들이켰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색깔이 거무죽죽해서 시각적으로 좋지 않았을 뿐 아니라, 꺼끌꺼끌한 느낌 때문에 먹는 일이 고역이었다. 그래서 ‘그럼 안 먹으면 되잖아요!’라고 우답을 했더니, 대뜸 ‘그럼 나무껍질 먹을 거여!’ 라고 반문해서 나를 무안하게 하였다.  

설창마을에는 아직도 비파산 아래에 당집이 남아 있다. 아니 단순히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당제를 지낸다. 다른 마을은 다 없어졌는데 참 오랫동안 유지되는 셈이다. 내가 주민들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신령님의 신비한 능력을 첫 손에 꼽았다.

신령함의 덕을 봐서 일제 말에도 징용, 징병에 끌려갔다가 변을 당한 사람이 없었고, 한국전쟁 때에도 좌우익의 갈등으로 죽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고 하였다. 하느님이 되었든, 부처님이 되었든 아니면 신령한 신령님이 되었든 민중들의 고단한 사람을 위로해주고 지켜주었다는 것에 흡족함을 느끼며 마을을 나왔다.

   
▲ 덕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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