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1>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는 어떤 국가인가?
▲양성면의 한천. 고대의 왕도는 강과 하천으로 연결되어 있고 대부분 \'한\'이라는 하천이름 주변에 왕도가 있었다. © 안성신문
*글쓴이 주 : 지난해 안성시 양성면 한천 일대에서 발굴된 ‘마한 왕도(王都)’에 대해 총 4회에 걸쳐 그 역사적 의미와 가치를 짚어보고자 한다. <1>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는 어떤 국가인가 <2> 역사기록에서 나타나는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3> 마한 왕도는 어떤 구조이며 고대 왕도와의 비교에서 유사점은 무엇인가 <4> 양성면 성하리를 왜 마한의 왕도라고 하는 가.
백제 초기 왕도 연구에서 마한 왕도의 실체를 가늠하게 되었다. 마한 왕이 백제 온조왕을 꾸짓기를 “일백 리 지역에 땅을 주었는데…”라는 기록과 같은 거리의 안성에서 마한의 왕도가 발견이 되었다.
우리나라 국명이 대한이라는 명칭도 삼한을 근거로 하였고 특히 마한은 한반도 전체를 다스렸다는 거대한 역사의 원류이자 고조선 역사와 통하는 오래된 왕도이다. 마한의 왕도를 잊어버렸다는 것은 우리 민족사의 큰 맥의 줄기를 잊어버린 것과 같다.
1992년에 백제초기 2곳의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를 하는 동안 많은 의문이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백제와 함께 존재하였던 마한의 왕도는 어느 곳일까, 지금까지 역사의 수수께끼가 되어 왔었다.
백제 신라 모두 초기에는 마한의 지배를 받았던 78개 소국의 맹주국이었다. 마한의 통제를 받아온 백제초기였고 중국의 사서에 마한에 대한 기록이 우리 사서보다 많을 만큼 대외적으로도 잘 알려진 국가였다.
지금까지 학설의 주류는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는 것이 왜정시대부터 정설처럼 되어 있고, 또한 삼국초기는 부족국가라 하여 원삼국 시대라는 학설이 고착되어 있다. 이러한 학설에서 마한은 보잘 것 없는 국가라는 개념에 유적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이 앞섰던 것이다.
그러나 백제초기의 왕도를 찾아내고 보니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정확성이 있다는 것을 우선 알게 되었고 또한 마한이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도 점차 가늠하게 되었다.
삼한의 역사 연구가 앞서 있는 북한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마한, 진한, 변한의 전체를 다스린 국가가 진국(辰國)이며 삼한은 행정 명칭으로 보면서 마한이 진국의 주체가 되어 삼한 전체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 중국에는 한(漢)나라라는 거대한 국가가 있었고 또한 한나라와 1년간 싸운 막강한 고조선이 요동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또한, 고조선에서 한반도에 있는 진국(辰國)으로 대단위 정치적인 망명객이 있었다는 기록에서도 진국의 실체가 결코 작은 국가가 아니라는 것을 중국의 문헌에서 간접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고조선과 함께 있었던 진국 마한의 왕도는 기원전 국가이기에 대부분 왜소하거나 위치도 분명하지 않기에 찾는다는 것은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남한 전체를 다스린 국가이자 중국 지역의 세력을 견제할 만큼 강력한 힘도 있었다면 흔적이 어느 정도 남아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도 교차하고 있었다. 못 찾는다 할지라도 어떻게 찾으려고 노력을 하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과정도 역사 기록에서는 중요하다고 느꼈다. 마한의 왕도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우리 민족은 끝없이 멍에를 지고 갈 수밖에 없고 시급한 것은 개발관계로 한번 유실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 왜곡을 당하고 있는 큰 문제 중에서도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평양에 중국의 군현인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하여 420년간 한반도를 다스렸다는 것이다. 바로 마한이 존재 하였던 시대로서 원삼국 학설과 함께 삼한 시대는 부족국가이며 한사군에 종속 되어 오랫동안 왜소함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에는 장기간 존재한 한사군의 군현의 실체는 분명하지 않고 낙랑국과 대방국이라는 국가 이름이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모든 문제를 바르게 규명하고 평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증이 될 수 있는 유적이 우선 확보되어야 진위를 가릴 수 있다.
특히 왕도는 그 당시 국력과 모든 함축된 역사자료가 결집되어 있고 특히 마한의 왕도는 민족사를 바르게 밝혀줄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 거대한 왕도 유적이다. 그 중요성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혼이 배어 있는 민족의 유산이다.
한종섭((사)백제문화연구회 회장)*
*글쓴이는 현 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으로, 1992년 제7회 전국 문화원 주최 최우수 논문상을 수상하고 2000년 경기도 하남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근무한 바 있다. 2004년 양성면 성하리에서 진국 마한의 왕도 유적을 발굴하고, 올해 춘천시 신북면 발산리에서 매국 왕도 등 미발표 왕도 1개소를 비롯하여 1992년부터 총 5개의 왕도 유적을 찾아내었다. 저서로는 『위례성 백제사』2권(집문당) 등 다수가 있다.
기사입력: 2005/07/05 [20:33] 최종편집: ⓒ 안성신문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2> | |||
- 역사 기록에서 본 마한은 어떤 나라인가 | |||
∙진국 마한은 78개의 소국을 거느린 맹주국 ∙고조선 시대 한반도의 토착왕국은 진국(辰國) 마한(馬韓)이었다. 안성에서 발견된 마한 왕도에 대한 문헌기록은 어떠한가. 중국 측의 사서에 의하면 마한 54개국, 진한 12개국, 변한 12개국의 연맹체로서 나라 이름과 함께 생활상의 내용까지 자세하게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삼한을 모두 마한이 다스린 것으로 통합 전체의 나라 이름은 진(辰)국이라 하였다. 자세한 내용으로는 『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 한(韓)전에는 “진왕(辰王)은 월지국(月支國)을 통치한다” 기록이 되어 있고, 『후한서 한전』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전체의 국토가 사방 4천 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이다. 마한이 한족(韓族) 중에서 제일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을 세워 진왕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을 하여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립을 하는데, 삼한의 제국 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종족의 사람이다.” 위의 내용에서 『삼국지』는 월지국이라 하였고 『후한서』에는 목지국이라 기록되었는데 자료의 신뢰도와 월지국이라는 기록이 두 곳에 나타나는 『삼국지』의 월지국이 신뢰성이 높은 기록이 되고 있다.(‘月’자가 ‘目’자로 오기될 소지가 높다는 것이 주류이다). 월지국을 진왕(辰王)이 통치하였고, 또한 진왕이 삼한 전체를 다스린 막강한 세력권으로 기록된 국가이다. 또한 마한 왕을 진왕이라고 하여 삼한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토착적인 진국(辰國)의 전통을 이어온 국가임을 알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이나 북한의 연구에 의하면 삼한 분립 이전의 압록강 이남은 모두 진국이 다스렸으며 중심지는 곧 마한의 월지국이라는 내용의 삼국지 동이전 기록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는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의 기록에서는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마한 왕에게 천도와 강역을 알리고, 전쟁 포로와 사냥한 신록을 바치는 관계로서 백제 초기는 마한의 지배를 받는 속국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본기(新羅本記)의 기록에는 신라 사신이 마한에 오자 마한 왕은 분노하여 말하기를 “진한과 변한은 속국인데 근래에 와서는 공물을 바치지 않아 예의를 다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신라의 사신을 죽이려고 하자 이를 만류 하여 되돌려 보냈다는 기록에서도 마한은 삼한의 맹주국 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마한 왕도의 위치를 천안의 직산 또는 익산이나 영산강 유역으로 보아왔었던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에서 본다면 백제와 마한과의 거리를 알 수 있는 것은 온조왕 24년(서기6년) “왕이 웅천책을 설치하니 마한왕은 사신을 파견하여 책망하기를 ‘왕이 처음 강을 건너 왔을 때는 발붙일 곳이 없으므로 내가 동북 일백 리 땅을 갈라주어 편히 살게 하고…’ 하면서 책망을 하는 기록과 온조왕 26년에는 사냥을 한다고 말하고 왕은 군사를 내어 마한을 기습 공격하여 멸망시켰다는 기록이다. 위와 같은 기록에서 마한과 백제는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지금까지 마한과 관련된 연구에서 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삼국지』한(韓)전에는 『위략(魏略)』을 인용한 글에는 “조선상 역계경이 우거에게 속하였으나 그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2천호의 백성들과 함께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다”는 내용의 글이 있다. 고조선이 요동에 있을 때에 역계경이라는 조선의 관리가 우거왕에게 자신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진국으로 망명을 갔다는 것으로 그 당시는 한(漢) 나라와 고조선, 진국 등이 서로 영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서 많은 사람들이 망명을 갈 정도였다면 힘이 약한 국가가 아닌 것을 입증하는 것으로 망명은 힘이 약하다면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당시 고조선은 한(漢)나라와 1년간 치열하게 싸운 국가이며 고조선에서 진국을 함부로 하지 못할 만큼 강대한 국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삼한의 연맹체가 진국이며 진국의 중심이 마한 의 왕도이며 마한의 왕도가 삼국사기의 내용대로 백제의 왕도에서 일백 리 거리에 속하는 안성에서 왕궁지와 함께 고대 도시가 발견이 된 것이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 |||
기사입력: 2005/07/12 [21:28] 최종편집: ⓒ 안성신문 |
<특별기고>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3> | |||
고대 도시 구조에서 찾게 된 안성의 마한 왕도 | |||
당진의 한진 나루와 평택의 방축리 일대의 토성에서 마한 왕도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백제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하는 과정에서 왕도 구조에 대한 축적된 학술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알고 있으나 막상 마한의 왕도를 찾고자 할 때는 조사 범위가 넓고 불분명하여 어느 곳부터 조사를 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지금까지 마한의 왕도로 지적되어온 위치로는 인천, 익산(益山), 직산(稷山), 또는 영산강 유역의 나주(羅州) 지역으로 비정되어왔었고 대부분 제천 청주이남 지역이 마한의 중심이라는 것이 정설처럼 되어 있다. 또한 마한의 멸망 시기가 백제 온조왕 때의 기원 전후가 아니라 4세기 후반 근초고왕 때라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서 백제 왕도와의 거리를 가늠하는 데 많은 혼란이 되어왔었다.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여 충청과 전라 지역을 마한의 왕도가 있었던 지역으로 비정하여왔었다.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나타나는 현상과 많은 차이가 있기에 오랫동안 의문이 되었고 마한의 왕도를 찾고자 한다면 위치에 대한 혼란을 갖지 않기 위해서는 제로 상태에서 기초부터 점검 조사하는 방향을 선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선적으로 경기와 충남 지역으로 연결되는 강과 연결되는 해안 지대를 살펴보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고대의 큰 왕도는 강과 하천으로 연결된 위치에 도읍을 정하였다는 필자의 그동안 연구 결과에 의하여 실마리를 잡고자 하였던 것이다. 마한은 해양 통로를 이용하여 해외로 왕래한 기록과 또한 마한이 관할하는 지역은 육로보다 해양 통로를 이용하기에 좋은 서해와 남해안 지역의 영토를 주로 관장하였기에 포구나 항구의 이용도가 높았다는 것을 예측할 수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서해안의 강과 연결된 해변 지역 몇 곳을 조사하기로 하면서 우선적으로 당진의 옛 나루터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진은 중국으로 왕래하였던 나루로서 이보다 앞선 원래의 이름은 ‘한진’이며 당진의 한진 나루와 주변 유적을 조사하면서 내포 지역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고, 고대로부터 사용된 큰 나루였다는 것을 가늠하게 되었다. 한진으로 통하는 강과 연결된 곳은 삽교천, 진위천, 안성천 등이며 이 일대 전체를 조사하기로 하면서 여러 곳을 답사하게 되었다. 조사 과정에서 실마리가 되었던 유적은 평택의 고덕면 방축리 일대에서 거대한 토성을 찾아내고 조사한 결과 삼한 시대의 유물이 많이 분포되어 있기에 점차 의심을 갖게 되었다. 삼한시대에 사용한 거대한 토성이 왜 이곳에 축조되었는가에 대한 의심에서 우선 규모 면에서 삼한 시대 거대한 세력과 연결된 위치의 성이라는 것을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고덕면 방축리 토성은 진위천과 안성천으로 연결이 되면서 바다로 통하는 삼거리의 수로를 지키는 중요한 위치의 거점 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유적으로는 백제 왕도의 입구를 지키는 한강변 풍납토성은 한강 본류와 남한강 북한강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의 길목 입구를 장악할 수 있는 백제 왕도의 문전성이라는 점에서 비교가 되었다. 고대 수상 교통과 관련된 당진과 평택의 유적에서 마한의 왕도가 강으로 연결된 보다 가까운 곳에 있을 것이라는 예측을 가능하게 하는 방향의 실마리가 되었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
<특별기고> 안성 마한(馬韓) 왕도의 발굴기(4) |
안성시 양성면을 왜 마한의 왕도라고 하는가 |
많은 사람이 살아가는 고대의 왕도는 도시 운영 유지를 위하여 일정한 기준에 맞지 않으면 왕도가 될 수 없다. 그동안 여러 왕도를 찾아내고 연구한 결과 공통적인 입지와 시설은 다음과 같은 도시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1) 고대의 규모가 큰 왕도는 강이나 하천으로 연결이 되어 있다. (2) 산성과 도성으로 하나의 단위를 이루고 있고 왕궁에서 산성으로 이어지는 퇴로가 조성되어 있다. (3) 지형과 구조에서 적을 막을 수 있는 자연지형과 인위적인 군사시설이 밀집 조성되어 있다. (4) 가까운 위치에는 농경을 할 수 있는 넓은 평야 지대가 있다. (5) 왕도 주변은 장성(長城)이 에워싸고 보호 시설이 여러 겹으로 조성되어 있고 왕도를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길목에 군사 시설이 배치되어 있다. (6) 그 당시에 해당하는 유물 분포 면적의 범위가 넓어야 한다. (7) 땔감의 공급이 원활한 지역이어야 한다. (8) 왕궁지는 독립된 위치에 보호 시설이 잘 되어 있다. (9) 왕도와 관련된 땅 이름의 흔적과 도시 구조에서 연계성이 남아 있다. (10) 왕도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산재되어 있다. (11) 왕도는 단일성이 아니며 복합적인 도시 구조로 조성되어 있다. (12) 고대의 건물은 신분과 관련이 있기에 규모와 구조에서 왕궁의 특성이 있어야 한다. 왕도를 찾아내었을 때는 이보다 더 많은 항목으로 조사 검토를 하지만 찾아내기 위해서는 위와 같은 기본적인 내용을 고려해야 한다. 위의 내용은 발굴을 하지 않고 알 수 있는 내용이지만 대부분 발굴만이 전부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거대한 왕도는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유물과 유적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는 것은 방대한 면적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결정적인 유물은 왕궁 건물지에서 삼한시대의 기와편이 발견되고 있다. 고대 건물에 기와를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은 종교적인 신전, 왕궁, 관부 세 곳에만 사용되었다. 삼한 시대는 불교가 유입되지 않아 사찰이 없었고 규모와 위치 구조에서 신전, 관부가 아닌 것으로 밝혀져 왕궁임이 입증된다. 기와 토기의 시대를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백제 왕궁지 발굴에서 맨 아래 층위에서 출토되는 백제 초기의 유물과 같은 기와, 토기 유물이 성하리 건물지 일대에서 대량 발견되고 있다. 또한 왕궁지를 찾아내고 알게 된 것은 인근 반제리에서 고속도로 조성 구간에서 발굴된 환호 군사 유적은 지금까지 발견된 유적 중에서 보다 특이한 군사 유적이 발굴이 된 것이다. 매봉산 중 상단부에서 발굴된 청동기 시대의 주거지와 초기 철기 시대의 군사 환호(環濠) 유적과 74기의 대규모 주거지가 가파른 산 위에서 발굴되었다는 것은 시대와 위치 규모에서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수성이 있는 유적이다. 반제리 군사유적은 보다 가까운 곳에 보호해야 할 중요한 유적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왕궁지는 길이 150m 폭 80m의 거대한 건물지로서 인근 반제리 매봉산 정상의 군사유적과 연결된 산줄기이며 같은 시대의 유물이 출토된 것이다. 또한 마한은 토착 세력 집단이기에 양성면, 공도읍, 원곡면 일대에서 청동기 시대의 유물의 밀집도가 높고 많은 무문토기가 출토됨으로써 마한의 건국 세력 기반을 입증하고 있다. 지금까지 삼국사기의 기록과 곳곳마다 나타나는 유적과 유물, 왕도의 구조와 거대한 건물지, 지면상 밝히지 못한 여러가지 입증 자료에서 마한의 왕도임이 밝혀진 것이다. 반제리와 용두리의 주변 유적이 발굴되기 전에 마한의 왕도를 발견하였다면 하남시의 유적처럼 반발이 심할 수 있어 은폐 가능성이 있지만 주변 발굴과 함께 동시에 왕궁지를 찾아내어 더 이상 의문이 될 수 없었다. 마한 왕도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부가가치 높은 문화 자산으로서 한번 파괴되면 영원히 되찾을 수 없기에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민족의 혼이 배어 있고 지역의 자랑스러운 문화 자산이기에 애향심으로는 결코 소홀히 하거나 방관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고대의 왕도는 지상의 신(神)이 사는 곳으로 함축된 사상이 내재되어 있고 보다 많은 관련 유적이 산재되어 있기에 파괴되기 전에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작은 고분의 유적은 발굴을 해야만 알 수 있지만 거대한 도시 구조와 유적을 찾아내는 것은 현장학술 조사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잘못된 인식으로는 발굴만이 우선이라고 생각을 하지만 유물은 남아 있지 않을 수도 있고 유동성이 많기에 낮은 안목의 발상으로 함정이 될 수 있다. 지역 신문을 통하여 간략하나마 시민들이 알 수 있도록 지면을 할애해주신 안성신문에 감사드리는 바이다. 한종섭(사단법인 백제문화연구회 회장) |
기사입력: 2005/08/27 [11:51] 최종편집: ⓒ 안성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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