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 비파산성--경기도 안중읍

吾心竹--오심죽-- 2009. 7. 5. 16:48
한국의 산성(56) - 백제 비파산성(琵琶山城, 경기 평택)

 

비파산성
소재 : 경기 평택시 안중면 용성리(龍城里)

 

 

 

1. 성벽

 


성벽의 축조방식과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기 위하여 동벽에 시굴 트렌치를 설치하여 성벽을 절개하였다. 성벽은 암반층을 정리한 후 갈색점토와 약간의 자갈을 다져서 기저부를 축조하였다. 기저부의 규모는 외벽이 약 13m정도이고, 내벽이 약 10m정도이다. 그 위로 적갈색점토와 갈색 점토, 회갈색 점토를 교대로 다져서 축조하였다. 다짐층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다. 한편 외벽 기단부에서는 2∼3단정도 석렬을 쌓은 흔적이 노출되었다.
기단 석재열 외부로 와적층이 확인되었다. 와적층의 폭은 약 3m∼4m정도이고, 두께는 약 20cm∼40cm정도이다. 후대에 보수한 것인데 성벽이 우수에 파이는 것을 빙지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벽 상면폭은 약 2m∼3m정도이다. 외벽의 하단폭은 토루의 중심축으로부터 약 13m정도이고, 높이는 약 6m정도이다. 내벽 절개 트렌치에서 나타난 내벽의 하단폭은 토루의 중심축으로부터 약 10m정도이고, 높이는 약 3.3m정도이다.

 

 

 

 

"車成"

 

銘 명문 기와가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 지역은 고려시대 龍城縣에 해당되는 지역이다.

용성현은 고구려의 上忽縣으로 신라 경덕왕대 車城縣으로 개명하였던 기록이 남아 있다. 이 명문기와는 차성현의 치소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기와는 주로 성벽 절개 트렌치에서 출토되었다. 특히 내·외성벽 하부의 와적층에서 다양한 기와가 출토되었다. 와적은 성벽의 하부를 보강하기위해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는 화재로 인해 2차 소성된 기와가 대부분이었으며 뒤섞여 있는 상태였다. 내벽과 외벽의 절개 트렌치에서 출토된 기와들은 대부분 고려시대 기와이다. 외벽 트렌치에서는 무문 평기와가 80∼90%로, 내벽 트렌치는 40∼50%의 출토비율을 보였다. 막새류는 출토되지 않았다.
토기류는 대부분 잔존상태가 작아서 거의 파편 상태이므로 전체 기형을 파악하기 힘들다. 백색 또는 황갈색 무문이거나 회청색 경질이 대부분이다. 고려시대로 추정된다.
비파산성 동벽에서는 성벽 판축층과 외벽 기초석렬의 양상을 명확하게 살펴볼 수 있었으며 판축층 하부에서는 축성시기를 반영하여 주는 고려시대 기와편이 출토되었다. 고려시대 토성의 판축공법은 경기지역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비파산성 동벽에서 채집된 "乾德三年"명문기와는 고려 광종 7년(965년)에 해당하는 시기로 이는 동벽 판축층에서 출토된 기와편과 함께 비파산성의 축조시기를 규명 할 수 있는 획기적인 자료로 평가된다.

[관련기사] 삼국시대 '차성현' 치소, 평택 비파산성으로 밝혀져

[연합뉴스 2004-05-18 16:15]


 

평택 관방 유적 출토 명문기와와 저장시설
경기 평택 일대 고대 관방 유적 중 비파산성에서 출토된 '車城'명 명문기와(왼쪽)와 자미산성에서 확인된 신라시대 저장시설(가운데) 및 자미산성 토광 출토 백제고배(오른쪽).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삼국시대에는 상홀현(上忽縣) 혹은 차성현(車城縣), 고려에서는 용성현(龍城縣)으로 불린 지역의 치소(治所 관청소재지)가 지금의 경기 평택시 안중면 용성리(龍城里) 소재 비파산성(琵琶山城)이었음이 확인됐다.

단국대 매장문화재연구소(소장 박경식)는 평택 일대 고대성곽 5곳을 조사한 결과 비파산(해발 102.2m)에 축조된 비파산성(총둘레 1천622m, 면적 13만8천800㎡)에서 '車城'(차성 혹은 거성)이라는 글자가 적힌 기와를 발굴했다고 18일 밝혔다.

앞서 지난 99년에는 경기도박물관이 이 산성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乾德三年'(건덕3년. 고려 광종 7년<965>)이라는 절대 제작연대가 적힌 명문 기와를 수습한 바 있다.

조사단은 "차성(車城)에서 용성(龍城)으로 이름이 바뀐 것이 고려 성종 대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번 '차성' 명 기와는 이보다 앞선 고려 건국초에 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면서 "이 유물로써 이곳을 차성현 치소로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 의하면 차성현은 통일신라 때는 당은군(唐恩郡)에 소속된 두 개 현 중 하나로 고구려에서는 상홀현(上忽縣) 혹은 차홀현(車忽縣)이라 했다가, 경덕왕이 차성현으로 고쳤으며 고려시대에는 용성현(龍城縣)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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