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08/23 17:40
한국의 산성(05) - 파사성(婆娑城, 경기 여주)
위치 : 여주군 대신면 천서리 산9
지정번호 : 사적 제251호
파사성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축성한 파사성은 성벽 등 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으며, 둘레는 약 935.5m정도이며
성벽중 최고 높은 곳은 6.25m나 되나 낮은 곳은 1.4m되는 곳도 있다. 천서리를 면한 동문지(東門址), 금사면 이포리를 면한 남문지(南門址)에는 문앵(門櫻)을 세웠던 고주형초석 2기와 평주 초석이 남았고 동문지에는 옹성문지(甕城門地)가 남아 있다. 한강에 연하여 있어 성 일부는 강언덕에 돌출된 자리를 잡아 남한강의 상하류를 한눈에 관찰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다.삼국시대에 축성되었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선조 25년(1592년) 에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유성룡의 발의에 따라 승군총익인 의암(義巖)이 승군을 동원하여 쌓은 둘레 1,100보의 성첩을 중수한 기록이 있다. 성벽을 살펴보면 초창기의 성벽과 그 뒤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흔적들이 혼재해있음을 볼 수 있다. 성벽은 30 - 40㎝ 정도의 장방형 석재를 가로로 겹겹이 쌓아 올리면서 틈에다 잔돌을 박아 고정시켰다. 이 성은 파사산 정상에 쌓은 포곡형의 석축산성으로 성의 아래부분의 폭은 10m내외이고 윗부분의 폭은 2 - 3m 정도이다.
파사성과 관련하여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신라 5대 임금인 파사왕 때 남녀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다. 남장군이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그 동안 여장군은 파사성을 쌓는 내기였다. 여장군이 성을 다 쌓기 전에 남장군이 중국에서 돌아왔다. 이때 여장군은 개군면 석장리에서 돌을 치마폭에 담아 나르고 있었는데 남장군의 소식을 듣고 놀라는 바람에 치마폭이 찢어져서 돌이 흘러내렸다. 흘러내린 돌들이 담을 이룬 곳이 석장리이고 그 때문에 파사성은 미완성인 채 지금에 이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목은 이색(李穡)은 금사 8영 중 제 6영에서 파사망우(婆娑望雨)를 읊조렸다. 여름철 파사성을 스치는 빗줄기를 보면서 목은이 느꼈을 감회가 600년 뒤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음은 인걸은 가고 없어도 산천이 의구(依舊)한 탓일께다.
[관련기사] - 여주 파사성 삼국시대 축조 확인
[연합뉴스 2000-06-02 16:30](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한강유역 진출과 함께 신라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진 경기 여주 파사성이 발굴결과 신라, 혹은 더 빠르면 백제가 축조한 삼국시대돌성(石城)임이 밝혀졌다.
경기문화재단 산하 기전문화재연구원(원장 장경호)은 2일 여주군 천서리 파사성발굴현장에서 가진 지도위원회에서 지난 해 9~11월 긴급수습 발굴조사에 이어 지난 3월 이후 지금까지 성 안쪽 건물지 및 동쪽 성문을 시굴조사한 결과 성벽에서 6~7세기 신라토기 중 하나인 단각고배류를 찾아냈다고 말했다. 성벽에서는 또한 6세기 후반 이후 삼국시대 산성에서 흔히 보이는 오각형 모양의 철 화살촉도 나왔다.
이런 성벽 발굴 결과로 보아 파사성은 당초 알려진 것처럼 진흥왕 때 한창 팽창하던 신라가 사용했던 성일 것으로 판단된다고 발굴단은 말했다. 다만 이 성을 쌓은 주인공은 신라보다 이른 시기에 이곳을 점령했던 백제인지는지금으로서는 단언할 수 없다고 발굴단은 덧붙였다. 이와관련, 성 안쪽 건물지 발굴결과 풍납토성과 춘천 중도, 파주 주월리 등지를 비롯해 초기 백제, 혹은 이른바 원삼국시대 한강 유적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중도식무늬없는토기(경질무문토기)와 찍어누른 무늬가 있는 타날문토기가 발견돼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들 토기는 지금까지는 대체로 백제보다 앞선 이른바 원삼국시대 유물이라고보고 있으나 최근 초기백제 중심지인 풍납토성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어 어떤 형태로든 백제와의 관계를 부정하기 힘들게 됐다.
한편 파사성 일대에서는 이와함께 반달모양돌칼과 갈아만든 돌칼을 비롯한 청동시기대 유물과 함께 고려 및 조선시대 유물도 많이 나와 삼국시대 이후 줄곧 성으로기능해온 것으로 보인다. 둘레 935m인 파사성은 한강 중류를 끼고 있는데다 그 위치가 주변에 높은 산이없어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고 충주와 조령으로 이어지는 교통요지라는 점등에서 일찍부터 주목받아 왔으며 신라가 쌓은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있었다.
출처 : http://www.yeoju.gyeonggi.kr/culture/main.asp (여주 문화관광 사이트)
http://young-dong.com/yoju_travel006.htm
http://womantopic.com/corner/6-15.htm
http://my.dreamwiz.com/wonsamc/newfile51.htm
[추가]
여주 파사산성에 오르다 | |
4873 | 2006-07-03 | 추천 : 0 | 조회 : 1437 |
지난 겨울 끝자락에 여주의 파사산성을 찾았습니다. 파산산은 이포나루 근처의 대신면(大神面) 천서리(川西里) 막국수 촌이 나오는데 막국수촌의 북쪽에 자리 잡은 산이 파사산이고 그곳 정산부에 파사산성이 있습니다. 오포대교를 건너자마자 좌회전하여 200m 정도 가면 파사산성 입구 안내판이 보이는데 안내판이 보이면 안내판을 지나치기 전에 우측으로 난 농로로 들어가야 합니다. 자칫하면 안내판을 지나치기 십상이니 주의해야 합니다. 파사산은 230M 밖에 되지 않은 산이지만 산성을 축성할 만큼 제법 가파릅니다. 2월인데 길이 편하지 않아서인지 땀에 뻘뻘 흘리며 올라갔습니다. 한 20분 정도 올라가니 제법 커다란 성벽이 여행객을 맞이하였습니다. 높이는 5~7M 정도 되었고 성벽이 여러곳 무너져 있었습니다. 사전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 성이 최초로 축성한때는 삼국시대라 했는데 처음으로 보이는 부분은 돌을 엇갈려 쌓은 모양이 조선시대 성벽의 형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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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가까이 가보니 문루를 세웠던 흔적이 있는것 보니 이곳에 성문이 있었나 봅니다.
돌 위에 있는 이끼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벽안쪽에 들어선 후 곧장 정상으로 가지 않고 오른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 정상부를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 후 정산에 올라보니 왜 이곳에 산성을 지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근처의 높은 산이 없기에 앞이 탁 트이고 멀리 유유히 남한강이 흘러가는 모양이 한눈이 들어옵니다.
이 성을 처음으로 쌓았던 나라는 이 파사산 인근을 가장 먼저 지배했던 한성백제였다고 합니다. 파사성 가장 안쪽 건물지를 발굴한 결과, 전형적인 한강 유역 백제 토기인 중도식 무문토기(무늬 없는 토기)와 타날문토기(찍어 누른 무늬가 있는 토기)가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토기들은 한성백제의 수도였던 위례성, 즉 풍납토성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는 토기들이라고 합니다.
그 후 이곳을 점령한건 신라였습니다. 아마 파사산성이란 이름도 그때 붙여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신라 5대와 이사금의 호가 파사(婆娑)이고 한자도 파사산과 같기 때문입니다.
파사성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옵니다. 신라 제5대 왕 파사 이사금 때 남,여 두 장군이 내기를 하였는데 男장군이 나막신을 신고 중국을 다녀오고, 女장군은 지금의 파사성을 쌓기로 하였는데 여장군이 축성을 마치기 전에 남장군이 먼저 중국에서 돌아와 이겼다고 합니다. 그 때 여장군은 개군면 석장리(石墻里)까지 가서 돌을 치마폭에 담아 오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놀라 치마폭의 돌을 떨어eM렸고 그래서 파사산성은 미완성 상태로 남아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채 북쪽에 기슭에는 전설 속의 女장군을 새긴 바위와 샘터가 있다고 하는데 찾을 수는 없었습니다.
성내에는 동문과 남문등 2개의 성문과 배수구, 우물지, 건물지등이 있는데 정상부에 건물터가 복원이 마무리되지 못한 채 비닐로 그냥 덮여져 있는 모양이 보기 좋지 않았습니다.
여주 시에서는 이곳 파사산성을 근처 신륵사와 함께 관광지로 개발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성벽을 복원하려면 아주 많은 비용이 들어갑니다. 여기서 조금 멀지만 고달사지도 현재 복원중인걸 미루어 여주시가 문화유산에 나름대로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칠이 다 벗겨진 안내판
하지만 번듯하게 복원하는 것만 중요한 게 아니라 문화유적을 제대로 알리는 것도 중요한 일이란 점입니다. 벗겨져 아무 내용도 읽을 수 없는 채 방치된 안내판이 저를 서글프게 했습니다.
파산산성의 기록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를 거쳐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서애(西涯) 유성룡(柳成龍)이 황해도 승군 도청섭 의암(義巖)에게 다시 쌓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유성룡이 발의하여 승군총익인 의암(義巖)과 승군을 동원하여 둘레 1,100보의 이 파사성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파사성 성벽을 자세히 보면, 바른 층 쌓기로 밑돌과 윗돌이 정연하게 맞물리도록 쌓은 신라시대 초기의 석벽과 함께 각 층이 흩뜨려져 있는 중수한 조선시대 다시 쌓은 부분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새로 복원한 성벽을 따라 내려오는데 돌로 쌓은 성벽 위 돌 가운데 서있는 소나무를 보았습니다. 복원하면서 소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고 복원한 모양입니다. 비록 소나무일 뿐이지만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 한 마음이 참 좋아보였습니다.
간혹 옛 성터에 오면 그곳을 쌓고 지켰던 많은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나라를 위해서 자신과 가족을 위해서 돌을 나르고 전방을 감시하며 때론 치열한 전투를 치루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치열함이 사라진 후에는 고성의 쓸쓸함과 남한강의 아름다움만이 남아있습니다. 파사성에 오른 서애 유성룡도 그런 기분이었나 봅니다. 파사성 금강루에서 지었다는 시 한편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파사성(婆娑城) 서애 유성룡
婆娑城下水 廻(파사성하수영회) 파사성 아래에는 물이 둥글게 굽어 흐르네
春風日日吹不斷(춘풍일일취불단) 봄바람은 날마다 끝없이 불어오고
落紅無數飛城 (락홍무수비성외) 지는 붉은 꽃잎이 무수히도 성 모퉁이에 흩날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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