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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 기원에 대한 이해(신선도의 전파)

吾心竹--오심죽-- 2009. 10. 29. 18:38

제목 종교의 기원에 대한 이해(신선도의 전파)
작성자 우리역사바로알기시민 날짜 2005-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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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신선도의 세계전파


제1. 신선도와 불교

진리를 깨친 후 지혜와 자비로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인도의 카스트 제도와 같은 인간불평등을 타파하여 인격평등을 가져오게 하며, 자유 자재로운 해탈의 길을 제시하되 한번도 제국주의의 길을 걷지 않은 세계적 고등종교의 하나인 불교의 유래는 무엇일까?
불교의 교조는 석가모니(서기전 624~544년, 일부 동북아 지역에서는 서기전 1027년 탄생으로 보는 주장도 있음, 한민족국가의 후단군조선기에 해당함)로 그는 선도수련과 독자적 노력 등에 의하여 대각(大覺)을 얻고, 세계 4대 성인의 하나인 부처(Buddha, 覺者)가 되었다.
불교 유래의 구체적인 역사적 계보는 찾기 어려우나, 석가족이 속한 코리(Koli, 槀離)족이 한민족 혈통이고, 석가모니가 신선도 계통의 스승을 만나 선도를 수련한 후 대각을 얻었으며 불도를 대선도(大仙道)라 하고 선도를 가르치는 불경이 많은 점 등은 불교가 신선도에서 연원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다음에 석가모니의 혈통, 석가모니의 선도수련, 선도를 가르친 불경 등 신선도 인연에 관하여 이를 뒷받침하는 한국과 인도의 관계 사료 등을 통해 불교와 신선도 관계를 밝히고자 한다.
  ①석가모니의 혈통. 석가(Sakya, 떡갈나무숲‧ 능력을 뜻함)족은 포탈라카국 감자대왕의 후예로서 지금의 네팔 타리이 지방 카필라선인(仙人)이 수도하던 카필라국에 정착하였고, 코살라국의 주인이 됐으며, 카필라국의 수도단나(首頭壇那, 淨飯王)는 마야부인에게서 석가모니를 낳았다. 영국의 사학자 빈센트 스미스에 의하면 석가족과 코리족은 동쪽에서 이동했으며, 몽골리안 중에서 한민족을 형성한 고리(槀離)족이 네팔지역에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는 석촌몽고인 설을 주장했다.
마야부인은 상반대정(常盤大定)의 석가모니전에 의하면 코리족(拘利族, 句離族, 九夷族, 槀離族, Koli , Koliyan, 골랴나무 숲 사람)이며, 정반왕과 마야부인은 같은 종족이라 했으므로 같은 민족임을 알 수 있다. 마야부인과 석가모니의 부인 야소다라 공주는 종형제자매로 모두 코리족이다.
카필라국에서 최고통치자는 왕이라고 했으며, 부족의 의사결정은 “석가가나”라 하여 석가족의 집회에서 고루 의논하며 단군조선의 ‘고루살이(和白)’식으로 행하였다.
②석가모니의 신선도 인연. 석가모니가 태어났을 때 나라에서 이름 높은 아시타선인(仙人)이 스스로 왕궁을 찾아와서 “싯타르타 왕자는 장차 세속을 떠나 도를 닦아 부처가 되어 널리 중생을 건지오리이다.”고 말하였다. 진리를 깨치기 위해 출가한 석가는 바가바선인(仙人)을 비롯한 여러 수행자가 모여 도를 닦는 숲을 찾아가 고행에 관해 물었으나 충분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석가는 이어서 당시 가장 이름 높은 선인 아라라 칼라마를 거처로 찾아가 선정을 배워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에 들 수 있었으나 최상의 깨침과 열반은 아니기에 다시 우드라카 라마푸트라라는 선인을 처소로 찾아갔다. 그는 거기서 정(定)을 익혀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을 체득했으나, 일체종지를 얻지는 못했다.
그 뒤 석가는 가야산에 들어가 6년간 스스로의 고행과 탐구 끝에 붓다 가야 보리수 밑에서 금강정(金剛定)에 들어 갔다가 새벽별을 보고 생사의 뿌리를 끊는 대각을 얻었다.
그 후 석가모니는 가섭에게 “아주 까마득한 옛날 아직 이 세상에 여래가 출현하기 전에 나는 설산선인(雪山仙人)으로서 설산에 살면서 보살행을 닦았다.”고 말했다.
또 법화경(法華經)에 보면 부처의 이름은 일월등명(日月燈明)이고, 성(姓)은 파라타(頗羅隋, 하늘의 본체를 나타내는 ‘파랗다’에서 온 듯하며 태고선인의 성이라 함)라고 하여 그 기원을 선인(仙人)에게 두고 있다. 또한 불도(佛道)를 대선도(大仙道)라고 부르기도 한다(例: 拈華嚴頌云 如來大仙道는 微妙難可知로다. 不求此妙法하면 那得黨菩提하랴).
③석가모니의 직접 가르침이나 그를 해석한 경론 가운데 선도(仙道)를 가르친 것이 많은데, 예를 들면 아함부의 불설입선경(佛說入仙經), 방등부의 일체지광명선인자심인연불식육경(一切智光明仙人慈心因緣不食肉經), 대위등광선인문의경(大威燈光仙人問疑經) 및 금강선론(金剛仙論) 등이 있다.
④기타 고대 한국과 인도 관계사료.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인 드라비다족은 회색 얼굴에 낮은 코를 가졌고 요가나 선도를 수련하며 성루에서 제사를 지내는 소도문화와 성곽도시, 관개용댐을 건설했으며 아침에는 태양 경배를 한다. 드라비다어 가운데 가장 오래된 타밀어는 현재 싱가포르 등에서 국가공용어의 하나로 쓰이고 있는데 한글과 같은 문법구조를 가진 교착어이며 한글과는 뜻과 음이 같은 단어가 많다.
문정창 씨는 불교의 기원이 요동반도에서 봉천지방에 자리했던 소호 금천씨의 제천금인(祭天金人)에서 발생하여 곤륜산맥을 타고 인도에 진출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사실들로 보아 지금부터 약 5000년 전 환단시대에 우리 민족의 신선도문명이 중앙아시아를 거쳐 인도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드라비다족은 또 아유타 공화국 허황옥 공주가 장유화상과 함께 가야에 와서 김수로 황후가 되고 불교를 처음으로 전파하게 했는데(단기 2381년) 드라비다어는 가야어를 통해 우리말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지금 네팔은 드라비다족과 몽골리안들이 대종을 이루며 삼일장, 49제 풍속이 우리와 같고, 라마승은 우리나라의 천군과 같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
한편 배달국 제 15대 치액특 환웅천왕은 티베트를 800년간 통치했으며, 3세 가륵단군은 강거의 반란을 티베트에서 토벌했는데 티베트인의 생긴 모습은 한국인과 같다. 5세 구을단군 기사 8년(단기 241년)에는 인도사람(身毒人)이 표류하여 동해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환단고기>>). 이는 인도 대륙과의 왕래를 나타내는 기록들이다. <<단기고사>>에도 2세 부루 단군 때 남려국(南閭國)에 다녀온 나염련(羅閻連)이 브라만교를 소개하려 했으나 단군이 반대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한편 대광명불화엄경 보살주처품에는 우리나라 금강산에 모든 보살이 살고 있었는데, 법기(法起)보살은 지금까지도 1200명을 거느리고 설법하고 있으며,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거룩한 힘이 악인에게 쫓껴 금강산에 떨어져 굴러도 털 하나 다치지 못하게 한다는 구절이 있고, 일연대사의 <<삼국유사>>에는 신라 경주 황룡사, 불전 후면에 석가모니 부처전의 가섭불(迦葉佛 )이 앉아 있던 절터로서 연좌석(宴坐石)이 있는데, 불전과 탑은 고려시대 몽골칩입 때 불타버렸다 한다.
한편 김원룡 교수는 석가모니의 석가(Sakya)족은 서기전 6~4세기 금속문명을 선도한 스키타이(Skythai) 일족이 인도로 들어간 것으로 추정했다. 스키타이족은 고대 유라시아 북방 기마 민족으로 다뉴브강‧ 흑해에서 송화강에까지 황금을 비롯한 철기문화를 발달시켰으며 시베리아와 알타이지역, 중국 오르도스지역을 통해서 한반도와 공통된 문화유적을 많이 가지고 있다. 스키타이 문화로서 알마아타 부근 쿠르칸의 원형고분 43개는 신라 천마총고분과 같고 중앙아시아 돌하루방과 제주도 돌하루방이 비슷하여, 무쿠칸지역에서 나온 황금원통 그리핀장식은 대동강변 유역에서 출토된 마구장식과 같아 그 교류를 짐작케 한다.

 


2. 신선도와 도교
중국의 도교는 황노사상(黃老思想) 또는 황노교(黃老敎)라 하여 황제(黃帝)와 교조인 노자(老子)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고, 그 뒤에 장자(莊子), 장릉(張陵, 오두미교 창시), 갈홍(葛洪, 抱朴子 지음) 등이 주로 발전시킨 종교다.
이 도교는 우리의 신선도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도교의 창시자인 황제와 노자가 우리 민족인 동이족이며, 도교의 주목적은 신선이 되는 데 있고 무위자연의 도를 내용으로 하는 <<황제음부경>>과 <<도덕경>>은 <<천부경>>등 3경과 단공무위, 좌정세계, 현모득도, 접화군생, 홍익인간하는 신선도에서 그 내용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황제 헌원(黃帝軒轅)은 지금의 백두산인 청구국 대풍산(大風山) 양지에 있는 삼청궁(三淸宮)에서 살던 배달겨례인 자부선인(紫府仙人)을 만나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받아 그것을 사용하여 마음을 씻고 돌아갔으며, 그것에 터잡아 <<황제음부경(黃帝陰府經)>>을 지었는데, 후인이 이를 신선음부설이라 부르기도 했다. 칠회제신의 역을 지은 자부선인에게는 헌원,공공, 창힐,대요 등도와서 신선도를 배웠다.
한편 노자(老子)는 단기 1815년(번한 조선 61대 번조선  32대 도을왕, 계미)에 노인(魯人) 공자(孔子)가 찾아와 예(禮)를 물은 적이 있다. 노자의 아버지는 한건(韓乾)이며, 그의 선조는 동이족인 풍인(風人)이고, 뒤에 서쪽으로 관문을 나가 내몽고를 경우하여 아유타(阿踰陀)에 이르러 백성을 교화했다. 노자는 본래 한(韓)씨 였으나, 동이족 자손이라 하여 음양오행설에 입각, 동방을 상징하는 나무(木)에 아들(子)로 이(李)씨로 창씨했으며, 이름을 이(耳)라 했다 한다.
생명주의의 종교인 도교는 생명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하여 천지의 기(氣)와 교류하고 궁극적으로 무위자연의 도(道)와 통하지 않으면 안되는 신선사상을 바탕으로 한 것인데 중국의 전국 시대에 연제(燕齊) 지방의 방사가 불사약을 구했던 삼신산은 한국에 있고, 최근 한국 도교학회장인 도광순(都珖淳) 씨는 한국이 신선사상 발상지라고 주장하고 있어 도교의 신선도 유래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도광순 씨는 풍류도의 근본사상이 신선사상이라고 하면서 도교의 중추 사상도 신선사상으로서 이는 중국의 사상이 아니라 한국의 고유한 원시사상이었으며 중국에 있어서 신선설이 문헌상에 등장하는 것은 <<한비자(韓非子)>>, <<초사(楚辭, 屈原作)>>, 전국책(戰國冊, 劉向作)>>, <<사기(史記, 司馬遷作)>, <<한서(漢書, 班固作)>>, <<포박자(抱朴子, 西晋의 葛洪作)>>등으로 이는 서기전 4세기 이전까지 상회하지는 않는데, 한국에 있어서는 이보다 훨씬이전인 상고원시대에 자생적인 사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썻다.
이러한 제반 사실로 보아 도교는 우리의 고유한 신선도에 그 근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3. 신선도와 유교
하늘(天)사상과 인의(仁義)사상을 중심으로 하는 유교는 복희씨에서 비록되어 교조인 공자(孔子)에 의해 확립되고 맹자(孟子)에 의해서 보관되었다.
유교도 우리 민족의 신선도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이는 주로 복희씨나 공자가 배달겨례인 동이족 출신이고, 그 사상의 원천이 <<천부경>>에서 비롯된 <<역경(易經)>> 등 4서 3경을 그 경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배달국시대에 우사관(雨師官)을 맡았던 왕자인 복희씨는 풍족으로서, <<천부경>>등에 터잡아 팔괘(八卦)를 중심으로 <<환역(桓易)>>을 만들었으며, <<환역>>에서 <<주역(周易)>>이 나왔고, 공자는 주역 계사편을 썼다.
배달동이겨례의 한 옛 역사에는 자부선인의 가르침에 유교, 도교가 갈라지지 않았으며, 유교(儒敎)의 유(儒)는 '선비유'자로서 선비는 선도를 행하는 무리라는 뜻으로 신선도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하였다.
<<예기(禮記)>>3편 단궁상(檀弓上)과 공자세가(孔子世家) 17 등에는 공자(단기1782~1854년)가 동이족인 은족으로서 곡부에서 태어났으며, 공자 스스로도 은족이라고 말했고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한다(<<論語>>子?편).  공자는 또<<중용 (中庸)>>에서 요순(堯舜)의 법을 이었을 뿐일라고 했는데 요임금과 순임금은 모두 동이인이었다. 공자는 요순의 법을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거쳐 조술 계승하였다.
한편 단군왕검은 도산회맹에서 부루태자를 파견하여 순임금에게 천부왕인(天符王印)인 금간옥첩(金簡玉牒)을 보내 오행치수법을 가르치고 치수 사업에 성공하게 하였다.
이상과 같이 유교는 한민족의 고대신앙과 경전에 바탕을 둔 신선도에서 근원하여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바탕으로 격물치치 성의정심 수신제가(格物致知  誠意正心 修身齊家)하여 선도수련을 한 다음 접화군생으로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하는 적극적 생활과 도덕정치를 발전 시켰던 것이다.

 


4. 신선도와 샤먼 일본신도
환단조선(桓檀朝鮮)을 거치면서 확립된 신선도는 단군조선이 쇠망하면서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현실적으로 백성들에게 필요한 기복치병의 일을 맡은 사람이 생겼는데, 이를 천군(天君), 신선(神仙), 신인(神人), 무사(巫師) 또는 무인(巫人)이라고 불렀다. 무인은 천지 사이에서 두 사람이 춤추어 합일하는 형상을 했는데, 후세 신라의 2대 남해왕은 차차웅(次次雄)이나 자충(慈充)이라 불러 스스로 무왕(巫王)이라 했으며, 천제를 지내는 존중자를 의미했는 바, '중'이란 말도 자충(慈充)을 반절(反切)한 말이라 한다(<<三國史記>>卷一南海次次雄).
그런데, 무인은 신접(神接)이나 신빙(神憑)으로 무아경에 나아가 정신적 고통을 제거하거나 병을 치유하고 복을 비는 등 기복치병의 일을 하였다. 무인들은 국중대회에서 천부인 3개인 거울,칼,북을 놓고 대회를 여는 것을 본따서 제사를 지내거나 굿을 하면서 3종 신기로는 거울, 칼, 방울을 쓰거나 관(冠)이나 신간(神竿)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러한 것을  샤먼(shaman, 沙門, 薩滿)이라 했으며, 이는 한국, 만주, 몽고, 시베리아, 중국, 일본 등 동북아시아 각지로 퍼져나가 습속화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선도에서 파생되어나간 무교(巫敎)나 신교(神敎)로서 선교와 함께 계속되다가, 고려 원종(元宗) 때 원(元)의 세력과 함께 들어온 라마교가 세력을 떨치면서 원이 신교를 사교라 하여 급압해 문이 닫기우면서 민간신앙으로 간신히 그 맥을 오늘까지 이어오고 있다.
지금 일본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어 여러 가지 종교가 있으나 국민의 8할 이상이 불자(佛子)이면서 신도(神道)를 믿는 신불습합(神佛習合)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현재 10만 개 정도의 신사(神社)나 신궁(神宮)이 있어 신도(神道)가 일본 고유의 종교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일본의 신(神)에는 국조신으로부터 부족신, 씨족신, 가족신 등 여러 가지가 있으나, 천신을 비롯하여 태반이 조몽, 야요이 문화를 전수할 때 부터 집중적으로 건너가거나 한반도와 관련있는 것이며, 나머지 신들은 일본 역사의 진행과 함께 생겨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신화가 다카마가하라(高天原)는 천신계(天神界)를 의미하고, 당감뻘(檀君原)과 상통하므로 단군문화권 신화라 할 수 있으며, 이에는 세 설(大陸高天原, 九州高天原, 大和高天原)이 있으나 원조는 대륙설이다. 다카마가하라의 천조대신 등 3신은 신선도의 삼신사상(天,地,人 합일)와 맥을 같이하며, 후일 가야, 백제지방 등을 통해 대륙신화가 많이 건너가 일본신은 거의 한국신이라할 수 있다.
일본 구주 구마모토(熊本)현에 있는 아소산(阿蘇山)은 아소다케로서 '아사달'에서 온 것이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일본어의 무당(巫人, 毗古)은 높이어 '미코토'라고 한다.
솟도 신전행사인 '굿'은 행운을 누리는 신전행사로서, 동북아 제어가 비슷하다(퉁구스어 Kutu, 만주어 Gutu <ghost 의미>, 몽골어 Qutug, duddj Good, 터키어 Qut, Gut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