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增東國輿地勝覽

당진현(唐津縣)--벌수지(伐首只)ㆍ부지(夫只)

吾心竹--오심죽-- 2009. 9. 16. 20:39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충청도(忠淸道)
당진현(唐津縣)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해안(海岸)까지 10리이고, 서쪽으로는 맹곶(孟串)까지 44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이었는데 혹은 부지군(夫只郡)이라고도 하였다.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벌수지(伐首只)ㆍ부지(夫只).
【성씨】 본현 장(張)ㆍ한(韓)ㆍ황보(皇甫)ㆍ임(任)ㆍ고(高). 신법(新法) 땅 이름으로 《주관육익(周官六翼)》에 나와 있으나, 그 지역은 상세하지 않다. 박(朴)ㆍ서(徐)ㆍ현(玄) 혜성(槥城).
【산천】 고산(高山) 현 서북쪽 22리에 있다. 이배산(利背山)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적현(赤峴) 현 남쪽 10리에 있다. 바다 현 북쪽 10리에 있다. 채원포(菜元浦) 현 서쪽 5리에 있다. 산도(蒜島) 현 북쪽 바다 가운데 있는데, 주위가 9리이다. 맹곶(孟串) 현 서쪽에 있는데, 주위가 32리이며, 옛날에는 목장이 있었다.
【토산】 백복령(白茯苓), 청옥석(靑玉石) 현 남쪽 5리인 관음동(觀音洞)에서 난다. 굴[石花]ㆍ숭어[秀魚]ㆍ홍어(洪魚)ㆍ자하(紫鰕)ㆍ조기[石首漁], 조개[蛤] 맹곶에서 난다. 부레[魚鰾]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꼬막[江瑤柱]ㆍ게[蟹]ㆍ붕어[鯽魚].
【성곽】 읍성(邑城) 정통(正統) 경신년에 쌓은 돌 성으로서, 주위가 1천 9백 54척에 높이는 8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관방】 당진포영(唐津浦營) 현 서쪽 34리에 있다. ○ 수군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갑술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는 1천 3백 40척이며, 높이는 9척이다. 난지도수(難知島戍) 현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주위는 34리이며, 당진포의 만호(萬戶)가 군병을 나누어서 지킨다.
【봉수】 고산 봉수(高山烽燧) 동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창택산(倉宅山)과 호응하고, 남쪽으로는 해미현(海美懸) 안국산(安國山)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권가정(勸稼亭) 객관 동쪽에 있다. 해망정(海望亭) 당진포에 있다.
【학교】 향교 현 동쪽 3리에 있다.
【역원】 홍세역(興世驛) 현 남쪽 9리에 있다.
【교량】 채원포교(菜元浦橋).
【불우】 고산사(高山寺) 고산에 있다. 능암사(能庵寺) 태산(泰山)에 있다. 성당사(聖堂寺)ㆍ사근사(沙斤寺) 모두 이배산에 있다. 영랑사(影浪寺) 영파산(影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현 북쪽에 있다.
【제영】 건렴운출수(褰簾雲出岫) 노숙동(盧叔仝)의 시에, “발을 걷으니 구름이 산봉우리에서 나오고, 휘장을 열어 젖히니 물이 하늘과 연했구나.” 하였다. 평강단롱노고저(平岡斷隴路高低) 이승소(李承召)의 시에, “편평한 산등성 끊어진 언덕엔 길도 높고 낮은데, 미끄러운 푸른 진흙 속으로 말굽이 푹푹 빠진다. 그늘졌던 골짜기에 눈이 녹으니 시냇물이 붓고, 양지쪽 언덕에 햇볕이 따뜻하게 쬐니 보리싹 가지런하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현내(縣內) 끝이 10리이다. 고산(高山) 서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이다. 동면(東面) 처음은 4리, 끝은 10리이다. 남면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대진(大眞)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5리이다. 내맹(內孟) 서북쪽으로 처음은 40리, 끝은 50리이다. 외맹(外孟)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35리이다.
【토산】 소금[鹽]ㆍ감[枾].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당진현

◎ 당진현(唐津縣)


본래 백제의 벌수지현(伐首只縣)인데, 신라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혜성군(槥城郡)의 영현(領縣)으로 하였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 임내에 붙이었다가,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면천(沔川)에 이르기 10리, 서쪽으로 해미(海美)에 이르기 8리, 남쪽으로 면천에 이르기 7리, 북쪽으로 박지포(朴只浦)에 이르기 29리이다.
호수가 2백 84호요, 인구가 1천 4백 89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명이요, 진군(鎭軍)이 8명이요, 선군이 1백 20명이다.
토성(土姓)이 2이니, 장(張)·한(韓)이요, 망성(亡姓)이 3이니, 황보(皇甫)·임(任)·고(高)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2천 6백 32결이요,【논이 4분의 3에 좀 모자란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메밀이다. 토공(土貢)은 지초·종이·여우가죽·수달피(水獺皮)·족제비털·어교(魚膠)이요, 토산(土産)은 낙지·굴이다. 어량(魚梁)이 1이요,【주로 숭어·홍어·큰 새우가 난다.】 염소(鹽所)가 35이다.
읍 석성(邑石城)【둘레가 2백 89보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가물면 마른다.】 역(驛)이 1이니, 흥세(興世)이다. 옛 목장(牧場)【현의 서쪽 맹곶이[孟串]에 있다. 둘레가 21리 되는데, 세종 9년에 물과 풀이 좋지 아니하므로, 〈말을〉 대산곶(大山串)에 옮겨 방목하였다.】 봉화가 1곳이니, 고산(高山)이다.【현의 북쪽에 있는데, 동쪽으로 면천(沔川) 장택(莊宅)에, 남쪽으로 해미(海美) 안국산(安國山)에 응한다.】
【원전】 5 집 634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