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增東國輿地勝覽

신증동국여지승람

吾心竹--오심죽-- 2008. 11. 21. 22:31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청산현]

 

 

 

동쪽으로는 경산도 상주(尙州) 경계까지 24리이고, 남쪽은 영동현(永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은 옥천군(玉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북쪽은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22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굴산현(屈山縣) : 또는 돌산(堗山)이라고도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이 기산(耆山)으로 고쳐서 삼년군(三年郡)의 영현(領縣)을 삼았으며,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상주(尙州)에 소속시켰었다.

 

공양왕(恭讓王)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더니, 뒤에 다시 상주로 회복시켰다. 본조 태종(太宗) 3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본도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황간(黃澗)에 합쳤고, 16년에 각각 복구시켜서 다시 현감(縣監)을 두었다.

 

속현 주성부곡(酒城部曲) : 고을 북쪽 90리에 있으니 넘어서 보은현(報恩縣) 북촌(北村)으로 들어갔다. 본래 상주에 소속되었는데, 고려 공양왕(恭讓王) 2년에 본현에서 감무를 두고 땅이 협소하다고 하여 분할하여 예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 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 굴산(屈山)ㆍ돌산(堗山), 기산(耆山).

 

산천 기성산(己城山) : 고을 서쪽 8리에 있는 진산(鎭山).
덕의산(德義山)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천둔산(千芚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도가산(道家山) :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문수산(文殊山)ㆍ도솔산(兜率山) : 모두 고을 서쪽 19리에 있다.

남천(南川) : 고을 남쪽 2리에 있으니,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에서 시작되었다.

토산 녹반(綠礬) : 보리(甫里) 석굴(石窟)에서 생산된다. 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꿀[蜂蜜]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성곽 기성산성(己城山城)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91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백운정(白雲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오곤원(吾昆院)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은천원(銀川院) : 고을 서쪽 19리에 있다.
주성원(酒城院) : 고을 북쪽 72리에 있다.

불우 청량사(淸涼寺) : 천둔산(千芚山)에 있다.
수미사(須彌寺) : 도가산(道家山)에 있다.
신암사(新巖寺)ㆍ문수사(文殊寺) : 모두 문수산(文殊山)에 있다.
망일암(忘日庵) : 덕의산(德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계은천소(界銀川所)ㆍ거이소(居尒所)ㆍ저점고성(猪岾古城) : 고을 서쪽 9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57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연혁 선조 26년에 황간(黃澗)과 합쳤다가 광해군 13년에 분할하였다.
주성(酒城) : 북쪽으로 처음은 70리 끝은 1백 리이다. 보은(報恩) 북계(北界)를 지나서 있다.
○ 은천소(銀川所) 거이소(居尒所) 서쪽으로 19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진천현]

 

 

동쪽은 충주(忠州) 경계까지 27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28리이며, 서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38리이고, 북쪽은 경기도(京畿道) 죽산현(竹山縣) 경계까지 3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3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금물노군(今勿奴郡) : 다른 이름은 만노군(萬弩郡)이요, 혹은 수지(首知), 또는 신지(新知)라고도 한다. 신라(新羅) 때에 흑양군(黑壤郡) : 흑(黑)은 혹 황(黃)이라고도 함. 이라 고쳤다.

 

고려 때 처음에는 강주(降州)라고 일컬었다가 뒤에 진주(鎭州)로 고쳤으며, 성종(成宗)이 자사(刺史)를 두었는데 목종(穆宗)이 폐지했다. 현종(顯宗)이 청주(淸州)에 소속시켰더니 고종(高宗)은 임연(林衍)의 고향이라 해서 창의현(彰義縣)으로 승격시키고 현령(縣令)을 두었었다.

 

원종(元宗)이 또 임연 때문에 지의녕군사(知義寧郡事)로 승격시켰더니 임연이 주벌을 당하자 낮추어서 진주 감무(鎭州監務)를 삼았고,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감(縣監)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京畿道)로 이속시켰더니 금상(今上) 초년에 복구했다.

 

군명 금물노(今勿奴)ㆍ만노(萬弩)ㆍ수지(首知)ㆍ신지(新知)ㆍ흑양(黑壤)ㆍ황양(黃壤)ㆍ강주(降州)ㆍ진주(鎭州)ㆍ창의(彰義)ㆍ의녕(義寧)ㆍ상산(常山).

 

산천 두타산(頭陁山) :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보련산(寶連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성산(城山) : 고을 서남쪽 7리에 있다.


길상산(吉祥山) : 또 하나의 이름은 태령산(胎靈山)이다.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보련산과 서로 연했다.

 

○ 신라 진평왕(眞平王) 때에 만노군 태수(萬弩郡 太守) 김서현(金舒玄)의 아내 만명(萬明)이 임신한지 20개월 만에 아들을 낳으니 이름이 유신(庾信)이다. 태(胎)를 이 산에 묻어 두었기 때문에 길상(吉祥)이라고 이름했다.

 

심곡산(深谷山) :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대문령(大門嶺) : 고을 서쪽 35리에 있으니 이곳이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다.
협탄령(脇呑嶺) : 고을 서쪽 협탄소(脇呑所)에 있으니, 직산현(稷山縣) 경계이다.
주천(注川) :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니, 청안현(淸安縣) 반탄(磻灘)으로 들어간다.
우천(牛川) : 고을 북쪽 4리에 있으니 주천(注川)으로 들어간다.

 

토산 꿀[蜜蜂]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사향(麝香)ㆍ영양(羚羊)ㆍ백화사(白花蛇).

봉수 소을산 봉수(所乙山烽燧) : 고을 남쪽 7리에 있으니,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거차대산(巨次大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충주(忠州) 망이산(望夷山)에 호응한다.

 

누정 연정(蓮亭) : 고을 남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역원 장양역(長陽驛) : 고을 북쪽 22리에 있다.
태랑역(台郞驛) : 고을 남쪽 14리에 있다. 옛 이름은 퇴량(堆糧)인데, 그 터는 지금 역(驛) 남쪽 8리에 있다.
시태원(時泰院) : 고을 안에 있다.
영제원(永濟院) :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태랑원(台郞院) : 태랑역(台郞驛) 곁에 있다.
광혜원(廣惠院) : 고을 북쪽 38리에 있는데 죽산현(竹山縣) 경계이다. 원(院) 곁에 정자가 있으니 이는 충청도의 신구관찰사(新舊觀
察使)가 인장을 교대하던 곳이다.

협탄원(脇呑院) : 고을 서쪽 34리에 있다.
불우 길상사(吉祥寺)ㆍ보적사(寶寂寺)ㆍ선적사(先寂寺)ㆍ편각사(片角寺) : 모두 태령산(胎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산(城山)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 길상산(吉詳山)에 있다. 신라 때에 사우(詞宇)를 세우고 봄ㆍ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를 지냈다.


고려에서도 그대로 시행하다가 본조(本祖) 태조(太祖) 8년에 이르러 비로소 중지시키고 본 고을 관원으로 하여금 제사지내게 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천향(金泉鄕) : 고을 북쪽 39리에 있다. 천(泉)은 세속에서는 진(眞)으로 부른다.
향림부곡(香林部曲) : 고을 부곡 23리에 있다.


협탄소(脇呑所) : 고을 서쪽 36리에 있다. 신지(新池)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니 도우천(導牛川)이 흘러 들어가고 그 가운데 세 섬이 있다.

 

도당산성(都堂山城)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8백 36척이다. 안에 우물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흘산성(伊訖山城) : 고을 서쪽 2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9백 8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대모산성(大母山城)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6백 70척이요,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 향림부곡(香林部曲)은 북쪽으로 23리, 협탄소(脇呑所)는 서북쪽으로 36리에 있다.
토산 은구어.

사원 백원서원(百源書院) : 선조 정유년에 세웠고 현종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지산서원(芝山書院) : 경종 임인년에 세웠고 계묘년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직산현]

 

  

동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郡) 경계까지 25리이며, 남쪽으로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0리이며,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21리이다. 서쪽으로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위례성(慰禮城)으로 백제(百濟)의 온조왕(溫祚王)이 졸본부여(卒本扶餘)로부터 남쪽으로 와서 나라를 열고, 여기에 도읍을 세웠다.

 

뒤에 고구려에서 이곳을 사산현(蛇山縣)으로 만들었고, 신라에서도 그대로 사산현(蛇山縣)으로 하고,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조 2년에 고을 사람 환자(宦者) 김연(金淵)이 명 나라에 들어가 황제를 모시고 있다가 사신이 되어 귀국하자, 이 고을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

 

태종(太宗) 원년에 다시 낮추어 감무를 두었고,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경기도로 옮겨서 소속시켰고, 금상(今上) 초년에 예전대로 회복시켰다.

 

군명 위례성(慰禮城). 사산(蛇山).

 

형승 북쪽으로는 한강(漢江)을 띄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에 웅거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기름진 들을 바라다 보며, 서쪽으로는 큰 바다에 막혀 있다. : 《삼국사(三國史)》 〈백제기(百濟記)〉 온조왕(溫祚王)의 옛터 : 이찬(李粢)의 제원루시(濟源樓詩)에, "온조 옛터에 한 누각 있으니, 여기 올라 사방으로 바라보면 뜻이 유유자적하네." 하였다.

 

산천 사산(蛇山) : 고을 서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


성거산(聖居山) : 고을 동쪽 21리에 있다. 고려 태조(太祖)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愁歇院)에 거동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기에,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드디어 성거산(聖居山)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서 제사지냈다.

 

양전산(良田山) : 고을 서쪽 22리에 있다.
휴류암(鵂鶹岩)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양(羊)과 말[馬], 인물의 형상과 같다.
망해산(望海山) : 경양현(慶陽縣)에 있다.
억적포(億賊浦) : 고을 서쪽 60리에 있다.
경양포(慶陽浦) : 경양현(慶陽縣)에 있는데, 해포(海浦)이다.


아주제천(牙州梯川) : 고을 북쪽 23리, 홍경평(弘慶坪)에 있다. 물 근원은 경기도 안성군(安城郡) 남쪽 청룡산(靑龍山)에서 나와서 진위현(振威縣) 동하포(冬河浦)로 흘러 들어갔다.

 

토산 소어(蘇魚)ㆍ수어(秀魚)ㆍ위어(葦魚)ㆍ진어(眞魚)ㆍ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 신증 황석수어(黃石首魚), 즉어(鯽魚).

 

봉수 망해산(望海山) 봉수 : 남쪽으로 아산현(牙山縣) 연암산(鷰巖山)에 호응하고, 북쪽으로 양성현(陽城縣) 괴태길곶(槐台吉串)에 호응한다.

 

누정 제원루(濟源樓) : 객관 동북쪽에 있다.

 

○ 서거정(徐居正)의 시(詩) 서문에, "사신으로 영남(嶺南)에 갈 때, 직산을 지나게 되었었다. 직산 객관 동북쪽에 한 누각이 있기에 올라가서 조금 쉬다가 주인에게 묻기를, '이 누각 이름이 무엇인가.' 하니, 주인은 알지 못하여 좌우 사람에게 물으니, 고을 사람이 '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객들은 제원이란 뜻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서거정이 말하기를, '이 고을은 백제의 옛 도읍이니, 이 누각을 제원(濟源)이라 한 것은 백제의 근원이 여기에서 시작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대개 백제의 시조 온조란 분은 본래 고구려 동명왕 주몽의 아들로서 난을 피하여 남쪽으로 도망했던 것인데, 역사서에 쓰기를 '온조가 부아악(負兒岳)에 올라가서 살 만한 곳을 살피다가 하남(河南)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했으니, 이곳을 세상에서 직산이라 한다.' 하였다.

 

서거정은 일찍이 생각하기를 부아악이란 여기서 2백리나 떨어진 곳이니 어찌 살 만한 곳을 잡을 수 있으리오. 또 이른바 하남(河南)이라는 하(河)는 어느 물을 말한 것인가.

 

서거정이 이곳을 지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나, 길이 급하여 한 번도 가보지는 못하고, 바라다만 보니, 지세가 편협해서 웅장한 기상이 없으니, 도읍을 세울 곳이 못 되어 맘속으로 깊이 의심하였다.

 

지난해에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를 편찬하면서 여러 가지 책을 상고해 보니, 직산이 백제의 첫 도읍이었던 것은 의심할 것이 없었다.

 

온조왕의 뒤에 직산으로부터 남한산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광주(廣州)이고, 또 북한산성으로 옮겼으니 바로 지금의 한도(漢都)이다. 뒤에 금강(錦江)으로 옮겼으니 지금의 공주요, 또 사비하(泗沘河)로 옮겼으니 지금의 부여다.

 

백제는 한(漢)나라 성제(成帝) 때로부터 당(唐)나라 고종(高宗)때를 거쳐 대개 5백여 년이 걸린 터로서 온조왕은 도망하여 파천(播遷)한 중에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설치해서 신라 고구려와 더불어 서로 솔밭처럼 버티어 삼국을 이루었으니, 호걸스럽고 영특하고 위대한 재주가 아니라면 그럴 수 있었겠는가.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성환역(成歡驛) : 현의 북쪽 8리에 있다.

 

○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屬驛)이 11이니, 신은(新恩)ㆍ김제(金蹄)ㆍ광정(廣程)ㆍ일신(日新)ㆍ경천(敬天)ㆍ평천(平天)ㆍ단평(丹平)ㆍ유구(維鳩)ㆍ김사(金沙)ㆍ장명(長命)ㆍ영춘(迎春)이다.

○ 찰방(察訪) 1명이다.

 

통수원(通水院) : 성환역(成歡驛) 옆에 있다.
말원(末院) :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수헐원(愁歇院) :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홍경원(弘慶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신증 신원(新院)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교량 아주천교(牙州川橋)ㆍ대천교(大川橋).

 

불우 구암사(龜菴寺)ㆍ만일사(萬日寺)ㆍ신암사(新菴寺) :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미라사(彌羅寺) : 양전산(良田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 고을 동북쪽 3리에 있다. 우리 세조(世祖) 11년에 비로소 세웠고, 봄과 가을에 향(香)과 축(祝)을 내려서 제사 지내게 했다.

 

성황사 : 고을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위례성 : 성거산에 있다.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6백 90척이요, 높이가 8척이며, 성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지금은 반쯤 무너져 있다.

 

○ 온조왕(溫祚王)은 고구려 동명왕의 셋째 아들이다. 동명왕이 훙(薨)하자 온조왕은 그 형 비류왕(沸流王)과 함께 유리왕(琉璃王)을 피해서 한수(漢水)를 건너 남쪽으로 와서, 비류왕은 미추홀(彌雛忽)에 도읍하고, 온조왕은 위례성에 도읍했다.

 

온조왕은 오간(烏干)ㆍ마려(馬黎) 등 10명의 신하로 보좌를 삼아 처음에 십제(十濟)라고 일컬었으니, 이때가 전한(前漢) 성제(成帝)의 홍가(鴻嘉) 3년이었다. 뒤에 자기가 여기 올 적에 백성들이 즐겨 추종하였다 하여 나라 이름을 백제라고 고쳤다.

 

천흥사(天興寺) : 성거산(聖居山)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고, 당 나라 때 세운 구리로 만든 기둥만 있다.


경양폐현(慶陽廢縣) : 고을 서쪽 44리에 있다. 본래 고려의 하양창(河陽倉)인데, 뒤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영(令)을 두고 염장관(鹽場官)을 겸임했으며, 본조 태조 5년에 와서 직산에 예속시켰다.

구실향(救實鄕) : 고을 동남쪽 13리에 있다.


사산성(蛇山城) : 흙으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9백 48척이요, 높이가 13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연혁 본래 백제의 사산(蛇山)이었다.

창고 읍창(邑倉)ㆍ해창(海倉) : 경양면(慶陽面)에 있다.
교량 아교(牙橋) : 북쪽으로 27리에 있는데, 진위(振威)의 큰길로 통한다.
맹간교(盲看橋) : 아교의 서쪽에 있는데, 평택(平澤)과 통한다.
토산 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영동현]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쪽으로는 같은 군(郡)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30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길동군(吉同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고려 성종(成宗) 14년에 승격시켜서 계주 자사(稽州刺史)를 삼았다가 목종(穆宗) 8년에 이를 폐지했고,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고, 6년에 현령(縣令)으로 승격시켰다가 뒤에 다시 감무(監務)로 회복시켰고, 얼마 안 되어 폐지했다.

 

본조 태종(太宗)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고, 경상도에서 본도(本道)로 소속시켰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길동(吉同)ㆍ계주(稽州)ㆍ영산(永山)ㆍ계산(稽山).

형승 산과 물이 맑고 기이하다. : 윤상(尹祥)이 금유(琴柔)에게 보낸 글에, "영동은 산수(山水)가 맑고 기이해서 시(詩) 짓는데 도움을 받을 만한 것이 진실로 많다." 했다.

 

산천 성황산(城隍山) : 고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박달산(朴達山) : 고을 북쪽 14리에 있다.
마니산(摩尼山) : 고을 서쪽 16리에 있다. 또 옥천군조(沃川郡條)에도 보였다.

남각산(南角山) :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어리산(於里山) :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기산(箕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침산(砧山) : 고을 남쪽 7리에 있다.

용연(龍淵) : 고을 서쪽 16리에 있으니, 마을 어구 두 언덕에 석벽(石壁)이 깎아 세운 듯하고, 2리쯤 들어가면 두 봉우리가 서로 버티고 서서 바위 산이 높고 가파르다.

 

가운데에 돌 웅덩이가 있어 못물의 하류(下流)가 여기에 모이는데, 물 깊이를 알 수가 없으니 세속에서는 이것을 기연(妓淵)이라고 한다. 물이 넘쳐 폭포가 되어 수백 척을 날라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는 깊은 못이 있다.

 

고당포(高唐浦)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송천(松川) : 박달산(朴達山) 아래에 있다.
심천(深川) :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고당포(高唐浦)로 흘러 들어간다.
동천(東川) : 성 동쪽에 있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초(紫草)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오미자(五味子)ㆍ꿀[蜂蜜].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2천 4백 10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성안에 우물이 둘 있다.

 

봉수 박달산 봉수(朴達山烽燧) : 동쪽으로는 황간현(黃澗縣) 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이산현(利山縣) 월이산(月伊山)에 호응한다.

 

정사 징청정(澄淸亭)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회동역(會同驛) : 고을 성 남쪽에 있다.
금련원(金連院)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회덕원(會德院)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심천원(深川院) : 심천(深川) 언덕에 있다.
사읍원(沙邑院) : 고을 동쪽 14리에 있다.
미전원(米田院) : 고을 북쪽 26리에 있다.
건행원(乾行院) : 고을 서쪽 10리에 있다.
교량 심천교(深川橋).

 

불우 마니사(摩尼寺) : 마니산(摩尼山)에 있다.
적화사(赤化寺)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박달라사(朴達羅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용화사(龍化寺) : 남각산(南角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안 서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서쪽에 있다.

 

고적 풍곡부곡(楓谷部曲)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앙암부곡(仰巖部曲)ㆍ율곡소(栗谷所) : 모두 고을 북쪽 20리에 있다.

낙화대(落花臺) : 성 서쪽에 있다. 세속에 전하기를, "계주(稽州) 때 사람들이 서로 전송하고 작별하던 곳으로 기생이 어느 남자와 헤어지기가 서러워서 떨어져 죽었기 때문에 후세 사람들이 이로 인하여 이름을 지었다." 한다.

 

마니산성(摩尼山城) : 또 옥천군(沃州郡)에 보인다.
방면 현동(縣東) : 처음은 1리, 끝은 18리이다.
남일(南一) : 처음은 5리, 끝은 30리이다.
남이(南二) : 처음은 20리, 끝은 50리이다.
서일(西一) : 처음은 15리, 끝은 30리이다.
서이(西二) : 처음은 5리, 끝은 40리이다.
북일(北一) : 처음은 10리, 끝은 40리이다.
북이(北二) : 처음은 20리, 끝은 35리이다.

 

진도 심천진(深川津) : 서쪽으로 15리인 송천(松川) 하류이며, 적등진(赤登津) 대로(大路)와 통하며, 수로(水路)에는 다리를 놓았다.

토산 감[柹]ㆍ신감채(幸甘菜)ㆍ누치[訥魚]ㆍ소가리[錦鱗魚].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보은현]

 

  

동쪽으로 경상도 상주(尙州) 경계까지 44리에 이르렀고, 남쪽으로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6리요, 청산현(靑山縣) 경계까지 25리에 이르렀고, 서쪽으로 회인현(懷仁縣) 경계까지 14리에 이르렀고, 북쪽으로 청주(淸州) 경계까지 28리에 이르렀으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新羅)의 삼년산군(三年山郡)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삼년(三年)이라고 고쳤으며, 고려 때에 보령(保齡) : 령(齡)은 뒤에 영(令)으로 변해졌음. 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상주(尙州)에 소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6년에 보령현(保寧縣)과 음(音)이 서로 비슷하다 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縣監)을 삼았다. 13년에 경상도에서 본도로 예속되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삼년산(三年山)ㆍ보령(保齡)ㆍ삼산(三山)ㆍ보령(保令).

산천 속리산(俗離山) :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봉우리 아홉이 뾰족하게 일어섰기 때문에 구봉산(九峯山)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는 속리악(俗離岳)이라고 일�고 중사(中祀)에 올렸다. 산마루에 문장대(文藏臺)가 있는데, 층이 쌓인 것이 천연으로 이루어져 높게 공중에 솟았고, 그 높이가 몇 길인지 알지 못한다.

 

그 넓이는 사람 3천 명이 앉을 만하고, 대(臺)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불어나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뉘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한 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이 되고,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 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김천(金遷)으로 들어 갔다.

 

○ 산 아래에 8교(橋)와 9요(遙)의 이름이 있는데, 산 양쪽 언덕이 빙빙 둘러 넓어져서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다 보면 멀고 멀어서 마치 땅이 끝인 것처럼 의심스럽다가 거기까지 가서 바라보면 또 멀고 멀어서 이렇게 아홉 번 구불어지다가 비로소 법주사(法住寺)에 닿기 때문에 이름을 9요(遙)라고 한다.

 

9요 속에 물 한 줄기가 돌고 돌아 굽이쳐 꺾기는데, 한 굽이마다 다리가 있어 그 다리가 도합 여덟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팔교(八橋)라고 했다. 맨 첫다리는 수정교(水精橋)이니, 다리 위에 비각(飛閣)이 있어 사람들이 이 각(閣) 속으로 다녔는데, 지금은 각은 무너지고 다리만 남아 있다.

 

함림산(含林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구봉산(九峯山) : 고을 동쪽 43리에 있다.
사산(蛇山)ㆍ와산(蛙山)ㆍ서산(鼠山) : 모두 고을 안에 있다.
금적산(金積山) : 고을 남쪽 25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 고을 북쪽 37리에 있으니 청주(淸州) 경계이다.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므로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오정산(烏頂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다.

웅현(熊峴)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차의현(車衣峴) : 고을 서쪽 15리에 있으니 회인현(懷仁縣)의 경계이다.
용천(龍川)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병풍연(屛風淵) : 속리산(俗離山) 아래 있으니 고을 동쪽으로 거리가 25리이다.

토산 송심(松蕈)ㆍ수철(水鐵)ㆍ웅현(熊峴)과 차의현에서 생산됨. 꿀[蜂蜜]ㆍ잣[海松子]ㆍ영양(羚羊)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ㆍ웅담(熊膽)ㆍ석심(石蕈).

 

누정 삼산루(三山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원암역(元巖驛)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고려 공민왕(恭愍王)이 복주(福州 안동을 말함)에서 청주(淸州)에 올 적에 이 역(驛)에서 머물렀다.

 

함림역(含林驛) : 함림산(含林山) 밑에 있다.
마분원(馬分院)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고을 동쪽 29리에 있다.
왕내원(王來院) : 구봉산(九峯山) 밑에 있으니 또한 공민왕(恭愍王)이 머물렀던 곳이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남원(南院)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병원(竝院) : 고을 서쪽 7리에 있다.
문라원(門羅院) : 고을 북쪽 13리에 있다.
추원(樞院) : 고을 북쪽 27리에 있다.

불우 속리사(俗離寺) : 속리산 서쪽에 있다.
법주사(法住寺) : 속리산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신라의 중 의신(義信)이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성덕왕(聖德王)이 중수했는데, 석조(石槽)와 석교(石橋)ㆍ석옹(石翁)ㆍ석확(石鑊)이 있으며, 절 안 산호전(珊瑚殿)에는 금신장육상(金身丈六像 불상)이 있으며, 문 앞에는 구리로 부어 만든 깃대[幢]가 있는데, 모양이 몹시 높고 그 한 쪽에 통화(統和) 24년에 세웠다고 새겨져 있다. 또 고려 밀직대언(密直代言) 이숙기(李叔琪)가 지은 중 자정(慈淨)의 비명(碑銘)이 있다.

복천사(福泉寺) : 법주사(法住寺) 동쪽 7리쯤 되는 곳에 있다. 절 동쪽에 샘물이 있어 돌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식수(食水)로 쓰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 : 속리산(俗離山) 마루에 있다. 그 신(神)이 매년 10월 인일(寅日)에 법주사에 내려오면, 산중 사람들이 풍류를 베풀고 신(神)을 맞이하여 제사지내는데 신(神)은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 한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구석(龜石) : 법주사 서쪽 봉우리에 구석(龜石)이 있는데, 천연으로 하늘이 만든 것 같아 그 등에 사람 50명이 앉을 만하고 그 머리는 우뚝하게 서쪽으로 들고 있다.

 

속세에서 전하기를, "중국(中國) 술사(術士)가 와서 보고 하는 말이, '중국의 재물과 비단이 날마다 동쪽으로 넘어오는 것을 나는 무슨 까닭인지 몰랐더니, 이제 알고 보니 이 물건이었구나.' 하고, 그 머리를 잘라 방술(方術)을 하였다." 한다.

 

마현박석(馬峴薄石)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고개 위에 얇은 돌이 3, 4리를 깔려 있는데, 세상에서 전하는 말로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속리산에 거둥했을 적에 닦은 어로(御路)다." 한다.

 

오정산성(烏頂山城) : 고을 동쪽 5리에 있으니, 바로 삼년산성(三年山城)인데, 쌓은지 3년만에 완성했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지은 것이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3천 6백 99척이요, 높이가 18척이며, 성안에 우물 다섯 개가 있는데, 지금은 반은 무너졌다.

 

○ 고려 태조 11년에 몸소 이 성을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드디어 청주(淸州)로 거둥했었는데, 산 아래 군장동(軍藏洞)이 있었으니, 세상에서 전하기를, "태조가 군사를 주둔시킨 곳이라." 한다.

 

함림산성(含林山城)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4백 88척이요, 높이가 6척이며, 성안에 큰 못이 있었는데 지금은 반쯤 무너졌다.

임언부곡(林堰部曲) : 혹은 임단(臨壇)이라고도 한다.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연혁 순조(純祖)조에 군수(郡守)로 올렸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방면 내북(內北) :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외북(外北) : 동북쪽 처음은 3리, 끝은 30리.
속리(俗離) : 동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5리.
왕래(王來)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마로(馬老) : 동남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5리.
삼승(三升) : 남쪽으로 처음은 17리, 끝은 30리.
탄부(炭釜) : 남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40리.
서니(西尼) : 서쪽으로 처음은 3리, 끝은 20리.
사각(思角) : 북쪽으로 처음은 4리, 끝은 20리.
토산 대추ㆍ감.

사원 상현서원(象賢書院) : 명종 기유년에 세웠고, 광해군 경술년에 사액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목천현]

 

동쪽은 청주(淸州)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은 직산현(稷山縣) 경계까지 19리이며, 서쪽은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7리이다. 남쪽은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대목악군(大木岳郡)인데, 신라에서 대록군(大麓郡)으로 고쳤고, 고려는 목주(木州)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2년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대목악(大木岳)ㆍ대록(大麓)ㆍ목주(木州)ㆍ신정(新定).

 

성씨본현 우(牛)ㆍ마(馬)ㆍ상(象)ㆍ돈(豚)ㆍ장(場)ㆍ심(沈)ㆍ신(申)ㆍ왕(王) : 세상에 전하는 말에,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운 뒤에 목주 사람이 여러 번 배반한 것을 미워하여 그 고을 사람들에게 모두 짐승 이름으로 성(性)을 내렸다. 뒤에 우(牛)는 우(于)로 고치고, 상(象)은 상(尙)으로 고치고, 돈(豚)은 돈(頓)으로 고치고 장(場)은 장(張)으로 고쳤다." 한다.

 

산천 작성산(鵲城山) : 고을 동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
흑성산(黑城山) : 고을 서쪽 11리에 있다.
추암산(鷲巖山) : 고을 서쪽 12리에 있다. 용혈(龍穴)이 있는데, 비를 비는 곳이다.
세성산(細城山) : 고을 남쪽 8리에 있다.
성거산(聖居山) : 고을 서북쪽 14리에 있으니, 직산현 조에 자세하다.
길상산(吉祥山)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였다.
산방천(山方川) : 고을 동쪽 20보(步)에 있다. 근원은 고을 북쪽 산방동(山方洞)에서 나와서 청주 진목탄(眞木灘)으로 흘러 들어갔다.

토산 철(鐵) : 산방천에서 생산된다. 자기(磁器)ㆍ꿀[蜂蜜]ㆍ대추[棗]ㆍ자초(紫草)ㆍ안식향(安息香).

 

누정 동작루(東作樓) : 선덕(宣德) 갑인년에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춘역(延春驛) : 고을 동쪽 3리에 있다.
탑원(塔院) : 고을 동쪽 23리에 있다.
황신원(黃信院)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신원(新院)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혹 남원(南院)이라고도 한다.
정항원(井項院) : 고을 서쪽 14리에 있다.

말원(末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신증 불지방원(佛地方院) : 고을 동쪽 35리에 있다.
교량 장명교(長命橋) : 산방천(山方川)에 있다.

 

불우 전곡사(轉谷寺)ㆍ보문사(普門寺) : 모두 성거산(聖居山)에 있다.
은석사(恩石寺) : 작성산(鵲城山)에 있다.
승천사(勝天寺) : 흑성산(黑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흑성산성(黑城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천 2백 90척이고 높이가 6척이며 가운데 못이 하나 있는데, 가물 때는 비를 빈다.

 

방면 읍내 끝이 10리.
근동(近東) : 동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일원(一遠)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이원(二遠) : 동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40리.
남면(南面) :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면(西面) : 처음은 7리, 끝은 20리.
세성(細城) : 남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성지 작성(鵲城)ㆍ세성(細城) : 모두 옛터가 있다.
토산 감ㆍ은구어(銀口魚).

 

사원 도동서원(道東書院) : 인조(仁祖) 기축년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 충청[2]-[청주목]

 

동쪽으로 청안현(淸安縣)의 경계까지 42리, 같은 현 시화역(時化驛)의 경계까지 44리, 남쪽은 문의현(文義縣)의 경계까지 20리, 회인현(懷仁縣)의 경계까지 24리, 보은현(報恩縣)의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전의현(全義縣)의 경계까지 54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까지 55리, 연기현(燕岐縣)의 경계까지 38리, 북쪽으로 진천현(鎭川縣)의 경계까지 32리,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상당현(上黨縣) : 낭비성(娘臂城)이라고도 하고,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신문왕(神文王)5년에 처음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다가,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시켰고, 고려 태조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 2년에 목(牧)을 설치하고,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전절군(全節軍)이라 불렀고, 중원도(中原道)에 소속되었다.

 

현종(顯宗) 3년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삼았다가 9년에 8목(牧)을 설치하여 다시 목으로 되었다.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르던 중, 세종 31년에 관찰사로써 목의 일을 겸하여 맡아 보게 하다가 이내 폐지하였고, 세조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청천현(靑川縣) : 고을 동쪽 60리에 있다. 옛날에는 살매현(薩買縣)이었고, 청천(靑川)이라고도 하였으며,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이 고을(청주(淸州))에 소속되었다.

 

주안향(周岸鄕) : 옛날에는 주애(朱崖)라고 했는데, 고을의 동남쪽 60리에 있다. 문의(文義)ㆍ회인(懷仁) 두 현을 지나야 그 땅에 도착한다.

 

진관 군(郡)이 둘이다 : 천안(天安)ㆍ옥천(沃川). 현(縣)이 열이다 :
직산(稷山)ㆍ목천(木川)ㆍ문의(文義)ㆍ회인(懷仁)ㆍ청안(淸安)ㆍ진천(鎭川)ㆍ보은(報恩)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명이다.

 

신증 연산군 을축년에 이 고을 출신의 환관(宦官) 이공신(李公臣)을 죽이고 이 고을을 폐지해서, 땅을 분할하여 이웃 고을에 예속시키고 이 도(道)를 고쳐 충공도(忠公道)로 하였다가 지금의 임금(중종) 초년에 모두 복구하였다.

 

군명 상당(上黨)ㆍ낭비성(娘臂城)ㆍ서원경(西原京)ㆍ청주(靑州)ㆍ낭성(娘城)ㆍ전절군(全節軍)

산천 당선산(唐羨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인데, 토성(土城) 터가 있다.
낙가산(洛迦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선도산(仙到山)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검단산(儉丹山) :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고을 동쪽 64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백제의 중 검단(儉丹)이 살던 곳이므로 그렇게 이름 지어졌다.


저산(猪山) : 고을 서쪽 30리에 있다.
용자산(龍子山) : 고을 서쪽 36리에 있는데, 또 전의현(全義縣) 편에 보인다.
미륵산(彌勒山) :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구라산(謳羅山) : 고을 동쪽 41리에 있다.

상령산(上嶺山) : 고을 동쪽 15리에 있다.
속리산(俗離山) : 주안향(周安鄕)에 있다.
기곡산(箕谷山) : 청천현에 있다.
파곶산(葩串山) : 청천현에 있다.

오근진(吳根津) :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곧 청안현(淸安縣)의 반탄(磻灘) 하류이다.
진목탄(眞木灘) : 고을 서쪽 35리에 있는데, 오근진의 하류이다. 연기현(燕岐縣)의 동진(東津)을 거쳐 공주(公州)에 이르러 금강으로 들어간다.

 

청천천(靑川川) : 청천현(靑川縣)에 있으며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청아현 좌귀산(坐龜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같은 현의 구자은현(仇自隱峴)에서 나오며, 또 하나는 보은현(報恩縣) 속리산에서 나와,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대교천(大橋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으며, 근원은 적현(赤峴)에서 나와 오근진으로 흘러 들어간다.
초수(椒水) : 고을 동쪽 39리에 있는데, 그 맛이 후추 같으면서 차고, 그 물에 목욕을 하면 병이 낫는다. 세종과 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행차한 일이 있다.

 

토산 푸른 옥[靑玉]: 구라산(謳羅山)에서 나온다.
푸른 옥돌[靑玉石]: 고을 동쪽 30리에 있는 소음리(召音里)에서 나온다.
녹반(綠礬) : 청천현(靑川縣)의 반석천(磻石遷)에서 나온다.

주토(朱土) : 주안향(周岸鄕)의 소흘곶리(所屹串里)에서 나온다.

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벌꿀[蜂蜜]ㆍ송이버섯[松蕈]ㆍ돌 버섯[石蕈]ㆍ지치[紫草]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ㆍ산무애뱀[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6백 48자이고, 높이가 8자인데, 그 안에 우물 13개가 있다.

 

봉수 거질대산(巨叱大山) 봉수 : 고을 동쪽 11리에 있다. 남쪽은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以山)에 호응하고, 북쪽은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한다.

 

누정 공북루(拱北樓) : 고을 북쪽 3리에 있다.

망선루(望僊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는데, 옛 이름은 취경루(聚景樓)이다. 지정(至正) 신축년(공민왕 10년)에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紅巾賊)을 피하여, 안동(安東)으로부터 이곳에 옮겨 와 수개월 동안 머물렀었다. 도적이 평정되자 문과와 감시(監試)의 합격자 방을 붙였었는데, 훗날 사람이 그 방을 써서 누각에 게시하였다.

 

신증 청연당(淸讌堂) : 동헌(東軒)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정통(正統) 갑자년(세종 26년) 봄, 세종이 초수(椒水)에 행차하였을 때 서적을 하사하였다.

 

역원 율봉역(栗峯驛) : 고을 북쪽 7리에 있으며, 본도에 소속된 16역을 찰방(察訪)한다. 장양(長楊)ㆍ태랑(台郞)ㆍ쌍수(雙樹)ㆍ저산(猪山)ㆍ시화(時化)ㆍ덕역(德驛)ㆍ증약(增若)ㆍ가화(嘉和)ㆍ토파(土坡)ㆍ순양(順陽)ㆍ화인(化仁)ㆍ회동(會同)ㆍ신흥(新興)ㆍ원암(原巖)ㆍ함림(含林)ㆍ전민(田民).
○ 찰방(察訪) 1명이다.

 

쌍수역(雙樹驛) : 고을 남쪽 16리에 있다.
저산역(猪山驛) : 저산 밑에 있다.
장명역(長命驛) : 고을 서쪽 56리에 있는데, 곧 장지역(長池驛)을 폐지한 자리에다 태조 5년에 새로 설치하였다.

율병원(栗餠院) : 고을 동쪽 44리에 있다.
판교원(板橋院) : 고을 동쪽 45리에 있다.
미원(米院)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덕산원(德山院)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정진원(情盡院) : 성(城)의 남쪽 2리에 있다.

포원(蒲院) : 고을 북쪽 37리에 있다.
북원(北院) : 고을 북쪽 7리에 있다.
장명원(長命院) : 장명역 동쪽 5리에 있다.
금원(金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조풍원(調風院) : 고을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작원(鵲院)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장원(場院) : 고을 서쪽 39리에 있다.
오근원(吳根院) : 오근(吳根) 부곡(部曲) 옛터에 있다.

신증 초정원(椒井院) : 초수(椒水) 곁에 있다.
교량 대교(大橋) : 바로 정진원(情盡院) 앞 다리이다.
신교(新橋) : 고을 서쪽 1리에 있다.
진목탄교(眞木灘橋) : 진목탄 위에 있다.

오근천교(吳根川橋) : 고을 북쪽 20리에 있는데, 겨울에는 다리를 설치하고, 여름에 큰 물이 나면 배를 이용한다.

 

불우 공림사(空林寺) : 속리산(俗離山)에 있다.
응천사(應天寺)ㆍ동림사(桐林寺)ㆍ송천사(松泉寺) : 모두 용자산(龍子山)에 있는데, 이색(李穡)이 지은 〈나옹진당기(懶翁眞堂記)〉가 있다.

 

동환희사(東歎喜寺)ㆍ보살사(菩薩寺)ㆍ화림사(化林寺)ㆍ영천사(靈泉寺) : 모두 낙가산(洛迦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당(城隍堂) : 당선산(唐羡山)에 있다.
여단(勵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상당성(古上堂城) : 율봉역(栗峯驛) 북쪽 산에 있다. 돌로 쌓았고 둘레가 7천 7백 73자, 성안에 우물 열 둘이 있었는데, 지금은 허물어졌다. 부모성(父母城) : 고을 서쪽 15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4백 27자이고, 성안에 큰 못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산성(山城) : 고을 동쪽 2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았고, 둘레는 5천 22자, 안에 우물 넷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저산성(猪山城) : 돌로 쌓은 것인데, 둘레는 5백 45자,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미륵산성(彌勒山城) : 돌로 쌓았고, 둘레는 5천 7백 79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구라산성(謳羅山城) : 돌로 쌓았고, 둘레는 2천 7백 90자, 안에 우물 둘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
상령산성(上嶺山城) : 돌로 쌓았고 터가 남아 있다. 안에 큰 우물이 있어 가뭄에 비를 빌면 감응이 있었다.

 

오근(吳根) 부곡 : 고을 북쪽 30리에 있다. 석곡(錫谷) 부곡 : 고을 서남쪽 25리에 있다.
배음소(拜音所) : 배음(背音)이라고도 한다.
추자소(楸子所) : 초자(椒子)라고도 한다.
덕평향(德平鄕) : 전의현(全義縣) 서쪽을 넘어서 들어간다.

조풍(調豐) 부곡(部曲) : 청안현(淸安縣)을 넘어서 들어간다.
신은소(新銀所)ㆍ한신(閒身) 부곡(部曲) : 모두 청천현(淸川縣)에 있다.
영모정(永慕亭) : 고을 북쪽 30리에 있었는데, 지금은 다만 그터만 남아 있다.

 

연혁 효종(孝宗) 7년에 서원현(西原縣)으로 강등하였다 : 노비(奴婢)가 주인을 살해했기 때문이다. 현종(顯宗) 8년에 복구하고 숙종(肅宗) 6년 현으로 내려갔다가 15년에 복구하였으며, 영종(英宗) 7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 무신역란(戊申逆亂) 때문이다.

 

16년에 복구하였다가 정종(正宗) 원년에 현으로 강등하였다. : 역녀(逆女) 효임(孝任)의 출생지이기 때문이다. 순조(純祖) 25년 현으로 강등하고 34년에 복구하였다가 철종(哲宗) 13년에 현으로 내렸다. : 김순성(金順性)이 역모를 하였기 때문이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영아 병영(兵營)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에 최영(崔瑩)의 건의로 도절제사영(都節制使營)을 이산현(伊山縣)에 설치하였는데 이조 태종(太宗) 2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고쳤고, 16년에 해미현(海美縣)으로 옮겼다가 효종(孝宗) 2년에 다시 이곳으로 옮겼다.

 

관원 충청도 병마절도사ㆍ중군(中軍) : 병마우후(兵馬虞侯)이다.
○ 상당산성(上黨山城)에 유진(留鎭)한다. 심약(審藥) : 각 1명이다.
○ 중영(中營) : 인조(仁祖) 때에 두었다.
○ 중영장(中營將) 1명이다.

○ 속읍(屬邑)은 청주ㆍ천안ㆍ문의ㆍ회인ㆍ청산ㆍ보은ㆍ황간(黃澗)ㆍ영동ㆍ청안(淸安)ㆍ진천ㆍ직산ㆍ목천(木川)이 있다.

창고 읍창(邑倉)ㆍ병영창(兵營倉) : 모두 읍내에 있다.
군향창(軍餉倉) : 상당(上黨)에 있다.
청천창(淸川倉) : 옛 읍에 있다.
신원창(薪院倉) : 서북쪽 20리에 있다.
금성창(金城倉) : 서북쪽 50리에 있다.
주안창(周岸倉) : 주안에 있다.
오근창(梧根倉) : 북쪽 20리에 있다. 오공창(吾公倉)은 잘못 부른 것이다.

교량 오근진교(梧根津橋)ㆍ작천교(鵲川橋) : 위의 다리는 장마철에 범람하면 배로 건넌다.

토산 철ㆍ감ㆍ대추ㆍ종이ㆍ칠ㆍ소가리[錦鱗魚]ㆍ은어.

묘사 만동묘(萬東廟) : 숙종 갑신년에 세웠는데 매년 3월 9일에 제사지낸다. 신종현황제(神宗顯皇帝) 묘ㆍ의종열황제(毅宗烈皇帝) 묘사원 화항서원(華巷書院) : 선조 경오년에 세우고 현종 경자년에 사액하였다.

 

○ 화양서원(華陽書院) : 숙종 병자년에 세우고 그 해에 사액하였다. 병신년에 왕이 친필로 사액하였다.
○ 표충사(表忠祠) : 영종 신해년에 세우고 병진년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 충청[2]-[천안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쪽으로 목천현(木川縣)과의 경계까지 13리, 남쪽으로 공주(公州)와의 경계까지 48리, 전의현(全義縣)과의 경계까지 33리, 서쪽으로 온양군(溫陽郡)과의 경계까지 11리, 아산현(牙山縣)과의 경계(境界)까지 16리, 북쪽으로 직산현(稷山縣)과의 경계까지 20리, 평택현(平澤縣)과의 경계까지 6리, 서울과의 거리가 2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동서도솔(東西?率)의 땅이었다. 고려 태조 13년에 동ㆍ서의 도솔을 합쳐서 천안부(天安府)로 하고 도독(都督)을 두었다. : 이첨(李詹)의 문집을 살펴보니, "왕씨의 시조가 예방(倪方)의 말을 듣고 탕정(湯井)ㆍ대목(大木)ㆍ사산(蛇山)의 땅을 나누어서 천안부를 설치하였다."고 했는데 옳은 듯하다.

 

성종 때에 환주도단련사(歡州都團鍊使)로 개칭하였고, 목종(穆宗) 때에 폐지하였다. 현종(顯宗) 때에 다시 천안이라 일컫고 지부사(知府事)를 삼았으며, 고종 43년에 몽고의 군사를 피하여 선장도(仙藏島)로 들어갔다가 뒤에 다시 옛땅으로 돌아왔다.

 

충선왕(忠宣王)때에 영주(寧州)로 개칭하였고, 공민왕 때에 다시 천안부로 하였다. 본조(本朝)에 와서는 태종 13년에 영산군(寧山郡)으로 고쳐다가 16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도솔(兜率)ㆍ환주(歡州)ㆍ임환(任歡)ㆍ영주(寧州)ㆍ영산(寧山)

 

산천 왕자산(王字山) : 고을 동북쪽 12리에 있으며, 진산(鎭山)이다.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곳에 머물러 두었을 때에 윤계방(尹繼芳)이 이곳을 다섯 용이 구슬을 다투는 형세라고 아뢰어 보루를 쌓고 군사를 조련하며, 왕자성(王字城)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왕자는 바로 그 산의 모양이다.

 

화산(華山) : 풍세현(豐歲縣)에 있으며, 고을에서 43리의 거리이다.
유려왕산(留麗王山) : 고을 동쪽 11리 목천현(木川縣)의 경계에 있다.
수조산(水潮山) : 고을 동남쪽 2리에 있다.
쌍령고개[雙嶺峴]: 고을 남쪽 40리이며, 공주(公州)와의 경계에 있다.
차현(車峴):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공주 조에 있다.

대천(大川) : 풍세현(豐歲縣) 북쪽에 있으며, 고을과의 거리는 9리이다.


토산 자기(磁器)ㆍ도기(陶器)ㆍ숭어[秀魚]ㆍ조기[石首魚]ㆍ지황(地黃)ㆍ백화사(白花蛇)ㆍ준치[眞魚]ㆍ게[蟹].

봉수 대학산(大鶴山) 봉수 : 고을 남쪽 18리에 있다. 남으로는 공주의 쌍령(雙嶺)에 호응하고, 북으로는 아산현(牙山縣)의 연암산(燕巖山)에 호응한다.

 

누정 선화루(宣化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역원 신은역(新恩驛)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금제역(金蹄驛) :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영풍원(寧豐院) :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
대평원(大平院) : 고을 남쪽 35리에 있다.
삼기원(三岐院) : 고을 남쪽 6리에 있다.
안정원(安定院) : 풍세현(豐歲縣)에 있다.
가을원(加乙院)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 고을 남쪽 2리에 있다.

대소원(大召院) : 고을 서쪽 8리에 있다.
풍천원(楓川院) : 고을 북쪽 6리에 있다.

 

불우 광덕사(廣德寺)ㆍ개천사(開天寺)ㆍ만복사(萬福寺)ㆍ대학사(大鶴寺) :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유려왕사(留麗王寺) : 고려 태조가 유숙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되었다.


성불사(成佛寺) : 모두 왕자산에 있다. 고려 태조가 말을 머물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점이라 하였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려 태조묘(太祖廟)ㆍ왕자성(王字城)ㆍ고정(鼓庭) : 모두 왕자산 밑에 있다. 지금은 옛터만 있다.


풍세현(豐歲縣) : 고을 남쪽 27리에 있으며, 자천(秭川)이라고도 한다. 본래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이었으며, 신라 시대에 순치(馴雉)로 개칭하여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이었던 것을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이 고을에 예속시켰다.


회고정(懷古亭) : 고을 서쪽에 있다.

모산부곡(毛山部曲) : 고을 북쪽 36리에 있다. 이곳을 지나서 아산현(牙山縣) 북촌(北村)에 들어간다


신종부곡(新宗部曲) : 고을 서쪽 80리에 있다. 지나서 예산현(禮山縣) 북촌에 들어간다.

덕흥부곡(德興部曲) : 고을 서쪽 69리에 있다. 지나서 신창현(新昌縣) 서촌(西村)에 들어간다.
돈의향(頓義鄕) : 고을 서쪽 62리에 있다. 지나서 아산현 서촌에 들어간다.

 

고읍 풍세(豐歲) : 서남쪽 25리에 있다. 본래는 백제의 감매현(甘買縣)인데 후에 제천(稊川)으로 고쳤고, 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에 순치(馴雉)로 고쳐 대록군(大麓郡)의 영현(領縣)으로 고쳤다가, 고려 태조 23년에 풍세로 고쳤으며 현종 9년에 예속되었다.

 

신종(新宗) : 본래는 신라의 부곡(部曲)인데, 예산(禮山)의 북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80리이다.


덕흥(德興) : 본래는 덕흥부곡이다. 신창(新昌)의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쪽으로 끝이 68리이다.

모산(毛山) : 본래는 모산부곡이다. 아산(牙山)의 동쪽 경계 너머에 있다. 서북쪽으로 끝이 40리이다.


돈의(頓義) : 본래는 돈의향(頓義鄕)이다. 아산 서쪽 경계 너머에 있다. 끝이 62리이다.
○ 신종ㆍ덕흥ㆍ모산ㆍ돈의는 모두 좁은 갯가[浦]의 들판이다.

 

성지 왕자산고성(王字山古城) : 군에서 20리 떨어져 있다. 고려 태조가 남쪽으로 견훤을 정벌할 때에 이곳에 주둔하여 보루(堡壘)를쌓아 관병(觀兵)하였다. 산 밑에 유적이 있다.


도리치고루(道理峙古壘) : 도리치에 있다. 고성(古城) : 북쪽 10리에 있는데, 흙으로 쌓은 유적이 있다.
창고 읍창ㆍ모산창(毛山倉) : 아산 시포(市浦)에 있다. 신종ㆍ덕흥ㆍ돈의에는 모두 창이 있다.
토산 감ㆍ대추ㆍ붕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 충청[2]-[옥천군]

 

동쪽으로 보은현(報恩縣)과의 경계까지 51리, 청산현(靑山縣)과의 경계까지 52리, 남쪽은 영동현(永同縣)과의 경계까지 46리, 전라도 무주현(茂朱縣)과의 경계까지 89리, 같은 도의 금산군(錦山郡)과의 경계까지 73리, 서쪽으로 회덕현(懷德縣)과의 경계까지 21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과의 경계까지 31리, 북쪽은 청주(淸州)와의 경계까지 37리, 서울과의 거리 3백 8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의 고시산군(古尸山郡)이었다. 경덕왕(景德王) 때에 관성군(管城郡)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현종(顯宗) 때에는 경산부(京山府)에 속하였으며, 인종(仁宗) 때에 현령(縣令)을 두었고, 명종 12년에 아전과 백성들이 현령인 홍언(洪彦)을 붙잡아 가두었기 때문에 유사(有司)가 임금께 아뢰어 관호(官號)를 없애버렸다가, 충선왕(忠宣王) 5년에 지옥주사(知沃州事)로 승격하여 경산부에 소속된 이산(利山)ㆍ안읍(安邑)ㆍ양산(陽山)의 3현을 나누어 속현으로 하였다.

 

본조에 와서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경상도로부터 본도로 소속시켰다.

 

속현 이산현(利山縣) : 고을 남쪽 30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소리산현(所利山縣)인데, 경덕왕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경산부에 소속시켰고, 명종 6년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뒤에 다시 예속하였다.

 

안읍현(安邑縣)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아동혜현(阿冬兮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안정(安貞)으로 개칭하고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으며,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 경산부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다시 예속되었다.

 

양산현(陽山縣) : 고을 남쪽 59리에 있다. 본래 신라의 조비천현(助比川縣)이었는데 경덕왕 때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관성군의 속현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에 경산부에 소속되었다. 명종 6년에 현령을 두었고, 뒤에 다시 예속되었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사람씩이다.
군명 고시산(古尸山)ㆍ관성(管城)ㆍ옥주(沃州).

형승 남기(南紀)의 주집(走集)이다 : 서거정(徐居正)의 〈적등루기(赤登樓記)〉에 있다. 산은 높고 물은 맑으며, 땅은 기름지고 물산은 풍부하다 : 남수문(南秀文)의 〈향교기〉에 있다.

 

산천 마성산(馬城山)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진산(鎭山)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지방 사람들이 말의 조상에 제사지냈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지륵산(智勒山) : 고을 남쪽 53리에 있다.
삼성산(三城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옛 성의 남은 터가 있다.
동림산(東林山) : 고을 남쪽 23리에 있다.
월이산(月伊山) : 이산현 남쪽 5리에 있다.
마니산(摩尼山) : 고을 남쪽 50리에 있다. 또 영동현(永同縣) 조에 있다.
환산(環山) : 고을 북쪽 16리에 있다.
서대산(西臺山) : 고을 남쪽 20리에 있다.

차탄(車灘) : 고을 동쪽 10리에 있다.


범나루[虎津]: 고을 남쪽 52리에 있다. 근원이 전라도 무주현 덕유산(德裕山)에서 나오고, 하류는 적등진(赤登津)이다.


적등진(赤登津) : 고을 남쪽 40리에 있다. 그 근원은 셋이 있는데, 하나는 전라도 덕유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경상도 중모현(中牟縣)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본도 보은현 속리산에서 나온다.

 

고을 동쪽을 지나서 차탄(車灘)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화인진(化仁津)이 되며, 회인현(懷仁縣)을 지나서 말흘탄(末訖灘)이 되고, 문의현에서는 형각진(荊角津)이 된다.

 

공주에 이르러서는 금강이 되고 곰나루[熊津]가 되며, 부여(扶餘)에 이르러서는 백마강이 되며, 임천(林川)ㆍ석성(石城) 두 고을 경계에 이르러 고성진(古城津)이 되고, 서천군(舒川郡)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화인진(化仁津) : 고을 동쪽 26리에 있다.

토산 무쇠[水鐵]: 안읍현(安邑縣) 지내동(枝內洞)에서 나온다. 지치[紫草]ㆍ인삼ㆍ사향(麝香)ㆍ벌꿀ㆍ안식향ㆍ지황ㆍ복령.

 

성곽 서산성(西山城)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천 1백 41자, 높이가 6자로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월이산(月伊山) 봉수 : 동으로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고, 북으로 환산(環山)에 호응한다.


환산(環山) 봉수 : 서쪽으로 회덕현 계족산(鷄足山)에 호응하고, 남으로 월이산에 호응한다.

누정 적등루(赤登樓) : 적등원 옆에 있다.

역원 증약역(增若驛) : 고을 서쪽 18리에 있다.
가화역(嘉和驛)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화인역(化仁驛) : 안읍현 남쪽 5리에 있다.
순양역(順陽驛) : 양(陽)은 옛날에는 양(良)자로 되었다.
양산현(陽山縣) 서쪽 4리에 있다.


토파역(土坡驛) : 파(坡)는 옛날에 현(垷)자로 되었다. 이산현 서쪽 2리에 있다.
화인원(化仁院) : 화인 나루의 기슭에 있다.
증약원(增若院) : 증약역 남쪽에 있다.
금천원(金川院) : 고을 남쪽 5리에 있다.
우현원(牛峴院) : 이산현 서쪽에 있다.
율현원(栗峴院) : 이산현 남쪽에 있다.
덕수원(德水院) : 양산현 남쪽에 있다.
적등원(赤登院) : 적등 나루 기슭에 있다.

불우 월암(月菴) : 삼성산(三城山)에 있다.
안양사(安養寺) : 환산(環山)에 있다.
감로사(甘露寺) : 증약역 북쪽에 있다.
황정암(黃丁菴) : 고을 북쪽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대성사(大聖寺) : 모두 동림산(東林山)에 있다.
영국사(寧國寺) : 지륵산(智勒山)에 있다. 고려 한문준(韓文俊)이 비문을 지은 중 원각(圓覺)의 비가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서쪽 산성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관성향(管城鄕)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이 고을의 옛터인데 지금은 식률평(植栗坪)이라 일컫는다.


산집암향(酸汁巖鄕)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은소촌(銀所村)이라고 일컫는다.
초집기소(酢汁器所) : 관성향에 있다.
어모소(於毛所) : 안읍현에 있다.
적현부곡(赤垷部曲) : 이 산현에 있다.
마니산성(摩尼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 4천 6백 31자, 높이 5자이다.

 

○ 산즙암향(酸汁巖鄕)은 남쪽으로 10리인데, 지금의 은소촌(銀所村)이고, 관성향(管城鄕)은 옛 읍터이며, 적현부곡(赤峴部曲)은 이산(利山)이고, 어모소(於毛所)는 안읍(安邑)이다.

 

진도 화인진(化仁津)ㆍ적등진(赤登津)ㆍ호탄진(虎灘津) : 위의 3도는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토산 감ㆍ대추ㆍ소가리ㆍ은어ㆍ가물치
사원 표충사(表忠祠) : 광해군 무신년에 세우고 기유년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5권 - 충청[2]-[문의현]

 

동쪽은 회인현(懷仁縣)과의 경계까지 11리. 남쪽은 회덕현(懷德縣)과의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연기현(燕岐縣)과의 경계까지 41리. 북쪽은 청주와의 경계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일모산군(一牟山郡)이었다. 신라에서는 연산군(燕山君)으로 개칭하였고, 고려 때에는 청주에 소속되었다.


명종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고종 46년에 위사공신(衛社功臣) 박희실(朴希實)의 고향이므로 현령(縣令)으로 승격시키고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었다. 충렬왕 때에 가림(嘉林)에 병합하였다가 이내 복구하였고, 본조에 와서도 그대로 계속하였다.

 

관원 현령ㆍ훈도 : 각각 한 사람씩. 군명 일모산(一牟山)ㆍ연산(燕山)

산천 양성산(壤城山) : 현 서쪽 4리에 있다.

누현(漏峴) : 현의 동쪽으로 9리 되는 구소리(九巢里)에 있다.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 굴[石穴]이 있는데,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아홉 용이 살던곳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구소라고 하였다."고 한다.

 

마물성산(摩物城山) : 현 동쪽 18리에 있다. 금방산(金方山)이라고도 한다.
구룡산(九龍山) : 현 서쪽 12리에 있다. 꼭대기에 노인성전(老人星殿)의 옛터가 있는데, 그 화상이 지금도 남아 있다. 또 회인현 조에도 보인다.

 

국사랑산(國師郞山) : 현 서쪽 28리에 있다.
월굴산(月窟山) :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옥녀봉(玉女峯)이라고도 한다.
저자산(猪子山) : 현 서쪽 5리에 있다.
옥쇄봉(玉碎峯) : 현 동쪽 1리에 있다.
대명산(大明山) : 현 서쪽 29리에 있다.

 

용혈(龍穴) : 현 동쪽 3리에 있다. 고을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들어가는데, 노끈을 매고 들어가 되돌아 나올 표시를 해야 한다. 깊이 들어가도 끝이 없고, 아래에 큰 물이 있어 불을 던지면 불꽃이 반딧불같이 되어서 꺼진다.

 

이원진(利遠津) : 현 남쪽 15리에 있다. 또 형각진(荊角津)이라고도 한다.
검단연(儉丹淵) : 현 서쪽 20리에 있다.
남천(南川) : 현 남쪽 2리에 있다. 금방산에서 나와 형각진으로 들어간다.

신증 초천(椒泉)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맛이 후추처럼 맵고 목욕을 하면 절로 병이 낫는다.

토산 벌꿀ㆍ지치[紫草]ㆍ복령ㆍ안식향ㆍ산무애뱀[白花蛇]ㆍ누치[訥魚].

봉수 소이산(所伊山) 봉수 : 현 동쪽 3리에 있다. 남으로 회덕현 계족산(鷄足山)에 호응하고, 북으로 청주 거질대산(巨叱大山)에 호응한다.

 

누정 사산루(四山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덕류역(德留驛) : 현 남쪽 3리에 있다.
다정원(茶亭院) : 현 동쪽 2리에 있다.
광제원(廣濟院) : 현 남쪽 7리에 있다.
형각원(荊角院) : 형각진 기슭에 있다.
달산원(達山院) : 현 서쪽 37리에 있다.

 

불우 석암사(石巖寺)ㆍ견불사(見佛寺) : 모두 구룡산에 있다.
묘고사(妙高寺) : 국사랑산에 있다.
유마사(維摩寺) : 대명산에 있다.
봉선암(奉先巖) : 괴방산(槐方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마물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양성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연산진(燕山鎭) : 고려 태조가 유금필(庾黔弼)로 정서대장군(征西大將軍)을 삼고 백제의 연산진을 공격하다가 장군 길환(吉奐)을 잃었다.

 

자인부곡(慈仁部曲) :현 동쪽 20리에 있다.
양성산성(壤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3천 7백 54자, 높이가 한 길이다. 안에 둥그런 못이 있는데 큰 못[大池]이라 부르며, 둘레가 1백 92자 8치이다. 사면에 모두 돌을 쌓아 섬돌이 되었다.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장마나 가뭄에도 물이 마르거나 넘치는 일이 없다고 한다.

 

연혁 선조(宣祖)조에 청주(淸州)에 합병시켰다 : 왜구의 노략질 때문이었다. 광해군 원년에 다시 세웠다.

고종 25년에 청주(淸州)에 예속시켰다가 20년에 현으로 복귀시켰으며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 : 끝이 5리,
동면(東面) : 처음은 5리, 끝은 20리.
남면(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북면(北面) : 처음은 5리, 끝은 30리.
서일도(西一道) : 처음은 7리, 끝은 30리.
서이도(西二道) : 처음은 20리, 끝은 20리.
서삼도(西三道) : 처음은 20리, 끝은 35리.

 

진도 형각진(荊角津) :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옥천(沃川)ㆍ회덕(懷德)으로 통한다.

토산 감ㆍ소가리ㆍ게.
사원 노봉서원(魯峯書院) : 광해군 을묘년에 세웠고, 효종 무술년에 사액하였다.
○ 금담서원(黔潭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웠고, 같은 해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부여현]

 

 

 동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24리,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37리,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소부리군(所夫里郡) : 사자(泗泚)라고도 한다. 백제의 성왕(聖王)이 웅천(熊川)으로부터 여기에 와서 도읍하고, 남부여(南扶餘)라 이름하였다.

 

의자왕(義慈王) 때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당 나라 군사가 돌아가고 나서는 신라에서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문무왕(文武王) 12년에 총관(摠管)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군(郡)으로 만들었으며,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소부리(所夫里)ㆍ남부여(南扶餘)ㆍ반월(半月)ㆍ사자(泗泚) : 자(泚)는 혹 비(沘)로도 쓴다.

 

산천 부소산(扶蘇山) : 현 북쪽 3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동쪽 작은 봉에 비스듬히 올라간 곳을 영월대(迎月臺)라 부르고, 서쪽 봉을 송월대(送月臺)라 이른다.

 

탄현(炭峴) :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
부산(浮山) : 고성진(古省津)의 북쪽 언덕에 있다.
망월산(望月山) : 현 동쪽 15리에 있으며, 또 석성현(石城縣) 편에도 나와 있다.
취령산(鷲靈山)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오산(烏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 : 현 서쪽 30리에 있다.

백마강(白馬江) : 현 서쪽 5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및 금강천(金剛川)이 공주의 금강(錦江)과 합류하여 이 강이 된 것인데, 임천군(林川郡) 경계로 들어가서는 고다진(古多津)이 된다.

 

고성진(古省津) : 바로 사자하(泗泚河)인데, 부소산 아래에 있다.

○ 백제의 의자왕 때 물고기가 죽어 물 위에 떴는데, 그 길이가 3장(丈)이나 되었다. 이를 먹은 자는 죽었고, 또 물빛이 붉게 변하여 핏빛과 같았다.

 

대왕포(大王浦) :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오산(烏山) 서쪽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 백제의 무왕(武王)이 매양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사자하(泗泚河) 북쪽 물가에서 놀면서, 술마시며 즐기고 술이 취해서는 반드시 거문고를 뜯으면서 스스로 노래하고, 시종하는 자들을 일어나 춤추게 하여, 당시 사람들이 이로 말미암아 '대왕포(大王浦)'라 일컬었다 한다.

 

광지포(光之浦) : 현 동북쪽 7리에 있다.
양단포(良丹浦) : 현 서쪽 7리에 있다. 나소현(羅所峴)에서 발원한다.
금강천(金剛川) : 현 북쪽 23리에 있다.

석탄(石灘) : 현 동쪽 12리에 있으며, 백마강의 상류이다.

 

학교 향교ː현 서쪽 1 리에 있다.
역원 은산역(恩山驛)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용전역(龍田驛) : 현 동쪽 8리에 있다.
고성원(古省院) : 고성진(古省津) 언덕에 있다.
복천원(福泉院) : 현 북쪽 30리에 있다.
금강원(金剛院) : 금강천(金剛川) 언덕에 있다.
교량 양단진교(良丹津橋)ㆍ금강천교(金剛川橋)

 

불우 숭각사(崇角寺)ㆍ도천사(道泉寺) : 모두 취령산(鷲靈山)에 있다.
경룡사(驚龍寺)ㆍ보각사(普覺寺)ㆍ망월사(望月寺) : 모두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호암사(虎巖寺) : 호암산(虎巖山) 천정대(天政臺) 아래에 있는데, 바위가 하나 있고, 그 위에 호랑이의 자취가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고란사(高蘭寺) :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망심사(望心寺) : 취령산에 있다.

사묘 사직당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부소산 마루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반월성(半月城) : 돌로 쌓았다. 주위가 1만 3천 6척이니 이것이 곧 옛 백제의 도성(都城)이다. 부소산을 쌓아 안고 두 머리가 백마강(白馬江)에 닿았는데, 그 형상이 반달같기 때문에 반월성이라 이름한 것이다. 지금의 아문(衙門)이 그 안에 있다.

 

증산성(甑山城) : 현 서쪽 44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2백 69척에 높이가 10척이다.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청산성(靑山城) : 현 동쪽 1리에 있는데 돌로 쌓았다. 둘레가 1천 8백 척에, 높이가 5척이며, 그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천정대(天政臺) : 현 북쪽 10리쯤에 있다. 강 북쪽에 절벽으로 된 봉우리에 큰 암석이 대(臺)같이 되어 강물을 굽어 보고 있다.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백제 때에 재상(宰相)을 임명하려 한면, 뽑힐 만한 자의 이름을 써서 함(函) 속에 넣고 봉한 다음, 바위 위에 놓았다가 조금 뒤에 이를 취하여 보고, 이름 위에 도장 흔적이 있는 것으로 재상을 삼았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했다 한다. 혹은 정사암(政事巖)이라고도 일컫는다.

 

조룡대(釣龍臺) : 호암(虎巖)으로부터 물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부소산(扶蘇山) 아래에 이르러, 한 괴석(怪石)이 강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돌 위에는 용(龍)이 발톱으로 할퀸 흔적이 있다.

 

낙화암(落花巖) : 현 북쪽 1리에 있다. 조룡대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전설에 의하면, 의자왕(義慈王)이 당 나라 군사에게 패하게 되자 궁녀(宮女)들이 달아나 나와 이 바위 위에 올라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으므로 낙화암이라 이름했다." 한다.

 

자온대(自溫臺) : 현 서쪽 5리에 있다. 낙화암에서 물을 따라 서쪽으로 내려가면 괴상한 바위가 물가에 걸터앉은 듯이 있는데, 10여명이 앉을 만하다.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백제의 왕이 이 바위에서 놀면 그 바위가 자연히 따뜻해졌기 때문에 그와 같이 이름했다." 한다.

 

의염참고기(義鹽倉古基) : 현 동쪽 10리에 있다. 옛날에 연해에 있는 각 고을의 소금을 수납하여 적곡(糴穀 양곡매입(糧穀買入))과 대납하였다." 한다.

 

석전부곡(石田部曲)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지금은 내복지촌(乃卜只村)이라 부른다.
풍지소(楓枝所) : 현 남쪽 10 리에 있다.

 

사원 부산서원(浮山書院) : 숙종(肅宗) 을해년에 세웠고, 같은 해 사액되었다.
○ 의열사(義烈祠) : 동쪽으로 10리에 있는데, 선조(宣祖) 병자년에 세웠고, 무인(戊寅)년에 사액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 충청[4]-[한산군]

 

 

동쪽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임파현(臨陂縣) 경계까지 14리, 같은 도의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서천군(舒川郡) 경계까지 19리이고, 북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5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마산현(馬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는 그대로 이름하여 가림군(嘉林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때에 감무(監務)를 두어 홍산(鴻山)을 겸임하게 하였다가, 뒤에 이를 지한주사(知韓州事
)로 승격시켰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따라 한산군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이다.
군명 마산(馬山)ㆍ마읍(馬邑)ㆍ한주(韓州)ㆍ아주(鵝州)

 

형승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곱다 : 이파(李坡)의 취읍정(翠挹亭) 기문에, "산이 기이하고 물이 고와 기린봉(麒鱗峯)은 북쪽에 진산(鎭山)이 되어 있고, 웅포(熊浦)는 그 남쪽을 감싸고 흐른다." 하였다.

 

산천 건지산(乾至山) : 군 서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취봉산(鷲峯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린산(麒麟山) : 군 서쪽 5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 : 군 북쪽 11리에 있다.
원산(圓山) : 와포(瓦浦)와 아포(芽浦) 사이에 있다.
계점산(鷄岾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기현(箕峴) : 군 서쪽 5리에 있다.
적현(赤峴) : 군 서쪽 6리에 있다.
곡현(曲峴) : 군 북쪽 25리에 있다.

상지포(上之浦) : 군 동쪽 18리에 있으니, 곧 임천군(林川郡) 남당진(南堂津)의 하류이다.
우포(杇浦) : 군 동쪽 11리에 있다. 월명산(月明山)에서 발원하여 진포(鎭浦)로 들어간다.
기포(岐浦) : 군 동쪽 12리에 있다.
와포(瓦浦) :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곧 바다의 별포(別浦)이다.

아포(芽浦) : 군 남쪽 20리에 있는데 서천군(舒川郡)과의 경계이며, 진포(鎭浦)의 하류이다. 또 곡현(曲峴)에서 나오는 물과 서천군 금부현(金富峴)과 비인현(庇仁縣) 모동(茅洞)의 물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진포(鎭浦) : 군 서쪽 21리에 있다. 임천군(林川郡) 조에 자세히 나와 있고, 또 서천군과 임피현(臨陂縣) 조에도 나와 있다.

 

토산 모시[苧]ㆍ옻칠[漆]ㆍ뱅어[白魚]ㆍ홍어(洪魚)ㆍ모래무지[鯊魚]ㆍ감[柹]ㆍ백화사[白花蛇]ㆍ대[竹]ㆍ조기[石首魚]ㆍ숭어[秀魚]ㆍ웅어[葦魚]ㆍ농어[鱸魚].

 

성곽 건지산성(乾至山城) : 흙으로 쌓았으며 주위가 3천 61척이다. 그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한 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4천 70척에 높이가 11척이며, 안에 도랑 하나와 우물 넷이 있다.

 

궁실 객관(客館) : 이곡(李穀)의 기문에, “지정(至正) 기축년 가을에 비가 몹시 와서 마산(馬山) 객관(客館)의 남쪽 낭사(廊舍)가 무너졌다. 비가 이미 개고 농사 또한 틈이 나니, 고을 사람들이 이를 수리하려고 하였다.

 

누정 취읍정(翠挹亭) : 군 남쪽에 있다. 이파(李坡)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서쪽 2리에 있다.

 

역원 신곡역(新谷驛) : 군 서쪽 11리에 있다.
간법암원(看法巖院) : 군 동쪽 14리에 있다.
숭정원(崇井院) : 군 서쪽 7리에 있다.
곡화원(曲火院) : 군 북쪽 25리에 있다.
길산원(吉山院) : 군 서쪽 13리에 있다.

신증교량 길산포 석교(吉山浦石橋) : 군 서쪽 22리에 있다.

불우 일광사(日光寺) : 취봉산(鷲峯山)에 있다.
숭정사(崇井寺) : 기린산(麒麟山)에 있다.
고석사(孤石寺) : 월명산(月明山)에 있다.
회사(回寺) : 건지산(乾至山) 북쪽에 있다.

 

영모암(永慕庵) : 건지산 북쪽에 있는데, 이색(李穡)의 화상(畫像)이 있다.

고적 안보향(安保鄕)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안곡소(鷃谷所) : 군 북쪽 13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 충청[4]-[임천군] 

 

동쪽으로는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29,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31리,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함열현(咸悅縣) 경계까지 16, 한산군(韓山郡) 경계까지 27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가림군(加林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가(加) 자를 가(嘉) 자로 고쳤으며, 고려 성종(成宗) 때에 임주 자사(林州刺史)를 두었고, 현종(顯宗) 때에 가림현(嘉林縣)으로 고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때에 원(元) 나라 평장사(平章事) 아패해(阿孛海)의 아내 조씨(趙氏)의 고향이라 하여 지림주사(知林州事)로 승격되었으며, 본조 태조(太祖) 3년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宦者) 진한룡(陳漢龍)의 청으로 부(府)로 승격되었다.

 

태종(太宗) 원년에 환원되었다가, 3년에 또 명 나라 조정으로 들어간 환자 주윤단(朱允端)의 청으로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다음 해에 환원되었으며,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만들었다. 관원 군수ㆍ훈도(訓導) : 각 1인.

 

군명 가림(加林)ㆍ가림(嘉林)ㆍ임주(林州).
산천 성흥산(聖興山) : 군 북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건지산(乾止山) : 군 서쪽 2리에 있다.
성주산(聖住山) : 군 서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주성산(周城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칠성산(七星山) : 군 남쪽 10리에 있다. 널찍한 평야에 일곱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형상이 칠성(七星)과 비슷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봉황산(鳳凰山) : 군 남쪽 10리에 있다.
구랑산(仇郞山) : 군 동쪽 25리에 있다.
화산(花山) : 군 남쪽 5리에 있다.
승달령(升達嶺) : 군 서쪽 10리에 있다.
유현(楡峴) : 군 북쪽 10리에 있다.
발현(發峴)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백암(白巖) : 군 동쪽 20리에 있다.
가림수(嘉林藪) : 군 동쪽 1리에 있다.

구랑포(仇郞浦) : 군 북쪽 15리에 있다. 홍산현(鴻山縣)에서 발원하여 장암강(場巖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장암강(場巖江) : 군 북쪽 15리에 있다.

고다진(古多津) : 군 동쪽 29리에 있는데, 수세(水勢)가 험악하다.
강경진(江景津)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은진현(恩津縣) 경계이다.
청포진(菁浦津) : 군 남쪽 22리에 있다.

남당진(南堂津) : 일명 용연포(龍淵浦)라고도 한다.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고다진(古多津)의 하류이다. 언덕 북쪽에 사인암(舍人巖)이 있다.

상지포진(上之浦津) : 군 남쪽 30리에 있다.


○ 이상 여섯 나루는 모두 공주 웅진(熊津)의 하류로서 한산군(韓山郡)으로 들어가서는 진포(鎭浦)가 된다.

 

토산 모시ㆍ질그릇[陶器]ㆍ백어(白魚)ㆍ웅어[葦魚]ㆍ어표(魚鰾)ㆍ조기[石首魚]ㆍ청어(靑魚)ㆍ게[蟹]ㆍ새우[蝦]ㆍ백화사(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지황(地黃).

 

성곽 성흥산성(聖興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천 7백 5척, 높이가 13척으로 험준하게 막혀 있으며, 성안에는 3개의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요산루(樂山樓) : 하륜(河崙)의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5리에 있다.

역원 영유역(靈楡驛) : 군 북쪽 15리에 있다.
남원(南院) : 군 남쪽 3리에 있다.
고다진원(古多津院) : 군 동쪽 25리에 있다.
신증교량 대교(大橋) : 군 남쪽 7리에 있다.
석교(石橋) : 구랑포(仇郞浦)에 있다.

 

불우 서부도암(西浮圖菴) : 성주산(聖住山)에 있다.
서자복사(西資福寺) : 건지산(乾止山)에 있으며, 절 남쪽에 석장(石檣)이 있다.
동자복사(東資福寺) : 성흥산에 있다. 절 남쪽에 석장이 있다.
용연사(龍淵寺) : 남당진(南堂津) 북쪽 기슭 위에 있다.
향림사(香林寺)ㆍ향덕사(香德寺) : 모두 천등산(天燈山)에 있다.
보광사(普光寺) : 성주산(聖住山)에 있는데, 차군루(此君樓)가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詞) : 산성(山城) 안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남당진사(南堂津祠) : 군 남쪽 14리에 있으니, 곧 진포(鎭浦)이다. 물이 깊고 출렁거려 무서우므로 장삿배들이 왕래할 때에는 반드시 노래하고 북 울리며 제사 지낸다.

 

고적 안량부곡(安良部曲) : 군 서쪽 18리에 있다.
고다지소(古多只所) : 군 북쪽 25리에 있다.
소라소(召羅所) : 군 남쪽 15리에 있다.
금암소(今巖所) : 군 남쪽 3리에 있다.

금물촌처(今勿村處)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현재 두모곡리(豆毛谷里)가 되어 있다.

진도 장암진(場巖津) : 동북쪽 16리에 있는데, 부여(扶餘)로 통한다.
고다진(古多津) : 동쪽 29리에 있는데, 조수가 빠르다. 서안(西岸)에 고암(鼓巖)이 있고 석성(石城)으로 통한다.

 

낭청진(浪淸津) : 동남쪽 30리에 있는데, 은진(恩津)ㆍ강경(江景) □리로 통한다.
청포진(菁浦津) : 동남쪽 22리에 있는데, 용안(龍安)으로 통한다.

남당진(南塘津) : 남쪽 15리에 있는데, 북안에는 사인암(舍人巖)과 용연사(龍淵寺)가 있다. 조수가 빠르며 함열(咸悅)로 통한다.

상지포진(上之浦津) : 서남쪽 30리에 있는데, 한산(韓山)으로 통한다.

토산 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감[柹]

사원 칠산서원(七山書院) : 숙종(肅宗) 정묘년(丁卯年)에 세웠고 정축년(丁丑年)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 충청[4]-[공주목]

 

동쪽으로는 회덕현계(懷德縣界)까지 69리, 진잠현계(鎭岑縣界)까지 64리이며, 남쪽으로는 부여현계(扶餘縣界)까지 49리, 이산현계(尼山縣界)까지 43리, 연산현계(連山縣界)까지 53리, 전라도 진산군계(珍山郡界)까지 80리이며, 서쪽으로는 대흥현계(大興縣界)까지 69리이며, 북쪽으로는 천안군계(天安郡界)까지 57리, 연기현계(燕岐縣界)까지 27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2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百濟)의 웅천(熊川)으로 문주왕(文周王)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이곳으로 옮겨 도읍하였다가 성왕(聖王)에 이르러 남부여(南扶餘)로 옮겼다.

 

당(唐) 나라 고종(高宗)이 소정방(蘇定方)을 보내어 신라(新羅) 김유신(金庾信)과 백제를 공격하여 멸하고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병을 주둔시켰는데, 당 나라 군사가 철수하자 신라가 그 땅을 모두 점유하였다.

 

신문왕(神文王)이 웅천주(熊川州)로 고쳐 도독(都督)을 두었고, 경덕왕(景德王)이 웅주(熊州)로 고쳤고, 고려(高麗) 태조(太祖) 2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성종(成宗) 2년에 목(牧)을 두었으며, 14년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안절군(安節軍)이라 하고 하남도(河南道)에 속하게 하였다.

 

현종(顯宗) 3년에 절도사를 폐하였고, 9년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고, 충혜왕(忠惠王)의 후(後) 2년에 원(元) 나라의 평장(平章) 활활치(闊闊赤)의 아내가 된 경화옹주(敬和翁主)의 외향이라 하여 목(牧)으로 승격시켰고, 본조(本朝)에서는 그대로 따르다가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속현 유성현(儒城縣) : 주(州) 동쪽 54리에 있다. 본래 백제(百濟)의 노사지현(奴斯只縣)으로, 노사지의 사(斯)는 어떤 데는 질(叱) 자로 쓰기도 한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인 비풍군(比豐郡 회덕(懷德)) 영현(領縣)으로 고쳤고, 고려(高麗) 때에 와서 본주에 속하게 되었으며, 본조에서는 그대로 따랐다.

 

진관 군(郡)이 2 : 임천(林川)ㆍ한산(韓山). 현(縣)이 10 : 전의(全義)ㆍ정산(定山)ㆍ은진(恩津)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연산(連山)ㆍ이산(尼山)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ㆍ연기(燕岐).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 1인.

군명 웅천(熊川)ㆍ웅진(熊津)ㆍ웅주(熊州)ㆍ회도(懷道)ㆍ안절군(安節軍).

 

풍속 남자는 쟁(爭)과 피리[笛]를 좋아하고, 여자는 가무(歌舞)를 좋아한다 :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당 나라 유인궤(劉仁軌)가 백제를 격파하고 웅진부성(熊津府城)에 주둔하자 당 나라 악공(樂工)들도 따라 왔다. 왕이 성천(星川)ㆍ구일(丘日) 등 38명에게 명하여 가서 당악(唐樂)을 배우게 한 뒤로는 고을 사람들이 음악을 잘하게 되었다.

 

형승 웅천(熊川)은 바다에 접해 있고, 계룡산(鷄龍山)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듯하네 : 이익박(李益朴)의 시(詩). 계룡산은 진산(鎭山)이요, 웅진(熊津)이 금대(襟帶)를 이루었다 : 서거정(徐居正)의 취원루기(聚遠樓記).

 

산천 계룡산 : 주 동쪽 40리에 있다. 또 연산현(連山縣) 조에도 나와 있다.
공산(公山) : 주 북쪽 2리에 있는 진산으로, 산의 모습이 공(公) 자 같기 때문에, 공산이라 이름 붙인 것이다.


무성산(茂城山) : 주 서쪽 32리에 있다.
월성산(月城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주미산(舟尾山) : 주 남쪽 5리에 있다.
정지산(艇止山) : 주 서북쪽 5리에 있다.
봉황산(鳳凰山) : 주 서쪽 3리에 았다.
여미산(余美山) : 주 서쪽 3리에 있다.
무악산(毋岳山)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유점산(油岾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탄현(炭峴) : 주 남쪽 30리에 있다.


고화점(古火岾)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자을매산(慈乙每山) : 주 서쪽 20리에 있다.
차유현(車踰峴) : 주 서쪽 35리에 있다.

어을온현(於乙溫峴) : 주 서쪽 35리에 있다.
적유현(狄踰峴) : 주 동쪽 27리에 있다.
판현(板峴) : 주 동남쪽 31리에 있다.
차현(車峴) : 주 서북쪽 57리에 있다.

 

○ 고려 태조(太祖)의 훈요(訓要)에 이르기를,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거꾸로 등을 지고 뻗어 있다." 한 것이바로 이것이다.

 

마현(馬峴)ㆍ화현(火峴) : 모두 주 동쪽 25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주 북쪽 84리에 있다. 온양(溫陽)과 경계이다.


능현(陵峴) : 주 동쪽 5리에 있다. 옛 능터가 있기 때문에 이름 붙인 것인데, 속설에 백제의 왕릉(王陵)이라 전해 온다.


사공암(沙工巖) : 주 남쪽 3리에 있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고을의 형세가 물 위에 가는 배와 같기 때문에 주미(舟尾)ㆍ정지(艇止)ㆍ사공(沙工)으로 이름 붙인 것이다." 한다.

 

동월명대(東月明臺) : 주 북쪽 1리에 있다.
서월명대(西月明臺) : 주 서쪽 2리에 있다.


잠연(潛淵) : 계룡산 아래 있다. 두 봉우리가 입을 벌리고 있는데, 그 가운데 큰 돌이 구멍을 이루어 마치 거북 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넓이는 30여 척 가량 되고 그 가운데에 물이 있는데, 깊이가 한이 없어 사람들이 나무와 돌로 메우면, 다음날 모두 못 아래로 나온다. 세간에서 이르기를, "항상 용이 구름기운을 타고 출입하며, 가물 때 비를 빌면 매양 영험이 있다." 한다.

 

금강(錦江) : 주 동쪽 5리, 즉 적등진(赤登津) 하류에 있다. 옥천군(沃川郡)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웅진도(熊津渡) : 주 서쪽 7리에 있으니, 적등진의 하류이다.

 

고려 현종(顯宗)이 거란(契丹)을 피하여 남쪽으로 달아나니, 절도사(節度使) 김은보(金殷甫) 등이 이 나루에서 맞았다. 현종이 시를 짓기를, "일찍이 남쪽 땅에 공주(公州)가 있다고 들었더니, 선경(仙境)이 영룡(玲瓏)하여 길이 있었구나. 이러한 마음 즐거운 곳에 이르러, 군신(群臣)과 함께 모여 일천 시름 놓아본다." 하였다.

 

송사(宋史)에 이르기를, "거란이 강조(康兆)를 잡아 죽이니, 왕순(王詢)이 평주(平州)로 달아났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음암진(陰巖津) : 북쪽 4리에 있으니, 곧 금강(錦江)의 하류이다.
지동진(紙洞津) : 주 동쪽 31리에 있으니, 적등진(赤登津)의 하류이다.
금상진(今尙津) : 남쪽 15리에 있으니, 금강의 하류이다.
삼기강(三岐江) : 독락정(獨樂亭) 기문(記文)에 자세히 나와 있다.

 

동천(銅川) : 주 서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熊津)의 하류로 들어간다.


일신북천(日新北川) : 주 북쪽 10리에 있다. 쌍령(雙嶺)에서 발원하여 남으로 흘러 웅진의 상류로 들어간다.


유포천(柳浦川) : 유성현(儒城縣) 동쪽 20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현(珍山縣) 경계에서 발원한다.

성천(省川) : 유성현 동쪽 7리에 있다. 연산(連山)과 진산(珍山) 두 고을 경계에서 발원하여 진잠현(鎭岭縣)에서 합류하여 지나, 유성현 동쪽에 이르러 성천이 된다.

 

대전천(大田川) : 유성현 동쪽 25리에 있다. 전라도 금산군(錦山郡) 경계에서 발원한다.
○ 이상의 세 냇물이 합류하여 회덕현(懷德縣)의 갑천(甲川)이 된다.

 

온천(溫泉) : 유성현 동쪽 3리에 있다. 우리 태조(太祖)가 계룡산에 대궐터를 잡으려고 할 때와 태종(太宗)이 임실현(任實縣)에 가서 강무(講武 사냥하는 군사 연습)할 때, 여기에서 목욕하였다.

 

토산 수철(水鐵)ㆍ동철(銅鐵) : 모두 마현(馬峴)에서 생산된다. 잣[海松子]ㆍ눌치[訥魚]ㆍ게[蟹].

성곽 공산성(公山城) : 주 북쪽 2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그 주위가 4천 8백 50척, 높이가 10척이며, 안에 우물 셋과 못[池] 하나가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월성산 봉수(月城山烽燧) : 남쪽은 이산현(尼山縣) 성산(城山)에 응하고, 북쪽은 고등산(高燈山)에 응한다.


고등산 봉수(高燈山烽燧) : 주 북쪽 30리에 있다. 남쪽은 월성산에 응하고, 북쪽은 쌍령(雙嶺)에 응한다.


쌍령 봉수(雙嶺烽燧) : 북쪽 50리에 있다. 남쪽은 고등산에 응하고, 북쪽은 천안군(天安郡) 대학산(大鶴山)에 응한다.

 

누정 취원루(聚遠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으니, 옛날의 관정정(觀政亭)이다. 정자가 연못 가운데 있었는데, 목사(牧使) 권체(權體)가 정자를 헐고 누(樓)로 만든 것을 뒤에 목사 홍석(洪錫)이 동헌(東軒) 동쪽에 옮겨 세웠다.

 

금강루(錦江樓) : 금강 남쪽 언덕에 있다.

망북루(望北樓) : 성 북문루. 원수대(元帥臺) : 주 서쪽 7리에 있다.
신증 응벽당(凝碧堂) : 취원루(聚遠樓) 곁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주 서쪽 3리에 있다. 서편에 옛능(陵)이 있는데, 속설에 전하기는 백제의 왕릉이라 하나, 어느 왕인지 알 수 없다.

 

역원 일신역(日新驛) : 주 북쪽 10리에 있다.
광정역(廣程驛) : 주 북쪽 45리에 있다.
경천역(敬天驛) : 주 남쪽 40리에 있다.
이인역(利仁驛) : 옛이름은 이도(利途)인데, 주 남쪽 25리에 있다.
단평역(丹平驛) : 주 서쪽 17리에 있다.
유구역(維鳩驛) : 신풍(新豐) 서쪽 8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주 동쪽 3리에 있으니, 이는 곧 옛날의 영춘정(迎春亭)이다.

금강원(錦江院) : 금강 북쪽 기슭에 있다.
환희원(歡喜院) : 주 남쪽 35리에 있다.
요광원(要光院) : 주 남쪽 30리에 있다.

모로원(毛老院) : 주 북쪽 26리에 있다.
궁원(弓院) : 주 북쪽 40리에 있다.
인제원(仁濟院) : 주 북쪽 52리에 있다.
웅진원(熊津院) : 웅진 언덕에 있다.


공서원(公西院) : 주 서쪽 31리에 있다.
반야원(般若院) : 주 서쪽 49리에 있다.
고관원(古館院) : 주 서쪽 67리에 있다.
공제원(公濟院) : 주 북쪽 28리에 있다.
내창원(內倉院) : 주 서쪽 25리에 있다.
광도원(廣道院) : 주 동쪽 57리에 있다.
불현원(佛峴院) : 주 동쪽 82리에 있다.


효가리원(孝家里院) : 주 동쪽 10리에 있다.

율사(栗寺)ㆍ중심사(中心寺)ㆍ동학사(東學寺)ㆍ상원사(上院寺) : 모두 계룡산에 있다.
반룡사(盤龍寺)ㆍ마곡사(麻谷寺) : 모두 무성산(茂城山)에 있다.


수원사(水原寺) : 월성산(月城山)에 있다.

동혈사(東穴寺) : 동혈산(東穴山)에 있다.
서혈사(西穴寺) :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주미사(舟尾寺) : 주미산(舟尾山)에 있다.
정지사(艇止寺) : 정지산(艇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공산(公山)에 있다.

 

계룡산사(鷄龍山祠) : 계룡산 남쪽에 있다. 신라 때에 오악(五岳)에 견주어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本朝)에서는 명산이라 하여 소사(小祀)로 정하여 매년 봄 가을에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웅진사(熊津祠) : 웅진 남쪽 기슭에 있다. 신라 때에는 서독(西瀆)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남독(南瀆)으로 삼고, 중사(中祀)로 정하여 봄 가을에 향과 축문을 내려서 제사하게 한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웅진은 옛날 백제국의 바다 어구에 있는데, 당(唐) 나라에서 이곳에 도독부(都督府)를 두었다." 하였다.

 

덕진폐현(德津廢縣) : 주 동쪽 5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소비포현(所比浦縣)이었는데, 신라 때 적오(赤烏)라 고쳐 비풍군(比豐郡)의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의 속현으로 삼았는데,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신풍폐현(新豐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래 백제의 벌음지현(伐音支縣)으로 혹은 무부현(武夫縣)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청음(淸音)이라 고쳐 웅주(熊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공주 속현으로 삼은 것을 본조에서 그대로 따랐다.

 

고유성(古儒城) : 유성현 동쪽 4리 광도원(廣道院) 옆에 있다.
객사(客舍)ㆍ향교ㆍ창고 등의 옛터가 아직도 남아 있다.

 

취리산(就利山) : 주 북쪽 6리에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唐) 나라 칙사 유인원(劉仁願), 웅진 도독 부여융(扶餘隆)과 함께 웅진 취리산에서 같이 맹세하였다.

 

독락정(獨樂亭) : 주 동쪽 30리 삼기촌(三岐村)에 있다.
정지방(亭止房) : 금강 가에 있다. 주와의 거리는 3리이다.

 

명학소(鳴鶴所) : 유성현(儒城縣) 동쪽 10리에 있다. 고려 명종(明宗) 6년에 명학소 사람 망이(亡伊)가 그 도당들을 모아서 본주(本州)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조정에서 이 명학소를 승격시켜 충순현(忠順縣)으로 만들고, 영(令)ㆍ위(尉)를 두어 안무(安撫)하게 하였더니, 그 뒤에 항복하였다가 다시 배반하므로 곧 폐해 버렸다.

 

청류부곡(淸流部曲)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지금은 구을촌(仇乙村)이라 칭한다.
양화부곡(良化部曲) : 주 동쪽 40리에 있다.
완부부곡(薍釜部曲) : 주 서쪽 40리에 있다. 완동(薍洞)이란 곳이 있는데, 아마 그곳인 듯하다.

이인부곡(里仁部曲) : 바로 이인역(利仁驛)이다.
미화부곡(美化部曲) : 유성현 동남쪽 28리에 있다.
귀지부곡(貴智部曲) : 주 남쪽 29리에 있다.

금단소(今丹所) : 주 남쪽 20리에 있다.
갑촌소(甲村所) : 유성현 북쪽 10리에 있다.


촌개소(村介所)ㆍ복수소(福水所) : 모두 유성현 동쪽 23리에 있다.
박산소(撲山所) : 덕진현(德津縣) 동쪽 5리에 있다.

금생소(金生所) : 덕진현 동쪽 7리에 있다.


고조산(古曹山) : 주 동쪽 50리에 있다. 속설에 옛날 현(縣)의 터라 하나, 어느 현인지 알 길이 없다.
이인산성(里仁山城) : 주 남쪽 2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5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양화산성(良化山城) : 주 남쪽 40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3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풍산성(新豐山城) : 신풍현 남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1척이다.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유성산성(儒城山城) : 유성현 동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백 80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덕진산성(德津山城) : 덕진현 남쪽 1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7백 67척이며, 그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공산현(公山縣)으로 강등시켰다 : 유탁(柳濯)의 변란 때문이었다. 이어 다시 승격시켰다. 현종(顯宗) 11년에현으로 강등시켰다가 숙종 5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영종(英宗) 4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13년에 다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다시 승격시켰다. 고종(高宗)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회인현]

 

 

동쪽으로는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32리이며, 서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주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미곡현(未谷縣)인데, 신라 때 매곡(昧谷)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君)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청주(淸州)에 부쳤다가 뒤에 회덕(懷德)의 겸임관(兼任官)으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에 따로 감무를 두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미곡(未谷)ㆍ매곡(昧谷).

 

산천 하마산(何麽山) : 고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호첨산(虎岾山) : 고을 남쪽 9리에 있다.
보리산(甫里山)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고을 서북쪽 25리에 있다.
마산(馬山) : 고을 서북쪽 10리에 있다.

 

피반대령(皮盤大嶺)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
차의현(車衣峴)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목감산(牧監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노성산(老城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매곡산(昧谷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묵현(墨峴) : 고을 서쪽 13리에 있다.
말흘탄(末訖灘) : 고을 남쪽 19리에 있으니 바로 화인진(化仁津) 하류이다.
웅암천(熊巖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이 구룡산에서 나와서 말흘탄(末訖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수철(水鐵) : 노성산(老城山)에서 생산된다.
수정석(水精石) : 고을 북쪽 마산(馬山)에서 난다.

 

봉밀(蜂蜜)ㆍ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복령(茯苓)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예대원(禮大院) :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공대원(孔大院)이라 하였다.
신원(新院)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탑원(塔院)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웅암사(熊巖寺) : 구룡산에 있다.
묘암사(妙巖寺) : 목감산(牧監山)에 있다.
마전사(麻田寺) : 노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매곡산(昧谷山)에 있으니, 봄ㆍ가을로 본관(本官)에서 제사지낸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호점산성(虎岾山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5천 1백 48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매곡산성(昧谷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52척이요, 높이가 8척이다.

 

인물고려 공직(龔直) :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신라 말년에 본읍(本邑) 장군이 되어 드디어 견훤(甄萱)을 섬기다가 견훤이 무도한 것을 보고 그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태조(太祖)에게 와서 있었다. 태조가 대상(大相)을 제수하고 벼슬이 좌승(左丞)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 했다.

 

공직달(龔直達) : 공직의 아들이다. 아우 금서(金舒)와 함께 후백제에 볼모로 잡혀 갔는데, 공직이 태조에게 투항하자 견훤이 죽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이산현]

 

 

동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쪽으로는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25리이고, 북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10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열야산현(熱也山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웅주(熊州)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공주(公州)에 예속시켰으며,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4년에 석성(石城)과 합쳐서 이성현(尼城縣)이라 일컬었다가, 16년에 다시 쪼개어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열야산(熱也山)ㆍ이성(尼城)ㆍ노산(魯山)

 

산천 노산(魯山) : 현 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으로, 일명(一名) 성산(城山)이라고도 한다.
접지산(接枝山) : 현 북쪽 3리에 있다.
고해랑(高海浪) : 현 남쪽 3리에 있다. 큰 언덕이 돌출해 나오고 길이 그 위로 났다.

장자지(長者池) : 현 남쪽 15리에 있다. 길이가 7백 60척이나 되며, 관개하는 면적이 매우 넓다.

대천(大川) : 현 동쪽 5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은진현 사진(私津)으로 들어간다.
석교천(石橋川) : 현 북쪽 6리에 있다. 현 북쪽 금굴이(金堀伊)에서 발원하여 석성현(石城縣) 수탕포(水湯浦)로 들어간다.

병정(竝井) : 현 남쪽 8리에 있으며, 두 우물이 서로 끼고 나오므로 병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토산 쇠 : 현 남쪽 천동(泉洞)에서 난다. 모시ㆍ게ㆍ붕어

성곽 노산성(魯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9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그 안에 네 우물이 있다.

봉수 성산 봉수(城山烽燧) : 남쪽으로는 은진현 황화산(皇華山)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공주의 월성산(月城山)에 응한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오덕원(吾德院) : 현 남쪽 10리에 있다.
궁정원(弓井院) : 현 북쪽 9리에 있다.

불우 탑사(塔寺) : 성산(城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저정소(猪井所) : 현 남쪽 14리에 있는데, 지금은 마본촌(馬本村)이라 부른다.
등수소(登水所) : 현 남쪽 13리에 있는데, 지금은 득윤촌(得尹村)이라 부른다.

명환본조 예승석(芮承錫)ㆍ경연(慶延)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은진현]

 

 

동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8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여산군(礪山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쪽으로는 석성현(石城縣) 경계까지 13리,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25리이고, 북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겅계까지 2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12리이다.

 

건치연혁 덕은군(德恩郡)은 본래 백제의 덕근군(德近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덕은(德殷)이라 고쳤고, 고려 초기에 다시 덕은군(德恩郡)으로 고쳤다.

 

시진현(市津縣)은 본래 백제의 가지내현(加知奈縣)이었는데 : 혹은 가을내(加乙乃)라 했고, 혹은 신포(薪浦)라고도 했다. 신라 경덕왕이 시진(市津)이라 고쳐 덕은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덕은ㆍ시진을 모두 공주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본조에 와서 태조 6년에 두 고을을 합하여 덕은감무(德恩監務)를 두었고, 세종 원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덕근(德近)ㆍ덕은(德殷)ㆍ덕은(德恩)ㆍ가지내(加知奈)ㆍ가을내(加乙乃)ㆍ신포(薪浦)ㆍ시진(市津)

 

산천 건지산(乾止山) : 현 북쪽 2리에 있으며, 옛 시진(市津)이 그 서쪽에 있다.
마야산(摩耶山) : 현 남쪽 2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황화산(皇華山) : 시진(市津)에 있는데, 지금 현의 치소(治所)와는 서쪽으로 10리 떨어져 있다. 산에 큰 돌이 펀펀하고 널찍하여 시진의 물을 굽어보고 있으니 이를 황화대[皇華臺]라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 백제 의자왕(義慈王)이 그 위에서 잔치하고 놀았다 한다.

 

강경산(江景山) : 현 서쪽 26리에 있다.
반야산(般若山) : 현 북쪽 7리에 있다.

불명산(佛明山) : 현 동쪽 33리에 있다. 산이 청산현(靑山縣) 도솔산(兜率山)으로부터 꾸불꾸불 서쪽으로 뻗어 본현에 와서는 세 산으로 나뉘었으니, 동쪽으로는 불명산, 남쪽으로는 마야산, 북쪽으로는 반야산이 있다.

 

채운산(彩雲山) : 채운향(彩雲鄕)에 있다. 현에서 25리 떨어져 있다.
증산포(甑山浦) : 현의 서쪽 21리에 있다. 전라도 여산군(礪山郡)에서 발원하여 강경포(江景浦)로 들어간다.

강경포(江景浦) : 강경산(江景山) 아래에 있는 해포(海浦)이다.
시진포(市津浦) : 시진현에 있는데 장삿배가 모이는 곳으로서 돛대가 연접하고 사람들이 잡답하게 왕래하며 물화를 매매하기 때문에 시진포라 이름하였다. 윤회(尹淮)가 말하기를, "옛날에 이루진(移樓津)이 있었다고 하는데, 혹시 이곳이 아닌가 한다." 하였다.

 

사진(私津) : 현의 북쪽 12리에 있으니, 곧 연산현(連山縣)의 포천(布川)과 초포(草浦)가 합류하는 곳이다.

율령천(栗嶺川) :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용계산(龍溪山)에서 발원하여 시진포로 들어간다.

토산 백옥석(白玉石) : 현의 남쪽 구좌곡(仇佐谷)에서 난다.
쇠 : 현 남쪽 작지(鵲旨)ㆍ웅전(熊田)ㆍ토관(吐串) 등지에서 난다.

대살[竹箭] : 채운산(彩雲山)에서 난다. 도루묵[銀口魚]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ㆍ뱅어[白魚]ㆍ웅어[葦魚]ㆍ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게[蟹]

 

신증 감 : 일찍 익는다. 속칭 조홍(早紅)이라 이른다.

성곽 황화산성(皇華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6백 50척, 높이가 6척이며, 그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봉수 강경산 봉수(江景山烽燧) : 남쪽으로는 전라도 용안현(龍安縣)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며, 북쪽으로는 황화산에 응한다.

황화산 봉수(皇華山烽燧) : 남쪽으로는 강경산(江景山)과 서로 응하고, 북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의 성산(城山)과 응한다.

 

정사 인풍정(引風亭)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원우 남항원(娚項院) : 현 남쪽 5리에 있다.

교량 조암교(潮巖橋) : 증산포(甑山浦)에 있다. 옛날에 돌다리가 있었는데 그곳 거주민들이 풍수[術者]의 말을 믿고 그 돌을 다 물에던져버려서, 지금은 나무로 다리를 놓고 다닌다. 아래에 바위가 있는데 조수(潮水)가 물러가면 보이기 때문에 이름하기를 조암(潮巖)이라 하였다.

 

신증 시진교(市津橋) : 시진포에 있다.
불우 관촉사(灌燭寺) : 반야산(般若山)에 있다.

 

돌미륵[石彌勒]이 있는데, 높이가 54척이나 된다. 세상에 전해오는 말에, 고려 광종(光宗) 때에 반야산 기슭에 큰 돌이 솟아 오른 것을 중 혜명(慧明)이 쪼아서 불상을 이루었다 한다.

 

쌍계사(雙溪寺) : 불명산에 있다. 금지사(金地寺)ㆍ보문사(普門寺)ㆍ염불사(念佛寺)ㆍ정토사(淨土寺) ; 모두 마야산(摩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덕은 고읍(古邑)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견훤(甄萱)의 묘 : 현 남쪽 12리 풍계촌(風界村)에 있다. 속칭 왕묘(王墓)라 한다.

고적 고덕은(古德恩) : 지금의 고을 아문으로부터 동남쪽 12리에 있다.
채운향(彩雲鄕) : 현 서쪽 25리에 있다.
고시진(古市津) : 황화산 서남쪽에 있다.

 

대정(大井) : 마야산 고성(古城) 아래 2리에 있는데, 세속에선 옛 백제의 어정(御井)이었다 한다. 그 땅 서쪽에는 쇠호산(衰虎山)이 있고, 동쪽에는 쇠룡관(衰龍串)이 있다.

 

마야산 고성(摩耶山古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5천 7백 10척이다. 그 안에 두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신증효자본조 강응정(姜應貞) : 중추부사(中樞府事) 강의(姜毅)의 아들이다. 나이 17세에 부모가 병에 걸리매, 항상 모시고 간호하면서 밤이 새도록 자지 않고 그 똥을 취하여 맛을 보며, 향불을 피워 놓고 하늘에 기도하여 자기 몸으로 대신하기를 청하였고, 부모가 죽자 여묘(廬墓)를 살면서 예절을 다하였으며, 소금과 소채를 먹지 않았다. 성종 즉위 초에 정문을 세웠다.

 

연혁 인조(仁祖) 24년에 은진(恩津)ㆍ이산(尼山)ㆍ연산(連山)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고 은진이라 불렀다 : 연산(連山)에 자세하다.

효종(孝宗) 7년에 다시 각각 그 전대로 하였다 : 옛 소재지[古治]는 동남쪽 12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연산현]

 

 

동쪽으로는 진잠현(鎭岑縣) 경계까지 22리,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35리이고, 남쪽으로는 같은 도 고산현(高山縣) 경계까지 19리,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북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3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황등야산군(黃等也山郡)이었는데, 신라 때에 황산군(黃山郡)으로 고쳤으며,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황등야산(黃等也山)ㆍ황산(黃山)

 

형승 산천이 웅장 수려하다 : 정이오(鄭以吾)의 향교 기문이다. 땅이 편평하며 넓은 지대가 적다 : 이첨(李詹)의 의창(義倉) 기문이다.

 

산천 계룡산(鷄龍山) : 현 북쪽 27리에 있다. 우리 태조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 이 계룡산 쪽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친히 와서 순시하고 길지(吉地)를 택하여 대략 그 기지를 정하고는 역사(役事)를 시작하였다가, 결국 조운(漕運)의 길이 멀다 하여 이를 그만두었는데, 지금까지도 그곳을 신도(新都)라 부르고 있으며, 당시 구획하였던 개울과 주춧돌 등이 아직 남아 있다.

 

황산(黃山) : 일명(一名) 천호산(天護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5리에 있다.


○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군사를 거느리고 당(唐) 나라 소정방(蘇定方)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니, 백제의 장군 계백(階伯)이 황산 벌판에서 신라의 군사를 방어할 적에, 3개의 병영을 설치하고 네 번 싸워 모두 이겼으나, 끝내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죽었다.

 

○ 견훤(甄萱)이 고려 태조를 따라 그의 아들 신검(神劍)을 토벌하니, 신검이 싸움에 패하여 항복하였다. 견훤이 번민하고 근심하다가 등창이 발생하여 수일 만에 황산 절에서 세상을 마쳤다.

 

도솔산(兜率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옛 성터가 남아있다.
마고평(馬皐坪)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북쪽으로는 이산(尼山)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은진(恩津)에 이른다.

 

포천(布川) : 현 서쪽 26리에 있다. 은진현 동쪽에서 발원하여 다시 은진현 사진(私津)으로 들어간다.
초포(草浦) : 현 서쪽 20리에 있다. 계룡산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거사리천(居士里川)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전라도 고산현(高山縣) 용계천(龍溪川)에서 발원하여 사진으로 들어간다.


잠연(潛淵) : 현 북쪽 15리에 있다. 공주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토산 모시ㆍ도루묵[銀口魚]ㆍ자연동(自然銅)ㆍ벌꿀ㆍ게ㆍ지황(地黃) 신증 녹반(綠礬) : 현 동쪽 20리 대야동(大也洞)에서 난다.

 

성곽 북산성(北山城) : 현 북쪽 3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7백 10척에 높이가 12척이다. 그 안에 우물 하나와 군창(軍倉)이 있는데, 지세가 험준하고 막혀 있다.

 

학교 향교 : 본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평천역(平川驛)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반야원(般若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초포원(草浦院) : 초포(草浦) 남쪽 언덕에 있다.


포천원(布川院) : 포천(布川) 동쪽 언덕에 있다. 일명(一名) 사제원(沙梯院)이라고도 한다.

불우 개태사(開泰寺) : 천호산(天護山)에 있는데, 고려 태조(太祖)의 진전(眞殿)이 있다.

불암사(佛菴寺)ㆍ상암사(上菴寺)ㆍ만운사(萬雲寺) : 모두 계룡산에 있다.


고운사(孤雲寺) : 천호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에 있디.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광조부곡(廣炤部曲) : 현 북쪽 13리에 있다. 지금은 두마촌(豆磨村)이라 부른다.
고의창(古義倉) : 현 서쪽 성내리(城內里)에 있다.

 

연혁 인조 24년에 은진(恩津)ㆍ이산(尼山)ㆍ연산(連山)을 합하여 한 현으로 만들고 은산(恩山)이라 불렀다 : 토적(土賊) 유탁(柳濯) 등의 모반 때문이었다.

 

○ 평천역(平川驛)의 서쪽에 소재지를 세웠으며, 효종 7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고종 32년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거사물(居斯勿) 본래 백제의 고사물인데 당이 고쳐 강등시켜서 지심(支潯)으로 만들어 주(州)의 영현으로 삼았다. 신라가 거사물을 쭉 세우다가 후에 내병하였다. ○ 지금 외성면(外城面)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연기현]

 

 

동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15리,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공주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전의현(全義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7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두잉지현(豆仍只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현종(顯宗) 때에 청주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이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다시 목주 감무(木州監務)로 겸임하게 하였다.

 

본조 태종 6년에 다시 나누어 감무를 두었다가 14년에 전의와 합쳐서 전기(全歧)라 고쳐 불렀고, 16년에 다시 나누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두잉지(豆仍只)ㆍ전기 (全歧)

풍속 백성들이 농사에 부지런히 힘쓰고, 남을 고자질하는 풍습이 없다.


산천 성산(城山) : 현 동쪽 1리에 있는 진산이다.
원수산(元帥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용수산(龍帥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정좌산(正左山) : 현 북쪽 15리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둔지산(屯智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동진(東津) : 현 동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진천현(鎭川縣) 두타산(頭陀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청주 적현(赤峴)에서 나오며, 하나는 전의현(全義縣)에서 나오는데, 남쪽으로 흘러서 공주의 금강으로 들어간다.

 

토산 자기(磁器)ㆍ질그릇[陶器]ㆍ게[蟹]

누정 연희루(燕喜樓)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금사역 (金沙驛) : 현 남쪽 5리에 있다.
송현원(根峴院) : 현 북쪽 21리에 있다.
신원(新院) : 현 동쪽 14리에 있다.
동지원(東津院) : 현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안선사(安禪寺)ㆍ흥천사(興泉寺) : 모두 오봉산(五峯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토흥부곡(土興部曲) : 현 북쪽 13리에 있다. 연천소(鷰川所)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2천 6백 71척인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진도 동진(東津) : 동쪽 5리에 있는데, 문의(文義)ㆍ회인(懷仁)으로 통한다.
나리진(羅里津) : 남쪽 20리에 있는데, 유성(儒城)ㆍ진잠(鎭岑)에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소가리[錦麟魚].
사원 봉암서원(鳳巖書院) : 효종 신묘년에 세웠고, 현종 을사년에 사액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석성현]

 

 

동쪽으로는 이산현(尼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은진현(恩津縣) 경계까지 24리이고, 서쪽으로는 임천군(林川郡) 경계까지 12리이고, 북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2리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진악산현(珍惡山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석산(石山)이라 고쳐 부여군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하였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이를 파하였다.

 

공민왕(恭愍王) 20년에 부여 감무로 이를 겸임하게 하였다가 공양왕(恭讓王) 2년에 다시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4년에 이산(尼山)과 병합하여 이성(尼城)으로 하였다가 15년에 고다진(古多津)이 왕래하는 요충지 (要衝地)라 해서 다시 이를 나누어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진악산(珍惡山)ㆍ석산(石山)

산천 망월산(望月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파진산(波鎭山) : 현 서쪽 4리에 있다.
불암산(佛巖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백야현(白也峴) : 현 서쪽 6리에 있다.
태조봉(太祖峯) : 현 북쪽 9리에 있다.
봉황암(鳳凰巖) : 현 동쪽 5리에 있다.

장군동(藏軍洞) : 현 북쪽 9리에 있다. 태조봉과 서로 마주 대하고 있으며, 가운데에 큰 길이 있다. 골 어귀가 곡절이 많고 좁아서 행인들이 볼 적에는 골이 없지 않은가 의심하나, 들어갈수록 그 안이 극히 광활하여 만여 명의 군병을 감출 만하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당 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칠 때에, 군병을 이곳에 감추었기 때문에 장군동이라 하였다." 한다.

 

관음포(觀音浦) : 현 남문(南門) 밖에 있다. 현 북쪽 정각동(正覺洞)에서 발원하여 저포(猪浦)로 들어간다.

창포(倉浦)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웅진(熊津)의 하류다.

 

수탕포(水湯浦) : 현 동쪽 7리에 있다. 이산현(尼山縣) 석교천(石橋川) 물이 증산천(甑山川)과 합류하여 이 수탕포가 되었다.

저포(猪浦) : 현 남쪽 2리에 있다. 수탕포와 관음포가 합류하여 이 저포가 되어 고다진(古多津)으로 들어간다.

 

증산천(甑山川) : 현 동쪽 6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부여현 원식동(元息洞)에서 나오고, 하나는 같은 고을의 북화동(北禾洞)에서 나와 수탕포로 들어간다.

 

고다진(古多津) : 현 서쪽 12리에 있다. 임천(林川) 편에 자세히 나와 있다.
연지(蓮池) : 객관(客館) 앞에 있다.

 

토산 모시ㆍ쇠 : 현 남쪽에 있는 삼산리(三山里)에서 난다.
웅어[葦魚]ㆍ조기[石首魚]ㆍ뱅어[白魚]ㆍ게[蟹]ㆍ숭어[秀魚]ㆍ붕어[鯽魚]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학교 향교 : 현 북쪽 1리에 있다.
원우 수탕원(水湯院) : 현 동쪽 13리에 있다.
임강원(臨江院) : 현 서쪽 12리에 있다.

교량 관음포 석교(觀音浦石橋)ㆍ수탕천 석교(水湯川石橋) : 현 동쪽 13리에 있다.
저포천 석교(猪浦川石橋) : 현 남쪽 5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正覺寺)ㆍ군각사(郡覺寺)ㆍ도솔암(兜率菴) : 모두 망월산(望月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7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 현 북쪽 5리에 있으며, 산 위에는 옛터가 있다.
진도 고다진(古多津) : 서쪽 10리에 있는데, 임천(林川)으로 통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덕산현]

 

 

동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3리이고, 남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북쪽으로는 면천군(沔川郡)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1리이다.

 

건치연혁 덕풍현(德豐縣)은 본래 백제의 금물현(今勿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금무(今武)라고 고쳐 이산군(伊山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에 와서 덕풍으로 고쳐 현종(顯宗) 때에는 운주(運州)에 붙였고, 명종(明宗) 때는 감무(監務)를 두었다.

 

이산현(伊山縣)은 본래 마시산군(馬尸山郡)이었는데, 신라에 와서 이산으로 고쳐 그대로 군(郡)으로 하였더니, 고려 현종 때에 홍주(洪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5년에 이산현의 인민과 형세가 피폐하였다 하여 드디어 두 개의 현을 합병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금물(今勿)ㆍ금무(今武)ㆍ덕풍(德豐)ㆍ이산(伊山)ㆍ마시산(馬尸山)

산천 가야산(伽倻山) : 현 서쪽 11리에 있다. 해미현(海美縣)에도 나와 있다.
팔봉산(八峯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상왕산(象王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또 해미현에도 나와 있다.

덕숭산(德崇山) : 현 남쪽 12리에 있다.
대덕산(大德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앵산(鶯山) : 현 북쪽 4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온천(溫泉) : 현 남쪽 5리에 있다.


용연(龍淵) : 현 서쪽 12리에 있다. 날이 가물 때에 비를 빌면 매양 감응이 있다고 한다.

화척탄(禾尺灘) : 현 동쪽 16리에 있으니, 곧 신교천(薪橋川)의 하류이다.

정포도(井浦渡) : 현 동쪽 30리에 있다. 또 신창현(新昌縣)에도 나와 있다.


신교천(薪橋川) : 현 동쪽 17리에 있다. 홍주(洪州) 금마천(金馬川)의 하류이며, 정포로 들어간다.
사읍교천(沙邑橋川) : 현 동쪽 17리에 있다.

 

토산 지치[紫草]ㆍ옻칠[漆]ㆍ붕어[鯽魚]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백화사(白花蛇).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6백 55척에 높이는 9척이며, 그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으니, 곧 이산영(伊山營)이다.

 

정사 관가정(觀稼亭) : 현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서쪽 5리에 있다.

역원 급천역(級泉驛) : 현 동쪽 8리에 있다.
봉용원(峯聳院) : 현 남쪽 5리에 있다.
교량 신교(薪橋)ㆍ사읍교(沙邑橋).

불우 가야사(伽倻寺) : 가야산에 있다.


수덕사(修德寺) : 덕숭산(德崇山)에 있는데 이 절에 취적(翠積)ㆍ불운(拂雲) 두 누각이 있다.

서림사(西林寺) : 상왕산에 있다.
용연사(龍淵寺) : 가야산에 있다.

수암사(水菴寺) : 팔봉산에 있다.
운암사(雲菴寺) : 상왕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쪽 3리에 있다.

 

가야갑사(伽倻岬祠) : 현 서쪽 3리에 있다. 신라 때에 이를 서진(西鎭)으로 삼아 중사(中祀)로 기록되어 있는데, 본조에서는 그 고을로 하여금 춘추로 제사하게 하였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이산진(伊山鎭) : 고려 최영(崔瑩)이 이산(伊山)에 도절제사(都節制使)의 병영을 두도록 건의한 것인데, 본조 태종 16년에, 태안군(泰安郡)에 거둥하여 명하여 이 진영을 해미현(海美縣)으로 옮기고, 이산의 구영(舊營)은 본현의 청사로 쓰도록 하였다.

 

옛 덕산[古德山] : 지금의 관청 북쪽 13리에 있다.
내박소(乃朴所) : 주 남쪽 18리에 있다.

신곡소(薪谷所) : 덕풍현(德豐縣)에 있다. 지금의 관청과 북쪽으로 17리 떨어진 곳이다.

 

연혁 본래 백제의 마시산(馬尸山)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에 이산군(伊山郡)으로 고쳤다. 영현(領縣)이 둘인데, 금무(今武)ㆍ목우(目牛)이다. 순조 28년에 군수(郡守)로 승격시켰다 :

 

고려 공민왕 때 최영(崔瑩)이 건의하여 이산현(伊山縣)에 도절제사(都節制使)를 세웠다. 본조 태조 2년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으로 고쳤다가 16년에 태안군(泰安郡)으로 행차하셨을 때 해미현(海美縣)으로 영을 옮기도록 명하였는데, 이산의 옛 영이 본현의 치소(治所)이기 때문이었다.

비방곶(非方串) : 동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인데 홍주(洪州)ㆍ합덕(合德)의 동쪽 건너에 있다.

진도 돈곶진(頓串津) : 동쪽으로 40리에 있는데, 신창(新昌)으로 통한다.
삽교(揷橋) : 동쪽으로 15리인 선화천(宣化川) 큰길에 있는데, 고려 때는 신교천(新橋川)이라 하였다.
토산 게ㆍ감ㆍ포초(浦草).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회덕현]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경계까지 30리이고, 서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9리이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29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2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우술군(雨述郡) : 일명 후천(杇淺)이라고도 한다. 인데, 신라 때에 비풍군(比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때에 공주에 예속시켰으며, 명종(明宗) 2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우술(雨述)ㆍ후천(杇淺)ㆍ비풍(比豐).


산천 계족산(鷄足山) : 현 동쪽 3리에 있는 진산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날이 가물 때 산이 울면 반드시 비가 온다고 한다.

식장산(食藏山) : 현 남쪽 23리에 있다.
질현(迭峴) : 현 동쪽 12리에 있다.
동자암현(童子菴峴) : 현 동쪽 8리에 있다.

이원진(利遠津) : 현 북쪽 29리에 있는데, 속칭 형각진(荊角津)이라 한다. 전라도 무주현(茂朱縣)에서 발원하는데 공주에 이르러 금강(錦江)이 되고, 서천군(舒川郡)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갑천(甲川) : 현 서쪽 5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신현(新峴)에서 발원하는데 본현 서쪽 3리에 이르러 선암천(船巖川)이 되고, 하류에서 형각진(荊角津)과 합류한다.

 

토산 지치[紫草]ㆍ누치[訥魚]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ㆍ석철(石鐵) : 현 북쪽 직동(稷洞)에서 난다. 안식향(安息香).

 

봉수 계족산 봉수(鷄足山烽燧) : 동쪽으로는 옥천군(沃川郡) 환산(環山)과 응하고, 북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소이산(所伊山)과 응한다.

누정 쌍청당(雙淸堂) : 현 동쪽 6리에 있는데, 본현 사람 송유(宋愉)의 별장이다.

 

학교 향교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역원 정민역(貞民驛) : 현 서쪽 10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일명 굴파원(屈坡院)이라고도 하는데, 현 동쪽 24리에 있으며, 남쪽에 누(樓)가 있다.

덕창원(德昌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총술원(寵述院) : 현 북쪽 11리에 있다.
형지원(荊止院) : 현 북쪽 27리에 있다.
여아원(餘兒院) : 현 남쪽 21리에 있다.

불우 법천사(法泉寺) : 계족산(鷄足山) 남쪽에 있다.
봉주사(鳳住寺) : 계족산 동북쪽에 있다.
선랑사(禪朗寺)ㆍ고산사(高山寺)ㆍ봉서사(鳳栖寺) : 모두 식장산(食藏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북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서봉부곡(西峯部曲) : 현 동쪽 21리에 있다.
흥인부곡(興仁部曲) : 현 동쪽 18리에 있다.
침이소(針伊所) : 현 북쪽 18리에 있다.

 

계족산성(鷄足山城) :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1천 9백 69척이고, 높이는 16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진도 형각진(荊角津) : 이원진(利遠津)이라고도 하는데, 북쪽 25리에 있다.
토산 소가리[錦鱗魚]ㆍ감

사원 숭현서원(崇賢書院) : 광해주 기유년에 중건하였고, 그해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진잠현]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11리이요,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0리이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진산군(珍山郡) 경계까지 22리이고, 서쪽으로는 연산현(連山縣) 경계까지 16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9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진현현(眞峴縣) : 진(眞)은 정(貞)으로 쓴 데도 있다. 신라에서 진령(鎭嶺)이라 고쳐 황산군(黃山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 태종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진현(眞峴)ㆍ진령(鎭嶺)ㆍ기성(杞城)ㆍ정현(貞峴)

산천 산장산(産長山) : 현 서쪽 5리에 있는 진산이다. 산허리에 바위 하나가 있는데, 세간에 전하기를, 계룡(鷄龍)이 이 바위에서 나왔다 하여 산장산이라고 이름붙였다 한다.

 

소족산(所足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압점산(押岾山) : 현 남쪽 22리에 있는데, 일명 안평산(安平山)이라고도 한다. 산 남쪽은 바로 전라도 진산군(珍山郡)과의 경계이다.


계룡산(鷄龍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삼기산(三岐山) : 현 남쪽 2리에 있다.
용두천(龍頭川) : 현 북쪽 3리에 있다.


증산천(甑山川) : 현 남쪽 15리에 있다. 전라도 진산군 대둔산(大芚山)에서 발원하여 차탄(車灘)으로 들어간다.

 

차탄(車灘) : 현 남쪽 9리에 있다.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공주 계룡산에서 나오고, 또 하나는 안평산(安平山)에서 나와 현 남쪽 5리에서 합류하여, 다시 북쪽으로 흘러 회덕현(懷德縣)의 갑천(甲川)으로 들어간다.

 

토산 벌꿀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백옥(白玉) : 삼기산에서 난다.
신증 녹반(綠礬) : 현 남쪽 16리 울어동(蔚於洞)에서 나온다.

 

학교 향교 : 현 남쪽 2리에 있다.
원우 오산원(吾山院) : 현 동쪽 9리에 있다.
지석원(支石院)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정각사(正覺寺) : 압점산(押岾山)에 있다.


회현사(晦見寺)ㆍ현수암(懸壽菴) : 모두 계룡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 5리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5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성지 밀암산고성(密巖山古城) : 옛터가 있으며 속칭 미림고성(美林古城)이라 한다.
토산 닥[楮]ㆍ칠(漆)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정산현]

 

 

동쪽으로는 공주(公州) 경계까지 21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주 경계까지 15리이고,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는 청양현(靑陽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는 백제의 열기현(悅己縣)이었는데 일명(一名) 두릉윤성(豆陵尹城)이라고 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열성(悅城)이라고쳐 부여군(扶餘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공주에 예속시켰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

 

군명 열기(悅己)ㆍ두릉윤성(豆陵尹城)ㆍ열성(悅城)

 

산천 대박곡산(大朴谷山) : 현 북쪽 7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계봉산(鷄鳳山) : 일명(一名) 백곡산(白谷山)이라고도 한다. 현 동쪽 9리에 있다.
칠갑산(七甲山) : 현 서쪽 16리에 있으며, 옛성의 터가 있는데 자비성(慈悲城)이라 부른다. 또 청양현(靑陽縣) 편에 나와 있다.


광생산(光生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 북쪽 10리에 있다.
호고개현(狐古介峴) : 현 동쪽 3리에있다.
장항현(獐項峴): 현 서쪽 5리에 있다.
직현(直峴)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금강천(金剛川) : 현 서쪽 32리에 있다. 청양현 어을항천(於乙項川)에서 발원하여 백마강(白馬江)으로 들어간다. 또 부여현(夫餘峴) 편에도 나와 있다.

 

왕지진(王之津) : 현 남쪽 26리에 있으니 곧 금강의 하류이다.

토산 모시ㆍ옻칠ㆍ쇠 : 현 남쪽 5리 지점 수한리(水閑里)에 대장간이 있다. 자기(磁器)ㆍ벌꿀ㆍ복령(茯苓)ㆍ지황(地黃)ㆍ백화사(白花蛇)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유양역(楡楊驛) : 현 동쪽 5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현 서쪽 12리에 있다.
장수원(長壽院) : 현 서쪽 27리에 있다.
수덕원(修德院) : 현 북쪽 7리에 있다.

 

불우 정혜사(淨慧寺) : 칠갑산(七甲山)에 있다.
계봉사(鷄鳳寺) : 계봉산(鷄鳳山)에 있다. 산의 이름은 계봉사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남포사(藍浦寺)ㆍ서련사(瑞蓮寺) : 모두 계봉산에 있다.
도림사(道林寺)ㆍ묘봉사(妙峯寺) : 모두 칠갑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산성(山城) 안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백곡리(白谷里) : 백곡산(白谷山) 아래에 있다. 늙은이들이 서로 전해오는 말에 본현의 옛터라고 한다.
계봉산성(鷄鳳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2백 척이다. 그 안에 한 우물이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연혁 현종(顯宗) 5년에 청양(靑陽)을 합쳤다가 다시 나누었다 :
윤성(尹城) 때의 옛터가 난봉산(難鳳山) 아래 백곡리(白谷里)에 있다.

성지 고성(古城) : 칠갑산(七甲山)에 있는데 본래는 도솔성(兜率城)ㆍ자비성(慈悲城)이었다.
진도 왕지진(王之津) : 남쪽 26리에 있는데 부여(扶餘)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게[蟹]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 충청[5]-[전의현]

동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는 연기현(燕岐縣) 경계까지 18리이고, 서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11리이고, 북쪽으로는 목천현(木川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4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구지현(仇知縣)이었는데, 신라에서 금지(金池) : 지(池) 자는 지(地) 자로 쓴 데도 있다. 로 고쳐서 대록군(大麓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던 것을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청주에 예속시켰다.

 

본조(本朝)에서는 태조(太祖)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太宗) 13년에 예(例)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하였으며, 다음 해에 연기현을 합하여 전기현(全岐縣)으로 하였다가 16년에 각각 환원하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인.

군명 구지(仇知)ㆍ금지(金池)ㆍ전기(全岐)

 

산천 증산(甑山) : 현 서북쪽 5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율현(栗峴) : 현 동쪽 14리에 있다.

고산(高山) : 현 동쪽 8리에 있다.
용자산(龍子山) : 현 동쪽 16리에 있다.


운주산(雲住山) : 현 남쪽 7리에 있는데 증산(甑山), 고산(高山)과 더불어 솥발 모양으로 솟아 있다.

금성산(金城山) : 현 남쪽 8리에 있다. 돌로 쌓은 옛성이 있다.

 

고라원천(高羅院川) : 현 동쪽 13리에 있는데, 율현에서 발원한다.


생졸천(生拙川) : 현 서남쪽 5리에 있다. 공주 경계인 망현(芒峴)에서 발원하여 현 남쪽에 이르러서는 옛 이성(李城)의 조그만 시냇물과 합류하고, 호암(狐巖)을 지나 또 대부천(大部川)과 합류하는데, 현은 두 냇물 사이에 있다.

 

대부천(大部川) : 대부향(大部鄕)에 있다. 구리옹 고개(仇里瓮古介)에서 발원하여 고산의 작은 냇물과 합류하고, 또 호암을 지나서 생졸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쇠[鐵] : 현 동쪽 서방리(西房里)에서 난다. 자기(磁器)ㆍ지치[紫草]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누정 풍화루(風化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고라원(高羅院) : 현 동쪽 16리에 있는데, 경원(鯨院)이라고도 부른다.
송현원(松峴院) : 현 남쪽 8리에 있다.

불우 원적사(元寂寺) : 용자산(龍子山)에 있다.
고정암(高正菴) : 고산에 있다.
연수암(延壽菴) : 현 남쪽에 있다.
운점사(雲岾寺) : 운주산(雲住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동북쪽 1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이성(李城) : 운주산 북쪽 봉우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세상에서 전하기를, 옛날 이도(李棹)가 살던 곳이라 한다. 성안이 넓어 주위가 1천 1백 84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대부향(大部鄕) : 현 북쪽 6리에 있다.
고산산성(高山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5천 1백 32척이다. 안에 세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금이성(金伊城) : 운주산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5백 28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증산산성(甑山山城) : 현 서북쪽 5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9백 32척이다. 안에 한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가을정처(加乙井處) : 현 북쪽 5리에 있다.
포곡역(蒲谷驛) : 옛터가 현 동쪽 18리에 있다.

성지 증산고성(甑山古城) : 서북쪽 5리에 있는데 둘레가 32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고산고성(高山古城) : 동쪽 8리에 있는데 둘레가 5천 1백 32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운주산고성(雲住山古城) : 동남쪽 8리에 있는데 둘레가 1천 5백 28척이고, 우물이 하나 있다.
○ 속칭 금성산성(金城山城)이라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청양현]

동쪽으로는 정산현(定山縣) 경계까지 21리이고, 남쪽으로는 부여현(扶餘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1리이고, 북쪽으로는 대흥현(大興縣) 경계까지 2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6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고량부리현(古良夫里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청무(靑武)로 고쳐 임성군(任城郡)의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초기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현종(顯宗) 9년에는 천안부(天安府)에 붙였다가 뒤에 다시 홍주(洪州)로 이속시켰던 것을, 본조에서는 태조 4년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 13년에 예에 의하여 현감으로 하였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 1인이다.
군명 고량부리(古良夫里)ㆍ청무(靑武).

산천 우산(牛山) : 혹은 기룡산(騎龍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북쪽 1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칠갑산(七甲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백월산(白月山) : 혹은 비봉산(飛鳳山)이라고도 하는데, 현 남쪽 19리에 있다. 또 대흥현(大興縣)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구봉산(九峯山) : 현 서쪽 5리에 있다.

두타산(頭陁山)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묘산(猫山) : 현 북쪽 13리에 있다.
관비산(官婢山) : 현 남쪽 1리에 있다.
여도현(餘道峴)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대현(大峴)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오리현(吾里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사자산(獅子山) : 현 북쪽 21리에 있다. 또 대홍현 산천 조에도 나와 있다.

어을항천(於乙項川) : 객관 동남쪽 1리에 있다. 즉 서천(西川)과 정산현(定山縣) 금강천(金剛川)의 하류이다.

 

서천(西川) : 객관 서쪽 1리에 있다. 오리현에서 나와 어을항천으로 들어간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게[蟹]ㆍ잣[海松子]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누정 쌍청루(雙淸樓) : 권진(權軫)의 시에, "낯 위에 스치는 바람은 멀리서 불어오고, 마루 앞에 마주 뜬 달이 한없이 맑구나. 두 가지 맑은 천고의 이 땅, 취하여 쓴들 그 누가 다투리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금정역(金井驛) : 현 남쪽 10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이 8개소이니, 광시(光時)ㆍ해문(海門)ㆍ청연(靑淵)ㆍ세천(世川)ㆍ용곡(龍谷)ㆍ몽웅(夢熊)ㆍ하천(下川)ㆍ풍전(豐田) 등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마양원(馬養院) : 현 남쪽 3리에 있다.
인려원(仁旅院) : 현 동쪽 17리에 있다.
간천원(乾川院) : 현 서쪽 19리에 있다.
가정자원(加亭子院) : 현 북쪽 20리에 있다.

 

불우 정련사(淨蓮寺)ㆍ백월암(白月菴) : 모두 백월산에 있다.
화정사(和鼎寺) : 구봉산에 있다.

장곡사(長谷寺) : 칠갑산에 있다.
운곡사(雲谷寺) : 사자산에 있다.
남산사(南山寺) : 관비산에 있다.
월산사(月山寺) : 백월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우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영수부곡(永壽部曲) : 수(壽) 자는 혹 신(新) 자로 쓰기도 하는데, 현 북쪽 25리에 있다.
횡천소(橫川所) : 현 동쪽 18리에 있다.

 

예본부곡(乂本部曲)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우산성 (牛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36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 영수부곡(永壽部曲)의 수(壽) 자는 신(新)이라고도 하는데, 북쪽으로 25리에 있다. 또 본부 부곡은 북쪽으로 20리에 있으며, 횡천소(橫川所)는 동쪽으로 18리에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온양군]

 

 

동쪽으로는 천안군(天安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는 예산현(禮山縣) 경계까지 26리이고, 서쪽으로는 신창현(新昌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아산현(牙山縣)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5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탕정군(湯井郡)이었는데, 신라 문무왕(文武王) 때에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뒤에 주를 폐하고 군으로 하였고, 고려 초기에는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천안부(天安府)에 붙였고, 명종(明宗) 2년에는 감무(監務)를 두었던 것을, 본조 태종 14년에 신창(新昌)과 병합하여 온창(溫昌)이라 칭호를 고쳤더니, 16년에 이를 다시 나누어 온
수현(溫水縣)을 설치하였는데, 세종 24년에 임금이 온천에 거둥하여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탕정(湯井)ㆍ온수(溫水)ㆍ온창(溫昌)ㆍ온천(溫泉).

산천 연산(燕山) : 군 북쪽 2리에 있는 이 고을 진산(鎭山)이다.
배방산(排方山) : 군 동쪽 8리에 있는데, 산마루에 네 개의 봉우리가 똑같이 대치하고 있어 가장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데, 이를 속칭 과안봉(過雁峯)이라 한다.

 

서달산(西達山) : 군 남쪽 3리에 있다. 송악산(松岳山) : 군 남쪽 23리에 있다.
화산(華山)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거차라산(巨次羅山)ㆍ월라산(月羅山) : 모두 군 서쪽 7리에 있다.
광덕산(廣德山) :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가문현(佳文峴) : 군 남쪽 30리에 있다.
포천(布川) : 군 동쪽 7리에 있다. 천안군 풍세동(豐世洞)에서 발원하여 신창현 견포(犬浦)로 들어간다.

 

가리천(加里川) : 군 동북쪽 1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으니, 하나는 군 서쪽 전족령(全足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가문현에서 나오며, 다른 하나는 군 동쪽 잉읍현(仍邑縣)에서 나오는데, 신창현의 견포로 들어간다.

 

온천(溫泉) : 군 서쪽 7리에 있다. 질병 치료에 효험이 있어 우리 태조ㆍ세종ㆍ세조가 일찍이 이곳에 거동하여 머무르면서 목욕하였는데, 유숙한 어실(御室)이 있다.

 

성곽 배방산성(排方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3백 13척에 높이는 13척이며, 안에 우물 두 개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누정 대청루(大淸樓) : 객관 동쪽에 있다. 군수 최린(崔潾)이 중건한 것이다. 이숙함(李淑瑊)이 빙설루(氷雪樓)라 이름을 고치고 지은 기문이 있다.


학교 향교 :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시흥역(時興驛) : 옛날에는 이흥역(理興驛)이라 호칭하였는데, 군 남쪽 8리에 있으며, 승(丞)이 있다. 본도에 속역(屬驛)이 일곱 개가 있으니 창덕(昌德)ㆍ일흥(日興)ㆍ급천(汲泉)ㆍ순성(順城)ㆍ흥세(興世)ㆍ장시(長時)ㆍ화천(花川)이다. ○ 승(丞) 1인이 있다.

 

애원(艾院) : 군 동쪽 18리에 있다.
신원(新院) : 군 동쪽 2리에 있다. 혹은 태산원(泰山院)이라고도 일컫는다.
망빈원(望賓院)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 군 남쪽 24리에 있다.
송현원(松峴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오산원(烏山院)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임반원(任潘院) : 군 동쪽 20리에 있다.

 

불우 과안사(過雁寺)ㆍ기린사(麒麟寺)ㆍ남산사(南山寺) : 무두 서달산(西達山)에 있다.
목사(木寺) : 배방산(排方山)에 있다. 외암(隈菴)ㆍ현우사(玄雨寺).

중암(中菴) : 모두 화산(華山)에 있다.
석암사(石菴寺) : 송악산(松岳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연산(燕山)에 있다.

 

○ 고려 고종(高宗) 23년에 몽고(蒙古)의 군사가 와서 성읍을 포위하였는데, 어전 현려(玄呂) 등이 성문을 열고 나가 싸워 크게 격파하고, 적의 머리 2급(級) 베었고, 화살과 돌에 맞아 죽은 자가 2백여 명이나 되었으며, 노획한 군기도 매우 많았다.

 

왕이 성황신이 음으로 도운 공이 있었다 하여 신호(神號)를 더 봉하였다.

 

여단 : 읍 북쪽에 있다.

고적 남산(南山) : 고려 태조(太祖)가 유검필(庾黔弼)에게 명하여 양정군(陽井郡)에 성을 쌓았다. 이때 후백제의 장수 김훤(金萱)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청주(淸州)를 침공하였다.

 

하루는 검필이 본군의 남산에 올라 앉아서 졸고 있었는데, 꿈에 한 거대한 사람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西原)에 반드시 변란이 있을것이니, 마땅히 속히 가서 구원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검필이 놀라 깨어 청주로 달려가서 후백제의 군사와 더불어 싸워 격퇴하고, 독기령(禿岐嶺)까지 추격하여 죽이고 잡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개흥부곡(開興部曲) : 군 서쪽 14리에 있다.
상곡부곡(上谷部曲)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목촌부곡(木村部曲) : 군 동쪽 10리에 있다.
박산부곡(朴山部曲) : 군 남쪽 12리에 있다.
독촌부곡(禿村部曲) : 군 북쪽 10리에 있다.
묘산부곡(卯山部曲) : 읍 동쪽 20리에 있다.

성지 배방산성(排方山城) : 배방산에 있으며 3천 5백 13척이며, 우물이 둘이 있다.
궁실 온천행궁 : 온천에 있으며 여러 임금이 머물고 갔던 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서천군]

 

 

동쪽으로는 한산군(韓山郡) 경계까지 11리고, 남쪽으로는 전라도 옥구현(沃溝縣) 경계까지 25리이고, 서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경계까지 9리이며, 북쪽으로는 홍산현(鴻山縣) 경계까지 41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0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설림군(舌林郡) : 혹은 남양(南陽)이라고도 하였다. 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서림군(西林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는 가림현(嘉林縣)에 붙였으며, 뒤에 다시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에 고을 사람인 이언충(李彦忠)이 충선왕(忠宣王)에게 공로가 있었다 하여 지서주사(知西州事)로 승격하였던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서 군으로 만들었다.

 

관원 본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설림(舌林)ㆍ서림(西林)ㆍ서주(西州)ㆍ남양(南陽).

산천 오산(烏山) : 군(郡) 성안에 있으며, 군의 진산(鎭山)이다.
운은산(雲銀山) : 군 남쪽 7리에 있다.

영취산(靈鷲山) : 군 남쪽 6리에 있다.
천방산(千方山) : 군 동쪽 21리에 있다.

대수산(大藪山) : 군 동북쪽 20리에 있다.
금복현(金福峴)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저령(猪嶺) : 군 북쪽 40리에 있다.
바다 : 군 서쪽 15리에 있다.

아포(芽浦) : 군 남쪽 10리에 있다. 한산군(韓山郡) 산천 조에 자세히 나와 있다.

길산포(吉山浦)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저령(猪嶺)에서 발원하여 진포(鎭浦)로 들어간다.
장교천(長橋川) : 군 남쪽 4리에 있다. 비인현의 부소현(扶蘇峴)에서 발원하여 같은 현의 장배곶(長背串)으로 들어간다.

 

용당진(龍堂津) : 군 남쪽 24리인 전라도 옥구현과의 경계에 있다.

개야소도(開也召島) : 주위가 13리이다.
연도(煙島) : 모두 군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지(新池) : 성 남쪽 8리에 있다.
동지(東池)ㆍ서지(西池) : 모두 성 동쪽 5리에 있다.

 

진포(鎭浦) : 군 남쪽 26리에 있는 해포(海浦)로서 임천(林川) 고다진(古多津)으로부터 서천포(舒川浦)까지를 통칭 진포라 이르는데, 그 사이의 모든 진포(津浦)는 모두 진포(鎭浦)의 건너는 곳이다.

토산 대나무ㆍ대살[竹箭] : 개야소도(開也召島)에서 난다.

 

모시[苧]ㆍ감[柹]ㆍ조개[蛤]ㆍ석굴[石花]ㆍ홍어(洪魚)ㆍ모래무지[鯊魚]ㆍ숭어[秀魚]ㆍ오징어[烏賊魚]ㆍ갈치[刀魚]ㆍ고기부레풀[魚鰾]ㆍ조기[石首魚]ㆍ웅어[葦魚]ㆍ전어(錢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삼치

 

[麻魚]ㆍ농어[鱸魚]ㆍ청어(靑魚)ㆍ전복[鰒]ㆍ홍합(紅蛤)ㆍ토굴[土花]ㆍ김[海衣]ㆍ낙지[絡締]ㆍ황각[黃角]ㆍ안식향(安息香)ㆍ대하(大蝦).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5백 25척에 높이는 10척이며, 그 안에 다섯 개의 샘과 두 개의 못이 있다.

 

관방 서천포영(舒川浦營) : 군 남쪽 26리에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봉수 운은산 봉수(雲銀山烽燧) : 남쪽으로는 전라도 옥구현(沃溝縣) 점방산(占方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비인현(庇仁縣) 칠지산(漆枝山)과 호응한다.

 

누정 백사정(白沙亭) : 군 서남쪽 13리에 있다.
망해정(望海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는데 군수 최치(崔淄)가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 : 군 남쪽 10리에 있다.

역원 두곡역(豆谷驛) : 군 남쪽 11리에 있다.
객망원(客望院) : 군 서쪽 8리에 있다.
길산원(吉山院) : 군 동쪽 9리에 있다.
신증 교량 장교(長橋) : 군 서쪽 5리에 있다.

불우 지원사(祗園寺) : 영취산(靈鷲山)에 있다.

대둔사(大芚寺)ㆍ망덕사(望德寺)ㆍ천방사(千方寺) : 모두 천방산(千方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옛 읍성(邑城) 안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용당진사(龍堂津祠) : 군 남쪽 24리에 있다. 고려 때에는 웅진명소(熊津溟所)로 되어 향과 축문을 내렸는데, 지금은 주에서 치제(致祭)한다.

 

고적 고읍성(古邑城) : 영취산 산마루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45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세종(世宗) 때에 그 지대가 외지고 막혔다 하여 지금의 읍터로 옮긴 것인데, 그 아래에는 또 고읍(古邑)의 터가 있다.

 

문조향(文照鄕) : 군 동쪽 21리에 있다.
임술소(林述所) : 군 북쪽 14리에 있는데, 지금은 장항촌(獐項村)이라 일컫는다.

 

진도 용당진(龍堂津) : 남쪽으로 25리에 있다. 옛날에는 장암진(長巖津)이라 칭하였는데, 옥구현(沃溝縣)으로 통한다. 진의 서남쪽으로 옛 군산진(群山鎭)까지는 1백 리, 남쪽으로 군산진까지는 10리, 서북쪽으로 마량진(馬梁鎭)까지는 30리인데, 이상은 모두 수로(水路)이다. 앞에는 가야소도(加耶所島)와 전라도의 오죽도(烏竹島)가 있다.

 

사원 건암서원(建巖書院) : 현종 임인년에 세웠고, 숙종 계사년에 사액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서산군]

 

 

동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경계까지 17리이고, 남쪽으로는 요아량(要兒梁)까지 1백 42리이고, 서쪽으로는 태안군(泰安郡) 경계까지 24리이고, 북쪽으로는 대산포(大山浦)까지 57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4백 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기군(基郡)이었는데, 신라에서 부성(富城)으로 고쳤고, 고려 인종(仁宗) 때에는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명종(明宗) 12년에 고을 사람이 영위(令尉)를 협박하고 가두었으므로 유사(有司)가 아뢰어 관호(官號)를 제거하였다가, 충렬왕(忠烈王) 10년에 읍 사람 정인경(鄭仁卿)이 공로가 있었던 까닭으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고, 34년에는 다시 서주
목(瑞州牧)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忠宣王) 2년에 예(例)에 의하여 서령부(瑞寧府)로 강등되고, 뒤에 또 지서주사(知瑞州事)로 강등한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다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기군(基郡)ㆍ부성(富城)ㆍ서령(瑞寧)ㆍ서주(瑞州).

산천 성왕산(聖旺山) : 군 북쪽 8리에 있다.
상왕산(象王山) : 군 동쪽 30리인 해미현(海美縣)과의 경계에 있다.
팔봉산(八峯山) : 군 북쪽 해안 15리에 있다.
도비산(都飛山) : 군 남쪽 18리에 있다.

바다 : 군 서ㆍ남ㆍ북 삼면이 모두 바다이다.
용유천(龍遊川) : 군 동쪽 18리에 있다.


판교천(板橋川) : 군 남쪽 6리에 있다. 성왕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흥인교천(興仁橋川) : 군 서쪽 24리에 있다. 팔봉산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안면곶(安眠串) : 옛날의 안면소(安眠所)이다. 군 남쪽 1백 리에 있으며, 목장(牧場)이 있다.

위포곶(葦浦串) : 옛날의 위포소(葦浦所)이다. 군 남쪽 15리에 있다.

율곶(栗串) : 군 남쪽 10리에 있다.
간월도(看月島) : 군 남쪽 35리에 있다.

신증 백사장(白沙場) : 군 북쪽 70리에 있다. 주위가 10여 리이며, 가운데에 못이 있다.

 

토산 모시[苧]ㆍ쇠[鐵] : 군 남쪽 마산리(馬山里)에서 난다.
석굴[石花]ㆍ청어(靑魚)ㆍ숭어[秀魚]ㆍ도루묵[銀口魚]ㆍ농어[鱸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기[石首魚]ㆍ물고기부레[魚鰾]ㆍ모래무지[鯊魚]ㆍ대하[大蝦]ㆍ자하[紫蝦]ㆍ조개[蛤]ㆍ낙지[絡締]ㆍ삼치[麻魚]ㆍ전어[錢魚]ㆍ해삼[海參]ㆍ조개살[江瑤柱]ㆍ백화사(白花蛇)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게[蟹]ㆍ소금[鹽]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7백 10척에 높이가 12척이며, 서쪽에 있는 조그마한 시냇물이 성안으로 흘러 들어온다.

 

관방 파지도영(波知島營) : 군 북쪽 35리에 있다.
○ 수군 만호(水軍萬戶) 1인이 있다. 신증 정덕(正德) 병자년에 비로소 돌로 성을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37척에 높이는 11척이며, 안에 한 우물이 있다.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 군 북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파지도 만호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키고 있다.
요아량수(要兒梁戍) : 군 남쪽 1백 42리에 있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군사를 나누어서 이를 지킨다.

봉수 북산 봉수(北山烽燧) : 동쪽으로는 해미현(海美縣) 안국산(安國山)과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태안군(泰安郡) 백화산(白華山)과 호응한다.

도비산 봉수(都飛山烽燧) :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고구현(高丘縣)의 성산(城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태안군 백화산과 호응한다.

누정 청심당(淸心堂) : 객관 동쪽에 있으며, 연못이 있다. 군수 예충년(芮忠年)이 세운 것이다.
학교 향교 : 군 서쪽 1리에 있다.

역원 풍전역(豐田驛) : 군 서쪽 6리에 있다. 옛날 왜구(倭寇)로 인하여 없어졌던 것을 공정왕(恭靖王) 경진년에 다시 설치하고 성여미현(省餘美縣)의 득웅역(得熊驛)에 붙였다.

 

냉정원(冷井院)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저지원(猪旨院) : 군 남쪽 5리에 있다.
망현원(芒峴院) : 군 서쪽 16리에 있다.

 

교량 판교(板橋)ㆍ금강교(金剛橋) : 모두 용유천(龍遊川)에 있다. 흥인교(興仁橋).

불우 개심사(開心寺)ㆍ문수사(文殊寺)ㆍ보현사(普賢寺) : 모두 상왕산에 있다.
운암사(雲巖寺) : 팔봉산에 있다.
보원사(普願寺) : 상왕산에 있다.
부석사(浮石寺) : 도비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북산성(北山城) 안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지곡폐현(地谷廢縣) : 본래 백제의 지육현(知六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지육(地育)이라 고쳐 부성군(富城郡)의 속현으로 삼았고,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그대로 본군에 붙였던 것을, 본조에서 인습한 것이다.

군 북쪽 30리에 있는데 옛날의 돌로 쌓은 성이 있으며, 그 주위는 1천 27척이다.

인정부곡(仁政部曲) : 군 남쪽 13리에 있다.
정소부곡(井所部曲)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성연부곡(聖淵部曲) : 군 북쪽 15리에 있다.
광지향(廣地鄕) : 군 남쪽 93리에 있다.
안면소(安眠所) : 모두 태안군(泰安郡) 남쪽 마을까지 넘어 들어가 있다.
화변소(禾邊所) : 군 남쪽 30리에 있다.
위포소(葦浦所)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조립부곡(助立部曲) : 군 북쪽 53리에 있다. 지금은 대산곶(大山串)이라 일컫는다.

북산성(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1천 6백 80척이며, 안에 세 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연혁 숙종 2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노비가 주인을 죽였기 때문이다. 39년에 다시 복귀하였다. 영종 9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읍인(邑人)이 반역을 음모하였기 때문이다. 18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정종(正宗) 병신(丙申)년에 현으로 강등시켰다가 9년에 다시 복귀시켰다.

 

진보 평신진(平薪鎭) : 옛날 조립((助立)의 부곡이었는데 지금은 대산곶(大山串)이다. 북쪽으로 60리에 있는데 이곳에 이르기까지는 90리도 못 되며 물결이 잔잔하다. 한 가닥은 바다 가운데로 세차게 흐르는데 둘레는 1백여 리나 된다.

 

이곳에 파지포 만호(波知浦萬戶)를 이속시켰다가 첨사(僉使)로 승격시켰다. 정종(正宗) 갑인년에 독립된 진(鎭)으로 만들었다.

○ 수군첨절제사 겸 총리영둔아병파총(水軍僉節制使兼摠理營屯牙兵把摠) 1명을 두었다.
○ 목장(牧場)이 있는데 둘레가 20리이다. 갑인년에 없애고 이어 첨사(僉使)를 감(減)하여 감목관(監牧官)이 겸하게 하였다.

 

혁폐(革廢) 파지포진(波知浦鎭) : 북쪽으로 38리에 있는데 중종(中宗) 11년에 축성(築城)하였는데 둘레가 1천 3백 37척이었다. 우물이 하나 있었고 만호(萬戶)가 있었다. 후에 평신진(平薪鎭)으로 합쳤다.

 

고파지도수(古波知島戍) : 파지도의 만호(萬戶) 분병(分兵)의 수자리하는 곳이다.
요아량수(要兒梁戍) : 안면곶(安眠串) 남쪽 지류가 바다로 들어가는 곳인데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의 분병(分兵)의 수자리하는 곳이다.

토산 감[柹]ㆍ대[竹].
사원 서암서원(書巖書院) : 숙종 을해년에 세워졌고 경종(景宗) 신축년에 사액되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 충청[6]-[면천군]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7리고, 남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이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복규(卜奎)가 합단(哈丹)의 군병을 방어한 공로가 있어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시킨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 1인.

군명 혜군(槥郡)ㆍ혜성(槥城) : 혜(槥)를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

산천 신암산(申庵山) : 군 북쪽 12리에 있다.
다불산(多佛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몽산(蒙山) : 군 북쪽 4리에 있다.
봉서산(鳳棲山) : 군 동쪽 2리에 있다.
마산(馬山) : 군 남쪽 8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 군 북쪽 9리에 있다.

 

창택산(倉宅山) : 일명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창택곶(倉宅串)에 있다.

바다 : 군 북쪽 45리에 있다.


범근내포(犯斤乃浦) : 군 동쪽 27리에 있다. 이곳에 창고가 있어 공주ㆍ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稅米)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漕運)하여 갔었는데 성화(成化)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바닥에 부딪히므로 아산(牙山)의 공세곶(貢稅串)으로 옮겼다.

 

창택곶(倉宅串) : 군 북쪽 35리에 있고, 목장(牧場)이 있다.
벽골지(碧骨池) : 군 동쪽에 있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도루묵[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새우[蝦]ㆍ부레풀[魚鰾]ㆍ김[海衣]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전어(錢魚)ㆍ게[蟹]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2척에 높이는 15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창택산 봉수(倉宅山烽燧) :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고산(高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 양성현(陽城縣)의 괴대길곶(槐臺吉串)과 호응한다.

 

신증누정 반월루(伴月褸) :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순성역(順城驛) : 군 동쪽 4리에 있다.
동제원(東濟院) : 군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구룡사(具龍寺)ㆍ장안사(長安寺) : 모두 신암산에 있다.
보회사(保會寺) : 다불산에 있다.
석수암(石水庵) : 창택관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몽산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도촌소(桃村所) : 군 북쪽 20리에 있다.
온월부곡(溫月部曲) : 군 동쪽 23리에 있다.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 군 동쪽 25리에 있다.
몽산성(蒙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14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성지 몽산고성(蒙山古城) : 둘레가 1천 3백 14척에 우물이 둘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황간현]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0리요, 북쪽은 경상도의 상주(尙州) 경계까지 14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동현(永同縣)경계까지 16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20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영동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경산부에 소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본도(本道)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청산(靑山)을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으로 만들었다. 16년에 각각 다시 복구시키고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소라(召羅)ㆍ황청(黃靑)ㆍ황계(黃溪).

 

산천 황악산(黃獄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또 경상도 금산군조(金山郡條)에 보인다.
백화산(白華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또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 보인다.
산양암(山羊巖) : 장교천(長橋川) 서쪽에 있다.

극락산(極樂山)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석천(石川) : 고을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속리산에서 나와서 산양암에 이르러 장교천과 합류(合流)했다.

장교천(長橋川) : 성 남쪽에 있다. 혹 대천(大川)이라고도 일컫는데, 근원이 무주(茂朱) 도마현(都馬峴)에서 나와 황악산(黃獄山) 물과 합류한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기(磁器)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꿀[峰蜜]ㆍ돌버섯[石蕈]ㆍ안식향(安息香)ㆍ신감채(辛甘菜)ㆍ목적(木賊).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6백 46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봉수 눌이산 봉수(訥伊山烽燧)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고성산(高城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한다.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눌이정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며, 북쪽으로는 경상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누정 가학루(駕鶴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불에 탔는데, 성화(成化) 병오년에 현감(縣監) 손번(孫蕃)이 중건(重建)했다.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신흥역(新興驛)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불우 심묘사(深妙寺) : 절에 팔경(八景)이 있으니,

사군봉(使君峯)ㆍ월류봉(月留峯)ㆍ산양벽(山羊壁 바로 산양암(山羊巖)이다)ㆍ용연동(龍淵洞)ㆍ냉천정(冷泉亭)ㆍ화헌악(花獻岳)ㆍ청학굴(靑鶴窟)ㆍ법존암(法尊巖)이다.

 

반야사(般若寺) : 백화산(白華山)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쌍림사(雙林寺)ㆍ대평사(大平寺) : 모두 황악산(黃獄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화부곡(金化部曲)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옛날엔 금산(金山)에 붙였었는데, 뒤에 경산부(京山府)로 옮겨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소속시켰다.

 

연혁 선조 26년 청산(靑山)에 병합되었다. : 임진왜란 때 현감 박몽설(朴夢說)이 진주에 부임하였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주 13년에 복귀시켰다.

 

○ 금화 부곡(金化部曲) 동쪽으로 38리에 있다. 본래 금산(金山)에 예속하였는데 경산(京山)으로 이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예속되었다.

 

토산 잣[海松子]ㆍ감ㆍ대추.
누정 관덕정(觀德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청안현]

 

 

동쪽은 청주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은 청주 경계까지 22리이며, 북쪽은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9리이고, 또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19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청당현(淸塘縣)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청연(淸淵)이다. 고려 초년에 청주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도서현(道西縣)인데, 신라 때 도서(都西)로 고쳐서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년에 도안(道安)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청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 태종 5년 두 고을이 백성이 적고 땅이 좁다 해서 합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었다가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청당(靑塘)ㆍ청연(淸淵)ㆍ도서(道西)ㆍ도서(都西)ㆍ도안(道安).

풍속 검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

 

산천 두타산(頭陀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좌구산(坐龜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칠보산(七寶山)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추성산(杻城山)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송현(松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사현(蛇峴)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초현(椒峴)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구자은현(仇自隱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반탄천(磻灘川) : 고을 서쪽 27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鎭川縣) 북쪽에서 나왔고, 하나는 음성현(陰城縣) 박이현(朴伊峴)에서 나왔으며, 하나는 좌구산에서 나와서, 청주 오근진(吳根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 고을 동쪽 사산리(蛇山里)에서 생산된다. 꿀[蜂蜜]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시화역(時和驛) : 고을 서쪽 17리에 있다.
백모로원(白毛老院)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수정천원(水精遷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장후원(長候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구석사(龜石寺) : 좌구산(坐龜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적에 이산(離山)이 높은 것을 꺼려서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神)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龜石)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조회(曺繪)의 기문이 있다.

 

장갑사(長岬寺) : 좌구산에 있다.
연천사(連天寺) : 추성산(杻城山)에 있다.
수암사(水菴寺) : 칠보산(七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도안(古道安)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정안부곡(靜安部曲) : 도안현(道安縣)에 있다.


곡은곡소(谷銀谷所)ㆍ염곡소(念谷所)ㆍ유통소(游筒所) : 모두 청당현(靑塘縣)에 있다.
난곡소(薍谷所)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도안(道安) : 서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新羅)의 도서(道西)였다. 도익(都益)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도서라 고치고,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에 도안(道安)이라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청주(淸州)에 예속시켰다가 본조 태조 5년에 청당(淸塘)에 합병시켰다.

 

○ 정안부곡(靜安部曲)은 도안에 있는데 난곡소(薍谷所)에서 동쪽으로 12리다.
유통소(遊茼所)ㆍ염곡소(念谷所)ㆍ은곡소(銀谷所)는 모두 청당에 있다.
토산 철ㆍ대추ㆍ은구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회인현]

 

 

동쪽으로는 보은현(報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남쪽으로는 청주(淸州) 경계까지 32리이며, 서쪽으로는 문의현(文義縣) 경계까지 16리이고, 북쪽으로는 청주 경계까지 29리이며, 서울과의 거리는 3백 46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 미곡현(未谷縣)인데, 신라 때 매곡(昧谷)으로 고쳐서 연산군(燕山君)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顯宗) 때 청주(淸州)에 부쳤다가 뒤에 회덕(懷德)의 겸임관(兼任官)으로 삼았다. 신우(辛禑) 때에 따로 감무를 두었다가 본조 태종 13년에 전례에 의해서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미곡(未谷)ㆍ매곡(昧谷).

산천 하마산(何麽山) : 고을 서쪽 2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호첨산(虎岾山) : 고을 남쪽 9리에 있다.
보리산(甫里山)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고을 서북쪽 25리에 있다.
마산(馬山) : 고을 서북쪽 10리에 있다.

 

피반대령(皮盤大嶺)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고갯길이 아홉 번 꺾이어 가장 높고 위험한 곳이다.
차의현(車衣峴)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목감산(牧監山)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노성산(老城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매곡산(昧谷山)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묵현(墨峴) : 고을 서쪽 13리에 있다.

말흘탄(末訖灘) : 고을 남쪽 19리에 있으니 바로 화인진(化仁津) 하류이다.
웅암천(熊巖川) : 고을 남쪽 1리에 있다. 근원이 구룡산에서 나와서 말흘탄(末訖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수철(水鐵) : 노성산(老城山)에서 생산된다.
수정석(水精石) : 고을 북쪽 마산(馬山)에서 난다.

봉밀(蜂蜜)ㆍ잣[海松子]ㆍ자초(紫草)ㆍ복령(茯苓)ㆍ지황(地黃)ㆍ안식향(安息香).

학교 향교 : 고을 북쪽 2리에 있다.
원우 예대원(禮大院) : 고을 동쪽 10리에 있으며, 옛날에는 공대원(孔大院)이라 하였다.

신원(新院) : 고을 북쪽 25리에 있다.
탑원(塔院) : 고을 북쪽 5리에 있다.

불우 웅암사(熊巖寺) : 구룡산에 있다.
묘암사(妙巖寺) : 목감산(牧監山)에 있다.
마전사(麻田寺) : 노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매곡산(昧谷山)에 있으니, 봄ㆍ가을로 본관(本官)에서 제사지낸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호점산성(虎岾山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5천 1백 48척이고 높이가 8척이며, 안에 우물 세 개가 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매곡산성(昧谷山城) :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1천 1백 52척이요, 높이가 8척이다.

 

인물고려 공직(龔直) : 용맹과 지략이 있었다. 신라 말년에 본읍(本邑) 장군이 되어 드디어 견훤(甄萱)을 섬기다가 견훤이 무도한 것을 보고 그 아들 영서(英舒)와 함께 태조(太祖)에게 와서 있었다.

 

태조가 대상(大相)을 제수하고 벼슬이 좌승(左丞)에 이르렀으며, 시호를 봉의(奉義)라 했다.

 

공직달(龔直達) : 공직의 아들이다. 아우 금서(金舒)와 함께 후백제에 볼모로 잡혀 갔는데, 공직이 태조에게 투항하자 견훤이 죽였다.

 

본조 홍윤성(洪允成) : 젊어서 불평객으로 행동이 구속 받지 않았다. 문종조(文宗朝)에 과거에 올랐고, 세조(世祖)를 도와 정난좌익 공신(靖難佐翼功臣)이 되었으며, 인산부원군(仁山府院君)에 봉했으며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시호는 위평(威平)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황간현]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경계까지 40리요, 북쪽은 경상도의 상주(尙州) 경계까지 14리에 이르고, 남쪽으로 영동현(永同縣)경계까지 16리에 이르고, 서쪽으로 같은 현(縣) 경계까지 20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4백 7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신라 소라현(召羅縣)인데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영동현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이 경산부(京山府)에 소속시키고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공민왕(恭愍王) 때에 다시 경산부에 소속시켰다.

 

공양왕 2년에는 다시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본도(本道)에 예속시켰으며, 14년에 청산(靑山)을 합쳐서 황청현(黃靑縣)으로 만들었다. 16년에 각각 다시 복구시키고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소라(召羅)ㆍ황청(黃靑)ㆍ황계(黃溪).

 

산천 황악산(黃獄山)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또 경상도 금산군조(金山郡條)에 보인다.
백화산(白華山) : 고을 북쪽 10리에 있다. 또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에 보인다.
산양암(山羊巖) : 장교천(長橋川) 서쪽에 있다.

극락산(極樂山)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석천(石川) : 고을 서쪽 4리에 있으니, 근원이 속리산에서 나와서 산양암에 이르러 장교천과 합류(合流)했다.

장교천(長橋川) : 성 남쪽에 있다. 혹 대천(大川)이라고도 일컫는데, 근원이 무주(茂朱) 도마현(都馬峴)에서 나와 황악산(黃獄山) 물과 합류한다.

 

토산 송이버섯[松蕈]ㆍ자기(磁器)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꿀[峰蜜]ㆍ돌버섯[石蕈]ㆍ안식향(安息香)ㆍ신감채(辛甘菜)ㆍ목적(木賊).

 

성곽 읍성(邑城) : 돌로 쌓았으니 둘레가 1천 6백 46척이요, 높이가 7척이며, 안에 우물 하나가 있다.

 

○ 이첨(李詹)의 기(記)에, "옛날 현(縣)이 승격되기 전에는 거주하는 백성들이 적고, 소나무와 참나무가 하늘을 덮어 가장 그윽하고 깊숙한 데다가, 들짐승이 맘대로 뛰놀고 도둑들이 노략질하기 때문에, 여기를 지나는 자는 여럿이 무리를 지어야만 비로소 다니곤 했다.

 

경오년에 지금 공주 목사(公州牧使)로 있는 영주(永州) 이언(李訔)이 전 삼사좌윤(前三司左尹)으로서 비로소 이 고을 감무(監務)가 되어 백성들의 고통스러움을 개탄하고 이것을 힘써 없앴기에 호구(戶口)가 날마다 늘고, 전답은 날마다 개간되고 사람을 해치는 자는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나무를 베어내고 돌을 쪼개어 이 성을 쌓아서 며칠 안 되어 공사가 완성되어, 백성들은 성에 보전하게 되고, 성은 덕(德)에 보전하게 되었으니, 이후(李侯)의 공이 더욱 빛남이 있도다." 하였다.

 

봉수 눌이산 봉수(訥伊山烽燧) : 고을 동쪽 20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경상도 금산군(金山郡) 고성산(高城山)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소이산(所伊山)에 호응한다.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고을 동쪽 13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눌이정산에 호응하고, 서쪽으로는 영동현 박달산(朴達山)에 호응하며, 북쪽으로는 경상도 상주(尙州) 중모현(中牟縣) 소산(所山)에 호응한다.

 

누정 가학루(駕鶴樓) : 객관(客館) 남쪽에 있다. 불에 탔는데, 성화(成化) 병오년에 현감(縣監) 손번(孫蕃)이 중건(重建)했다.

 

고을 서쪽 5리쯤 되는 곳에 두어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섰는데 가운데 청학굴(靑鶴窟)이 있다. 바위골이 그윽하고 깊으며 연기와 안개가 아득하여, 지나는 사람은 인간 세상의 경계가 아니라고 의심한다.

 

객관(客館) 모퉁이에 성가퀴(성 위에 나지막하게 쌓은 담)가 있어 푸른 언덕에 임해 있는데, 옛적에 여기에 누(樓)가 있었으니 이것이 가학루(駕鶴樓)이다.

 

영락(永樂) 연간에 귀암(龜巖) 상공 남재(南在)가 현판을 단 것이다. 그 뒤에 불에 타서 객관과 함께 모두 재가 되고 말았고, 다만 주춧돌만 남아 있은지 40여 년이 되었다.

 

이신원(李申院) : 고을 서쪽 3리에 있다.
서송원(西松院) : 고을 남쪽 9리에 있다.
박차원(朴車院) : 금화부곡(金化部曲)에 있다.
자천원(玆川院)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이현원(李峴院)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판초원(板草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불우 심묘사(深妙寺) : 절에 팔경(八景)이 있으니, 사군봉(使君峯)ㆍ월류봉(月留峯)ㆍ산양벽(山羊壁 바로 산양암(山羊巖)이다)ㆍ용연동(龍淵洞)ㆍ냉천정(冷泉亭)ㆍ화헌악(花獻岳)ㆍ청학굴(靑鶴窟)ㆍ법존암(法尊巖)이다.

 

반야사(般若寺) : 백화산(白華山)에 있다.
건천사(乾川寺)ㆍ쌍림사(雙林寺)ㆍ대평사(大平寺) : 모두 황악산(黃獄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고을 동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금화부곡(金化部曲) : 고을 동쪽 38리에 있다. 옛날엔 금산(金山)에 붙였었는데, 뒤에 경산부(京山府)로 옮겨 붙였고, 공양왕(恭讓王) 2년에 여기에 소속시켰다.

 

연혁 선조 26년 청산(靑山)에 병합되었다. : 임진왜란 때 현감 박몽설(朴夢說)이 진주에 부임하였는데, 한 사람도 돌아오지 않았다.


광해주 13년에 복귀시켰다.

○ 금화 부곡(金化部曲) 동쪽으로 38리에 있다. 본래 금산(金山)에 예속하였는데 경산(京山)으로 이속시켰으며, 공양왕 2년에 예속되었다.

 

토산 잣[海松子]ㆍ감ㆍ대추.
누정 관덕정(觀德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6권 - 충청[3]-[청안현]

 

 

동쪽은 청주 경계까지 30리이고, 남쪽은 청주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은 청주 경계까지 22리이며, 북쪽은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9리이고, 또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19리에 이르며, 서울과의 거리는 2백 93리이다.

 

건치연혁 청당현(淸塘縣)이요, 또 한 가지 이름은 청연(淸淵)이다. 고려 초년에 청주에 소속시켰고 뒤에 감무를 두어 도안(道安)을 겸임하게 하였다. 도안현(道安縣)은 본래 고구려(高句麗)의 도서현(道西縣)인데, 신라 때 도서(都西)로 고쳐서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년에 도안(道安)으로 고쳐서 현종(顯宗) 9년에 청주에 소속시켰으며 본조 태종 5년 두 고을이 백성이 적고 땅이 좁다 해서 합치고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었다가 13년에 전례에 의하여 현감을 두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 1명
군명 청당(靑塘)ㆍ청연(淸淵)ㆍ도서(道西)ㆍ도서(都西)ㆍ도안(道安).

풍속 검소하고 인색한 것을 숭상한다 : 《지지(地志)》

 

산천 두타산(頭陀山) :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또 진천현조(鎭川縣條)에 보인다.
좌구산(坐龜山) :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칠보산(七寶山) : 고을 동쪽 6리에 있다.
추성산(杻城山) :고을 서쪽 20리에 있다.

송현(松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사현(蛇峴) : 고을 북쪽 15리에 있다.
초현(椒峴) : 고을 남쪽 15리에 있다.
구자은현(仇自隱峴) : 고을 동쪽 7리에 있다.

 

반탄천(磻灘川) : 고을 서쪽 27리에 있다. 그 근원이 셋이 있는데, 하나는 진천현(鎭川縣) 북쪽에서 나왔고, 하나는 음성현(陰城縣) 박이현(朴伊峴)에서 나왔으며, 하나는 좌구산에서 나와서, 청주 오근진(吳根津)으로 들어간다.

 

토산 백옥(白玉) : 고을 동쪽 사산리(蛇山里)에서 생산된다. 꿀[蜂蜜]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지황(地黃)ㆍ복령(茯苓).

학교 향교(鄕校) : 고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시화역(時和驛) : 고을 서쪽 17리에 있다.
백모로원(白毛老院) : 고을 북쪽 18리에 있다.
수정천원(水精遷院) : 고을 동쪽 30리에 있다.
장후원(長候院)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불우 구석사(龜石寺) : 좌구산(坐龜山)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는 말에, 이 고을을 세웠을 적에 이산(離山)이 높은 것을 꺼려서 이 절을 세우고 수족(水族)의 신(神)인 거북의 이름을 따서 구석(龜石)이라고 했는데, 이에 대한 조회(曺繪)의 기문이 있다.

 

장갑사(長岬寺) : 좌구산에 있다.
연천사(連天寺) : 추성산(杻城山)에 있다.
수암사(水菴寺) : 칠보산(七寶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고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 : 고을 서쪽 5리에 있다.
여단 : 고을 북쪽에 있다.

 

고적 고도안(古道安) : 고을 서쪽 15리에 있다.
정안부곡(靜安部曲) : 도안현(道安縣)에 있다.
곡은곡소(谷銀谷所)ㆍ염곡소(念谷所)ㆍ유통소(游筒所) : 모두 청당현(靑塘縣)에 있다.
난곡소(薍谷所) : 고을 동쪽 12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고읍 도안(道安) : 서쪽으로 15리에 있는데 본래 신라(新羅)의 도서(道西)였다. 도익(都益)이라고도 하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도서라 고치고,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 23년에 도안(道安)이라 고쳤고, 현종 9년에는 청주(淸州)에 예속시켰다가 본조 태조 5년에 청당(淸塘)에 합병시켰다.

○ 정안부곡(靜安部曲)은 도안에 있는데 난곡소(薍谷所)에서 동쪽으로 12리다.
유통소(遊茼所)ㆍ염곡소(念谷所)ㆍ은곡소(銀谷所)는 모두 청당에 있다.
토산 철ㆍ대추ㆍ은구어.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충주목]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8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48리이고,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51리이고, 경기도 여주(驪州) 경계까지 78리이고, 경기도 음죽현(陰竹縣) 경계까지 66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45리이고, 강원도(江原道) 원주(原州)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2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혹은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薍長城)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빼앗았다. 진흥왕(眞興王)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貴戚)의 자제와 육부(六部)의 호민(豪民)을 옮겨서 채웠고, 경덕왕(景德王)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太祖) 23년(940)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성종(成宗) 2년(983)에 목(牧)을 두었다가 14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어 창화군(昌化軍)이라 이름하여 중원도(中原道)에 예속하였다.

 

현종(顯宗) 3년(1012)에 폐지하고 안무사(安撫使)로 만들었다가 9년에 8목(牧)의 하나로 만들었고, 고종(高宗) 41년(1254)에 승격하여 국원경(國原京)으로 만들었다가 뒤에 다시 목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그대로 인습하였다.

 

세종(世宗) 31년(1449)에 관찰사로서 목사를 겸하게 하였다가 조금 뒤에 파하였고,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두었다.

 

진관 군(郡)이 셋이고 : 청풍(淸風)ㆍ단양(丹陽)ㆍ괴산(槐山). 현(縣)이 넷이다. : 연풍(延豐)ㆍ음성(陰城)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

 

관원 목사(牧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국원(國原)ㆍ대원(大原)ㆍ예성(蘂城)ㆍ중원(中原)ㆍ창화군(昌化軍).

풍속 백성의 풍속이 검소하고 인색하다. : 《지지(地志)》

형승 남쪽 방면의 요해처에 자리잡고 있는 땅이다. : 정인지(鄭麟趾)의 기(記)

산천 대림산(大林山) : 주(州) 남쪽 10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말흘산(末訖山)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심항산(心項山) : 주 동북쪽 9리에 있다.
마산(馬山)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망이산(望夷山) : 주 서쪽 91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또 청풍군(淸風郡) 조에 보인다.
○ 이숭인(李崇仁)의 시에, "저 월악(月岳)을 보니 중원(中原)에 비껴 있는데, 한강의 물이 처음 발원했네." 하였다.

 

천룡산(天龍山)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정토산(淨土山) : 혹은 개천산(開天山)이라고도 한다. 주 북쪽 33리에 있다.
견문산(犬門山) : 주 서쪽 8리에 있다. 그 아래에 큰 내가 있는데, 금휴포(琴休浦)라 한다.
풍류산(風流山) : 주 남쪽 23리에 있다.
가섭산(迦葉山) : 주 서쪽 45리에 있다.
국망산(國望山) 주 서쪽 51리에 있다.
장미산(薔薇山) : 주 서쪽 28리에 있는데, 옛 석성(石城)이 있다.
천등산(天燈山) : 주 북쪽 40리에 있다. 개천사비(開天寺碑)가 있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당(唐) 나라 개원(開元) 연간에 세웠다." 한다. 비문은 닳아서 읽을 수가 없다.

 

오동산(梧桐山) : 주 동쪽 7리에 있다.
금봉산(金鳳山) : 주 동쪽 5리에 있다.

종당산(宗堂山) : 주 북쪽 13리에 있다. 이상한 돌이 생산되는데 세밀하여 비갈(碑碣)을 만들 만하다.

악현(惡峴) : 주 서쪽 음성현(陰城縣) 경계에 있다.

연주현(連珠峴) : 주 남쪽 5리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연주의 선녀가 풍류산(風流山)에 놀고 혹은 이 고개에서 놀았다." 한다.
그 골목의 이름을 지금까지 비선동(飛仙洞)이라고 일컫는다.

 

북진(北津) : 주 북쪽 10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온다.
금천(金遷) : 주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北津)의 하류이다.

월락탄(月落灘) : 주 서쪽 15리에 있는데, 바로 지금의 금천(金遷) 월탄(月灘)으로 우륵(于勒)주D-001이 놀던 곳이다.

 

달천(達川) : 혹은 덕천(德川)이라 이름하고, 혹은 달천(獺川)이라 이름하는데, 주 서쪽 8리에 있다. 근원이 보은현(報恩縣) 속리산(俗離山) 꼭대기에서 나와서 그 물이 세 갈래로 나뉘는데, 그 하나가 서쪽으로 흘러 달천이 되었다. 배를 띄우고 겨울에는 다리를 놓는다.

 

진포(辰浦) : 곧 북진(北津)의 상류인데, 주 동쪽 15리에 있다. 맑고 깊어 바닥을 알 수 없는데, 세속에서 용못[龍淵]이라고 전한다.

하늘이 가물 때에 범의 두골(頭骨)을 던져넣으면 징험이 있다. 혹은 전회강(澶洄江)이라고도 한다.

토산 철(鐵) : 주연리(周連里)에서 산출된다. 잣[海松子]ㆍ송심(松蕈)ㆍ활석(活石)ㆍ수달(水獺)ㆍ봉밀(蜂蜜)ㆍ자초(紫草)ㆍ조(棗)ㆍ인삼ㆍ사향(麝香)ㆍ안식향(安息香)ㆍ쏘가리[錦鱗魚]ㆍ석심(石蕈).

 

신증 석류황(石硫黃) : 노오(老烏)ㆍ시물(柴勿) 두 골짜기에서 산출된다.
성곽 : 읍성(邑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6백 50척이고 높이가 8척이다. 가운데에 우물 셋이 있다.

 

봉수 : 대림산 봉수(大林山烽燧) : 남쪽으로 연풍현(延豐縣) 주정산(周井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馬山)에 응한다.

심항산 봉수(心項山烽燧) : 동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하고, 서쪽으로 마산에 응한다.

마산 봉수(馬山烽燧) : 동쪽으로 대림산과 심항산에 응하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가섭산(迦葉山)에 응한다.

망이성 봉수(望夷城烽燧) : 동쪽으로 음성현 가섭산에 응하고, 남쪽으로 진천현(鎭川縣) 소을산(所乙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경기 죽산현(竹山縣) 건지산(巾之山)에 응한다.

 

궁실 : 실록각(實錄閣) : 객관(客館) 동남쪽에 있다. 본조(本朝)의 실록(實錄)을 보관하고 있는데, 3년마다 사관(史官)을 보내 포쇄(曝曬)한다. 성주(星州)와 전주(全州)도 같다.

 

신증 남별관(南別館) : 서문(西門) 안에 있다.
신별관(新別館) : 남문 안에 있다.

누정 경영루(慶迎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동루(東樓)이다.
만경루(萬景樓) : 주 서쪽 3리에 있다.

공신루(拱宸樓) : 바로 성의 북문루(北門樓)이다.
남풍루(南風樓) : 바로 성의 남문루(南門樓)이다.
망경루(望京樓) : 객관 서쪽에 있다.

 

신증 청연당(淸燕堂) : 객관 동쪽에 있다.

자경당(自警堂) : 객관 동쪽에 있다.
향사당(鄕射堂) : 서문 밖에 있다. 목사 이귀(李龜)가 세웠다.
학교 향교(鄕校) : 서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연원역(連原驛) : 주 북쪽 5리에 있다. 찰방(察訪)하는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14개인데, 단월(丹月)ㆍ인산(仁山)ㆍ감원(坎原)ㆍ신풍(新豐)ㆍ안부(安富)ㆍ가흥(嘉興)ㆍ용안(用安)ㆍ황강(黃江) 수산(壽山)ㆍ장림(長林)ㆍ영천(靈泉)ㆍ오사(吾賜)ㆍ천남(泉南)ㆍ안음(安陰)이다. ○ 찰방 한 사람이다.

 

가흥역(嘉興驛) : 주 북쪽 30리에 있다.
용안역(用安驛) : 주 서쪽 45리에 있다. 예전에는 음성(陰城)에 속했는데, 성종(成宗) 9년에 본 주로 옮겨 붙였다.

단월역(丹月驛) : 옛날 단월부곡(丹月部曲)의 땅으로, 주 남쪽 10리에 있다. 역 남쪽에 계월루(溪月樓)가 있다.

 

건태원(乾兌院) : 주 서쪽 3리에 있다.
약옹원(若翁院) : 주 동쪽 25리에 있다.
경희원(慶希院) 주 남쪽 40리에 있다.
용두원(龍頭院)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경제원(敬濟院) : 일명 대조(大棗)라고도 한다. 주 서쪽 30리에 있다.
우원(隅院) : 주 서쪽 65리에 있다.

도관원(都官院) : 주 서쪽 77리에 있다.
석원(石院) : 주 서쪽 85리에 있다.
금곶원(金串院) : 주 서쪽 10리에 있다.
주지원(注之院) : 주 남쪽 16리에 있다.

미륵원(彌勒院) : 주 서쪽 50리에 있다. 일명 광수(廣修)라고도 한다.
신창원(新倉院): 주 서북쪽 20리에 있다.
부구이원(釜拘伊院) : 주 서쪽 55리에 있다.

신증 금천참(金遷站) : 주 서쪽 15리에 있다.
가흥참(嘉興站) : 가흥역(嘉興驛) 옆에 있다.

 

창고 가흥창(可興倉) : 옛날에는 덕흥창(德興倉)이라 일컬었고, 또 경원창(慶原倉)이라 일컬었다.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

 

예전에는 금천(金遷) 서쪽 언덕에 있었는데, 세조(世祖) 때에 여기로 옮기고 경상도 여러 고을과 본주(本州)의 음성(陰城)ㆍ괴산(槐山)ㆍ청안(淸安)ㆍ보은(報恩)ㆍ단양(丹陽)ㆍ영춘(永春)ㆍ제천(堤川)ㆍ진천(鎭川)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청풍(淸風)ㆍ연풍(延豐)ㆍ청산(靑山)등 고을의 전세(田稅)를 여기에서 거두어 배로 실어날라 서울에 이르는데, 수로(水路)로 2백 60리이다. 신증 예전에는 창사(倉舍)가 없었는데, 금상(今上) 16년에 비로소 집을 지었다. 모두 60칸이다.

 

신증 사창(社倉) : 주의 서쪽 80리에 있다.

불우 보련사(寶蓮寺) : 천룡산(天龍山)에 있다.

용두사(龍頭寺) : 말흘산(末訖山) 밑에 있다. 삼국시대 때에 북쪽 오랑캐가 자주 침범하므로, 이에 절을 짓고 탑을 세워서 기도하였다. 고려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승 법경자등탑비(僧法鏡慈燈塔碑)가 있다.

 

개천사(開天寺) : 정토산(凈土山)에 있다.
영곡사(靈鵠寺) : 대림산(大林山)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기대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며 공중에 걸쳐서 누각을 지었다. 밑에서 바라보면 달아맨 것 같다.

 

김생사(金生寺) : 북진(北津) 언덕에 있다. 김생(金生)은 신라 사람인데, 부모가 미천하여 그 세계(世系)는 알지 못한다. 경운(景雲)2년(711)에 났다. 어려서부터 글씨에 능하여 평생토록 다른 기예는 공부하지 않고, 나이 80이 넘었어도 오히려 붓을 잡고 쉬지 않아서, 예서(隸書)ㆍ행서(行書)ㆍ초서(草書)가 모두 신묘한 경지에 들어갔다.

 

덕주사(德周寺) : 월악산(月岳山) 밑에 있다. 속담에 전하기를, "덕주부인(德周夫人)이 이 절을 세웠기 때문에 인하여 이름하였다." 한다. 난초사(蘭草寺)ㆍ동가섭사(東迦葉寺) :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주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주 북쪽 3리에 있다.

 

월악사(月岳祠)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 43년(1256)에 몽고(蒙古) 군사가 주의 성을 무찌르고 또 산성(山城)을 공격하니, 관리들이 늙고 약하여 막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산사로 올라갔는데, 홀연히 구름 안개ㆍ비ㆍ우레ㆍ번개가 크게 일어나자, 몽고 군사들이 신이 돕는 것이라고 여겨 치지 않고 물러갔다.

 

여단(厲壇) : 주 북쪽에 있다.

고적 익안 폐현(翼安廢縣) : 주 서쪽 30리에 있다. 본주(本州)의 다인철소(多仁鐵所)인데, 고려 고종 42년에 그 지방 사람들이 몽고 군사를 막아내어 공이 있으므로 승격하여 현(縣)을 만들고, 인하여 예속시켰다.

 

대림산성(大林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9천 6백 38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덕주산성(德周山城) : 주 동쪽 45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만 2천 6백 70척이고, 안에 샘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페하였다.

 

동악성(桐岳城) : 주 동쪽 13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2천 2백 80척이다.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봉황성(鳳凰城) : 주 서쪽 28리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6천 1백 2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포모대(泡母臺) : 풍류산(風流山)에 있는데, 높이가 수십 장(丈)이다. 속설에 전하기를, "옛적에 장미(薔薇)라는 선녀가 있었는데, 스스로 포모(泡母)라 이름하고 항상 그 위에서 놀아 향기가 골에 가득하였다. 당 명황(唐明皇)이 그 말을 듣고 도사(道士)를 보내 맞아서 궁에 들이고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탄금대(彈琴臺) : 견문산(犬門山)에 있다. 푸른 벽이 낭떠러지라 높이가 20여 길이요, 그 위에 소나무ㆍ참나무가 울창하여 양진명소(楊津溟所)를 굽어 임하고 있는데, 우륵(于勒)이 거문고를 타던 곳이다. 뒷사람이 인하여 그 대를 탄금대라 이름하였다.

 

단월부곡(丹月部曲) : 바로 단월역(丹月驛)의 옛터이다.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 : 주 동쪽 25리에 있다. 지금은 사을미(沙乙未)라고 일컫는다.

탄촌부곡(炭村部曲) : 주 남쪽 20리에 있다.

이차탄부곡(伊次呑部曲)ㆍ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 : 주 남쪽 45리에 있다.
소잉림부곡(所仍林部曲) : 주 동쪽 65리에 있다. 청풍군(淸風郡) 남촌(南村)으로 넘어 들어간다.

덕산향(德山鄕) : 주 동쪽 55리에 있다. 청풍군 남촌으로 넘어 들어간다.

하맥곡처(下麥谷處) : 주 서북쪽 45리에 있다.
상맥곡처(上麥谷處)ㆍ연탄처(淵呑處) : 고을 서쪽 90리에 있다.
대조곡처(大鳥谷處) : 주 서쪽 90리에 있다.

 

연혁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 : 낭자성(狼子城)이라고도 하고, 미을성(未乙省)이라고도 한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시켰다. : 이홍윤(李洪胤)의 난 때문이다.

 

선조(宣祖)가 즉위하여 정묘년(1567)에 다시 복귀시켰다 : 무옥(誣獄)으로 하옥되었기 때문이다. 광해주 5년(1613)에 현으로 강등시켰다. : 유인발(柳仁發)이 반역하다가 주륙당했기 때문이다. 인조 원년(1623)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6년에 다시 충원현(忠原縣)으로 강등되었다. : 안집중(安執中)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2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채문형(蔡門亨)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효종 3년(1652)에 다시 복귀하였다가 숙종 6년(1680)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15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영종 5년(1729)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이조겸(李祖謙)이 반역으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14년에 다시 복귀되었다가 15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지아비를 죽인 죄인 때문이다. 24년에 복귀되었다가 31년에 현으로 강등되었다. : 유수원(柳壽垣)이 반역죄로 주륙당하였기 때문이다. 40년에 다시 복귀되었다. 고종(高宗)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방면 남변(南邊) : 끝이 10리.
북변(北邊) : 끝이 10리.
금천(金遷)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이안(利安) : 서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30리.
신석(薪石)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
덕서(德西)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중니곡(中尼谷) : 서쪽으로 끝이 60리.

복성면(福城面) : 서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소탄(所呑) : 옛날 연탄처(淵呑處)인데,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법왕(法王) : 위와 같음. 금목동(金目洞) : 서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성곡(省谷)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

대오곡(大烏谷) : 본래는 대오곡처(大烏谷處)로써,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0리.

사다산(沙多山) : 서쪽으로 처음이 1백 리, 끝이 1백 15리.
기음(岐音) : 위와 같음.
두의곡(豆衣谷)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90리.

소고(蘇古) : 서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유모곡(柳茅谷)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

불정(佛頂) : 위와 같음.

 

율지동(栗枝洞) : 남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

감물내(甘勿內) : 본래는 감물내미부곡(甘勿內彌部曲)이었는데,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맹동(孟洞) : 서쪽으로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감미곡(甘味谷) : 서쪽 끝으로 처음이 60리, 끝이 80리.

거곡(居谷) : 위와 같음.

사을미(沙乙味) : 본래는 광반석부곡(廣反石部曲)이었는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
가흥(可興) : 서북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35리.
앙암(仰巖) : 서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60리.

성대양(省台陽) : 서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금생(金生) : 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가차산(加次山)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0리.

엄정(嚴政)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60리.
산천(山天)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주유모(周柳茅) : 서남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사리포(沙里浦) : 처음이 40리, 끝이 50리.
율동(栗洞) : 처음이 80리, 끝이 1백 리.

 

덕산(德山) : 본래는 덕산향(德山鄕)인데, 동남쪽으로 처음이 55리, 끝이 1백 5리.
적화현(赤火峴) : 처음과 끝이 60리.

○ 탄촌부곡(炭村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소잉임부곡(所仍林部曲)은 동남쪽으로 65리. 상하맥곡(上下麥曲)은 서북쪽으로 45리.

 

진도 포탄진(浦灘津) : 동북쪽으로 25리인데, 제천(提川)으로 통한다.
달천진(達川津) : 서남쪽으로 8리인데, 서울에서 영남으로 통하는 대로로서, 가물면 다리를 개설한다.
신당진(新塘津) : 동쪽으로 25리인데, 청풍(淸風)ㆍ황강역(黃江驛)으로 통한다.
목계진(木溪津) :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可興)에서부터 원주(原州)ㆍ제천(提川)으로 통한다.
청룡진(靑龍津) : 서북쪽으로 40리이다.
북강진(北江津) : 북쪽으로 10리인데, 원주(原州)와 하연진(荷淵津)으로 통한다.
하연진 : 서북쪽으로 20리인데, 가흥(可興) 대로로 통한다.
가흥진(可興津) : 창북(倉北)의 사잇길에 있다.

 

토산 도미[鯽魚]ㆍ백면지(白綿紙) : 중국의 세폐(歲幣)로 썼다.

사원 팔봉서원(八峯書院) : 선조 임인년(1602)에 세웠고, 현종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 운곡서원(雲谷書院) : 현종 신축년(1661)에 세웠고, 숙종 병진년(1676)에 사액하였다. 주자(朱子)ㆍ정구(鄭逑) :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이다. 벼슬은 대사헌이었는데,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목(文穆).

 

○ 누암서원(樓巖書院) : 숙종 을해년(1695)에 세웠고, 임오년(1702)에 사액하였다.
○ 충렬사(忠烈祠) : 달천(達川)에 있는데, 숙종 정축년(1677)에 세웠으며, 영종(英宗)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고, 어제비(御製碑)가 있다.

 

성지 천용산 고성(天龍山古城) : 봉황성(鳳凰城)이라고도 한다. 둘레는 6천 1백 21척이며, 우물이 하나 있다.

장미산 고성(薔薇山古城) : 유적(遺跡)이 있다.

영아 후영(後營) : 인조조(仁祖朝)에 두었다.
○ 후영장(後營將) 한 사람.
○ 속읍(屬邑)은 충주ㆍ청풍ㆍ단양ㆍ괴산ㆍ연풍ㆍ제천ㆍ영춘ㆍ음성이다.

본군 양진창(楊津倉) : 숙종 12년(1686)에 양진(楊津)의 동쪽에 세웠다가 16년에 읍내로 옮겨 세우고 군량(軍糧)을 저장한다.

동창(東倉) : 동남쪽 10리. 청풍과의 경계이다.

남창(南倉) : 남쪽 40리이다.
북창(北倉) : 북쪽 10리. 금천(金遷)의 북안(北岸)이다.
내창(內倉) : 서북쪽 30리.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청풍군]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3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慶尙道)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6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0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5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사열이현(沙熱伊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을 삼았다.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충숙왕(忠肅王) 4년에 현(縣)의 중 청공(淸恭)이 왕사(王師)가 되었으므로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사열이(沙熱伊)

 

풍속 풍속이 화전(火田)을 숭상한다. : 정추(鄭樞)의 시에, "풍속이 불로 가는 것[火耕]을 숭상하여 조를 많이 심는다." 하였다.

 

형승 산천이 기이하고 빼어나서 남도(南道)의 으뜸이 된다. : 송처관(宋處寬)의 한벽루기(寒碧樓記). 한 줄기 맑은 강 : 정추(鄭樞)의 시에, "천년 교목(喬木)은 일천 봉우리가 합하고, 한 줄기의 맑은 강은 한 고을로 전한다." 하였다.

 

산천 인지산(因地山) :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무암산(茂巖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창고(倉庫)의 예전 터가 있는데, 고려 때에 경상도의 전부(田賦)를 이곳에 옮겼다.

삼방산(三方山) : 군 북쪽 3리에 있다.
금곡산(金谷山) : 군 서쪽 26리에 있다.
저성산(猪城山) :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돌 성이 있다.
병풍산(屛風山) : 군 북쪽 1리에 있는데, 바람 구멍이 있다.

부산(婦山) : 군 서쪽 15리에 있다.

성황산(城隍山) : 군 동쪽 3리에 있다.
월악산(月岳山) : 군 남쪽 50리에 있다. 신라에서는 월형산(月兄山)이라고 일컬었다. 소사(小祀)로 되었다.

전산(箭山) : 전산소(箭山所)에 있다.
백야산(白夜山) : 군 남쪽 33리에 있다.
쌍암산(雙巖山) : 군 동쪽 5리에 있다.

취산(鷲山) : 군 남쪽 2리에 있는데, 군창(軍倉)이 있다.
장선현(長善峴) : 군 서쪽 20리에 있다.
가라현(加羅峴) : 군 서쪽 16리에 있는데, 지극히 험하고 막히었다.

북진(北津) : 병풍산 밑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고교천(高橋川) : 군 북쪽 8리에 있다. 근원이 제천현(堤川縣) 경계에서 나와서 북진(北津)으로 들어간다.

월천(月川) : 군 서쪽 40리에 있다. 근원이 부덕산(夫德山)에서 나와 충주(忠州) 진포(辰浦)로 흘러 들어간다.

신증 엄성천(嚴城遷) : 군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실[絲]ㆍ수철(水鐵) : 군 동쪽 평등산(平登山)에서 산출된다. 송이버섯[松蕈]ㆍ대추[棗]ㆍ봉밀(蜂蜜)ㆍ자초(紫草)ㆍ석이버섯[石蕈]ㆍ인삼(人蔘)ㆍ복령(茯苓)ㆍ백화사(白花蛇)ㆍ영양(羚羊)ㆍ먹[墨]ㆍ석류황(石硫黃) :

 

전산(箭山)ㆍ백야산(白夜山)ㆍ쌍암산(雙巖山)ㆍ논양리(論陽里) 등지에서 난다.
석종유(石鍾乳) : 군 북쪽 풍혈(風穴)과 군 남쪽 저전리(苧田里) 석혈(石穴)에서 산출된다.
신증 청토(靑土) : 군 동쪽 목동(木洞)에서 난다.
녹반(綠礬) : 군 북쪽 전산에서 난다.

 

봉수 오현 봉수(吾峴烽燧) : 군 남쪽에 있다. 동쪽으로 단양군(丹陽郡) 소이산(所伊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심항산(心項山)에 응한다.

 

누정 한벽루(寒碧樓) : 객관(客館) 동쪽에 있어 큰 강을 굽어 임하였다.
신증 명월정(明月亭) : 한벽루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남쪽 1리에 있다.

역원 황강역(黃江驛) : 군 서쪽 35리에 있다.
수산역(壽山驛) : 군 남쪽 26리에 있다.
안음역(安陰驛) : 옛 이름은 안성(安城)이다. 군 북쪽 5리에 있다.

권일원(權一院) : 군 남쪽 26리에 있다.
논양원(論陽院) : 군 서쪽 33리에 있다.
주병원(酒餠院)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불우 월악사(月岳寺) : 월악산(月岳山)에 있다.
산방사(山房寺)ㆍ무암사(霧巖寺) : 모두 백야산(白夜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남쪽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목촌소(木村所) : 군 북쪽 1리에 있다.
전산소(箭山所) : 군 북쪽 17리에 있다.
결매소(結買所) : 군 북쪽 2리에 있다.

 

연혁 현종 9년(1668)에 중궁전하 김씨(金氏) : 명성왕후(明聖王后)의 관향(貫鄕)이라하여 도호부(都護府)로 승격시켰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충주진관 병마동첨절제사(忠州鎭管兵馬同僉節制使)를 겸한다. 한 사람.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읍내(邑內) : 끝이 5리.
근남(近南)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
원남(遠南) : 처음이 20리, 끝이 40리.
근서(近西) : 처음이 5리, 끝이 30리.
원서(遠西) : 처음이 30리, 끝이 55리.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
북면(北面) : 처음이 5리, 끝이 15리.
수화(水化) : 남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

 

성지 고성(古城) : 저성(猪城)이라 칭하는데, 동쪽으로 5리에 있으며, 옛터가 있다.
고성(古城) : 성황산(城隍山)이 있었는데, 유적(遺跡)이 있다 신라 문무왕(文武王) 13년(673)에 사열산성(沙熱山城)을 증축하였다.

 

진도 북강진(北江津) : 북쪽으로 5리에 있는데, 제천(堤川)으로 통한다.
황강진(黃江津) : 역북(驛北)에 있으며, 원주(原州)로 통한다.

토산 누치[訥語]ㆍ쏘가리[錦鱗魚]ㆍ자라[鼈]

사원 봉강서원(鳳岡書院) : 현종 신해년(1671)에 세웠고, 임자년(1672)에 사액하였다.
○ 황강서원(黃江書院) : 영종 병오년(1726)에 세웠고 정미년(1727)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제천현]

 

 

동쪽으로 강원도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17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18리이고, 남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0리이고,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20리이고, 서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43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 원주(原州)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91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내토군(奈吐郡)인데 신라에서 내제(奈堤)로 고쳤고, 고려 초에 제주(堤州)로 고쳤다. 성종(成宗) 14년(995)에 자사(刺史)를 두었다가 목종(穆宗) 8년(1005)에 파하였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原州)에 붙였고, 예종(睿宗) 원년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현감을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씩이다.
군명 내토(奈吐)ㆍ내제(奈堤)ㆍ의천(義川)ㆍ의원(義原).

풍속 백성의 풍속이 소박하고 간략하다 : 권근(權近)의 향교기(鄕校記)에 있다.

 

형승 지세(地勢)가 가장 높다 : 정인지(鄭麟趾)의 시이다. 물은 겹겹이요 산은 거듭거듭이다 : 신개(申槩)의 시에, "갈수록 물은 겹겹이요, 또 산은 거듭거듭인데, 약간의 민가는 그림 속이로다." 하였다.

 

산천 용두산(龍頭山) : 현 북쪽 1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대덕산(大德山) : 현 북쪽 21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 현 서쪽 35리에 있다.
감암산(紺巖山) : 현 북쪽 40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 : 현 동쪽 12리 영춘현(永春縣) 경계에 있다.

주유산(舟遊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두모곡산(豆毛谷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주유산과 서로 마주 대하였다.
가질문산(加叱文山) : 현 서쪽 61리 강원도 원주 경계에 있다.

호명산(虎鳴山) : 현 동남쪽 17리에 있다.
말응달산(末應達山) : 현 남쪽 10리에 있다.
벌을산(伐乙山) : 현 동쪽 2리에 있다.
제비랑산(齊非郞山) : 현 서쪽 15리에 있다.

 

광탄(廣灘) : 현 서쪽 21리에 있다. 근원이 원주(原州) 치악산(雉岳山)에서 나와서 청풍군(淸風郡) 북진(北津)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사계(沙溪) : 현 남쪽 5리에 있다. 부곡산(釜谷山)에서 나와서 또 서쪽으로 흘러 광탄(廣灘)에 들어간다.
둔지천(屯池川) : 현 서쪽 43리에 있다. 가질문산(加叱文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청풍군 북진으로 들어간다.
의림지(義林池) : 현 북쪽 10리에 있다. 그 깊이가 헤아릴 수 없고, 관개(灌漑)하는 것이 대단히 넓다.

 

토산 순채[蓴] : 의림지(義林池)에서 난다.

철(鐵) : 현 북쪽 미고개(未古介)에서 난다. 대추[棗]ㆍ봉밀(蜂蜜)ㆍ송심(松蕈)ㆍ자초(紫草)ㆍ백화사(白花蛇)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苓)ㆍ신감채(辛甘菜)

신증 영양각(羚羊角)ㆍ방풍(防風)

 

신증궁실 치헌(癡軒) : 객관(客館) 서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천남역(泉南驛) : 현 서쪽 6리에 있다.

보통원(寶通院) : 현 안에 있다.
유원(楡院) : 현 동쪽 15리에 있다.
박달원(朴達院) : 박달현(朴達峴) 밑에 있다.
황간원(黃澗院) : 현 서북쪽 27리에 있다.

신증 둔지원(屯池院) : 현 서쪽 43리에 있다.

불우 소악사(小岳寺) : 대덕산(大德山)에 있다.
공전사(公田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의암사(義巖寺) : 대덕산에 있다.
감암사(紺巖寺) : 감암산(紺巖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용두산(龍頭山)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의천루(義泉樓) : 예전에 객관 동쪽에 있었다.
원림부곡(員林部曲)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양성부곡(陽城部曲) : 현 북쪽 25리에 있다.

소당부곡(小堂部曲)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지금은 소탕리(所湯里)라고 일컫는다.

산척처(山尺處) : 현 서쪽 41리에 있다.
공재소(空梓所) : 현 서쪽 51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동면(東面) : 처음이 5리, 끝이 20리이다.
남면(南面) : 위와 같다.
북면(北面) :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현좌(縣左) : 동쪽으로 끝이 10리이다.
현우(縣右) : 서쪽으로 끝이 30리이다.

근좌(近左) : 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근우(近右)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원서(遠西) : 서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70리이다.

 

○ 원림부곡(員林部曲)은 남쪽으로 20리, 양성부곡(陽城部曲)은 북쪽으로 25리, 소당부곡(小堂部曲)은 서쪽으로 20리인데, 지금은 소탕리(所湯里). 산척처(山尺處)는 서쪽으로 40리, 공재소(空梓所)는 서쪽으로 5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현의 북쪽이다.
제비랑고성(齊非郞古城)ㆍ대덕산고성(大德山古城)ㆍ감악산고성(紺岳山古城) : 둘레가 2천 6백 척인데 너무 험해서 쌓을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음성현]

 

 

동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8리이고, 북쪽으로 충주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18리, 청안현(淸安縣)경계까지 35리이고, 서쪽으로 진천현(鎭川縣) 경계까지 40리이고, 서울까지 2백 48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잉홀현(仍忽縣)인데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흑양군(黑壤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다. 고려(高麗)에서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잉홀(仍忽)ㆍ설성(雪城)ㆍ잉근내(仍斤內) : 육익(六翼)

 

산천 가섭산(迦葉山) : 현 북쪽 8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정자산(亭子山) : 현 동남쪽 10리에 있다.
품현(品峴) : 현 서쪽 10리에 있다.

사장산(沙將山) : 현 서북쪽 10리에 있다.
수정산(水精山) : 현 동쪽 3리에 있다.
보현산(普賢山)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밀암(密巖) : 산성(山城) 밑에 있다.
웅암(熊巖) : 현 서남쪽 10리에 있다.
옥천산(玉川山) : 현 남쪽 5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

봉수 가섭산 봉수(迦葉山烽燧) : 동쪽으로 충주 마산(馬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충주 망이산(望夷山)에 응한다.

 

누정 의송정(倚松亭) : 객관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감원역(坎原驛) : 현 서쪽 1리에 있다.
양혜원(楊惠院) : 현 남쪽 9리에 있다.
장신원(長信院) : 현 서쪽 19리에 있다.

 

불우 서가섭사(西迦葉寺)ㆍ상봉악사(上鳳岳寺) : 모두 가섭산(迦葉山)에 있다.
성주사(聖住寺) :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고산성(古山城) : 수정산(水精山) 위에 있다.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2백 71척이고, 높이가 10척 남짓이고, 안에는 우물 하나가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성 남쪽에 고읍(古邑)의 유지(遺址)가 있는데 관평(官坪)이라고 부른다.

 

금촌부곡(金村部曲) : 현 서쪽 15리에 있다.
파천부곡(巴川部曲) : 현 남쪽 20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1895)년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선조(宣祖) 25년(1592)에 청안(淸安)으로 예속시켰다가 광해주 10년(1618)에 복구시켰다.
군명 설성(雪城) 관원 현감(縣監) : 충주 진관병마절제도위(忠州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방면 동도(東道) : 끝이 5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근서(近西)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원서(遠西)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영춘현]

 

 

동쪽으로 경상도(慶尙道)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36리이고, 남쪽으로 단양군(丹陽郡) 경계까지 58리이고, 서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5리이고, 북쪽으로 강원도(江原道) 영월군(寧越郡) 경계까지 31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4백 6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을아단현(乙阿旦縣)인데 신라에서 자춘(子春)으로 고치고 내성군(奈城郡)의 영현(領縣)을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쳐 원주(原州)에 붙였다.

 

본조(本朝) 공정왕(恭靖王) 원년(1398)에 옮겨서 본도(本道)에 예속시켜 비로소 감무(監務)를 두었고, 태종(太宗) 13년에 규례에 따라 고쳐 현감(縣監)으로 만들었다.

 

속현 어상천현(於上川縣) : 현 서쪽 37리에 있다. 관사와 군창(軍倉)이 있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을아단(乙阿旦)ㆍ자춘(子春)

 

산천 북우이산(北亏尒山) : 현 동쪽 1리에 있다.

성산(城山) : 현 남쪽 3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아래에 석굴(石窟)이 있어 높이가 11척 남짓이고, 넓이가 10여 척쯤 되며, 깊숙히 들어가 끝이 없고 물이 철철 나와 깊이가 무릎에 닿는데, 맑고 차갑기가 얼음과 같다.

 

고을 사람이 횃불 10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다가 구멍은 오히려 끝나지 않았는데 횃불이 다되어 돌아왔다.

 

소백산(小白山) : 현 동남쪽 40리에 있다. 또 경상도 풍기군조(豐基郡條)에 있다.
화산(華山) : 현 서쪽 3리에 있다.
어라산(於羅山) : 현 서쪽 58리에 있다.
가라산(加羅山) : 현 서쪽 33리에 있다.
삼타산(三朶山) : 현 서쪽 38리 제천현(堤川縣) 경계에 있다.

백아곡산(白阿谷山) : 현 남쪽 30리에 있다.

병북산(兵北山) : 현 동쪽 7리에 있다.
별퇴산(別退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성동산(城洞山) : 현 남쪽 7리에 있다.
적고지산(笛古之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비마라산(毗摩羅山) : 현 서쪽 8리에 있다. 아래에 큰 강이 있고 낭떠러지를 따라 석벽을 파서 길을 냈는데, 길이 대단히 위태롭고 험하다.

 

중현(重峴) : 현 서쪽 45리 제천현 경계에 있다.
적현(赤峴) : 현 서쪽 25리에 있다.
마아현(馬兒峴) : 현 동쪽 30리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경계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현 서남쪽 48리 단양군(丹陽郡) 경계에 있다.

 

남진(南津) : 현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 금천(金遷)으로 흘러 들어간다.

눌어탄(訥魚灘) : 현 북쪽 2리에 있다. 영월군(寧越郡) 금장강(錦障江)의 하류이다.

토산 대추[棗]ㆍ석심(石蕈)ㆍ잣[海松子]ㆍ인삼(人蔘)ㆍ백옥(白玉) : 현 서쪽 우구리산(牛仇里山)과 창전산(昌田山)ㆍ사고개산(沙古介山) 등 처에서 산출한다.

 

봉밀(蜂蜜)ㆍ자초(紫草)ㆍ황양(黃楊)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 신증 영양각(羚羊角)ㆍ석종유(石鍾乳) : 현 남쪽 3리 바위 구멍 사이에서 나온다.

 

신증누정 온진정(溫眞亭) : 객관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오사역(吾賜驛) : 현 북쪽 48리에 있다.

사원(斜院) : 현 서쪽 18리에 있다.
의통원(義通院) : 현 서쪽 52리에 있다.
덕통원(德通院) : 현 남쪽 54리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성산(城山)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입석부곡(立石部曲) : 현 북쪽 45리에 있다. 지금은 가개전촌(駕介田村)이라고 일컫는다.
답곡부곡(沓谷部曲) : 현 동쪽 6리에 있다.

소치곡부곡(所耻谷部曲) : 현 서쪽 56리에 있다. 지금은 수출지촌(水出只村)이라고 일컫는다.

택평소(澤坪所) : 현 서쪽 35리에 있다.

성산고성(城山古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5백 23척이고, 높이가 11척이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지금은 반이 무너졌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25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7리, 끝이 30리이다.
대곡(大谷)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가야(加耶) : 서쪽으로 처음이 25리, 끝이 40리이다.

어산천(於山川) : 서북쪽으로 처음이 35리, 끝이 50리이다.
거의곡(車衣谷)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40리이다.

 

○ 입석부곡(立石部曲)은 북쪽으로 45리에 있는데, 지금 가개전촌. 답곡부곡은 동쪽으로 6리, 소치곡부곡은 서북쪽으로 56리인데, 지금 수출지촌(水出只村). 택평소(澤坪所)는 서쪽으로 35리이다.

토산 누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연풍현]

 

 

동쪽으로 경상도 문경현(聞慶縣) 경계까지 11리이고, 남쪽으로 문경현 경계까지 13리이고, 서쪽으로 괴산군(槐山郡) 경계까지 33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50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3백 6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상모현(上芼縣)이다. 고려(高麗) 현종(顯宗) 9년(1018)에 장연(長延)으로 고치고 장풍현(長豐縣)과 함께 충주(忠州)에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3년(1394)에 두 현(縣)을 합하여 감무(監務)를 두고 장풍현이라 일컬었고,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13년에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만들었다.

 

세종(世宗) 11년(1429)에 충주의 동촌(東村)을 베어 붙이고, 성종(成宗) 7년(1476)에 또 충주의 수회촌(水回村)을 베어서 붙였다.

 

관원 현감(縣監)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상모(上芼)ㆍ장연(長延)

 

산천 계립령(鷄立嶺) : 세속에서 마골재[麻骨岾]라 한다. 현 북쪽 43리에 있다. 고구려의 온달(溫達)이 이른바,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서쪽이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돌아오지 않겠다." 한 것이 이 땅이다.

 

주정산(周井山) : 현 북쪽 38리에 있다.

조령(鳥嶺) : 초점(草岾)이라고도 한다. 현 동북쪽 15리 경상도 문경현 경계에 있는데, 험하고 막힌 요해지(要害地)이다.
이화현(伊火峴) : 현 동쪽 7리, 문경현 경계에 있다.

 

공정산(公正山) : 현 동쪽 5리에 있다.
박달산(朴達山) : 현 서북쪽 34리에 있다.
정자산(亭子山) : 장풍현에 있다.
경항산(景項山) : 현 동북쪽 20리에 있다.

 

희양산(曦陽山) : 현 동남쪽 20리에 있다. 또한 문경현 조에 보인다.
마본산(馬本山) : 현 서쪽 22리에 있다.
만수산(萬壽山) : 현 동북쪽 35리에 있다.
장항산(場項山) : 현 북쪽 37리에 있다.

송현(松峴) : 현 서북쪽 20리에 있다.
우점(牛岾) : 현 북쪽 10리에 있다.

 

이화천(伊火川) : 현 서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이화현(伊火峴)에서 나오고 하나는 조령에서 나와서 합류하여 괴산군(槐山郡) 괴탄(槐灘)으로 들어간다.

 

온정(溫井) : 현 북쪽 30리, 안부역(安富驛) 서쪽에 있다.
토산 송심(松蕈)ㆍ석심(石蕈)ㆍ신감채(辛甘菜)ㆍ잣[海松子]ㆍ봉밀(蜂蜜)

 

봉수 마골점 봉수(麻骨岾烽燧) : 동쪽으로 문경현 탄항산(炭項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주정산(周井山)에 응한다. 주정산 봉수(周井山烽燧) : 북쪽으로 충주 대림산(大林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마골재[麻骨岾]에 응한다.

 

학교 향교(鄕校)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안부역(安富驛) : 현 북쪽 28리에 있다.
신풍역(新豐驛) : 현 북쪽 9리에 있다.
신혜원(新惠院) : 현 북쪽 20리에 있다.
온정원(溫井院) : 온정 곁에 있다.
연경원(延慶院) : 현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각연사(覺淵寺) : 정자산(亭子山)에 있다.
원통사(元通寺) : 장항산(場項山)에 있다.
선정사(禪頂寺) : 박달산(朴達山)에 있다.
심곡사(深谷寺) : 공정산(公正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현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현 북쪽 1리에 있다. 여단(厲壇) : 현 북쪽에 있다.
고적 장풍 폐현(長豐廢縣) : 현 서쪽 20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방면 현내(縣內) : 끝이 15리이다.

고사리(古沙里) : 동쪽으로 처음이 2리, 끝이 40리이다.
수회(水回) : 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면의(勉義)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5리이다.
장풍(長豐) : 서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토산 대추[棗]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단양군]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豐基郡) 경계까지 29리이고, 남쪽으로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경계까지 36리이고, 서쪽으로 청풍군(淸風郡) 경계까지 22리이고, 북쪽으로 제천현(堤川縣) 경계까지 52리이고, 영춘현(永春縣) 경계까지 43리이고, 서울까지 3백 5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인데 혹은 적성(赤城)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때에 내제군(奈堤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단산현(丹山縣)으로 고쳤고, 현종(顯宗) 9년(1018)에 원주(原州)에 붙였다가 충주(忠州)에 옮겨 붙였다.

 

합단(哈丹)의 난에 고을 사람들이 능히 적을 막았으므로 그 공을 상주어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숙왕(忠肅王) 5년(1318)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하여 군(郡)으로 만들었는데, 본조(本朝)에서 인습하였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적산(赤山)ㆍ적성(赤城)ㆍ단산(丹山).

산천 올산(兀山) : 군 서쪽 2리에 있다. 혹은 소유올산(所由兀山)이라고도 한다.
가은암산(加隱巖山) : 군 서쪽 17리에 있다.

죽령(竹嶺) : 군 동쪽 30리, 경상도 풍기군 경계에 있다.
건지산(乾止山) : 군 남쪽 15리에 있다.
상악산(上嶽山) : 군 서쪽 13리에 있다.


가은암산(加隱巖山)과 서로 연하여 몹시 험하고 막혔다. 산 꼭대기에 돌 우물 2개가 있는데, 가물면 비를 빈다.


여물진산(餘勿眞山)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성산(城山) : 군 북쪽 3리에 있다.
계두산(鷄頭山) : 군 남쪽 20리에 있다.

소백산(小白山) : 군 동쪽 35리에 있다.
두혈산(頭穴山) : 군 남쪽 8리에 있다.
객산(客山) : 군 북쪽 30리에 있다.
갑산(甲山) : 군 북쪽 40리에 있다.


연비산(鷰飛山) : 군 서쪽 10리에 있다. 높고 크고 몹시 험하며 상악산과 마주보고 있다. 가운데에는 큰 내가 있어 흘러 지나가는데,바로 상진(上津)의 큰 물줄기이다.

 

금수산(錦繡山) : 군 북쪽 20리에 있다.
가문현(加文峴) : 매포현(買浦縣) 동북쪽 10리에 있다. 길이 대단히 험하고 좁다. 또한 영춘현조(永春縣條)에도 보인다.


상진(上津) : 군 북쪽 13리에 있다. 혹은 마진(馬津)이라고도 한다. 근원이 강능부(江陵府) 오대산(五臺山)에서 나와서 흘러 충주(忠州) 금천(金遷)으로 들어간다.

 

하진(下津) : 군 서쪽 4리에 있으니, 곧 상진(上津)의 하류이다.
소요항탄(所要項灘) : 군 서쪽 5리에 있으니, 곧 하진(下津)의 하류이다.
남천(南川) : 군 서쪽 30보(步)에 있다. 근원이 경상도 예천군(醴泉郡) 작성산(鵲城山)에서 나와서 이요루(二樂樓) 앞을 지나 하진으로 들어간다.

 

북평천(北坪川) : 군 북쪽 5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죽령(竹嶺)에서 나오고 하나는 풍기군(豐基郡) 축점(杻岾)에서 나와서 장림역(長林驛) 앞에서 합류하여 상진으로 들어간다.

 

신증 불암천(佛巖川) : 군 남쪽 20리에 있다. 경치가 좋다.
도담(島潭) : 군 북쪽 24리에 있다. 세 바위가 못 가운데 우뚝 솟아 있고, 도담에서 흐름을 거슬러서 수백 보쯤 가면 푸른 바위가 만길이나 된다. 황양목(黃楊木)과 측백(側柏)이 돌 틈에서 거꾸로 났고, 바위 구멍이 문과 같아서 바라보면 따로 한 동천(洞天)이 있는것 같다.

 

구담(龜潭) : 군 서쪽 20리에 있다.
토산 대[竹]ㆍ대추[棗]ㆍ옥석(玉石) : 군 동쪽 덕상동(德上洞)에서 산출된다.


먹[墨] : 품질이 가장 좋다. 단산오옥(丹山烏玉)이라고 한다. 송심(松蕈)ㆍ해송자(海松子)ㆍ칠(漆)ㆍ자초(紫草)ㆍ봉밀(蜂蜜)ㆍ석심(石蕈)ㆍ복령(茯苓)ㆍ안식향(安息香)ㆍ백화사(白花蛇)ㆍ오미자(五味子)ㆍ황양(黃楊)ㆍ눌어(訥魚)ㆍ인삼(人蔘)ㆍ신감채(辛甘菜)ㆍ청석(靑石) : 군 북쪽 약야촌(若也村)에서 난다. 청금석(靑金石) 같은데 금은 없다.

 

신증 녹반(綠礬) : 군 북쪽 35리, 평동(坪洞)에서 난다.

봉수 소이산 봉수(所伊山烽燧) : 동쪽으로 경상도 풍기군 죽령(竹嶺)에 응하고, 서쪽으로 청풍군(淸風郡) 오현(吾峴)에 응한다.

 

누정 이요루(二樂樓) : 군 서쪽 30보에 있다.

학교 향교(鄕校) : 군 남쪽 1리에 있는데, 풍화루(風化樓)가 있다. 영락(永樂) 14년(1416)에 지군(知郡) 이작(李作)이 세웠는데, 기(記)가 있다.

 

역원 영천역(靈泉驛) : 군 북쪽 40리에 있다.
장림역(長林驛) : 군 동쪽 10리에 있다.
보통원(普通院) : 군 동쪽 2리에 있다.
앵원(鶯院) : 군 동쪽 10리에 있다.
용부원(用富院) : 군 동쪽 20리에 있다.
장회원(長會院) : 군 서쪽 20리에 있다.
유덕원(有德院) : 군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원당사(原堂寺)ㆍ개원사(開原寺)ㆍ자복사(資福寺) : 모두 금수산(錦繡山)에 있다.
법호사(法護寺) : 건지산(乾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올산(兀山)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죽령사(竹嶺祠) : 사전(祀典) 소사(小祀)에 실려 있다. 봄가을로 향(香)과 축문(祝文)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고적 매질포(買叱浦) : 군 북쪽 25리에 있으며, 관사(館舍)가 있다.
금의곡소(金衣谷所) : 군 동쪽 30리에 있다.

 

가은암산성(加隱巖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3천 18척인데, 지금은 모두 퇴락하였다. 안에 세 샘이 있는데 험하고 막혔다. 고려 말년에 제천(堤川) 청풍(淸風)과 본군 사람이 여기에서 왜적을 피하였다.

 

성산성(城山城) : 돌로 쌓았으며 주위가 1천 7백 68척이다. 안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하였다.

 

방면 읍내 : 끝이 1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남면(南面) : 위와 같다.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조산촌(造山村) : 북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소야촌(所也村) : 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北面) : 동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 금의곡소(金衣谷所)는 동쪽으로 30리이다.

성지 독락성(獨樂城) : 군의 동남쪽에 있는데, 서ㆍ남ㆍ북쪽은 몹시 험악하고 동쪽만은 사다리가 만들어져 있지만, 이리저리 돌이 흩어져 험하다. 중턱쯤 올라가면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옛날 난을 피했던 곳이다.

 

진도 상진(上津) : 마진(馬津)이라고도 하며, 동북쪽으로 20리에 있다.
하진(下津) : 서쪽으로 5리에 있다.

토산 대추[棗]ㆍ칠(漆)ㆍ쏘가리[錦鱗魚]
누정 봉서루(鳳棲樓) : 읍내에 있다.
창하정(蒼霞亭) : 구담(龜潭)에 있다.
서벽정(棲碧亭) : 사인암(舍人巖)의 돌 사이에 있다.
수운정(水雲亭) : 운암(雲巖) 곁에 있다.

사원 단암서원(丹巖書院) : 현종 임인년(1662)에 세웠으며 임신년(1692)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4권 - 충청[1]-[괴산군]

 

 

동쪽으로 연풍현(延豐縣) 경계까지 22리이고, 남쪽으로 청안현(淸安縣) 경계까지 38리이고, 서쪽으로 음성현(陰城縣) 경계까지 29리이고, 북쪽으로 충주(忠州) 경계까지 17리이고, 서울까지의 거리는 2백 94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잉근내군(仍斤內郡)인데 신라에서 괴양군(槐壤郡)으로 고치고, 고려에서 괴주(槐州)로 고치었다. 현종(顯宗) 9년(1018)에 충주(忠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고, 본조(本朝) 태종(太宗) 3년(140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하고,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규례에 따라 군(郡)을 만들었다.

 

관원 군수(郡守)ㆍ훈도(訓導) : 각각 한 사람이다.
군명 잉근내(仍斤內)ㆍ괴양(槐壤)ㆍ괴주(槐州)ㆍ시안(始安)

 

산천 금산(錦山) : 군 서쪽 2리에 있는데, 진산(鎭山)이다.
대원산(大原山) : 군 동쪽 1리에 있다.
원성산(元城山) : 군 동쪽 21리에 있다. 산 남쪽은 바로 경상도 경계이다.
송명산(松明山) : 군 동쪽 12리에 있다.
보광산(普光山) : 군 남쪽 26리에 있다. 산 꼭대기에 작은 우물이 있다.
남산(南山) : 군 남쪽 3리에 있다.

군대산(軍岱山) : 군 동쪽 13리에 있다.
소마산(小馬山) : 군 서쪽 25리에 있다.
목소산(目所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송현(松峴) : 군 서쪽 20리에 있다.
모현(茅峴) : 군 동쪽 20리에 있다.
구을현(仇乙峴)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도차의현(道車衣峴) : 군 북쪽 20리에 있다.

 

괴진(槐津) : 군 동쪽 7리에 있는데, 곧 충주(忠州) 달천(達川)의 상류이다.
남천(南川) : 군 남쪽 2리에 있다. 그 근원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구을현에서 나오고 송현에서 나온다.

북천(北川) : 군 북쪽 1리에 있다. 근원이 도차의현에서 나와서 대원산(大原山) 밑을 지나 남천과 합류하여 괴탄(槐灘)으로 흘러 들어간다.

 

토산 칠(漆)ㆍ자초(紫草)ㆍ인삼(人蔘)ㆍ봉밀(蜂蜜)ㆍ안식향(安息香)ㆍ복령(茯笭)ㆍ백화사(白花蛇)ㆍ눌어(訥魚)

 

누정 존빈루(尊賓樓)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군수 안요경(安堯卿)이 중수하고, 관찰사 이숙함(李叔瑊)이 누(樓)의 편액(扁額)을 고쳐 읍취(挹翠)라 하였다.

 

피서정(避暑亭) : 객관 서쪽에 있다.
학교향교(鄕校) : 군 서쪽 1리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군 북쪽 2리에 있다.

역원 인산역(仁山驛) : 군 동북쪽 2리에 있다.
탄제원(灘濟院) : 괴진(槐津) 언덕에 있다.
풍정원(楓井院) : 군 남쪽 13리에 있다.
북암원(北巖院) : 군 북쪽 5리에 있다.
반상원(伴相院) : 군 동쪽 7리에 있다.
익철원(益哲院) : 군 서쪽 34리에 있다.

 

신증교량 괴탄교(槐灘橋) : 군 동쪽 7리에 있다.

불우 의상암(義相庵) : 원성산(元城山)에 있다.
성불사(成佛寺) : 송명산(松明山)에 있다.
보광사(普光寺)ㆍ소마사(小馬寺) : 모두 보광산(普光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군 서쪽에 있다. 신증 지금은 옮겨서 군 동쪽 2리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군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유창(柳倉) : 옛날에는 세이창(世伊倉)이라고 일컬었다. 군 동쪽 21리에 있다. 옛날 공세(貢稅)를 거두던 곳이다.


세우처(世于處)ㆍ사량저처(沙良渚處) : 군 서쪽 20리에 있다.

방면 일도(一道) : 서쪽으로 끝이 5리이다.
이도(二道) : 서쪽으로 처음이 5리, 끝이 10리이다.
동상(東上)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동중 : 처음이 10리, 끝이 35리이다.


동하(東下)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북상(北上)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북하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남상(南上) : 서남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5리이다.
남중(南中) : 처음이 8리, 끝이 20리이다.
남하 : 동남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40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성지 고성(古城) : 군대산(軍岱山)에 있으며, 백화성(白和城)이라 칭한다.
진도 괴탄진(槐灘津) : 연풍(延豐)으로 통하며, 비가 오면 다리를 설치한다.
토산 쏘가리[錦鱗魚]ㆍ대추[棗]
누정 읍취루(挹翠樓)

 

 

 

 

신증동국여지승람 - 충청도

 

 

예전 마한(馬韓) 지역인데 고구려와 백제가 그 땅을 나누어 차지하였다가, 뒤에 모두 신라에 병합되었다. 고려 성종(成宗) 14년(995)에 나라 안을 나누어 10도(道)를 만드는데, 충주(忠州)ㆍ강주(剛州)ㆍ환주(歡州) 등 13주(州)로 중원도(中原道)를 만들고, 공주(公州)ㆍ운주(運州) 등 11주로 하남도(河南道)를 만들었다.

 

예종(睿宗) 원년(1105)에 관내도(關內道)에 합하여 양광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일컬었다가 명종(明宗) 원년(1170)에 나누어 두 도(道)를 만들었고, 충숙왕(忠肅王) 원년(1313)에 다시 합하여 한 도를 만들어 양광도(楊廣道)라 일컬었다.

 

공민왕(恭愍王) 5년(1351)에 충청도(忠淸道)로 일컫고, 신우(辛禑) 말년에 본도의 평창군(平昌郡)을 베어서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본조(本朝) 태조(太祖) 4년(1395)에 양주(楊州)ㆍ광주(廣州)의 관할인 군ㆍ현은 경기(京畿)에 붙이고,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공주(公州)ㆍ홍주(洪州)의 관할인 군ㆍ현은 그대로 충청도(忠淸道)로 일컬어 각각 관찰사(觀察使)를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원년(1398)에 영월군(寧越郡)을 베어 강원도(江原道)에 붙이고 강원도 영춘현(永春縣)을 본도에 붙였으며, 태종(太宗) 13년(1413)에 여흥(驪興)ㆍ안성(安城)ㆍ음죽(陰竹)ㆍ양성(陽城)ㆍ양지(陽智)를 베어 경기에 붙이고, 경상도(慶尙道) 옥천(沃川)ㆍ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청
산(靑山)ㆍ보은(報恩)을 본도에 붙였다. 목(牧) 4, 군(郡) 12, 현(縣) 38개를 관할한다.

 

관원 관찰사(觀察使) : 한 사람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가 겸한다.
병마우후(兵馬虞候) : 한 사람인데, 종3품(從三品)이다. 여러 도가 같다.
수군우후(水軍虞候) : 한 사람인데, 정4품(正四品)이다. 여러 도가 같다.
도사(都事) : 한 사람이다.

 

심약(審藥) : 두 사람인데, 하나는 관찰사도(觀察使道)이고 하나는 병마절도사도(兵馬節度使道)이다.
검률(檢律) : 한 사람이다.

 

연산군(燕山君) 11년(1505)에 충공도(忠公道)로 고쳤다 : 진천(鎭川)ㆍ괴산(槐山)ㆍ평택(平澤)ㆍ아산(牙山)을 경기도에서 이속시켰다가 중종(中宗) 원년(1506)에 다시 환원했다.

 

명종(明宗) 5년(1550)에 청공도(淸公道)로 고치고, 광해주(光海主) 5년(1608)에 공청도(公淸道)로 고치고, 인조(仁祖) 6년(1628)에 공홍도(公洪道)로 고쳤다가 24년(1646)에 홍충도(洪忠道)로 고치고, 효종 7년(1656)에 공홍도(公洪道)로 고치고, 현종(顯宗) 11년(1670)에 충홍도(忠洪道)로 고치고, 숙종(肅宗) 6(1680)년에 공홍도로 고치고, 영종(英宗) 5년(1729)에 공청도(公淸道)로 고쳤다가 7년에 충청도로 고쳤다.

 

정종(正宗) 원년(1776)에 홍충도로 고치고, 순조(純祖) 25년(1825)에 공충도(公忠道)로 고쳤다가 34년에 충청도로 고쳤는데, 철종(哲宗) 13년(1862)에 공충도로 고쳤다. 모두 54읍(邑)이다. 《大東地誌》

 

고종(高宗) 33년(1896)에 좌우도를 남북도로 하였다. 북도는 충주(忠州)가 다스리는데 관할 영군은 17개이다. :


충주(忠州)ㆍ청주(淸州)ㆍ옥천(沃川)ㆍ진천(鎭川)ㆍ청풍(淸風)ㆍ괴산(槐山)ㆍ보은(報恩)ㆍ단양(丹陽)ㆍ제천(堤川)ㆍ회인(懷仁)ㆍ청안(淸安)ㆍ영춘(永春)ㆍ영동(永同)ㆍ황간(黃澗)ㆍ청산(靑山)ㆍ연풍(延豐)ㆍ음성(陰城). 남도는 전에 공주가 다스렸던 37군이다. :

 

공주(公州)ㆍ홍주(洪州)ㆍ한산(韓山)ㆍ서천(舒川)ㆍ면천(沔川)ㆍ서산(瑞山)ㆍ덕천(德川)ㆍ임천(林川)ㆍ홍산(鴻山)ㆍ은진(恩津)ㆍ태안(泰安)ㆍ온양(溫陽)ㆍ대흥(大興)ㆍ평택(平澤)ㆍ정산(定山)ㆍ청양(靑陽)ㆍ회덕(懷德)ㆍ진잠(鎭岑)ㆍ연산(連山)ㆍ노성(魯城)ㆍ부여(扶餘)ㆍ석성(石城)ㆍ비인(庇仁)ㆍ남포(藍浦)ㆍ결성(結城)ㆍ보령(保寧)ㆍ해미(海美)ㆍ당진(唐津)ㆍ신창(新昌)ㆍ예산(禮山)ㆍ전의(全義)ㆍ연기(燕岐)ㆍ아산(牙山)ㆍ직산(稷山)ㆍ천안(天安)ㆍ문의(文義)ㆍ목천(木川). 후에 오천(鰲川)을 더 두어 모두 38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8]-[풍덕군]

 

 

동으로 장단부계(長湍府界)까지 39리, 남으로 통진현계(通津縣界)까지 34리, 서로 개성부계(開城府界)까지 17리, 북으로 개성부계까지 15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정주(貞州)이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개성현에 예속시켜, 상서 도성(尙書都省)의 관할을 받았다. 문종(文宗)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고, 예종(睿宗) 3년(1108)에 승천부(昇天府)로 고쳐서 지부사(知府事)를 두었으며, 충선왕(忠宣王) 2년(1310)에 지해풍군사(知海豐郡事)로 강등시켰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군(郡)을 없애고,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에 붙였다가 18년에 군으로 복구시켰다. 세종 24년(1442)에 덕수현(德水縣)을 합병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승천부(昇天府)ㆍ하원(河源)ㆍ정주(貞州)ㆍ해풍(海豐)

 

산천 백마산(白馬山)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말흘산(末訖山) : 군의 북쪽으로 1백 보(步) 되는 데 있다.
덕적산(德積山) : 군의 동쪽 30리에 있다.
삼성당산(三聖堂山) : 덕수현(德水縣) 남쪽 5리에 있다.
여리산(如利山) : 덕수현 서쪽 5리에 있다.
마군산(馬群山) : 덕수현 서남쪽 10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마제산(馬蹄山)이다.

 

바다 : 군의 서쪽 20리에 있다.
승천포(昇天浦) : 군의 남쪽 15리에 있다.
하원도(河源渡) : 군의 남쪽 30리에 있는데,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일찍이 공주와 함께 여기서 조수를 구경하였다.

인녕도(引寧渡) : 덕수현에 있는데, 세속에서는 인월곶(引月串)이라고 부른다. 군에서 남쪽으로 40리 떨어졌으니, 양화도(楊花渡) 하류이다.

 

조강도(祖江渡) : 덕수현에 있다.

동강(東江) : 군의 동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데, 남도(藍島)가 있다.
화장포(化莊浦) : 동강 남쪽 10리에 있다.

사천(沙川) : 덕수현 동쪽 9리에 있는데, 개성부 천마(天磨)ㆍ성거(聖居)ㆍ송악(松岳)의 여러 산의 물이 여기서 합쳐 동강으로 들어간다.


마지(馬池) : 덕수현 북쪽 2리에 있다.

토산 정옥사(碇玉沙) : 군의 북쪽에 있는 흥왕사(興王寺)에서 나온다.
석회(石灰)ㆍ조기〔石首魚〕ㆍ숭어ㆍ농어[鱸魚]ㆍ붕어ㆍ낙지ㆍ석굴ㆍ토굴ㆍ바지락ㆍ게ㆍ백하.

 

봉수 덕적산(德積山) 봉수 : 동으로 교하현(交河縣) 검단산(黔丹山)에 응하고, 북으로 개성부 송악산 성황당에 응한다.

누정 관호정(觀湖亭) : 객관(客館) 북쪽에 있다.

학교 향교 : 군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중련역(中連驛)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승천포원(昇天浦院) : 승천부(昇天府) 옛 성(城) 밑에 있다.
냉정원(冷井院) : 군 남쪽 30리에 있다.
광대원(光大院) : 군 남쪽 30리에 있다.
임해원(臨海院) : 군 남쪽 15리에 있다.

 

불우 연경사(衍慶寺) : 부소산(扶蘇山)에 있다.
흥교사(興敎寺) : 백련산(白蓮山)에 있다.

 

경천사(敬天寺) : 부소산에 있다. 이 절에 13층의 석탑(石塔)이 있는데,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게 만들었다.

 

세상에 전하는 말이, "원(元) 나라 탈탈 승상(脫脫丞相)이 원찰(願刹)로 만들고, 진령군(晉寧君) 강융(姜融)이 원 나라에서 공장(工匠)을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 하는데, 지금까지 탈탈 승상과 강융의 화상이 있다. 또 절 동쪽 산에서 이상한 돌이 나는데, 세상에서, '침향석(沈香石)'이라 한다.

 

보리암(普利菴) : 마군산(馬群山)에 있다.
백운사(白雲寺) : 여리산(如利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승천포성(昇天浦城)에 있다.
여단 : 군의 북쪽에 있다.

 

덕적산사(德積山祠)ㆍ백마산사(白馬山祠)ㆍ삼성당사(三聖堂祠) : 고려 충숙왕(忠肅王) 6년에 덕수현에서 사냥하다가 해동청(海東靑)과 내구(內廐)의 말이 죽으니, 성황과 신사를 불사르도록 명한 것이 바로 이곳이다.

 

주작신당(朱雀神堂) : 보통 당두산(堂頭山)이라 하는데, 옛 장원정(長源亭) 서남쪽 2리 바닷가에 있다.

 

능묘 제릉(齊陵) : 군의 북쪽 15리에 있는데, 우리 태조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능이다.
후릉(厚陵) : 군 동쪽 10리에 있다. 공정대왕(恭靖大王)의 능은 정안왕후(定安王后)와 합장하였다.

 

고적 중방제(重房堤) : 군 남쪽 4리에 있는데, 고려에서 중방비보(重房裨補)라 칭하여, 매양 봄가을에 반주(班主)가 부변(府兵)을 거느리고 수축(修築)하여 남북 수문(水門)을 열어놓고 논에 물을 대도록 했는데, 길이는 8리요, 넓이는 3리다.

 

고정주(古貞州) : 승천부(昇天府)의 옛터인데, 지금 승천포(昇天浦) 고성(古城) 북쪽 2리에 있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정주의 치소(治所)는 또 옛터 서편에 있었는데, 지금은 바다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한다.

 

덕수 폐현(德水廢縣) : 군 동쪽 30리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 덕물현(德勿縣)으로, 인물(仁物)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고려에서 그 이름을 그대로 두고 현종 9년(1018)에 개성현(開城縣)에 예속시키고 상서도성의 관할로 만들었다.

 

문종 10년(1056)에 흥왕사(興王寺)를 덕수현에 새로 짓고, 현치(縣治)를 양주(楊州)로 옮겼다가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 원년(1389)에 감무(監務)를 두었는데, 본조 태조 7년(1398)에 감무를 없애고 풍덕에 붙였다.

장원정(長源亭) : 군의 서쪽 25리에 있다.

수강궁(壽康宮) : 충렬왕 4년(1278)에 수강궁을 덕수현 마제산(馬蹄山)에 지었는데, 이 때부터 항상 여기서 사냥을 구경했다.

임해궁(臨海宮) : 옛터는 승천포 서안(西岸)에 있다.
보법사(報法寺) : 말흘산(末訖山)에 있다.
흥왕사(興王寺) : 옛터는 덕적산(德積山) 남쪽에 있다.

 

연혁 효종(孝宗) 기축년(1649)에 부로 승격시켰다가, 순조(純祖) 23년(1823)에 고쳐서 개성부(開城府)에 속하게 하였는데, 고종 3년(1866)에 복구하고 32년(1895)에 개성을 넣었다가 잠시 후 다시 군을 두었다. 《文獻備考》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8]-[연천현]

 

 

동으로 영평현(永平縣) 경계까지 18리, 남으로 양주(楊州) 경계까지 13리, 서로 마전군 경계까지 15리, 북으로 삭녕군 경계까지 27리, 강원도 철원부 경계까지 16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43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공목달현(工木達縣)으로 웅섬산(熊閃山)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공성(功成)으로 고쳐서 철성군(鐵城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장주(漳州)로 고쳤는데, 장(漳)은 장(獐)으로도 쓴다. 성종(成宗) 14년(995)에 단련사(團練使)를 두었고, 목종(穆宗) 8년(1005)에 없앴다가 현종 9년(1018)에 동주(東州)에 예속시켰다.

 

명종(明宗) 5년(1175)에 비로소 감무를 두어서 승령(僧嶺)을 겸임했고, 충선왕(忠宣王) 때에 왕의 이름을 피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만들었다.

14년에 마전현(麻田縣)에 합병하여 마련현(麻漣縣)으로 만들었다가 16년에 다시 갈라 현으로 만들었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공목달(工木達)ㆍ웅섬산(熊閃山)ㆍ공성(功成)ㆍ장주(漳州)ㆍ연주(漣州)ㆍ장포(獐浦)

 

산천 보개산(寶蓋山) : 현 동북쪽 20리 철원(鐵原) 경계에 있다.
오봉산(五峯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견불산(見佛山) : 현 동쪽 15리에 있다.
가사평(袈裟坪) : 현 남쪽 10리에 있다.

차탄(車灘) : 현 남쪽 5리에 있는데,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서쪽 고을파(古乙坡)에서 나와 남으로 흘러 양주(楊州) 유탄(楡灘)으로 들어간다.

 

징파도(澄波渡) : 현 서쪽 45리에 있는데, 장단부 임진도 조에 자세하다.

학교 향교 : 현 동쪽 1리에 있다.
역원 옥계역(玉溪驛) : 현 북쪽 7리에 있다.

송절원(松折院) : 현 동쪽 10리에 있다.

불우 오봉사(五峯寺) : 오봉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현 남쪽 2리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총묘 강석덕(姜碩德) 묘 : 현 서쪽 17리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현종 3년(1662)에 다시 마전(麻田)에 합하였다가 전패(殿牌)는 유실되어 없어졌다. 4년에 다시 설치하였다.

읍호 장포(獐浦) : 고려 성종(成宗)이 정한 것이다. 연천(漣川).

관원 현감(縣監) : 장단진 관병마 절제도위(長端鎭管兵馬節制都尉)를 겸한다. 한 사람이다.

 

성지 보개산 고성(寶蓋山古城) : 동북쪽으로 15리에 있으며, 둘레는 4리이고, 그 가운데에 우물이 3개 있다. 면(面)엔 험준한 석문(石門)이 마주 서 있다.

 

방면 현내면(縣內面) : 끝이 20리이다.
동면(東面) : 처음이 5리이고, 끝이 10리이다.
남면(南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5리이다.
서면(西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20리이다.
북면(北面) : 처음이 10리이고, 끝이 30리이다.
상수면(上水面) : 북쪽으로 끝이 10리이다.

 

진도 시욱진(時郁津) : 북강(北江) 삭녕로(朔寧路)에 있으며, 옛날에는 징파도(澄波渡)라고 하였다. 서쪽으로는 장경석벽(長景石壁)이 보이고, 동남쪽은 석저협구(石渚峽口)로 되어 있고, 암벽 위에는 도영암(倒影菴)이 있고 그 아래에는 장군탄(將軍灘)이 있으며 그아래에는 웅연석애(熊淵石崖)로 되어 있는데, 《석문이서(石文異書)》를 보면 강(江)은 석린석묵(石鱗石墨)에서 나온다고 되어 있다.

웅연진(熊淵津)ㆍ유연진(楡淵津) : 서쪽으로 마전(麻田)과 통한다.

사원 임장서원(臨章書院) : 숙종 경인년(1710)에 건축해서 계사년에 사액(賜額)하였다.
주자(朱子) : 자세한 것은 경도(京都) 문묘(文廟) 조에 있다.

 

전고 고려 고종(高宗) 4년(1217)에 금산병(金山兵)이 징파도를 지나며 싸울 때에 우리 군대가 싸워서 물리쳤다. 신우(辛禑) 3년(1377)에 진영세(陳永世)를 파견하여 연주(漣州)를 상택(相宅)하게 하니, 영세가 돌아와서 오역(五逆)의 땅이라 도(都)를 건설할 수 없다고 상소하여 마침내 의논하여 중지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8]-[삭녕군]

 

 

동으로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22리, 강원도(江原道) 철원부(鐵原府) 경계까지 41리, 남쪽으로 장단부(長湍府) 경계까지 28리, 서쪽으로 황해도 토산현(兎山縣) 경계까지 11리, 북쪽으로 강원도 안협현(安峽縣) 경계까지 21리, 강원도 평강현(平康縣) 경계까지 61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9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소읍두현(所邑豆縣)이었는데, 신라에서 삭읍(朔邑)으로 고쳐서 토산군(兎山郡)의 영현(領縣)으로 만들었고,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승령현(僧嶺縣)은 본래 고구려 승량현(僧梁縣)인데 : 비물(非勿)이라고도 한다. 신라에서 동량(㠉梁)이라 고치고 철성군(鐵城郡)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1018)에 두 고을을 모두 동주(東州)에 붙였다. 예종(睿宗)이 비로소 승령감무(僧嶺監務)를 두고 삭녕과 합쳤다.

 

본조 태종 3년(1403)에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외가 고향이기 때문에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키고 승령을 붙이게 하였다. 14년에 안협현(安峽縣)을 없애고 예속시켜서 안삭군(安朔郡)을 만들었다. 16년에 다시 안협현을 설치하고 드디어 옛 이름으로 환원했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소읍두(小邑豆)ㆍ삭읍(朔邑)ㆍ안삭(安朔)ㆍ승령(僧嶺)ㆍ비물(非勿)ㆍ동량(㠉梁).

산천 남산(南山) : 군과의 거리가 3리이다.
승령산 : 군의 동쪽 15리 승령현에 있다.

성산(城山) : 군 동쪽 5리에 있는데, 작은 성터가 있다.


영원산(寧原山) : 군 동쪽 7리에 있다.
영원산(靈原山) : 군 남쪽 16리에 있다.
흥성산(興盛山) : 군 동쪽 25리에 있다.

검질산(儉秩山) : 군 동쪽 15리에 있다.
수청산(水靑山) : 군 동쪽 55리에 있다.


말탄산(末呑山) : 군 동쪽 50리에 있는데, 그 산 동쪽이 곧 철원부(鐵原府) 효성산(曉星山)이다.
강화평(江華坪) : 군 동쪽 40리에 있다.
방축평(防築坪) : 군 동쪽 45리에 있다.
삭녕도(朔寧渡) : 군 남쪽 5리에 있다.
장단부(長湍府) : 임진도(臨津渡)에 자세히 나왔다.

 

손청탄(孫廳灘)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은 강원도 철원부 고암산(高巖山)에서 나와서 군의 옛 승령현 서쪽을 지나 이 여울이 되었다.

 

북천(北川) : 군의 북쪽 7리에 있는데, 바로 손청탄 하류로서 군 남쪽에 이르러 삭녕도로 들어간다.

 

토산 실ㆍ삼ㆍ오미자ㆍ벌꿀ㆍ누치ㆍ쏘가리ㆍ파[蔥]: 고을 사람들이 파를 많이 심어 이익을 본다.

신증 녹반(綠礬) : 군의 북쪽 금동사(金洞寺)에서 난다.

 

학교 향교 : 군의 서쪽 2리에 있다.
불우 관음사(觀音寺) : 영원산(靈原山)에 있다.
장군사(將軍寺) : 홍성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군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하나는 성산에 있고 하나는 승령산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고승령(古僧嶺) : 현 동쪽 30리에 있다.


고삭녕(古朔寧) : 삭녕도 언덕 옆에 옛터가 있는데, 정통(正統) 신유년(1441)에 지금의 읍으로 옮겼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세종 23년(1441)에 치소(治所)를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 옛 치소는 동쪽으로 5리에 있다. 관원 군수 : 장단진 관병마 동 첨절제사를 겸하였다. 1명이다.

 

토산 인삼ㆍ녹용(鹿茸)ㆍ자초(紫草)ㆍ송이버섯[松蕈]ㆍ꿀ㆍ눌어(訥魚)ㆍ쏘가리[錦鱗魚] 등이 있다.

 

성지 고성(古城) : 동쪽으로 5리에 본읍의 옛 치소가 있다. 산 위의 작은 성에 남은 터가 있다.
역참 삭녕역ㆍ봉곡역(烽谷驛) : 승령(僧嶺)이다.

 

방면 읍내면 : 끝이 20리이다.
남면 :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동면 : 처음이 10리, 끝이 22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마장면(馬場面) : 동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40리이다.
인목(寅目) : 동북쪽으로 처음이 20이, 끝이 30리이다.
내문(乃文) : 동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60리이다.

 

진도 우화정진(羽化亭津) : 남쪽으로 5리에 큰 길이 있다.
삭녕도(朔寧渡) : 고읍의 남쪽으로 5리에 있다.

사원 표절사(表節祠) : 정조(正祖) 신해년(1791)에 사액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8]-[마전군]

 

 

동으로 연천현(漣川縣) 경계까지 19리, 남으로 적성현 경계까지 7리, 서로 장단부 경계까지 17리, 북으로 삭녕군 경계까지 21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79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마전천현(麻田淺縣)인데, 신라에서 임단(臨湍)으로 고치고 우봉군(牛峯郡)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고, 현종 9년(1018)에 장단에 붙여서 상서도성의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고,뒤에 감무를 두었다가 곧 적성현(積城縣)에 합병했다.

 

공양왕이 다시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종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문종 2년(1452)에 그 땅에 숭의전(崇義殿)이 있기 때문에 군으로 승격시켰다.

 

관원 군수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마전천(麻田淺)ㆍ이사파홀(泥沙波忽)ㆍ임단.

산천 미두산(尾頭山) : 군 동쪽 5리에 있다.
분석산(分石山) : 군 북쪽 10리에 있다.
염창산(鹽倉山) : 군 서쪽 5리에 있다.


징파도(澄波渡) : 군 동쪽 20리에 있는데, 곧 삭녕군 삭녕도 하류이다. 또한 연천현 편에 나온다.
후근도(朽斤渡) : 군 남쪽 7리에 있는데, 징파도 및 양주(楊州)의 한탄[大灘] 물이 여기서 합류한다.

토산 실ㆍ삼ㆍ누치ㆍ쏘가리ㆍ게.

 

학교 향교 : 군의 동쪽 1리에 있다.
원우 동지원(東指院) : 징파도(澄波渡) 언덕에 있다.

사묘 숭의전(崇義殿) : 군 서쪽 5리에 있는데, 본조 태조 원년(1392)에 예조에 명하여 마전현에 사당을 짓고, 고려 태조(太祖)ㆍ혜종(惠宗)ㆍ성종(成宗)ㆍ현종(顯宗)ㆍ문종(文宗)ㆍ원종(元宗)ㆍ충렬왕(忠烈王)ㆍ공민왕(恭愍王)을 제사하게 하고 제전(祭田)을 주었다.

 

사직단 : 군의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군 서쪽 3리에 있다.

여단 : 군 북쪽에 있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삭녕(朔寧)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현종(顯宗) 3년(1662)에 또 연천(漣川)으로 동왕(同王) 4년에 다시 나누었다.

 

방면 군내면(郡內面) : 끝이 15리이다.
동면 : 처음이 5리, 끝이 15리이다.
서면 :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북면 :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화진(禾津) : 처음이 15리, 끝이 20리이다.

 

진도 유연진(楡淵津) : 동쪽으로 7리에 있으며 연천과 통한다.
후연진(朽淵津) : 남쪽으로 7리에 있으며 양주(楊州))와 통하는데, 적성(積城)과 아울러 징파강(澄波江)에 있다.

 

묘전 숭의전(崇義殿) : 서쪽으로 10리 강변에 있으며, 본조 태조 임신년(1392)에 세웠는데, 처음에는 여덟 임금을 배향했으나, 세종 7년(1425)에 네 임금으로 고쳐 배향했다.

 

문종(文宗) 2년(1452)에 이름을 숭의전이라 고치고 여러 신하들을 배향하였다. 고려 태조ㆍ현종ㆍ문종ㆍ원종(元宗).

 

배향 복지겸(卜智謙) : 처음의 이름은 사현(沙現)이며, 본관은 면천(沔川)이다. 벼슬은 태사(太師)이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홍유(洪儒) : 처음의 이름은 술(術)이며, 본관은 의성(義城)이다. 벼슬은 태사이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신숭겸(申崇謙) : 처음의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벼슬은 태사이며, 시호는 장절(壯節)이다.


유금필(庾黔弼) : 평산 사람으로 벼슬은 대광(大匡),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배현경(裵玄慶) : 처음의 이름은 백옥(白玉)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벼슬은 대광이며, 시호는 무열(武烈)이다.


서희(徐熙) : 본관은 이천(利川)으로, 호는 복천(福川)이다. 벼슬은 태보내사령 시장위 송검교 병부 상서(太保內史令諡章威宋檢校兵部尙書)이다.

 

강감찬(姜邯贊) : 처음의 이름은 은천(殷川)이며, 본관은 금천(黔川)이다. 벼슬은 천수군 개국후(天水郡開國侯)로 치사(致仕)하였으며,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윤관(尹瓘) : 자는 동현(同玄)이며, 본관은 파평(坡坪)이다. 벼슬은 태보 시중(太保侍中),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김부식(金富軾) : 본관은 경주이며, 호는 뇌천(雷川)이다. 벼슬은 시중태자 집현전 대학사 낙랑군 개국후(侍中太子集賢殿大學士樂浪郡開國後)로 치사 하였으며,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김취려(金就礪) : 본관은 언양(彦陽)이고, 벼슬은 태위 시중(太尉侍中)이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조충(趙沖) : 자는 담약(湛若)이며, 본관은 횡성(橫城)이다. 벼슬은 태위평장사 증시중(太尉平章事贈侍中)이며,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김방경(金方慶) : 자는 본연(本然)이며,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벼슬은 삼중 대광 첨의중찬 상락공(三重大匡僉議中贊上洛公)으로 치사하였으며,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안우(安祐) : 본관은 탐진(耽津)이며, 벼슬은 중서평장사(中書平章事)이다.
이방실(李芳實) : 본관은 함안(咸安)이며, 벼슬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이다.
김득배(金得培) : 호는 난계(蘭溪)이며, 본관은 상주(尙州)이다.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이고,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정몽주(鄭夢周) : 경도(京都) 문묘(文廟) 편에 있다.
영(令) : 왕씨(王氏)의 세습(世襲)이다.

미강서원(湄江書院) : 숙종(肅宗) 신미년(1691)에 건축하여 계유년(1693)에 사액(賜額)하였다.
허목(許穆) : 자는 문보(文甫), 호는 미수(眉叟)이니, 본관은 양천(陽川)이다. 벼슬은 우의정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3권 - 경기[8]-[교동현]

 

 

바다 섬에 있는데, 동으로 인화석진(寅火石津)까지 10리, 서로 바다까지 27리, 남으로 바다까지 11리, 북으로 황해도 배천군(白川郡) 각산진(角山津)까지 12리, 서울과의 거리는 1백 82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 고목근현(高木根縣)인데 대운도(戴雲島)라고도 하고, 고림(高林)이라고도 하며, 달을신(達乙新)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혈구군(穴口郡)의 영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에서 그대로 두고 명종(明宗)이 감무를 두었다. 본조 태조 4년에 만호(萬戶)를 두어 지현사(知縣事)를 겸했다가 뒤에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대운ㆍ고림ㆍ고목근.

 

산천 수정산(修井山) : 현 서쪽 25리에 있다.
화개산(華蓋山) : 현 남쪽 3리에 있다.

 

응암(鷹巖) : 월곶(月串) 바다 가운데 있다.
송가도(松家島) : 현 남쪽 10리에 있으며, 주위가 26리이다.
비석진(鼻石津) : 현 동쪽 10리에 있는데, 인화석진이라고도 한다. 또 강화부 조에도 나왔다.
각산진(角山津) : 현 북쪽 21리에 있으며, 인참진(仁站津)이라고도 하는데, 황해도로 왕래하는 곳이다.

 

토산 조기ㆍ숭어ㆍ굴ㆍ바지락ㆍ조개ㆍ낙지ㆍ백하ㆍ청게ㆍ부레ㆍ소금.

 

성곽 화개산성(華蓋山城) : 돌로 쌓았는데, 주위는 3천 5백 34척이고, 높이는 18척이다. 그 안에 못[池] 하나 샘 하나가 있고, 군창(軍倉)이 있다.

관방 월곶진(月串鎭) : 현 남쪽 16리에 있다. 우도수군 첨절제사영(右道水軍僉節制使營)이 있는데, 소관은 정포(井浦) 교동량(喬桐梁)이다. ○ 첨절제사(僉節制使) 1명이 있다.

교동량영(喬桐梁營) : 수군 만호(水軍萬戶) 1명이 있으며, 교동현감이 겸한다.

봉수 수정산(修井山) 봉수 : 북으로 황해도 연안부(延安府) 각산(角山)에 응한다.

화개산 봉수 : 남쪽으로 강화부 망산(網山)에 응하고, 동으로 강화부 하음성산(河陰城山)에 응한다.

신증궁실 객관 : 황치신(黃致身)의 시에, "3월달에 바삐 돌아오니 해는 지려 하는데, 원림(園林) 곳곳에 푸르게 그늘이 생겼네. 어여쁠사 철쭉꽃은 너무도 멋지게 피어서, 봄빛을 독차지하고 손의 마음 위로하네." 하였다.

 

학교 향교 : 현 남쪽 4리에 있다.
원유 동진원(東津院) : 현 동쪽 11리에 있다.
불우 화엄사(華嚴寺)ㆍ안양사(安養寺) : 모두 화개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 현 서쪽에 있다.
문묘 : 향교에 있다.
성황사 : 화개산에 있다.
여단 : 현 북쪽에 있다.

명환고려 설공검(薛公儉) : 감무(監務)가 되었다.

 

연혁 고종 32년(1895)에 강화로 들어갔다가 곧 군(郡)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인조 7년(1629)에 도호부(都護府)로 승격하여 11년에 치소(治所)를 월곶진(月串鎭)으로 옮겼다 : 월곶진을 강화(江華)로 옮겼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경기 수군 절도사(京畿水軍節度使)와 삼도 통어사(三道統禦使)를 겸한다. 한 명이다.

 

진보 주문도진(注文島鎭) : 수군(水軍)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가 한 사람이다.
장봉도진(長峯島鎭)ㆍ수군 만호겸 감목관(水軍萬戶監牧官)이 한 사람이다.

요망(瞭望) : 장봉도(長峯島)ㆍ말도(末島)ㆍ폴음도(乶音島)에 있다.

영아 통어영(統禦營) : 곧 경기 수영(京畿水營)이며 읍성(邑城)에 있다. 국초(國初)에 영을 남양(南陽)의 화량(花梁)에 개설하였는데, 뒤에 이곳으로 옮겼다. 인조(仁祖) 11년(1633)에 수사(水使)가 삼도 통어사(三道通禦使)를 겸하여 경기(京畿)ㆍ황해(黃海)ㆍ충청(忠淸) 3도의 주사(舟師 해군(海軍))를 거느렸다.

 

정종(正祖) 3년(1779)에 통어영을 강화로 옮기고, 본부사(本府使)가 수군 방어사 우해방장(水軍防禦使右海防將)을 겸하고, 12년에 다시 통어영을 본부로 옮겨와 수사가 전과 같이 겸하고, 인하여 방어해방(防禦海防)을 감하였다.

 

관원 경기 수군 절도사 겸 삼도 통어사(京畿水軍節度使兼三道通禦使) : 도호부사(都護府使)도 겸하였다.

중군(中軍)ㆍ수성(守城) : 모두 한 사람이다.
진속 : 영종(永宗)ㆍ덕포(德浦)ㆍ덕적(德積)ㆍ화양(花陽)ㆍ주문(注文)ㆍ장봉(長峯) 본영(本營) 및 각 진(鎭)에 갖가지 전선(戰船) 60척씩이다. : 율선(律船) 1백 15척이 있다.

 

성지 읍성(邑城) : 둘레가 1천 6척(尺)인데, 옹성(瓮城)이 셋이고 치성(雉城)이 넷이며, 동남북(東南北) 3문과 소남문(小南門)이 있다.

 

방면 동면(東面) : 동쪽으로 10리에 바다가 있다.
남면(南面) : 읍내(邑內)가 해변이다.
서면(西面) : 서쪽으로 20리가 바다이다.
북면(北面) : 북쪽으로 20리가 바다이다.

 

진도 동진(東津) : 동북쪽으로 10리인데 강화(江華)ㆍ인화(寅火)ㆍ석진(石津)과 통한다. 북진(北津) : 북쪽으로 20리인데, 인점포(印帖浦)에서 연안(延安) 각산진(角山津)으로 통한다.

 

송가진(松家津) : 남문 밖에서 출항하여 송가로 들어간다.

목장 장봉도(長峯島)ㆍ말도(末島) : 양(羊)을 기른다.
폐장(廢場) : 폴음도(乶音島)ㆍ송가도(松家島)ㆍ미법도(彌法島) 등이다.

도서 송가도(松家島) : 남쪽 바다 가운데에 있는데, 둘레는 25리이고 토지는 매우 비옥하다.

주문도(注文島) : 강화 매도(煤島) 서쪽 7리에 있는데 둘레가 30리이고, 동쪽으로 장봉도(長峯島)와의 거리가 수로(水路)로 25리인데고기가 아주 많이 잡힌다.

 

폴음도(乶音島) : 《고려사》에는 팔음도(八音島)ㆍ파음도(巴音島)라고 했는데, 둘레는 15리이고 동쪽으로 서검도(西檢島)와 주문도(注文島)와 서로 떨어져 있다.

 

말도(末島) : 둘레가 10리이고, 북쪽으로 연안계(延安界)와 서쪽으로 연평도(延平島)와의 거리가 30리이며, 동쪽으로 폴음도가 5리이다.

 

미법도(彌法島) : 매도에 있는데, 북쪽으로 서검도(西檢島)가 7리이다.
장봉도(長峯島) : 둘레가 25리인데, 토지가 비옥하고 또한 포곡(浦曲)이 있어서 배를 댈 만하다.
칠도(桼島) : 서쪽 바다 가운데 있다.
응암(鷹岩) : 부(府)의 앞쪽 바다 가운데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2권 - 경기[7]-[장단도호부]

 

 

동으로 삭녕군계(朔寧郡界)까지 50리, 마전군계(麻田郡界)까지 36리, 적성현계(積城縣界)까지 51리, 남으로 파주계(坡州界)까지 45리, 서로 풍덕군계(豐德郡界)까지 26리, 개성부계(開城府界)까지 37리, 북으로 황해도 우봉현계(牛峯縣界)까지 13리, 서울과의 거리는 47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고구려(高句麗) 장천성현(長淺城縣)으로 : 야아(耶牙)라고도 하고, 야아(夜牙)라고도 하였다.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우봉군(牛峯郡) 영현(領縣)으로 만들었다. 고려(高麗) 목종(穆宗) 4년(1001)에 시중(侍中) 한언공(韓彦恭)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단주(湍州)로 승격시켰다.

 

현종(顯宗) 9년(1018)에 다시 장단현으로 만들고, 현령(縣令)을 두어서 상서 도독(尙書都督)의 소관으로 하다가, 문종(文宗) 16년(1062)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본조(本朝) 태종(太宗) 14년(1414)에 임강현(臨江縣)과 합하여 장임현(長臨縣)이라 이름하였다가 뒤에 다시 장단으로 임진(臨津)과 합하여 임단현(臨湍縣)이라 이름하였다.

 

세종(世宗) 원년(1418)에 다시 장단 현령(長湍縣令)으로 만들었다. 세조(世祖) 2년(1456)에 장단과 임강을 없애고 임진에 예속시켰다.


4년에 다시 임강과 임진을 장단에 붙였다. 5년에 중궁(中宮)의 증조ㆍ고조ㆍ현조의 세 무덤이 그 지방에 있어서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군청(郡廳)을 도원역(桃源驛)이 있던 곳으로 옮겼다. 예종(睿宗) 원년(1468)에 진(鎭)을 설치하고, 도호부로 승격시켰다.

 

진관 도호부 1 : 강화(江華) 군(郡) 3 : 풍덕(豐德)ㆍ삭녕(朔寧)ㆍ마전(麻田)ㆍ현(縣) 2 : 연천(漣川)ㆍ교동(喬桐).관원 부사(府使)ㆍ교수(敎授) : 각각 1명씩이다.

 

군명 습천(隰川)ㆍ장천성(長淺城)ㆍ야야(耶耶)ㆍ야아(夜牙)ㆍ단주(湍州)ㆍ장임(長臨)ㆍ임단(臨湍).

 

산천 망해산(望海山) : 부(府)에서 북쪽으로 4리에 있는 진산(鎭山)이다.
용호산(龍虎山) : 부에서 동쪽으로 10리인 임강현 남쪽에 있다.

화장산(華藏山) : 임강현에 있다. 우리 태조가 이 산에서 사냥하다가 사슴을 쫓아가는 중, 절벽의 높이가 수십 척이라 사람은 갈 수가 없는데 사슴이 미끄러져 내려가니 태조의 말도 미끄러져 내려가 밑에까지 이르자 말이 엎어져 미처 일어나기도 전에 즉시 사슴을 쏘아 죽였다.

 

백악(白岳) : 임진현 북쪽에 있다. 고려에서 풍덕(豐德) 백마산(白馬山)을 우소(右蘇)로 삼고, 백악을 좌소(左蘇)로 삼았다.

○ 공민왕(恭愍王) 9년(1360)에 도읍을 남경(南京 한양)으로 옮기려고 태묘(太廟)에서 점쳐보니, 불길하여 결국 옮기지 않있다. 이에 친히 이 산에 거둥하여 땅을 살펴보고 산의 남쪽에 대궐을 지었는데, 주위가 7백 20보(步)였다. 당시 사람들이 신궁(新宮)이라 하였다.

 

도라산(都羅山) : 임진 남쪽 25리에 있다.
구룡산(九龍山) : 부의 북쪽 30리에 있는데, 바로 성거산(聖居山)이다. 우봉현(牛峯縣) 편에 자세히 나온다.
오관산(五冠山) : 부의 서쪽 30리에 있는데, 산꼭대기에 다섯 개의 작은 봉우리가 관(冠)처럼 둥그렇게 생겼으므로 오관산이라 이름 하였다.

 

보봉산(寶鳳山) : 부의 서쪽 20리인 회령(檜嶺) 동쪽에 있는데, 산세가 봉이 춤추는 것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용암산(湧巖山) : 오관산 동북쪽에 있으며, 오관산ㆍ천마산(天磨山)의 여러 산과 서로 이어져 있되, 다만 봉우리에 다름이 있을 뿐이다.

 

면주동(綿紬洞) : 오관산 아래 있으며 골 안이 넓고 깊숙한데 절이 하나도 없다. 전하는 말에, "만약 여기에 절을 지으면 나라의 운수가 길지 못한다." 하였는데, 대개 고려의 비보(裨補)의 뜻이다.

 

영통동(靈通洞) :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화담(花潭)에서부터 올라가면 산을 돌아 길이 꼬불꼬불한데, 시내를 여러 번 건너면 그 골에 이른다. 골 안은 편평하게 퍼져서 인가 수십 채가 있는데, 대대로 빨래하는 것을 업으로 삼고 있다.

 

차일암(遮日巖) : 면주동 어귀에 있다. 바위가 편평하고 넓어서 앉아서 놀 만한데, 바위를 뚫어 구멍을 만들어 놓았으니, 사람들이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장막을 칠 때 기둥을 세웠던 곳이다." 하기도 하고, 혹은 "신선이 놀던 곳이다." 하기도 하며, 혹은 "임금이 거둥했던 곳이다." 하기도 한다.

 

샘 있어 빙빙 돌아 나오는데, 그 빠르기가 화살 같고 그 아래가 웅덩이가 되었으니, 웅덩이 밑은 모두 돌이어서 고기들이 노는 것을 하나하나 셀 수가 있다.

 

화암(花巖) : 영통동 어귀에 있는데 화담(花潭)이라고도 한다. 화담 왼쪽에는 푸른 절벽이 가파르게 서서 마치 그림 병풍을 펴놓은 것 같고, 바위 틈에 철쭉꽃이 있어 봄이 되면 만발하여 물 밑에 붉게 비친다. 화담 오른쪽에는 작은 바위가 있어 사면이 깎아지른 듯한데, 그 위 네 귀퉁이에도 장막을 치던 구멍이 있다.

 

산대암(山臺巖) : 송경(松京) 숭인문(崇仁門) 밖에 있는데, 절벽이 1백 길이나 되고, 그 모양이 채붕(彩棚)을 펼쳐놓은 것 같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탁타암(槖駝巖) : 산대암 서쪽에 있다.
고암(鼓巖) : 용암산 오룡봉(五龍峯) 위에 있는데, 그 모양이 북[鼓]과 같으므로 고암이라 하였다.

추암(皺巖) : 송경 도성(都城)의 동북쪽 2, 3리 되는 곳에 있는데, 바위가 시냇가에 서 있어 병풍 같고, 모두 가로 결이 있기 때문에 추암이라 이름하였다. 아래에 큰 돌이 많아서 앉아서 술 마실 만하다. 고려 최당(崔讜 최영(崔瀅))이 항상 소를 타고 와서 여러 노인들과 여기서 놀았다.

 

달령(獺嶺) : 낙산사동(洛山寺洞)에 있다. ○ 의종(毅宗)이 일찍이 중 각예(覺倪)와 함께 달령에서 시를 짓고 놀면서 돌아갈 줄을 모르니, 호위하는 장사들이 피곤하였으므로 정중부(鄭仲夫) 등이 비로소 반역할 마음이 생겼다.

 

임금이 한 번은 말을 달려 홀로 달령에 이르렀는데, 모시고 간 신하들은 미처 따라오지 못했다. 임금이 기둥에 기대어 이르기를, "만약 정습명(鄭襲明)이 있었다면 내가 어찌 이 지경이 되었겠느냐." 하였다.

 

회령(檜嶺) : 곧 화장사(華藏寺) 서령(西嶺)이다.

유현(柳峴) : 진현(榛峴)에서 서쪽으로 2리 되는 곳에 있다.
진현(榛峴) : 동파역(東坡驛) 서쪽 3리에 있다.

중광현(重光峴) : 용호산(龍虎山) 서쪽에 있다.
봉황암(鳳凰巖) : 강련포(江連浦) 서안(西岸)에 있다.
용둔교(龍遁郊) : 부의 서쪽 15리 대사현동(大蛇峴洞)에 있는데, 이제현(李齊賢)의 팔영(八詠)에 용야심춘(龍野尋春)이 바로 여기이다.

 

호곶교(壺串郊)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목장이 있는데 둘레가 42리이다.
백안교(伯顔郊) : 낙하(洛河) 북쪽에 있는데, 지금은 목장이 되었다.
판적천(板積川) : 근원이 속현(屬縣) 송림(松林)에서 나와 백악(白岳) 이남의 여러 물과 합류하여 사천(沙川)으로 들어가 바다에 이른다.

 

삼미천(三彌川) : 부의 북쪽 20리에 있는데, 근원이 우봉현(牛峯縣) 성개산(性蓋山)에서 나와 적성(積城) 대탄(大灘)을 지나 임진으로 들어간다.

장단도(長湍渡) : 부의 동쪽 33리에 있는데, 두기진(頭耆津)이라고도 한다. 양편 언덕에 푸른 석벽이 수십 리를 서 있어 바라보면 그림 같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고려 태조가 거둥해 놀던 곳이다." 하며, 민간에서는 아직도 그 가곡(歌曲)이 전해지고 있다.

 

동강(東江) : 임진현 서쪽 15리에 있다. 강련포(江連浦) : 임진현 서쪽 10리에 있는데, 고기잡이배를 대는 곳이다.

 

임진도(臨津渡) : 부의 남쪽 37리에 있는데, 그 근원은 함경도(咸鏡道) 안변(安邊) 속현(屬縣) 영풍방장동(永豐防墻洞)에서 나와 이천(伊川)ㆍ안협(安峽)ㆍ삭녕(朔寧)을 거쳐 연천현(漣川縣) 서쪽에 이르러 증파도(澄波渡)가 되고, 마전군(麻田郡) 남쪽에 이르러 대탄(大灘)과 합쳐져, 적성현(積城縣) 북쪽에 이르러서는 이진(梨津)이 되고, 부의 동쪽에 이르러서는 두기진(頭耆津)이 되며, 임진현 동쪽에 이르러서 이 나루가 되고 동남쪽으로 덕진(德津)이 되며, 교하현(交河縣) 북쪽에 이르러 낙하도(洛河渡)가 되고, 봉황암(鳳凰巖)을 지나 오도성(烏島城)에 이르러서 한수(漢水)와 모인다. ○ 도승(渡丞) 1명이 있다.

 

덕진(德津) : 곧 임진강 하류이다.
낙하도(洛河渡) : 덕진 하류이다. ○ 도승(渡丞) 1명이 있다.

토산 실[絲]ㆍ삼[麻]ㆍ송이[松蕈]ㆍ웅어(葦魚)ㆍ눌치[訥魚]ㆍ쏘가리[錦鱗魚]ㆍ숭어[秀魚]ㆍ은어[銀口魚]ㆍ게[蟹]ㆍ석창포[石菖蒲].

 

신증 녹반(綠礬) : 부의 동쪽 독자동(獨子洞)에서 난다.

 

봉수 천수산(天壽山) 봉수 : 곧 천수원(天壽院) 북봉(北峯)이다. 송림(松林) 서쪽에 있는데, 남으로 도라산(都羅山)에 응하고, 서로 개성부(開城府) 송악산(松岳山) 국사당(國師堂)에 응한다.

도라산(都羅山) 봉수 : 북으로 천수산에 응하고, 동으로 파주(坡州) 대산(大山)에 응한다.

궁실 객관(客館) : 서거정(徐居正)의 신영기(新營記)에, "고기(古記)를 상고해 보면, 삼한(三韓) 때에 습천군(隰川郡)이었는데, 뒤에주(州)로 승격했다가 다시 장단현(長端縣)으로 강등했다.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일하고 송경(松京)에 도읍하여 장단을 동익(東翼)으로 삼고 개성을 서익(西翼)으로 삼았다. 성종조(成宗朝) 때에 단주(湍州)라 고쳤다.

 

신축년(1361)에 홍건적(紅巾賊)의 난리를 만나서 관우(館宇)는 불에 타고 현관(縣官)은 영평현(永平縣)에 임시로 있었다. 무진년(1388)에 우리 태조 강헌대왕(太祖康獻大王)이 명하여 안집 별감(安集別監)을 설치하고 흩어져 있는 백성을 불러서 어루만져 고향으로 돌아오게 했다. 3년이 지난 경오년에 현령(縣令)으로 고쳤다.

 

태종(太宗) 갑오년(1414)에 임강현(臨江縣)을 없애고 장단에 예속시켜 이름을 장림(長臨)이라 고쳤다. 세종(世宗) 기해년(1419)에 각각 옛날대로 임진ㆍ장단이라 하였다. 세조(世祖) 병자년(1456)에 장단과 임강 두 고을을 없애고, 합쳐서 임진현으로 만들었다.

 

현감인 하여덕(河汝德)이 비로소 읍(邑)을 도원역(桃源驛) 옛터로 정하였는데, 사군(使君 지방관의 경칭) 송숙기(宋叔琪)가 후임으로 와서 비로소 역사를 시작했는데, 무인년에 이름을 장단현이라 고쳤다.

 

이 해에 본 고을에 왕후의 조상의 산소가 있다는 이유로 군(郡)으로 승격시켰다. 이듬해 기묘년에 비로소 읍을 옮겼는데, 공아(公衙)ㆍ객관(客館)ㆍ고무(庫廡)가 처음 지어지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 뒤를 이어 사군 조지주(趙之周)가 완전히 지으려 하다가 상(喪)을 당해 돌아가고, 그 뒤를 이어 사군 김한생(金漢生)이 와서 정사가 화(和)하고 백성이 기뻐했다.

 

학교 향교(鄕校) : 부의 북쪽 3리에 있다.
역원 도원역(桃源驛) : 부의 남쪽 3리에 있다. 본도(本道)의 속역(屬驛)이 다섯이 있는데, 구화(仇和)ㆍ백령(白嶺)ㆍ옥계(玉溪)ㆍ단조(丹棗)ㆍ상수(湘水)이다. ○ 역승(驛丞) 1명이 있다.

 

구화역(仇和驛) : 부의 북동쪽 30리에 있다.
백령역(白嶺驛) : 부의 동쪽 30리에 있다.

통제원(通濟院) : 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냉정원(冷井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오목원(五目院) : 부의 남쪽 30리에 있다.
약사원(藥師院)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연화원(蓮花院) : 부의 동쪽 33리에 있다.
석주원(石柱院) : 부의 동쪽 10리에 있다.
숙천원(淑川院) : 부의 서쪽 15리에 있다.
선구원(禪具院) : 부의 서쪽 20리에 있다.

천수원(天壽院) : 부의 서쪽 25리에 있다. 개성부(開城府)편에 자세히 나왔다.

 

불우 화장사(華藏寺) : 보봉산(寶鳳山)에 있는데, 처음 이름은 계조암(繼祖庵)이다. 지공(指空)이 처음에 터를 보고 크게 절을 지어 마침내 큰 총림(叢林)이 되었다. 불전(佛殿)과 승당(僧堂)의 제도가 매우 굉장하여 매년 여름이면 중들이 모여들어 참선하는것이 양주(楊洲) 회암사(檜巖寺)와 어금버금하다. 이 절에 지공이 가져 온 서축 패엽경(西竺貝葉經)이 있어서 지금까지 전해진다.

 

극락사(極樂寺) : 오관산에 있다.
창화사(昌化寺) : 도라산(都羅山)에 있다.
영통사(靈通寺) : 오관산 아래에 있는데, 골 안이 깊숙하고 산이 첩첩이 둘러싸여 있으며 물이 이리저리 굽이쳐 흐르고 나무가 우거졌다. 그 서루(西樓)의 뛰어난 경치는 송도(松都)의 제일이다. 절에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승통의천탑명(僧統義天塔銘)이 있고, 또 고려 문종(文宗)의 화상과 홍자번(洪自藩)의 화상이 있다.

 

흥성사(興聖寺) : 영통사 북쪽에 있다.
낙산사(洛山寺) : 용암산(湧巖山) 아래에 있다. 절벽이 높이 서서 삼면이 깎아놓은 듯한데, 절은 바위 사이에 있다. 오직 남쪽만 터져서 황홀하기가 마치 하늘이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절 동쪽에 한 개의 독봉(獨峯)이 있는데 높이 하늘을 찌를 듯하고 위에 너럭바위를 이고 있으니, 정병대(正甁臺)라 한다.


안적사(安積寺) : 금신사(金神寺)의 남쪽 기슭에 있다.
증각사(證覺寺) : 화장사(華藏寺) 위에 있다.

 

사묘 사직단(社稷壇) : 부의 서쪽에 있다.
문묘(文廟) : 향교(鄕校)에 있다.
성황사(城隍祠) : 부의 동쪽 2리에 있다.
여단(厲壇) : 부의 북쪽에 있다.

덕진사(德津祠) : 덕진(德津)에 있으니, 사전(巳典)에 서독(西瀆)으로 되었고, 중사(中祀)로 기록되었다. 봄 가을로 향(香)과 축(祝)을 내려 제사했다.

 

오관산사(五冠山祠) : 사전에 소사(小祀)로 기록되었으니, 매년 봄 가을로 향과 축을 내려서 제사했다. 사(祠)는 영통사(靈通寺) 북쪽 언덕에 있다.

용호산사(龍虎山祠) : 용호산에 있는데, 봄 가을로 본읍(本邑)에서 제사지낸다.

 

능묘 고려 숙종릉(肅宗陵) : 송림현(松林縣) 불정원(佛頂原)에 있으니, 이름은 영릉(英陵)이다.
고려 명종릉(明宗陵) : 부의 남쪽 7리에 있으니, 이름은 지릉(智陵)이다.
신라 경순왕릉(敬順王陵) : 부의 남쪽 8리에 있다.

 

고적 마가갑(摩訶岬) : 영통사동(靈通寺洞)에 있다.

임진 폐현(臨津廢縣) : 부의 남쪽 25리에 있으니, 본래 고구려 진임성현(津臨城縣)으로, 오아홀(烏阿忽)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개성군(開城郡) 속현(屬縣)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顯宗) 9년(1018)에 장단현(長湍縣)에 예속하여 상서 도성(尙書都省)의 소관으로 하였다. 문종(文宗) 17년(1063)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恭讓王) 원년(1389)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1413)에 규례에 따라 현감(縣監)으로 고쳐 만들었다. 14년에 장단에 합하여 이름을 임단(臨湍)이라 하였다. 세종(世宗) 원년(1418)에 다시 갈라서 임진 현감으로 만들었다. 세조(世祖) 4년(1458)에 다시 예속시켰다.

 

임강 폐현(臨江廢縣) : 부의 북쪽 30리에 있으니, 본래 고구려 장항현(獐項縣)으로, 고사야홀차(古斯也忽次)라고도 한다. 신라 때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우봉군(牛峯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장단에 붙여서 상서 도성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공양왕 원년에 비로소 감무를 설치했다.

 

본조 태종 14년에 장단에 합쳐서 이름을 장임현(長臨縣)이라 했다가 두어 달 뒤에 다시 현감을 두었다. 세조 4년에 다시 장단에 예속시켰다.

 

송림 폐현(松林廢縣) : 부의 서쪽 5리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 약지두치현(若只頭恥縣)으로, 지섬(之蟾)이라고도 한다. 신라 때 여웅(如態)이라고 고쳐서 송악군(松岳郡)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초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현종 9년에 장단에 예속시켜서 상서 도성 소관으로 만들었다. 문종 17년에 직접 개성부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를 설치했다.

 

본조 태종 18년에 임강에 붙였다. 고장단(古長湍) : 지금 치소(治所)의 동쪽 25리에 있다.
조현역(調絃驛) : 지금 보현원(普賢院)이 바로 조현역의 옛터이다. 본조 세종 때에 역을 없애고, 그 관원들은 동파(東坡)와 청교(靑郊) 두 역으로 나누었다.

 

불일사(佛日寺) : 고려 광종(光宗)이 송림현 북쪽에 불일사를 짓고, 현의 치소를 동북쪽으로 옮겼다.

보현원(普賢院) : 부의 남쪽 25리에 있으니, 국조(國朝)에서 조현역을 설치했다가 지금은 또 없앴다. 물이 도원역(桃源驛) 상류에서 부터 내려와 보현원 북쪽에 이르러 천천히 흘러 웅덩이가 되었는데, 의종(毅宗)이 뚝을 쌓아 못을 만들어 놀이하는 곳으로 삼았다.

 

동림사(東林寺) : 용암산(湧巖山) 오룡봉(五龍峯) 아래에 있다.
천화사(天和寺) : 옛터는 성 동쪽에 있다.
선흥사(禪興寺) : 옛터가 동교(東郊)에 있다.

 

자제사(慈濟寺) : 정종(靖宗)이 임진의 과세원[課橋院]을 하사하고, 이름을 자제사라 했다. 그 전에 임진에 배가 없어서 행인이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 죽는 사람이 많으므로 관청에서 부량(浮梁)을 만드니, 이때부터 사람과 말이 평지처럼 다녔다.


총지사(摠持寺) : 옛터가 개성부 탄현문(炭峴門) 밖 10리에 있다.

 

연혁 고종(高宗) 23년(1886)에 군으로 고쳤다. 《文獻備考》
연혁 헌종(憲宗) 6년(1840)에 현(縣)으로 내렸다 :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15년에 다시 부로 올렸다.

관원 도호부사(都護府使) : 장단진 병사첨절제사(長湍鎭兵馬僉節制使)ㆍ총융 후영장(摠戎後營將)ㆍ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1명.

 

영아 총융 후영(摠戎後營) : 현종(顯宗) 6년(1665)에 우영(右營)을 두었는데 뒤에 후영으로 고친 것이다.
○ 후영장은 본부사(本府使)가 겸하였다. ○ 속읍(屬邑)은 장단(長湍)ㆍ삭녕(朔寧)ㆍ마전(麻田)ㆍ연천(漣川)이 있다.

 

토산 잉어[鯉魚]ㆍ즉어(鯽魚).
성지 덕진 고성(德津古城) : 남족으로 15리. 강변에 있는데 광해군 때에 수축한 고성이다. 포로 고루(匏蘆古壘) : 동쪽으로 32리, 포로탄(匏蘆灘)의 위쪽 적성(積城) 경계에 두 개의 누(壘)가 있는데, 강을 격하여 상대해 있으며 석벽으로 되어 있으며 공고하게 되어 있다. 삼국 시대에 표로하변(瓢瀘河邊)에 쌓은 것이다.

 

방면 진현내(津縣內) : 끝이 15리이다.
진동(津東)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진북(津北)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장현내(長縣內) : 동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장동(長東) : 동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장북(長北)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30리이다.
장서(長西) : 동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강동(江東) : 동북쪽으로 처음이 60리, 끝이90리이다.
강남(江南)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40리이다.
강서(江西) : 북쪽으로 처음이 40리, 끝이 50리이다.
강북(江北) : 동북쪽으로 처음이 50리, 끝이 70리이다.

송남(松南) : 서북쪽으로 처음이 15리, 끝이 25리이다.
송서(松西) : 서북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20리이다.
상도(上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하도(下道) : 서남쪽으로 처음이 20리, 끝이 30리이다.

중서(中西)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0리이다.
동도(東道) : 동북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서도(西道) : 서쪽으로 처음이 10리, 끝이 25리이다.
고남(古南) : 처음이 20리, 끝이 35리이다.
대위(大位) : 동북쪽으로 처음이 30리, 끝이 50리이다.

진도 임진도(臨津渡) : 동남쪽으로 20리에 있다.

낙하진(洛河津) : 덕진(德津) 하류에서 교하(交河)로 통하는 길이다. 고려 때에는 큰길로서 도승지(渡丞旨)를 두었었다.

고량진(高浪津) : 동쪽으로 30리에 있으며, 고려 때에는 장단도(長湍渡)라 불렀고 두기진(頭耆津)이라고도 한다.

덕진 : 임진강 하류에 있다.
저포진(猪浦津) : 덕진 하류에 있다. 돌거진(突巨津).
봉수 도라산(都羅山) : 서쪽으로 15리에 있다.

사원 임강서원 : 숙종 경신년(1680)에 세웠으며 갑술년(1694)에 사액(賜額)하였다.

능묘 숭릉 : 숙종비 명의 왕후(明懿王后) 윤씨의 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