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增東國輿地勝覽

면천군(沔川郡)-- 혜군(槥郡)ㆍ혜성(槥城)

吾心竹--오심죽-- 2009. 9. 16. 20:3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9권
 충청도(忠淸道)
면천군(沔川郡)

 

 


동쪽으로는 홍주(洪州) 경계까지 17리고, 남쪽으로는 덕산현(德山縣) 경계까지 12리이고,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경계까지 13리이고, 북쪽으로는 같은 현 경계까지 15리이고, 서울과의 거리는 3백 75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백제의 혜군(槥郡)이었는데, 신라 경덕왕(景德王)이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이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충렬왕(忠烈王) 16년에, 고을 사람 복규(卜奎)가 합단(哈丹)의 군병을 방어한 공로가 있어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시킨 것을, 본조 태종 13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군(郡)으로 한 것이다.
【관원】 군수ㆍ훈도 각 1인.
【군명】 혜군(槥郡)ㆍ혜성(槥城) 혜(槥)를 우리나라 속자(俗字)로 추(橻)로 쓰기도 하고, 혹은 유(杻)로 쓰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마산(馬山)ㆍ해종(海宗)ㆍ면주(沔州).
【성씨】 본군 복(卜)ㆍ한(韓)ㆍ현(玄)ㆍ유(兪)ㆍ임(任)ㆍ박(朴)ㆍ정(井)ㆍ서(徐)가 있으며, 유(兪) 촌성(村姓)이다. 구(具) 능성(綾城). 왕(王) 개성(開城). 한(韓)ㆍ김(金)ㆍ박(朴) 모두 역성(驛姓)이다. 한(韓) 부곡성(部曲姓)이다.
【산천】 신암산(申庵山) 군 북쪽 12리에 있다. 다불산(多佛山) 군 서쪽 10리에 있다. 몽산(蒙山) 군 북쪽 4리에 있다. 봉서산(鳳棲山) 군 동쪽 2리에 있다. 마산(馬山) 군 남쪽 8리에 있다. 소이산(所伊山) 군 북쪽 9리에 있다. 창택산(倉宅山) 일명 고산(高山)이라고도 하는데, 창택곶(倉宅串)에 있다. 바다 군 북쪽 45리에 있다. 범근내포(犯斤乃浦) 군 동쪽 27리에 있다. 이곳에 창고가 있어 공주ㆍ홍주에서 관할하는 군현의 세미(稅米)를 수납하였다가 서울로 조운(漕運)하여 갔었는데 성화(成化) 14년 봄에 물이 얕아져서 배가 바닥에 부딪히므로 아산(牙山)의 공세곶(貢稅串)으로 옮겼다. 창택곶(倉宅串) 군 북쪽 35리에 있고, 목장(牧場)이 있다. 벽골지(碧骨池) 군 동쪽에 있다.
【토산】 모시[苧]ㆍ지치[紫草]ㆍ숭어[秀魚]ㆍ뱅어[白魚]ㆍ석굴[石花]ㆍ조기[石首魚]ㆍ은어[銀口魚]ㆍ오징어[烏賊魚]ㆍ전복[鰒]ㆍ조개[蛤]ㆍ새우[蝦]ㆍ부레[魚鰾]ㆍ김[海衣]ㆍ농어[鱸魚]ㆍ민어(民魚)ㆍ준치[眞魚]ㆍ붕어[鯽魚]ㆍ전어(錢魚)ㆍ게[蟹]
【성곽】 읍성(邑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3천 2척에 높이는 15척이며,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
【봉수】 창택산 봉수(倉宅山烽燧) 서쪽으로는 당진현(唐津縣) 고산(高山)과 호응하고, 북쪽으로는 경기 양성현(陽城縣)의 괴대길곶(槐臺吉串)과 호응한다.
『신증』 【누정】 반월루(伴月褸) 객헌(客軒) 동쪽에 있다.
【학교】 향교 군 동쪽 2리에 있다.
【역원】 순성역(順城驛) 군 동쪽 4리에 있다. 동제원(東濟院) 군 동쪽 5리에 있다.
【불우】 구룡사(具龍寺)ㆍ장안사(長安寺) 모두 신암산에 있다. 보회사(保會寺) 다불산에 있다. 석수암(石水庵) 창택관에 있다.
【사묘】 사직단 군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몽산에 있다. 여단 군 북쪽에 있다.
【고적】 군자지(君子池) 객관 앞에 있다. 지군사(知郡事) 곽충룡(郭翀龍)이 창건한 바로서 못 가운데에 연(蓮)을 심고 염계(濂潔 송(宋) 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의 말을 취하여 군자지라 이름하니, 이제현(李齊賢)이 찬(讚)하여 말하기를, “꽃과 열매가 한때 피고 맺되, 진흙에 오염되지 않아서, 군자와 같은지라, 염계에게 사랑 받았다.” 하였다. 구준대(衢樽臺) 군 남쪽 1리에 있으며, 역시 곽충룡이 축조한 것이다. 앞사람이 찬(讚)하기를 “만민이 모두 나의 동포라 함은, 횡거(橫渠 장재(張載))의 말이거니와, 혼자서 즐기는 것이 무엇이 즐거우랴. 구준(衢樽)이 여기 있도다.” 하였다. 강구정(康衢亭) 군 동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담대멸명(澹臺滅明) 지름길로 가지 않았다는 것은, 노론(魯論)에 기록돼 있으며, 평탄한 대로(大路)를, 군자가 가도다.” 하였다. 치의당(緇衣堂) 군 서쪽 1리에 있으니, 역시 곽충룡이 세운 것이다. 앞사람이 찬하기를, “읍은 비록 10실(室)에 불과하나, 신(信)하고 충(忠)한 사람이 있다. 어진이의 감화란, 집집이 어진이를 낳게 한다.” 하였다. 도촌소(桃村所) 군 북쪽 20리에 있다. 온월부곡(溫月部曲) 군 동쪽 23리에 있다. 가리저부곡(加里渚部曲) 군 동쪽 25리에 있다. 몽산성(蒙山城) 돌로 쌓았는데, 주위가 1천 3백 14척이다. 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는데, 지금은 못쓰게 되었다.
【명환】 신라 김준(金峻) 진성왕(眞聖王) 7년에 병부 시랑(兵部侍郞) 김처회(金處誨)가 당 나라로 가서 정절(旌節)을 바치려다가 바다에 익사하여 혜성군 태수(槥城郡太守) 김준을 고주사(告奏使)에 임명하여 보냈다. 고려 서인(徐堙) 본군이 처음에 면주(沔州)로 승격하였을 때에 서인이 당시 지주사(知州事)가 되어 선정을 베푼 바 있다. 곽충룡(郭翀龍) 원외(員外)로 있다가 지군사(知郡事)로 나왔다. 본래 서생(書生)으로 군사(軍事)를 익히지 않았는데 왜적이 돌연 습격해 오자, 온 고을 사람들이 달아나는 것을 충룡이 말에 올라 창을 비껴들고 용기를 내어 군중을 격려하니, 한 사람이 적군 백 명을 당할 수 있게 되어 먼저 험요(險要)한 곳을 끊으니, 적이 형세가 불리하게 되어 물러갔다. 본조 맹사성(孟思誠)ㆍ박안신(朴安信)ㆍ이영견(李永肩) 모두 지군사(知郡事)로 부임하여 그 은택이 백성에게 미친 바가 있어 지금까지도 그를 칭송한다. 홍윤성(洪允成) 문과에 오르기 전에 본군의 교도(敎導)가 되었다.
【인물】 고려 복지겸(卜智謙) 신라 말엽에 복학사(卜學士)라 일컫는 자가 당 나라로부터 본군으로 와서 살면서 바다 도적을 물리쳐 죽이고, 머물러 남은 백성들을 모아 보전한 적이 있었는데, 지겸은 그의 후손이다. 처음 이름은 사괴(砂瑰)이며, 배현경(裵玄慶)과 더불어 태조(太祖)를 추대,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어 본주의 토지 3백 경(頃)을 하사받아 자손이 대대로 이를 먹고 살았다. 시호는 무공(武恭)이다. 복지유(卜智柔)ㆍ박술희(朴述熙) 나이 18세에 궁예(弓裔)의 위사(衛士)가 되었으며, 뒤에 태조를 섬겨 공이 있어 대광(大匡)에 이르렀다. 시호는 엄의(嚴毅)이며, 혜종 묘정(惠宗廟庭)에 배향되었다. 복규(卜奎)ㆍ복기(卜祺) 모두 복지겸의 후손이다. 본조 복승정(卜承貞) 문과에 올라 여러 주군(州郡)을 역임하였는데, 법을 지키고 치적이 있었다는 것으로서 명칭이 있다.
【열녀】 본조 치자(梔子) 안지의(安止義)의 아내이다. 남편이 나병(癩病)을 얻은 지 10년 만에 죽으니, 원중(園中)에 빈(殯)하여 놓고, 주야로 슬퍼하고 울더니, 3년 만에 비로소 장사를 지냈다. 시어니가 다시 시집보내려 하자, 치자가 말하기를, “어머님께서 만일 이를 강요하신다면 나는 반드시 강에 몸을 던지고 말 것입니다.” 하니, 시어머니가 두려워하여 그치고 말았다. 그 뒤에 치자도 또한 나병에 걸려 절개를 지킨 지 14년 만에 비애하던 끝에 몸이 파리하여 죽었다.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고, 부세(賦稅)를 면제해 주었다. 『신증』 곽씨(郭氏) 박충간(朴忠幹)의 아내이다. 남편이 죽자, 몹씨 비통하며 몸을 돌아보지 않았고, 초하루 보름으로 반드시 친히 그 무덤에 가서 제사하였으며, 복을 마친 뒤에도 오히려 그만두지 않았다. 그의 아우 구세충(具世忠)의 아내도 또한 절행(節行)이 있어 남편의 상복을 마친 뒤에도 그대로 소의(素衣)와 소식(素食)을 하고, 죽은 이를 섬기기를 생존시와 같이 하였다. 이 사실이 보고되니, 모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제영】 요검구안행(腰劍舊顔行) 유원순(兪元淳)의 시에, “재차 지나며 밤길을 번거롭게 하니, 관솔 불 양쪽에 밝혀 길을 인도해 간다. 비창(䏶槍) 든 저들은 새로 생긴 익위(翼衛)인가. 요검 찬 병사들은 옛날의 안행들. 함께 추운 해의 솜을 얻은들, 누가 능히 흉년 곡식을 분양해 주리. 민심을 수습할 조그마한 은택도 없으니, 매양 농사 힘쓰라 권장한 내가 부끄럽다.” 하였다. 왕명석산천(王命錫山川) 복오(卜吾)의 시에, “삼한(三韓)을 통일하던 그날, 지금 추사(追思)하건대 5백 년의 옛일. 무공공(武恭公)의 공도 적지 않아서, 왕명으로 산천을 하사했다네.”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
【방면】 읍내(邑內) 끝이 7리. 마산(馬山) 남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10리. 죽림(竹林) 동쪽으로 처음은 6리, 끝은 13리. 덕두(德頭)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20리. 가화(嘉火) 동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20리. 범천(泛川) 동남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손동(孫洞) 동북쪽으로 처음은 20리, 끝은 30리. 정계(淨界) 북쪽으로 처음은 10리, 끝은 15리. 초천(草川)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중흥(中興)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감천(甘泉)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50리. 송산(松山) 북쪽으로 처음은 30리, 끝은 40리. 승선(昇仙) 북쪽으로 처음은 15리, 끝은 30리. 송암(松巖) 서북쪽으로 처음은 5리, 끝은 20리.
【성지】 몽산고성(蒙山古城) 둘레가 1천 3백 14척에 우물이 둘이 있다.
【토산】 감[枾].

 

 

세종
 지리지
세종 지리지 / 충청도 / 홍주목 / 면천군

◎ 면천군(沔川郡)


본래 백제의 유군(杻郡)인데, 신라에서 혜성군(槥城郡)으로 고쳤고,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운주(運州) 임내로 삼았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忠烈王) 16년 경인에 고을 사람 복규(卜奎)가 글안(契丹)을 막아 공이 있었으므로, 지면주사(知沔州事)로 승격하고, 별호를 마산(馬山), 또는 종해(宗海)라 하였다. 본조 태종(太宗) 13년 계사에 예(例)에 의하여 면천군으로 고쳤다.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홍주에 이르기 17리, 서쪽으로 당진(唐津)에 이르기 10리, 남쪽으로 덕산(德山)에 이르기 9리, 북쪽으로 바다에 이르기 39리이다.
호수가 4백 5호요, 인구가 3천 1백 55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1명이요, 진군(鎭軍)이 28명이요, 선군이 1백 95명이다.
토성(土姓)이 7이니, 복(卜)·한(韓)·박(朴)·현(玄)·정(井)·임(任)·유(兪)요, 망성(亡姓)이 1이니, 서(徐)요, 내성(來姓)이 1이니, 구(具)요,【능성(綾城)에서 왔다.】 망래성(亡來姓)이 1이니, 왕(王)이요, 속역성(續驛姓)이 3이니, 한(韓)·박(朴)·김(金)이요, 촌성(村姓)이 1이니, 유(兪)이다.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반반이며, 간전(墾田)이 4천 53결이요,【논이 9분의 4가 넘는다.】 토의(土宜)는 오곡과 조·팥·메밀·뽕나무·배나무이다. 토공은 지초·종이·자리·칠·잡깃[雜羽]·족제비털·여우가죽·삵괭이가죽·뱅어·쌀새우[白蝦]요, 약재(藥材)는 연밥[蓮子]이다. 염소(鹽所)가 1이다.【가마[盆]가 36개다.】
몽산 석성(蒙山石城)【군의 북쪽 4리에 있는데, 둘레가 5백 43보이며, 〈지세가〉 험하고, 안에 우물 하나가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하며, 군창(軍倉)이 있다.】 역(驛)이 1이니, 순성(順城)이요, 봉화가 1곳이니, 창덕산(倉德山)이 군의 북쪽에 있다.【동쪽으로 홍주(洪州) 임내의 명해(明海)에, 서쪽으로 당진(唐津) 고산(高山)에 응한다.】 양제(楊堤)【군내(郡內)에 있는데, 길이가 1백 40척이며, 논 1백 15결에 물을 댄다.】
월경처(越境處)는 홍주(洪州) 임내에 신평(新平)이 덕풍(德豐)과 합덕(合德) 지경을 넘어서 본군(本郡)의 동촌(東村) 안에 들어와 있다.
【원전】 5 집 634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