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들의 땅 포승면
원효대사와 해골원효성사깨달음
출처 :원효대사(법안스님) 원문보기▶ 글쓴이 : 요석보현 |
오도송(悟道頌) 원효대사(元曉大師)
마음이 생겨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흙굴과 무덤이 다르지 않네.
삼계는 오직 마음이요 만법은 오직 의식일 뿐이니
마음 밖에 법이 없는 것을 어찌 따로 구해서 무엇하리
心生則 種種法生 심생즉 종종법생
心滅則 龕墳不二 심멸즉 감분불이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유심 만법유식
心外無法 胡用別求 심외무법 호용별구
※ 龕 : 신주를 모시어 두는 방, 감실
墳 : 무덤 봉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가 갈증이 와서,
밤길에 한 바가지 들이켠 물이 아침에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원함이 이튿날 구역질로 변하는 것에서
사실은 변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았는데….
"일체유심조"의 진리를 깨달았다고 하지요.
"내 마음이 나를 속이는 것이다"
일체유심조
(一切唯心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만든 것이다. |
신라 말기였습니다. 원효 대사와 의상 대사는 당시 문화와 불교가 꽃피었던 당나라로 유학을 가시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편리한 교통 수단이 없었기에 걸어서 그 먼 길을 가야만 했으므로, 보통 사람의 의지로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첫 번째 유학 길에서는 고구려 국경을 넘다가 그곳 병졸들에게 잡혀 많은 괴로움을 겪고 다시 신라로 돌아와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부처님의 진리를 구하려는 지극한 마음으로 두 분은 다시 길을 떠나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저녁 날도 이미 저물었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억수같이 내리고 바람도 거세게 불어 한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산길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마침 비를 피할 만한 동굴을 하나 발견하였는데, 온 몸이 비에 젖고 지칠 대로 지친 두 사람은 그냥 쓰러져 잠이 들었습니다. 잠을 자던 원효 대사가 몹시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깜깜한 어둠뿐이었습니다. 주위를 더듬거리다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발견하고는 너무도 반가워 단숨에 마셔버렸는데, 그 물맛 또한 참으로 달콤하였습니다. 그렇게 원효 대사는 만족한 기분으로 새벽까지 깊이 단잠을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니 원효 대사의 머리맡에는 간밤에 자신의 갈증을 풀어준 물바가지가 보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바가지가 아니라 바로 죽은 사람의 해골이 아니겠습니까? 그리니 그 달콤했던 물은 해골 안에 고인 썩은 빗물이었지요. 원효 대사는 갑자기 속이 메스꺼워져 토하기 시작했는데,
‘어젯밤 그토록 달콤했던 물이 오늘 아침에는 보기만 하여도 구역질이 나다니, 같은 물인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콤하고 것과 구역질 나는 것은 가려내는가? 오호라! 그건 물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었구나. 그래 모든 것은 마음이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야!’ 원효 대사는 한 순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것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도 없는 것 모든 것이 마음이요 만 가지 일이 오직 생각이다 다만 마음 따라 생기고 마음 따라 사라질 뿐이라네 또한 대사는, ‘모든 것이 마음인데, 내 마음이야 당나라에 가나 고국으로 돌아가나 항상 그 마음이지’하시며, 그 순간 당나라 가는 것을 그만두고 의상 대사와 헤어져 혼자 신라로 되돌아갔습니다. 본국으로 돌아온 원효 대사는 무덤에서 깨달은 것을 바탕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며 많은 저술을 남겼습니다. 그때까지 상류귀족들만 믿던 불교를 가난하고 무지한 사람들에게 쉽게 전하려고 노력하던 원효 대사의 높은 덕은 신라 땅 방방곡곡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또한 불교 각 종파의 입장을 서로 화해시켜 모두가 하나임을 가르치는 대사의 ‘화쟁(和諍)’ 사상은 신라 불교의 완성이자, 우리 민족의 위대한 사상이며, 방대하고도 깊이 있는 저술은 세계적으로도 중요한 불교연구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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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원효대사(법안스님) 원문보기▶ 글쓴이 : 요석보현
원효대사는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이루니
지난 밤 잠자리는 땅막이라 여겨 편안했는데
오늘밤 잠자리는 귀신의 집이므로
이처럼 편안치 못함을 확인하자.
마음이 일어나면 갖가지 법(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깨달았다.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이다.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으랴.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하고 다시 신라로 되돌아 왔다.
( 一 切 唯 心 造 )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드는 것임을 이제야 깨달았네
심생즉 종종법생 (心生則 種種法生)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심멸즉 감분불이 (心滅則 龕墳不二)
마음이 멸하면 감(龕)과 분(墳)이 다르지 않네
삼계유심 만법유식 (三界唯心 萬法唯識)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識)에 기초한다.
심외무법 호용별구 (心外無法 胡用別求)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해골의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이루니
원효 대사는 이 말을 남기고 의상대사와 헤어져 돌아왔다
어느 날. 원효가 가마를 타고 왕실로 가던 중.
대안 대사와 마주치게 되었다. 대안 대사는 술에 취해.
거지꼴을 하고선. 원효대사에게. 말하길
부처님 말씀에
위도 없고 아래도 없으며.
있음도 없고 없음도 없는데.
어떤 놈은 복이 많아
사람위에 사람이 타고 가며. (사람이 가마를 태우고 가는 것),
좋은 옷을 걸치고 , 좋은 곳만 들락거리느냐…….
또 어떤 놈은 천지가 내 집이고. 내 법당이니.
걸림도 없고.막힘도 없으며.천지가 다 내 것인데
어떤 놈이 더 편한가. 어디 한번 해보자.
하며 고함을 치니 그 소리가
원효에게는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렸고.
다른 사람들은 술 먹은 미친 중놈의 미친 소리로 들렸다.
원효가 대안 대사를 찾아 가니.
토굴 안에는 죽은 어미 곁에 오소리(호랑이) 새끼가 끙끙대며
슬피 울고 있었다. 그 소리가 너무 애처롭고 슬퍼서 .
목탁을 치며 염불을 해주고 있는데.
대안대사가 돌아와 목탁을 치고 있는 원효를 보며
뭐하는 거냐고 물으니 원효는
어미가 죽어 울고 있기에. 염불을 한다고 했다.
대안대사는 혀를 차며 쯔쯔쯔 …….
배고플 때 밥을 주는 것이 염불이니라……. 하며
아랫마을에서 동냥해온 젖을 물리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원효는 또 한 번. 큰 깨달음을 얻는다
一宗一派 一經一論(일종일파 일경일론)
모든 종파는 다 부처님을 가르침을 다르는 제자들이요
팔만사천의 모든 경들은 다 마음을 깨우치는 이치일 뿐이니
치우침이 없어야 하며 특정 교학을 주장하지도 말라
모든 경교의 사상을 和會하고 통일하여
부처님의 참 정신을 구현하라
부처님의 산 가르침을 실천하라.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라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를 실천하라.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
<원효대사>
원효(元曉 : 617 ~ 686) 대사는 속성은 설(薛)이고,
법명은 원효이며 아명 서당(誓幢) ·신당(新幢).
압량(押梁:慶山郡)이고 설총의 아버지이다.
648년(진덕여왕2) 황룡사에서
승려가 되어 수도에 정진하였다.
가산을 불문에 희사하고,
초개사를 세우고 자기가 태어난
집터에는 사라사를 세웠다.
650년(진덕여왕 4)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길에 올랐는데,
중도에 고구려 순찰대에 붙잡혀 실패하였다.
661년 의상과 다시 유학길을 떠나 당항성에 이르러
한 고총(무덤)에서 잠을 자다가
잠결에 목이 말라 마신 물이,
날이 새어서 해골에 괸 물이었음을 알고,
사물 자체에는 정(淨)도 부정(不淨)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음을 깨닫고 그냥 돌아왔다.
그 후 분황사에서 독자적으로 통불교를 제창,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하루는 거리에 나가 “누가 내게 자루 없는 도끼를 주겠는가?
내 하늘을 받칠 기둥을 깎으리라” 라고 노래한 것이
태종무열왕에게 전해져 요석공주와 잠자리를 같이하기에 이르렀고,
마침내 설총이 태어났다. 이 사실을 스스로 파계로 단정하고,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복성거사라 자칭하였으며,
《무애가》를 지어 부르며 군중 속에 퍼뜨리자
불교가 민중 속에 파고들었다. 또 당나라에서 들여온
《금강삼매경》을 왕과 고승들 앞에서 강론하여 존경을 받았다.
그 후 참선과 저술로 만년을 보내다가 70세에 혈사에서 입적하였다.
뒤에 고려 숙종이 대성화정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다.
불교사상의 융합과 그 실천에 힘쓴 정토교의 선구자이며,
한국의 불교사상 큰 발자취를 남긴,
가장 위대한 고승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그의 저술은 20부 22권이 있으며,
현재 전해지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면 100여부 240권이나 된다.
특히, 그의 《대승기신론소》는 중국 고승들이
해동소(海東疏)라 하여 즐겨 인용하였고,
《금강삼매경론》은 인도의 마명(馬鳴)·용수 등과 같은
고승이 아니고는 얻기 힘든 논(論)이라는
명칭을 받은 저작으로서 그의 세계관을 알 수 있는 대저술이다.
그는 학승(學僧)으로서 높이 평가될 뿐만 아니라,
민중교화승으로서 당시 왕실 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또, 종파주의적인 방향으로 달리던 불교이론을
고차원적인 입장에서 회통(會通)시키려 하였는데
그것을 오늘날 원효의 화쟁사상(和諍思想)이라 부르며,
이것은 그의 일심사상(一心思想)·
무애사상(無#애14思想)과 함께 원효사상을
가장 특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너무나 다양하여 헤아리기
어려우나 항상 ‘하나’라는 구심점을 향하였고,
화쟁과 자유를 제창하였다.
원효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구법(求法)의
길에 올랐다가 어느 날 무덤 사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몹시 지치고 갈증이 나던 차에 그럿에
고인 물을 발견하고는 매우 시원하게 마셨다.
이튿날 보니 전날 밤에 마셨던 물은 다름
아닌 해골바가지에 담겼던 물이었다.
문득 구토증이 일어나는 순간 원효대사는
확연한 깨달음을 얻고 탄식하며 말샜다.
"마음이 생기면 우주 만물이 생기고,
마음이 사라지면 해골물이나
깨끗한 물이나 서로 다름이 없구나.
부처님도 이 세상 모든 것은
오직 마음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분이 어찌 우리를 속이겠는가?"
그리고는 원효는 조용히 일어나 의상에게 말했다.
"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소.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의상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까지 오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았는데...
목숨을 걸고 온 길이 아닙니까?"
"당나라에 유학가야 할
이유를 깨닫지 못하던 시절의 이야기요.
스님이나 다녀오시오."
원효가 당나라로 가던 길을 돌려 돌아와
열심히 정진하고 있을 때에
그 당시 서라벌 장안에 걸승이 있었는데
대안(大安)이라는 스님이었다.
이 분은 스님복장보다는
떠돌이와 같은 복색을 하고 다니면서
저자거리를 '대안!
'대안(크게 평안하라는 뜻)!' 하며 외치고 다녔다.
하루는 정진하고 있는 원효를 찾아와 말했다.
"남산의 어느 굴에 어미 잃은 강아지가 있는데
당신이 가서 염불을 좀 해줘야겠오."
하며 원효를 데리고 갔다.
과연 굴에 가니 죽은 어미의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고서
깽깽 거리며 울고 있는 눈도 채 안뜬 강아지들이 있었다.
대안이 말했다.
"자! 이 놈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염불을 해 주시오."
그 말을 들은 원효는
그 자리에 앉아서 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대안스님이
"이보시오 이리 나오시오.
그 강아지들에게는 그렇게 경을 해서는 안되오."
그러자 원효는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하오?"
그러자 대안 스님은 나가서 죽을 끓여와서
강아지 한마리 한마리의 입에다가
죽을 넣어주었다.
그리고는 원효를 보고
"이 놈들에게는 이것이 바로 염불이요."
그 말에 원효는 해골바가지에서
깨달은 마음법과 함께
걸림없는 무애 실천 사상의
큰 틀을 이룰 깨달음을 얻었다.
하루는 대사가 분황사(芬皇寺)
무애당(無碍堂)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다.
제자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대사가 물었다.
"요석공주瑤石公主)께서
금란가사(金란袈裟)를 보내 왔습니다."
대사는 제자가 내미는 가사를
물끄러매 쳐다보다가 말했다.
"너의 눈에는 법의로 보이는 모양인데
나의 눈에는 한 여인의 수많은 번뇌가
얽혀있는 망상뭉치로 보이는 구나.
너나 입어라."
대사는 태종무열왕의 딸 요석공주가 자신을
사모하고 있으을 벌써부터 눈치채고 있었던 것이다.
대사께서 분황사에 있을 때 어느 날 밤,
사복(蛇腹)이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사복은 태어나서 6세가 될 때까지 일어나서
걷기는 커녕 네 다리로 기지도 못하고 기어 다녔다.
그래서 뱀처럼 배로 기어다닌다고 해서
뱀 사(蛇), 배 복(腹), 사복이라고 했다.
그가 6세가 되던 어느 날 제 어미가 밭에
나갔다 돌아오니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사방 팔방으로 찾아 다녔지만 찾지를 못했는데
저녁 무렵에야 돌아왔는데 양손에 뱀을 잡아 쥐고
언제 기어다녔냐는 듯이 걸어 들어왔다고 했다.
그런 그가 대사를 찾아와 말했다.
"평생 농사를 짓고 새끼만
돌보던 암소가 한마리 죽었는데
같이 가서 묻어주지 않겠소?"
대사는 두 말않고 쾌히 그를 따라갔다.
사복이 암소라고 하는 것은 그의 어미였다.
둘은 사복의 어머니를 정성스레 장사를 지내면서
사복이 원효에게
"어머니 가시는 길에 명복이나 빌어주소."
하자, 대사는
"무릇 살아있는 것은 고통의 삶을 사는 것이니
태어나지도 말고 사는 동안 병든 것도 역시 고이며...."
대사가 이렇게 명복을 빌자, 사복은 그 말을 듣고
"너무 기오. 짧게 할 수 없오?"
그러자, 대사가 말을 고쳤다.
"태어남은 고요 태어나지도 말고..."
그러자 또 사복이 말했다.
"그것도 기오, 더 짧게 하시오."
그러자 원효는 말했다.
"태어나지도 죽지도 말지어다."
그러자, 사복은
"됐오."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는
사복이 대사의 제자가 되었다.
대사와 대안 스님이 서라벌의 저잣거리를
걷다가 문득 대안 스님이 말을 꺼냈다.
"원효 스님, 오늘 저녁
삼악도(三惡道)나 구경하러 갑시다."
대사는 궁금한 얼굴로,
"삼악도라니요?"
대안스님은 껄껄 웃으며 기방(妓房)을 가리켰다.
"저 곳이 삼악도가 아니고 무엇이오?
우리 저기 가서 중생제도나 합시다."
대사가 혜공스님과 함께 천렵
(川獵 : 냇가에서 고기 잡는 일)을 하러 갔다.
둘이서 고기를 잡아서 먹고는
대사께서 냇가 바위에 앉아서 대변을 보자
변이 물에 둥둥 떠내려 갔다.
그것을 본 혜공스님이 왈
"네 똥이 내 고기로다."(汝尿而 吾漁로다)
하였다.
이 일화가 바로 포항 오천의
오어사(吾漁寺)가 생긴 유래이다.
대사 말년에 요석공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설총이 찾아왔다.
그 때에 대사는 일주문앞에서
낙엽을 쓸고 있을 때였다.
아무 말 없이 인사를 하는
아들을 보고 빗자루를 쥐어주며
"여기에 있는 낙엽을 쓸어모아라."
그리고는 절로 들어갔다.
설총은 깊은 가을에 쌓인 낙엽을
정성스레 쓸어서 모아놓고는.
다시 나온 대사를 보고,
"이제 다 쓸었습니다."
하니, 대사는 설총이 쓸어놓은 낙엽더미에서
한 아름씩 집어다가 원래 있었던 모양으로
일주문 앞에 뿌렸다.
그리고는 아무 말없이 다시 산사로 돌아갔다.
“일체 무애인은 단번에 생사 벗어난다”
성사(聖師) 원효는 성이 설씨이고 할아버지는 임피공이며, 아버지는 담날내말이다. 압량군(지금(고려)의 장산군, 현재의 경북 경산 압량면) 남쪽 불지촌의 밤골 사라수 아래서 태어났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옛날 한 절의 주지스님이 종에게 하루저녁 끼니로 밤 두알씩을 줬다. 종은 양이 너무 적다며 관아에 소송을 했다. 관리가 괴이하게 여겨 밤을 가져다 조사해보니 한 알이 사발 하나에 가득 차 있으므로 도리어 한 개씩만 주라고 판결을 했다. 그래서 밤나무 골이라고 부르게 됐다.
원효스님은 출가하고 그 집을 초개사(初開寺)라 이름 지었으며, 나무 옆에 절을 세우고 사라사라고 불렀다. 법사의 어릴적 이름은 서당이고, 다른 이름은 신당이었다. 어릴적부터 총명하고 특이하여 혼자 공부를 했는데, 하루는 거리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 누가 내게 자루없는 도끼를 주려는가.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어 보련다.” 사람들은 그 의미를 알지 못했는데, 이 노래를 들은 태종 무열왕은 “이 대사가 아마 귀한 부인을 얻어 어진 아들을 낳고 싶어하는가 보다”고 뜻을 알아차렸다.
이때 요석궁에 과부 공주가 있었다. 왕은 궁리를 시켜 원효를 불러오게 했다. 궁리가 원효스님을 찾아가니 이미 남산을 지나 문천교를 지나고 있었다. 원효는 궁리를 보자 일부러 물에 빠져 옷을 적셨다. 할수없이 궁리는 요석궁으로 인도해 옷을 말리며 머물게 했다. 이후 공주가 태기가 있어 설총을 낳으니 신라 10현(賢)중 한사람이다. 설총은 훗날 이두 문자를 만들고 학문을 발전시킨 인물이다.
‘화엄경’ 내용의 노래 유포시켜
무지한 백성도 아미타불 ‘염송’
원효가 계율을 어기고 설총을 낳은 이후 속인의 의복을 입고 스스로 소성(小性)거사라고 불렀다. ‘일체 무애인(無碍人)은 한 번에 생사를 벗어난다’라는 <화엄경>의 내용으로 무애가를 만들어 세상에 유포시키니 뽕나무 농사짓는 늙은 이와 옹기장이나 무지몽매한 무리들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됐다.
원효스님은 일찍이 분황사에 머물면서 <화엄경소>를 지었는데, 제40 <회향품>에 이르러 붓을 꺾었다. 또 송사 때문에 몸을 일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니 모두 이를 위계의 초지라고 했다. 또 바다용의 권유로 길가에서 조서를 받들고 <삼매경소>를 지었는데 붓과 벼루를 소 뼈 사이에 놓았으므로 각승(角僧)으로도 불렸다.
그가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잘게 부수어 진용을 빚어 분황사에 모시고 슬픔을 표했다. 그때 소상이 갑자기 돌아보았는데 그때 돌아본 채 그대로 있다.
신라시대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한국불교의 큰 스승인 원효.의상.자장스님 등 수많은 고승이 함께 했던 까닭이다. 그 가운데서도 원효스님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스님이다. 마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걸림 없이 살았던 원효스님이다.
일연스님은 다른 스님과 달리 원효스님에 대해 ‘聖師’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그만큼 원효스님을 존경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효스님은 특히 원융사상을 강조했다. 모든 사상과 가르침, 일체만물은 독립적인 현상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일체만물과 화합하는 중도의 삶을 살라는 것이 원융사상의 요체다.
최근 몇 개월 사이, 계층간.지역간.종교간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상대를 인정하고, 또한 그 상대로 인해 내가 존재할 수 있다는 원융의 가르침을 잊고 살기 때문이다. 원효스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돌아봐야 한다.
안직수 기자 jsahn@ibulgyo.com
오늘은 다 아는 이야기 중의 하나인 원효대사와 해골물에 얽힌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는 당시 불교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있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을 하고 배를 타기 위하여 백제로 가다가 밤이 늦어서 이슬을 피할 수 있는 굴 속에서 자고 가기로 합니다. 밤에 잠에서 깬 원효대사는 너무나 목이 말라서 물을 찾다가 옆의 그릇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먹었지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깨어난 원효대사가 다시 물을 찾다 해골에 담긴 썩은 물을 발견하게 되지요.
해골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구역질을 하고 말았지요. 그러다 아하! 하고 깨우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즉 여러가지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없어지니 해골과 바가지가 둘이 아니로구나.
삼계가 오직 마음뿐인데, 당나라에 가나 신라에 있으니 항상 그 마음인 것을... 그리고 신라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아주 유명하지요. 이 이야기는 너무나 많이 이야기 되는 이야기라서,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입니다. 그러나 원효대사와 낙산사에 얽히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보면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봅니다. 의상대사가 낙산사에서 관음보살을 친견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서, 원효대사도 길을 재촉해 낙산사로 향합니다. 흰옷을 입고 벼베는 여인을 보고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이 흉년이라고 하지요. 빨래하는 여인을 만나서 물을 달라고 하지요. 그러자 여인이 빨래하던 곳의 물을 떠서 주게 됩니다. 원효대사가 물이 더럽다고 생각하여 버리고 다시 떠서 마시지요. 이 때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가 있다가 날아 오르며, 휴제호 화상아! 즉 불법의 진수를 모르는 화상아! 하면서 날아갑니다. 소나무 아래에 짚신 한짝이 있었는데, 절에 이르러 관음상 아래에 보자 짚신 한짝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제야 비로서 그 여인이 관음을 화신임을 알고 첨례코자 하였으나 친견할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지요. 이 일화는 다른 방면에서 원효대사를 봅니다. 즉 일체를 마음의 작용으로만 보고, 나머지는 다 헛되다고 하는 것에 집착을 하면은, 현실 속에서 일어나는 일 들에서 멀어져 오히려 본질을 보지 못한다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너무 일체유심조에만 집착함으로서 현실속에서 중생을 이끌어 주시는 자비의 보살정신을 잃어 버리면 안된다는 이야기지요. 이러한 부분을 원효대사께서도 잘 아셨기에, 후에 일반대중이 같이 할 수 있는 정토신앙의 보급에 앞장 서신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원효성사 명언 /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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