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진...한진나루, 한나루...평택 만호리(외야곶<오야곶<왜곶이)...괴태길곶(원정리 봉수대)~송악 한진나루 >>>
***직산현 외야곶<오야곶<왜곶이...서해대교와 평택항여객터미널 //
***양성현의 괴태길곶<홰대기곶<평택항... 원정리 봉수대...직산현의 망해산 봉수대와 상응(팽성) //
***직산현 외야곶면의 대진(한진나루)...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 대진-평택항 유래 >
위치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대진은 일명 큰 나루, 한진(漢津), 한(진)나루, <솔개바위 나루-鳶岩津>라 부르며,
마한 진왕(馬韓 辰王)이 동북 100리를 온조왕에게 봉토(封土)하여
백제 첫도읍지 직산(稷山)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을 세우고(BC18년),
경양군(慶陽君), 하남백(河南伯) 백제개국공신 조성(趙成-직산조씨 시조)이 봉작(封爵) 받은
위례성 서북쪽 해로(海路)의 대중국(對中國), 대외무역(對外貿易)의 요충지였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의 한강유역을 점령, 개로왕을 죽이고 (AD475년),
이곳을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수릿골)이라 개칭하였으며,
신라 진흥왕은 한성 백제 땅을 빼앗고 신주(新州)를 설치(AD553년),
김무력~김서현~김유신장군 가문(家門)이 백제 의자왕 군대를 격파하며,
<대진>에 대당조공로(對唐朝貢路)를 다시 열었다(AD649년).
대진(大津)은 혜군 가리저(槥郡 可里渚-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동쪽에 백제의 수군창이 있었던 것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평정하고(AD660~663년), 신라에서 <숙(수)관-稤館>을 설치하여 대당, 대외무역의 제일해관(第一海關), 대당 조공로(對唐 朝貢路)로 이용되었다.
원효대사와 의상대사의 2차 당나라 유학길(AD661년)
충북 진천의 도당산성~협탄령(엽둔치, 엽전재)~직산(양성, 안성)~대진나루를 통한 안전행로를 택한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원효대사의 유명한 <해골 물- 대오각성> 설화(說話)의 중심지 역시
홰대기곶(괴태길곶-槐台吉串, 봉화산,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 서남쪽에
염거(廉居, ?~844) 스님이 창건한 사찰 수도사(修道寺)라고 전해지며,
최근 해군사령부 공사를 할 때 불상과 주춧돌이 발견되었다.
<대진> 인근 용성은 신라 경덕왕이 차성(車城)이라 개칭(AD 757년), 당은군(唐恩郡-남양)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 광종7년(AD 965년) 무렵에 용성현(龍城縣)으로 고쳤다.
“대진(大津)은 조선시대 직산현 왜곶이(外也串, 吾也串) 월경지 서쪽 80리에 있으며,
수원도호부 서남쪽으로 1백리, 넓이가 10여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임진왜란시 왜군을 물리친 영웅암(英雄岩, 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 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홍성) 면주(沔州-면천)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규장각 <고지도>등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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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津三國時百濟 (대진삼국시백제)
於槥郡之可里渚 (어혜군지가리저)
東置水軍倉新羅 (동치수군창신라)
平百濟置館積穀 (평백제치관적곡)
號稤館唐之使价 (호숙(수)관당지사개)
商賈皆就館羅人 (상고개취관라인)
朝貢亦由此因名 (조공역유차인명)
大津 (대진)
* 대진(한진나루...지금의 만호리 일대)은 삼국시대 백제의
혜군(지금의 당진군 면천면)의 가리저 고을(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동쪽에 수군의 창고를 두었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후에 관을 설치하여 곡식을 쌓았다.
숙(수)관이라 부르며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장사꾼) 그리고 신라가 당나라에 조공을
이곳에서 한데서 <대진>이란 유래의
지명이 생겨났다.
*혜(槥-널혜)군--지금의 당진군 면천면 * 사개(使价)--큰 사신 / * 상고(商賈)--상인(장사꾼)
*가리저-백제의 현(縣)이름. 예) 금마저(金馬渚)-지금의 전북 익산
*수(稤..궁 소임 수, 숙)--숙(수)관...당관(唐館)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연구소...1872년 지도...수원부지도 //
***외야곶면-직산현 서쪽 80리...지금의 포승읍 만호리, 신영리 일대
***평택항 여객터미널...만호리에 외야곶(外也串), 오야곶(吾也串-왜곶이)
대진(한진)나루의 유래비 설립하여 역사문화 유산을 홍보요망하면 좋을 것 같네여... ///
***아산현의 영인산성 < 신성산성(薪城山城-섶머리 성) < 백제의 대두산성(大豆(頭)山城)---우측 밀두리 입암산 /
***아산의 고용산(高聳山)...높게 치솟은 산 ///
***서해 아산만 계두산 아래에서 본 위례성(중앙) // 좌측-서운산(좌성산) // 우측 성거산(우성산)---익성...//
***직산의 하남위례고성(523m)...좌측 능선--입장 양대리 국사봉 //
***우측의 성거산(579m)...좌측 위례고성...금북정맥, 호서정맥 //
***좌측의 서운산(547.7m), 좌성산...서운산성과 우측의 위례고성 //
***서운산 (좌성산)의 모습...//
***성거산(聖居山,579m)의 모습
***계두산(鷄頭山)...지금은 마안산...고등산...수원부 고지도엔 광교산...//
***아산호 방조제와 건너 대두산성의 영인산과 입암산(갓바위) 봉수대...//
***혜초기념비...아산호 관광지...//
***대동여지도...대진(평택 만호리~당진 송악 대진-한진나루)
***광여도 수원부지도...직산의 외야곶 대진 //
수원도호부(水原都護府) --신증동국여지승람 //
남쪽으로 충청도 평택현(平澤縣) 경계까지 50리, 같은 현 경계까지 59리, 진위현(振威縣) 경계까지 22리, 서쪽으로 남양부(南陽府) 경계까지 20리, 같은 부 경계까지 1백 13리,
【속현】용성현(龍城縣)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는데, 본래 고구려의 상홀현(上忽縣), 또는 차홀(車忽 수릿골)이라고 한다. 신라에서 차성(車城)이라 고치어 당은군(唐恩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쳤으며, 현종(顯宗) 9년에 와서 본부에 예속되었다.
【산천】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 부 남쪽 67리 되는 곳에 있다. 대천과 진위현(振威縣) 장호천(長好川)의 물이 여기에서 합류하여, 또 남쪽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간다. 양야곶(陽也串) 쌍부현(雙阜縣)에 있는데 부 서쪽까지 50리이다. 둘레가 68리이고 목장(牧場)이 있다.
【진도】 계두진(鷄頭津) 남쪽으로 80리인데, 아산(牙山)으로 통한다.
이포진(里浦津) 남쪽으로 70리이며 평택(平澤)으로 통한다.
당포진(堂浦津) 남쪽으로 90리이며 아산으로 통한다.
대진(大津) 서남쪽으로 1백 리이며 넓이가 10여 리인데 조세(潮勢)가 사납다. 중류(中流)에 영옹암(令翁巖)이 우뚝 서 있는데 높이는 1백 척가량 된다. 만조(滿潮) 때에 배로 건너면 홍주(洪州) 면주(沔州) 등 여러 읍으로 통하는 첩로(捷路)이다.
【목장】 홍원곶장(洪原串場) 서남쪽으로 80리이다.
○ 감목관(監牧官) 양야곶장(陽也串場) 서남쪽으로 70리이다.
【고적】 정송폐현(貞松廢縣)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는데 옛 송산(松山)부곡(部曲)이다.
광덕폐현(廣德廢縣)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위의 두 현은 고려 현종(顯宗) 9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포내부곡(浦內彌部曲)ㆍ육내부곡(陸內彌部曲) 모두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쟁홀(爭忽)부곡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제촌(堤村)부곡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청구(靑丘)부곡ㆍ사량(沙梁)부곡 부 서쪽 20리 되는 곳에 있다. 공촌(公村)부고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주석향(柱石鄕) 부 남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분촌향(盆村鄕) 부 서쪽 15리 되는 곳에 있다. 공이향(工二鄕) 부 서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사정처(奢井處) 부 남쪽 50리 되는 곳에 있다. 금음촌처(今音村處)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양간처(楊干處)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본래는 인주(仁州)에 속하여 있었는데, 우리 태종(太宗) 18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삼봉처(三峯處) 부 서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고등촌처(高等村處) 부 북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심곡처(深谷處) 부 서쪽 25리 되는 곳에 있다. 유제처(楡梯處) 부 동쪽 5리 되는 곳에 있다. 오타장(五朶莊) 부 남쪽 65리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高麗史)》에 영신현(永新縣)을 일명 오타(五朶)라고 하였는데 이는 틀린 것이다 영신은 지금 진위현(振威縣)에 속하였다. 종덕장(宗德莊) 부 남쪽 30리 되는 곳에 있다.
신영장(新永莊) 부 남쪽 60리 되는 곳에 있다. 처음에는 양성(陽城)에 속하여 있었는데, 우리 태조 7년에 와서 예속되었다.
*** 당진 송악의 대진(한진나루)의 모습
***당진의 송악 한진나루(대진)의 전경...//
***서해대교의 아름다운 저녘 노을...//
< 위례성 > - 吾心竹 詩 -
慰禮城 부소모이 물 따라 일 백리 길
素沙河 沃澤田畓 기장 벼 베어내니
오리 떼 群舞되어 하늘을 덮는구나
雙嶺山 차령고개 산 따라 일 백리 길
曲橋川 沼澤田畓 수수 조 걷어내니
참새 떼 이리저리 낱알을 쪼는구나
曲橋川 素沙河에 百姓들 모여드니
집마다 굴뚝연기 太平을 누리나니
城壁을 둘러막고 百濟라 이름하네
밀머리 산꼭대기 西海를 바라보며
溫祚王 세대박이 大洋을 누비나니
뉘라서 七百年 大業 虛無타 말을하리
<<< 직산고을 오심죽...직산현의 서쪽 외야곶 대진(大津) 탐방기...2009.8.21 >>>
< 大津-平澤港 > ---吾心竹 詩 //
파란물 부딪치는 저기가 밀머리라
비류왕 海濱古都 온조왕 大豆山城
牛頭坪 너른 들판 槥郡의 可里渚라
脇呑嶺 곧장 질러 홰곶이 올라서니
唐項城 세대박이 羅唐船 오고가고
百濟倉 修築하여 唐稤館 懸板거네
泗泌城 떨어진 꽃 白馬江 흐르는데
周留城 劍歌소리 漁夫의 노래소리
어느 뉘 해골바가지 물 시원타 말했느뇨
防潮堤 막힌 곳에 숭어 떼 뛰노나니
그리운 慰禮古城 보고픈 님의 얼굴
뿌우웅 뱃고동소리 山東가는 카페리호
< 오심죽...大津...평택항에서...2009. 9. 21 >
**주(註) :
1) 대진(大津)-옛 외야곶(外也串,吾也串, 왜곶이)--신라~당나라의
공도(貢道)의 중심 항구. 지금의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평택항.
2) 밀머리-충남 아산시 밀두리...
밀물(썰물)의 머리란 순 우릿말>밀두(密頭).
3) 해빈고도(海濱古都)-비류왕이 세운 국가로 미추홀(彌鄒忽)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를 말함
4) 대두산성(大豆山城)-백제 온조왕 27년(AD 9년) 축성-<삼국사기>
大頭山城=大豆山城>섶머리성=薪城山城>靈仁山城(평택성)
*섶머리-삼각주처럼 생긴 지형. 일명 섬머리를 한자로 표현함.
5) 우두평(牛頭坪)-당진군 면천면 삽교천 유역의 평야를 말함.
...지금의 우강면, 신평면, 합덕읍 일대
6) 혜군 가리저(槥郡 可里渚)--지금의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백제 때 이름 (예) 금마저(金馬渚)--전북 익산의 백제시대 이름.
7) 협탄령(脇呑嶺)--지금의 엽돈령, 엽전재...입장~진천간 고개 이름.
...안성 서운산 청룡사~입장 양대리 부소산(扶蘇山)에 걸쳐 있슴.
8) 홰곶이-일명 홰대기곶>괴태길곶(槐台吉串)
-횃불(봉화)를 올리던 곶이란 뜻 /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 봉수대.
9) 당항성(黨(唐)項城)--<당나라로 가는 길목의 성>으로
아산만~덕적도 사이 긴 해협(海峽)의 해안선을 통칭하여 말함.
10) 세대박이--주로 大洋을 항해하던 범선. 古代 돛대를 3개 세운 배.
11) 나당선(羅唐船)-신라, 당나라 배.
12) 당숙(수)관(號稤館)-지금의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 혜산의 동쪽에 있던 당관(唐館)을 말함.
평택시 포승읍, 안중읍 부근의 용성,차성(車城) 역시 당관(唐館)을 두었을 것으로 사료됨.
안중읍 龍城, 자미산성, 비파산성 부근으로 추정.
13) 사비성(泗泌城)-부여읍 쌍북리(雙北里)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14) 주류성(周留城)-백제부흥군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이
이끄는 백제 최후의 항전지...충남 홍성군 장곡면 일대로 추정함.
15) 위례고성(慰禮古城)-백제초도 직산 위례성(BC18~6,13년간)
백제 온조대왕이 세운 도읍지. 입장 호당리~북면 운용리에 있슴.
16) 산동(山東)-중국의 산동 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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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연해(沿海)의 정관(亭館)
백제가 혜군(櫘郡) 가리저(加里渚)의 동쪽에 수군창(水軍倉)
을 두었는데 혜군은 지금의 면천(沔川)이다.
그 뒤 신라가 백제를 평정한 뒤에 다시 혜산(櫘山)의 동쪽에
창고를 두고 그 이름을 숙관(稤館)이라 하였는데
당(唐)나라의 사개(使价)와 상고(商賈)들이
모두 이 관(館)에 들었으며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조공할 때도 이곳을 통해서 하였다.
풍천(豐川) 초도(椒島)의 광석산(廣石山) 밑에 당관(唐館)의 옛터가 남아 있는데 전해 오는 말에 의하면 중국의 사신들이 바다를 건너서 왕래하던 곳이라고 한다.
고려 때에는 송(宋)나라의 서울이 변경(汴京)에 있었기 때문에 사행(使行)들이 등주(登州)로 가서 뭍으로 올랐다. 그래서 황제가 등주에 조칙을 내려서 관을 두고 이들을 접대하도록 하였다. 보령현(保寧縣) 서쪽에 있는 고밀도(高密島)의 관은 중국의 사행(使行)들이 왕래하던 정관(亭館)이며, 송나라 흠종(欽宗)이 등극하였을 때 김부식(金富軾)이 하사(賀使)가 되어서 배를 탔던 곳에 모두 정관들이 있었는데 등주의 여러 곳들이 바로 이것이다. 해미(海美)의 안흥정(安興亭)과 홍주(洪州)의 잉분도(芿盆島), 인천 자연도(紫燕島)의 조천대(朝天臺), 송도(松都)의 벽란정(碧瀾亭) 등이 모두 옛날에 중국으로 사신을 떠나던 장소들이며, 대식(大食), 섬라(暹羅) 등 여러 나라들이 이곳을 통해서 방물(方物)을 바쳤다.
원(元)나라 때는 제주(濟州)에 총관부(摠管府)를 설치하고 장사성(張士誠), 방국진(方國珍) 등이 해마다 고려에 사신을 보내왔는데 이들이 모두 제주를 경유하였다. 유구(琉球)의 사신이 순천(順天)에 와서 정박함에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답례를 하였는데, 이때는 제주의 오른쪽 바다를 지나서 통행하였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해중(海中)의 군대(軍隊) 이동의 길
중국 군대의 이동은 모두 바다를 경유해서 요동(遼東)으로 나왔는데, 한(漢)의 팽오(彭吳)가 예맥(濊貊)과 조선(朝鮮)에 침입했을 때에 중국의 연제(燕齊)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騷動)이 일었다. 그리고 양복(楊僕)이 위씨조선(衛氏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을 침공할 때에 발해(渤海)를 건너서 열구(列口)에 이르렀는데 이 열구란 한강이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곳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한(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장군을 보내 바다를 건너와서 청천강(淸川江) 이남의 지역을 회복하였다. 그리고 조위(曹魏 삼국 시대의 위나라)는 유흔(劉昕)을 보내 침공해 왔고, 사마의(司馬懿 조위의 권신(權臣)으로 진(晉) 무제의 조부)는 우리나라를 공격하려고 군량을 운반하였는데 이를 위해 등주(登州)에다 수입성(水入城)을 쌓았으며, 탁발위(拓跋魏 북위(北魏))는 백제를 침벌(侵伐)하였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8년(612, 고구려 영양왕23)에 내호아(來護兒)가 바다를 건너 패수(浿水)로 들어와서 평양에 주둔하였으며, 당(唐)나라가 정관(貞觀) 18년(644, 보장왕3)에 고구려를 정벌할 때 산동반도의 내주(萊州)에서 곧장 평양으로 왔는데 등주(登州)의 북쪽에 오호도(烏胡島)를 건설하였다. 그리고 용삭(龍朔) 1년(661, 부여 풍왕1)에 소열(蘇烈 소정방(蘇定方)을 말하는데, 열이 이름이고 정방이 자임)이 백제를 멸망시킬 때에 등주의 성산(成山)에서 출발하여 인천의 덕적도(德積島)에 도착하였다. 이 성산의 동쪽 10리에 소석산(召石山)이란 산이 있는데 이 산은 진시황(秦始皇)이 바다를 건너려고 다리를 만들던 곳이라 한다.
원(元)나라는 범문호(范文虎)를 보내 흑산도(黑山島)의 수로를 자세히 살펴보고는 제주도의 남쪽 바다를 경유하여 일기도(一歧島)에서 고려의 군대와 만나서 왜(倭)를 정벌하였다. 선조 무술년(1598, 선조31) 왜적이 침략할 때에는 진린(陳璘)이 절강(浙江)의 군병을 동원하여 당진(唐津)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유구(琉球)와 섬라(暹羅)에 조칙을 내려서 우리나라를 돕도록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군대로 말하면 백제가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가서 월주(越州)의 땅을 경계로 삼았는데 이는 곧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이 도읍했던 곳이며, 또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서 요서(遼西)의 진평(晉平)을 경략(經略)하였는데 이는 곧 옛날 고죽국(孤竹國)의 지역이다.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 시중(侍中)에게 올린 글에 보면 백제도 일찍이 중국의 제로(齊魯) 지방을 침공하여 이를 뒤흔들어 놓은 일이 있다고 한다.
고려 고종(高宗) 임진년(1232, 고종19)에 정응경(鄭應卿)이 수군(水軍) 3천 명을 거느리고 용주포(龍州浦)를 출발하여 몽고의 요청에 호응했던 일이 있으며, 인조 18년(1640)에는 임경업(林慶業)과 이완(李浣)이 주사(舟師) 5천 명을 거느리고 열두 달치 식량을 준비해 가지고 안의(安義)의 바닷가에서 서로 회합한 적이 있다.
[주D-001]한(漢)의 …… 일었다 : 《사기(史記)》 평준서(平準書)에는 “팽오가(彭吳賈)가 조선을 멸하고 창해군(滄海郡)을 두었는데 연제 지방이 휩쓸리어 소동이 일었다.”고 되어 있는데, 기원전 128년에 위씨 조선(衛氏朝鮮)에 소속되어 있던 예군(濊君) 남려(南閭)가 그가 관할하는 28만 구(口)를 이끌고 한(漢)에 귀부(歸附)한 것을 계기로 일시 이곳에 창해군을 두었던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주D-002]양복(楊僕)이 …… 이르렀는데 : 한의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은 5만의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을 거쳐 왕검성으로 들어왔는데, 열구는 곧 대동강의 어귀 또는 그 어귀에 있는 황해도 은율(殷栗) 지방을 가리킨다.
[주D-003]광무제(光武帝)가 …… 회복하였다 : 서기 23년에 낙랑군 지역의 토호(土豪)인 왕조(王調)가 일어나서 낙랑군의 태수인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스스로 ‘대장군 낙랑 태수(大將軍樂浪太守)’라고 일컬었는데, 그 뒤 이 반항 운동이 7년간을 끌다가 후한(後漢)의 광무제가 새로 파견한 낙랑 태수 왕준(王遵)과 이에 협력한 토착 한인(漢人) 세력들에 힘입어 서기 30년에 실패로 돌아가고 만 일이 있으며, 서기 37년에는 고구려의 대무신왕(大武神王)이 보낸 호동왕자(好童王子)에 의해 낙랑군이 습멸(襲滅)되었다가 그 뒤 44년에 역시 후한의 광무제가 해로(海路)로 보낸 군대에 의해 낙랑군이 또다시 살아나게 된 일이 있었다.《後漢書 卷76 循史列傳 王景》 《後漢書 卷1 光武帝紀》 《三國史記 大武神紀》 그러나 여기에서 이유원(李裕元)이 회복이란 뜻의 ‘복(復)’ 자를 쓴 것은 잘 이해할 수가 없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정유(1417,영락 15) 11월27일 (무인)
조운의 때를 잃은 일로 충청도 도관찰사 서선을 파직하다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 서선(徐選)을 파직하였으니, 충청도의 조운(漕運)이 시기에 미치지 못하여 도중에 얼음이 얼어서 인명을 죽음에 이르게 한 때문이었다. 녹전감재 차사원(祿轉監載差使員)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 권소(權紹)·덕산 현감(德山縣監) 권수종(權守宗)·직산 현감(稷山縣監) 최규(崔揆)·수참 전운 판관(水站轉運判官) 김자동(金自東) 등은 파직하고, 영선 차사원(領船差使員) 이산 현감(尼山縣監) 양유중(梁有中)·대진 만호(大津萬戶) 오진경(吳晉卿)은 모두 논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죄가 감재(監載)에게 있고 영선(領船)한 자의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원전】 2 집 19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교통-수운(水運)
[주D-001]녹전감재 차사원(祿轉監載差使員) : 각 지방에서 서울로 조전(漕轉)하던 녹미(祿米)를 배에 실어 나르던 일을 감독하던 차사원(差使員).
[주D-002]영선 차사원(領船差使員) : 조전(漕轉)하는 데 배를 몰고 목적지까지 가는 책임을 진 차사원(差使員).
세종 20년 무오(1438,정통 3) 9월10일 (신묘)
최윤덕이 면천 산성보다 서천성을 먼저 쌓을 것을 상언하니 의논하여 면천 읍성을 먼저 쌓기로 하다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최윤덕(崔閏德)이 상언하기를,
“이제 면천 산성(沔川山城)은 그 내부가 험하고 또 크다는 이유로 읍성(邑城)으로 개축하고 있습니다. 대저 면천 밖에는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 파지도 만호(波知島萬戶), 탄지도 만호(灘知島萬戶), 대진 만호(大津萬戶)와 태안(泰安)·서산(瑞山)·당진(唐津) 등의 각 고을의 포구가 해문(海門)에 포열해 있어서, 비록 적변(賊變)이 있다 하더라도 가장 먼저 적의 침투를 받을 곳은 아니오니, 잠정적으로 읍성으로 개축하지 말게 하시고는 다시 조관을 파견하여 심정(審定)한 연후에 이를 쌓게 하시고, 서천(舒川)의 성은 적로(賊路)의 첫 길목이고 또 이미 축조를 시작하였으니, 금년에 축조를 끝내게 하시는 것이 어떠하옵니까.”
하니, 병조로 하여금 이를 의정부와 함께 같이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황희(黃喜) 등은 의논하기를,
“먼저 면천(沔川)을 쌓고 뒤에 서천(舒川)을 쌓는다는 공의가 이미 정해졌음에도, 이제까지 아직 쌓지 않는 이유는 다만 성기(城基)가 정해져 있지 않고 또 흉년으로 말미암은 것이지, 면천이 위급하지 않다고 하여 그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저 산성이란 위급한 사태가 있을 때만 쓰고 평상시에는 그다지 쓰지 않는 까닭에, 오르내리면서 출입하는 것을 백성들은 모두가 싫어하고 꺼리는 법이온대, 금번 순무사(巡撫使) 조말생(趙末生)이 인민들의 소망에 따라 이미 읍성의 기지를 확정하고 또 병기도 갖추었으며, 뿐만 아니라 민력을 동원할 시기까지 박두하였는데, 갑자기 서천으로 옮겨 사역한다는 것은 진실로 불가한 일입니다. 대개 면천 산성에 있어서는 3, 4인의 대신들이 각기 자기의 소견을 고집함으로써 의논이 분분하여 결정을 보지 못했던 것이어서, 비록 조관을 보낸다 하더라도 반드시 정하기 어려울 것으로 추상되오며, 또 각도 주·현(州縣)에 읍성이 있고도 산성이 있는 데가 자못 많사오니, 이제 면천 읍성을 다 쌓고서도 혹 감당하기 어려운 적변이 있으면 다시 산성을 쌓아 사변에 대응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허조(許稠)는 의논하기를,
“전자에 신이 계본(啓本)을 본즉, 읍성은 곧 면천 인민들이 자원하는 바이며, 또 물과 샘이 있으나 산성은 물과 샘이 핍절되어 있다고 하옵기에, 신이 전일 헌의하여 계본에 의해 하옵시기를 청하였던 것입니다. 이제 최윤덕의 상언에 거의 다 쌓은 산성을 철폐 파기할 수는 없다고 하였으니, 그윽이 생각하건대, 노장(老將)의 말은 아마도 그의 소견이 있을 것으로 아옵니다. 신은 생각하옵기를, 물이 족하고 부족하다는 말이 오늘에 와서 비로소 제기된 것인지, 아니면 산성(山城)을 처음 한 곳에다 정할 때에 이미 있었던 것인지요. 산성을 처음 정할 때에 만일 물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다면 반드시 이 성을 취택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때 물이 풍부하였다면 오늘에 와서 갑자기 부족하게 될 수는 없는 일이므로, 이것이 의심스럽다는 것입니다. 물과 샘이 있고 없는 것은 하루 이틀의 경고로는 징험될 바가 아닌지라, 조말생이 어찌 능히 이를 알았겠습니까.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서 다시 심찰하여 정하게 하옵소서.”
하고, 좌찬성 신개(申槪)는 의논하기를,
“면천의 읍성과 산성의 어느 것이 온당한 것인지 알 수 없으므로, 멀리서 이를 추측해 헤아리기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서천은 해구(海口)와 가까워서 바로 충청도에서는 적을 받는 첫 길목이 될 것입니다. 적의 배가 전라도로부터 올 것 같으면, 바닷길로는 반드시 제일 먼저 서천으로 와서, 비인(庇仁)·남포(藍浦)·홍주(洪州)·서산(瑞山)·태안(泰安) 등지를 거쳐 당진(唐津)·면천까지 도달할 것이니, 최윤덕의 헌의는 진실로 그 선후 완급(先後緩急)의 이치를 얻은 것입니다. 당초에 의논할 때 서천을 뒤에 하고 당진·면천을 먼저 하기로 한 것은 그 뜻을 알지 못하겠사오나, 만약 서천에의 축성의 제반 일이 기간 내에 가능하다면, 먼저 서천을 하고 뒤에 면천을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하니, 황희 등의 헌의에 따랐다.
【원전】 4 집 161 면
【분류】 *군사-관방(關防)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조운(漕運)에 이용된 수로(水路)
고려 충렬왕(忠烈王) 기축년(1289, 충렬왕15)에 원(元)나라가 요동(遼東)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쌀 10만 석을 요구하였으므로 고려가 6만 4천 석의 쌀을 개주(蓋州)로 실어다 준 일이 있으며, 신묘년(1291)에는 우리나라가 기근이 들어 원나라가 강남(江南)의 쌀 10만 석을 우리나라로 운반해 온 일이 있다. 또 원나라 장수가 일본을 정벌할 때에는 10만 석을 운반하여 강화(江華)에 비축하기도 했으며, 을미년(1295)에는 요동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5만 석의 쌀을 요동에 실어 보내 주도록 하기도 하였다.
아조(我朝)의 선조 25년(1592)에 명나라가 산동(山東)의 쌀 10만 석을 실어다가 우리나라 남도(南道)의 백성들을 진휼하였으며, 모문룡(毛文龍)이 가도(椵島)에 진을 치고 있을 때에는 중국의 등주(登州)에서 양향(糧餉)과 금백(金帛)을 실어 날랐는데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인조 18년(1640)에 쌀 1만 석을 삼차(三叉)의 대릉하(大凌河)와 소릉하(小凌河)에 운반하였으며, 갑신년(1644, 인조22)에는 또 1만 석을 운반하였고 을유년(1645, 인조23)에는 칙자(勅咨)로 인하여 삼남(三南)과 양서(兩西)의 쌀 9만 5천 석을 연도(燕都 북경(北京))에 운반해 주었다.
《송사(宋史)》에는 중국의 명주(明州)에서 배가 떠나서 8일 만에 우리나라 경계에 들어오고 또 8일 만에 벽란도(碧瀾島)에 닿았다고 하였으며, 《문헌통고(文獻通考)》에는 예성강(禮成江)에서 배가 출발하여 6일 만에 명주에 도착하였는데 사실 바다를 건너는 기간은 2, 3일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정몽주는 남경(南京)이 8천 리 거리인데 90일의 일정(日程)이 된다고 하였고, 《제주지(濟州志)》에는 원나라에 갈 때에 명월포(明月浦)에서 배가 떠나서 7일 밤낮이면 그 서안(西岸)에 오른다고 하였다.
그리고 괴원(槐院)의 등록(謄錄)에는 선사포(宣沙浦)에서 배에 올라 등주(登州)까지 가는 거리가 3760리라 하였으며, 제도부(齊都賦)에는 바다가 옆으로 삐죽 나온 것이 발해(渤海)인데 실로 이것은 하나의 큰 포구(浦口)라고 하였다. 《한서(漢書)》에는 제(齊)나라 사람들이 바다를 건너가서 농사를 짓는다고 하였는데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면 그것이 상시로 왕래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으로 말하면 등주의 성산(成山)이 발해의 동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이고 우리나라로 말하면 장연(長淵)이 또한 발해의 서쪽으로 가장 깊이 들어간 곳이니 그 거리가 서로 가깝다고 하겠다. 그런데 백령도(白翎島)로 말하면 이는 또 이 장연보다도 더욱 서쪽인 바다 가운데에 있다. 그러므로 등주에서 고기잡이를 나온 자들이 흔히 백령도를 거쳐서 왕래하기도 하는데 지금 이 백령도에는 가끔 중국의 매 등이 날아오기도 한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물의 조종(祖宗) 열둘
첫째는 한강(漢江)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강릉 오대산의 우통(于筒)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회양 금강산의 만폭동(萬瀑洞)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보은 속리산의 문장대(文藏臺)에서 발원한다. 달천강(達川江)은 문장대의 서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복천(福泉)이 되어서 북쪽으로 흘러 충주에 이르고 다시 단월(團月)의 서북을 경유하여 한강으로 흘러든다. 신연강(新淵江)은 만폭동의 서남쪽에서 흐르기 시작하여 명연(鳴淵)이 되어 홍천강(洪川江)과 합쳐지고 다시 굴운천(窟雲川)을 지나 남쪽으로 흘러 용진(龍津)이 되어서 한강으로 흘러든다. 임진강(臨津江)은 그 근원이 문천(文川)의 노령(蘆嶺)에서 시작되는데 남쪽으로 영풍(永豐)의 고현(古縣)에 이르고 다시 사천(沙川)을 지나 오두(鰲頭)에 이르러서 조강(祖江)에서 한강과 합쳐진다. 그리하여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의 서쪽 지방과 철령(鐵嶺), 분수(分水), 쌍령(雙嶺), 운악(雲嶽), 불곡(佛谷), 왈롱(曰籠) 이남 지방과 대관령, 백복산(百福山), 태백산(太白山) 이서 지방과 조령, 죽령, 속리산 이북 지방과 피반(皮盤), 상당(上黨), 칠현(七賢), 백운(白雲), 광교(光敎), 수리(修理), 안남(安南), 문수(文殊) 이동 지방과 서울의 모든 물들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둘째는 예성강(禮成江)인데 그 근원이 수안(遂安)의 언진산(彦眞山)에서 발원하며, 남쪽으로 흘러서 흑석탄(黑石灘)이 되고 성천(成川)을 지나 미라산(彌羅山) 동방포(東方浦)에 이르러서 벽란도(碧瀾渡)가 되는데, 수룡산(秀龍山), 성거산(聖居山), 천마산(天磨山)의 서쪽 지방과 총수산(葱秀山), 멸악산(滅惡山), 운달산(雲達山) 이동 지방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셋째는 대진(大津)인데 그 근원이 셋이니, 하나는 양지(陽智 지금의 경기도 용인 지역)의 곡돈현(曲頓峴)에서 발원하고 하나는 청양(靑陽)의 백월산(白月山)에서 발원하며 하나는 공주의 차령(車嶺)에서 시작된다. 돈곶진(頓串津)은 백월산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여양(黎陽)을 경유하여 왕자산(王子山)에 이르러 승선천(昇仙川)을 지나 북쪽으로 행담도(行擔島)로 들어가서 공진(貢津)과 만난다. 미륵천(彌勒川)은 차령의 동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덕평향(德坪鄕)을 경유하여 온정천(溫井川)을 지나서 단포(丹浦)가 되어 팔당(八堂)의 서쪽에 이르러서 돈곶진과 만난다. 그리하여 광교산(光敎山), 성륜산(聖倫山) 이남과 칠현산(七賢山), 성거산(聖居山) 이서와 차령, 각흘산(角屹山), 사자산(獅子山), 오서산(烏棲山), 가야산(伽倻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든다.
넷째는 금강(錦江)인데 그 근원이 장수산(長水山)의 수분치(水分峙)에서 나와서, 서쪽으로 흘러 용암(龍巖)에 이르러서 송탄(松灘)이 되고 옥천(沃川)에 이르러 강경(江景)을 거쳐 옥구(沃溝)를 지나 용당진(龍塘津)이 된다. 그리하여 장안산(長安山), 성수산(聖壽山), 마이산(馬耳山), 주취산(珠翠山) 이북과 상당(上黨), 피반(皮盤), 황악(黃岳), 대덕(大德) 이서와 망이(望夷), 차령, 각흘 이남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다섯째는 사호(沙湖 영산강(榮山江))인데 그 근원이 담양(潭陽)의 용천산(龍泉山)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원율천(原栗川)이 되고 작천(鵲川)을 서남쪽으로 지나서 곡강(曲江)이 되어 용포(龍浦)에 와서 머문다. 그리하여 내장산(內藏山), 백암산(白巖山), 추월산(秋月山), 용천산(龍泉山) 이남과 옥천산(玉泉山), 무등산(無等山), 중조산(中條山), 여점산(呂岾山) 이서와 반등산(半登山), 취령산(鷲嶺山), 불갑산(佛岬山), 군니산(君尼山) 이동과 화악산(華嶽山), 덕룡산(德龍山), 쌍계산(雙溪山), 월출산(月出山)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리로 흘러든다.
여섯째는 섬강(蟾江 섬진강(蟾津江))인데 그 근원이 진안(鎭安) 마이산의 중대(中臺)에서 나와서, 전주의 웅치(熊峙)에 와서 쌍계(雙溪)의 물웅덩이를 지나면서 용연(龍淵)이 된 뒤 남쪽으로 흘러서 두적강(斗赤江)으로 들어간다. 그리하여 성수산, 마이산, 소치산(掃峙山), 모악산(母岳山) 이남과 내장산, 금성산(金城山), 설산(雪山), 무등산 이동과 억불산(億佛山), 주월산(舟越山), 도솔산(兜率山), 백운산(白雲山) 이북과 장안산(長安山), 여원산(女院山), 주치산(走峙山), 지리산 이서의 모든 산들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일곱째는 낙동강(洛東江)인데 그 근원이 안동의 태백산(太白山) 황지(黃池)에서 발원하여, 산을 뚫고 흐르기 때문에 그 이름을 천천(穿川)이라고도 한다. 천연대(天淵臺)를 경유하여 탁영담(濯纓潭)이 되고 다시 가야천(伽倻川)을 지나 박진(朴津)이 되어 진강(晉江)과 만난다. 그런 다음 호포(狐浦)를 지나 월당진(月堂津)이 되어 다시 흩어져서 삼차하(三叉河)가 된다. 금호강(琴湖江)은 그 근원이 청송(靑松)의 보현산(普賢山)에서 나와서 하빈(河濱)의 고현(古縣)을 경유하여 서쪽에서 낙동강과 서로 만나며, 황둔강(黃芚江)은 그 근원이 무주의 덕유산(德裕山) 불영봉(佛影峯)에서 나와서, 합천(陜川)에 이르러 징심천(澄心川)을 지나서 진천(鎭川)으로 들어갔다가 현창(玄倉)에 이르러 낙동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태백산과 소백산, 조령과 죽령의 이남과 속리산(俗離山), 황악산(黃嶽山), 대덕산(大德山), 덕유산(德裕山), 장안산, 지리산 이동과 고초산(高草山), 백암산, 취서산(鷲棲山), 구룡산(九龍山), 원적산(圓寂山) 이서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여덟째는 대동강(大同江)인데 그 근원이 영원(寧遠) 내악림(內樂林)의 백산(白山)에서 나와서, 금천(金川)을 지나 비류강(沸流江)과 합쳐지고 다시 합장포(合掌浦)를 지나 은탄(銀灘)이 된다. 그런데 능성강(能成江)은 그 근원이 두류산에서 나와서 문포천(文浦川)을 지나 마탄(馬灘)에서 대동강과 만나며, 그리고 월당강(月唐江)은 그 근원이 서흥(瑞興) 웅파산(熊坡山)의 부연(釜淵)에서 나와서 영진(迎津)을 지나 철화강(鐵和江)이 되어 북쪽으로 대동강과 급수문(急水門)에서 만난다. 그리하여 검산(劍山), 마유(馬踰), 철옹(鐵甕), 오강(吳江), 화여(花餘), 재령(載寧) 이서와 악림(樂林), 광성(廣城), 생천(栍川), 알일(謁日), 고야(姑射) 이남과 덕업(德業), 언진(彦眞), 멸악(滅惡), 수양(首陽), 달마(達摩) 이북과 구월(九月) 이동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아홉째는 청천강(淸川江)인데 그 근원이 강계의 갑현(甲峴)에서 나와서, 문천(文川)을 지나 고성진(古城津)에 이르러 노강(老江)이 된다. 그런데 대령강(大寧江)은 그 근원이 의주의 천마산(天摩山)에서 나와서 해망우(海望隅)의 동쪽에 이르러 노강에서 청천강과 만난다. 그리하여 갑현, 적유(狄踰), 구현(狗峴), 우치(牛峙), 구계(九階), 방장(防墻) 이남과 천마, 청룡(靑龍), 길상(吉祥) 이동과 악림, 광성, 생천 이서와 향산(香山), 알일, 고야, 마두(馬頭), 도운(到雲)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째는 용흥강(龍興江)인데 그 근원이 영흥의 철옹산에서 나와서, 비류천(沸流川)을 지나 제인포(濟仁浦)가 되어 남쪽으로 말응도(末應島)에 이른다. 그리하여 마유령, 철옹, 오강, 화여, 재령 이동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한째는 압록강(鴨綠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대택(大澤)에서 나와서, 지하로 복류(伏流)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혜산강(惠山江)이 되고 청성(淸城), 방산(方山), 옥강(玉江)의 보(堡)와 수구(水口)의 진(鎭)을 거쳐 의주부에 이르러 적도(赤島)의 동쪽에서 다시 세 갈래로 갈라져서 흐르게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남쪽으로 흘러서 구룡연(九龍淵)이 되니 이것이 곧 압록강으로서 그 물빛이 마치 오리 머리처럼 푸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그중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서강(西江)이 되고 하나는 중간을 따라 흐르는데 이를 이름하여 소서강(小西江)이라 한다. 검동도(黔同島)에 이르러서 이들이 다시 합쳐져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백두(白頭) 이남과 원산(圓山) 이서와 후치(厚致), 황초(黃草), 설한(辥罕), 적유(狄踰), 우현(牛峴), 방장(防墻), 천마(天麼), 노동(蘆洞), 망일(望日) 이북의 모든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열두째는 두만강(豆滿江)인데 그 근원이 백두산(白頭山)의 남쪽 갑산(甲山)에서 나와서, 경흥부(慶興府)에 이르러서 적지(赤池)를 경유하여 수빈강(愁濱江)이 되고 다시 동쪽으로 흘러서 조산(造山)을 지나 녹둔도(鹿屯島)에 이르게 된다. 백두 이동과 원산(圓山), 장백(長白), 무산(茂山)의 잿마루와 송진(松眞), 백악(白嶽) 이북의 여러 산의 물이 이 강으로 흘러든다.
[주D-001]대진(大津) : 아산만(牙山灣)을 지칭하는 것 같다. 세 개의 근원이란 아산만으로 흘러드는 안성천(安城川), 삽교천(揷橋川) 및 곡교천(曲橋川)을 지칭하는 것이 확실하다.
임하필기(林下筆記) 제13권 문헌지장편(文獻指掌編)
서해(西海)의 남쪽
서해(西海)의 해안선(海岸線)은 남쪽으로 해남(海南)의 명양(鳴洋)에서 시작하여 서쪽으로 부안(扶安)에 이르기까지 북쪽을 향하다가 만경(萬頃)에서 서산(瑞山)에 이르는 사이에서는 북쪽으로 비꾸러지고, 서산에서 다시 동쪽으로 굽어서 홍주(洪州)의 대진(大津)에 이르렀다가 수원(水原)에서 다시 북쪽을 향하여 드디어 통진(通津)의 조강(祖江) 남쪽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땅끝이 바다 깊이 들어간 곳으로 말하면 해남 우수영의 등산곶(登山串)과 영광(靈光)의 망운(望雲), 무안(務安)의 해제(海際), 홍주의 흥양(興陽), 태안(泰安)의 전 군 및 안흥량(安興梁) 남북의 두 면(面), 그리고 서산의 대산곶(大山串)이다.
[주D-001]홍주(洪州)의 대진(大津) : 아산만(牙山灣)을 말한다. 홍주의 금마천(金馬川)이 고을을 북쪽으로 관류(貫流)하여 삽교천과 합쳐져서 아산만으로 들어간다.
[주D-002]통진(通津)의 조강(祖江) : 통진은 지금 김포의 서단(西端) 지역이고 조강은 그 북쪽을 흐르는 한강(漢江) 하류의 명칭이다.
세종지리지 / 충청도
◈ 충청도(忠淸道)
본래 백제의 땅이다. 고려 성종(成宗) 14년 을미에【송나라 태종(太宗) 지도(至道) 원년.】 경내(境內)를 나누어 10도(道)로 함에 따라, 충원도(忠原道)는 충주(忠州)·청주(淸州)·강주(剛州)·환주(歡州) 등 13주(州)를 관할하고, 하남도(河南道)는 공주(公州)·운주(運州) 등 11주를 관할하였다. 예종(睿宗) 원년 병술에【송나라 철종(哲宗) 숭녕(崇寧) 5년.】 양광 충청주도(楊廣忠淸州道)라 하다가, 명종(明宗) 원년 신묘에【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7년.】 양광 충청주도를 갈라 두 도(道)로 만들었다. 충숙왕(忠肅王) 원년 갑인에【원나라 인종(仁宗) 연우(延祐) 원년.】 다시 양광 충청주도를 양광도(楊廣道)로 하고, 홍무 21년 무진에 도(道)의 평창군(平昌郡)을 갈라 교주도(交州道)에 옮겨 붙였다. 본조 태조(太祖) 4년 을해에【홍무 28년.】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양주(楊州)·광주(廣州) 관할 군(郡)·현(縣)을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였고, 충청도 관찰사(忠淸道觀察使)로 고쳐 도청[司]을 청주에 두었다. 공정왕(恭靖王) 원년 기묘에【건문(建文) 원년.】 영월군(寧越郡)을 갈라 강원도(江原道)에 옮겨 붙였고, 그 도의 원주(原州) 임내(任內)인 영춘현(永春縣)을 내속(來屬)시켰다. 태종(太宗) 13년 계사에【영락 11년.】 여흥(驪興)·안성(安城)·음죽(陰竹)·양성(陽城)·양지(陽智)를 갈라 경기(京畿)에 옮겨 붙였고, 경상도(慶尙道)의 옥천(沃川)·황간(黃澗)·영동(永同)·청산(靑山)·보은(報恩)을 이에 내속시켰다.
그 지경은 동쪽이 단양(丹陽) 죽령(竹嶺)에 이르고, 서쪽은 태안(泰安) 오근이포(朽斤伊浦)에, 남쪽은 은진(恩津) 작지(鵲旨)에, 북쪽은 직산(稷山) 아주제(牙州梯)에 이르는데, 동서가 4백 77리요, 남북이 2백 44리이다.
관할은 목(牧)이 4, 군(郡)이 11, 현령(縣令)이 1, 현감(縣監)이 39이다.
명산(名山)은 계룡산(鷄龍山)이 공주(公州)에 있고, 죽령(竹嶺)이 단양(丹陽)에 있으며, 가야산(伽倻山)이 덕산(德山)에 있고,【모두 사전(祀典)에 있다.】 월악(月嶽)이 청풍(淸風)에 있으며,【삼국(三國) 때에는 월형산(月兄山)이라 하여 사전(祀典)에 있었는데, 지금은 혁파하였다.】 도고산(道高山)이 신창(新昌)에 있다.【사전(祀典)에 있었는데, 지금 혁파하였다.】
대천(大川)은 웅진(熊津)이다. 그 근원이 전라도(全羅道)에서 나와 양산(楊山) 서쪽을 지나 영동현(永同縣)에 들어가고, 이산현(利山縣)에 이르러 적등진(赤登津)이 되고, 옥천(沃川)에 이르러 화인진(化仁津)이 되며, 회덕(懷德)에 이르러 이원진(利遠津)이 되고, 연기(燕岐)에 이르러 또 큰 내가 있어, 청주(淸州)의 서쪽 지경으로부터 남쪽으로 흘러 들어와서, 그 아래가 웅진(熊津)이【사전(祀典)에 있다.】 되고, 공주(公州)에서 금강(錦江)이 되며, 부여(扶餘)에서 고성진(古省津)이 되고, 임천(林川)에서도 고다진(古多津)이 되며, 진포(鎭浦)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양진명소(楊津溟所)는 그 근원이 강원도(江原道) 영서(嶺西)로부터 나와서 며촌(旀村) 방림역(芳林驛)을 지나 평창군(平昌郡) 북쪽에 이르러 용연진(龍淵津)이 되고, 영월군(寧越郡) 서쪽에 이르러 가근동진(加斤同津)이 되고, 군(郡) 남쪽에 이르러 금장강(錦障江)과 합류(合流)하여, 영춘(永春)·단양(丹陽)·청풍(靑風)을 지나 충주(忠州)에 이르러 연천(淵遷)이 되고, 경기(京畿) 여흥(驪興) 우음안포(亐音安浦)에 들어간다.
호수가 2만 4천 1백 70호(戶)요, 인구가 10만 7백 90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1천 9백 74명이요, 영진군(營鎭軍)이 1천 7백 66명이요, 수호군(守護軍)이 2백 48명이요, 선군(船軍)이 7천 8백 58명이다.
간전(墾田)이 23만 6천 3백 결(結)이다.
구실[賦]은 쌀【경미(粳米)·백미(白米)·세경미(細粳米)·상경미(常粳米)·점경미(粘粳米)·점백미(粘白米)·조미(糙米)가 있다.】·피[稷米]·콩【녹두·붉은 팥·콩이 있다.】·보리【찰보리[眞麥]·메밀.】·지마(芝麻)【향명(鄕名)은 참깨[眞荏子].】·꿀·밀[黃蠟]·지마유(芝麻油)【향명(鄕名)은 참기름[眞油].】·소자유(蘇子油)【향명은 들기름[法油].】·겨자[芥子]·모시[白苧布]·명주[紬布]·무명[綿布]·닷새베[正五升布]·솜[綿子]·초쇄자(草刷子)【국속(國俗)에서 솔[之省]이라 함.】·표주박[瓢子]이다.【대체로 군읍(郡邑)의 구실[田賦]이 멀든지 가깝든지 모두 같으므로, 다시 군읍 아래에 적지 아니한다.】
공물[貢]은 범의 가죽·표범가죽·곰가죽·여우가죽·삵괭이가죽·노루가죽·사슴가죽·쇠가죽·말가죽·산수달피(山水獺皮)·표범꼬리·범꼬리·곰털·족제비털·돼지털·잡깃[雜羽]·수돛[雄猪]·말린 사슴고기[乾鹿]·말린 노루고기·말린 돼지고기·거위[天鵝]·포육(脯肉)·쇠뿔[牛角肋]·사슴젓[鹿醢]·토끼젓·가뢰[班猫]·홍어(紅魚)·큰 새우·말린 숭어·상어·어교(魚膠)·칠(漆)·먹[墨]·주토(朱土)·황밤[黃栗]·마름[菱仁]·가시연밥[芡仁]·개암[榛子]·말린 포도[乾葡萄]·오미자(五味子)·조피나무열매[川椒]·호도(胡桃)·배[梨]·연감[紅柿]·참가사리[細毛]·황각(黃角)·청각(靑角)·석이[石茸]·느타리·싸리버섯·소나무그을음[松煙]·송화(松花)·송진[松脂]·세겹줄[三股縄]·두겹줄[兩股縄]·마의(馬衣)·목화[綿花]·모시[苧]·삼[麻]·각색 종이[各色紙]·유둔(油芚)·왕골자리[莞席]·돗자리[草席]·소쿠리[簞]·각색 비[各色尾帚]·각색 사기그릇[磁器]·질그릇[陶器]·각색 나무그릇[木器]·고리[柳器]·자단향(紫檀香)·백단향(白檀香)·애끼찌[弓幹木]·나무활[木弓]·자작나무[自作木]·장작개비[燒木]·건축에 쓰는 큰 나무·서까래[椽木]·잣나무[栢木]·황양목(黃楊木)·대추나무·피나무[椵木]·가래나무·넓은널 대중목[廣板大中木]·피나무널[椵板]·잣나무널[栢板]·해죽(海竹)·그 고을의 박선[仍邑朴船]·숯[炭]·시우쇠[正鐵]이다.
약재(藥材)는 담비쓸개[獺膽]·고슴도치가죽·섣달 여우간[臘狐肝]·사슴뿔·영양뿔[羚羊角]·녹각교(鹿角膠)·토끼대가리[兎頭]·쇠쓸개[牛膽]·아교(阿膠)·범의 정강이뼈[虎脛骨]·우황(牛黃)·이리뼈[狼骨]·녹용(鹿茸)·곰의 쓸개[熊膽]·돼지쓸개[猪膽]·도아조유(島阿鳥油)·오징어뼈[烏魚骨]·자라껍데기[鼈甲]·거북껍데기[龜甲]·매미허물[蟬脫皮]·찰머구리[蝦蟆]·두꺼비[蟾酥]·뽕나무벌레[桑螵蛸]·등에[蝱蟲]·거머리[水蛭]·잉어쓸개[鯉膽]·말린 잉어[乾鯉魚]·지네[蜈蚣]·뽕나무 겨우살이[桑寄生]·오가피(五加皮)·잣[栢子仁]·닥나무열매[楮實]·회화나무꽃[槐花]·탱자껍데기[枳殼]·오배자(五倍子)·구기자(枸杞子)·복신(茯神)·복령(茯苓)【붉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괴좆나무뿌리[地骨皮]·모란뿌리껍질[牧丹皮]·고무딸기열매[覆盆子]·함박꽃뿌리[芍藥]【붉은 것과 흰 것의 두 종류가 있다.】·족도리풀뿌리[細辛]·구리때뿌리[白芷]·현삼(玄蔘)·낭아(狼牙)·수뤼나물[葳靈仙]·지치[紫草]·끼절가리뿌리[升麻]·질경이씨[車前子]·쇠무릎지기뿌리[牛膝]·버들옷[大戟]·대소 삽주[薊草]·자호(紫胡)·배암도랏씨[蛇床子]·고본(藁本)·으름덩굴[木通]·끼무릇뿌리[半夏]·삽주뿌리[蒼朮]·백부자(白附子)·쪽칠[藍漆]·단너삼뿌리[黃耆]·부들꽃[蒲黃]·도라지·창출[蒼朮]·바디나물뿌리[前胡]·쥐방울[馬兜零]·칡꽃[葛花]·범부채[射干]·납가새[蒺藜子]·연밥[蓮子]·연밥송이[蓮房]·연잎[蓮葉]·연꽃술[蓮花蘂]·더위지기[茵陳]·겨우살이풀[麥門冬]·택사(澤瀉)·마뿌리[山藥]·바곳[草烏頭]·수자해좆싹[赤箭]·파랭이꽃이삭[瞿麥穗]·과남풀[龍膽]·가위톱[白歛]·인삼(人蔘)·수자해좆뿌리[天麻]·승검초뿌리[當歸]·파고지(破古紙)·하눌타리[括樓]·매재기뿌리[京三菱]·새박뿌리[何首烏]·외나물뿌리[地楡]·대왕풀[白芨]·창포[菖蒲]·두여머조자기[天南星]·회초미뿌리[貫衆]·호라비좆뿌리[天門冬]·자리공뿌리[商陸]·두릅뿌리[獨活]·감제뿌리[虎杖根]·검산풀뿌리[續斷]·속서근풀[黃芩]·며래뿌리[萆蘚]·새삼씨[兎絲子]·양귀비열매껍질[粟殼]·병풍나물뿌리[防風]·궁궁이[芎藭]·낙석(絡石)·애기풀[遠志]·초결명씨[決明子]·자자(紫子)·왕골뿌리[莞根]·석위(石葦)·모향(茅香)·산골[自然銅]·곱돌[滑石]·산비둘기[班鳩]·백교향(白膠香)·북나무진[安息香]·하국[旋覆花]·겨우살이꽃[金銀花]이다.
재배하는 약재(藥材)는 회향(茴香)·대추[棗]·누에나비[元蠶蛾]·감국화(甘菊花)·부추씨[韮子]·율무씨[薏苡仁]·모과[木瓜]·콩꽃[豆花]·잇[紅花]·정가이삭[荊芥穗]·소야기[香薷]·우엉[惡實]·생지황(生地黃)·영생이[薄荷]·백변두(白扁豆)【검은 것과 흰 것의 두 가지가 있다.】·장군풀[大黃]·참외꼭지[眞瓜蔕]·나팔꽃씨[牽牛子]·【흰 것과 검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누른 국화[黃菊]·누른 해바라기씨[黃葵子]이다.
병마 도절제사(兵馬都節制使)는 해미현(海美縣)에 두었는데, 바다 어귀에 이르기 6리요,【군관(軍官)이 5백 명, 신백정(新白丁)이 1백 48명, 수성군(守城軍)이 2백 7명이다.】 병마 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의 지키는 곳[守禦處]이 둘 있으니, 순성진(蓴城鎭)은 바다 어귀에 쑥 들어가 있고,【유방군(留防軍)이 61명, 패속군(牌屬軍)이 3백명, 신백정(新白丁)이 58명, 수성군이 50명이다.】 남포진(藍蒲鎭)은 바다 어귀에 이르기 8리이며,【유방군(留防軍)이 63명, 진속군(鎭屬軍)이 3백 명, 신백정(新白丁)이 39명, 수성군이 51명이다.】 수군 도안무 처치사(水軍都安撫處置使)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대회이포(帶回伊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중대선(中大船)이 6척, 중맹선(中孟船)이 18척, 쾌선(快船)이 4척, 군사 없는 중대선이 6척, 추왜별맹선(追倭別孟船)이 6척, 선군(船軍)이 1천 7백 66명, 선직(船直)이 1백 14명이다.】 수군 만호(水軍萬戶)가 지키는 곳이 7이니, 좌도 도만호(左道都萬戶)는 태안군(泰安郡) 서쪽 오근이포(朽斤伊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1척, 추왜별선(追倭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2척, 선군(船軍)이 1천 4백이다.】 우도 도만호(右道都萬戶)는 남포현(藍浦縣)이 구정(龜井)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兵船)이 16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無軍船)이 1척, 선군(船軍)이 1천 3백 2명이다.】 서천포 만호(舒川浦萬戶)는 장암포(長巖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6척, 선군이 7백 97명이다.】 고만량 만호(高巒梁萬戶)는 보령현(保寧縣) 서쪽 송도포(松島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0척, 선군이 6백 61명이다.】 파치도 만호(波治島萬戶)는 서산군(瑞山郡) 북쪽 대산포(大山浦)에 머무르고,【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별선(別船)이 2척, 무군선 1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당진 만호(唐津萬戶)는 당진현(唐津縣) 북쪽 박지포(朴只浦)에 머무르며,【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0명이다.】 대진 만호(大津萬戶)는 홍주(洪州) 임내(任內) 신평현(新平縣) 북쪽 대진(大津)에 머무른다.【거느린 것이 병선이 13척, 선군이 7백 94명이다.】
감목관(監牧官)이 1명이요, 역승(驛丞)이 9명이다. 율봉도(栗峯道)의 관할 역이 7이요,【쌍수(雙樹)·덕류(德留)·금사(金沙)·저산(楮山)·태랑(台郞)·장양(長楊)·시화(時化).】 일신도(日新道)의 관할 역이 5요,【경천(敬天)·광정(廣程)·평천(平川)·단평(丹平)·유구(帷鳩).】 연원도(連原道)의 관할 역이 6이요,【단월(丹月)·용안(用安)·안부(安富)·가흥(可興)·감원(坎原)·인산(仁山).】 성환도(成歡道)의 관할 역이 4요,【신은(新恩)·김제(金蹄)·연춘(延春)·장명(長命).】 황강도(黃江道)의 관할 역이 6이요,【수산(水山)·장림(長林)·영천(令泉)·천남(泉南)·안음(安陰)·의풍(義豐). 의풍의 속칭 오사호(吾賜乎)라 한다.】 증약도(增若道)의 관할 역이 9이요,【가화(嘉禾)·화인(化仁)·원암(原巖)·함림(含林)·토파(土坡)·순양(順陽)·회동(會同)·신흥(新興)·전민(田民).】 시흥도(時興道)의 관할 역이 4이요,【창덕(昌德)·일흥(日興)·장시(長時)·화천(花川).】 금정도(金井道)의 관할 역이 11이요,【광시(光時)·세천(世川)·용곡(龍谷)·급천(汲泉)·순성(順成)·흥세(興世)·풍전(豐田)·하천(下川)·몽웅(夢熊)·해문(海門)·청연(靑淵).】 이인도(利仁道)의 관할 역이 9이다.【용전(龍田)·은산(銀山)·유양(楡陽)·숙홍(宿鴻)·남전(藍田)·청화(靑化)·두곡(豆谷)·신곡(新谷)·영유(靈楡)·분행(分行)·좌찬(佐贊) 2역(驛)은 경기 찰방도(京畿察訪道)를 관할한다.】
수조처(收租處)가 8이니, 연천(淵遷)은 충주(忠州) 서쪽 10리에 있고,【본주(本州) 및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豐)·제천(堤川)·영춘(永春)·음성(陰城)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양진(楊津)을 따라 앙암(仰巖)을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水路]이 2백 60리이다.】 앙암(仰巖)은 충주(忠州) 서쪽 60리에 있으며,【본주 및 단양(丹陽)·청풍(淸風)·괴산(槐山)·연풍(延豐)·제천(堤川)·영춘(永春)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양진을 따라 여흥(驪興)을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2백 20리이다.】 우음안포(亐音安浦)는 경기(京畿) 여흥(驪興) 동쪽 10리에 있으며,【옥천(沃川)·영동(永同)·황간(黃澗)·청산(靑山)·보은(報恩)·청안(靑安) 등 고을은 〈구실을〉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여강(驪江)을 따라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2백 10리이다.】 추호포(推乎浦)는 여흥 서쪽 1리에 있고,【청안(靑安)·음죽(陰竹) 2현(縣)의 구실은 〈이곳에 바쳐서〉 여강을 따라 이포(梨浦)를 지나 서울에 다닫는데, 물길이 1백 94리이다.】 이포(利浦)는 경기 천령현(川寧縣) 동쪽 5리에 있으며,【죽산(竹山)·진천(鎭川) 2현(縣)의 구실을 이곳에 바치는 데, 물길이 1백 60리이다.】 경양포(慶陽浦)는 직산현(稷山縣) 서쪽 1리에 있고,【본주 및 평택(平澤)의 구실은 이곳에 바쳐서 〈배로〉 공세곶(貢稅串)을 지나 서해(西海)를 거쳐서 서강(西江)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40리이다.】 공세곶(貢稅串)은 아산현(牙山縣) 서쪽 8리에 있으며,【본주 및 청주(淸州)·목천(木川)·전의(全義)·연기(燕岐)·온수(溫水)·신창(新昌)·은진(恩津)·연산(連山)·회덕(懷德)·공주(公州)·정산(定山)·회인(懷仁)·천안(天安)·진잠(鎭岑)·이산(尼山)·문의(文義)의 구실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범근천(犯斤川)을 지나 서해를 거쳐서 서강(西江)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리이다.】 범근천(犯斤川)은 면천(沔川) 동쪽 30리에 있다.【본주 및 임천(林川)·한산(韓山)·서천(舒川)·남포(藍浦)·비인(庇仁)·홍산(鴻山)·홍주(洪州)·태안(泰安)·서산(瑞山)·해미(海美)·강진(康津)·덕산(德山)·예산(禮山)·청양(靑陽)·보령(保寧)·결성(結城)·대흥(大興)·석성(石城)·부여(扶餘) 등 고을의 구실은 모두 이곳에 바쳐서 〈배로〉 대진(大津)을 지나 서해를 거쳐서 서강에 다닫는데, 물길이 5백 10리이다.】
【원전】 5 집 624 면
[주D-001]강주(剛州) : 진천.
[주D-002]환주(歡州) : 천안.
[주D-003]운주(運州) : 홍주.
[주D-004]무진 : 우왕(禑王) 14년.
[주D-005]공정왕(恭靖王) : 정종.
가장 큰 무역항 대진(大津:唐津)
통일신라 이후 조선술의 발달 등으로 대외무역이 크게 번성하자 지방세력들은 자기의 중요한 활동 무대를 해상무역에서 찾았다. 원래 대외무역은 조공의 형식을 취하여 국가간에 행하여 왔었지만, 세력을 점차 증대시켜 온 지방의 사상인(私商人)들은 국가의 간섭과 통제에서 벗어나 민간무역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해상호족들은 해안이나 강의 포구에 웅거하여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축적된 경제력을 기반으로 군사력을 증강시켜 주위의 인민들을 포섭함으로서 독립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서해안은 리아스식 해안으로 항포구가 발달되어 있고 동고서저의 한반도 지형상 배후에는 넓은 평야가 형성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과거 고구려와 백제땅이었으므로 반신라적인 의식이 비교적 강하게 남아있었다. 그리고 수도인 경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중앙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왔다. 지리적으로는 중국과의 왕래가 편리하여 국제무역을 통한 경제력 확보가 용이하였다.
특히 혜성(槥城)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지역으로 조선시대에는 면천군(沔川郡)으로 불린 곳이다. 이 지역을 포함한 현재의 충남 내포지방은 한사군 가운데 하나인 진번군이 해상루트를 통하여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으로 추정되며, 낙랑군과 해상으로 밀접하게 교섭했던 서해항로의 요충지였다.
혜성에는 삼국시대에 백제가 가리저(加里渚) 동쪽에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을 설치하였다. 후에 신라는 혜산(懳山)의 동쪽에 화경관(禾京館)을 지어 신라와 당나라를 왕래하는 사신과 상인들의 숙박과 상거래에 활용하였다. 이와 같이 신라의 최대 무역항인 당진은 신라 조공무역항으로서 대진(大津)이라고 불렸다.
서해안의 강력한 호족 복지겸․박술희
혜성 출신의 호족으로는 복지겸(卜智謙)과 박술희(朴述熙)를 들 수 있다. 복지겸의 선조 복학사(卜學士)는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건너와 거주하면서 해적을 소탕하고 백성을 모아 보호하였다. 복학사가 언제 어떤 연유로 당으로부터 혜성군에 와서 살게 되었는지 알수 없다. 그러나 해적을 소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상당한 군사력을 소유하고 있던 해상세력가였음이 틀림없다.
박술희 역시 혜성군 사람으로 박술희의 아버지인 득의(得宜)가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대승(大丞)의 벼슬을 하고 있었던 점은 박술희 가문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음을 알수 있다. 또한 혜성군이 대중국 해상교통로의 요지로 많은 상인과 사신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는 점에서 박술희 가문 역시 유력한 해상호족이었음을 일수 있다.
고려초 강감찬(姜邯贊) 장군에게도 대승(大丞) 직위를 추증하였던 것을 보면 상당한 직위였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박술희의 부친 박득의 역시 아들 박술희와 함께 고려초 중앙관직에 진출하여 득의와 술희 부자 모두 상당한 벼슬에 올랐으며, 혜성지방의 강력한 호족이었음을 알수 있다.
맺음말
장군의 본향인 당진은 우리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선조들의 뜨거운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고장이다. 바다와 긴밀히 접하고 있던 당진은 신라 때부터 대중교통과 해상무역의 중심지였으며, 국가의 중요한 요충이었을 뿐만아니라, 수군창(水軍倉)과 곡창(穀倉)이 설치되어 있었다.
신라가 조공무역을 하던 대진 즉 지금의 당진은 큰 항구였다. 당진은 당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의 숙소가 위치하였던 국제무역도시의 효시이기도 하였다. 천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역사의 장면속에서 영화롭던 큰 나루 당진은 21세기를 맞이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경제의 중심도시가 되고 있으며, 세계가 주목하는 철강 무역도시로 부활하고 있다.
지난 3월 27일 복지겸 장군의 사당건립을 통해 일생을 오로지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다간 장군의 업적과 숭고한 국충애민(國忠愛民) 정신을 계승발전하고 후대에 선양할 수 있게 된 것은 충청도민의 자긍심을 고양하는 일이라 할 것이다.
사회·정치
[출처] 왕건을 도와 고려를 개국한 복지겸 |작성자 박철준
윗 글에서...<...화경관???---숙관, 수관이 맞습니다...궁소임 숙(수) // 당나라 관(唐館) ///
택당선생집(澤堂先生集) 제2권 시(詩)
영공암(令公巖) 면천(沔川) 의 대진(大津) 가운데에 있다.
영공암은 바로 대진 한복판에 있는 바위 / 令公巖乃在大津之中央
파도가 밤낮으로 소리내며 부서지나 / 海濤日夜聲澎浪
꼼짝 않고 끄떡없이 서 있는 모습 / 屹然不移亦不僵
아 산의 바탕 굳세고 강함이여 / 嗟乎峙質堅且强
대인이 우뚝 서서 하늘을 떠받치는 듯 / 有如大人特立扶天綱
뱃사람들 공경하여 제사 올리며 / 舟人敬之報馨香
영공의 이름 붙인 것도 당연하다 하리로다 / 呼以令公名固當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홍색 관복에 비단 안장 길거리 메우고 행차할 때 / 君不見緋袍錦韉塞康莊
길 옆으로 썰물처럼 물러서는 행인들 / 行人辟易分兩傍
누가 제대로 실적 따져 영공이란 이름 붙여 줬나 / 誰能考實以名償
각종 재물 상납을 다반사로 여기면서 / 紛紛金銀銅鐵木石納官以爲常
간혹 강도와 도적 붙잡아내기도 한다마는 / 或縛草偸捕熊狼
이와 같은 영공의 역량 헤아릴 수 없는 속에 / 此等令公不可量
천작은 날로 마모되고 공름은 엉망되게 할 뿐 / 但使天爵日耗公廩瘡
아 어떡하면 곽 분양 불러내어 / 嗚呼安得喚起郭汾陽
중서당에 앉아 스물네 번 고과(考課)하며 / 二十四考中書堂
오랑캐 평정하고 민생 안정시킬꼬 / 削平胡羯安黔蒼
[주D-001]영공 : 보통 방백(方伯)을 영공이라고 불렀다.
[주D-002]어떡하면 …… 안정시킬꼬 : 곽 분양은 안사(安史)의 난(亂)을 평정하고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진 당(唐) 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로, 곽 영공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20년 동안 천하의 안위(安危)가 그의 한몸에 달려 있었는데, 그가 오래도록 중서령(中書令)으로 재직하면서 무려 스물네 번이나 인사 고과를 매기는 등 천하에 위세를 부렸는데도 조정이 시기하지 않았다는 고사가 전한다. 《舊唐書 郭子儀傳》
***대동여지도...영옹암, 영웅암...대진,평택항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직산현 외야곶면 ///
***대동방여전도...대진, 평택항...직산현 외야곶면...영웅암, 영옹암...///
택당선생 속집(澤堂先生續集) 제2권 시(詩)
대진(大津)을 건너며
가는 게 이롭다는 점괘가 적중하려는 듯 / 利往從貞卜
툭 터진 경치에 막힌 가슴 뚫리더니 / 遐觀豁滯胸
새벽빛 밝아 오며 건너는 대진 나루 / 平明大津渡
겹겹이 쌓인 산만 눈에 온통 들어오네 / 極目衆山重
아침 햇빛 쏘아 대자 물고기 화들짝 깊이 숨고 / 日射魚龍竄
바람도 힘이 없어 운무(雲霧)만 짙게 깔렸어라 / 風微瘴霧濃
저 산 중에 어딘가 남산도 서 있겠지 / 終南何處是
면수 이 물결도 조종하러 흐르나니 / 沔水亦朝宗
[주D-001]조종(朝宗) : 옛날 제후가 천자를 뵙고 인사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작은 강물이 큰 강물과 합수(合水)한다는 뜻으로, 면수가 한강에 합류되는 것을 가리킨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에 “강한(江漢)이 바다에 조종(朝宗)한다.”라는 말이 있다.
醉吃集卷之三 詩
大津江村
醉臥沙汀穩。
閑行草逕賖。
長風來賈舶。
返照入漁家。
乞火炊香稻。
爭隈采石華。
江南眞樂地。
不必賦懷沙。
東岳先生集卷之二十三 拾遺錄 下
水原大津舟中
天啓癸亥七月二十一日己酉。以掃墳呈告。詣闕拜辭而行。宿果川。庚戌。次水原栗田村舍。
辛亥。次設倉。壬子。渡大津。入沔川鄕墅。
鄕山隔浦對松杉。
雨霽長風送客帆。
畏比游魚簇香餌。
欣同逸驥脫重銜。
紅塵紫陌黃金帶。
碧樹蒼崖白罽衫。
向午篙工賀利涉。
艫頭已過令公巖。
大津。乃我東邦津渡中第一險處也。
有一大巖。屹立中流。名曰海神令公巖。
彼此來往之船。若過此岩。例得無虞云。
***청구도...대진 영웅암, 영옹암...직산현 외야곶면...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만호리...///
***대동여도...대진나루...영웅암, 영옹암...///
芝峯類說卷二 地理部 -지봉유설 권2 지리부
大津在京畿,忠淸之間。水路三十里。
中有大石。舟觸則碎。俗號賽神令公。
行人必以香火祈祝。賽神之稱。
蓋以此。而謂之令公則未知其義。
或疑令公。卽靈君云。
대진은 경기, 충청도의 사이에 있다. 수로는 삼십리며,
그 중간에 큰 돌이 있다.
배가 부딪치면 부서진다. 세속에 굿의 신, 새신 영공이라 부르며
배를 건너는 행인들은 반드시 향불로 기원과 축원을 올린다.
새신(賽神)이라 칭하며, 이로써 숭상하고,
소위 이르기를 영공은 그 의미를 잘 알지 못한다.
혹시 영공은 의심스럽고, 즉 영군(靈君)이라 이른다.
***지봉유설--1614년(광해군 6)에 이수광이 편찬한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저술 //
<<< 영웅암-英雄巖...직산현 고적조 ...1899년(광무3년) >>>
직산현 외야곶면 바다 가운데 있는데, 곧 수원 땅이다.
임진년(1592년)에 왜선이 은밀히 바닷길을 따라 밤에 이 바다에 이르렀다.
달빛 아래에서 바위 모양이 마치 장군이 투구와 갑옷을 갖추어 입고,
진을 치고 있는 형상을 깎아 세운 듯한 것을 바라보고
왜군의 두목이 크게 놀라 배를 돌려 남쪽으로 돌아갔다.
난리가 끝난 뒤에 <영웅암>이라 이름하고 포상의 표시를 하라는 명을 내렸다.
* 英雄巖 在外也串面海洋中 卽水原地.
壬辰倭船 潛由海道 夜抵此洋
月下望見 巖形削立 如將軍具 凱甲列陳之狀
倭醜大驚 逐回舶南下 勘亂後 號<英雄巖> 有着表褒著之 命.
*영웅암 재외야곶면해양중 즉수원지.
임진왜선 잠유해도 야저차양
월하망견 암형삭립 여장군구 개갑열진지상
왜추대경 축회박남하 감란후 호<영웅암> 유착표포저지 명.
<광여도...수원부...대진 영웅암, 영옹암...>>>
<<< 직산고을 오심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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