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도읍 이름 위례가 살아났다
- '위례'는 '크고 많음' 또는 '우리'의 뜻으로 추정 -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서울 송파구 거여동, 장지동 일대와 경기도 하남시 학암동, 성남시 수정구 창곡동, 복정동 일대, 즉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 서쪽 너른 평야는 우리에게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던 지역이 아니었다. 그러나, '송파 신도시'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이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파트 대단지가 들어설 이 곳의 '송파 신도시'란 말은 이제는 사라지게 되었다. 앞으로는 이 이름 대신 '위례 신도시'란 이름으로 사용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에 들어설 신도시 이름 '송파 신도시'를 바꾸게 된 것은 서울 송파구와 함께 이 지역의 신도시를 삼분하고 있는 경기도 성남시와 하남시가 신도시 이름에서 '송파'를 빼 달라고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 여러 후보 이름 중에서 '위례'를 선정
'송파 신도시'라는 이름은 개발 지역이 송파구 지역에만 해당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3개의 시구(市區)가 걸쳐 있는 지역이어서 애초부터 이것은 맞지 않았다.
송파 신도시는 '송파 거여 택지개발 예정지구(205만평)'가 정식 명칭. 그러나, 예정 지구로 들어간 지역이 송파구 부분은 38%에 불과하고, 성남시가 41%로 송파구 부분보다 넓으며, 하남시도 21%나 된다. 이에, 성남시와 하남시에서는 3개 지방자치 단체에 걸쳐 있는 이 지역을 '송파 신도시'란 명칭으로 계속 쓰는 것은 옳지 않다 하여 변경을 요구해 왔던 것.
신도시 이름 사용에서, 지방자치단체 즉 이 지역을 삼분하고 있는 서울의 송파구, 성남시, 하남시의 의견 조율이 필요하다고 본 토지공사에서는 국민들의 의견을 참작하여 이름을 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지난 4월 국민공모를 실시, 940여 건의 이름들을 접수하였다.
이어서 한국땅이름학회, 한국지명학회, 국학연구소 소속의 전문 학자 등 11명으로 명칭공모 심사위원단(위원장 배우리)을 구성하였고, 07년 5월 29일 오후 2시에 판교 신도시 홍보관에서 접수된 응모작 심사의 작업을 벌였다. 심사위원들은 약 2시간 여에 걸쳐 심사 끝에 '위례 신도시'를 최우수작으로, '온조 신도시'를 우수작으로 선정했다. 응모작 중에는 위례, 온조 외에 송남, 한성, 남송, 청량, 아리수, 산성, 한울 등 좋은 이름들이 많았는데, 위원들은 '위례'라는 이름이 역사와 인문지리 측면에서 신도시의 특징을 잘 살리면서 신도시가 들어설 3개 지자체를 대표할 수 있다는 판단에 따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송남'이나 '남송'이라는 이름은 '송파'의 '송'과 '하남' 또는 '성남'의 '남'을 따서 생각한 이름이고, '청량'은 이 근처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의 이름을 토대로 한 것이다. '아리수'는 한강의 옛이름이고, '한울'은 '큰 울타리'의 뜻으로, '위례'가 원래 '울타리'의 '울'이 그 뿌리말이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든 이름이었다. 그러나, 역사성이나 지역성을 많이 참작해야 한다는 위원들의 생각은 이 이름들이 이 지역의 백제 때 이름인 '위례'나 백제의 시조인 '온조'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다. '위례'는 한글로만 쓸 때 받침이 없고, 우리 고유어기도 해서 심사위원들의 높은 점수를 받았다.
□ '위례'라는 이름은 '울' 또는 '우리'가 그 바탕인 듯
위례성은 백제 건국 초기의 도성(都城)으로 원래 한강 북쪽에 있었으나 온조왕 때에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의 이성(二聖)산성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역사 기록에는 위례성과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이라는 이름이 함께 나오는데, 흔히 한강 북쪽에 처음 만든 왕성을 위례성 혹은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이라 부르고, 한강 남쪽에 새로 지은 왕성은 하남위례성이라 불렀다고 풀이한다. 위례(慰禮)는 우리말 '울타리'를 한자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위레성'에 대한 <삼국사기> 기록에 따르면, 졸본부여 사람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가 남쪽으로 함께 내려온 뒤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 각기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웠고, 비류가 죽자 그 신하와 백성이 모두 위례성으로 옮겨오므로 비로소 백제(百濟)라는 큰 나라로 성장했다고 한다.
그런데 같은 책에 또 보면, 온조왕 13년(BC. 6)에 왕이 신하들에게 '동쪽의 낙랑(樂浪)과 북쪽의 말갈(靺鞨)이 자주 침범하니 한수(漢水) 남쪽으로 도읍을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말한 뒤 한산(漢山) 아래에 목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백성들을 옮겨 살게 했다고도 적혀 있다.
'하남위례성'이란 '강(한강) 남쪽의 위례성'이라는 뜻임에 틀림업다. 그러므로 위 두 가지 기록 중 온조가 하남위례성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기록에 따른다면 백제의 도읍은 처음부터 한강 남쪽에 있었음이 확실하다. 그런데 ,온조왕이 위례성에서 한강 남쪽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또 다른 기록에 따른다면 위례성은 한강 북쪽의 하북위례성과 한강 남쪽의 하남위례성으로 각각 나뉘게 된다. 지금 역사학계는 이 두 가지 해석이 서로 팽팽히 맞서고 있는 것이다.
위례성(慰禮城)이라는 이름의 뜻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있다.
'울타리'를 뜻한다는 해석과 '강변의 성'이라는 해석, 그리고 '왕성'이라는 해석 등이다.
'위례'는 사방을 널리 둘러싼다는 뜻의 위리(圍籬)와 음이 비슷하므로 목책을 세우고 흙을 쌓아 만든 담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한강 옆에 쌓은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나오는 것은 위례는 욱리하(郁里河), 아리수(阿利水)와 함께 한강을 가리키는 이두(吏讀)식 이름이라는 데에 따른 것.
왕이 사는 성을 가리킨다는 해석은 중국의 역사서인 <주서(周書)>에 '백제왕을 어라하(於羅瑕)라고 부르는데 중국말로 왕(王)'이라는 기록이 있어 '위례'는 '어라'와 함께 '왕' 내지 '크다'라는 뜻이며, 위례성은 왕성 혹은 큰성[大城]으로 볼 수 있다는 견해에서 나온 것이다. '위례'가 '크다’ 또는 ‘많다’는 뜻을 가진 ‘여르’에서 유래된 말로 추정된다고 하고 있다. ('여르'가 왜 '많다'나 '크다'의 뜻이었는지를 설명한다면 상당한 설득력을 갖지만, 이 설이 일반인들에게 이해쪽으로 다가가기는 그리 쉽지 않다.)
위 세 가지 견해 중 가장 널리 인정되는 것은 위례가 '담'이나 '울타리'를 뜻한다는 첫번째 해석이다. '울' 또는 '우리(울애)'에서 나왔다는 설과도 거의 일치하는데, '위례'라는 이름이 원래 한자에서 나온 이름이 아닐 것으로 보면 이 설은 '위례'와 '우리'라는 음의 근사치로 보아 큰 설득력을 갖는다.
□ 위례성의 위치에 관해서도 학자들 분분
위례성이 정확히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학자들에 따라 또는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학자들은 위례성을 충남 천안(직산)지역이라고 믿었는데, 이는 천안시 입장면의 성거산(해발 523m) 정상부를 감싼 위례산성(慰禮山城)이 그 흔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정약용(丁若鏞)과 같은 역사지리학자들이 그 곳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고증을 통해 위례성은 한강 북쪽에 있고, 한강 남쪽의 광주지역(지금의 경기도 하남시)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 하남위례성이라 불렀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서 위례성의 위치에 대한 해석이 크게 바뀌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많은 사람들은 남한산성과 풍납토성처럼 한강 유역의 규모가 큰 성(城)에 주목하게 되었다. 일본인 학자들이 주로 유적·유물을 분석하는 고고학적 방법으로 위례성의 위치를 밝히게 되면서 나온 현상인데, 그러나, 문헌자료에 대한 분석은 상대적으로 소홀하여 위례성, 하남위례성, 한성(漢城) 한산성(漢山城) 등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밝히는 데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광복 이후에는 처음에 하북위례성이 북한산 기슭에 있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인정되기도 했다. 또, 서울지역의 도시개발 여파로 1970∼1980년대에 고대유적을 차례차례 발굴-조사하면서 점차 중랑천 유역에 주목하는 학자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서울의 한강 북쪽지역에서는 뚜렷한 백제 유적을 찾지 못하고 앞으로 기대하기도 쉽지 않아 1990년대에는 백제의 초기 중심지를 한강 유역에만 한정할 것이 아니라 북쪽의 임진강 유역까지 범위를 확대해 찾아야 한다는 견해들이 속속 제기되기도 했다.
하남위례성을 서울 송파구의 몽촌토성(夢村土城)에 비정하는 학자들이 많아진 것은 1970∼1980년대. 몽촌토성이 신라의 월성(月城)과 마찬가지로 야트막한 구릉에 쌓은 산성으로서 북쪽과 남쪽의 평야지대를 내려보고 있는, 좋은 입지적 여건을 갖춘 데다가 성안에서 뼈갑옷을 비롯해 고대의 각종 고급품들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7년부터 풍납토성(風納土城)을 발굴 조사하게 되면서 상황이 변했다. 풍납토성은 전체 둘레 3.5km의 타원형 평지성으로서, 성벽의 폭은 약 43m, 높이는 11m 이상이며, 오늘날의 댐 공사를 연상케 할 정도로 매우 과학적이고 복잡한 방법으로 쌓은 백제 최대의 평지토성이다. 풍납토성 안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삼국시대 움집[竪穴住居]을 비롯해 웅장한 지상가옥, 자갈로 포장한 도로, 3겹으로 된 환호(環濠) 등이 확인되었다. 이 유적들이 대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3세기경에 이르는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3세기 후반부터 5세기 후반 사이에 해당하는 유적이라고 풀이하기도 한다. 유적의 편년에 대한 해석은 서로 다르지만, 백제 사람들이 처음에는 3겹의 환호를 방어시설로 이용하다가 나중에 환호를 메우고 대신 풍납토성을 쌓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든 학자들이 거의 동의한다. 그리고 성안에서 각종 도자기와 토기, 토관(土管) 등 최고급의 유물과 시설물이 출토되어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 내지 도성이라는 데에도 다른 의견이 없다.
백제의 도성은 처음에 위례성 혹은 하남위례성 중심이었다가 나중에 한성(漢城)으로 바뀌었다.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합쳐 '한성'이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삼국사기>에 한성은 북성(北城)과 남성(南城)으로 구성되었다 했는데, 성벽 사이의 거리가 1킬로미터도 안 될 정도로 두 성의 거리가 아주 가깝기 때문. 문제는 어느 쪽이 하남위례성이었는가 하는 것인데, 근래 역사학자들은 풍납토성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위례성이 원래 충남 천안 혹은 아산지역에 있었다는 주장과 하남위례성이 경기도 하남 지역에 있었다는 주장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최근 역사학계에서도 이 주장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왕성이나 도성이 있었던 곳이라면 적어도 당시 사람들이 살았던 집과 성곽, 상류층이 쓰던 물건,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 등이 함께 발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고, 뒷받침할 만한 다른 물증도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킨 곳은 서울시 송파구의 풍납토성, 몽촌토성과 석촌동 고분군((古墳群)뿐이다.
※ 이상 네이버 블러그 자료 일부 참조. blog.naver.com/neokid13)
□ 사라질 뻔한 '송파'라는 땅이름
정부의 방침으로 서울 남동쪽의 송파, 하남, 성남 일부 지역이 하나로 묶여 새로운 도시 형태의 주택 단지가 생길 것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 지역은 독립적인 다른 행정지명을 갖게 될 수 있다. 어떻든 적어도 새 도시 형태가 되기 전까지는 '위례 신도시'란 이름이 계속 따라다닐 것이다. 그러나, 행정적으로는 이 지역이 서울 송파구로 흡수될 것이냐, 아니면 성남시나 하남시로 들어갈 것이냐, 또는 독립적인 행정 지역이 될 것이냐 하는 것이 앞으로 신중히 검토해야 할 문제이다. 새로운 시(市)가 생긴다면 당연히 그 이름은 '위례시(慰禮市)'가 될 것이며, 다른 행정구역에 들어간다 해도 '위례구(慰禮區)'나 '위례동(慰禮洞)'식의 행정동이 나오게 될 것이다. 즉, 백제 때의 땅이름 위례가 어떤 형태로든 이 시대 우리 땅에 버젓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그 동안 이 신개발 지역에 '송파'라는 이름과는 별개로 이 땅에 또 하나의 지명이 탄생하는 것이다.
사실, '송파'라는 이름도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땅이름이다.
자유당 정권 시절이던 1960년대 중반에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비위를 맞추고 싶은 한 고관이 우리 수도 서울을 '우남(雩南)'이란 이름으로 바꾸자고 서둘러댔다. '우남'은 이승만 대통령의 호인데, '서울특별시'가 아닌 '우남특별시'로 하면 이승만 박사를 길이길이 그 이름으로써 기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을 것이다. 그러나 4 19에 의해 대통령이 물러남으로써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또, 성남시가 새로 생긴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인데, 그 시에 새로 생긴 가장 큰 거리 이름이 시정 책임자가 바뀔 때마다 대붕로(大鵬路), 대봉로(大峰路) 등으로 몇 차례 엎치락뒤치락한 일도 있다. 당시 시의 책임자가 자기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넣는답시고 이처럼 땅이름을 마구 주물렀던 것이다.
땅이름은 어느 한 개인의 생각에 따라 이렇게 붙여지고 저렇게 고쳐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
땅이름은 대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익히 불러져 내려와 그 자체로도 무형의 유산이다. 그 속에는 우리의 역사가 있고, 훈훈한 조상의 숨결이 있다. 이것을 하루아침에 없애 버린다거나 얼치기 이름으로 바꾼다는 것은 역사를 뭉개고 조상을 잊겠다는 생각과 같다.
1980년대의 일이다.
옛날 '송파진(松波津)'이라는 나루가 있던 지금의 송파 일대에 서울 강동구에서 갈린 구가 새로 생겨나(1988년) '송파구(松波區)'란 이름이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불과 1년도 안 되어 '올림픽구'로 바꾸자는 움직임이 당시의 집권당인 민정당(民正黨)쪽에서 일고 있었다. 당시 88올림픽이 서울에서 열렸는데, 이를 기념해 구(區) 이름에 '올림픽'이라는 이름을 넣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주민들 가운데 상당수는 '송파구'를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정서까지 만들어 각 계에 호소하였다.
밀어붙이려는 쪽에서는 여론 조사 결과 지역 주민 8할 이상이 올림픽구로 바꿀 것을 원하고 있어 추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역 토박이들이 많이 사는 문정동, 장지동 주민들은 그 여론 조사 결과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5백년 역사가 담긴 많은 유적지와 송파 산대놀이, 송파 답교놀이, 송파 나루터 등으로 옛날부터 전국적으로 알려진 '송파'라는 이름은 구 이름으로라도 마땅히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서울시의 주선으로 '올림픽구'보다는 '송파구'라는 이름으로 굳혀지기는 했다.
여기서, 우리는 오랫동안 익히 불러온 '송파'라는 이름을 '올림픽'이란 이름으로 지워 버리려 했던 일부 사람들을 크게 나무라고 싶다.
'송파'는 이 곳이 옛날 한강 본류였을 때 송파 나루터로 유명했지만, 전국에서 모여드는 장사꾼들로 크게 붐볐던 상설 시장이었다.
강원도쪽에서 한강 물줄기를 타고 내려온 여러 가지 작물, 목재 등이 그득그득 쌓였고, 특히 이 곳의 소(牛)시장은 유명해서 안성 읍내장, 은진 강경장, 전주장, 덕원 원산장과 함께 전국 5대 향시(鄕市)의 하나였던 곳이다.
기록에 의하면 1925년 을축년 장마 직전까지도 207호나 되는 객주집이 있었다니 얼마나 성했던 시장거리였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 위례는 이제 그 뜻처럼 한 지역을 크게 싸안을 듯
그에 못지않게 알려진 것이 있으니 '송파 산대놀이'이다.
이 산대놀이는 관원 관노들의 놀이라 할 수 있는 양주 별산대 놀이와 달라, 장사꾼들이 갖가지 탈을 쓰고 거드름춤(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추는 춤)과 깨끼춤(앉았다 뛰어올랐다 하는 춤) 등의 묘한 몸짓으로 한바탕 장내를 흥겹게 하는 것이다. 사회를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표현하며 즐기는 이 '탈꾼대놀이'는 연중 행사로 정월 대보름, 단오, 추석 등의 명절에 베풀어졌고, 어떤 때는 1주일씩 계속되는 때도 있었다고 한다.
송파는 옛날부터 서울 외곽의 중요한 나루요, 많은 이들이 왕래하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에는 송파 별장(別將)을 두고 방어하리만큼 나라에서 크게 중요시했었다.
이러한 역사를 간직한 '송파'를 이제 그 이름조차 바꾸어 없애자고 했다니 정말 제 정신이 있는 사람들인가? '올림픽'이 아무리 중요하고 기억해 두고 싶은 잔치였다 해도 우리 역사 속의 훈훈한 이름 '송파'를 죽여서까지 대신 들어앉힐 필요가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올림픽'이란 이름은 지금의 '올림픽대로'나 '올림픽공원'으로도 족하다. 그것이 마음에 안 차면 차라리 '올림픽동'을 하나 더 만들든지.
형체는 없지만 조상들의 '생각'이 밴 땅이름, 소리가 없지만 우리 삶의 내력을 전해 주는 땅이름, 그러한 땅이름이 지도의 한구석에서라도 두고두고 사라지지 않을 때, 결코 잊고 싶지 않은 그 '옛날'이 그대로 살아 숨쉴 것이다.
'위례'는 '우리'와 음이 아주 근사하다. 따라서, 그 근사한 '우리'라는 말처럼 이 지역은 이 일대의 많은 지역을 싸안을 것이다. '송파'도 싸안고 '성남'도 싸안고 '하남'도 싸안을 것이다. 백제 때의 땅이름이 '위례'가 이 지역에 완전히 자리잡게 되면 백제를 세운 그 옛날의 온조 임금도 하늘에서 크게 기뻐하리라 믿는다. ///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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