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고을에 남은 아픔의 흔적들
- 고려 때부터 중요시 해온 경기 남부의 방어 진지
- 고려 때부터 중요시 해온 경기 남부의 방어 진지
■ 글·사진 :: 배우리<한국땅이름학회 회장>
돌보는 이 없어 아예 슬픔에 젖었음인가? 성은 외로이 산비탈을 지키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죽주성(竹州城). 누가 이를 지금에 와서 역사적 의미를 지닌 성이라 하랴?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매산리 미륵당(대평원, 大平院) 서북쪽 산비탈. 성을 이루었던 돌들이 풀섶에 힘없이 나뒹굴고, 일부는 1997년도에 복원돼 간신히 그 옛 모습을 보이려 애를 쓰고 있다.
돌성의 둘레는 1천1백74m. 고려 제23대 고종 23년(1236)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가 몽고 군사로부터 피흘려 지켜낸 곳. 그래서 경기도 기념물 69호로 지정돼 있긴 하다.
외로이 울고 있는 죽주산성
몽고는 고려 고종 22년 이후 서너 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우리 온 땅을 짓밟았다.
1235년 평안도 안변, 용강, 함종(咸從, 지금의 평남 강서군), 삼등(三登, 지금의 평남 강동군) 및 경상도의 안동, 동경(지금의 경주) 등을 침범하였던 몽고군은 일단 물러섰다가 이듬 해 다시 많은 군사로 침입을 감행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삼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인 죽주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송문주 별감은 몽고의 침략군이 오자,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몽고군은 성을 포위하고 포(砲)를 쏘아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송별감 군사 역시 포를 쏘아 대항했다. 송별감은 전에 평안도 구주 싸움을 통해 몽고의 공격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그 공격 방법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미리 포를 준비해 놓았었다.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몽고군은 기름을 이용하여 성에 불을 지르려 했다. 몽고군이 화공(火攻)을 감행하려고 머뭇거리는 틈을 타 송별감의 군사들은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여 몽고병들을 짓밟았다. 성 밖은 일시에 몽고군의 시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일부 몽고군은 공격에 쓰던 기구들을 모두 불태우고 물러갔다.
성이 포위당한 지 보름만에 얻은 큰 전과였다. 백성들은 죽주성의 수장(首將)으로 고을을 잘 지켜낸 송문주 별감을 ‘하늘이 낸 귀신’이라 하였다.
죽주는 고려시대부터의 요지
‘죽주’는 경기도 남부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한 현(縣)이었다.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皆次山)현’이었던 이 고을은 신라의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죽주’로 고쳐 지주사(知州使)를 두었다.
현종 때 광주(廣州)에 예속시켰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죽산(竹山)’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따라서 ‘죽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473년간, ‘죽산’이라는 명칭은 태종 때부터 약 5백년동안 사용해 온 것이다.
죽산현은 일제 때인 1914년 일부가 용인군으로 들어가고, 대부분이 안성에 편입됨으로써 군현으로서의 명을 다했다. 사또(현감)가 다스리던 고을 하나가 일제에 의해 없어진 셈이다. 그 현감이 있었던 본고장은 현재 ‘죽산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죽산’이란 이름에서 갈려 나간 ‘일죽’ ‘이죽’ ‘삼죽’ 등이 형제처럼 안성군 속의 면 이름들로 남아 왔다. 1997년도에 이르러 그중 죽산 고을의 중심지였던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바뀌었다. 안성군이 1998년 4월에 안성시로 승격되었으니, 지금은 죽산(죽주)의 중심지가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 된 것이다.
죽주 고을은 후삼국시대에 태봉의 궁예가 이곳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던 기훤(箕萱)에게 귀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궁예는 여기서 큰 대접을 받지 못한 듯하다. 겨우 5년만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죽주성 근처의 큰 절 칠장사
죽주성 근처, 죽산면 칠장리에는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七長寺)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창건한 이 절은 고려 초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현재의 비각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갔던 7명의 악인(惡人)을 교화하여 그 7명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을 안고 있는 절의 이름이 ‘칠현산(七賢山)’이고, 그중의 한 봉우리는 따로 ‘칠장산(七長山)’이라 하기도 한다.
혜소국사는 현종 때 왕의 명으로 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다. 절의 비각 안에 있는 보물 488호의 혜소국사비엔 한 전설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나타나 그를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내리치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려 가토가 놀라 달아나 버렸다는.
현재 비 몸체가 갈라져 있음은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일까?
이름 그대로 옛날의 슬픔을 ‘잊은’ 이진터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일죽 나들목에서 돌아 들어가면 바로 닿는 곳에 죽산성당이 있고,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진터’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1966년 병인교난 때 많은 교우들이 끌려와 처형 당한 곳. 교우들을 끌어다가 심한 고문을 했던 관아터도 있다.
죽산은 옛날엔 한양에서 삼남으로 가는 중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도호부를 설치했고, 큰 감옥을 두어 인근에서 죄 짓는 자가 있으면 끌어다 가두기도 했다. 교우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던 그곳에는 지금 면사무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 해도 25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남은 이들의 숫자이고, 이름없이 고문을 받다가 숨져간 이는 그 몇 배에 이른다.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이른바 ‘사학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볼 때 무명의 순교자로 세상을 뜬 교우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병인교난이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나 전개 과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 주고도 남는다.
죽산의 순교 사화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 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17살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60살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 날 한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럼에도 이곳 죽산에서는 이처럼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많았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이진터’. 지금은 굴착기로 깎아냈고, 목장의 한 귀퉁이로 변해 버렸지만, 목장이 되기 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다.
‘이진터’는 한자로는 ‘이진(夷陣)’이.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병인박해가 끝나자 이진터는 ‘그곳으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아예 잊으라’고 해서 ‘잊은터’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그 참담한 비극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삼죽면 소재지 덕산리에 있는 이곳은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아주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 이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 때문인가?
‘두들기’에선 이름처럼 많은 교우들이 두들겨 맞았다.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끌려가다 잠시 물이라도 마시려고 멈춰 가다가 심하게 두들겨 맞곤 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안성 고을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죽산 고을. 그러나 그 죽산 고을의 여러 자취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그 모습으로나마 옛날의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돌성의 둘레는 1천1백74m. 고려 제23대 고종 23년(1236)에 죽주방호별감(竹州防護別監) 송문주가 몽고 군사로부터 피흘려 지켜낸 곳. 그래서 경기도 기념물 69호로 지정돼 있긴 하다.
외로이 울고 있는 죽주산성
몽고는 고려 고종 22년 이후 서너 해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우리 온 땅을 짓밟았다.
1235년 평안도 안변, 용강, 함종(咸從, 지금의 평남 강서군), 삼등(三登, 지금의 평남 강동군) 및 경상도의 안동, 동경(지금의 경주) 등을 침범하였던 몽고군은 일단 물러섰다가 이듬 해 다시 많은 군사로 침입을 감행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내려와 삼남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인 죽주성을 포위하였다. 당시 송문주 별감은 몽고의 침략군이 오자, 고을 사람들을 이끌고 성에 들어가 굳게 지켰다.
몽고군은 성을 포위하고 포(砲)를 쏘아 항복을 받아내려 했다. 그러나 송별감 군사 역시 포를 쏘아 대항했다. 송별감은 전에 평안도 구주 싸움을 통해 몽고의 공격 방법을 이미 알고 있었던 터라 그 공격 방법에 대항할 수 있도록 미리 포를 준비해 놓았었다.
성은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몽고군은 기름을 이용하여 성에 불을 지르려 했다. 몽고군이 화공(火攻)을 감행하려고 머뭇거리는 틈을 타 송별감의 군사들은 일시에 성문을 열고 돌격하여 몽고병들을 짓밟았다. 성 밖은 일시에 몽고군의 시체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일부 몽고군은 공격에 쓰던 기구들을 모두 불태우고 물러갔다.
성이 포위당한 지 보름만에 얻은 큰 전과였다. 백성들은 죽주성의 수장(首將)으로 고을을 잘 지켜낸 송문주 별감을 ‘하늘이 낸 귀신’이라 하였다.
죽주는 고려시대부터의 요지
‘죽주’는 경기도 남부에 있었던 고려시대의 한 현(縣)이었다.
본래 고구려의 ‘개차산(皆次山)현’이었던 이 고을은 신라의 경덕왕이 ‘개산군(介山郡)’으로 고쳐 한주(漢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죽주’로 고쳐 지주사(知州使)를 두었다.
현종 때 광주(廣州)에 예속시켰고, 조선 태종 13년(1413)에 ‘죽산(竹山)’으로 고쳐 현감을 두었다. 따라서 ‘죽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473년간, ‘죽산’이라는 명칭은 태종 때부터 약 5백년동안 사용해 온 것이다.
죽산현은 일제 때인 1914년 일부가 용인군으로 들어가고, 대부분이 안성에 편입됨으로써 군현으로서의 명을 다했다. 사또(현감)가 다스리던 고을 하나가 일제에 의해 없어진 셈이다. 그 현감이 있었던 본고장은 현재 ‘죽산리’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죽산’이란 이름에서 갈려 나간 ‘일죽’ ‘이죽’ ‘삼죽’ 등이 형제처럼 안성군 속의 면 이름들로 남아 왔다. 1997년도에 이르러 그중 죽산 고을의 중심지였던 이죽면이 죽산면으로 바뀌었다. 안성군이 1998년 4월에 안성시로 승격되었으니, 지금은 죽산(죽주)의 중심지가 행정상으로는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이 된 것이다.
죽주 고을은 후삼국시대에 태봉의 궁예가 이곳에서 무리를 이루고 있던 기훤(箕萱)에게 귀의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궁예는 여기서 큰 대접을 받지 못한 듯하다. 겨우 5년만에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로 갔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지역은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삼남대로(三南大路)를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죽주성 근처의 큰 절 칠장사
죽주성 근처, 죽산면 칠장리에는 용주사의 말사인 칠장사(七長寺)가 있다.
신라 선덕여왕 5년(636)에 창건한 이 절은 고려 초에 혜소국사(慧炤國師)가 현재의 비각 자리인 백련암(白蓮庵)에서 수도할 때 찾아갔던 7명의 악인(惡人)을 교화하여 그 7명 모두가 도를 깨달아 칠현(七賢)이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절을 안고 있는 절의 이름이 ‘칠현산(七賢山)’이고, 그중의 한 봉우리는 따로 ‘칠장산(七長山)’이라 하기도 한다.
혜소국사는 현종 때 왕의 명으로 이 절을 크게 중건하였다. 절의 비각 안에 있는 보물 488호의 혜소국사비엔 한 전설이 담겨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加藤淸正)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나타나 그를 크게 꾸짖자, 화가 치민 가토가 칼을 내리치니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려 가토가 놀라 달아나 버렸다는.
현재 비 몸체가 갈라져 있음은 그 전설을 뒷받침하는 것일까?
이름 그대로 옛날의 슬픔을 ‘잊은’ 이진터
서울에서 중부고속도로를 타고 남쪽으로 달리다가 일죽 나들목에서 돌아 들어가면 바로 닿는 곳에 죽산성당이 있고, 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이진터’라는 천주교 성지가 있다.
1966년 병인교난 때 많은 교우들이 끌려와 처형 당한 곳. 교우들을 끌어다가 심한 고문을 했던 관아터도 있다.
죽산은 옛날엔 한양에서 삼남으로 가는 중요 길목이어서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도호부를 설치했고, 큰 감옥을 두어 인근에서 죄 짓는 자가 있으면 끌어다 가두기도 했다. 교우들이 심한 고문을 당했던 그곳에는 지금 면사무소가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 해도 25명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기록에 남은 이들의 숫자이고, 이름없이 고문을 받다가 숨져간 이는 그 몇 배에 이른다. 오가작통(五家作統)으로 이른바 ‘사학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처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상상해 볼 때 무명의 순교자로 세상을 뜬 교우들의 수는 헤아릴 수가 없을 것이다.
병인교난이 시작된 1866년부터 이곳에 공소가 설립되기 2년 전인 1932년까지 무려 70여 년 동안 신자 공동체의 형성이나 전개 과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음은 그 당시 박해의 참상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말해 주고도 남는다.
죽산의 순교 사화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 뿐이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 사람 10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17살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60살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 자리에서 순교했다. 또 여정문은 그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 날 한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당시의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이라도 부자를 한 날 한 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그럼에도 이곳 죽산에서는 이처럼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많았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이진터’. 지금은 굴착기로 깎아냈고, 목장의 한 귀퉁이로 변해 버렸지만, 목장이 되기 전에는 노송이 우거지고, 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골짜기였다.
‘이진터’는 한자로는 ‘이진(夷陣)’이.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竹州山城)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곳.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란 뜻으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병인박해가 끝나자 이진터는 ‘그곳으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아예 잊으라’고 해서 ‘잊은터’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그 참담한 비극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죽산 읍내에서 15리쯤 떨어진 곳에 ‘두들기’라는 곳이 있다.
삼죽면 소재지 덕산리에 있는 이곳은 80여 호가 사는 큰 마을이지만, 옛날에는 아주 인가가 드문 작은 주막거리였다. 지형이 조금 도드라져 이 이름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그 이름 때문인가?
‘두들기’에선 이름처럼 많은 교우들이 두들겨 맞았다. 용인, 안성, 원삼 등지에 사는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끌려가다 잠시 물이라도 마시려고 멈춰 가다가 심하게 두들겨 맞곤 했던 것이다.
일본인들에 의해 안성 고을의 뱃속으로 들어가 버린 죽산 고을. 그러나 그 죽산 고을의 여러 자취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그 모습으로나마 옛날의 ‘슬픔’을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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