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좀 보소오 날 좀 보소오 날 좀 보오소 동지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라앙 고개를 넘어간다 -밀양아리랑의 노랫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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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히기 힘든 ‘아리랑’의 어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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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귀에 너무도 익숙한 아리랑이지만, 아리랑의 성립 시기나 그 어원에 관해서는 아직도 확실한 정설이 없다. 아리랑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제기된다. 고대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설이 있고, 조선 말 대원군 시대에 성립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두 가지 설을 바탕으로 하여 아리랑이 고대에 성립되어 차츰 조금씩 변해오다가 대원군 시대에 榕楮?경복궁 공사를 위한 가렴주구가 얽혀서 여러 변이형이 생기고, 그 내용상에도 변화가 일어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아리랑의 대표적 어휘인 ‘아리랑’에 대해서도 많은 설이 있다. 아랑설(阿娘說), 알영설(閼英說), 알영고개설이 있는가 하면, 대원군 시대를 유래의 시점으로 보는 아이롱설(我耳聾說), 아난리설(我難離說), 아리랑설(我離娘說), 아랑위설(兒郞偉說) 등이 있다. 언어학자인 양주동(梁柱東) 고인이나 이병도(李丙燾) 고인 등은 아리랑이 옛 땅이름이라는 설을 제기하기도 했었다. ‘아리랑’이라는 말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된 것이지만, ‘닐늬리’ ‘청산별곡’ ‘군마대왕(軍馬大王)’의 후렴구처럼 아리랑도 관악기의 구음(口音)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유래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아리랑’이 ‘알(?)’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뿌리말 ‘알’ 뒤에 접미사처럼 ‘랑’이 이어붙어 ‘알이랑(아리랑)’이라는 말로 정착되지 않았나 보는 것이다. 함경도 지방에서 오랫동안 많이 불려온 민요 ‘어랑타령’의 ‘얼’도 같은 차원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알’은 원래 어떤 뜻을 지닌 것일까? ‘알’은 바로 ‘혼(魂)’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알’과 ‘얼’을 같은 뜻을 지닌 유사음의 낱말이기에 그렇다. 좀 비약인 것 같긴 하지만, ‘아리랑’이라는 낱말 속에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혼’이 존재하기에 이것에 바탕하여 음률적으로 흥겹게 외쳐 나옴으로써 ‘아리랑’이 태동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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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리랑고개’는 어디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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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고개로 날 넘겨주소 정든님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 입만 방긋 아리아리랑--- -밀양아리랑의 노랫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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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고개로 나를 넘겨 달라는데 아리랑고개가 어딘지 알아야 말이지. 우리나라 곳곳에는 아리랑고개가 무척 많다. 따라서 아리랑고개가 어디냐고 물을 때 그곳이 어디라고 딱 짚어 말하기는 쉽지가 않다. 어느 한 고을 안에서도 아리랑고개가 어디라고 지적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이상하게도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은 어느 한 곳을 가리키는 지명이 아닌 보통명사적 성격을 띠고 있는 곳이 많다. 예를 들면, 전북 익산에는 아리랑고개라고 불리는 곳이 무려 네 군데나 된다. 지금도 어딜 가서 아리랑고개가 어디냐고 물으면 “아리랑고개라는 곳이 따로 있나? 아리랑 노래를 부르면서 넘어다니던 고개면 다 아리랑고개지” 라는 말을 듣게 된다. 따라서 아리랑고개는 지금도 어딘가에서 계속 생기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서울만 해도 잘 알려진 두 군데에 아리랑고개가 있다. 하나는 ‘정릉고개’라고도 불리고 있는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서 정릉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이고, 다른 하나는 서울 중구 무학동, 즉 광희문 앞에 있는 고개이다. 서울 정릉동의 아리랑고개는 옛날부터 이런 이름이 있었던 것이 아니고, 이 근처 요식업자들의 선전에 따라 붙은 이름이다. 일제 때인 1935년 경에 요리업자들이 정릉의 그윽하고 아름다운 경치를 이용하여 고급 요정을 꾸미고, 손님들의 발길을 끌기 위해 이 고개의 길을 넓혀 민요 아리랑의 이름을 따서 아리랑고개란 표목을 고개 마루턱에 세우고, ‘아리랑고개 너머 좋은 놀이터가 있다’는 것을 널리 선전하면서 차츰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이곳에서 촬영한 후부터 아리랑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 광희문 근처의 아리랑고개는 ‘죽어서 넘는 고개’의 뜻으로 붙은 이름. 옛날에 서울 장안의 어려운 사람들이 죽으면, 흔히 시구문(광희문)을 지나 이 고개를 넘어서 신당동 화장터나, 금호동 공동묘지를 가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때문에 서울에서는 ‘아리랑고개를 넘어갔다’고 하면 ‘세상을 떠났다’는 뜻의 은유적 표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충남 논산 양촌면 신기리에서 전북 완주 운주면 안심리로 넘어가는 아리랑고개는 일제 때 안심금광이 번창하여 돈을 벌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 고개에 술집을 차리고 아리랑노래를 많이 불러댐으로써 이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전북 전주시 호성동의 아리랑고개는 1950년대의 전란 중에 제35 예비사단의 군인들이 넘어다니며 아리랑고개라 부르기 시작함으로써 나온 이름이라 한다. 전국에 있는 아리랑고개를 모아 보니 다음과 같았다. 서울(2곳), 인천, 경기도의 연천(2곳), 철원, 김포, 용인, 광주 강원도의 강릉, 양양 충북의 보은, 부여, 논산, 영동 충남의 예산 전북의 전주, 완주, 군산, 익산(4곳), 정읍, 전남의 나주, 해남, 광주광역시(2곳) 경북의 상주(2곳), 경주(3곳), 선산, 경남의 거제, 합천(2곳), 함양, 울산광역시, 부산광역시(3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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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의 전설이 배인 밀양아리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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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도 밀양아리랑, 정선아리랑, 진도아리랑 등 엄청나게 많다. 밀양아리랑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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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로 감돌고 벽공에 걸린 달은 아랑각을 비추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 주소
저 건너 저 집이 정든네 집인데 지 안 가고 내 안가니 수천리로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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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에 관해서는 영남루(嶺南樓)에 얽힌 비극 전설이 아랑 설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들 하지만, 잘알 수는 없다. 옛날 밀양에 살던 한 부사에게 얼굴도 마음씨 예쁜 ‘아랑’이라는 딸이 있었단다. 어느 날 아랑에게 반한 관노가 사랑을 고백하자, 아랑은 냉정하게 관노를 꾸짖었겠다. 증오로 가득찬 관노는 그만 아랑을 비수로 찔러 죽이고 말았다나. 그후 밀양에 부임하는 신임 부사들마다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랑의 혼령 때문에 하나같이 죽어갔고……. 그러던 차에 서울 남산골의 한 선비가 밀양 부사로 새로 부임해 왔고, 아랑의 혼령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선비는, 그 관노를 붙잡아 벌한 뒤 아랑각(阿娘閣)을 짓고 제사를 지내 아랑의 넋을 위로했더란다. 그때 부녀자들이 아랑의 정절을 ‘아랑아랑’ 하며 노래 부르던 것이 밀양아리랑이 된 것이라고. 아랑은 조선 명종 때 밀양부사의 딸 윤동옥(尹東玉)을 가리키며, 재기있고 자색이 뛰어난 규수로 전해진다. 18세 때 유모의 꾀임에 빠져 영남루로 달 구경을 갔다가 통인 주기(朱旗)에게 정조를 강요 당하자 죽음으로 정절을 지켰다는 것이다. 아랑각을 짓고난 후부터는 아랑의 원혼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고 고을도 태평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아랑의 높은 정절을 추모하기 위해 해마다 음력 사월 열엿샛날 제관을 뽑아 원혼을 달래며 제향을 드리고 있다). 아랑각은 경남 밀양시 내일동에 있다. 1983년 7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밀양시 소유로 시에서 관리하며 아랑사(阿娘祠)라고도 부른다. 1965년 종래의 건물이 너무 낡아 지역민들과 출향 인사들의 성금과 당국의 보조로 현재의 아랑각을 중건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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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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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의 영남루를 찾아를 오니 아랑의 애화가 전해있네 - 칠보장 채색에 아랑각은 아랑의 슬픔이 잠겨있네 - 남천강 굽이쳐서 영남루를 감돌고 십오야 밝은 달은 아랑각을 비춘다 -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와 이리 좋노 밀양의 영남루는 와 이리 좋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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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 노래들은 밀양의 소리꾼들이 즐겨 불렀다. 북채 두 개를 마주 두드려 반주를 했다. ‘날 좀 보소……’의 밀양아리랑을 접하면 우선은 흥부터 나지만, ‘아우라지 뱃사공아 배좀 건너주게…’로 시작되는 강원도 정선아리랑 가락은 느리면서도 구슬프다. 정선아리랑은 정말로 그 가락의 맛이 밀양아리랑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태백준령 첩첩산중에서 한 뼘 하늘을 머리 위에 이고 살던 정선 사람들은 고단한 생활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모든 것을 조선시대 초기부터 아라리 가락에 담아 불렀기 때문에 흥겨울 리가 없고 그저 애잔하기만 하다. 정선아리랑이 구슬픈 것은 이 지방 특유의 정서와 분위기 탓. 정선아리랑은 고려가 멸망하면서 지조를 지키던 고려 유신들이 험준한 정선 땅으로 숨어들어 생활하면서 부른 노래가 기원이라고 전해지는데, 그 고려 유신들의 입에서 나온 노랫말과 가락이 흥겨울 리가 있을 것인가.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 억수장마 질라나 /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산 속에서 나물로 연명하며 망국의 한과 고려 조정에 대한 충절을 다짐하던 이들 후손들의 애절함이 토착가락에 실리면서 정선아리랑은 더 구슬픈 가락으로 변해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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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너 저 집이 내 집인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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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반하여 밀양아리랑은 슬픈 구석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 아리랑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까지 약 2백년 사이에 만들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16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정선아리랑의 영향을 받아 생긴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예부터 넓은 들에 사통팔달 교통 덕택에 풍요로운 고장이기에 밀양 주민들은 배가 불렀고, 결국 계집이나 생각하는 사나이들이 많게 되었단다. 그래서 흔히 하는 말로 이곳의 기생 숫자가 오뉴월 똥파리보다도 많았다던가. 영남루에 소속된 관기만도 16명이었다니 그 수를 짐작할 수가 있다. 거기다가 밀양 기생은 평양 기생 뺨칠 만큼 재색이 뛰어났다는 소문까지. 그러나 천한 상놈들에게는 그 기생들이 모두 그림의 떡일 뿐이었기에 ‘날 좀 보소’라거나 ‘정든 님 오셨는데 인사를 못해……’ 하는 식의 노랫말의 아리랑이 나오게 되었다는 것. 밀양 고을 사나이가 아낙을 그리듯 밀양 고을의 아낙 중에도 님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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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건너 저 집이 정 든 내 집인데 지 안 가고 내 안가니 수천리로다, 서산에 지는 해는 지고 싶어 지나 날 두고 가신 님은 가고 싶어 가나, 물 길러 가는 채 술 길러 이고 오동나무 수풀 속에 임 찾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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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아리랑의 본고장인 경남 밀양 고을에서 아랑의 전설 이야기를 선전 항목에서 빼놓을 리가 없다. 그래서 밀양 고을에서는 해마다 향토축제인 ‘밀양 아리랑대축제’를 5월 초 쯤에 연다. 밀양 아리랑대축제는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의 충의(忠義) 정신, 조선시대 성리학의 태두인 김종직 선생의 지덕(智德) 정신, 죽음으로써 순결의 화신이 된 아랑낭자의 정순(貞純) 정신을 기리는 축제로 올해로 벌써 49번째다. 이 행사에는 ‘아랑규수 뽑기잔치’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