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연기군은 본래 백제 ‘두잉지(豆仍只)’현이었는데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59

장남벌의 미꾸지내가 새 도읍지를 마련했네…
- 새 행정수도가 들어설 연기군 남면 일대
■ 글·사진 :: 배우리<한국땅이름학회 회장>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 가운데 새 행정 수도의 후보지가 최종 결정됐다.
분명히 충청권 어디라는 것은 확실한데, 그 동안 어디가 될지는 그 누구도 잘 알지도 못했고 장담하지도 못했다. 그러더니, 결국 충남의 연기군 일부와 그 옆의 공주시 일부로 거의 확정(…?)이 되었다.
연기군은 백제의 두잉지현

충남의 연기군은 본래 백제 ‘두잉지(豆仍只)’현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의 이름인 ‘연기(燕岐)’로 고쳤다. 그러나 당시엔 이름은 ‘연기’였지만, 연산(戀山 문의)군의 영현(領縣)이었을 뿐이었다.
그후, 고려 현종 9년(1018)에 청주에 붙였고, 명종 2년(1172)에 감무(監務)를 두었다가 뒤에 목천(木川) 감무가 겸임하게 된다. 조선 태종 6년(1406)에 와서 각립(各立)되었던 이 지역은 그 14년에 전의(全義)현과 합쳐서 ‘전기(全岐)’현으로 했다가 16년(1416)에 와서 다시 갈라서 현감을 두었고, 숙종 6년(1680)에 문의현(文義縣.지금의 청원군 문의면)에 들어갔다가 11년(1685)에 다시 현이 되고, 고종 32년(1895)에 예에 따라 다시 군으로 되어 7면을 관할했었다.
즉 연기군은 오랫동안 독립된 하나의 군(郡) 형태를 별로 이루지 못했다.
이렇던 연기군은 일제 때인 1914년에 군면(郡面) 폐합에 따라 지금과 거의 비슷한 행정구역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 연기군은 조치원읍과 금남면-동면-서면-남면-전동면-전의면 등 1읍 7면, 2백3리로 구성되어 있다.
한반도의 허리를 비스듬히 가로지르는 차령산줄기의 중간 허리 남쪽 평야 지대에 위치한 조치원은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로 알려진 곳이다.
옛날부터 교통의 요지

연기읍내는 조선시대에도 교통의 요지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양(서울)에서 전라-경상도로 이어지는 큰 길이 수원-천안 등을 거쳐 이 지역을 지나고 있다.
이 연기읍내를 중심으로 하여 사방으로 뻗은 길을 살펴보면, 북으로는 천안으로 가는 길이, 남쪽으로는 금산 땅으로 가는 길이 뻗어 있고, 북동으로는 청주, 남동으로는 보은, 남서로는 공주로 가는 길이 뻗어 있어 5거리 지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곳이 옛날부터 중요 길목이었음은 ‘조치원’이라고 하는 ‘원(院)’ 이름을 보아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교통 기관이 발달하여 전국이 1일 생활권 안에 들어서 길 중간에 하룻밤 묵어 갈 여관이나 호텔이 필요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여행객이나 공무(公務)로 일을 볼 사람이 지방을 갈 때 날이 저물면 묵어갈 만한 곳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길 중간중간에 ‘원’이라는 것을 두어서 여행객의 편의를 돌보아 주었다.
원은 조선시대에 공적인 임무를 띠고 지방에 파견되는 관리나 상인 등 공무 여행자에게 숙식 등의 편의를 제공하던 공공여관이었다.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에 흔히 역과 함께 사용되기도 해서 ‘역원(驛院)’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 원이 언제부터 설치-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이 왕래하는 곳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때부터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교통 사정이 어려운 때에 원은 여행자를 도둑이나 짐승으로부터 보호하는 한편,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하였고, 더러는 지방에서 살림이 어려워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하였다. 임진왜란을 겪고난 조선 후기에는 원이 주막(酒幕) 또는 주점(酒店)으로 변하기도 하였다. 지금 전국에 많이 있는 주막거리라는 땅이름은 대개 이렇게 해서 나오게 된 것이다.
원은 여행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이므로, 원이 있던 곳은 어느 곳보다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원의 이름이 그대로 땅이름으로 되기도 하였다. 서울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등이 바로 그것이다.
연기군의 단 하나의 읍인 조치원

연기군의 단 하나의 읍인 조치원은 본래 연기군의 북쪽 지역이어서 북일면(北一面)이라 했다가 뒤에 북면(北面)이 되었던 곳이다.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으로 되어 있지만, 이곳은 예부터 연기군 일대의 중심지였다.
생활권을 작게 구분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평야 지역을 이루어 행정구역의 변화가 어느 곳보다도 심했던 이 지역은 한때 청주 땅에 속하기도 했었고, 목천(木川.지금의 천안시 목천면)의 감무(監務)가 다스리기도 했었다.
일제 때에 이 지역이 북면의 조치원리를 중심으로 하여 크게 발전하여 1917년 10월에 일부 지역을 서면에 넘겨 주고, 여기에 조치원면을 신설하여 관내를 여럿으로 나누어 따로 동리명(洞里名)으로 정해 두었다.
그 뒤로도 인구가 급속히 늘어난 조치원면은 면으로 승격된 지 불과 14년만인 1931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원이 있었던 마을은 대개 ‘원터’나 ‘원골’로 되어 전국에는 이런 이름의 마을들이 무척 많다.
충남 연기군의 ‘조치원’도 원이 있었던 곳이기 때문에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그 원의 정확한 위치는 확인이 어려운데, 지금의 조치원읍 서창리에 ‘원마루’라고 하는 마을이름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호천(美湖川)의 한 갈림 내에 위치한 조치원읍은 북쪽과 서쪽으로는 차령산맥이 둘려쳐져 있고, 남북으로 길게 시원한 벌판이 펼쳐져 있어 예로부터 농업이 크게 성했던 곳이다.
연기군의 중심지는 원래 남면의 연기리

연기군 남면, 금남면, 동면과 공주시 장기면 일대가 7월 초 새 행정수도 후보지로 최종 선정되자, 이 지방 사람들의 마음이 술렁거렸다.
그러나 그러한 흥분 가운데는 이 지방을 붙박아 살아온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게 된다는 서운함과 실망도 섞여 있었다. 도리어 지금보다 좋아질 것이라는 기대에 부푼 사람들은 막상 행정수도가 들어설 곳의 지역 사람들이 아니라 그 주변 사람들이었다.
이 지역이 최종 후보지로 확정되게 된 것은 수도권과 80㎞ 이상 충분히 떨어져 있고 영·호남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 신 행정수도 건설의 명분과도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
편의상 ‘연기 공주지구’라 불리는 총 2천1백60만평의 이 지역은 미호천과 금강이 합류하는 지점.
옛날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어느 곳에서나 교통상으로 접근이 쉬운 곳이고, 풍수지리학상으로도 입지가 뛰어나다는 소문이 전부터 있어 왔다.
특히 공주시 장기면 일대는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계획을 세울 당시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점지했던 자리이기도 하다.
대전과 청주에서 각각 10㎞ 정도 떨어져 있고 경부고속철도 오송역 및 청주공항이 인접해 있고, 대전, 충북, 충남의 중심지역에 자리잡아 국가균형발전 효과 뿐만 아니라 국민통합 효과도 높다는 평가를 받아 최종 입지로 선정된 것이다.
주변에 원사봉(해발 254m)과 전월산(260m)이 있는 이곳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명당 자리. 전월산을 중심봉으로 앞으로는 금강 물줄기가 미호천과 합류하며 휘감아 지나가는 지형지세다.
전월산과 금강 사이에는 장남평야라 불리는 퇴적층의 넓은 들이 있어 천연적으로 수도로서의 틀을 갖췄다. 이 때문에 197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 계획(백지 계획)을 추진할 때부터 최적지로 꼽혀 왔다.
무엇보다 대전, 청주와 삼각축을 형성하고 있어 도로 등 기존 인프라의 활용이 가능하고 공주, 청주, 천안 등을 배후도시로 개발할 수 있는 여건을 지녔다.
이 일대를 흐르는 미호천은 충북 음성군 삼성면 마이산((馬耳山)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흘러 진천군과 청원군을 뚫고 나와 연기군 동면 합강리(合江里)에 이르러 금강(錦江)으로 흘러 들어간다.
미호천은 ‘미꾸지내’라는 토박이 땅이름에서 나온 이름이다.
‘미꾸지’에서 ‘미’는 ‘물’을 뜻하고, ‘꾸지’는 ‘구지’에서 나온 이름으로 충청도 사투리로 ‘물구덩이’ 또는 ‘못’의 의미를 지닌다. 진천군의 초평면과 문백면 경계에 ‘우담(牛潭)’이라는 못이 있는데, 이 못 때문에 나온 이름인 듯하다.
조치원읍에서 미호천을 따라 남쪽으로 5㎞ 내려간 곳에 있는 면이 남면(南面)이다. 거리상으로 조치원읍과는 불과 10리 안팎으로 떨어진 지역인데, 이곳 사람들은 일제 때부터 크게 발달한 조치원읍을 자주 왕래해 왔다. 장이나 학교가 모두 이곳에 있었기 때문.
이 면의 보통리(洑通里)는 본래 연기군 군내면의 지역으로, 마을 보(湺.웅덩이)가 있는 내가 지나기 때문에 붙은 이름으로 일제 때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근처의 ‘잣디(月里=월리)’라는 마을과 봉암리라는 마을의 일부를 병합해서 보통리라 해서 남면에 편입시킨 곳이다.
본래 연기군의 읍터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보통리 바로 남쪽의 남면 연기리(燕岐里)였다.
연기리에는 지금도 연기현 동헌의 터가 있다. 지금도 이곳엔 느티나무가 여러 그루 남아 있어서 옛 모습을 일부나마 보여 주고 있다. 그뿐 아니라 조선 태종 16년(1416)에 창건하였다는 연기 향교(鄕校)가 ‘향굣말(校村=교촌)’이라는 마을에 있다.
근처엔 또 연기현의 옥(獄)터가 있고, 객사(客舍)터도 있다. 이를 보아도 옛날 연기군의 중심지는 지금의 조치원이 아니라 남면의 보통리-연기리 일대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연기군의 남면 일대가 결국 새 행정 수도의 중심이 될 모양이다.
‘언제고 그렇게 될 곳’이란 옛 사람들의 생각은 결국 빗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