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화령 옛이름은 '물가의 큰 산'의 뜻인 '답달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55

화령 옛이름은 '물가의 큰 산'의 뜻인 '답달

'답'은 '닿음(접함)', '달'은 '산'의 옛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050700 산 기고 28매 땅기 월간산  백두대간 땅이름  `백두대간7 추풍령~화령재(8-9)


  '영남(嶺南)'이니 '영동(嶺東)'이니 하는 지금의 지역 이름들은 백두대간이 낳은 이름이라 할 수 있다. 또, 지금의 함경도 지방을 나타내는 '관북(關北)'이나 평안도 지방을 나타내는 '관서(關西)'라는 지역 이름도 백두대간의 철령(鐵嶺)을 기준으로 한 것이라 한다. 철령은 함경남도 안변 근처의 큰 고개.
  '영남'의 영(嶺)은 백두대간의 줄기 중에서 조령, 죽령 등의 고개를 말할 것이다.

 

□ 고려시대엔 상주가 '영남도'의 중심
  '영남'은 '고개 남쪽' 의미의 일반명사처럼 들리는 이름이 되어 버렸지만, 사실 이 이름은 꽤 오래 전에 하나의 도(道) 이름으로도 씌어 왔다.
  고려 성종 14년(995년), 오늘날의 도제(道制)를 최초로 실시하여 전국을 10도로 나누고 중앙 집권체제를 확립하여 지방장관인 절도사(節度使)를 파견하였다.
  당시, 백두대간 남쪽의 상주는 영남도(嶺南道)라 하여 오늘날의 경상도 12주 48현을 관할하였고, 경주는 영동도(嶺東道)라 하여 경남지역 9주 35현을, 진주는 산남도(山南道)라 하여 역시 경남지역 10주 37현을 소관하였다. 
  당시 전국 10도의 영역은 다음과 같았다.
  ① 관내도(關內道)-지금의 경기·황해도(개성이 중심)
  ② 중원도(中原道)-지금의 충청북도(충주가 중심)
  ③ 하남도(河南道)-지금의 충청남도(공주가 중심)
  ④ 강남도(江南道)-지금의 전라북도(전주가 중심)
  ⑤ 영남도(嶺南道)-지금의 경상북도 일부(상주가 중심)
  ⑥ 영동도(嶺東道)-지금의 경상남도 일부(경주가 중심)
  ⑦ 산남도(山南道)-지금의 경상남도 일부(진주가 중심)
  ⑧ 해양도(海陽道)-지금의 전라남도(광주가 중심)
  ⑨ 삭방도(朔方道)-지금의 강원·함경남도 일부(강릉이 중심)
  ⑩ 패서도(浿西道)-지금의 평안도(평양이 중심)
  따라서, 오늘날 경상도 지역을 영남지방이라고 부르는 것은 1천여 년 전 '영남도'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영남도'는 지금의 상주(尙州)를 중심으로 한 지금의 경북 지방 일대를 가리켰기에 고려시대엔 '영남'이라 하면 지금의 경상도 전체를 가리키기보다 주로 상주 일대를 가리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주가 고대와 중세에 상당히 비중 있는 고을이었다는 것은 지금의 경상도(慶尙道)란 이름이 경주(慶州)'와 '상주(尙州)'의 첫 음(音)을 따서 나온 것임을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고려 현종 3년(1012년), 상주에 안동 대도호부(大都護府)를 설치하여 경주와 진주 지역까지 관할하였던 것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 그 뒤, 안동대도호부는 경주로 옮기고, 안동에는 안무사(安撫使)를 설치하였다.
  본래 삼한(三韓) 시절에 사벌국(沙伐國)이라 했던 상주는 삼국·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에 이르기까지 단순히 하나의 고을 형태가 아닌 거의 작은 소국(小國)에 가까운 것이었다. 
  상주는 조선 태조 때 두어졌던 관찰영(觀察營)이 선조 14년(1596)에 대구로 옮겨지기 전까지 사실상 도(道)의 행정 중심지였다.

 

□ 백두대간의 넓은 지역을 껴안았던 화령 고을
  주(州) 설치 제도가 없어져 옛날과 달리 지금의 상주는 현재 여러 개의 고을(시·군)을 껴안고 있지 못하지만, 지금의 상주시 읍면의 이름들만 보아서도 옛날에 여러 고을이 합쳐진 지역이라는 것을 잘 알 수가 있다.
  상주시의 읍면 이름에서 '∼동면(∼東面), '∼서면(∼西面) 형식의 것이 많은 것은 지금의 상주시가 여러 고을을 껴안은 것임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동면', '서면' 하는 식의 이름은 어느 고을의 동쪽, 서쪽 지역임을 가리키는 까닭이다.
  상주시는 옛날 이 일대에 있었던 예닐곱 정도의 군현(郡縣)이 합해져 이루어졌는데, 합해진 각 군현의 이름이 그대로 상주 속의 읍면 이름으로 남거나 여기에 '동', '서' 등의 음절이 덧붙여져 방위식 면이름으로 바뀌었다.
  ·상주(尙州) 본고을→전 상주읍(尙州邑), 사벌면(沙伐面), 은척면(銀尺面. ※은척산 이름을 땀), 중동면(中東面), 내서면(內西面), 외서면(外西面), 외남면(外南面)
  ·공성현(功城面)→공성면(功城面)
  ·중모현(中牟縣)→모동면(牟東面), 모서면(牟西面) ※ '중모'의 '모(牟)가 바탕
  ·청리현(靑里縣)→청리면(靑里面)
  ·함창현(咸昌縣)→함창읍(咸昌邑), 공검면(恭儉面)(공갈못 이름을 땀)
  ·함창현의 이안부곡(利安部曲)→이안면(利安面)
  ·화령현(化寧縣)→화동면(化東面), 화서면(化西面), 화남면(化南面), 화북면(化北面) ※ '화령'의 '화(化)'가 바탕
  ·장천부곡(長川部曲)→낙동면(洛東面) ※ '낙동(洛東)'은 '가락의 동쪽'이란 뜻으로 상주의 옛이름
  6개의 행정동과 18개의 읍면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재의 상주시는 그 관할 안에서 이처럼 옛날에 포함했던 각 고을의 이름 흔적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화령재는 옛 화령현의 이름에서 나와
  상주 땅에 있는 화령재는 '화령(化寧)'이란 옛 지명 때문에 나온 것이다.
  백두대간 능선상에서 백학산과 봉황산 사이를 잇는 화령재는 비록 낮기는 하지만, 예부터 교통의 요지로 삼국시대에 신라와 백제를 이어주는 역할을 했고, 양국간의 치열한 싸움터이기도 했다.
  사실, 추풍령에서 속리산 입구인 비재까지는 백두대간에서 가장 산세가 약하고 높이가 낮은 구간이다. 몇몇 산을 빼고는 3∼400미터가 고작인 자그마한 산들. 따라서, 이 구간에 있는 화령재는 백두대간의 다른 고개들에 비하면 고개가 무척 낮은 편이다. '화령재, 해발320m'라고 하는 고갯마루의 표석이 백두대간 고개 이름 치고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기에 위치상으로 보면 그 비중은 대단한데….
  마루에 있는 화령정에 오르면 편액 대신 걸어 놓은 안내문을 통해 그 오랜 옛날 성읍국가 시절부터 삼국의 싸움, 고려와 조선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화령에 쌓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빽빽이 적어 놓은 한자가 그나마 뚜렷하지도 않아 읽기는 그리 쉽지 않다.
  화령재를 이 곳 사람들은 '화령잿말랑' 또는 '짓질재'라고도 한다.
  한자를 한글로 옮길 때, 아마 '영(寧)'자처럼 표기가 까다로운 것은 없을 것이다.
  이 글자는 원음은 '녕'이지만, 표기하는 낱말에 따라 '녕' 외에 '령'도 되고 '영'도 되므로 여간 주의가 따르지 않는다.
  '안녕(安寧)', '강녕(康寧)' 등에서는 음 그대로 '녕'이지만, '귀령(歸寧)', '재령(載寧)', '부령(富寧)' 등에서는 '령'이 된다. 또, 두음법칙에 따라 써야 하는 한자 표기 원칙상 이 글자가 앞에 나오는 낱말에서는 '영거(寧居)', '영릉(寧陵)' 등처럼 '영'이 된다. 지명의 영월(寧越), 영해(寧海), 영변(寧邊) 등도 마찬가지. 두음법칙이 무시되는 북한에서는 이들을 '녕월', '녕해', '녕변' 등으로 쓴다.
  옛날 '비사벌(비자화)'라고 했던 지금의 '昌寧'을 한글로 '창령'이라 쓰는 이가 있지만, 제대로 된 표기는 '창녕'이다. '녕'자 앞에 나오는 음절의 받침이 ㄴ이나 ㅇ일 때는 음 그대로 '녕'을 쓰게 되어 있는 원칙에 따른 것인데, 늘 사용하는 사람도 많이 헷갈린다.
  낱말에서야 국어 사전이라도 살펴 표기 방법을 원칙대로 따를 수 있겠지만, 잘 쓰지 않는 인명 표기에서는 더욱 어렵다.
  전직 장관의 이름인 '이어령(李御寧)'을 한자로만 적어 놓으면, '이어령'이 아닌 '이어녕'으로 써 놓는 실수를 낳을 수도 있다. 앞에 받침이 없는 글자가 있을 때는 '寧'을 '령'으로 적기로 한 원칙에 따라 여기서는 '령'이다. 백제의 25대 임금 이름 武寧王도 '무녕왕'이 아닌 '무령왕'이다. 조선 초 태종의 아들 讓寧大君, 忠寧大君을 한글로 '양녕대군', '충녕대군'이라 적지만, 孝寧大君은 '효령대군'으로, 같은 항렬로 들어간 '寧'임에도 한글 표기는 일치되지 않는다.
  갑자기 국어 공부를 하듯 엉뚱하게 이야기가 흘렀지만, 이것은 백두대간에 있는 한 지명 '화령재'란 이름에 관해서 먼저 알고 넘어가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 대단한 고을이었던 옛 화령군
  '화령재'에서의 '화령'만으로도 얼핏 고개 이름처럼 느껴지지만, '화령'의 한자는 '化嶺'도 '花嶺'도 아닌 '化寧'이다. 지금의 상주시 안의 화동(化東), 화서(化西), 화남(化南), 화북(化北) 등의 면이름들이 모두 이 '화령'이란 이름에 바탕을 둔다.
  <택리지>에서는 상주 이야기에서 한자가 다른 '화령' 관련 이야기가 나온다.
  '상주 서쪽은 화령(火嶺)이고, 화령 서쪽은 충청도 보은(報恩)이다. 화령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고향이며---' 
  화령현은 신라시대에는 답달비군(答達匕郡, 沓達匕郡)이라 하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화령군(化寧郡)으로 고치고, 곁의 도안현(道安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시대인 1018년(현종 9)에 화령군이 되어 상주목의 속읍이 되었고, 그 뒤 조선시대까지 직촌(直村)이었다.
  조선 중기에는 화령현으로 강등되어 또 상주목의 속현이 되었다.
  화령현은 그 넓이로 보아서는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었다.
  속리산(俗離山)에서 그 남쪽 백학산(白鶴山)까지 길게 이어진 백두대간 줄기 양쪽 지역을 이 고을이 위치하고 있었다.
  신라 경덕왕 이후부터 '화령'이라 했던 이 고을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중기까지 존속되어 오다가 상주에 합쳐지면서 면(面) 단위의 행정구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름 '화령'만큼은 일제의 한반도 찬탈 이전까지도 이 지역 사람들에게 깊이 입에 버린 지명이었다. 얼마나 지역이 넓었으면 이 고을이 상주 관내로 들어가 면(面)으로 될 때 여러 면으로 쪼개져 '화령의 어느 쪽 지역'이라는 식의 '화동(化東)', '화서(化西)', '화북(化北)' 등의 면이름이 되었을까.
  화령현의 중심지는 지금의 상주 화서면 면소재지인 신봉리(新鳳里)일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곳 화령장터엔 지금도 닷새마다 조촐하게게나마 장이 열리고 있는데, 장터 남쪽의 옛 다리인 화령교(化寧橋)는 전에는 화령장터를 찾는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잦던 곳이다.
  화령의 진산이라는 봉황산(鳳凰山)이 있는데, 이 산은 연산군 아들(중종)의 태(胎)를 묻었다 하여 태봉산(胎峯山. 胎封山)으로도 불린다. 그 근처 봉촌리에는 화령 향교터와 화령고성(化寧古城)이 있고, 하송리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 900~935)이 말년에 대궐을 짓고 살았다는 대궐터가 있다.
  옛날에는 보은에서 상주에 이르는 도로가 화령 고을의 중심을 지났다
  속리산 남쪽 백두대간 자락 사면에 위치한 화령은 이처럼 대단한 고을이었다.

 

□ 화령의 옛이름 답달은 '물가의 산'이란 뜻
  화령의 옛이름인 '답달'은 '닿은 산'의 뜻으로, 이 고을이 백두대간 서쪽 비탈에 위치하는 금강 상류 산간 분지에 있어 '물가에 접한(닿은) 산골'의 의미로 이 이름이 나왔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땅이름 중에 이와 유사한 연유('물가에 접함')로 의한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다사지현(多斯只縣)-하빈현(河濱縣): 지금의 대구 달성군 하빈면 ※ 닷재(닿재)
  ·진임성(津臨城)-임진현(臨津縣): 지금의 경기 파주 문산읍 임진리 ※나루닷재
  ·지답현(只沓縣)-기립현( 立縣): 지금의 경북 포항 남구 장기면 ※지닷골
  '답달'은 <삼국사기지리지> 등에 '답달비(答達匕, 沓達匕)'로 표기되었는데, 여기서 '비(匕)'는 그 뜻과 관계 없이 앞음절과 뒷음절 연결을 위한 촉음차(促音差)인 것으로 보인다.
  '답달'에서의 '달'이 '산(山)'의 옛말이란 것은 이미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터여서 구태여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따라서, '답달비'는 '닿음(臨.接)'의 뜻으로 새길 수 있는 '답'과 '산(달)'의 뜻인 '닯(달비)'의 말조각으로 나누어 해석함이 좋을 것이다.
  답(닿)+닯(닯이.달비) (※ '답'에서 말음 ㅂ은 복합어에서 흔히 나타나는 음 첨가.   좁쌀, 찹쌀, 입때, 접때)
  그렇다면, 이 '답달'이 어떻게 해서 그 뒤에 '화령'으로 옮겨갔을까?
정확히 알려면 물론 신라 경덕왕(景德王)을 불러 모셔야 알 수 있겠지만, 경덕왕이 당시에 개명한 전국의 많은 이름들의 예를 살펴보면 어렴풋이나마 그 연유를 짐작할 수가 있다.
  즉, 답달비의 '비(匕)'를 이와 비슷한 글자인 '화(化)'로 취하고, 그 뒤에 뜻이 좋은 한자인 '령(寧)'을 붙여 하나의 새 지명을 탄생시켰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寧'은 뜻으로 보아서는 '편안함'이지만, 이 글자는 그 음을 빌어 어조사로 쓰는 예가 많다. 그리고, '차라리', '어찌' 등의 뜻으로 새기기도 한다.   /// 글.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