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죽령'의 원이름 '대재'는 '닷재'의 변음일 듯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50

'죽령'의 원이름 '대재'는 '닷재'의 변음일 듯

 

'닷(닫)'은 '산'의 뜻인 '달'의 뿌리말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051200 산 기고 35매 땅기 월간산  백두대간 땅이름  저수재~죽령(13)

 

 


  소백초요 일령개 (小白 嶢一嶺開)
  도두비촉 흥유재 (到頭飛 興悠哉)
  계유북회 황강거 (溪流北會黃江去)
  산맥동차 벽해회 (山脈東遮碧海廻)
  곡리연광 의유사 (谷裏煙光疑有寺)
  안변추색 사등대 (雁邊秋色似登臺)
  귀편정지 단양군 (歸鞭正指丹陽郡)
  삼도운하 염염래 (三島雲霞  來 )
  <풀이>
  드높은 소백산에 한 재가 트였는데 
  당도하여 둘러보니 흥이 일어 도도하네
  시냇물은 북쪽으로 황강과 모여 흐르고
  산줄기는 동쪽으로 바다 가려 돌았구나
  골짝 안의 연기빛 절이 있나 의심되고
  기러기 나는 가을빛 이 몸이 누대 오른 듯
  돌아가는 발길은 단양고을 향하는데
  삼도의 구름 노을 천천히 다가오네
                   - 다산 정약용의 '죽령을 넘으며'[踰竹嶺] -


□ 길손들의 애환이 담긴 죽령
  영남대로상에 위치해 있는 죽령(竹嶺)은 예부터 교통의 요지였다. 그래서, 그 옛날 과것길에 오르는 예비 선비들의 짚신 자국들만큼이나 이 고개에는 많은 사연이 담겨 있다.
  이 고개는 특히 안동이나 영주쪽의 길손들의 발길이 잦았다. 경상도 하고도 인물 많이 나기로 유명했던 소백산 남쪽의 선비들. 이 고개를 넘으며 얼마나 생각들을 했고, 얼마나 많은 노래들을 흘려 놓았을까?
  조선 연산군에서 중종 때의 명신인 이현보(李賢輔)나 학자로서 널리 이름난 이퇴계(李退溪.) 등도 한양길을 오고갈 때는 이 고개를 자주 넘어 다녔다.
  이현보는 벼슬을 사직하고 돌아올 때 풍기군수 주세봉(周世鵬)이 술과 안주를 장만하여 이 고갯마루에서 마중하여 함께 회포를 풀었다고 한다. 이퇴계도 풍기군수로 있으면서 충청감사로 있는 그 중형 온계(溫溪)가 고향인 예안(지금은 안동 땅으로 들어간 옛 현)에 왕래할 때 이 고개 허리에 있는 촉령대(矗 臺)에서 마중하고 배웅하며 시주로 즐기기도 했다고 한다.
  <온계일고연보>(溫溪逸稿年譜)에는 촉령대 항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 대재죽령요원지하(臺在竹嶺腰院之下)
  호령분계처야(湖嶺分界處也) -
  즉, 죽령의 한 허리에 촉령대가 있고, 여기가 호남과 영남의 경계가 된다'는 내용이다.
  죽령 도계비에는 '영남의 관문 죽령', '경상북도', '여기까지 영주시입니다'라고 기록하였고 그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 소백산 허리, 구름도 쉬어 간다는 아흔아홉 굽이. 죽령은 영남과 기호를 넘나드는 길목 가운데서도 가장 유서 깊고 이름난 중요한 관문이다. 이 고개는 신라 아달라왕 5년(158년)에 신라 사람 죽죽(竹竹)이 길을 개설하였다 하여 '죽령'이라 불리어 왔으며 한때는 고구려와 국경이 되기도 하였다고 한다. 고려와 조선대에는 청운의 꿈을 안은 선비들의 과거 길이었고 온갖 문물을 나르던 보부상들과 나그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숱한 애환이 서려 있는 곳이다. -


 □ 죽죽이 길을 내어 '죽령'이라?
  흔히 '죽령'의 땅이름 유래를 설명할 때, '죽죽(竹竹)'이라는 인물을 들먹인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아달라왕 5년에 죽죽(竹竹)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인 죽죽사(竹竹祠)가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고개를 열었다는 '죽죽'이라는 인물은 누구일까? 어느 한 사이트에서 '죽죽'이라는 이름을 검색해 보았더니 '대야성전투'라는 제목이 나오고, 여기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 <대야성전투> 삼국시대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을 둘러싸고 벌어진 신라와 백제의 전투. 640년대에 들어와 신라에 대하여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 백제의 의자왕은 642년, 장군 윤충(允忠)에게 신라 서부지역의 요새인 대야성을 공격할 것을 명하였다. 백제의 공격을 받자, 대야성을 지키고 있던 김품석(金品釋)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사지(舍知) 검일(黔日)은 백제군과 내통하여 창고에 불을 질렀다. 이로 인해 성 안의 사기가 떨어지게 되고 마침내 백제에게 항복하였으나 사지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은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다. 또한 항복하러 성밖으로 나간 군사들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고, 사로잡힌 1천여 명은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천사(遷徙)되었다. 대야성전투의 패배로 수세에 처한 신라는 먼저 압량주(押梁州)를 설치하고 김유신(金庾信)으로 하여금 전열을 재정비케 하는 한편,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하여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648년 김유신은 대야성의 백제군사를 격파하는 등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대야성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이러한 과정에서 김유신과 김춘추가 중요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고, 이후 양자가 연합하여 형성한 세력하에 삼국통일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
  그러나, 대야성 전투에 등장하는 인물인 '죽죽'이 아닌, 이와 동명이인인 죽죽이 죽령이라는 고개를 열었다고 하는데, 여기서도 '글쎄?'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한 땅이름 관련 책에도 이 죽령이 '죽죽'이란 인물 때문에 나왔다는 설명을 붙였는데, 같은 책의 다른 부분의 설명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못박아 놓기도 해서 머리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그 원문.
  - 죽령(竹嶺) [죽령재, 대재]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단양과 경상 북도 영주군 사이에 있는 고개. 신라 제8대 아달라 이사금 5년(158)에 이 길을 열었음. 옛날 어느 도승이 이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았다 함.
  죽령(竹嶺) [죽령재, 대재]
  경상북도 산천
  영주군 풍기면 수철동과 단양군 대강면 용부원리 경계에 있는 재.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阿達羅尼部今) 5년(158)에 이 길을 열었음. 죽죽이 이 길을 냈다는 것은 잘못된 것임. 옛날 어느 도승이 이 재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 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았다 함. 부근에 죽령사(竹嶺寺)와 죽령봉수(竹嶺烽燧)의 봉홧둑이 있었음. -


□ '죽령(대재)'은 '닷재'에서 나왔을 듯
  죽령이 '대 죽(竹)'자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해서 '대(竹)'와 관련된 이름이라고 보기에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대나무는 이러한 높은 산간 지방에 많이 나는 식물은 아니다. 따라서, '이 일대에 대나무가 많아서--'라는 설명으로의 '죽령' 설명은 설득력이 너무도 없다. 또, 한 자료에서 보이는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서---'라는 전설 내용도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 또, '죽죽'이라는 사람이 길을 열었다고 해서 '죽령'이라고 했다는 것도 더 뚜렷한 어떤 자료의 보충 없이는 무조건 믿기가 쉽지 않다.
  '죽령'은 원래 '대재'였다. 즉, '죽령'이라는 이름은 '대재'의 한자식 의역이다.
  대(竹)+재(嶺) →죽령(竹嶺)
  그렇다면, '대재'의 '대'를 '대나무'로만 볼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땅이름에서의 '대'는 '대나무'가 아닌 경우가 무척 많고, 더구나 고개 이름에서의 대'는 거의 단순히 '산'의 의미가 들어간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땅이름들을 지역별로 조사해 보면 '죽(竹)'자가 들어간 것이 유달리 산지에 많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대재'라는 이름은 전국에 여러 곳 있는데, '한티'나 '큰재 또는 '머리재' 등이란 이름과 함께 쓰는 곳이 많은 것을 보면 여기서의 '대'가 '크다'의 의미도 가졌음을 짐작하 수 있다. 
  *경북 울진 근남면 수곡리의 대재(한티재)
  *전남 곡성 곡성읍 구원리의 대재
  *경남 의령 대의면 다사리의 대재(한티재, 대티, 머리재)
  *경북 영천 채신동의 대재
  *경남 고성 대가면 척정리의 대재(대티, 큰재)


□ '달'의 뿌리말은 '닫'
  땅이름 풀이를 어원적으로 하다 보면 더러는 곤혹스러운 때가 적지 않다. 간혹 어떤 큰 의미(역사나 전설적으로)를 가졌을 것 같은 이름이 어원적으로는 별 큰 의미가 없는 재미없는(?) 뜻으로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럴 때, 자유스럽게 움직여야 할 붓이 잠시 멈칫해지기도 한다.
  지금, 이 '대재'를 어원적으로 설명하는 데도 그러하다. '어느 고개를 넘는데 하도 힘들어서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았다'는데, 그게 아니라니?
  '대'의 원시 언어는 ' '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언어학자들은 우리의 언어가 대개 폐음절(閉音節)에서 개음절(開音節)로, 단음절(單音節)에서 다음절(多音節)로 변해 온 경향이 짙다고 설명한다.
  그러한 과정을 일부 말에서 생각해 보자
  *맏(말)=宗, 初 : 맏이, 마루(宗), 마리(머리), 모리(몰.모이>뫼.山)
  *숟(술)=雄, 峰 : 수(雄), 수리(峰)
  *갓(갓)=邊, 終 : 갓(가장자리), 끝, 곁, 가죽(거죽)
  *읻(잇)=繼, 連 : 이슴(이음), 이음매
  *돋(돗)=石 : 도끼, 돌(돌멩이)
  *삳(샅)=間 : 사이(새), 샅(사태), 사타구니
  같은 차원에서 '닫'이라는 뿌리말도 지금의 '달(산)', '들', '뜰', '따(地)' 등의 낱말들을 낳았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고 양주동(梁柱東) 언어학자는 <제왕운기>의 내용을 인용하여 '달(達)'을 지금의 '돌'이라는 낱말과도 연결지어 설명해 놓고 있다.
  - 달(達)'은 또 '돌'과도 통음된다. 부석사(浮石寺, 션돌뎔)을 '선달사(善達寺)'라 함은 그 예증이다. -
  '달'이 '대'로 옮겨가기까지의 음운 변화 과정을 설명하려면 많이 복잡해지지만, '한밝달'의 '밝달(박달)'이 '배달'로 된 것과 견주어 보면 그 유추가 그리 어렵지는 않다.
   달>밝달>바달>배달
   재>닷재(달재)>다재>대재
  따라서, '대재'는 거슬러 올라가면 '닷재(달재)'에 도달하게 되며, 더 옛날로 올라가면 그 뿌리말 ' '을 구할 수 있다. 다만, 여기서 뿌리말 ' '이 원래 어떤 의미를 지녔을 것인가 하는 것인데, 현재 이 말의 후손들(?)인 숱한 낱말들을 살펴보면, 이 말이 '높음'이거나 '머리'의 뜻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대재'는 원래 '큰 재'의 의미를 지닌 '닷재'였을 것이다.


□ 숱한 애환이 깃든 죽령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 충북 단양군 대강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689미터, 백두대간의 한 허리 도솔봉과 북쪽 연화봉과의 안부에 있는 '죽령 옛길'은 무려 2천여 년의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일찍이 영남좌도의 크고 작은 고을들은 모두 소백산 언저리에 기대어 죽령으로 한양길을 열었다.
  죽령은 삼국 결사쟁패(決死爭覇)의 접경이었다.
한때 백제의 손길이 닿기도 했고,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땅이었다가 나중에는 진흥왕 대 신라의 영토가 되기도 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때인 서기 470년경으로, 그 후 신라 진흥왕 12년(551년)에 신라에 복속되자, 영양왕 1년(590년) 고구려 명장 온달(溫達) 장군이 왕께 자청하여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는 말을 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있다. 이와 연관되는 온달산성이 소백산 북쪽 자락에 있다.
  누군가는 재미있는 말로 후백제의 견훤 이야기도 했다.
  - 죽령과 조령 이남은 후백제를 세운 견훤의 고향이었으니 거기 가서 견훤의 흉을 보다가는 찬물 한 사발도 못 얻어 마신다. -
  <고려사>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했던 고려 말,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왜구가 이 고개를 각각 넘어 왔다고 적혀 있다.
  조선 인조 때의 청백리 김시양(金時讓. 1581~1643)이 지은 <하담파적록>에는 임진왜란과 관련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 동양위 신익성(申翊聖)은 상촌 신흠(申欽)의 아들이다. 글씨를 잘 쓰고 글을 잘 지어 문장으로 자허(自許)하였다. 신미년에 그의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의) <상촌집>을 간행하여 배포하였다. 그 속의 <동정록>에, '임진년에 적이 조령, 죽령 두 재로부터 올라왔다.'고 하였다. (중략) 내가 동양위에게 말하기를, '임진년에 왜적이 조령과 추풍령을 거쳐 올라왔고, 죽령만은 적의 발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른 일이 없었는데 <동정록>에는 죽령으로 올라왔다고 말하였으며, (중략)' 하였더니 동양위는 얼굴빛이 변하여 돌아갔다. - (대동야승. 제72권)
  일제 말이던 1941년, 충북 단양의 대강면 죽령역에서 경북 영주의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연결되는 4500m의 죽령터널이 뚫려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면서 죽령 북쪽 단양군 일대의 지하자원이 개발되기 시작하였다.
  경상도 동북지방(영남 내륙)의 고을 사람들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 곳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과것길 선비와 공무를 띤 관원들은 물론, 온갖 물산이 보부상들의 등에 업혀 이 고갯길을 넘나들었다. 그래서 고갯길 양쪽의 단양과 청풍, 영주와 풍기 등지에는 길손들의 숙식을 위한  객점, 마방(馬房)들이 들어섰고, 이들 장터는 늘 성시를 이루곤 했단다.
  특히, 이 길은 추풍령, 문경새재와 더불어 삼국시대 군사적 요충지이자, 영남권과 기호지방(畿湖地方)을 연결하는 3대 관문의 하나로 여겨져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길이다.


□ 오늘 속에서 '죽령'의 옛날을 되살리다
  근대에 들어 교통수단의 발달로 고개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길손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수십년 동안 죽려의 옛 고갯길은 숲덩굴에 묻혀 있거나 상처를 입어야 했다. 그런 데다가 길이 2001년 터널이 뚫리면서 줄잡아 2천여 년 유구한 세월에 걸쳐 영남 내륙을 잇는 동맥의 역할을 해온 이 고갯길은 더욱 호젓해졌다.
  그러나, 최근 영주시청과 풍기읍이 고갯길을 복원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다시 모으고 있다.
  즉, 영주시에서 옛 자취를 되살려 보존하자는 뜻에서 1999년 5월 이 길(2.5km)을 다시 뚫었고, 죽령 옛길 안내판(희방사역, 죽령고개)과 옛길 곳곳에 전설 안내판을 설치한 것이다. 이 곳을 찾는 여행객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동시에 가족단위의 새로운 산책코스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수많은 전설과 이야기가 서려 있는 죽령 옛길에는 선인들의 발자취를 느껴볼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 많다.
  삼국시대 이래 사신들로부터,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 남정(南征)길의 고려 태조 왕건, 안향, 정몽주, 정도전, 옛 임금을 복위코자 목숨 바친 금성대군, 왜적 척살을 위해 몸바친 의병대장 유인석, 이강년 등...
  대재(죽령)에 오르면 지금도 우리의 역사를 이끌어 간 많은 선인들의 숨결을 만날 수 있다. 죽령은 그 이름처럼 큰 이야기들을 가득 안은 큰 고개이다. /// 글.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