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무풍(茂豊)과 무산(茂山)은 같은 뜻의 이름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31

'무풍'은 '산이 많고 높음'의 뜻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무주는 북한의 삼수갑산(三水甲山)과 함께 남한 오지(奧地)의 대명사다.
  무주라는 지명은 속세와 동떨어진 곳으로 인식돼 왔기에 세상 돌아가는 일에 어두운 사람을 두고 "무주 구천동에서 왔나?"라는 말을 많이 한다.
  '무주(茂朱)'는 '무풍(茂豊)'과 '주계(朱溪)'에서 한 글자씩 취해 만들어진 이름.
  무풍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 16년(757) 때 무풍현으로 고쳐지고, 나중에 그 옆의 주계현(朱溪縣)과 합해 '무주군(茂朱郡)이 되어 수백 년 동안 고을 형태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작지만 당당한 한 고을이었던 무산현 지역은 지금은 전북 무주군의 한 면이름(무풍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무풍과 주계가 합쳐져 무풍이 되고
  무주 하고도 무풍은 그야말로 심심산골.
  무풍은 백두대간의 한 자락이 덕유산과 삼도봉 사이에서 활 모양으로 휘어 돌며 싸안은 면(面) 단위의 산골이지만, 그래도 옛날에는 당당히 사또(현감)가 다스렸던 하나의 행정 지역이었다.
  무풍면의 중심은 옛 무풍현의 관청이 있던 현내리(縣內里). 그래서, 이름도 '현(縣)의 중심(안쪽)'이란 뜻의 '현내'이다. 신라 때 이 곳 거문들 자리에 때 치소(治所)를 설치하고, 돌성을 쌓아 무산현(茂山縣)이라 했다. 지금 근처에 무풍 고성지(古城地)가 남아 있으니, 이것이 바로 그 옛날의 무산성(茂山城).
  그러나, 무산(茂山)은 한 고을을 형성하기에는 그 영역이 너무 좁았음인가, 인접한 주계(朱溪) 고을과 합해 '무주'라는 새 고을을 태동시킨다. 
  신라 땅에 속했던 무산현은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진 후, 개령군(현 김천군 개령면)에 붙이었다가 고려 명종 6년(1176)에 감무를 두어서 주계현을 겸하여 다스렸다.
  주계현 지역은 본래 백제의 적천현(赤川縣)이었다. 신라에서 단천(丹川)으로 고쳐서 진례군(현 금산)에 붙였다가, 고려 때 주계로 고친 것이다. 고려 명종 6년(1176) 무풍 감무가 겸하여 다스렸고, 공양왕 3년(1391)에 무풍과 주계를 병합하여 무주가 되었다. 조선 3대 태종 14년(1414)에 현청을 주계에 두고 현감이 이 곳에서 고을을 다스렸다.
  무풍(무산)과 주계는 무주라는 한 고을을 형성했지만, 삼국시대엔 엄연히 다른 행정구역이었다. 신라와 백제의 경계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을 경계로 하여 동쪽은 신라의 무풍현, 서쪽은 백제의 주계현이었다. 즉, 통문을 경계로 한 동·서 두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고려시대에 이르기까지 판도와 문물이 다른 지역. 그래서, 6백년이 지난 지금도 통문을 경계로 언어·풍습 등에 현격한 차이가 있고, 사투리만으로도 두 지방 사람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이다.
  주계는 무풍보다는 많이 작아 변천되는 세월 속에 신라와 백제의 영역 싸움에 시달림을 받아오다가 결국 옆의 고을(무풍)에 합쳐져 사라진 고을. 이 지역에서 이제 '주계'라는 지명은 영원히 사라져 버렸고, 겨우 우리 나라 성씨들의 본관에서 '주계박씨'라는 것이 확인될 뿐이다.

 

□ 무풍(茂豊)과 무산(茂山)은 같은 뜻의 이름
  삼국시대에 무산현으로 불렸던 이 곳은 산국 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에 이르러선 무풍현으로 바뀐다.
  경덕왕 때는 전국의 땅이름을 일제히 바꾸었는데, 바꾸더라도 원래의 이름이 크게 손상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바꾼 것이 많아 그나마 다행이다.
  '무풍'도 '무산'이란 이름에서 그 뜻을 그대로 가져왔다.
  두 지명에서 '무'는 같은 글자이므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문제는 '산'과 '풍'인데 이 두 글자가 어떻게 대역이 될까?
  '무풍(茂豊)'에서의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만 보면 '무산(茂山)'과의 대역이 어려워지고 만다.
  학자들은 여기서의 '산'과 '풍'을 똑같은 뜻으로 풀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의 연구>(신태현 저)라는 책에서도 이를 설명해 놓고 있다.
  "무산(茂山). 무(茂)의 훈은 '성'. 산(山)의 훈은 '뫼'. 무산(茂山)을 '무풍(茂豊)'으로 개명한 것은 '풍(豊)'이 '풍(酉豊)'의 약자로 그 훈이 '술'이므로 '풍(豊)'으로써 '수리(봉우리)'에 훈차한 것이다. 따라서, '무산'이나 '무풍'은 '성뫼'가 그 원이름이다."
  즉, '풍'을 '풍성함'의 뜻으로 보지 말고, '산(봉우리)'이란 뜻의 '수리'로 보라는 뜻이다.
  '성한뫼'에서 '성한'은 '성하다(많다)'의 뜻임은 말할 것도 없다. 즉, '높고 많은'의 의미일 것인데, 지금의 무풍 지역으로 보면 그 지형상 딱 어울리는 땅이름이 아닐 수 없다.

 

□ 빼재는 '툭 불거져 나온 산'의 뜻
  전국에는 빼재라고 이름붙여진 산(또는 고개)이 여러 곳에 있다.
  · 경기 가평 하면 신상리
  · 경남 거창 고제면 개명리
  · 전북 완주 운주면 구제리
  · 충남 논산 양촌면 임화리
  · 충남 서산 부석면 강수리 / 인지면 화수리

  전북 무주의 백두대간 중에 있는 빼재는 한자명으로 '수령(秀嶺)'으로 나온다. '빼'가 '수(秀)로, '재'가 '령(嶺)'으로 대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곳의 빼재는 '수령' 외에도 '수현(秀峴) '수티(秀峙)' 등으로 나온다.
  여기서 앞음절 '빼'는 어떤 뜻일까?
  한자에서 '수(秀)'로 의역했다고 해서 '빼어남'의 뜻을 가진 것일까?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
  우리말의 '빼다'라는 말을 먼저 생각해 보자.
  국어 사전에서는 '빼다'의 뜻을 여러 가지로 풀고 있는데, 그 중에서 '끼여 있는 물건을 밖으로 나오게 하다'와 '빠져나오게 하다'를 관련 풀이로 잡아 볼 수 있다.
'빼재'가 '빼다'의 뜻을 포함한 것이라면 길게 이어진 산줄기에서 하늘로 툭 불거진 산의 뜻이 아닐까 한다.


  '재'는 '고개'로만 보지 말고, '산(山)'으로도 보아야 한다.
   동창이 발갓나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쇼칠 아해는 여태 아니 니럿나냐.
   재 너머 사래 긴 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재 너머에 있는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고 하면서, 주인은 일하는 아이를 일어나라고 재촉을 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인 남구만(南九萬)의 시조이다.
  재 너머.
  여기서의 '재'도 고개이다. 이 '재'는 고개 이름에서 접미사처럼 붙어 '새'(鳥嶺)', '대재(竹嶺)', '싸리재(축杻嶺)' 등 많은 땅이름을 퍼뜨려 놓았다.
  원래 '산(山)'을 뜻하던 말이었던 '재'는 처음에는 '잣'이었다. 그러한 흔적은 옛 문헌에 잘 나타난다.
  '마슬히어나 자시어나'(마을이거나 산이거나)<석보상절>(六,40)
  이 '잣'은 '성(成)'의 뜻으로도 옮겨갔다.
  '성(城)'은 자시라.'<월인석보>(一,6)
  '외로왼 자새 믌기운이 어득도다.'(孤城水氣昏)<두시언해>(三,28)
  이 '잣'은 뒤에 '자'로 옮겨가고 이것의 음이 변해 다시 '재'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잣→자→재
  즉, '잣'과 '재'의 중간 과정이 '자'인데, 17세기 후반에 나온 문헌 등을 보면 그것이 잘 나타난다.
  '경도(京都) 자안(城內)'<박통사언해> (중간본 上,54)
  그러나, 그렇다고 '재'란 말이 옛날에 전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앞의 시조에서 나온 바와 같이 '재 너머  래 긴 밧츨   '처럼 '재'는 옛날에도 씌었다. 다른 문헌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재나려 티샤 두갈히 것그니'(재를 내려와 쳐서 두 칼에 꺾으니)<용비어천가>(36)

  지금의 말에 '자드락'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나즈막한 산기슭의 경사진 땅'을 말하는데, 이 말도 '산(山)'의 옛말인 '잣(잗)'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 자드락에 나 있는 길을 '자드락길'이라 하는데, 이 말은 '산비탈길' 또는 '산기슭길'과 비슷한 뜻을 지닌다. 그러나, 지금은 '자드락'이나 '자드락길'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별로 볼 수가 없다.
  전국에는 '잣메'라는 땅이름이 많다. 이 땅이름은 '산(山)'이란 뜻의 말이 둘 겹쳐 이루어진 말이다. 즉, '잣'도 산이고 '메'도 산이다.
  '잣고개'라는 이름은 더욱 많다. 이 땅이름은 한자로 대개 '백현(栢峴)'이란 땅이름을 달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이러한 이름은 '잣나무가 많은 고개'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가 않은 것이 많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잣고개'에서 '잣'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산(山)'이기 때문에, 이 이름은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의 뜻을 지닌다.
  '잣골'의 '잣'도 마찬가지.
  이 이름은 한자로 '척동(尺洞)', '백동(栢洞)' 등의 이름으로 나와 있으나, 그 한자의 '자(尺)'나 '잣(栢)'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수가 많다. 즉, '잣골' 중에는 '산골짜기' 또는 '산골말'의 뜻으로 붙여진 것이 아주 많다. 

 

□ 우두령은 '쇠머리재'를 한자로 옮긴 것
  빼재에서 북동쪽으로 대간 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삼봉산, 도마재, 삼도봉, 덕산재 등을 거쳐 충북 영동군 용화면과의 경계에서 불쑥 솟구친 산인 우두령(牛頭嶺) 즉 쇠머리재를 만난다.
  '쇠머리재'나 '쇠머리산'으로 불리는 땅이름은 이 곳뿐 아니라 전국 여러 곳에 있다.
  · 경기 양평 지주면과 여주군 대신면, 북내면 경계
  · 경기 파주 광탄면 방축리
  · 경북 김천 대덕면 대리
  · 경북 상주 내서면 고곡리와 서만리, 서원리 경계
  · 전남 구례 간전면 흥대리
  · 전남 순천시 낙안면 상송리
  · 제주 북제주 구좌읍 연평리
  · 충남 홍성 서부면 양곡리


  · 충남 논산 연산면과 부적면 사이(고려 광종 때 은진미륵을 이 산에 있는 돌로 만들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대개 한자로 '우두령(牛頭嶺)', 우두치(牛頭峙)', '우두산(牛頭山)' '우두악(牛頭岳)' 등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그리고, 그 풀이를 대개 '산(고개)'의 모양이 쇠머리를 닮아서'라고 해 놓고 있다.
  산머리나 고개 모양이 어떻게 생겼기에 소의 머리 모양이라고 할까? 얼른 쉽게 그것이 머리에 형상화되질 않는다.
  그래서, '쇠머리'의 '쇠'를 '새'의 전음(轉音)으로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것 역시 완전한 정답이라고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단, '머리'를 '모리'로 보면 이것이 원래 '산'의 뜻이기에 '쇠머리'는 '쇠머리'를 '새모리', 즉 '사이에 있는 산'의 뜻으로 풀어 볼 수는 있다.
  어떻든, 백두대간 중의 쇠머리는 오늘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등을 번갈아 돌아보면서 "우머어, 우머어--" 외쳐대며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몸(산줄기)에 제발 흠집을 내지 말아 달라 한다.  ///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http://www.travelevent.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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