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소백산-태백산-장백산-함박산 등의 '백', 박'도 한 뿌리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40

백산과 밝산은 같은 이름


소백산-태백산-장백산-함박산 등의 '백', 박'도 한 뿌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060100 산 기고 50매 땅기 월간산  백두대간 땅이름  죽령~고치령(13-14)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 二白飛騰脊勢强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 神龍於此地中藏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 溪通北地趨黃澗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쌌네 / 山出西枝繞赤裳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았다만 / 每向高峯增塹壘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느 누가 안단 말고 / 誰知平陸是關防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 淸州大野開千里
  추풍령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 一據秋風便
   -다산시문집


□ 소백산과 태백산을 이백(二白)으로 풀어
  옛 사람들은 소백산과 태백산을 한 형제산으로 본 듯하다. 아니, 두 덩어리를 묶어 '이백(二白)'이라 하여 하나의 커다란 산무리로 본 것도 같다.
  이백은 동남방으로 달려가 있어 / 二白馳巽維
  형세가 자루 연한 쇠뇌 같으며 / 勢若連臂弩
 -다산시문집 귀전시초(歸田詩草) 일부
  이백(二白)의 산세가 강하다는 뜻의, 다산의 이 싯구는 소백과 태백을 별개의 산무리로 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1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기를, '문경(聞慶) 북쪽 새재 동편에 이름이 어류(御留)라는 산성(山城)이 하나 있는데 혹자의 말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규모는 남한산성의 10분의 9 정도이나 험준하기로는 남한산성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 속에는 인구 4~5만 또는 가구수 1~2만 호가 들어설 수 있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과 연결되고 북으로는 월악산(月嶽山), 서쪽으로는 화산(華山), 속리산(俗離山), 덕유산(德裕山), 지리산(智異山)과 연접해 있어 성을 쌓고 관방(關防)으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도신(道臣)과 비국(備局)에 명하여 승군을 모집해 절을 짓게 하고 서서히 성 쌓을 대책을 논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국조보감 제36권 인조조 (무인, 1638)
  옛 문헌들을 보면 이처럼 태백산이 나오는 곳에 소백산이 따라 나오고, 반대로 소백산이 나오는 곳에 태백산이 따라 나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동문선 제69권 백문보(白文寶)에도 태백산과 소백산을 묶어서 서술한 부분이 보인다
  '신축년(공민왕 10년) 11월에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처음 충광(忠廣)에서 고개를 넘었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난리를 당해 갈팡질팡하여 놀란 노루와 엎드린 토끼처럼 어찌할 줄을 몰라 명령하여도 정돈되지 않으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걱정하였다. 고개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푸르고 아득하여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지른 것 같은 것이 경상도 일대이며, 고개에서 북쪽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높이 솟고, 그 남쪽으로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州)가 있는데, 복주가 큰 진영(鎭營)이었다.'
  특히, 정약용은 자신의 글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는 일 별로 없었다.
  '영남성-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이다. 이 도에 황수(潢水: 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 
 -경세유표 제3권
  '영남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한 데로 모이고 구역은 딴 판국으로 생겼다. 대소백(大小白)으로부터 남쪽 두류산(頭流山)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한계를 이루어 놓았으니, 하늘 뜻이 우리 나라 보장(保障)을 이렇게 정해 준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
 -성호사설 경사문(經史門)
  즉, '소백산'과 '태백산'은 함께 '백산(백산)'으로 묶어 말할 수 있으며, 앞음절 '태(태)'와 '소(소)'는 단순히 크기에 따라 구분해 붙인 것임을 알 수가 있다.

 

□ 소백산 주위는 온통 볼거리
  겨울철이면 하얀 눈을 머리에 이어 소백산(小白山)이라 한다던가? 거느린 국망봉, 비로봉, 연화봉, 도솔봉 등 많은 영봉들이 누가 머리가 더 흰가 내기라도 하듯 흰 눈을 덮어쓰고 '밝음'을 자랑한다.
  죽계구곡과 연화봉에서 이어진 희방계곡, 북으로 흐르는 계곡들이 단양팔경의 절경을 이루고, 계곡의 암벽 사이로 희방폭포를 비롯한 많은 폭포의 힘찬 물줄기를 연출하며 소백산의 덩어리는 많은 산사람들을 불러낸다. 특히, 겨울이면 눈꽃의 환상적인 자태가 등산인들의 발길을 모은다.
  비로봉 서북쪽 기슭의 주목군락(천연기념물 244호)도 장관이다. 1만여 평 산자락에 자생하는 수백년 수령의 주목 수천 그루가 한국산 에델바이스인 솜다리 군락을 이루어 놓고 있는 것이다. 충북의 단양쪽으로는 온달산성과 온달동굴 등 유적지도 많아 답사 여행지로도 제격이다.
  천년 고찰을 자락에 품고 있는 한국 불교의 성지이기도 한 소백산. 국망봉 아래 초암사, 비로봉 아래 비로사, 연화봉 아래 희방사, 산 동쪽의 부석사, 북쪽의 구인사 등 많은 절을 거느리고 있다. .
  특히, 구인사는 천태종의 본산으로 1945년에 개창되었고, 높이 33m에 이르는 5층의 대법당을 비롯 연건평 3,000평이 넘는 대규모의 사찰이다.
  소백산은 예부터 수도하거나 독서하기 더 없이 좋은 산이었던 듯싶다.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 記言)에는 허암(虛庵)의 사적이 실려 있는데, 이 곳에서 글을 읽은 것으로 나온다. 주역을 읽던 중에 있었던 일화가 여기 실려 있다.
  '혹 전해지기는, 가정(嘉靖) 연간에 도수(陶 ) 이선생(李先生) 이황(李滉)이 소백산에서 주역(周易)을 읽는데, 어느 노승이 구두(句讀)를 정정해 주는 것이 매우 좋았다. 선생은 허암(虛庵)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묻기를,
  “스님도 《주역》을 압니까?”
  하였으나 사절하고 답하지 않았다. 또 묻기를,
  “스님은 정허암(鄭虛庵)을 아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허암이 누구입니까?”
  하였다. 선생이 사실을 말하니 그는 말하기를,
  “그렇군요. 나는 일찍이 그의 성명을 들었으며 대략 그 사람됨도 압니다.”
  하므로, 선생이,
  “세상도 이미 바뀌었고 금령(禁令)도 풀렸는데, 허암이 나오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이오?”
  하니, 노승이 말하기를,
  “그 사람은 도망하여 어머니의 상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불효이고, 임금을 섬기다 임금의 명을 무시하였으니 불충입니다. 어찌 불충-불효한 자가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선생은 마음속으로 이가 바로 허암일 것이라 생각하고 후한 예우를 하려고 하니, 그 중은 일어나 갔는데, 간 곳은 알지 못했다 한다.
  이제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기사를 보니, 허암의 일이 실려 있는데 역시 사실을 말한 것이 이와 같았다.
  아, 그 마음씨와 사적을 살펴보니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게 한다. 이같은 사람은 옛날 이른바 청사(淸士)인 것이다. 세변(世變)을 당하여 세상을 피하고 종적을 감추어 몸을 마치되 후회하지 않았으며, 특히 그 행실이 뛰어나고 더욱 기특하였다. 저서가 있어 세상에 전하는데 청고(淸苦)하여 속세를 끊은 것은 그 글도 또한 마찬가지다.'


□ 영남에 인(仁)의 덕을 안긴 두 백산
  <성호사설> 천지문(天地門)에 보면 백두정간(白頭正幹)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산세와 인물을 관련지어 서술한 부분이 주목을 끈다.
  '백두산은 우리 나라 산맥의 조종이다. 철령(鐵嶺)에서부터 서쪽으로 뻗은 여러 산맥이 모두 서남(西南)쪽으로 줄달음쳤다. 철령(鐵嶺)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서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본줄기이고 그 중간에 있는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갔으니, 이것은 풍수학에서 말하는, '버들가지[楊柳枝]'라는 것이다. 그들의 설명에 의하면, "오동나무 잎에는 반쪽 씨가 달리고, 버들가지 끝에는 알맹이가 맺는다."고 하였으니, 그 알맹이의 위치는 영남 지방에 해당될 것이다. 아마도 이것은 안동(安東)과 예안(禮安) 사이를 벗어나지 않을 듯하다. 태백산-소백산 이상의 산세가 이러하므로 물이 모두 여러 갈래로 갈라져 흐르는 영남지방만은 동래(東萊)와 김해(金海)를 좌우(左右)로 싸고돌아서 문막이가 되었다. 이것은 곧 산이 끝난 곳에 물이 합류된 형국으로, 거칠고 사나운 기운이 흔적 없이 제거된 것이다. 왼쪽으로는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산의 큰 산맥과 더불어 그 출발점과 종착점을 같이하였다. (중략) 퇴계(退溪)가 태백산과 소백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 나라 유학자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그 계통을 받은 인물들이 깊이가 있으며 빛을 발하여 예의가 있고 겸손하며 문학이 찬란하여 수사(洙泗)의 유풍을 방불케 하였고,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출생하여 우리 나라에서 기개와 절조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 후계자들은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며 정의를 사랑하고 생명을 가볍게 여기어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아니하였으며 위험이 닥쳐온다 하여 지조를 변하지 아니하여 독립적 지조를 가졌다. 이것은 영남 북부와 남부의 다른 점이다. 대체로 그 일직선의 큰 산맥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에 이름을 붙인 것도 의미가 있었던 듯하며 인물이 산출된 것으로 보아도 이 지역이 인물의 창고라 할 수 있다. 결국 국가에서 의존할 수 있는 힘을 다른 데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위에서 수사(洙泗). 즉 수(洙)와 사(泗)는 모두 노(魯)나라의 물 이름. 수사는 곧 공자와 그 제자들이 출생한 곳이라는 뜻
  결국, 소백산과 태백산은 영남 안팎에 기(氣)를 안겨 주어 큰 인물들을 배출케 했다는 것이다. 이백(二白)이 백두대간 중에서도 그 어느 산보다 정신적 큰 빛을 발하는 곳으로 여겨온 점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익(李益)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중세 이후에는 퇴계(退溪)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났고, 남명(南冥)이 두류산(頭流山) 동쪽에서 태어났다. 모두 경상도의 땅인데, 북도에서는 인(仁)을 숭상하였고 남도에서는 의(義)를 앞세워 유교의 감화와 기개를 숭상한 것이 넓은 바다와 높은 산과 같게 되었다.'고 했는데, 이로 보면 소백산은 영남인들에게 인(仁)의 덕을 안겨 준 산으로 여겨 온 듯하다.

 

□ 동명(東明)은 '새밝'의 뜻
  소백산이 겨울이면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백(白)'을 무조건 '희다'라는 뜻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땅이름(특히 산이름)에서는 그런 뜻으로 붙여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白'이라는 글자의 상형문자 형태로 보게 되면 이 글자는 엄지손가락 그림에 도달하게 된다. '엄지'는 바로 '으뜸'을 말하며, 이것은 바로 '높음'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백'은 지명에서 '으뜸(주산)'이나 '높음'의 뜻을 갖춘 것이 많고, '백산(白山)'이란 의미도 그런 면으로 주로 이해하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白'이 '밝음'의 '밝(븕)'의 음차로 많은 이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삼국지의 동이전(東夷傳)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마을 남녀들이 밤에 모여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중행사(國中行事)를 벌였는데,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후한서(後漢書)의 동이전에도 "10월에 제천 의식을 갖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창악(唱樂)을 하였고, 귀신. 영성. 사직에 제사하기를 즐겼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더라"고 하였다.
  상고시대 부족들의 종교와 예술 생활을 종합한 제정일치(祭政一致)의 한 본보기인 이 제천 의식은 고려시대에 계승되어 팔관회(八關會)의 의식이 되었다.
  동맹은 동명(東明)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나라일을 의논하고, 그들의 시조인 주몽신(朱蒙神), 즉 동명신(東明神)과 그의 생모인 하백녀(河伯女)를 제사지내는 큰 제천 행사였다. 또, 이 의식은 풍년을 기원하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농제(農祭)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제사를 행하는 날에는 남녀노소가 한 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춤추는 것으로 날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니, 얼마나 큰 잔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맹이라는 행사 이름이다. 이 이름은 '새븕'서 나온 말로 보이는데, '새(새)'는 동쪽을 뜻하여 동(東), '븕'은, 밝음을 뜻하여 맹(盟)을 취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제천행사의 지향인 동명성왕의 동명(東明)도 그 이름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학자들은 동맹에서 이어져 내린 '팔관회'란 이름도 이에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팔관회는 불교의 팔관(八關)과 일치되었지만, 그 원뜻은 '발 '으로, '밝다'의 뿌리말인 '발(븕)'에서 나온 말이며, '새븕'과 그 연원을 같이 하고 있다고 양주동(梁柱東) 학자도 말했다. 즉, 팔관은 '발간(븕 )'에서 음을 따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 발기예 나귀 타 나아' (새벽에 나귀타고 나가)
 -두시언해(8:32)
  여기서 ' 발기'는 '갓 밝이'로, 바로 '갓(新) 밝은 때'임을 가리킨다. '새벽'이란 말도 원래는 '새로 밝음'의 뜻인 '새븕'에서 나온 말이고 보면 결국은 같은 뜻에서 출발한 말인 것이다.
<삼국유사> 제4권 원효(元曉)조에 보면, '원효'가 '새밝'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임을 알게 된다.
  '원효가 태어난 곳의 이름이 불지(佛地)이며, 절을 초개(初開)라 하고 자칭 원효라 한 것도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뜻이 또한 우리말이니, 당시 사람이 해가 돋는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
 -삼국유사(제4권 '원효'조)
  원(元)은 '시작', '처음'임을 나타내고, 효(曉)는 '밝음'을 나타내니, '원효'는 '새밝'의 뜻이다. 이 '새밝'은 그가 태어난 '불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삼국유사>에는 잘 나타내고 있다.
  '잉피공(仍皮公)의 아들 담내내말(談 乃末)은 압량군 남쪽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 사라수(裟羅樹) 밑에서 아기(원효)를 낳았다. 그 마을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弗等乙村)이라 한다'  
 -삼국유사(제4권 원효조)
  양주동은 '불지'나 '발지'가 '밝이'의 뜻인 '발기'인 원음 '발디'의 한자 표기로 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원효' 외에도 '해밝이'에 해당하는 '희명(希明)', '달밝이'에 해당하는 '월명(月明)' 등 '밝이'와 관련된 이름이 나온다. 또, 삼국사기에도 '밝이'를 한자로 취음한 '발기(拔奇)'라는 이름이 있다.
  '새발 발긔  래 밤 드리 노니다가'  (서울의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놀며 다니다가)
 -처용가(處容歌)
  여기서 '발긔달(明期月)'은 바로 '밝은 달'을 뜻하며, '밝이'가 옛노래에서도 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 '박'과 '백'은 '밝'의 음차인 경우 많아
  '밝이'의 뿌리말인 '븕'은 '광명(光明)'이나 '나라땅'의 의미로 씌어 곳곳에 많은 지명을 낳았다. '부리', '부루', '비로', '비', '복', '발', '바라', '보름' 등의 음이 들어간 지명 중에는 이 '븕'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무척 많다.
  '븕고개(赤峴)'에서 변한 '배오개(梨峴)', '발내(列水)'에서 변한 '배내[뱃내:浿水] '한븕'에서 나온 '한배(長背,長非)' 등도 모두 같은 계열의 지명이다.
  '븕'은 '밝다'는 의미로 주로 씌었지만, '붉다'(옛날에는 '밝다'와 '붉다'의 구분이 없었음)의 어원이기도 하다. '불(火)'도 원래말이 '븕'이며, '발가벗다'의 '발가', '불알(睾丸)'의 '불', '박쥐'(옛말은 '븕쥐', 한자로는 伏翼)의 '박' 등이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게(正)'도 옛말이 '발리'이니 이것도 '븕다(밝다)'는 말의 친족어임을 알 수 있다.
  이 '븕'이 지명, 인명으로 이용될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자의 음을 빌어야 했는데, '발(發)', '벌(伐)', '불(弗,佛,不)', '부리(夫里)', '부여(夫餘)', '부루(夫婁)', '비류(沸流)' 등 그 음에 가까운 것을 주로 이용하였다. 인명에서 많이 쓰인 '박(朴,泊)', '복(卜)' 지명에서 많이 쓰인 '백(白,百)', '맥(貊)' 등도 이 계통이다.
  '밝다'의 훈을 갖는 한자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혁(赫)', '소(昭)', '명(明)' 등이 그 예이다. 또, '븕'은 '불'과 음이 비슷하여 이 뜻을 갖는 '화(火)'자가 쓰이는가 하면, '벌'과도 음이 닮아 '원(原)', '평(平,坪)' 등의 한자를 빌어 지명과 인명 등에 나타내기도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이 '븕'에 뿌리를 둔 이름이라 하여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대체로 '박(朴)'은 '븕'의 음차(音借), '혁(赫)'은 그의 훈차(訓借)로 보고, '거세'는 '거서간(居西干)'과 같은 '갓한'('갓'은 '새로', '처음', 그리고 '한'은 '우두머리'의 뜻으로 '시조왕'의 뜻)으로 보아, '밝은 누리의 첫 임금'으로 새기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 그를 '불거내왕(弗矩內王)'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발 뉘'의 음차로, '밝은 누리'나 '혁거세(赫居世)'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박혁거세 뿐 아니라, 박제상(朴堤上)의 '박', 복지겸(卜智謙), 복길(福吉,卜吉), 복규(卜奎) 등의 '복'도 '븕'의 뜻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있었을 당시는 성(姓)이 정립되기 이전이어서, '박', '복'을 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옛 백제 땅 나주 근처의 '복룡(伏龍)'은 '밝은 산'의 뜻인 '밝모리'로 유추되고 있다. '복'은 '밝'의 음차, '용'은 옛말이 '미르(미리)'이므로 '모리(山)'의 뜻으로 붙여졌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지금의 보성 땅의 옛 지명 '복홀(伏忽)'도 '밝골'로 보고 있고, 공주 땅의 옛 지명 '소비포(所比浦.所北浦)'나 '적오(赤烏)'도 '새밝골(새붉골)'로 유추되고 있다. 부여의 옛이름 '소부리(所夫里)'나 '사비(泗 )'도 '새밝'으로 보기도 한다. '사비근을(沙非斤乙)'은 강원도 회양 근처의 삼국시대 지명인데, 이 곳의 다른 이름인 '적목(赤木)', '단송(丹松)' 등의 '적(赤)', '단(丹)'으로 보아 '새밝은골' 또는 '밝으너미'로 유추된다.

 

□ '밝'계통의 산이름들
  그렇다면, 이 인명, 지명 등에서 많이 쓰인 '븕'은 산이름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우리 나라의 산들 중 대개 명산이거나 큰 산들에 '백(白)'자나 '박(朴)'자가 들어간 것이 많은데, 이들의 대부분이 '븕'에서 연유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우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百頭山)(일명 태백산)을 비롯하여, 장백산, 소백산, 함백산, 박달산, 백산, 북수백산, 간백산, 동백산, 백사봉, 백운산, 박산 등, 이 계통의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븕'은 한자로 취음될 때 주로 '백(白)'이 되었지만, '박(朴,博)'이나, '벌(伐.罰)'로도 된다.  밝은 땅(陽地)이라는 뜻의 '븕달(븕달, 븕  )'은 '배달(倍達)'로도 되고, '박달'로도 되었다. 지금의 '새재(鳥嶺)'가 '박달재(朴達峙)'로도 불린 것이라든가, 충주와 제천 사이의 고개에도 '박달치'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그 예이다.
  '백白'은 '밝'의 음차이고, 또 '희다'는 뜻을 가지고도 있어, '밝다'와 통하므로, 많은 산에 이 이름들이 붙어 있다. 실제, 이 이름을 가진 산들 중에는 현지 토박이들이 아직도 '백'보다 '박'으로 많이 발음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백산'이 '박산'이며, 그 원뜻이 '밝뫼'임을 짐작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백산(白山)은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화천군 화천읍, 전북 부안군, 평남 양덕군과 고원군 사이, 평북 강계군과 회천군 사이, 함남 문천군과 평남 영원군 사이, 함남 신흥군과 풍산군 사이, 풍산군 웅이면 등에 있다.
  산이 높아 늘 구름이 머물러 있어 '흰구름산'이라는 뜻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보통 말해 오는 백운산(白雲山)도 같은 계열의 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발은봉(發銀峰)(강원도 남부), 발은치(發銀峙)(강원도 북서쪽), 발온치(發溫峙)(충남 서부), 발이악(發伊岳)(제주도), 발리봉(發梨峰)(경기도 중남부), 발봉(發峰)(낭림산맥 남부) 등도 '밝은', '밝이', '밝' 등의 음차로 보고 있다.
  태백산맥의 대관령 남서쪽 평창군에는 높이 1,458m의 발왕산(發旺山)는 '바랑뫼'일 것인데,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븕+앗('곳'의 옛말)+뫼 > 븕앗뫼 > 바랏뫼 > 바랑뫼(바랑산)
즉, 양지쪽 산 '밝은 산'의 뜻인 '발앗뫼'가 '바랑뫼'가 되고 '바랑산'이 되어 한자로 '발왕산'이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산의 기슭에 '바랑고개(바랑재)'와 '바랑골'이라는 마을도 있다.

 

□ 수호신 산을 '밝'으로   
  '븕'은 산이름에 '백(白)'이나 '박(朴)'으로 주로 들어가 있음을 보았다.
  위에 든 산이름 외에도 백운대(白雲臺)(서울 북한산), 백양산(白楊山)(부산), 백석봉(白石峰)(충북 진천), 백모덕(白茅德)(함남 개마고원), 백마산(白馬山)(충북 음성), 백사봉(白沙峰)(함북 회령), 박골령(朴骨嶺)(낭림산맥 남부), 박달봉(朴達峰)(경기 포천 이동면), 박리산(朴李山)(평북 국경 근처), 배산(盃山)(경남 남동부), 백봉(白峰)(경기 미금시 동쪽), 백설산(白雪山)(함흥시 북서쪽), 백암산(白庵山)(금강산 서쪽), 백우산(白羽山)(강원도 홍천 내촌면), 백적산(白積山)(강원도 평창 진부면), 백하산(白霞山)(전북 무주 최북단), 백화산(白華山)(소백산맥 추풍령 북쪽), 발교산(髮校山)(강원도 횡성 최북단) 등도 거의 '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산(박산.밝산)'이 그 원뿌리인 태백산(太白山), 소백산(小白山), 장백산(長白山), 함백산(咸白山), 대박산(大朴山) 등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산 이름에 왜 '밝'이 이토록 취해졌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선 옛 사람들이 산을 인간 세계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여, 그 이름까지에도 상당한 조심성을 기해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고을마다 주산(主山)을 정한 것이라든가, 산 위에 제단을 만들어 수시로 제천의식을 행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산 자체를 고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온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 고장마다 있는 산신령의 전설도 이러한 조상들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고을에 빛(안녕과 평화)을 주는 터전이라 해서 '밝'에 연유하는 이름들이 많이 붙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될 때, 그 음에 가깝고 뜻에도 잘 통하는 '백(白)'이 많이 씌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백(白)'은 '밝'을 소리대로 표기하는데 무리도 없거니와 '밝다'와도 통하는 '희다'의 뜻을 갖는 글자여서 이 계통의 산이름들에 많이 취해졌을 것이다. '희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깨끗하다', '정결하다', '숨김이 없다', '환하다(밝다)'의 뜻을 가지므로, 위에 열거한 산이름들과 같이 '백(白)'자가 많이 씌었을 것이다. /// 글.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