慰禮城 地名由來

'선달산'의 '달'도 '돌'에서 나온 듯

吾心竹--오심죽-- 2009. 8. 28. 15:21

'도래기재'는 '돌산'의 의미

'선달산'의 '달'도 '돌'에서 나온 듯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배우리

 

060200 산 기고 50매 땅기 월간산  백두대간 땅이름  고치령~도래기재(선달산)

 


  동창이 발갓나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쇼칠 아해는 여태 아니 니럿나냐.
  재 너머 사래 긴 밧츨 언제 갈려 하나니.

  재 너머에 있는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고 하느냐면서, 주인은 목동의 기상을 재촉하고 있다. 조선 선조 때의 정치가인 남구만(南九萬)의 시조이다.

 

□'재'는 '산'이란 뜻의 뿌리말 '잣'에서 출발
  재 너머.
  여기서의 '재'는 고개이다. 이 '재'는 고개 이름에서 접미사처럼 붙어 '새'(鳥嶺)', '대재(竹嶺)', '싸리재(杻嶺)' 등 많은 땅이름을 이루어 놓았다.
  그러나, '재'는 원래 '산(山)'을 뜻하던 말이었다. 이 말의 원시음(元始音)은 '재'가 아니라 '잣'이었다. 그러한 흔적은 옛 문헌에 잘 나타난다.
'마슬히어나 자시어나'(마을이거나 산이거나) <석보상절>(六,40)
이 '잣'은 또 '성(成)'의 뜻으로도 옮겨갔다.
'성(城)'은 자시라.' <월인석보>(一,6)
'외로왼 자새 믌기운이 어득하도다.'(孤城水氣昏) <두시언해>(三,28)
  이 '잣'은 뒤에 '자'로 옮겨가고 이것의 음이 변해 다시 '재'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잣>자>재
  즉, '잣'과 '재'의 중간 과정이 '자'인데, 17세기 후반에 나온 문헌 등을 보면 그것이 잘 나타난다.
  '경도(京都) 자안(城內)' <박통사언해>(중간본 上,54)
  그러나, 그렇다고 '재'란 말이 옛날에 전혀 쓰이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앞의 시조에서 나온 바와 같이 '재 너머 사래 긴 밧츨   '처럼 '재'는 옛날에도 씌었다. 다른 문헌에도 그 흔적이 보인다.
  '재 나려 티샤 두 갈히 것그니'(재를 내려와 쳐서 두 칼에 꺾으니) <용비어천가>(36)
  지금의 말에 '자드락'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은 '나즈막한 산기슭의 경사진 땅'을 말하는데, 이 말도 '산(山)'의 옛말인 '잣(잗)'에서 나온 말로 보고 있다. 자드락에 나 있는 길을 '자드락길'이라 하는데, 이 말은 '산비탈길' 또는 '산기슭길'과 비슷한 뜻을 지닌다. 그러나, 지금은 '자드락'이나 '자드락길' 같은 말을 쓰는 사람을 별로 볼 수가 없다.
  전국에는 '잣메'라는 땅이름이 많다. 이 땅이름은 '산(山)'이란 뜻의 말이 둘 겹쳐 이루어진 말이다. 즉, '잣'도 산이고 '메'도 산이다. '잣고개'라는 이름은 더욱 많다. 이 땅이름은 한자로 대개 '백현(栢峴)'이란 땅이름을 달고 있어 이를 '잣나무가 많은 고개'로 생각하기 쉬우나, 그렇지가 않은 것이 더 많다.
  '잣고개'에서 '잣'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산(山)'이기 때문에, 이 이름은 단순히 '산을 넘는 고개'의 뜻을 지닌다.
  곳곳에 있는 '잣골'의 '잣'도 마찬가지.
  이 이름은 한자로 '척동(尺洞)', '백동(栢洞)' 등의 이름으로 나와 있으나, 그 한자의 '자(尺)'나 '잣(栢)'과는 별 관계가 없는 수가 많다. '잣골' 중에는 '산골짜기' 또는 '산골말'의 뜻으로 붙여진 것이 적지 않다. 즉, 전국에 많이 있는, '척(尺)', '백(栢, 柏)'이 취해진 한자 지명 중에는 '산'의 뜻인 '잣'을 그 뿌리로 한 것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 '도리재'를 한자로 옮긴 도역령(道驛嶺)
  백두대간 선달산의 도래기재도 '재'를 취한 이름으로, 지금은 '고개'의 뜻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여기서의 '재'도 원래는 '산'의 뜻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경북 봉화 춘양면의 우구티리에서 같은 면 서벽리로 넘어가는 도래기재는 한자로는 '도역령(道驛嶺)'으로도 표기되어 오고 있다. 이 고개 근처에 조선시대에 역이 있어서 이 이름이 되었다고 하나, 여기에 역이 있었다는 증거는 보이지 않는다.
  '도역령'의 '도역(道驛)'은 '도이(도리)'의 한자 표기였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驛'을 '역'이라는 음으로만 읽고 있으나, 옛날에는 '이'가 그 본음이었다. 따라서, '道驛'의 원래 음은 '도이' 또는 '도리(돌이)'였을 것이며, 결국 '도역령(道驛嶺)'은 '도리재(돌이재)'를 한자로 취한 것이란 추측을 해 볼 수 있다.
  이쯤 해서 우리는 이 '도리재'를 '도래기재'와 연결해 보지 않을 수가 없고, 이 도래기재는 음운상 측면에서 또 '돌기재(돍 재)'와 가까운 친척벌임을 생각해 볼 수도 있다.
  '도리재(돌이재)'는 '돌(石)'이라는 말과 '고개'라는 뜻이 합성된 지명. 즉, '돌 많은 산'이란 뜻의 '돌재'라는 땅이름과 그 맥을 같이 한다.
  '도래기재'는 '돌'에 '애기'라는 접미사가 붙고 여기에 '~재'가 붙어 이루어진 지명으로 볼 수 있다.
  돌(~애기)+재=돌+애기+재=돌애기재(도래기재)
  땅이름에서 '~애기'는 단순 접미사일 경우가 많은데, 다음과 같은 것이 그 예에 해당한다.
   * 가매기(감+애기) ※ 큼(大)
   충북 단양 대강면 남천리(가매기골), 청원 북이면 옥수리, 경북 김천 봉산면 태화리(가매기들), 구성면 하강리(가매기골), 영주 풍기읍 욱금리,
   * 소래기(솔+애기) ※ 작음(솔=小)
   경기 김포 하성면 시암리, 경남 창녕 유어면 선소리(소래기덤), 경북 예천 호명면 형호리(소래기바우)
   * 푸래기(풀+애기) ※ 풀(草)
   충남 당진 석문면 초락도리(푸레기)
   * 가래기(갈+애기) ※ 갈=물(水)
   충남 당진 송악면 도원리, 서산 팔봉면 양길리, 전남 나주 금천면 고동리, 전북 정읍 감곡면 통석리(가래기들) 정우면 장학리(가래기들), 남제주 성산읍 신풍리(가래기소)
   * 다래기(달+애기) ※ 달=산(山). 일부는 들(野)
   경기 연천 미산면 유촌리(다래기들), 강원 양구 양구면 웅진리, 영월 주천면 주천리, 충남 서산 해미면 저성리(다래기들.다락들), 전남 고흥 남양면 장담리, 동강면 오월리, 과역면 연등리(다래기등), 함평 월야면 월악리, 전북 임실 강진면 갈담리, 회진리(다래기봉), 경북 고령 다산면 벌지리(다래기재), 울산 울주 범서면 구영리
   * 고래기(골+애기) ※ 골=골짜기(谷山)
    충남 서천 마산면 군간리, 광주 광산구 대산동, 제주 서귀포시 강정동(고래기물) 
   * 느래기(늘+애기) ※ 늘=늘어짐(延)
   전남 강진 도암면 계라리, 영관리
   * 두래기(둘+애기) ※ 둘=두름(周)
   전북 남원 주생면 정송리, 야영면 두락리, 대강면 사석리(두래기골), 전남 순천 낙안면 용릉리, 해남 계곡면 여수리(두래기산)
   * 무내기(문+애기) ※ 문=물(水)
   전남 순천 별량면 두고리(무내기고개), 남원 주생면 도산리(무내기고개), 경북 영양 일월면 오리리(무내기골)
  충남 당진 석문면의 '푸래기골(푸레기골)'이란 이름은 예부터 풀이 무성한 섬이어서 나온 것으로, 한자로는 초락도(草落島)라 표기해 오고 있다. 2005년, 당진군에서는 정보화 사회에 걸맞게 농어촌 마을을 사이버 체험관 마을로 탈바꿈시켜 농어촌 경쟁력 제고에 나서기 위해 군내에서 39개 마을을 사이버 체험관으로 선정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이 푸레기 마을이다. 이 푸레기 마을은 그 이름에 걸맞게 선정 종목이 식물 관련의 약쑥 체험이었다,
  '~애기'라는 접미사는 비단 땅이름에 한한 것이 아니다. 가루를 풀어서 만드는 음식인 '푸레기(풀애기)', 올(絲)이란 말에서 나온 '오래기(실오래기)', 짚에서 나온 '지프래기(지프라기)', 정처없이 떠다닌다는 말에서 '뜨내기(뜬애기), 비로 쓸어서 나오는 '쓰레기(쓸+애기)' 등 일반 용어에서도 많이 볼 수가 있다.
 

□ 선달재는 선돌재가 그 바탕
  전국에는 '돌재'라는 곳이 무척 많다. 그러나, 돌재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돌들이 삐죽삐죽 서 있는 산이면 '선돌재'이고, 돌이 비스듬히 서 있는 산이면 '빗돌재', 틈새가 벌어진 돌이 있는 산이면 '뜬돌재', 흰 빛깔의 돌이 있는 산이면 '흰돌재'이다. 선돌, 빗돌, 뜬돌, 흰돌이 각각 한자로 음역된 이름이 입석(立石), 사석(斜石), 부석(浮石), 백석(白石)이다.
  '도래기재'도 '돌재'라는 이름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소백산과 태백산을 백두대간으로 연결시키고 있는 선달산(先達山)도 '돌'과 관련한 이름일 것이다.
  행정 구역상으로 강원도 영월군과 경북 봉화군, 영주시에 걸쳐 있는, 높이 1,236m의 이 산은 아름다운 계곡을 사방에 품고 있다.
  그런데, 어느 인터넷 포탈 사이트의 선달산 이름 관련 설명 좀 보자.
  -'선달산(1,236m)은 한자로 '仙達山'(신선이 놀던 곳)이라고도 하고, '先達山'(먼저 올라야 한다는 뜻)으로 표기하기도 한다. 선달산 북쪽에 용아골, 칠룡골이 있는데 용아골은 선달산 내맥을 이어왔다는 뜻이며, 칠룡골은 일곱 능선이 함께 선달산으로 이어졌다는 뜻이다. 남으로 봉황산, 서로 회암산 형제봉과 소백산, 동쪽에 옥석산, 동남쪽에 문수산 예배봉으로 만산이 에워싸고 있어 오르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향유의 기쁨을 안겨 주는 명산이다. 또 이 곳은 태백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구간이다. -
  그러나, '선달산'은 '선돌재'란 이름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선돌재'을 한자로 뜻을 취해 올리면 '입석산(立石山)' 또는 '입석현(立石峴)'이 될 것이지만, 이 산이름은 의역(意譯)이 아닌 음역(音譯)에 의한 이름으로 봄이 타당하다. '신선이 놀던 곳'이니 '먼저 올라야 할 산'이니 하는 식으로 글자(한자)에 얽매여 해석함은 우리 땅이름 정착 과정의 정서와는 잘 맞지 않는다. '선돌재'는 불쑥불쑥 솟아 있는 돌(바위)들이 많아 나온 이름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실 이 산(선달산)에는 그러한 바위들이 적지 않다.
  선달산 근처 1204봉에서 1100m대의 5개의 봉우리를 거쳐 1136봉까지 이르는 곳만 해도 흡사 동물농장을 연상시키는 바위들을 만날 수가 있다. 집채만한 큰바위들도 있고, 동자 모양의 바위, 나지막이 엎드린 강아지바위, 뾰족한 등뼈를 붙인 공룡바위, 코끼리 모양의 바위 등.
  그런데, 여기서 '선돌'이 어떻게 '선달'이라는 음으로까지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이것은 다른 곳의 땅이름 변화와 견주어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 선달재 : 경북 영천 북안면 유상리. 이 곳에 선 돌이 있다.
   * 선달곡 : 대구 달성 현풍면 오산리. '선들곡'으로도 불리고, 한자로 입석현(立石峴)
   * 선달골 : 경남 거창 남상면 대산리. 들 가운데 선돌이 있었다.
   * 선달바구 : 경남 고성 구만면 저련리. 바위가 서 있다.
  그 밖에도 경남 밀양 초동면 신호리, 경남 합천 적중면 말방리, 초계면 원당리, 거창 신원면 양지리, 경북 청송 부동면 내룡리 등에 '선달바우', '선달방위' 등의 이름들이 있는데, 모두가 그 곳에 선바위(선돌)가 서 있어 나온 것이다. '서 있는 돌'이란 뜻의 '선돌'은 '선달'로도 불렸다는 충분한 증거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낱말들 일부에도 지금의 것과 옛날의 것이 모음에서 상당한 차이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것이다. (물론, 모음이 달리 옮겨지면서 뜻의 분화 현상을 일으킨 것도 많다.)
  * 모리(宗)-머리(頭)-마리(한 마리, 두 마리,---)
  * 달-들-돌
  * 붉(赤)-밝(明)
  * 남다(餘)-넘다(踰)
  * 늘다(延)-널다(넓다)
  따라서, '선달산'의 '달'도 '돌'의 음이 그렇게 옮겨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선돌산(선달산)>선덜산>선달산

 

□ 김삿갓은 노루목 골짜기를 무릉계라고 극찬
  선달산 일대는 옛날부터 사람이 살 만한 곳의 하나로 손꼽혀 왔다.
  선달재에서 등산객들이 하산로로 많이 이용하고 있는 어래산 자락 충북 단양 영춘면 의풍리 일대는 정감록에서 전하는 십승지(十勝地)이다. 그래서일까? 베틀재, 고치령, 마구령 등 지금도 포장이 되지 않은 험한 고개들 일대의 오지 마을들은 6.25 때나 일제 때도 화를 입지 않았단다.
  이 의풍리에 흐르는 남대천 하류를 따라 북쪽으로 30분쯤 걸어가면 마대산(馬垈山) 동쪽 기슭에 김삿갓 일가가 피난 와서 살았다는 노루목이 있고, 이 곳에 방랑시인 김삿갓의 묘가 있다.
  김삿갓은 강원도 영월의 산 경치에 반해 동강의 삼옥리와 영월의 와석리의 안쪽 골짜기인 어둔리에서 여러 해 동안 정착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둔리 일대에는 일년 내내 찾아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오지로 버려졌었는데, 최근에는 그 절경이 널리 알려지면서 외지 사람들이 많이 찾아들고 있다. (그래서, 영월군에서 김삿갓 유적지를 정비한다고 진입로를 포장해 놓았다)
  골짜기에 들어서면 싸리골이라는 민가가 나오고, 좀더 골 안쪽으로 들어가면 곡골이 된다.
  싸리골에서 약 10리 구간에 이르는 골 안쪽의 한 지역 이름이 노루목인데, 사람들은 이 곳의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겨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노루목'이라고 해서 무조건 이를 글자 그대로 '노루'와 관련지어 설명해야 할까?
  전국에는 노루(獐)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데도 '노루모기', '노루목', '놀목'이 되어 한자로 장항(獐項)이 된 곳이 무척 많다. 행정 동.리명만 해도 전북 남원 산내면 장항리 등 전국에 6군데나 된다.
  '노루목'의 '노루'는 노랗다는 뜻의 '노르', '누르'가 되기도 해서 경북 상주 은척면의 황령(黃嶺), 김천 증산면의 황항(黃項)처럼 '황(黃)'자가 취해진 것도 있다.
  '노루목'과 비슷한 이름으로 경기 연천 전곡읍, 파주 진서면의 '눌목(訥木)'이 있다. 한자로 어항(於項)으로 쓰는 경북 상주 은척면 황령리의 '너진메기', 화북면 용유리의 '느랏목'이나 충남 천안 광덕면 지장리의 고개 '늦은목'도 같은 계열의 이름이다.


□ '노루목'은 '너르목'과 같은 계열 이름
  '누루실(노루실)'이나 '누리실', '너러실' 등의 이름도 그 뜻으로 보아 같은 유의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경남 함양 안의면의 황곡리(廣谷里)는 긴 골짜기 안에 있어 '누루실'로 불리던 곳이다. 전남 광양 황길리에는 '누룩실', 충남 보령 청라 황룡리에는 '누리실'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는 황곡(廣谷)이다.
  충북 보은 내북면 장곡리(獐俗里)는 '노루실'인데, 경북 영덕 지품면과 충북 보은 회북면의 '누리실(눌곡.訥谷)'이나 경남 밀양 무안면의 '너실(板谷)', 경북 상주 화동면에 '너러실(板谷)' 등과 그 뜻을 같이 한다. '~실'은 '골짜기' 또는 '골짜기 마을'을 나타낼 때 흔히 쓰이는 지명 접미사이다. 
  선달산 근처에도 등성이가 늘어져 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들이 아주 많다.
  경북 봉화 소천면 서천리와 갈산리에 있는 늦으목이재, 영주 부석면 북지리의 늦은목이, 봉화 춘양면 서동리 늘미고개 등이 그것. 북지리의 늦은목이는 한자로 '만항(.晩項)'이라고 쓴다.
  '눌', '널' 관련 지명들을 바탕으로 해서 '비탈이 느린 산', '줄기가 늘어진 산', '넓은 산' 등의 뜻으로 붙여졌을 만한 산이름들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광(廣) : 광덕산(廣德山)-너르덕
  ·판(板) : 판막령(板幕嶺)-노루목, 너르목고개
  ·어(於) : 어업령(於業嶺)-느릅재. 늘업고개, 어음령(於音)-늠재
  ·장(獐) : 장항덕(獐項德)-눌목, 장항령(獐項嶺)-눌목재
  ·눌(訥) : 눌의산(訥誼)-누르미.누르매
  ·황(黃) : 황룡산(黃龍山)-누르미.눌미, 황매산(黃梅山)-눌매, 황방산(黃方山)-눌뱅이, 황의산(黃依山)-누리뫼, 황장산(黃獐山)-누르매, 황학산(黃鶴山)-누락. 눌악


□ 어둔이라는 이름만큼 어두운 김삿갓 계곡
  김삿갓이 살았다는 영월 와석리의 어둔리는 골이 깊어 그 이름 그대로 어두운 골짜기이다. 여기에 노루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한자로는 장항(獐項)이라고 쓴다. 땅모양이 노루가 엎드린 형국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골짜기가 길게 늘어져 나온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노루목이란 마을은 영월 하동면의 들모랑이라는 들목부터 냇물을 따라 20리 가량이나 남쪽으로 들어가야 나온다. 산골짜기의 냇물을 까라 올라가는 중에 든돌, 싸리골, 곡골 등의 작은 마을들을 거치게 된다. '김삿갓'의 이름을 딴 '삿갓교'라는 다리도 건너게 된다.
  이 곳에서도 마대산 동쪽 골짜기로 5리 정도를 거슬러 올라가야 김삿갓 집터가 있다는 어둔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어둡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 어둔이 골짜기의 깊숙한 모습을 그 이름만으로도 짐작할 만하다.
  선달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영주 부석면 남대리와 단양 영춘면 의풍리를 지나 영월 하동면 와석리로 흘러들어 마대산의 동북쪽 골짜기에 맑은 계류를 형성하고 있다. 골짜기가 아름다워 방랑시인 김삿갓이 '무릉계'라며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그래서 흔히 이 골짜기를 '김삿갓 계곡'이라 부르기도 한다.)
  노루목에는 '김병연 지묘'라는 작은 묘가 있는데, 이 묘가 발견된 것은 30여 년 전이지만, 마대산 동쪽 자락에 생전의 김삿갓 집터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은 최근의 일.
  본명이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인 김삿갓은 방랑시인으로, 삿갓을 쓰고 전국으로 방랑하며 다녔다고 하여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으로 불렸다.
  병연은 안동김씨의 집안으로 경기 양주에서 출생했는데, 선천부사(宣川府使)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 투항을 해서 그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그러나, 형 병하(炳河)와 함께 노복 김성수(金聖洙)의 도움으로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살 수 있었다.
  그 후에 이 집안은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강원도 영월로 옮겨 살다가 20세 되던 해에 향시에 응시해 장원급제하였으나, 병연은 자신의 집안 내력을 모르고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를 택한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방랑길에 올랐다.
  57세 때 전남 화순 동복(同福)에서 객사하기까지 삿갓을 쓰고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으며, 발걸음이 미치는 곳마다 많은 시를 남겼다. 후에 둘째아들 익균(翼均)이 유해를 영월의 태백산 근처 산기슭에 묻었다.
  병연은 자신이 '무릉계'라고 했던 노루목 깊은 산골짜기에 자신의 유언대로 조용히 묻힌   것이다.  /// 글. 배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