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백제(하남위례성)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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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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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3월 24일 15:0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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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부여박물관...<<백제관>>의 입구 설명판에는 어김없이 <한성백제-BC18~AD475>로 되어있는데 왜 그런지요???
백제초도---고기록(삼국유사,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동사강목,연려실기술 등...)에는 하남위례성-<금직산,사산(사천)>으로 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을 말하는데
<삼국사기>온조왕 13년 7월에 한수 이남으로 책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가를 옮겼다. 8월에 사신을 마한에 보내어 천도를 알리고 드디어 경계를 그어 정하여...중략...온조왕 14년 봄 정월에 도읍을 옮기고...중략...
백제사의 수수께끼...하남위례성이 명쾌히 밝혀지지 않았는데... 다산 정약용, 두계 이병도를 이어받아 하북위례성을 추종하여 서울지역이라고 단정지어 설명하는데 누가 감히 그런 주장을 펴는 것 인지요??? 궁금합니다???
잘 모르면 <<<백제초도 하남위례성은 여러 설이 분분하지만 아직 어딘지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라고 숙제로 남겨놔야 학생,일반인 등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찾아 나설것 아닙니까???
다산의 <아방강역고 위례고> 이후 <두계 이병도박사> 이후에 현재의 사학계에서는 <하북위례성>을 추종하는 건가요??? 일부는 중랑천변이라고도 말하고...도통 추측이 난무합니다.
<< 성호 이익~순암 안정복>>이 동사문답을 통해서 꼼꼼히 지명을 고찰하였고, 순암이 1778년 목천(천안시) 용회당에서 20년만에 동사강목을 완성하고, 정조가 을람하시고, 동강강목에 <<<위례성--직산, 미추홀--인천>>>이라 곳곳에 기록합니다.
순암이<친필 대록지--천안 목천현지>를 직접 찬할때에도 <<<위례성-직산>>>이라 분명히 기록합니다.
다산 정약용처럼 패수고,대수고, 예고, 맥고 등을 서술하지만 <<< 위례고>>>를 별도로 서술 안합니다...근데 다산은 정말 이상합니다.
순암은 다산과 같은 남인으로 천주교에 대해서 < 천학고><천학문답>으로 천주교를 부정합니다...그래서 다산과 순암의 주장이 틀린가요???
다산의<아방강역고 위례고>에서는 서거정의 <직산 제원루기...백제의 근원이되는 누각>과 삼국사기를 꿈속에서 보았나???등등으로 서거정을 맹공격하는데...
다산이 1794년 암행어사로 연천현감 서용보를 파직해서, 정조가 죽자 서용보로 부터 철저히 보복 당한 한풀인 것 처럼 비쳐지는데 정말 안타깝습니다. 서용보--조선초 사가정 서거정의 친형인 서거광의 직계 후손임.
<<<다산의 하북위례성 문제점>>>
1. 마한왕이 봉토한 동북 100리를 무시하였고(웅천--금강,안성천이던), 2. 춘천의 말갈(맥국-우두산성)의 침입경로를 한수이북으로 보아, 원주~이천~용인 / 충주~음성~안성 등의 침략을 무시하였고, 3. 문주왕이 고구려군을 피해 도망가다가 머물렀던 곳이라 근거없이 주장했고, 4. 신라가 한강을 정복후 한산주를 설치한 삼각산(북한산)이 부아산 이라 잘못 비정하였고, 5. 1814년 다산의<대동수경>, 외조부 공재 윤두서의 <동국여지전도>, 정상기,정항령<조선지도첩>을 보았음에도 옛 한산의 고지도 <용인현 부아산>을 못 보았다는 논리가 안맞고, (수원 화성 건축시 수원부에도 광교산 옆에 부아산은 뚜렷히 표시됨) 6. 단순 하남의 대칭어인 하북위례성을 주장했는데, 아산만 유역의 하남백 조성(백제 개국공신), 온조의 신하 목천마씨 마려와 천안 전씨 전섭을 고찰 안했고, 아산만 유역의 하팔현(진위천+안성천, 평택 팽성읍)을 못보았고... 7. <동사강목-안정복, 성호 이익>의 주장을 뭉개고, 별도로 <위례고>를 집필하여 그들과 차별화 했고... 8. 하남위례성이라 불리던 직산의 지형지세를 비교적 자세히 답사치 못한 오류.
***기타 많은 자료가 더 있지만 중략하고...
한국사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kbs의 역사추적을 통해서 왜??? 한성백제가 기원전18~475년이라 그런지 밝혀주세요.
1. 직산백제 위례성시대-----bc18~bc6, 13년 2. 한성백제 풍납성시대-----bc 5~371년 3. 한성백제 남평양성시대---371~475년 4. 웅천백제 공산성시대-----475~538년 5. 사비백제 사비성시대-----538~660년
<<<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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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납토성이 왜 하남위례성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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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복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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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년 03월 24일 16:44: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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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이란 한강이남지역을 의미한다. 흙으로 다져만든 풍납토성은 어머어마한 토성으로 중국 동진과 교류했던 백제초기의 무수한 유물들이 쏟아졌으며, 반듯반듯한 거리흔적들도 드러났다. 현재 풍납토성은 아파트단지 지하에 묻혀서 100%발굴이 안되고 있어 지역주민들과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공격으로 전사한 개로왕은 거대한 토성을 축조하여 민심이 위반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발굴된 풍납토성의 규모나 구조로 보아 100만명 정도가 동원되야 축조가 가능한 토성이였기 때문에 축조내내 엄창난 인력이 동원되었기 때문에 민심이 위반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8톤 트럭 20만대 분량의 흙으로 쌓은 동양 최대의 판축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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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납토성은 나무 기둥을 세우고 나무판을 댄 뒤 뻘흙과 모래, 나무 껍질 등을 켜켜이 쌓아 만든 판축토성으로, 내벽의 일부 구간에서는 식물유기체를 얇게 깐 것이 10겹 이상 확인되는데 뻘흙을 부은 후 나뭇잎이나 나무껍질 등을 1cm 정도 깔고, 다시 뻘흙을 까는 과정을 10회 이상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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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문대 이형구 교수 등에 의해 풍납토성의 중요성이 부각된 이후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한신대 박물관 등에 의해 송파구 풍납동 일대의 경당연립주택 신축공사부지와 풍납현대연합주택조합부지, 남양연립 재건축조합부지, 삼화연립 재건축사업부지, 외환은행직장조합아파트 신축부지, 미래마을 재건축조합부지 등에서 발굴 조사가 진행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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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문화재연구소
| | 서울 강동구지역의 한강변에는 일본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 인덕왕릉보다 규모가 큰 세계최대규모의 전방후원분 무덤들이 10여기들이 발견되었다. 전방후원분의 초기양식은 호남 등 서남해안지역에서 발견된다. 사학계에서는 일본의 무덤양식인양 논리는 펴고 있는데, 사실은 해모수의 북부여왕조를 계승하여 골본부여를 개국한 고두막의 후손 구태백제세력이 후한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 후미를 치기위해 황해도 지역에 구태백제를 개국했는데, 서남해를 통하여 한반도지역과 일본지역을 복속시키고, 온조백제까지 통합한 이후에 한강변에 거대한 전방후원분 무덤을 남겼다고 봐야 한다. 서남해안 지역의 작은 규모의 전방후원분들은 구태백제세력의 초기 정복활동의 흔적이라고봐야 한다.[윤복현] 일본 전방후원분 무덤규모가 서울 한강변의 전방후원분보다 규모가 작다는 건 일본왕들이 구태백제의 왕족이라는 의미다. 즉, 구태백제는 일본열도를 복속하고 유사시 최후보루로 삼으면서 왕족들의 거주지로 삼은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기나 일본서기를 보면 동성왕과 무녕왕 등 백제의 태자들이 일본에서 성장한 후 한반도로 들어와서 왕위에 오르는 배경이며, 백제멸망이후 다시 일본으로 태어나는 역사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자료] 풍납토성 발굴10년 “AD200년 고대국가 백제 진면목”
도성은 궁전, 제사시설, 궁원, 고급관원 거주지역, 도로, 성문 등을 갖추었다. 이뿐이랴. 도성 주변엔 홍수를 막을 토성과 제방, 그리고 대형 고분을 조성했고, 배후 전략적 요충으로서 이성산성과 남한산성을 쌓았다.
AD 200년 무렵 풍납토성의 모습이다. 한성기 백제 도성인 풍납토성은 연인원 100만명이 쌓은 명실상부한 고대국가의 도성이었다.
올해는 풍납토성 발견 10년이 되는 해. 지금까지의 발굴조사 결과 대형의 석조건물지와 제사구덩이, 6각형 주거지는 물론 포장도로, 벽체건물지 등 백제도성의 면모를 알려주는 유구와 유물들이 쏟아졌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13~14일 서울올림픽파크텔에서 ‘풍납토성, 500년 백제왕도의 비전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국제학술대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주제 발표자로 나서는 신희권 서울중부권 문화유산조사단장은 ‘풍납토성의 도성구조 연구’라는 글에서 AD 200년쯤의 풍납도성 내부 모습을 추정했다.
일단 ‘궁전종묘구’와 ‘성문 및 도로’ ‘궁원(宮苑·궁궐의 정원)’, 그리고 ‘고급관원들의 거주지’ 등으로 크게 나눴다. 풍납토성의 핵심인 ‘궁전종묘구’에서는 주거지, 저장공, 구상유구, 폐기장 등 220기의 유구가 확인됐다. 국가제사터인 여(呂)자형 주거지와 거대한 폐기구덩이가 발견됐다. 제사에 쓰인 것으로 보이는 12마리분의 말머리가 대표적이다. 한편 이곳에서 발견된 대형 건물지는 한성백제 시대 최대 건물지다. 구조도 일반 건축물과 다르다. 이곳에서 출토된 다량의 기와와 전돌을 볼 때 당시 왕성 내 궁전 건축이나 예제 건축의 일부로 평가될 만큼 위상이 높다.
최근 이곳에서는 직경 16m, 깊이 1.2m의 원형구덩이가 발견됐다. 여기서 수습한 유물만 평기와 5000여점, 와당 30여점이다. 건물이 붕괴했거나 혹은 국가시설 증·개축 때 나온 건축자재를 폐기한 장소였을 것이다. 결국 풍납토성의 중앙부는 궁전이나 제사건물, 관청건물 등이 밀집분포했을 것이다.
또한 최근 발굴한 105평 규모의 수혈건물지는 AD 200년쯤 폐기된 것으로 판단된다. 종교적·제사적 성격의 공공건물로 평가된다.
두번째, 풍납토성 내부에서는 도로 41m와 성문 3곳이 확인됐다. 도로는 왕성내 중요 공간을 분할하거나 중요 시설을 감싸던 핵심 도로였을 것이다. 궁성의 외곽을 감싸는 순환도로일 수도 있다. 도로는 도시구조 연구의 핵심적인 자료다.
또한 중간 지점에 있는 ‘풍납오거리 길’에는 당시 도성의 정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성의 구성 요소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궁원, 즉 연못과 같은 조경유적이다. 발굴 결과 연못유적이 두 곳으로 추정된다.
마지막으로 고급 관원 거주지다. 풍납토성에서 확인된 가장 특징적인 유구가 바로 6각형 대형 주거지다. 길이 10m, 폭 7m가 넘는 대규모이다. 유물들 가운데는 전돌, 토제 초석, 토관 등 일반 주거지에서는 사용되지 않은 건축재가 보인다. 특히 중국계 도자기가 다량 출토된 것으로 보아 높은 신분 계층인 고급관원들의 저택으로 추정된다.
신희권 단장은 “도성 내외의 전반적인 구조로 볼 때 백제는 이미 AD 2세기에 고대국가의 면모를 확립했다”며 “몽촌토성이 축조된 3세기쯤 한성백제는 전성기에 이른다”고 밝혔다. [참조자료]풍납토성에서 되찾은 '백제 500년'
백제의 첫 수도 위례성이 풍납성인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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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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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년 03월 25일 13:5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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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리안><오마이뉴스>---자료는 잘 보았습니다.
제 질문의 핵심은 <<< 백제 온조왕이 처음 도읍했던 하남위례성이 어디냐??? >>>입니다.
윗 글 중에서...
백제의 궁궐
백제는 수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제1기 한성시대, 제2기 웅진시대, 제3기 사비시대 등 3기로 나눠 살펴본다.
1.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의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이것이 문제입니다.
분명히 백제초도는 하북이던지, 직산이던지에 있어야 합니다.
윗 글은 다산, 이병도박사의 하북위례성설을 주장하는 것 이지요???
***앞전 질문에 다산의 <위례고>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중요한 백제초도 위례성...기원전 18~6년, 13년간의 백제초도가 어디냐??? 입니다.
***풍납성 부근의 고고학적 유적, 유물이 많이 발견된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제의 첫도읍은 분명 풍납성, 몽촌토성 부근이 아니지요.
***이번 충남도와 천안시가 8억원 들여 2009년~2010년까지 3차 전면 발굴을 실시한답니다. 풍납성,몽촌성 등의 유물만 가지고 백제초도라 논하는 건 무리한 주장입니다. 판축식 기법의 산성은 천안주변에도 많습니다.
***백제의 개략적인 것은 저도 알고있습니다. <<< kbs의 역사추적>>>팀에서는 <<< 백제초도 하남위례성 >>> 서울로 보시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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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성은 큰 강을 방어용으로 삼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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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윤복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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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9년 03월 26일 01:51: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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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백제본기]제1대 시조 온조왕 <始祖 溫祚王 B.C18~28 재위기간 45년>
그(비류)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열 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 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그의 조상은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같이 나왔기 때문에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는 설도 있다. 한 편, [북사]와 [수서]에는 모두 "동명의 후손 중에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있었다. 그가 처음으로 대방 옛 땅에 나라를 세웠는데, 한 나라 요동 태수 공손도가 자기의 딸을 구태에게 시집보냈고, 그들은 마침내 동이의 강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어느 주장이 옳은지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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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기사는 백제가 첫 수도를 삼은 하남 위례성과 관련한 기록입니다. 위례성으로 삼은 하남 땅의 배경에 대해서는 북한산 꼭대기에 올라가 바라본 한강이남지역은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북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동쪽으로는 태백산맥(강원도, 경상 남북도의 동부를 남북으로 뻗어 있는 산맥. 국내에서 가장 큰 산맥으로 금강산, 태백산, 오대산, 설악산 따위의 봉우리가 있다.)이 있고,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평야(한강과 임진강의 하류 일대에 펼쳐진 평야. 김포 일대의 평야와 평택 일대의 평야로 나눈다. 서울이 가까워 근교 농업이 발달하였으며, 쌀·보리·조·콩·옥수수 따위가 많이 생산된다)이 보이고, 서쪽으로는 큰 바다(서해)로 막혀있는 곳이다. 과연 어디일까?
[자료]백제의 첫 왕도 하남 위례성은 어디인가?
백제는 B.C. 18년에 한강유역에서 나라를 세우고 A.D. 475년에 고구려의 침입으로 공주로 도읍지를 옮길 때까지 거의 500여년 간을 한강평원의 왕도에 머물렀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잊혀진 한성백제의 역사만큼이나 그 첫 도읍지인 하남위레성의 위치도 학자들마다 견해가 각각 다르다.
백제의 첫 도읍지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 먼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온조왕 건국기사에 보면, 온조는 열 명의 신하들이 건의한 의견을 받아들여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고 했다. 즉, 하남위례성은 북은 한수가 있고, 동은 높은 산에 의지하고 있으며, 남은 기름진 평야를 바라보고, 서는 큰 바다와 격한 천험의 지리에 위치한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도읍지 천도의 관련기사가 보이는데, 온조왕 13년 7월에 한산 아래에 柵을 세우고 위례성의 민호를 옮겼다고 했으며, 14년 정월에 도읍지를 옮겼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근거로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다산 정약용은 온조왕이 처음 국가를 세울 때에는 한강 북쪽이었는데, 온조왕 14년에 한강의 남쪽인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고 주장하였다.
사실 온조왕 14년 이전의 기록을 보면 북동쪽의 말갈로부터 수 차례에 걸쳐 침입을 받고 있다. 따라서 온조왕은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즉위 14년에 한강 남쪽인 하남위례성으로 천도를 단행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해의 기록을 보면, "정월에 새 궁실을 지었는데, 검소하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따라서 온조왕이 천도한 직후 도성에 짓던 궁실공사가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대로라고 하면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의 평야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야만 한다. 고려의 충렬왕대 스님인 일연은 첫 도읍지는 천안의 직산이고 14년에 천도한 하남위례성은 경기도 광주,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라고 주장했다. 첫 도읍지에 대한 이견은 있으나 하남위례성이 경기도 광주라고 하는 주장은 정약용·이병도에게 그대로 이어졌으며, 최근 오순제씨는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하남위례성의 광주설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면서 다시금 주장하였다.
이외에도 많은 의견들이 제기되었는데, 이기백·박순발·박현숙·성주탁은 몽촌토성의 발굴결과를 토대로 하남위례성이 바로 몽촌토성이라고 주장하였다. 88올림픽 경기장 건설과정에서 발굴조사된 몽촌토성에서 다량의 백제토기들이 출토되었다. 그러나 발굴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왕궁 같은 대형건물터가 출토되지 않아 왕성으로서의 결정적인 자료는 확보되지 못하였다.
한편, 김정학·이형구·성주탁 등은 풍납토성이 하남위례성이라고 꾸준히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일찍이 풍납토성은 이병도 박사가 백제의 사성으로 비정한 이래 백제의 왕도로서 주목하지 못하였다. 고고학자인 김원룡 교수도 1967년에 조사한 보고서에서 이변도 박사의 견해를 그대로 받아들여, 평시에는 "일반민이 살고 있었던 반민반군적인 읍성"이라고 말하면서 학계에서는 풍납토성이 거의 잊혀져 가고 있었다.
그러면 백제의 하남위례성은 어디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강동구 풍납동에 있는 풍납토성이다. 풍납토성은 선문대학교의 이형구 교수에 의해 백제왕도로 주장되어 왔으나 학계에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1997년 1월1일에 이형구 박사는 풍납동 현대아파트 건설의 터파기공사 현장에 접근금지를 제지하고 들어가서 파괴된 백제토기를 직접 목격한 후, 국립문화재 연구소는 물론 각 일간지에 이 사실을 알리게 됨으로서 공사는 중지되고 풍납동 발굴이 조사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1997년 10월부터 1999년 9월까지 모두 9차례에 걸처 풍납토성에 대한 발굴이 실시되었다. 토성내에서 삼족토기·와당·원통형기대·흑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고, 경당연립 주택부지에서는 궁전유적 등 여러 건물지가 조사되었다. 특히, '大夫'라는 관직명이 쓰여진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대부는 중국고대의 직제에서 보면 이는 궁중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던 관직명이라고 한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에 이미 의례용으로 사용되는 초두가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바 있다. 초기백제에서 대부명이 새겨진 토기와 의례용 초두가 출토되고, 대형 궁전건물지가 발굴되는 풍납토성은 바로 왕도일 수밖에 없으며, 백제초기의 왕도는 다름 아닌 하남위례성인 것이다.
500여년 동안이나 한성백제의 도읍지였던 하남위례성이 백제의 멸망과 함께 역사속으로 사라졌었다. 그러나 1997년도부터 시작된 발굴로부터 하남위례성은 긴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다. 그러나 풍납토성은 성벽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은 이미 건물들이 들어차서 백제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풍납토성 백제 유적 발굴 8년만에 재개 한겨레 | 입력 2007.12.10 19:51 | 수정 2007.12.10 23:01
[한겨레] 2000년 5월 재개발조합 주민들의 발굴 유적 파괴로 큰 파문을 일으켰던 서울 풍납동 풍납토성(사적 11호) 안 옛 경당연립 재개발터의 초기 백제 유적이 8년만에 다시 발굴된다. 이 유적은 오늘날 서울 지역인 한성에 도읍을 두었던 초기 백제시대(기원전 18년~기원후 475년)의 큰 건물터와 고급 유물들이 무더기로 발견되어 당대의 왕궁·신전터일 가능성이 높다고 학계에서 추정해온 곳이다.
유적을 발굴했던 한신대 박물관(관장 이남규)은 "지난주 서울시 산하 서울역사박물관,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쪽 관계자와 만나 내년 3월부터 시의 지원 아래 경당연립터 2300여평의 발굴을 재개하기로 최종 합의했다"고 10일 밝혔다. 박물관쪽은 "시쪽에서 현장 발굴 비용 2억원과 보고서 발간 비용 등을 포함해 4억여원을 지원해주기로 했다"면서 "3월 중순께부터 본격적인 재조사에 착수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박물관은 8년여동안 발굴 재개를 위해 문화재청과 서울시쪽에 자금 및 행정적 지원을 요청했으나 서울시 등은 현지 주민들의 반발과 재원 조달의 어려움 등을 들어 난색을 표시해왔다. 박물관쪽은 "서울시쪽에서 조속히 비용을 지원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꾸고, 문화재청도 이를 받아들여 합의를 이뤄냈다"고 전했다.
경당연립터에서는 99년 9월 발굴이 시작된 뒤 백제 관직명으로 추정되는 '대부(大夫)'란 한자가 새겨진 토기 조각, 제사 용도에 쓰인 듯한 말뼈, 당시 중국 동전(오수전) 등 수천여 점의 한성백제 유물과 대형 건물터 등이 무더기 발견된 바 있다. 특히 학계에서 성내 백제 왕궁 추정터의 핵심 유적으로 지목하면서 경당연립터는 언론 등에서 집중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러나 재개발을 추진하려던 주민들이 보상이 늦어지는데 항의하며 2000년 5월13일 굴삭기를 동원해 발굴현장 일부를 갈아엎는 '문화재 테러'를 벌인 뒤 발굴은 전면 중단됐다. 유적은 훼손 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의 보존 지시 등에 힘입어 2000년7월 사적으로 지정됐고, 현재는 모두 흙을 덮어 복토한 상태다. 아울러 이 사건을 계기로 미래 마을 등 토성 안 다른 재개발 대상터와 일반 가옥 등의 재건축 행위도 잇따라 규제되면서, 성터 유적 보존 움직임이 본격화했다. 그러나 땅값 하락 등의 재산권 피해를 호소하는 주민들과 당국사이에는 지금도 보상 대책 등을 둘러싸고, 첨예한 논란이 계속되는 중이다.
박물관쪽은 발굴이 재개되면, 경당연립터 유적의 가장 큰 발굴 구덩이인 44호 유구를 비롯해 한변의 길이가 16m를 넘는 연못터, 중국 동진에서 유약을 묻혀 만든 대형 도자기 출토 유구 등을 집중 조사할 방침이라고 한다. 풍납토성이 초기 백제 왕성인지를 밝혀줄 주요한 단서들이 경당 유적에서 추가로 나올 것인지가 학계의 관심사다. 8년전 발굴 책임자였던 권오영 한신대 교수는 "외형상 마무리 조사의 성격이지만, 발굴 중단 때까지 전체 면적(2300여평)의 절반도 안되는 1000여평만 조사했기 때문에 조사가 온전히 끝나면 유적의 성격을 밝혀내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들이 확보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유적들의 구조가 인근 주택가 지하에도 상당 부분 걸쳐있어 발굴 영역을 크게 넓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며 "국가기관이 주택터를 추가 매입·보상한 뒤 전면적인 확대 발굴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국립문화재연구소의 10개년 발굴계획안을 보면, 경당연립터는 2011~2012년에 전면 발굴하는 것으로 일정을 짜놓고 있다.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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