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백제시대의 복식---kbs 역사추적 //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20:50

[자료]백제
작성자 윤복현 조회 22
작성일 2009년 03월 24일 15:58:53

http://www.bhm.or.kr/  

 

 

백제 시대의 옷

  [백제복식]백제의 복식  

<출처>천리안 자료실

백제의 복식

한국 고대문화의 원류가 북방문화, 즉 스키타이계인 만큼 복식의 경우에도 스키타이계의 영향을 받았다. 고대인들은 머리에 삼각형 모자(弁形帽)와 새깃털로 장식한 관(鳥羽冠)을 썼고, 좁은 소매에 둔부선까지 오는 왼쪽 여밈의 저고리와 말을 탈 때의 편리성을 감안하여 좁은 바리를 입었다.

상의 위에는 의례용으로 긴 저고리를 입기도 했다. 허리에는 가죽이나 헝겊으로 된 띠를 맸고 장화를 신었다. 또 귀고리, 목걸이, 팔찌, 반지 등의 장신구를 즐겨 착용했다.

. 중국 고서화에 전해

백제와 고구려, 신라 삼국이 이러한 기본 복식을 이어받고 있다는 사실은 4세기 중국 梁나라의 '직공도(職貢圖)'에서 잘 나타난다. 4-6세기에 그려진 고구려의 고분벽화도 이를 확인하는 자료라 할 수 있다.

백제 왕의 옷매무새는 소매가 넓은 자색 두루마기(大袖紫袍)에 청색 비단 바지(靑錦袴)를 입고 가죽띠(素皮帶)를 맸다는 것이다. 또 흑색 가죽신(烏革履)을 신고 금화가 장식된 검은 비단관(烏履冠)을 썼다고 한다.

이 기록을 근거로 한 왕의 옷매무새에다 무령왕릉 출토품으로 장식을 곁들여 보면 아주 찬란하다. 자색옷에 꿰매어 붙인 사각형 혹은 오각형의 얇은 금판이 더욱 빛나고 허리에 두른 은제 과대는 위엄을 더했을 것이다. 왕비는 물론 왕도 귀고리를 달았고 금동제 신발(金銅履)을 신었다. 과대는 숫돌 물고기, 청동 등의 장식품을 길게 늘여뜨린 아주 화려한 허리띠다. 과대는 고구려나 신라의 귀족들도 6세기까지 금, 은으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백제 귀족들도 금과대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금동신발은 제사 등 특별한 경우의 의례용만 아니고 평상 집무복에도 갖춘 신발인지도 모른다. 금동신발은 보기와는 달리 딱딱한 신의 안쪽에 헝겊을 대면 충분히 신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밑바닥에는 뾰족한 스파이크 같은 것이 있어 신기에 불편하지 않다. 현재도 일본 신사의 신관(神官)들이 금동신발과 같은 모양의 신을 나무로 만들어 신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지난해 부여 능산리에서 발굴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에는 5인의 악사가 생생한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이들은 관을 쓰지 않고 머리를 길게 땋아서 조선시대 내인의 새앙내리 접듯이 몇번 접은 뒤 댕기로 묶어서 오른편 귀쪽에 붙였다. 이 모습은 마치 일본의 아좌태자 양쪽에 서 있는 왕자들의 미즈라를 연상시킨다.

이같은 악사의 모습은 소매 넓은 자색유와 치마(裙)를 입고 장보관(章補冠)을 썼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 신선으로 보이는 11개의 인물상도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과제다.


[병기]백제의 철기문화와 병기  

<출처>천리안 자료실

백제의 철기문화와 병기

1. 백제의 철기문화

2. 백제의 병기

1. 백제의 철기문화

백제는 일찍부터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일본서기(日本書紀)를 보면 백제의 근초고왕이 일본사신에게 철제 40장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현재 일본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이 신물(神物)로 여기는 가운데 소장하고 있는 칠지도(七支刀) 역시 백제가 일본에 준 단철(鍛鐵)의 칼이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역시 근초고왕때 일이다.

그리고 漢城시대 백제 유적인 서울 성동구 구의동 고분출토 쇠도끼와 철촉을 분석한 결과 실제 高炭素鋼으로 밝혀졌다. 이렇듯 백제는 漢城시대에 이미 철기문화를 꽃피웠다.

철기문화는 동서나 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의 융성을 좌우한다. 정복국가에서 무기는 철기문화의 꽃이기도 하다.

2. 백제의 병기

1) 부소산성의 마름쇠
사비성(泗비城)옛터인 충남 부여읍 부소산성(扶蘇山城)에서 얼핏 불가사리처럼 보이는 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철기는 마름쇠(鐵질藜)라는 일종의 방어용 무기였다. 4개의 가시로 이뤄진 마름쇠는 어느 방향으로 놓아도 첨예한 가시 하나가 위쪽을 향해 세워지도록 고안되었다. 그 중에 가장 큰 가시 하나에 구멍이 뚫려 여러개의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에도 이 마름쇠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기막힌 방어용 무기다. 마름쇠를 끈으로 연결, 성밖에 둘러놓으면 가시덩굴 역할을 하는 동시에 성벽 위에서 던지면 적을 살상하거나 쫓아버리는 무기 구실을 한다"(삼국사기). 마름쇠는 부소산성 출토품이 유일한 실물이다.

2) 공격용 무기
활과 화살, 쇠뇌(弩)는 공격용 무기이자 원거리 무기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 유물로 전남 나주 신촌리 9호고분 출토품이 있다.

3) 환두대도(環頭大刀)
칼자루 뒤끝의 둥근 고리 안에 장식무늬가 있는 환두대도 중 나주 신촌리 9호고분에서 나온 삼엽문 환두대도는 특히 유명하다. 철지에 금판을 씌운 타원형 병두고리의 중심 장식이 금동삼엽형으로 되어 있다. 손잡이에는 고기비늘무늬를 돋친 은판으로 감았다. 또 칼자루 끝 고리에 타출문의 돋친 은판을 씌우고 고리 안에는 봉황의 머리를 장식한 고리칼(단봉환두대도 : 單鳳環頭大刀) 역시 이 고분에서 발견되었다. 이밖에 무령왕릉 출토품이 있다. 타원형 고리표면에다 용을 새기고 고리안에서 여의주를 입에 문 용머리를 장식한 고리칼(금동장환두대도 : 金銅裝環頭大刀)이다.

4) 동물뼈제조 갑옷
갑옷이라고 하면 흔히 쇠를 연상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백제인들은 쇠가 아닌 동물의 뼈를 갈아서도 갑옷을 만들었다. 몽촌토성출토품 뼈비늘갑옷 골제찰갑(骨製札甲)이 그것이다. 이렇듯 백제인들이 입었던 갑옷의 윤곽은 밝혀지고 있으나, 투구와 방패가 발견되지 않았다. 본래 갑옷(甲)과 투구(胄)는 일습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두가지를 붙여 갑주(甲胄)라는 말을 쓰고 있다.

'삼국사기'는 갑옷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금갑을 비롯해 금휴개(金휴鎧), 명광개(明光鎧)라는 갑옷 이름이 기록되었다. 이들 갑옷은 신라 고분인 금관총(金冠塚)에서 나온 금동갑옷과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백제건축]백제의 토목기술  

<출처>천리안 자료실

백제의 토목기술

1. 백제의 축성

2. 백제의 성곽

3. 사비성의 구조

1. 백제의 축성술

백제는 처음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였고, 이어서 河南慰禮城 혹은 漢城을 도읍으로 하였다고 '三國史記'는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했던 때가 서기 5세기 후기까지였다. 이후 熊津(오늘날 公州)과 泗비(오늘날 夫餘)를 도읍으로 삼았다. 어떤 학자들은 오늘날 益山 지역에 別都를 경영하였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신라가 줄곧 한 곳에서 도읍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외세의 압력에 의하여 도읍을 옮기곤 했다. 국가성립기에는 이웃한 낙랑군(樂浪郡)과 말갈(靺鞨)이라 불리던 세력에 의하여 도읍이 불타는 경우도 있었다. 또 한군현(漢郡縣)을 몰아낸 뒤에는 고구려와 대치한 상황에서 백제는 출성을 통해 방어력을 향상시킬 필요성이 컸다. 그런만큼 한성시기의 백제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력을 키우려 축성을 해온 것은 곧 백제의 성장과정인 동시에 발전과정이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오늘날 한강과 임진강 유역에 자리잡은 여러 옛 성터들은 백제가 국가로서 성장하던 과정에서 축조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에서도 풍납동 토성과 몽촌토성은 가장 규모가 큰 중심적인 거승로서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이러한 강안(江岸)에 위치한 성들은 주변의 산 위에 있는 성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어 커다란 방어망을 형성하였다고 여겨지고 있다.

한편 백제 후기에 이르면 돌로 성벽을 쌓는 안팎겹쌓기(內外來築)와 바깥면을 돌로 수평잡아 굄쌓기를 하고 안쪽을 돌부스러기와 흙으로 채우는 방법(外築內托)이 확인되고 있다. 축조기법의 다양한 발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던 것을 알려주고 있는 대목이다. 이처럼 발전된 축성술은 백제가 멸망한 다음 통일신라로 이어지고, 한편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고대성곽의 원류를 이루었던 것이다.

한편 백제의 축성기술은 직접적으로 일본에 건너갔다. 일본의 가장 오랜 역사서인 '日本書紀'에는 7세기 후반 백제가 나, 당 연합군에게 국도를 함락당한 뒤 많은 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대마도와 壹岐, 築紫에 방어병력과 봉수대를 배치하고 水城을 쌓았다고 하였다. 또 서기 665년 8월에 달솔(達率)(백제의 제2관등) 답발춘초를 보내어 長門國에 성을 쌓게 하고 역사 달솔 억례복류와 사비복부를 보내어 축자국의 大野, 椽이라는 두성을 쌓았다고 하였다. 오늘날 대마도에 남아있는 가네다(金田)성과 규슈에 있는 오노조(大野城), 미즈키(水城), 기이조 등은 모두 이 시기에 백제인이 주축이 되어 축조한 것으로 일본에서는 특별사적으로 관리되고 있다. 이 성들의 축조에 백제의 지배층이 관련되어 있다는 기록은 현재 성곽의 배치관계와 축조기법 뿐만 아니라 거기서 출토되는 그릇조각이나 기와조각이 부여에서 보는 것과 동일하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 日本書紀에 기록

일본의 고대성곽 가운데 가장 긴 학술적 논쟁을 거친 것이 고고이시(神龍石)란 것이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산성과 동일한 것으로 계곡부분은 돌로 벽을 만들고 성문과 수구문을 두었으며 대부분의 성벽은 돌로 된 기단위에 판축의 토루로 구성되었다. 수십년간 이것을 놓고 성성설(聖城說)과 한국식 산성설(山城說)로 논란을 거듭하다가 발굴조사에 의하여 산성(山城)임이 확인되었다. 이의 축조연대는 아직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백제의 축성술이 주축이 되고 신라와 고구려 계통의 영향도 받아 이룩된 우리나라 성곽의 연장임은 우리보다 일본의 학자나 일반인들이 더 잘 알고 있는게 사실이다.

 2. 백제의 성곽

백제시대 성곽은 당연히 도읍지였던 한강유역과 금강유역에 집중적으로 남아 있다.

풍납동(風納洞)토성(土城)은 서울 강동구 천호대교 아래쪽에 남아있는 평지토성으로 그 둘레가 4Km에 이른다. 현재 동쪽 성벽에는 몇 군데 성문 터가 남아있으나 한강에 면한 성벽은 거의 유실됐다. 이 토성을 백제 초기 도읍인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몽촌토성(夢村土城)은 현재 올림픽공원 안에 있다. 목책유구와 토성 외곽에 하천을 파고 한강물을 끌어댄 해자(垓字)의 흔적이 발견되어 하남 위례성의 주성(主城), 곧 궁궐이 있던 곳으로 알려지고 있다. 타원형의 내성과 그 바깥에 달린 외성으로 나눠져 있으며 총 둘레는 2천2백85m로 8천명 내지 1만명이 살 수 있는 규모다.

광주(廣州)이성산성(二聖山城)은 풍납동 토성, 몽촌토성과 함께 도성 권역에 들어있다. 총 둘레 1천9백25m로 내부면적은 5만평이다.

아차산성(阿且山城)은 풍납동 토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광장동이 있다. 풍납동 토성과 함께 도성과 함께 도성의 북쪽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공주(公州)공산성(公山城)과 부여(夫餘)의 부소산성(扶蘇山城) 및 나성(羅城)은 뛰어난 방어조건을 갖춘 백제 후기의 도성이었다. 여기에 부여 북쪽에 있는 증산성(甑山城)이나 금강하류 대안에 축조된 성흥산성(聖興山城) 등은 모두 부소산성을 겹겹이 둘러싸 보호하는 외곽 방어시설 역할을 했다.

3. 사비성의 구조

백제가 泗비城으로 도읍을 옮긴 것은 널리 알려진 대로 AD 538년의 일이다. 그러니까 사비성은 漢城(서울)과 熊津(공주)을 거쳐 3번째 도읍으로 자리잡은 도성이다. 오늘날 충남 부여군 부여읍 일대로 압축되고 있다.

사비성은 扶蘇山城과 平地城이 연결되어 둘러쳐진 羅城의 개념을 갖는다. 부소산성을 제외한 나성은 현재의 부여시가지 주위를 에워싼 야산능선을 이용하여 축조되었다.

泗비城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지역에 있었던 백제 때의 도성이다. 백제 도읍자체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한다. 백제가 협소한 熊津(공주)을 버리고 넓은 평야를 포용한 땅에 보다 큰 도읍을 건설하기 위해 천도한 것은  AD 538년(성왕 16년) 봄이다. 백제는 사비로의 천도를 국가체제 재정비의 시기로 삼았다. 북서쪽으로 금강이 굽어 흐르는 가운데 동쪽으로는 산이 둘러쳐져 외적 방어에 더할나위 없는 조건을 갖추었다. 도읍을 사비로 옮긴 까닭을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밀접했기 때문에 해상교통시 유리한 성이 고려된 것으로 보는 경향도 잇다. 사비성은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1백30년간의 수도가 되었다.

사비도성은 산성으로서 扶蘇山城과 平地城으로서의 羅城으로 이루어졌다. 부소산성은 부소산을 양쪽 머리가 낮게 감싸 두르고 백마강을 향해 초승달의 형태를 보여 半月城이라고도 불렀다. 이밖에 사비성, 所夫里城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다.

 

 

[백제공예]백제의 공예  

<출처>천리안 자료실

공예(工藝)

1. 도기 제조술

2. 백제의 기와

3. 무령왕릉 발굴

 백제의 무령왕릉(武寧王陵)출토의 금관관식(金冠冠飾)과 신라의 금관을 비교하여 보면 차이점을 알 수 있다. 무령왕릉 출토 금관관식은 초화문관식(草花紋冠飾)인데 자유로운 구도 위에 비대칭적인 절묘한 공간구성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의 금관은 같은 기본형으로 녹각형(鹿角形)과 수지형(樹枝形)의 입식이 기하학적으로 대칭되며 단순한 공간구성을 하고 있다. 이는 조익형(鳥翼形)관식이나 금제관모 등에서도 그러하다. 목걸이나 팔찌도 실은 자세히 보면 단순한 대칭이나 기본형을 고수하고 있는데, 무령왕릉 출토의 목걸이나 팔찌는 현대적 감각을 지니고 자유로운 구상에 있었다.

그리고 작가의 창조적 태도가 왕비의 팔찌에 작가의 이름을 새길만큼 확립된 것이었다.

1. 도기 제조술

백제의 도기 제조술은 아주 뛰어났다. 특히 사비시대의 백제는 도기표면에 녹유(綠釉)를 입히는 선진기술을 습득함으로써 다른 주변 국가를 압도했다.

사비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도기나 도제품을 제작한 가마터(窯址)는 현재 충남 청양 본의리(7세기 전반), 부여 정암리(7세기), 전북 고창 운곡리와 익산 신용리(6세기 중반), 전남 영암 구림리(6-7세기) 등에 남아있다. 이들 가마터는 모두 80년대와 90년대에 접어들어 발견되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상당히 과학적으로 축조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비시대 가마들은 거의가 경사진 언덕을 따라 올라가 축조한 반지하식 등요(登窯)로 이루어졌다. 이는 고화도(高火度)를 효율적으로 유지, 보다 견고한 도기를 만들기 위한 과학적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청양 본의리 등요는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재래식 사기가마처럼 계단식 등요로 밝혀졌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 거의가 평요(平窯)이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익산 신용리 가마는 반지하식 등요로 천정 평면은 독사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은 형식은 일본의 스에무라(陶邑) 가마군으로 연결되었다. 영암 구림리에서 발굴된 가마 역시 반지하식이고 평면은 독사머리를 했다. 다만 영암 구림리 가마는 고화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창불구멍을 낸 것으로 조사되어 기능상 한 단계 더 발전한 가마로 여겨진다.

사비시대 이전의 가마터도 더러 남아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전남 승주 대곡리(3-4세기), 충북 진천 산수리(4세기)등이 이 시대의 가마다. 이러한 최근의 발굴자료들은 3세기에서 7세기에 이르는 동안 백제 도기가마의 변천 및 발전상을 보여주고 있다.

. 백제인의 陶器文化

사비시대 백제도기에서 주목할 그릇은 녹유기(綠釉器)다. 강도가 높은 질그릇에 녹갈색의 유약을 입힌 이 그릇은 7세기 초기에 나타난다. 부여 능산리 고분군에서 출토된 녹유그릇받침(器臺)이 바로 그것이다. 이 그릇은 조각으로 출토되었으나 복원작업을 거친 결과 나팔모양을 한 녹유그릇받침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질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기법의 도기라 할 수 있다.

이 선구적 질그릇인 녹유기는 통일신라로 이어져 널리 사용되기에 이른다. 위에 톱니바퀴 모양의 장식이 있고 세로로 붙은 와선무늬 장식의 띠 사이사이에 구멍이 뚫린 그릇받침은 사비시대 백제 녹유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질그릇에 유약을 입혀 녹유기를 구워내는 백제 도공들의 생산기술은 선진적이었다. 그릇에 유약을 입히는 시유술(施釉術)은 뒷날 고려청자와 같은 본격적 도자기(陶瓷器)를 생산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익산 미륵사(彌勒寺)절터에서도 7세기 전반쯤의 도기들과 기와편들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표면에 녹갈색의 녹유를 입혔다. 녹갈색의 산화납을 저화도에서 입히는 방식으로 녹유를 시유했다. 녹유가 시유된 기와에서 백제는 7세기 전반쯤에는 그것말고도 기와와 같은 도제품에 녹유를 보편화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녹유가 결국은 통일신라에 널리 전파되는 것이다.

백제도기나 도제품의 우수성은 생산기반시설과 견주어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7세기 전반에 과학적인 질그릇 가마를 만들었다. 지난 86년 사비성 고토에서 그리 멀지않은 청양 본의리 한 구릉에서 발견한 반지하의 계단식 등요(登窯)가 그 시기의 가마다.

2. 백제의 기와

사비시대 백제의 도기와 도제품을 말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와류다. 국립부여박물관이 최근 발굴조사한 부여 정암리 기와가마터(瓦窯地)가 기와류를 만들어 낸 대표적 유적으로 부여 시가지 남쪽 백마강 언덕의 석비레층을 파고들어가 터널식으로 구축한 굴가마들이다. 길이 4.5-6.5m크기의 평요(平窯)2기와 등요(登窯)2기 이외에 작업장까지 발견되었다.

이들 가마군에서는 주로 연꽃무늬 수막새를 비롯해 망새편, 암수키와 등의 기와류가 주로 나왔다. 그리고 상자형 전돌과 자배기, 벼루 등도 출토되어 도와전류(陶瓦塼類)는 물론 도기류(陶器類)까지 생산한 중요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오늘날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대할 수 있는 도제유물(陶製遺物)의 얼마쯤은 정암리 가마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문화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사비시대가 백제문화의 황금기라면 도기나 도제품의 수요가 왕성했을 것이다. 이는 백제의 도기제조술을 발전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흔히 호자(虎子)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도기인 소변기로부터 뼈항아리 골호(骨壺)에 이르기까지, 또 일상용기와 종교적 성물(聖物)인 불상(佛像)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그리고 궁궐과 사찰 건축에 따른 거대한 망새(치尾)나 기와류, 산경산수문전(山景山水紋塼)처럼 아름다운 벽돌이 있다. 때로는 도기와 도제품은 껴묻거리(副葬品)로 수요되기도 했다.

. 기와무늬

백제의 기와 무늬는 숫막새의 공간 속에 가득찬 만발한 꽃송이로 알맞게 살이 쪄서 꽃잎 끝이 버선 코처럼 살짝 들고 있어 입체감과 아울러 온화하고 조화적인 조형미를 주었다. 모두 굴곡의 곡선미를 최고로 발휘하여 색깔도 회백색의 부드럽고 우아한 질감이다. 이러한 백제 연꽃의 아름다움은 미륵사지 석등의 대석이나 여러 불상의 연화좌(蓮花座) 및 광배(光背) 등에서도 같은 감각으로 조형되었다.

신라는 형편에 따라 때로는 고구려식 와당(瓦當)을 제작하고 때로는 백제식 와당을 제작하여 썼던 것이니 신라적 개성이란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체로 백제와당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신라는 느긋한 생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개성을 융합시킨 와당을 삼국말기에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영향이 우세한 것이었다.

신라의 황룡사지 출토전을 보면 통일신라 이전 것은 무문전(無紋塼)이다.

백제는 부여 규암에서 출토된 산경문(山景紋), 봉황문(鳳凰紋), 연화문(蓮花紋), 귀면문(鬼面紋), 반용문(蟠龍紋), 와운문(渦雲紋) 등의 문양전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조형예술을 대표하는 것이다.

생동하는 힘과 온화하면서 부드러운 곡선이 서로 어울려 과히 신공(神工)의 재주를 다하였다.

우리는 백제 산수화의 높은 경지를 이 산경문전에서 볼 수 있으며 백제인의 해학적 여유를 귀면문에서 볼 수 있다. 비운문(飛雲紋)에서 튀어나올 것 같은 구름의 요동이며 그 한정된 원의 공간 속에서 무한히 창공을 나르는 것 같은 생동하는 봉황문의 구도는 백제인의 높은 회화적 구상을 엿보게 한다. 신라는 통일신라 이후에 문양전을 만들었는데 이는 보상화문이 기본형이며 기하학적이고 도식적이어서 백제의 저 자유로운 구상을 따르지 못하였다.

. 瓦塼士 존재한듯

백제 도기항아리는 어깨가 넓어 광견호(廣肩壺)라는 이름의 항아리, 발이 셋 달린 삼발이 항아리,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 등 여러 기형이 있다. 목이 긴 병을 비롯해 자라병이 있는가 하면 바가지모양의 도기, 동잔, 잔, 삼발이잔, 주전자, 동물모양의 그릇 등 백제도기는 실로 다양한 형태를 이룬다. 납작한 원형판에 마치 동물의 다리를 연상시키는 다리가 다닥다닥 이어진 사비시대의 도제품 벼루는 뒷날 통일신라와 일본에 전파된다.

이들 명품은 고대사서가 기록하고 있는 백제기술집단의 하나인 와박사(瓦博士)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준다. 백제의 기술집단은 사비시대사회가 요구하는 보다 많은 문물을 창출함으로써 백제는 동아시아의 문화대국(文化大國)으로 우뚝 세웠다. 특히 당시 도기 제조술이 이룩해 낸 백제 최초의 녹유기(綠釉器)가 나온 능산(能山)리에서 금동용봉봉래산향로(金銅龍鳳蓬萊山香爐)가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3. 무령왕릉 발굴

지난 1971년 여름 공주 송산리에서 무령왕의 무덤을 발굴했다. 동방의 투탕카멘왕 무덤이랄 수 있는 유적이다. 출토된 유물 가운데 뛰어난 금속제품들을 살펴보면 우선 왕의 위엄을 보이는 금동용봉손잡이 큰칼, 왕권의 지혜와 힘을 상징하는 사람과 동물이 조각된 사신경(청동거울), 3가지 금속으로 구성 제작된 동탁은잔이 있다.

. 과학적 이론 바탕

동탁은잔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받침은 구리 할금이며, 잔과 뚜껑은 은으로 만들고 손잡이는 연봉모양이지만 꽃받침은 금이다. 그리고 표면은 받침에서 뚜껑까지 역동하는 용과 겹겹이 핀 연꽃, 봉래산과 그 위를 나는 봉황새등 무늬들을 새겼다. 향로와 미술적 모티브가 같다고 볼 수 있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백제의 높은 금속기술수준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다.

. '아연 - 청동기' 특징

청동기는 대체로 쌍합법으로 주조가 가능하나 팔주령같이 구조가 복잡하거나 기하학적 무늬를 현미경적 작업으로 새긴 다뉴세문경은 소위 실납법이라는 주물기술로만 가능하다. 특히 제조기법이 신비의 수수께끼로 알려진 이 세문경은 지금도 많은 전문과학자들이 실험고고학 측면에서 연구하고 있다.

 

 

백제시대 탈놀이 “백제기악”  

우리민족의 자랑스러운 연극유산인 ‘백제기악’은 그동안 전하는 사료의 부족과 연구자들의 무관심으로 잊혀져가고 있음이 사실이다.

서기 612년(백제무왕13년) 백제사람 미마지에 의해 일본으로 전해진 후 일본 전통기능의 모태로 인정받고 있는 백제기악이 우리나라에서는 한동안 까맣게 잊혀지면서 부여 구드레 한모퉁이에 ‘미마지 사적현창비’가 주위의 무관심속에서 외로이 서있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 나라현 사쿠라이에는 ‘미마지’가 처음 기악을 일본에 전한 터전임을 확인하는 ‘쓰찌부다이’라는 비석이 서 있고 일본 전통예능인들이 해마다 이곳을 찾아와 옷깃을 여미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승되고 있는 기악탈 200여점이 문화재로 지정 보존되면서 근년에는 그의 연희까지도 복원코자 나라현에 소재한 덴리대학 아악부를 중심으로 집중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

또 여러 학술재단과 NHK방송국이 이를 적극 뒤받침하면서 미국을 비롯한 해외공연을 거듭하고 있으며 백제기악탈 복원품을 소장하고 있는 일본 ‘약사사’(백제장인들에 의해 지어진절)에서는 매년 5월5일 백제기악 야외공연을 열고 있다.

국내에서도 근년에 들어 기악의 복원과 관련된 작업이 몇 몇 뜻 있는 인사들에 의해 조심스럽게 진척되어 온 바 있으며 특히 공주 민속극 박물관에서는 1996년 이래 기악탈의 복각을 위하여 일본의 국립도쿄박물관과 정창원 등에 보관된 대표적 기악탈을 현지 답사, 실측하여 복각하는 작업을 해왔다.

그리고 지난해 6월 백제기악 복원을 위한 방안모색이라는 주제로 제21회 전국연극제 기념학술 심포지움이 개최되었으며 같은 해 10월 제49회 백제문화제 학술심포지움이 백제기악의 복원 주제를 가지고 공주문화원에서 개최한 것은 백제기악복원을 위한 준비단계로 여겨져 다행한 일이다.

백제의 탈놀이 기악을 복원하는 일은 잊혀져가는 전통문화의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는 막중한 과업이 아닐수 없다.

하루속히 기악의 복원 재창조를 위한 구체적이며 실제적인 방인이 논의되고 이를 수렴하면서 이를 계기로 백제문화권 충남의 전통연극유산을 재 정립하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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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천리안 자료실

백제의 궁궐 
 

백제는 수도가 있던 지역을 중심으로 제1기 한성시대, 제2기 웅진시대, 제3기 사비시대 등 3기로 나눠 살펴본다.

1. 한성시대

기원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이다. 현재까지 한성시대의 왕성 위치 및 유적에 대해서는 거의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의하면 궁안에는 회나무를 심었고 우물과 연못을 두었으며 궁의 서쪽에는 활쏘는 대를 조성하는 등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다.

2. 웅진시대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475년부터 538년까지 60년 사이이다. 동성왕은 20년 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한성으로부터 내려온 귀족 세력과 웅진성 지역의 신흥 귀족세력을 조정하여 왕권의 신장을 꾀하였다. 곧 우두성을 비롯한 5개성을 쌓는가 하면 웅진서 안 궁궐 동쪽에 임류가이라는 고층 누각을 지어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 만큼 왕권을 안정시켜다 무녕왕 때에는 왕권이 재확립된 듯 중국의 양나라에로부터 영동대장군 곧 중국의 동쪽 을 평안하게 만들었다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다. 이때의 궁궐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그가 죽은 뒤 축조된 무녕왕릉의 건축술로 미루어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왕궁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3. 사비시대

사비시대에 문헌상 주목되는 것으로는 무왕 때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는 망해루와 의자왕이 왕궁 남쪽에 세웠다는 망해정 및 의자왕이 지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다는 태장궁 등이 있다. 또 무왕 35년에 궁 남쪽에 못을 파고 20여리 밖에서 물을 끌어 들였으며 못가에는 버드나무를 심고 못안에 방정선산을 모방하여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국립 공주박물관 전시 유물  

<출처>천리안 자료실

국립 공주박물관 전시 유물

1. 돌짐승[石獸, 국보 제 162호]

응회암이라는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돌로 만들어진 석수는 뭉뚝한 입을 조금 벌리고 있고 코는 크지만 콧구멍이 없다. 높은 콧날이 등뒤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좌우에 눈과 귀가 있다. 등에는 융기가 네 곳에 있고 머리 위의 융기 상면에는 철제의 나뭇가지모양 뿔이 패어진 홈에 꽂혀 있다. 몸의 좌우에는 날개모양이 도안처럼 부조(浮彫) 되어있고 네 다리는 짧고 발톱이 뚜렷하지 않다.

2. 무령왕의 지석[誌石, 국보 제 163호]

  왕릉의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2장의 장방형 돌판 이다. 가로 41.5cm 세로35cm 두께5cm의 청회색 섬록암에 해서체로 글이 새겨져있다. 이 지석 은 우리 나라 지석 중 가장 오래 된 것일 뿐만 아니라 이 지석이 출토됨으로써 왕릉은 삼국 시대의 왕릉 중 피장자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무덤이 되었다, 비록 내용은 소략 하지만 '삼국사기'에 누락된 사실을 보충할 수 있었고 매지권(買地券)에서 알 수 있듯이 백 제인들의 사상 연구에 주요한 단서가 되었다. 이 지석 2장이 고분 축조연대를 분명히 제시 해 주었기 때문에 왕릉 출토유물은 삼국시대 고고학 연구 특히 편년 연구에 기준자료가 되 었다. 왕의 지석 표면에는 "무령왕이 62세 되던 523년 5월 7일 붕어(崩御)하여 525년 8월 12일에 대묘[大墓·王陵]에 모시고 지상과 같이 기록하여 둔다." 는 내용이 새겨져 있고 그 뒷면에는 방위표(方位表) 또는 능(陵)의 위치를 표시하는 묘역도(墓域圖)를 나타내 10간(干) 12지(支)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3. 금제 뒤꽂이[金三足, 국보 제153호]

 왕의 머리부분에 있는 거울 위에서 출토되었다. 전체적인 형상은 날개를 펴고 나는 새의 모습과 유사하다. 새 날개와 비슷한 역삼각형의 상단부 에는 꽃무늬[花紋]와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이 새겨져(打出) 있다. 하단부에는 갈래의 꽂이 를 만들었다. 이 뒤꽂이는 금판을 꽂이부 쪽에서 상단부 쪽으로 갈수록 얇게 두르려 폈고, 긑을 이용하여 절단하였으며, 테두리를 따라가면서 가는 선(打出)을 돌려 완성하였는데. 조 익형(鳥翼形)의 상부에는 팔화문(八花紋)이 한 개씩 상·하 두 개의 조그만 원문(圓紋)을 사 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S자형의 인동문(忍冬紋)이 두 줄기가 서로 대향(對向)해 있으며, 새의 머리와 날개 형태 부분의 윤랑(輪廊)은 점열(點列)로 돌려져 있다.

4. 환두대도[環頭大刀]

왕의 좌측 허리춤에서 발견되었다. 손잡이 끝[龍紋]의 둥근 고리에는 용무늬[龍紋]가, 손잡이 상하에는 거북등무늬[龜甲紋]와 봉황무늬[鳳凰紋]. 인동무늬[忍冬紋] 가 베풀어져 있다. 손잡이 중심부는 뱀배무늬가 새겨진 금실과 은실을 교대로 빽빽하게 감 아 장식하였다. 칼집은 나무에 칠을 해 만들었다. 용과 봉황이 장식된 둥근고리큰칼[環頭大刀]은 5세기 후반 이후의 삼국시대의 왕릉급 무덤에서만 한정적으로 출토되며 왕의 권위를 상징한다. 무령왕이 패용한 이 대도의 용무늬는 함께 출토된 다리작명[多利作銘] 은팔지의 정교한 용무늬와 비교할 수 있으며 국내 출토 용. 봉황문대도 중 가장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5. 왕비 관장식[金製冠식飾, 국보 제 155호]

 왕비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 다. 얇은 금판에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과 화염문[火焰紋] 장식을 투조(透彫)하였다. 왕의 관식과는 달리 문양이 좌우대칭이며 영락을 달지 않았다. 중앙에는 7개의 연꽃잎이 바닥으로 늘어진 모습을, 그 위에는 막 피어오르는 꽃을 꽂은 꽃 병을 투조하고 있어 불교적인 요소가 관식의 제작에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 유리동자상[琉璃童子像]

왕비(王妃)의 허리부근에서 나온 두 개의 유리 동자상 가운데 하나는 하반신(下半身)이 파손되어 있다. 담록색(淡綠色)이 감도는 두 개의 동자상은 몸체의 형 상을 간략하게 새겨서 표현하고 있는데 얼굴표정이 각각 남(男), 여(女를) 표현하여 동남(童男), 동여(童女)를 형상화(形象化) 한 듯하다. 이 동자상은 왕비가 살아 있을 때 부적과 같 이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장신구에 매달아 왕비 자신을 지키고자 했던 수호신적인 성격이 짙다.

7. 벽돌

왕릉 축조에는 모두 28종류 이상의 다양한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중 주목되는 것으로 는 명문 있는 벽돌과 문양 있는 벽돌이다. 명문 있는 벽돌은 '...사임진년작(士任辰年作)' 명 (銘)이새겨진 벽돌과 '대방(大方)', '중방(中方)', '급사(急使)' 명이 압출(壓出) 된 벽돌이 있다. 문양 있는 벽돌에는 각각 짧은 변과 긴 변에 문양이 있는 것이 있는데 짧은 변에는 연꽃무늬(蓮花紋)와 인동연꽃무늬(忍冬蓮花紋)로 장식되고, 긴 변에는 연화사겨자무늬(蓮花斜格子紋)와 사격자무늬(斜格子紋)로 장식되었다.

8. 금제 귀걸이 [金製耳飾, 왕비, 국보 제 157호]

모두 4쌍이 출토되었다. 머리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主璟], 중간장식[中間飾], 끝장식[垂下飾]등을 갖추었고, 발치 쪽에서 출토된 2쌍은 중심고리과 수하식만 갖춘 것이다. 노는 고리[流環]에 2점의 귀걸이를 매달아 만들었다. 길쭉한 귀걸이는 영락을 붙인 사슬모 양 연결금구를 탄환모양의 끝장식을 매달았다. 짧은 귀걸이는 중간 장식으로 소환연접반구 체(小環連接半球體)를 덮어씌운 담녹색 유리구슬을 사용하였고 사슬형금구로 사익형(四翼形)의 끝장식을 연결하였다.

9. 아홉 마디 목걸이[金製九節頸飾, 국보 제 158호]

모두 아홉 마디로 되어 있는 이 목걸이는 한 마디의 길이가 6cm정도인데 가운데가 가장 넓 으며 6면으로 각져 있고 전체적으로 약간 휘었다. 각 마디의 양끝은 끈처럼 가늘게 늘려서 걸기 위한 고리를 만들고 끝은 다시 몸체에 다섯 바퀴 정도 정교하게 감아서 마무리하였다. 착용고리는 금봉을 말아 만든 가는 고리[細環]이며, 여기에 9절 중 양끝 마디의 고리를 걸어 연결하였다.

10. 다리작명은팔찌[多利作銘銀釧, 국보 제 160호]

   왕비(王妃)가 왼쪽 손목에 찼던 이 은팔찌의 안쪽에는 그 제작 연유(緣由)에 대한 글씨가 세로로 새겨져 있다. 즉 왕비가 세상을 떠나기 6년 전인 "경자년(庚子年, 520년) 2월에 다리 라는 장인이 대부인(大夫人), 즉 왕비를 위하여 이 팔찌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마지 막의 230주이[二百世主耳]는 무게단위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함께 나온 은꽃잎 장식 안에 새 겨진 일백주(一百主)와 통하는 것이다. 팔찌의 바깥 면에는 혀를 길게 내밀면서 머리를 뒤쪽으로 돌리고 발이 3개인 두 마리의 용 이 막 꿈틀거리듯 생동감 넘치게 표현되었는데, 그 솜씨에 힘이 묵직한 팔찌와 잘 어울리고 있다. 발톱과 비늘이 섬세하게 표현된 한 마리용의 꼬리가 다른 용의 목 밑으로 들어가 포 개어진 채 바깥 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11. 신발[飾履]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세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신발의 형태와 제작기법은 왕 신발 과 비슷하지만 무늬의 구성 등에서 차이가 난다. 내외측판은 전면에 거북등무늬[龜甲紋]를 구획하고 그 안에 봉황무늬[鳳凰紋], 인동당초무늬 [忍冬唐草紋]를 표현했는데, 모두 문양부분만 남기고 바탕을 투각하였다. 영락은 신발이 맞 닿는 부위를 제외하고 전면에 달았다. 바닥판의 무늬는 내외측판과 같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9개의 철 못이 박혀 있 는데 단면은 원형이다. 전면에 달개가 달려 있다.

왕의 신발은 내측판, 외측판과 바닥판의 3판을 서로 붙여 만들었다. 각 판은 다시 안에 은 판이 있고 그 바깥에 금동판을 덧댄 것이다. 신발 속에는 3중의 포(布)가 붙어 있고 얇은 나 무껍질이 함께 나왔는데 바닥에 깔았던 것으로 보인다. 바닥은 앞부분이 조금 들려 있고 10 개의 철못이 박혀 있는데 단면은 정사각형에 가까운 사각추 모양이다. 내측판의 표면에는 전면에 거북등무늬[龜甲紋]가 구획되었는데 그 안에는 꽃잎무늬[花紋]를 장식하였다. 외측판 역시 거북등무늬가 타출되어 있는데 내부에 꽃잎무늬와 더불어 봉황이 표현되어 있다.

13. 베개[頭枕, 국보 제 164호]

나무토막을 역사다리꼴 모양으로 다듬고 윗 부분을 U자형으로 파낸 다음 전면에 붉은 칠을 하였다.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선을 돌린 다음 그 안에 같은 금박으로 육각형의 거북등 무늬를 연속적으로 표현하였다. 육각형 안에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의 안료로 비천(飛天)·새그림·어룡(魚龍)·연꽃·인동(忍冬)·네 이파리꽃 등의 그림을 그렸다. 베개의 윗 부분에는 나무로 조각하여 만든 두 마리의 봉황을 서로 마주보게 붙였다. 이 봉 황의 부리와 귀의 일부분에 금박(金箔)을 띠처럼 돌렸다. 입안에는 청동막대를 박았으며, 봉 황 밑에는 '갑(甲)' 과 '을(乙)' 이라는 붓글씨가 쓰여 있다.

14. 발받침[足座, 국보 제 165호]

   크기와 바탕색은 베개와 비슷하다. 전면에 붉은 칠을 하고 가장자리를 따라가며 금박으로 테두리를 돌린 다음 그 안에 검은색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앞뒷면에 모두 그려져 있는 데, 연꽃무늬[蓮花紋]와 구름무늬[雲紋] 등이 표현되어 있다. 윗부분의 좌우에는 철막대[鐵心]가 박혀 있고 이를 중심으로 연꽃무늬가 그려져 있다. 철막 대에는 금제릉형장식(金製菱形裝飾)이 붙어 있는데, 대나무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

15.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紋鯨, 국보 제 161호]

 무령왕릉에서 나온 3개의 청동거울[銅鏡] 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뒷면의 거울걸이를 중 심으로 4각(角)의 구획이 있고 그 주위에 신수(神獸)를 표현한 방격규구신수문경(方格規矩神獸紋鯨)이다. 이 거울에 묘사된 사람은 신선(神仙)을 표현한 듯, 머리에는 상투를 틀고 반나체에 삼각하의 (三角下衣)만 입은 모습이며 손에는 창(槍)을 들고 4마리의 큼직한 짐승들을 사냥하고 있는 중이다. 손잡이 주위에는 4각형의 윤곽을 만들고 작은 돌기(突起)들을 배열한 다음 그 사이에 12간 지(十二干支)의 글씨를 새겨 놓았다. 거울은 일상용구(日常用具)로서보다 오히려 지배자들의 권위(權威)의 상징물(象徵物)로서의 성격이 강하였다.

16. 왕 관장식[金製冠飾, 국보 제 154호]

 왕의 머리부분에서 거의 포개어진 채 발견되었다. 얇은 인동당초문(忍冬唐草紋)과 화염문(火焰紋)장식을 투조(透彫) 하였는데 문양의 좌우가 비대칭이다. 줄기와 꽃에 지름이 5mm정도의 달개를 달았다. 달개는 둥글고 작은 원판이며 여기에 작은 구멍을 뚫어 금실로 꿰어 4∼6회 꼬아 달았는데 모두 127개이다.「구당서(舊唐書)」에 '(왕 은) 검은 천으로 된 관(冠)에 금꽃을 장식하고...'라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왕릉 출토의 관식은 왕이 평소 사용했던 비단모자의 좌우 혹은 전후에 꽂았던 장식품으로 생각된다.

17. 금제 귀걸이 [金製耳飾, 왕, 국보 제 156호]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고리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 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 달았다. 큰 귀걸이의 중간장식은 2개의 원통체를 대칭되게 연결하였고, 원통체의 끝에는 금 실과 금 알갱이로 장식한 심엽형[心葉形]장식이 달려 있다. 끝장식은 큰 심엽형(心葉形) 장 식[母葉]을 중심으로 작은 심엽형 장식[子葉] 2개를 대칭되게 매달았다. 작은 귀걸이의 중간 장식은 금 알갱이를 붙여 마든 소환연접구체 5개를 '0-0'모양의 고리로 연결하였다. 끝장식 은 담녹색 곡옥에 누금수법 장식이 가미된 금모자 를 씌운 것으로, 금모자[金帽]에도 좌우대 칭으로 2개의 심엽형 장식이 달려 있다. 이와 비교할 수 있는 귀걸이가 경주의 금령총[金領塚]과 일본 구마모토현의 에다후나야마 [江田船山] 고분에서 출토된 바 있다.

18. 목걸이[金制頸飾]

왕릉 안에서는 여러 종류의 목걸이가 출토되었다. 왕비가 착용하고 있던 아홉 마디[九節]와 일곱 마디의 목걸이처럼 금봉(金捧)을 깎거나 두드려 만든 것이 있고, 소환연접구체나 금박 (金箔) 유리옥(琉璃玉) 및 옥(玉)을 엮어 만든 것도 있다. 그리고 탄화목(炭化木)을 장기알처 럼 깎고 그 테두리에 금판(金版)을 감아 장식품을 만들고, 그것을 수십 점이어서 만든 예도 있다.

19. 금모곡옥[金帽曲玉]

금모곡옥은 비취곡옥에 루금세공(鏤金細工)한 금제 모자를 씌운 것인데 무령왕릉에서는 감 장용금모(嵌裝用金帽)가 모두 25개가 발견되었는데 그 형태와 출토 위치도 모두 달라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

20. 금제영락부소환

왕비의 발치 북쪽에서 팔찌와 함께 출토되었으며, 크기는 아주 작다. 중심고리에 금실을 두 번 감은 다음 횡으로 두세 번 감아서 마무리하였고 끝장식은 작은 원형달개이다. 왕의 귀걸이는 하나의 중심고리[主環]에 작은 고리 2개를 연결 고리로 하여 두 줄의 귀걸이를 매달았다.

21. 유리제연관옥

연관옥이란 여러 가지 색깔의 납유리를 나선형 줄무늬로 서로 엇갈리게 꼬아서 만든 구슬을 일컫는 것으로, 고대 이집트에서는 이미 기원전에 나타났지만 우리 나라에서는 무령왕릉의 연관옥 밖에 없다. 무령왕릉의 연관옥은 짙은 주황색과 황색, 녹색의 3색을 나선형으로 조화시켜 세련된 장식을 가미한 것으로 무령왕릉 보다 약간 늦은 6세기 중엽 일본의 무덤에 서 종종 출토되고 있어 백제에서 전해졌음을 짐작케 한다. 이들 연관옥은 모두 납유리로, 녹 색 부분은 동, 짙은 주황색 부분은 철, 백색 부분은 주석(朱錫)에 의하여 발색(發色)되는데,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서 만들어진다. 먼저 철사에 진흙을 얇게 발라서 말린 다음 색깔 없 는 유리를 녹여서 유리(遊離)를 만든다. 이것이 식으면 그 표면에 녹색, 짙은 주황색, 황색의 납유리 분말 가루를 잘 개어 입혀서 말린 다음 열을 가해 용착(溶着)시킨다. 이것이 식으면 녹색 부분과 짙은 주황색 부분을 깎아서 얕은 홈을 만들고, 황색 납유리의 분말 가루를 개 어 홈에 채워 말린 후 가열하여 황색 부분을 용착시킨다. 이것이 완전히 식으면 철사를 뽑 아 내고 겉모양을 깎아 형태를 다듬어 제품을 완성시킨다. 이와 같이 연관옥은 가장 복잡 한 과정을 거쳐서 만들어지는 구슬 중의 하나로 무령왕릉과 같이 격(格)이 높은 특별한 무덤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22. 각종 유리구옥 일괄[各種 琉璃球玉 一括]

 담황색, 감색, 녹색, 적색, 청색 등 7∼8가지의 색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크기와 형태가 모두 같지는 않으나 백제 장인들의 유리에 대한 착색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된 모습을 보여 준다. 지름이 2mm정도의 작은 것으로부터의 약간 큰 것들인데 가운데는 모두 구멍이 있어 유기질의 끈으로 꼬여서 패용 한 듯하나 이 구슬들이 왕과 왕비의 머리, 가슴, 허리 부위에 서 발견되었으므로 전체가 1습으로 된 것인지 또는 구슬 표면에 금박을 씌운 것, 연주옥(連珠玉) 등도 섞여 있어 더욱 그 사용된 형태와 목적을 알기 어렵다.

23. 화형원두관정[花形圓頭棺釘]

화형원두관정(花形圓頭棺釘)의 화형 원두는 중심으로부터 방사형(放射形)으로 홈을 파서 팔화형(八花形)을 만들고 은판(銀板)을 씌워 장식하였는데 그 중에는 금은 빛을 나타내고 있는 것도 있으며 정신(釘身)은 네모나게 생겼다. 팔화형(八花形)의 지름은 약 2.4cm, 정(釘) 의 길이는 9∼10cm이다.

24. 영락부금제화형장식

 육화형(六花形) 금판의 중앙이 반구형(半球形)으로 도드라졌고 화형좌(花形座)의 3화판 끝에 각각 소공(小孔)이 뚫려 있는데 무엇인가에 매달기 위한 것으로 보이며 반구형 정상에는 소 공 2개를 뚫고서 금줄을 꼬아 원형(圓形) 영락(瓔珞) 1개를 달았다.

25. 서혈사 석조 여래 좌상[西穴寺 石造 如來坐像]

지대석(地臺石)과 상·중·하대석을 갖춘 대좌(臺座)위에 불신(佛身)이 앉은 모습이 잘 조화 되고 있다. 나발(螺髮)과 얕게 조형된 육계(肉 ) 그리고 이목구비 뚜렷한 상호를 지닌 불신 은 우견편단식(右肩偏袒式)을 따른 대의를 걸치고 석가모니의 5인중의 하나인 항마촉지인 (降魔觸地印)을 결(結)한 채 길상좌의 결가부 구멍이 있는데, 아마 불상광배(佛像光背)가 있 었던 듯하다. 모두 8각형으로 만든 대좌 가운데 지대석에는 비천상과 반인반조인 가릉빈가 상, 안상을 조각하고 그 뒤의 하대석에는 여덟 이파리의 유려한 복련중판연화문(覆蓮重瓣蓮花文)과 5단으로 된 중대석 받침을 만들었다. 하대석 위에 올려진 중대석에는 석탑에서 많 이 볼 수 있는 우주(隅柱)를 조각하고, 그 위에 올려진 상대석에는 16 이파리의 앙련(仰蓮) 을 중판(重辦)으로 새겨서 장식하고 있다. 특히 불신(佛身)의 다리 아래의 상대석 위에는 부 채꼴의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는데, 이는 석굴암본존불(石窟庵本尊佛)을 비롯한 통일 신라 시대 불상에서 흔히 보이는 특징이다.

26.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247호]

 1974년 공주군 의당면 송정리 절터에서 출토, 현재 국립 공주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면 (三面) 보관(寶冠)을 쓴 얼굴은 거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보관의 중앙에 화불(化佛)이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는 이 상(像)은 둥글고 아담한 단판연화좌(單辦蓮花座)의 양식과 함께 백제 후기 약 7세기경의 작품이다.

27. 계유명천불비상[癸酉銘千佛碑像, 국보 제108호]

 이 비석(碑石)모양의 불상은 상·하 두 개의 돌로, 연꽃 무늬 받침과 몸체가 한 돌이며 그 위에는 두단으로 이루어진 지붕 모양의 덮개 돌이 한 돌이다. 둥근 연꽃 받침 위에 세워져 네모꼴의 몸통에는 아래 부분에 여래상(如來像)과 보살상(菩薩像)을 도드라지게 조각하고, 그 양쪽으로는 각기 4줄의 글씨를 새겼으며, 그 나머지 몸체와 덮개 돌 전면에는 작은 여래 상을 가득 새겼다. 이는 천불 신앙에 의한 천불상(千佛像)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이와 같은 비석 모양의 불상, 이른바 불비상(佛碑像)은 중국 남북조(中國 南北朝)시대부터 시작하여 당(唐)나라까지 유행하였던 형식으로서 우리 나라에서는 특히 통일 신라 시대 초기의 연기(燕岐) 지방에서 성행하였다. 불상에 새겨진 글씨의 내용은 「계유(673년 4월 15일 에 백제 유민(百濟 遺民)인 신도 250인이 국왕 대신(國王 大臣) ·7세부모(七世父母)·법계 중생(法界 衆生)을 위하여 이 불상을 만들다.」라고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