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麗

제22대강종(康宗, 1211~1213 재위2년)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5:57

 제22대강종(康宗, 1211~1213 재위2년)    

  강종은 명종의 맏아들이자 의정왕후 김씨 소생으로 1152년 4월 을사일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숙(璹). 개명은정(貞). 이름은 오(晶). 자는 대화(大華)이다.
1171년(명종 1) 관례를 올리고  1173년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197년 부왕과 함께 최충헌(崔忠獻)에게 쫓기어 강화도로 유배 되었다. 1210년(희종 6)에 소환되어 이듬해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守司空上柱國漢南公)에 책봉되었다.
같은해 12월 최충헌에게 옹립되어 폐위된 희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이때의 그의 나이 60세였다.
강종은 어린 시절부터 무신정권의 틈바구니 속에서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지냈으며 급기야 무신들에 의해 부왕명종이 강제로 퇴위당함에 따라 14년 동안 강화도에서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강종이 60세의 나이로 22대 왕으로 즉위는 하였지만 최씨 무단정치로 실권이 없었다. 그는 최충헌이 머무르던 흥녕부를 진강부로 고치고 그에게 문경무위향리조안공신의 칭호를 주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업무를 최충헌이 별감으로 있던 교정도감에 일임하였다.
왕의 생일을 광천절(光天節)이라 정하고, 왕모 의정왕후 김씨(懿靖王后金氏)를 광정태후로 추존하였다.
또한, 원자 진(瞋:뒤의 高宗)을 태자에 책봉하고, 왕비 유씨를 연덕궁주(延德宮主)로 하였다.
그 후 1213년 8월 지병으로 병상에 누웠으며, 그 달 정축일에 태자 진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62세를 일기로 생을마감하였다.
시호는 원효(元孝)이며, 장지는 후릉(厚陵:개풍군 현화리)이다.

    강종은 이의방의 딸인 사평왕후 이씨와 종실 신안후 성의 딸인 원덕왕후 유씨 두명의 부인을 두었으며, 그들에게서 고종과 수녕궁주를 얻었다.

  강종 준철문열단총명헌이모목청원효대왕의 휘는 오요 1자는 대화이며 자는 법주라 하니 명종의 장자며 모는 광정태후 김씨로 의종 6년 임신 4월 을사에 탄생하였다. 명종 3년 4월에 태자로 책립되어 이름을 숙주라 사하였다 27년 9월에 최충헌이 강화에 추방하였다가 희종 6년 12월에 서울로 소환되어 명년 정월에 한남공으로 봉케 되었으며 이름을 정이라 고쳤다 12월 계묘에 충헌이 희종을 폐하고 왕을 사제에서 받들어 강안전에서 즉위하고 이름을 오로 고쳤다.

임신 원년 춘 정월 기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신해에 왕자 진이 안악현으로부터 환경하였다. 을묘에 관정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병인에 제하기를「등극한 처음에 은유를 폄이 예이나 2월 하순에 가서 길일을 가려 사를 반포할 것이오 서경 및 제로의 주 목이 진봉하는 방물은 일체 이를 면제한다」라고 하였다. 연생경도장에서 3일간 설하였다. 2월 경신에 고주사 중서사인 이의를 금에 보내니 표에 이르기를 「엎드려 보건대 국왕 영은 일찌기 선대의 업을 전하여 외번을 공경히 지키더니 문득 질병에 걸려 날로 심하고 오래되어 몸이 심히 쇠약하게 되었나이다 치료를 하여도 효과가 없어 전부할가 걱정하여 바라기를 번거러운 기무를 벗어남으로 인하여 잠시 여천(여생)을 보전할가 하나이다(그것은) 대개 신의 중부인 선국왕 신 탁의 유촉을 승품한 데에 말미암은 것이니 신은 친등으로는 유자1)임으로 도리상 승가에 합당하니 만약에 체경이 있을 때는 반드시 먼저 추여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년 12월 25일에 신으로 하여금 국가의 사무를 권지케 하였나이다 신 영는 사양할 도리가 없고 받기에도 또한 견디기 어려우나 돌이켜 보건대 부탁함이 가벼운 일이 아니옵기 장차 호소하여 멀리 (천청에) 아뢰고자 하였사오나 백성은 하루도 임금이 없어서는 안되고 방사2)는 오래도록 제사를 결할 수 없음을 생각하여 힘써 군정에 따라 임시로 중임을 맡았나이다 국천척지3)에 진실로 전추(운월)하는 회포만 깊어지고 부심석간4)에 사실의 전말(단예5))을 앙고하오니 행여나 연청6)을 돌리시면 홍은을 깊이 감하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임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의봉루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3월 경신에 문하시랑 평장사 임유가 졸하였다. 하 4월 신사에 왕의 생일로 광천절을 삼았다. 을사에 이의가 금에서부터 돌아오니 조에 이르기를「짐이 생각컨대 그대 나라는 대대로 충근을 돈독하게 하여왔다 생각컨대 전왕이 갑자기 병으로 사양하므로 그대는 중부의 아들로 본래부터 현명함을 일컬었고 선신의 유훈에 미하여 (그대로) 하여금 기무를 섭행토록 하였다 하였으므로 답조를 주어서 특히 긍종함을 표시하노라 이에 보내온 장주를 거듭 보고 마땅히 짐의 뜻을 밝게 타일러야 할 것이니 그 은허를 받거던 더욱 번의를 삼가히 하라 이어서 마땅히 사신을 보내어 책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5월에 왕비 의정왕후 김씨를 추존하여 광정태후를 삼았다. 6월 병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전경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인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았다. 추 7월 신유에 금의 봉책사 대리경 완안유기와 직학사 장한이 왔다. 을축에 아을 진을 책봉하여 왕태자를 삼아 원복7)을 가하고 부를 세웠다. 정묘에 호부시랑 이실춘을 금에 보내어 만춘절을 하하였다. 임신에 왕이 책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근자에 전왕이 이에 나라를 사양하고 경이 현숙하다고 하여 세봉 주기를 바란다기에 이에 사신을 보냄에 다달아 하여금 가서 석명을 가하라고 하였으니 더욱 충각함을 생각하여 힘써 총광에 대하도록 하라 이제 사신 명호대장군 대리경 완안유기와 부사 한림직학사 대중대부장한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책명토록 하고 인하여 경에게 차복 금인 필단 궁전 안마 등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라」고 하고 책에 이르기를「짐은 어귀8)의 바탕을 가지고 천을 대신하여 명함을 맡게 되니 무릇 소영9)의 예에 참예할 자에게는 반드시 과후한 은을 높여 주리라 하물며 동번(고려)은 그의 후도10)를 삼가하여 지난번 (왕위를) 전하고 받을 즈음에 있어서 극히 읍양의 풍을 돈독히 하였도다 공장을 보고 특별히 좇아 허락하노라 권고려국사 왕오(#:2-530)는 자성이 점쟎코(개제11)) 학문이 깊어서 안으로는 선을 즐기는 정성을 펴고 밖으로는 어진 이를 좋아하는 명망이 성하도다 리념을 상고하여 화협하고 정권을 가수함에 능히 이겨내어 부촉자로 하여금 지인의 일컬음을 얻게 하고 전수자로 하여금 과연 부탁의 보람이 있게 하였도다 이 한 일을 돌아볼 때 어찌 양전의 길이 아니라 하리오 이러므로 그대의 진봉을 바르게 하고 이 새로운 은택을 풍성하게 하노라 아아 산해 5부12)를 총람하여 모사(모토 즉 봉토)를 주고 차복 9명13)을 가하여 그 기장을 빛나게 하나니 바라건대 충애의 마음을 간기하여 더욱 총수의 뜻을 체하도록 할 것이며 그대의 직분을 힘써 닦아 삼가 짐의 말에 복응할 지어다 가히 특히 개부의동삼사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0000호 식실봉 1000호를 제수할 것으로서 인하여 유사로 하여금 날을 가려 예를 갖추어 책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여한 상로14)는 고가 19척인데 광화문의 고는 겨우 15척인지라 깎아 낮추어 문에 들일 것을 청하니 금사가 답하기를 상로의 제는 모두 정식이 있으므로 증손하지 못는 것이라 하므로 이에 문지방 밑을 파고 (상로)정상의 3륜을 떼어 끌어들렸다. 8월 정해에 성변소재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사신을 금에 보내어 봉책과 사물을 사하였다. 동 10월 계유 삭에 금의 숭경 원년 년호를 썼다. 갑오에 왕비 유씨를 책하여 연덕궁주를 삼았다. 을미에 내정에서 초제하여 성변을 가시었다. 11월 병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을미에 김원의로 참지정사 판례부사를 삼고 최홍윤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정극온으로 수사공 좌복사 판삼사사를 삼았다.

계유 2년 춘 정월 계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을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갑자에 나주에 지진하였다. 하 4월 갑오에 지능에 배알하였다. 중서성에서 비서감 이순중이 남성시를 관장할새 시제를 오해하였음을 탄핵하므로 폄하여 남경부유수를 삼고 진사의 적을 초제하였다. 5월 병인에 한발로 재우하였다. 6월 신미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이 보살계를 내전에서 받고 승 지겸으로 왕사를 삼았다. 추 7월 임인에 허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8월 계유에 왕이 불예(제왕의 병)하여 정축에 조하기를 「짐이 불류15)로서 외람되히 대보를 이어 받아 지금에 수년이 되었다 덕은 박하고 짐(책임)은 무거운데 병은 점차 위태하여지니 오직 천위(왕위)는 잠간동안이라도 비울 수 없는지라 태자 진은 덕은 족히 써 위에 알려질만하고 명은 족히 써 아래를 크게 덮을만한지라 이에 왕위로써 명하여 중대하고 어려운 일을 물려 주노니(유대투간16)) 무릇 너희들 백료는 각기 너희들의 일을 잡아 사왕(명령)에 쫓도록 하고 산능제도는 힘써 검약함을 앞세울 것이며 역월의 복17)을 3일로 제(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날 해 저물때 해와 같이 큰 별이 건방(서방)에 보이더니 이윽고 땅에 떨어졌다 밤 2고(2경)에 왕이 수창궁 화평전에서 훙하니 재위 2년에 수 62이다 익를 원효라 하고 묘호를 강종이라 하였으며 능을 후능이라 하였다 고종 40년에 명헌을 가익하였다.

사신이 찬하기를「강종이 재위하던 날에 무릇 시위한 바는 모두 강신의 제약을 받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나라를 다스린 날이 얕으니 슬프도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