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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대 희종(熙宗,1204~1211 재위7년)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5:56

   제21대 희종(熙宗,1204~1211 재위7년)

  희종은 신종과 선정왕후의 맏아들로 1181년 5월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영. 초명은 덕(悳). 자는 불피(不陂)이다. 1200년(신종 3)에 태자로 책봉되고 1204년에 신종의 양위를 받아 대관전(大觀殿)에서 즉위하였다.

   희종은 신종과 마찬가지로 실질적인 왕권은 없었으며, 국사 전반에 관한 모든 결정은 최충헌에 의해서 이뤄졌다. 1205년(희종 1)에 최충헌(崔忠獻)을 진강군개국후(晋康郡開國侯)에 봉하였으며 1206년에 다시 진강후(晋康侯)에 봉하고 흥녕부(興寧府)를 세우게 하였다.
1207년 최충헌의 청으로 유배자 300여명을 가까운 곳으로 옮겨 방면하였다. 1208년 개성 대시(大市) 좌우의 긴행랑(行廊) 1,080영(楹)을 다시 짓게 하였는데 오부방리(五部坊里)와 양반의 집에서 미속(米粟)을 내게 하여 그 비용을 충당하게 하였다.
  1209년 4월에는 청교역리 3명이 최중헌 부자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가 귀법사 승려의 고발로 실패했다. 이 사건당시 범인의 색출을 위하여 임시로 설치된 교정도감은 그 후부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기관으로 자리잡는다. 무신들의 합좌기구인 중방은 이 순간부터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다.

  희종은 신종과는 달리 부왕의 선위를 받아 왕실의 예법에 따라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측면에서 즉위에 대한 대의 명분이 확실하였다. 이같은 사실은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최충헌을 제거하려는 움직임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211년 내시 왕준명(王濬明) 등과 함께 당시 정권을 휘두르던 최충헌을 죽이려다가 실패하였는데, 이로 인하여 도리어 최충헌에게 폐위를 당하여 강화로 쫓겨났다. 이때 희종의 나이 혈기왕성한 31세였으며, 재위 7년 11개월이었다.
  
  뒤이어 자란도(紫鸞島)로 옮겨졌고, 1215년(고종 2) 다시 교동으로 옮겨졌다 가 1219년 서울에 봉영(奉迎)되었다. 이렇게 서울에 돌아와서 딸 덕창궁주 (德昌宮主)를 최충헌의 아들 성(珹)과 혼인시켰다. 1227년 복위의 음모가 있다는 무고로 최우(崔瑀)에 의하여 다시 강화로 쫓 겨났다가 교동으로 옮겨져 1237년에 법천정사(法天精舍)에서 죽었다. 묘호는 처음에 정종이었으나 뒤에 희종으로 고쳤다. 강화에 장사하여 능을 석릉(碩陵)이라 하였다.시호는 성효(誠孝)이다.
                                                                   출처:
미르나라

희종 성효대왕의 휘는 영이오 자는 불피이며 고휘는 덕이다 신종의 장자요 모는 정선태후 김씨로 명종 11년 신축 5월 계미에 탄생하여 신종 3년 4월에 태자로 책봉되고 7월 정월 기사에 내선을 받아 즉위하였다.

 

정축에 신종이 붕어하매 2월 경신에 양능에 장사지냈다. 낭중 임영령을 금에 보내어 상을 고하였다. 3월 정묘에 문선왕에게 석전(夕奠 염습 때부터 장사 때까지 매일 저녁에 신위 앞에 제물(祭物)을 올리는 의식)
하니 국상(國喪)으로 이 달에 행한 것이다.

하 4월 갑오 삭에 모후 김씨를 추존하여 왕태후를 삼았다. 기미에 사하였다. 5월 경오에 왕의 생일인 수기절을 고쳐서 수성절이라 하였다. 6월 기해에 금(金)이 제전사 소부감 장칭과 대리소경 매경과 위문사 공부시랑 석각과 기복사 이부시랑 출갑회 등을 보내 왔다. 3사가 하루씩 걸러 입경하여 인은 영은 선은 3관에 나누어 거처하였다. 을묘에 왕이 조삼을 입고 제전사를 인도하여 조를 연경궁에서 맞이하였다. 경신에 금사를 향연하였다. 구례에 객사를 향연하는 날 내시 한 사람이 왕명을 받아 우창의 건후 15석을 내어 시위군인에게 분급하여 주었는데 이날 군인이 균등하게 분급하지 않음에 노하여 서리(초)한 사람을 때려 죽이니 내시는 도망쳐 면하였다. 형부가 군인을 잡아 가두고 국문고략하여 죽은 자가 수인이나 되었으나 마침내 서리 죽인 자는 얻지 못하였다.

추 7월 임술 삭에 금(金)이 횡선사 병부시랑 완안립을 보내왔다. 8월 무오에 장군 김경부와 예부시랑 최윤우를 금(金)에 보내어 사제를 사하였다. 참지정사 차약송이 졸하였다. 9월 신미에 연등으로 법왕사에 행차하여 임신에 대회를 설하였다. 금년에 9월로 한 것은 정월이 바로 초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달에 사신을 금(金)에 보내어 위문 기복 횡선을 사하였다. 동 10월 계사에 인득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11월 갑자에 원자 지를 세워 왕태자를 삼으니 나이 8세였다. 11월 계축에 최충헌으로 수태사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축을 원년 하 4월 신해에  추밀원사 김평이 졸하였다. 6월 갑오에 홍문공도 제생이 충헌에게 호소하기를「본도 급제 임득후는 세도가에 아부하여 우리 선성당을 장군 김준에게 팔았으니 청컨대 죄주소서」라고 하기를 수일간 하는지라 헌대에서 득후를 옥에 잡아 가두고 백은 10근을 물리었다. 추 7월 병신에 마중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8월에 송의 상선이 장차 예성강을 떠나려고 하는데 감검어사 안완이 가서 금수물(난출지물)을 감시하다가 국금을 위반한 송상 수인을 발견하여 혹독하게 매질하였다. 충헌이 이 말을 듣고 완을 파면시키고 또 어사를 가려서 보내지 않음을 논죄하여 시어 박득문도 파면시켰다. 동 12월 정묘에 최충헌으로 문하시중 진강군 개국후를 삼고 기홍수로 판리부사를 삼았다.

병인 2년 춘 2월 기미에 신종을 대묘에 부제
(祭  삼년상을 마친 뒤에 신주를 조상의 신주 곁에 모실 때 지내는 제사)하였다. 하 4월 갑자에 금(金)이 대리경 이자광조와 소부감 마암을 보내와 왕을 책봉하였다 선경 대관 양전의 의병이 오래되어 더러워졌으므로 왕이 충헌의 아들 장군 우에게 명하여 선경전에는 홍범편을 쓰고 대관전에는 무일편을 쓰도록 하여 써 북사(금사)를 맞이하게 하였다 계유에 왕이 장차 책명을 받으려 할제 좌승선 정숙첨을 보내어 금사에게 행례소를 상의케 하니 대답하기를「책명은 선경전에서 받고 연회는 대관전에서 설하고 망조배는 승평문 밖에서 행하도록 할 것이라」하거늘 왕이 써 충헌에게 문의하니 대답하기를「전왕 때 선경전이 불탔으므로 책명을 대관전에서 받고 망조를 승평문 밖에서 하였으나 이제 정전이 이미 이루어졌으니 어찌 가히 구차하게 한 때의 제를 따라 곧 구규(舊規  전부터 있는 규칙)를 잃겠나이까」하므로 드디어 이를 청종하였다. 6월 갑인에 유량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인에 대장군 박정모가 벼락을 맞았는데 정모는 사람됨이 탐람하고 거짓이 많았다. 추 8월 갑술에 현능을 배알하였다. 9월 을유에 창능을 배알하였다. 갑오에 양능을 배알하고 능 곁에 창신사를 중영하여 액을 효신이라 고쳐 써 명복을 빌게 하였다. 내시 최정빈이 역사를 감독하였던 바 왕에게 아첨하려 사치하고 아름다움을 극하게 하니 경비가 심히 많았다. 동 10월 신유에 친히 대묘에 협제하였다.

정묘 3년 춘 정월에 전년 겨울로부터 산서쪽의 달관이 많이 사망하므로 무반이 의심하기를 동반의 저주함이 아닌가 하고 간간이 불평하는 말이 있으매 내시원으로 써 중방과 장군방에서 기양도장을 행하도록 하였다. 2월 정미 삭에 최충헌이 주하여 제도의 유배자를 양이하고 방면하기를 거의 3백명이나 하였다. 3월 경자에 선경전에 거동하여 진강후 최충헌으로 하여금 왕태후에게 책보를 봉상케 하고 충헌에게 대견 금은 능견 안마 등물을 사하고 드디어 제왕 재추와 문무 상참 이상관을 향연하고 한 사람에 구마 한 필씩을 사하였다. 하 4월 기유에 사하였다.

무진 4년 춘 2월 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니 태사가 주하기를「진사세에 명당의 물이 흘러 선방을 파하였으니 상음을 더욱 기하는 것이온 바 또 향성문을 중영하는 역사도 있사오니 궐내에 유어하심이 불가하나이다」라고 하거늘 병인에 이판의 최우제로 이어하였다. 3월 임신에 왕이 충헌의 모정에서 곡연하여 창화하며 밤새도록 심히 술을 마시고 갑술에 이판궁으로 환어하였다. 윤월 을해에 덕양후 서와 영인후 진과 시흥백 진과 시중 최충헌 문하평장사 기홍수 임유 추밀사 우승경 동지추밀사 노효돈을 불러 누상에서 잔치하고 격구를 관람하였는데 구를 친 자에게는 채백을 차등 있게 주었다. 정유에 황보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기사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7월 정미에 대시의 좌우장랑을 개영하니 광화문으로부터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무릇 1008영이나 되며 또 광화문 안에 대창의 남랑과 영휴문 등 73영을 지으니 무릇 5부 방리의 양반에게 미속을 집집마다 걷우어 공역의 노임에 충당케 하므로 양반 방리의 역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8월 경인에 기거랑 임영식을 금에 보내어 천수절을 축하하였다. 갑오에 법운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도적이 무릉을 팠다. 왕이 예부의 제릉서에 명하여 제릉을 순심토록 하였는데 또 도굴자가 5∼6명 있어 곧 중사에게 명하여 원찰승으로 하여금 수축토록 하였다 유사가 탄핵하여 제릉의 능직을 파면하고 능호인을 원도에 유배토록 하였다 명년에 도적 수인을 잡아 죽였다. 9월 기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을해에 국노와 서노와 효순 의절을 향연할새 왕이 친히 돌며(술을) 권하였다 병자에 또 크게 환과 고독 독폐질자를 풀어 먹이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니 주 부 군 현도 또한 이 예에 의하였다 근자에 국가가 다난하므로 향례가 오래 폐지되어 왔는데 이에 이르러 조하여 도감을 세우고 다시 구제에 좇도록 하였다. 을유에 장군 최우 제에 행차하여 견룡에  명하여 격구케 하였다. 11월 신축에 정광습을 금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임주재는 하정하였다. 경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금이 호부시랑 돈부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기사 5년 춘 정월 정유에 왕이 금주의 붕함을 듣고 봉위사 사홍기와 제전사 이정중을 금에 보내었다 이정중이 금에 제기를 청하니 (금의) 유사가 불허하매 정중이 말하기를「길은 먼데 부음을 가장 늦게 들어 부산하게 행장을 꾸려(등장) 빨리 오느라고 미쳐 (제기를) 가지고 오지 못하였거늘 대국은 어찌하여 사소한 일로 사람을 책망하고 이 그릇(제기)을 아끼느뇨」라고 하니 이에 허하는지라 제사함에 미쳐 전구가 정전(#:2-524)하니 금인이 그 지성을 가탄하였다. 신축에 금이 손거관을 보내와 상을 고하였다. 기유에 왕이 신고(신종)의 기신도장으로 용흥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2월 무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금국의 대안 연호를 행하였다. 3월 정유에 유정동 최충헌의 집으로 이어하였다. 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갑인에 상장군 김원걸과 예부시랑 방응교를 금에 보내어 즉위를 하하였다. 신유에 여수하였다. 하 5월 무술에 수대사 문하시랑 평장사 최선이 졸하였다. 6월 계해 삭에 일식하였다. 신묘에 문하시랑 평장사 김봉모가 졸하였다. 신해에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경신에 문하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기홍수가 졸하였다. 동 10월 정묘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병자에 불정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11월 을미에 연경궁에 환어하였다. 기해에 합문통사사인 서연을 금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갑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금이 호부시랑 간근정을 보내왔다. 참지정사 이춘노가 졸하였다.
경오 6년 춘 2월 계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3월 갑오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기사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계유에 태사가 요언을 가실(불) 것을 청하였다. 6월 무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김홍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금이 횡선사 이자답정을 보내왔다. 이 달에 우룡혁을 금에 보내어 만춘절을 하하고 송효성은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추 7월 병오에 낭장 지방숙을 금에 보내어 횡선을 사하였다. 8월 임신에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병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9월에 최충헌의 내사동 제택에 행차하여 3일간 유하였다가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동 11월 정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금사가 왔다. 12월 을묘 삭에 일식하였다. 이 달에 명종의 태자 숙를 강화에서 불러왔다.
신미 7년 춘 정월 계사에 숙를 봉하여 수사공 상주국 한남공을 삼고 개명하여 정이라 하고 연등연에 나아가도록 하였다. 윤월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계미에 원비 임씨를 책하여 함평궁주를 삼았다. 신묘에 태자 지에게 원복을 가하고 책봉을 받게 하였다. 을미에 아들 의를 책봉하여 검교대위 수사도 상주국 시녕후를 삼았다. 병오에 사하였다. 5월에 금이 완안유부를 보내와 생신을 하하니 왕이 장군 김량기를 보내어 회사케 하였던 바 양기가 통주(금)에 이르러 몽고병을 만나 화살에 맞아 죽고 하절 9인도 또한 해를 당하니 금이 유골을 거두어 보냈다. 6월 신사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8월 임오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문하시랑 평장사 노효돈이 졸하였다 9월 정묘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최당이 졸하였다. 을해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이효전을 금에 보내어 만춘절을 하케 하였으나 길이 막혀 돌아왔다. 동 10월 무자에 강창서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11월에 금이 권지문방)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임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이실춘을 금에 보내어 하정케 하였으나 길이 막혀 돌아왔다. 12월 경자에 내시 왕준명 등이 최충헌을 죽이려 꾀하다가 이루지 못하였다. 계묘에 충헌이 왕을 폐하여 강화현에 옮겼다가 뒤이어 자연도로 옮기고 태자 지를 인주에 추방하고 한남공 정을 세웠다 고종 24년 8월 무자에 왕이 법천정사에서 붕어하니 낙진궁으로 빈을 옮겼다 재위 7년에 수가 57이며 시호를 성효라 하고 묘호를 정종이라 하였다가 뒤에 희종으로 고쳤으며 능을 석능이라 하였다 고종 40년에 인목을 가시하였다.
사신이 찬하기를「이 때는 충헌이 국명을 잡은지 이미 여러 해가 된지라 널리 당여를 심고 위복을 전천하였다 희종이 비록 일하려 하여도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마땅히 정도로 자처하고 어진 이에게 맡기고 유능한 사람을 등용하여 왕실을 자강하였더라면 비록 발호하는 신하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악을 마음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인데 왕은 이것을 알지 못하고 경박한 꾀를 청용하여 한 때의 분함을 풀려 하다가 마침내 방출을 당하게 되었으미 슬프도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