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麗

제18대 의종(毅宗,1146~1170 재위24년)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5:52

 제18대 의종(毅宗,1146~1170 재위24년)

  의종은 인종의 맏아들이자 제2비 공예왕후 임씨 소생으로 1127년 경오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현(晛), 초명은 철(徹). 자는 일승(日升)이다. 의종은 어린 시절부터 오락을 좋아하고 시를 즐겼다. 특히 격구에 몰입하여 학문을 소홀히 하고 내시나 무장들과 어울려 함께 시합을 하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어머니 공예왕후 임씨는 둘째왕자 경을 태자로 책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1134년(인종 12)에 태자가 되었으며 1146년 인종이 죽자 그의 유언되로 대관전에서 고려 18대왕에 올랐다. 그이 나이 20세였다.

   의종은 즉위 때부터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고려왕실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 있었다. 이미 인종 때에 이자겸(李資謙)의 전횡과 반란 등으로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할 겨를도 없이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남으로써 왕권은 더욱 쇠약해졌다.
묘청의 난 진압에 따르는 서경세력(西京勢力)의 몰락은 개경(開京)에 기반을 둔 문신세력(文臣勢力)을 득세하게하였다. 서경세력의 몰락은 고려왕실의 유력한 세력기반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고려왕실로서는 왕실의 권위회복과 왕권의 안정이 절실한 과제였다. 그러나 부왕인 인종이 해결하지 못한 난제(難題)를 어린 의종이 감당할 수는 없었다.
의종은 즉위초부터 개경 문신세력의 심한 제재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왕위를 엿보는 반역음모로 항상 신변의 위협마저 느끼고 있었다. 의종은 재위중 거둥이 잦았다. 그 이유를 이제까지 대체로 놀이를 좋아하는 그의 타고난 성격 탓으로 돌리고 있으나,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절박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 그 주된 이유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게다가, 당시 국제관계의 전개도 고려측에 유리하지 않았다.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가 인종 때보다 훨씬 더 강해져서 대륙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종 때에는 고려왕실의 국내적 지위는 물론 국제적 지위도 크게 위축되었던 것이다.
의종은 그 타고난 성격이 나약하고 섬세하였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다. 그는 격구(擊毬)와 음률(音律)에 능하였으며, 특히 시문(詩文)에는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러한 성격과 재능은 어려운 시기의 군주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즉위한 뒤에 그가 해결하여야 할 당면과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생각하고, 또 이를 실현해보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실추된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또 왕조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1148년에 현릉(顯陵:太祖陵)과 창릉(昌陵:世祖陵) 등을 참배하였으며, 1154년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1158년 백주(白州)에 별궁(別宮)을 창건하여 그 명칭을 친히 중흥(重興)이라 지은것을 보더라도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170년에는 서경에 거둥하여 신령(新令)을 반포하였다. 그는 장차 낡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정하여 다시왕화(王化)를 부흥하고자 하여 고성(古聖)이 권계(勸戒)한 유훈(遺訓)과 현재 민폐를 구제할 일을 채택하여 신령을 반포한다고 다짐하였다. 그 전에 그 주체적인 내용을 보면 유교적 정치이념에 대하여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불교·음양설·선풍(仙 風)을 중요시하였을 뿐이다.
이것은 의종이 실제정치에 있어서는 유교적인 가치관을 의식적으로 외면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마도 유교적 지식인이었던 문신에 대한 정치적 반감이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한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평소에 인정(人情)과 태평(太平) 등에 관한 생각과 글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하여보면, 의종은 당시 매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왕조 의 중흥과 좋은 정치의 실현을 염원하고 있었던듯하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 이 실제 정치면에 구체적인 성과로써 나타나지는 못하였다. 오히려, 그는 재위중 왕권능멸의 풍조와 신변의 위협으로 시달림을 받았다.
따라서, 그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부처나 여러 신(神)들에게 의존하거나 각 처로 옮겨다니며 놀이로써 시름을 잊거나, 문신들에게 자기과시를 하는 것 이었다. 그는 그가 처하여 있던 시대상황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그것이 의종대의 왕권이 가진 한계성이었다.
의종의 행적을 보면, 그가 재위중에 유흥과 오락생활에 깊이 빠지고, 또 지 나치게 불법을 숭상하고 신지(神祗)를 존신(尊信)하는 등으로 많은 폐단을 초래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인을 의종 개인의 방종경박한 성격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될 것 이다.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황 속에서 의종의 행동이 그렇게밖에 나타날 수 없었던 요인에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의종대의 왕권과 문신세력의 대립·갈등 은 정치적·사회적 혼돈을 초래하였고, 그것이 무신정변(武臣政變)의 계기가 되었다. 1170년 의종이 보현원(普賢院)에 거둥하였을 때에 정중부(鄭仲夫)·이의방 (李義方)·이고(李高) 등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왕위에서 물러나 거제현(巨濟縣)으로 옮겨갔다.이것이 바로 정중부의 난이다이와 동시에 그의 아우인 익양공 호(翼陽公晧)가 즉위하니, 그가 곧 명종이다. 이후 무신시대가 열게 되고, 고려사회는 새로운 변혁기로 접어든다. 무신시대는 정주부, 경대승, 이의민, 최충헌 일가로 이어져 명종대에서 고종대가지 1백년이나 지속된다.
그뒤 1173년(명종 3)에 김보당(金甫當)이 무신정권에 항거하여 거병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의종을 받들어 계림(鷄林:慶州)에 나오게 하였다. 그러나 김보당의 거병이 실패하자, 의종은 무신정권이 보낸 장군 이의민 (李義旼)에 의하여 비참하게 살해되어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에 던져졌다.이때가 1173년 10월이며 향년 47세였다.
묘효(廟號)는 의종(毅宗), 능은 희릉(禧陵)이며, 시호는 장효(莊孝)이다.
                                                                                출처:
미르나라


계유 7년 춘 정월 신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유에 원자의 이름을 홍이라고 사하였다가 뒤에 기로 개칭하였다. 갑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2월 신미에 우방재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계미에 수창관으로 환어하였다. 기축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3월 을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5백라한재를 설하였다. 신해에 흥성사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기묘에 아들 홍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고 사하였으며 내외 문무 양반에게 산직을 가하고 겸하여 전시
435)를 사하였다. 정해에 군신을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6월 기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목청전에 화재가 있었다. 계유에 왕이 보살계를 받았다. 갑신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금이 천덕 5월을 고쳐서 정원436) 원년으로 삼는다고 알려왔다. 추 7월 병신에 신궐에 환어하였다. 임인에 우난분재를 봉원전에 설하였다. 8월 병인에 선인전에 거동하여 중형을 논결하였다. 갑수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곽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동 10월 신유에 어사대가 복합하여 시사를 논하였다. 정묘에 왕이 환궁하였다. 11월 기해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탐라현의 도상437) 인용 부위 중련 진직 등 12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임인에 금이 소부감 아륵근언충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이 달에 기거사인 최루백을 금에 보내어 용흥절을 축하하고 예부원외랑 윤린첨은 생신 하함을 사하고 어사잡단 리양신은 방물을 바치고 예부원외랑 박유는 하정하였다.

 

갑수 8년 춘 정월 병인에 최자영으로 판병부사를 삼고 김영석으로 상서좌복사 판공부사를 삼았다. 정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왕제 민을 책하여 평원후를 삼았다. 병자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기묘에 경풍전에 거동하여 호종문신을 불러 청교역에서 청우를 바친데 대한 시를 지을 것을 명하였더니 직한림원 금효순 등 14인이 합격한지라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아울러 주과를 사하였다. 임년에 지문하성사 최윤의와 추밀원사 임극충을 불러 양화루에서 소연을 베풀고 밤이 다하여(야애)438) 파하였다. 2월 신해에 인종의 기일임으로 승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계축에 경천사에 행차하였다. 3월 병진에 최윤의 임극충 김존중 등 6인을 불러 양화루에서 곡연하였다. 무오에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환궁하였다. 하 4월 병신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5월 계축 삭에 일식이 있었다.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참지정사로 치사한 윤포가 졸하였다. 동교에서 열병하였다. 황보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무수에 금이 대부소감 량빈을 보내와 양 2000두를 사하였다. 추 9월에 서경 중흥사를 창건하였다. 동 10월 경진 삭에 노인을 향연하고 또 승 30000을 공양하였다. 이 달에 소태현의 하거439)를 개착하였으나 공을 마치지 못하였다. 11월 병인에 금이 대부감 이규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이 달에 김영녕을 금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봉설은 생신 하함을 사하고 김인유 횡사를 사하였다.

을해 9년 춘 정월 신해에 대부경 최유칭으로 서북면 병마사를 삼고 시형부시랑 허순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기미에 승을 봉원전에서 공양하였다. 임수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2월 정해에 급사중 민각과 좌사간 박득령 등이 복합하여 시사를 논쟁하였으나 회보가 없었다. 을사에 승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정미에 경천사에 출어하였다. 3월 임수에 환궁하였다. 경오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계유에 최자영으로 권판상서리부사를 삼고 최윤의로 권판상서병부사를 삼았다. 을해에 국청사에 출어하였다. 하 4월 경자에 환궁하였다. 5월 정미 삭에 일식이 있었다. 신해 단오에 경령전에 배알하였다. 경오에 최자영으로 판리부사 서경류수사를 삼았다. 갑수에 량원준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임극충으로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 태자빈객을 삼았다. 6월 정축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해에 왕이 보살계를 수문전에서 받았다. 을미에 최자영으로 서북면병마판사 겸판중군병마사를 삼고 최윤의로 동북면병마판사 겸판중군병마사를 삼고 문공유로 부(병마사)를 삼았다. 추 8월 병자 삭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송의 명주에서 우리 표풍인 지리선 등 5인을 돌려 보내왔다. 신묘에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평장사 최자영과 지문하성사 량원준과 기거사인 최루백과 좌사간 박득령과 좌정언 허홍재와 우정언 최석보를 불러 국정을 자문하였다. 동 11월 무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사에 금이 사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이 달에 우사원외랑 김순을 금에 보내어 용흥절을 축하하고 형부원외랑 김온중은 생신 하함을 사하고 호부랑중 최자비는 하정하고 좌사간 박득령은 방물을 바쳤다. 12월에 사공장의 작을 삭탈하였다. 무신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송이 우리 표풍인 30여구를 돌려 보내왔다. 문하시랑평장사 유필이 졸하였다.

병자 10년 춘 정월 계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임인 삭에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기복도장을 내전에 설하였다. 이 달에 좌승선 김존중으로 태자소보를 삼았다. 하 4월 갑오에 왕이 흥왕사 행차하여 화엄경을 전독하였다. 처음에 왕이 후사가 없어 왕비 김씨와 더불어 맹세하기를 만약에 아들을 낳으면 마땅히 김은자로 화엄경 4부를 이룩할 것이라고 하더니 원자가 탄생하매 미쳐 2부를 사성하였으므로 흥왕사 홍교원을 수리하여 이를 간직케 하고 원액을 홍진이라 고쳐 크게 법회를 설하고 낙성하였다. 병신에 환궁하여 대벽440) 이하를 사하고 법회에 종사한 모든 사람들에게 다 직과 상을 주었다. 5월 신해에 우박이 내렸다. 6월 신묘에 황문장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병인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났다. 8월 정축에 혜성이 멸하지 않음으로 2죄(참문)이하를 사하고 류자를 량이하였다. 갑오에 상서 한진을 금에 보내어 존호441) 올림을 축하하였다. 9월 을사에 어사대의 리원이 내관의 금복442)을 벗기니 왕이 노하여 그 리원을 포금하였다. 정미에 정안공 임원후가 졸하였다. 동 10월 을해에 장경도장을 선경전에 설하였다. 임오에 승 500명을 내전에서 공양하였다. 평장사 최윤의 이지무와 지추밀원사 신숙과 우승선 이원응과 우부승선 금이영과 국자감대사성 김영윤과 보문각학사 김영부와 지합문사 최온과 급사중 최응청과 내시전중감 최유칭과 어사잡단 김( ) 등을 불러 목청전에 들어가 선구보 양성정 및 어원의 화초를 두루 구경시키고 충허각에서 곡연을 사하였다. 처음 왕이 대내의 동북우에 일각을 짓고 편액을 충허라고 하니 김벽이 선명하였다. 또 내합별실에 좋은 약을 쌓아두니 그 뜻은 널리 여러 사람의 병을 치료코자 함이라 편액을 선구보라 하였으며 또 그 곁에 정자를 지어 괴석과 명화를 모으고 편액을 양성이라 하였다. 윤월 임인에 평장사 이지무로 태자태보를 삼아 김존중에 대하였다. 이 달에 금이 정원 4년을 고쳐 정륭 원년이라 하니 세조의 휘를 피하여443) 풍자로써 륭자에 가름하여 행하였다. 11월 임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금이 정원장군 야율준례를 보내왔다. 신묘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12월 병오에 여수하였다. 을축에 동북면 병마부사 이공승으로 추밀원좌부승선을 삼았다.

정축 11년 춘 정월 무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진에 목친전에 거동하여 증세승통 현희 등 200여승을 불러 재를 설하고 복을 빌었다. 계미에 익양후와 재신 최윤의와 이지무 등을 불러 편전에서 주연을 설하고 다음 날 오시에 이르러 파하였다. 을유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신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경천사에 행차하였는데 유사가 행재소444)가 좁으므로 사관을 물리치도록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사관은 나의 언동을 기록하는지라 잠시라도 떠날 수 없다]라고 하였다. 2월 기해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고조기가 졸하였다. 무신에 왕이 환궁하였다. 왕제 대녕후 경을 천안부에 유배하였다. 계축에 출어하였다. 정사에 팽몽령 등 8인이 군취하여 노름(도박)을 하였으므로 모두 남주에 유배하였다. 3월 임신에 장원정으로 이어하였다. 이날 밤에 상승국에 불이 나서 어련에까지 연급되었다. 경진에 천수사로 이어하였다. 계미에 례빈경 이중제와 그 가속을 남도에 유배하였다. 중제의 처 이씨는 상서 복림의 딸로 천성이 악하여 일찍이 종에게 한 말 가운데 신하답지 못한 말이 있었던 바 종의 처가 평소에 이를 원망하고 있었는지라 드디어 환자에 상소하여 아뢰게 되니 왕이 노하여 근신에게 명하여 이씨를 주리틀어(면전)445) 끌어오게 하고 온 가족을 귀양보내니 이로부터 참언이 번갈아 일어나고 왕이 많이 군신을 의심하게 되었다. 하 4월 병신 삭에 대궐 동쪽 이궁이 낙성되니 궁호는 수덕이라 하고 전호는 천녕이라 하였으며 또 시중 왕충의 집으로 안창궁을 삼고 전참정 김정순의 집으로 정화궁을 삼고 평장사 유필의 집으로 연창궁을 삼고 추밀원부사 김거공의 집으로 서풍궁을 삼았고 또 민가 50여구를 헐어서 대평정을 짓고 태자에게 명하여 편액을 쓰게 하고 곁에는 명화 이과를 심었으며 진기하고 아름다운 완호물을 좌우에 포열하였다. 정의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을 지었으며 그 북쪽에는 양이정을 지어 청자로써 지붕을 이고 남쪽에는 양화정을 지어 종려 나무(종)로써 지붕을 이었다. 또 옥석을 갈아 환희 미성 2대를 쌓고 괴석을 모아 선산을 만들고 멀리서 물을 끌어 비천을 만들어 사치하고 화려함을 다하니 군소무리들이 뜻을 맞추어 민간의 진이한 물건은 곧 밀지라 칭하며 원근을 묻지 않고 다투어 취하여 싣고 오는 짐바리가 길에 연달으니 백성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무수에 재추 대간 시신 등을 명하여 수덕궁을 유람케 하고 인하여 주식을 사하였다. 경자에 왕이 수덕궁에 입어하였다. 임인에 관란정에 거동하여 2죄 이하를 곡사446)하고 정함을 복직시켰으며 영선에 참여한 모든 사람에게 다 상을 주었다. 계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을사에 왕이 진사 400근으로 평장사 문공원의 집을 사서 순어소로 삼았다. 갑인에 왕이 환궁하였다. 갑자에 영의가 주하기를 [내년에 나라에 재앙이 있을 것이오니 마땅히 고사를 수리하여 이를 가시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해안사에 행차하여 풍수(지리)를 보았다(상). 5월 임신에 밀전에 거동하여 평장사 최윤의와 우승선 이원응 등을 소견하고 서홍정대 각 일요를 사하였다. 이날 밤에 왕이 내수와 령인을 거느리고 림정에 순연하여 새벽에 이르러서도 파하지 않았다. 계유 밤에도 또한 그러하였다. 병자에 박순충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왕이 동해 중에 우릉도447)란 섬이 있어 땅이 넓고 토지가 기름져서 예전에 주현이 있었던 곳으로 사람이 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명주도 감창 전중내급사 김유립을 보내어 가서 보게 하였다. 유립이 돌아와 주하기를 [땅에 암석이 많아 백성이 살 수 없겠더이다]라고 하니 드디어 그 의논을 그만두었다. 갑신에 관정사에 행차하여 풍수를 보고 드디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6월 무신에 김의 횡선사 대부경 장철이 왔다. 신해에 안화사로부터 돌아왔다. 무오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추 7월 무자에 송나라 상인이 앵무와 공작과 이화를 바쳤다. 8월 기해에 왕이 수덕궁으로 환어하였다. 을묘에 총지사에 행차하여 주지 회정을 불러 림정에 유상하고 기복시 2절을 류제하여 재추 시신에게 선시하였다. 호종한 백관과 군졸은 숲과 골짜기에서 노숙하니 수탄함이 자못 많았다. 회정은 오직 주금448)으로서 고임(행)을 얻어 은총이 비할 데 없으매 모든 승도들로 직상을 구하는 자는 모두 이에 따라붙어 뇌물을 주니 탐비함이 끝이 없었다. 신유에 왕이 이궁을 김오위 제상리에 두고자 하거늘 평장사 최윤의가 간절히 간하므로 이에 중지하였다. 임수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9월 계해 삭에 내시 박윤공에게 명하여 수덕궁을 증축케 하였다. 신미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다음 날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계사 삭에 천수사에 환이하였다. 임인에 대부사의 유밀이 다하였으므로 여러 사원으로부터 거두어 재초의 비에 충당케 하였다. 을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승 30000을 구정에서 3일간 공양하였다. 11월 계해 삭에 왕이 환궁하였다. 공부랑중 이광진을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고 형부원외랑 박육화는 횡사를 사하고 형부원외랑 김돈중은 하정하고 례빈소경 최령의는 방물을 바치고 공부원외랑 김가회는 용흥절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이날 밤에 평장사 최윤의 이지무와 승선 이원응 최유칭 등을 불러 림정에 유상하고 곡연을 사하였다. 기묘에 금이 소부감 완안덕수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계미에 장녀를 책하여 경덕궁주로 삼고 제2녀를 안정궁주로 삼고 제3녀를 순화궁주로 삼았다. 이날 밤에 재추와 근신을 불러 천녕전에서 곡연하였다. 갑신에 보제사에 출어하였다. 무자에 환궁하였다. 신묘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12월 계축에 조하여 정함의 사제로써 경명궁을 삼으니 음양가가 말하기를 개가 머리를 들고 주인에게 짖는 세라 임어함이 좋지 않다고 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무오에 이지무로 감수국사를 삼고 최함으로 정당문학을 삼고 김영부로 지추밀원사 태자빈객을 삼고 임극충으로 수사공을 삼았다. 경신에 경명궁에 이어하였다.

무인 12년 춘 정월 갑수에 환궁하였다. 2월 을미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가 경자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무오에 왕이 환궁하였다. 기미는 인종의 기일이므로 태평정에서 승에게 공양하였다. 때에 왕은 불사하기를 좋아하였으므로 중들이 궁정에 가득하고 은총을 믿고 환관에게 부탁하여 백성을 침요하고 다투어 사탑을 지으니 해됨이 날로 심하였다. 경신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3월 신유 삭에 일식이 있었다. 정묘에 사죄를 강등하고 류 이하는 면사하고 또 서경반역449)으로 노비에 충당된 자를 사하였다. 임신에 수덕궁에 행차하여 재추 대각 시신을 태평정에 향연하고 인하여 어원의 화목을 유상토록 허하였다. 임오에 국내 노인에게 크게 주식을 베풀었다. 하 4월 을사에 평장사 최윤의 지문하성사 신숙 동지추밀원사 김영부에게 명하여 상춘정에 초제하게 비를 빌게 하였다. 무신에 재우하였다. 5월 을축에 안화사에 행차하여 석정시를 짓고 재상과 사신으로 하여금 화진케 하였다. 병인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기사에 무지개가 관일하였다. 신사에 김정명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신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추 7월 기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유에 또 나타났다. 갑신에 왕이 환궁하였다. 8월 경자에 상서형부가 중형을 판결할 것을 아뢰었다. 을사에박순충으로 지문하성사를 삼았다. 병오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가 계축에 안화사로 이어하였다. 갑인에 태사감후 류원도가 주하기를 [백주 토산의 반월강을 실로 우리 나라 중흥의 땅이오니 만약 궁궐을 지으면 7년안에 북노(금)를 병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므로 이에 평장사 최윤의 등을 보내어 풍수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돌아와 주하기를 [산이 배조하는 듯하고 수가 순조로워 궁궐을 지음직한 곳입니다]라고 하니 왕도 그렇게 여겼다. 9월 기미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신에 최윤의와 지주사 이원응 내시 박회준 등을 보내어 백주에 별궁을 창건하였다. 회준의 성질이 가혹하여 정부를 서해도에서 징발하고 주야로 최촉하니 불일로 낙성케 되었다. 궐명을 중흥 전액을 대화라고 사하니 술자가 사사로히 말하기를 [이는 도선이 말한 바 경방(서방)의 객호가 머리를 들고 엄습하여 오는 세인 바 여기에 궁궐을 지었으니 혹시 위망의 환이라고 있을까 하노라]고 하였다. 계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정유에 안평재에서 곡연하고 좌승선 이공승을 불러 헌수케 하니 공승이 시를 지어 바쳤다. 을묘에 백주에 행차하여 병진에 중흥궐에 입어하였다. 정사에 대화전에서 수하하였는데 이 날에 천지가 혼흑하고 대풍이 나무를 뽑으니 왕이 자못 의심하여 다방으로 기양하였다. 무오에 군신을 대화전에서 향연하였다. 11월 계해에 환궁하여 사하였다. 갑자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량원준이 졸하였다. 경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유에 금이 고존복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계미에 금사를 향연하였다. 만보전이 불탔다. 12월 기축에 박순충으로 권판리부사를 삼았다. 계사에 부윤현인 봉가가 그 아비와 계모를 죽이고 가동까지 함께 죽여 모두 부엌 불에 던지고 도망하였다. 을미에 천수사에 행차하였다.

기묘 13년 춘 정월 병진에 해무리에 일이(문기가 관옥처럼 햇가에 나타나는 것)가 있어 빛이 청 적 백인지라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세개의 해가 함께 떴다]라고 하였다. 임수에 수덕궁에 이어하였다.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2월 임인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대안사에 행차하는데 국자생 이량평이 길에서 배알하고 상소하여 시사를 논하였다. 정미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승에게 공양하며 시 1절을 어제하여 사신으로 하여금 화진케 하고 드디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경수에 김존중의 제택에 이어하였다. 신해에 환궁하였다. 을묘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3월 정사에 문하시중 왕충이 졸하매 익를 강렬이라 하였다. 을축에 왕이 환궁하였다. 무진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을해에 현화사에 행차하니 동서 양원의 승이 각기 다정을 설하고 정가를 맞이할제 다투어 화치함을 자랑하였다. 병자에 동서양원에 유람하고 승에게 공양하였다. 하 4월 경인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갑진에 곽정통의 평장사 최진의 제택에 이어하였다. 경수에 환궁하였다. 6월 갑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기미에 환궁하였다. 추 7월 계미에 왕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가 을미에 환궁하였다. 8월 정사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가 무진에 환궁하였다. 경진에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9월 을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 기해에 양제통의 평장사 문공원의 제택에 환궁하였다. 동 10월 갑인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가 임수에 환궁하였다. 11월 신사 삭에 재추 랑사에게 주과를 사하였다.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정유에 금이 안원대장군 완안덕온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니 기해에 수창궁에서 향연하였다.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12월 갑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임수에 사공 윤언식의 제택에 이어하였다. 계해에 양제통택에 이어하였다. 기사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흥국사에 출어하였다.  

경진 14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왕이 흥국사에 있으면서 중외의 조하를 받고 임진에 환궁하였다. 을미에 왕이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태양에 괴기가 3일간 있었다. 신축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갑진에 용호군졸 장언이 그 어미를 죽였으므로 참수하여 3일간 효시(저자에 머리를 달아매는 것)하였다. 2월 경수 삭에 왕이 환궁하였다. 을축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3월 임오에 장원정에 이어하였다. 병수에 서루에 거동하여 제장의 안마르 사열하였다. 기축에 흥왕사로 이어하는데 길에서 한 노구를 보고 포 및 주를 사하였다. 정유에 환궁하여 양부 재추와 시신을 불러 어원의 화초와 진금기수를 상완함을 허하고 인하여 주과를 사하였다. 하 4월 임자에 추밀원부사 이원응으로 참지정사를 삼으니 이 날에 졸하였다. 무오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드디어 법천사에 행차하였다. 5월 을미에 최효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수에 재우하였다. 6월 경신에 금이 야율림을 보내왔다. 추 7월 무인에 금사를 향연하였다. 계미에 참지정사로 치사한 신숙이 졸하였다. 기축에 중서시랑 평장사 최함이 졸하였다. 을미에 경용재에 이어하였다. 8월 병오 삭에 일식이 있었다. 정미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가 을축에 환궁하였다. 무진에 소재도장을 선경전에서 6일간 설하였다. 계유에 태양에 흑점이 있었다. 왕이 몰래 폐인 백자단 이영을 시켜 고랑중 이지중이 가졌던 완물을 수취케하여 이것을 곽정통의 이궁에 두었다. 9월 무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새로 이룩된 장당450)의 후원에 행차하여 주연을 설하고 국화를 완상하였다. 을유에 모후전에 나아가 기거하였다. 동 10월 경수에 경복사에 행차하였다. 병진에 드디어 보현사에 행차하여 승에게 공양하고 은병 10구를 만들게 하니 무게가 30근이며 각기 5향 5약451)을 가득 담아 절에 시납하였다. 기미에 보현원루에 거동하여 걸인들에게 한 사람 앞에 포 1필과 면 2양씩 사하였다. 경신에 또 사루에 거동하여 친히 행려자에게 밥과 국을 사하였다. 신유에 또 그렇게 하고 임수에 환궁하였다가 드디어 경용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승 30000을 구정에서 3일간 공양하였다. 임신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11월 정축에 환궁하였다. 신묘에 금이 고통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을미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신사 15년 하 4월 계묘 삭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 을묘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무진에 귀법사에이어하였다. 5월 계유 삭에 환궁하였다. 갑신에 우박이 내렸다. 갑오에 최유청으로 봉원전대학사를 삼았다. 을미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정유에 비가 내렸다. 왕이 기뻐하여 희우시를 지어 써 유신에게 보였다. 6월 계묘에 왕이 봉원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재우하였다. 추 7월 임신 삭에 환궁하였다. 경인에 사하였다. 8월 임인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가 정미에 환궁하였다. 계축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가 임수에 환궁하였다. 정묘에 천화사에 출어하였다. 9월 정축에 장원정에 이어하였다. 정해에 대화사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임인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병오에 감음현인 자화 의장 등이 무고하기를 [정서의 처 임씨가 현리 인량으로 더불어 상(국왕)과 대신을 저주한다]라고 하므로 왕이 각문기후 림문분을 시켜 안문케 하였더니 그것은 자화가 인량으로 더불어 틈이 있어 무첨코자 함이었다. 이에 자화와 의장을 강에 던졌다. 11월 갑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서북면에서 치보하기를 김주(해릉)가 시해당했다고 하였다. 무인에 왕이 환궁하였다. 임오에 구정에 거동하여 관악하고 갑신에 또 그렇게 하였다. 신묘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12월 경자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신해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기미에 왕이 백순궁에 돌아왔다. 을축에 김영부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김거공으로 리부상서를 삼고 최유칭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최유청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아 치사케 하고 이공승으로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조진약으로 지어사대사를 삼고 이덕수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임오 16년 춘 정월 무진 삭에 일식이 있었다. 신사에 왕이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2월 경수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신해에 경연에 거동하여 경의를 강론케 하였다. 정묘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윤월 갑수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기축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3월 병오에 장원정에 이어하였다. 무오에 환궁하였다. 송의 도강 후림 등 43인이 왔다(이 편에 송의)명주가 첩보하기를 송조가 금과 더불어 군사를 일으켜 서로 싸우다가 금년 봄에 이르러 크게 이겨 금제 완안량을 잡아 형상을 그리고 죄를 술하여 중외에 포고하고 어필로 도형상에 쓰기를 량이라는 이름의 김로는 독부로 스스로 존대하여 임금을 죽이고 어미를 살해하였으며 맹약을 어기고 국경(색)을 침범하여 양국에 잔학하였다 여러번 옮기면 반드시 패하나니 하늘이 벌을 내려 이적의 경계로 삼았도다]라고 하였다 하니 대개 송인이 우리 조정에 시위코자 함이오 반드시 그 말대로임은 아닌 것이었다. 기미에 김거공으로 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최유칭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조진약으로 추밀원부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이공승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김(알?)으로 우승선을 삼았다. 병인에 간관이 복합상소하여 별궁의 공헌을 혁파하도록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왕이 음양비축설452)을 혹신하여 매양 행재소에 승려와 도사 수백인을 모으고 항상 재초를 설하여 소모되는 비용이 적지 않았으므로 내탕의 저장은 텅 비었으며 또 사사집을 많이 빼앗아서 별궁으로삼고 재화를 주구하되 명목을 별공이라하여 환자로 감령케 하니 (환자는) 이것을 빙자하여 사재를 영모하였다. 그 때에 한황과 역병으로 중외에 길에서 아사하는 자가 잇달았다. 하 4월 갑수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가 신사에 환궁하였다. 갑신에 오랜 가뭄으로 재우하고 조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정사에 임하여 다스려지기를 바라 군신들과 더불어 동심합덕하여 날로 충언을 듣고 정책상에 실현시켜 위로는 천심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민망에 부응코자 생각하나니 그 문무 4품 이상은 각기 시정의 득실과 민간의 이해를 말하여 채택할 수 있도록 대비하라]고 하였다. 기축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5월 정유 삭에 이계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해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정사에 선지하기를 [인군의 덕은 생을 좋아하고 살을 미워하며 민은453)을 근휼함에 있거늘 근자에 감옥이 비지 않고 백성은 많이 역병에 걸리니 짐은 심히 민망하게 여기노라 그 수사454) 이하의 죄를 사하고 제도군현에 포탈한 조세를 면제하여 주고 창름을 열어 빈궁하여 살 곳을 잃은 자를 진휼할 것이며 겸하여 청백하고 수절하는 자를 천거하라]고 하였다. 기미에 관비 선화가 한 잉부와 말 곡식(두속)을 다투다가 이를 죽였다. 선화의 아들이 환관이었으므로 법사에게 청탁하여 형을 감면하여 사를 기다리게 하고 바로 원주로 보내매 유사가 박주하여 자연도로 이배하였다. 이달에 바람과 한발이 심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죽은 잉부의 원기의 소감이라고 하였다. 6월 정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송의 도강 등성 등 47인이 왔다. 계미에 경성에 도적 30여인이 있어 밤에 영평문에 이르러 문졸을 쳐서 쫓고 문 빗장(관)을 쪼개고 나갔다. 정해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인에 송의 도강 서덕영 등 89인과 오세전 등 142인이 왔다. 계사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추 7월 임인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신에 송 도강 하부 등 43인이 왔다. 신유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박순충이 졸하였다. 순충은 서리로부터 내시로 들어가 중외직을 역임하고 드디어 재보에 오른 사람으로 근검으로써 몸을 가졌던 것이다. 8월 을축 삭에 장원정에 출어하였다가 을해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진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 임진에 문하시랑평장사 최윤의가 졸하였다. 9월 갑오 삭에 장원정에 이어하였다. 기해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신축에 왕의 폐행이 미도455)를 끼고 가만히 화계456)를 어상의 욕 속에 넣어 두었다가 발각되매 주부 동정 김의보가 내시 윤지원으로 더불어 통모하고 저주한 것이라고 무고하니 의보는 참하고 지원은 무인도에 유배하였다. 계축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무인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11월 계사 삭에 환궁하였다. 임인에 왕태자에게 원복457)을 가하였다. 계묘에 우승선 이담으로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귀법사에 행차하였다. 무신에 금이 대부감 완안흥을 보내와 즉위를 고하였다. 임수에 천수사에 출어하였다. 12월 계해 삭에 태백(성)이 4일간 경천하였다. 병인에 왕이 환궁하였다. 이로부터 자주 미행하였다. 경오에 흥왕사에 출어하였다. 을해에 인지재에 돌아왔다. 임오에 왕이 환궁하였다. 기축에 이지무로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김영부로 참지정사 판상서병부사를 삼고 김거공으로 지문하성사 호부상서를 삼고 임극충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최유칭으로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조진약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김영윤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신묘에 왕이 인지재에 거동하여 친히 춘첩자458)를 지으니 [탕탕히 봄 빛은 아름답고 흔흔히 만물의 뜻은 새롭도다 장차 인 지 덕을 닦고자 하는데 이제 만년춘을 얻음이로다]라고 하고 또 [꿈에 소연히 정말 좋은 길지를 들었으니 부소산 밑의 별신선이 그 곳이라 새로움을 맞이하고 경사로움을 받아들이는 오늘 아침에 만복이 함께 모이게 되고 서기가 잇달았도다]라고 하였다. 왕이 몹시 술사를 믿어 경용재를 고쳐 인지재라 하고 (규모를) 넓히고 장식을 더하여 날로 폐행들과 유희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간관이 혹시 헐어버릴 것을 청하면 왕은 곧 몽보를 말하여 거절하였다. 그러므로 이 시를 짓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간하는 사람이 끊어지게 되었다. 이 달에 김영윤 김순부를 금에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고 또 김거실을 보내어 등극의 선유를 사하였다.

권미 17년 춘 정월 기해에 인지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상서좌승 서순으로 지서북면병마사를 삼고 한림시독학사 최우보로 동북면 병마부사를 삼았다. 을사에 왕이 연등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2월 정묘에 보제사에 출어하였다가 임신에 환궁하였다. 을해에 천수 홍원 2사에 행차하여 술에 취하여 유숙하였는데 종관과 위사들은 모두 먹지를 못하였다. 정축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을유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신묘에 영통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현화사에 거동하였다. 3월 정유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경자에 동면도감판관 손응시가 3년간 려묘459)하였으므로 조하여 문려에 정표460)케 하였다. 계묘에 홍원사에 이어하였다가 4월 임수에 환궁하였다. 계유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을해에 친히 대묘에 관제461)하고 수사 이하를 사하고 백관의 작을 1급씩 올리고 그 집사로 정랑 이상관에게는 각기 아들 한 사람씩에 음직462)을 허락하였다. 병자에 인지재에 이어하였다가 5월 정유에 환궁하였다. 임자에 지문하성사 김거공이 졸하였다. 병진에 왕박으로 수사도 함녕백을 삼았다. 6월 경신 삭에 일식이 있었다. 갑자에 왕이 미행하여 안화사에 이어하였다가 정축에 환궁하였다. 김의 횡사사 소부감 한강이 왔다. 추 7월 신묘에 금사를 대내에서 향연하였다. 을미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을사에 송이 도강 서덕영 등이 와서 공작 및 진기한 물건을 바쳤다 덕영은 또 송제의 밀지로 김 은합 2부에 침향을 가득 담아 바쳤다. 갑인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위위경 이양실로 지서북면 병마사를 삼고 급사중 박육화로 동북면 병마부사를 심으니 유사가 탄핵하여 양실이 번진에 맞지 않다 하므로 서순을 그대로 유임시켰다. 8월 임수에 왕이 환궁하였다. 계해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갑신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9월 무수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동 10월 무오에 삭에 이순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인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인지재에 이어하였다. 무인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가 갑신에 왕이 환궁하여 백좌회를 설하고 내외에 령하여 승 30000을 공양케 하였다. 11월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금이 대부감 야율장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경신에 흥국사에 이어하였다. 병인에 인지재에 이어하였다. 계유에 별이 떨어졌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무인에 흥국사에 출어하였다. 계미에 천수사에 이어하였다. 병수에 최유칭으로 지문하성사를 삼고 김영윤으로 동지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서공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갑신 18년 춘 정월 신묘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백홍이 관일하였다. 2월 을축에 왕이 미행하여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계유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정축에 흥국사에 이어하였다. 경진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임오에 흥국사에 이어하였다가 3월 신묘에 환궁하였다. 신축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임인에 차내전숭반조동희와 차우시금 박광통을 송에 보내어 유동기를 바치게 하니 서덕영이 온데 대한 보답이었다. 병오에 장차 인지재 이어하려는데 법천사 주지 각예는 예종 궁인의 아들인데 주찬을 갖추어 어가를 달령원에서 맞이하니 왕이 풍월을 음상하며 제학사로 더불어 창화하다가 끝나기 전에 왕이 술에 취하여 바로 귀법사에 입어하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시종들은 왕의 간 곳을 몰랐더니 밤중이 되어 돌아왔다. 하 4월 정사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가 병인에 왕이 환궁하였다. 기묘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5월 병수에 흥국사에 이어하였다. 정유에 인지재 이어하였다. 무수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가 병오에 환궁하여 최유칭과 이담울 불러 수문전에서 잔치하고 또 상춘정에서 잔치하여 새벽이 되도록 취하게 마시었다. 경수에 천수정에 출어하였다. 6월 갑인 삭에 일식하였는데 태사가 상주하지 않았다. 김영부로 중서시랑 동평장사를 삼고 최유칭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김영윤으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기미에 인지재에 이어하였다가 계미에 환궁하였다. 추 7월 임진에 조하기를 [백성(민)은 나라의 근본이라 근본이 튼튼하여야 나라가 평안한 것이다 요사이 공사간 토목의 역으로 인하여 백성이 살 수가 없거늘 항차 지금 환사 등이 옥사를 영조하여 사치하고 화려함을 다투고 있으니 유사는 그것을 일체 금단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오에 안화사에 이어하였다가 정미에 환궁하였다. 8월 신유에 왕이 미행하여 안화사에 이어하였다. 경진에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신사에 도적이 대묘의 제기를 훔쳐 갔다. 9월 정해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을미에 지화재에 이어하여 격구를 관람하였다. 수사공재가 졸하였다. 동 10월 계축 삭에 김원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사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묘에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11월 경인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백홍이 해를 둘러 남서북에 각각 일이(해무리)가 있었는데 마치 해가 서로 꿰뚫고 있음과 같았다. 정유에 청주통궁에 이어하였다. 금이 대부감 오골론수정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자에 수사공 임극충의 집에 이어하였다. 병오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윤월 무오에 임극충의 집에 이어하였다. 갑자에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을해에 정업원에 이어하였다. 무인에 환궁하였다. 김장을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12월 정해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경자에 경복사에 출어하였다. 임인에 최유칭으로 판병부사 태자태전을 삼고 김영윤으로 리부상서 추밀원사를 삼고 서공으로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임극충으로 태자태보를 삼았다.

을유 19년 춘 정월 신해 삭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신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가 신유에 환궁하여 무차대회463)를 설하였다. 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였다. 경오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가 계유에 환궁하였다. 병자에 증산사에 출어하니 우정언 조문귀가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정축에 보현원에 이어하였다. 무인에 자효사에 행차하였다가 2월 신사에 환궁하였다. 을유에 경천사에 출어하였다. 병수에 흥천사에 이어하였다. 무자에 경천사로 환어하였다가 기축에 환궁하였다. 을미에 홍원사에 출어하였다. 정유에 천화사에 이어하였다. 경자에 채인으로 응양군상장군 섭병부상서를 삼아 동궁시위에 충하고 강문준으로 전중감 흥위위섭상장군 태자우청도솔부솔를 삼고 정원녕으로 용호군대장군 겸태자우감문솔부솔을 삼고 량숙으로 대부경 신호위대장군 겸태자우위솔부솔을 삼았다. 갑진에 홍원사에 이어하였다. 병오에 천화사에 이어하였다. 3월 경수 삭에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신해에 김의 대부영의 주가 예졸 70여인을 보내어 린 정 2주 경내의 섬을 공격하고 방수하던 정주별장 원상 등 16인을 잡아 돌아갔다. 기미에 홍원사로 이어하였다. 신유에 보현원으로 이어하였는데 날씨는 춥고 비가 심히 와서 위졸이 동사한 자가 9인이나 되었다. 무진에 홍원사로 환어하였다. 경오에 경천사로 이어하였다. 신미에 인제원으로 이어하였다. 하 4월 경진에 관란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인제원으로 이어하였다. 갑신에 내시좌우번이 다투어 진완물을 바쳤다 그 때에 우번은 귀골(환고) 자제가 많았는데 환자를 통하여 성지로써 공사의 진완과 서화 등물을 많이 토색하고 또 채붕을 결조하여 잡기를 싣고 이국인이 공헌하는 모양을 지어(작) 청홍개 2병과 준마 2필을 바쳤으며 좌번은 모두 유사였으므로 잡희에 익숙하지 못하고 그 공헌한 바도 백에 하나도 당하지 못하는지라 불급함을 부끄러워하여 남의 준마 다섯필을 빌려서 바쳤더니 왕이 모두 이것을 받고 좌번에게는 백은 10근과 단사 65근을 우번에게는 백은 10근과 단사 95근을 사하였는데 그 뒤에 좌번은 밀값을 치루지 못하여 날마다 징채를 당하게 되니 사람들이 이를 비웃었다. 을유에 경복사로 이어하였다. 무자에 봉령사로 이어하니 곧 정함의 축리소464)인지라 정함이 왕을 향연하는데 공판이 인제사나 관란사보다 훨씬 나았다 왕이 취하여 스스로 생을 불고 인하여 묻기를 음률 아는 자가 있느냐 하매 좌우가 급제 이홍승으로 써 아뢰었더니 곧 불러서 앞으로 오게 하고 생적을 불게 하니 드디어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었다 하고 명하여 내시에 속하게 하였다. 경인에 경복사로 환어하였다. 무신에 왕이 판적요지에 배를 띄우고 환자 백선연 왕광취와 내시 박회준 류장 등으로 더불어 주연을 설하고 락을 베풀다가 드디어 수루에 올라가 최유칭 서공 등을 불러 같이 마시고 또 례성강 고공(사공) 어자를 불러 수희를 베풀어 관람하다가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밤 2고에 관북궁으로 환어하니 호종관이 길을 잃고 쓰러지는 자가 잇달아 있었다. 5월 경수에 경복사로 이어하였다. 을묘에 우박이 내렸다. 신유에 이지무로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유칭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김영윤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서공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김(알)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갑자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6월 갑오에 려수하였다. 계묘에 지후 임효성의 집으로 이어하였다. 추 7월 경수에 사공 임극충의 집으로 이어하였다. 경신에 보현원으로 이어하였다. 8월 계미에 현화사로 이어하였다. 정해에 경복사로 이어하였다. 계사에 현화사로 환어하였다. 동 10월 을유에 보제사로 이어하였다. 11월 임자에 관북궁으로 이어하였다. 무오에 흥국사로 이어하였다가 기미에 환궁하였다.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신에 보제사에 출어하였다. 금이 소부감 완안장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왕이 환궁하였다가 곧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보제사에 이어하였다. 경오에 잠행하여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12월 정축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가 정유에 환궁하였다. 을사에 최유칭으로 수태보 판상서리부사를 삼고 김영윤으로 지문하성사 판상서병부사 태자소전을 삼고 임극충으로 태자소사를 삼고 서공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김(알)으로 례부상서를 삼고 이공승으로 추밀원부사 태자빈객을 삼고 허홍재로 국자제주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병수 20년 춘 정월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현화사에 출어하였다. 2월 계미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라한전에서 10000의 연등을 하였다. 무자에 현화사에 환어하였다. 3월 을사에 김신사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였다. 하 4월 갑신에 왕이 승 각예로 더불어 밤에 성수원에서 잔치하니 (성수원은) 즉 각예가 창건한 바이다. 무자]에 각예를 불러서 달을 완상하고 시를 지었다. 갑오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별궁은) 일찍이 영은관 북쪽의 인가를 빼앗아 수영을 더하여 별궁으로 삼은 것이다. 정유에 평장사 최자영이 졸하니 3일간 철조하였다. 신축에 왕이 청녕재에서 잔치하니 (청녕재는) 곧 현화사의 동령에 새로 영조한 별관이다 밤 5고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6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현화사의 장흥원에 거동하여 박소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갑진에 청녕재에 이어하였다. 무신에 보제사에 이어하였다. 기유에 김의 횡선사 상서우사랑중 이자도가 왔으므로 왕이 환궁하여 조서를 맞이하고 인하여 사신을 향연하고는 보제사로 행차하였다. 을묘에 왕이 보제사로부터 궐문에 이르기까지 장막을 설하고 미행하여 수문전에 입어하였다가 다음날 또한 장막 속으로 보제사에 환어하였다. 이 뒤로는 무릇 유행에 모두 길에 장막을 설하였다. 8월 정축에 념현사에 이어하였다. 갑신에 경복사에 이어하였다. 9월 경수에 관북별궁에 이어하였다. 임수에 보제사에 이어하였다. 갑자에 관북별궁에 돌아왔다. 동 10월 경진에 수창궁에 환어하였다. 무자에 보제사에 출어하였다. 임진에 성북통별궁에 이어하니 (별궁은) 본래 시랑 김돈시의 사제였다. 병신에 관북별궁에 환어하였다. 무수에 승 30000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자에 백좌회를 수문전에서 설하고 귀법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현화사에 가 승 성문위 방에 행차하였다. 11월 계묘 밤에 청녕재에서 잔치할제 총신 이영이 금수 김은화 진향 서각 마라 고양 부안 등 진기한 물건을 모아서 좌우에 진열하고 대가를 맞이하거늘 왕이 시종장졸에게 활쏘기를 명하니 상장군 강용이 과녁을 맞추었으므로 라 1필 초 1필을 사하고 여락을 벌려 취토록 마시다가 4고에 이르러 성문 방으로 돌아왔다. 병오에 귀법사의 보광원에 행차하였다가 밤중에야 돌아왔다. 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정사에 수창궁에 환어하였다. 금이 대부감 야율성정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신에 금사를 대관전에서 향연하였다. 12월 계유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정해 21년 춘 정월 갑진에 전 라주로안찰부사 윤평수가 은 80근을 바쳤다 평수는 백성들의 고혈을 뽑아 써 은총을 노린 것이라 때의 여론이 이것을 야비하다고 하였다.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가 밤에 돌아오는데 김돈중의 말(마)이 기사의 화살통에 부딪쳐서 화살이 왕의 련 곁에 떨어졌다 왕이 놀래서 류시인 줄 알고 빨리 달려서 환궁하여 궁성을 계엄하였다 갑인에 유사에게 명하여 시중에 방을 붙이기를 [능히 적을 고하는 자가 있으면 직의 유무를 물론하고 동반은 정랑에 서반은 장군에 원하는대로 제수할 것이며 공사천례도 또한 참직함을 허할 것이며 아울러 은 200근을 급할 것이오 여자인 경우에는 은 300근을 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래도 얻지 못할까 염려하여 다시 명하여 황금 15근과 은병 200구를 거리에 걸고 포적의 구구금으로 하였다. 을묘에 부병을 궐정에 주둔시켜 불측한 일에 대비하도록 하니 이로부터 용력 있는 자를 선취하여 내순검이라 호하고 양번으로 나누어 항상 자의를 입고 궁검을 가지고 장위 밖에 나누어 서서 눈비를 가리지 않고 밤부터 새벽에 이르기까지 순경하였다. 병진에 간관이 복합하여 시사를 간언하기를 5일간 하니 왕이 청종하였다. 2월 계미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임진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3월 기해 삭에 왕이 영통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왕이 비를 무릅쓰고 장흥원에 행차하여 각예로 더불어 밤에 (술을) 마시고 우승선 김돈중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였다. 신유에 왕이 미행하여 김신굴에 이르러 라한재를 설하고 현화사에 돌아와 이공승 허홍재 각예 등으로 더불어 배를 중미정 남지에 띄우고 취토록 마시며 환락을 극히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녕재 남쪽 기슭에 정자각을 짓고 편액하여 중미정이라 하고 정의 남쪽 시내에 토석을 쌓아 저수하고 안상에 모정을 지으니 부안 로위가 완연히 강호의 상과 같은지라 배를 그 가운데 띄우고 소동으로 하여금 뱃노래와 고기잡이 노래를 부르게 하여 유관의 락을 마음껏 하였다 처음 정자를 지을 때 역졸들이 각기 양식을 가져왔는데 한 역졸이 몹시 가난하여 능히 자급할 수 없는지라 역도들이 모두 밥을 한 술씩 나누어 먹게 하였는데 하루는 그 처가 음식를 갖추어 와서 먹이고 또 말하기를 [친한 분을 불러서 같이 잡수도록 하시오]라고 한대 역졸이 말하기를 [집이 가난한데 무엇으로써 준비하였소 남에게 사통하여 얻은 것인가 어찌 남의 것을 훔친 것인가]라고 하니 처가 말하기를 [모양이 추하니 뉘가 나와 사통할 것이며 성질이 옹졸하니 어찌 능히 도적질 하리오 다만 머리털을 깎아 사왔을 따름이오]라고 하고는 인하여 그 머리를 보이니 역졸이 흐느껴 울며 능히 먹지 못하는지라 듣는 사람이라 슬퍼하였다. 임수에 귀법사 동령에 행차하여 시신으로 더불어 주연을 베풀었다. 계해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하 4월 무진 삭에 일식이 있었다. 을해에 보현원에 이어하였다. 무인에 하청절이므로 만춘정에 행차하여 재추와 시신을 연흥전에서 향연하였다 대락서 관현방은 다투어 채붕과 준화며 헌선도 포구락 등의 성기 노름을 갖추고 또 배를 정자의 남쪽 물가에 띄워 흐름을 따라 오르내리며 서로 더불어 창화하여 밤에 이르러 이에 파하였다 정자는 판적요에있으니 처음 요정을 인용하여 영조되었다 안에 전각이 있어 연흥이라 하고 남쪽에 시내가 있어 좌우에 반회하고 좌우에 송 죽 화초를 심었으며 그 사이에 또 모정 초루가 무릇 일곱이 있어 편액을 가진 것이 넷이나 되니 령덕정 수어당 선벽재 옥간정이라 하고 다리를 금화교라 하고 문을 수덕문이라 하였다 그 어선은 금수로써 장식하고 가금으로 돛을 만들어 써 류련의 락465)을 삼았다 사치와 아름다움을 극히 하였던 것으로 백성을 괴롭히고 재물을 낭비하여 무릇 3년만에 이루어진 것이다. 경진에 장흥원에 이어하여 시를 짓고 사신에게 명하여 화진토록 하였다. 임오에 왕제 승 충희가 왕을 청녕재에서 향연하니 각예와 시신을 불러 같이 마시고 늦게 배를 중미정 남쪽 못에 띄워 밤이 되도록 유상하였다. 계미에 또 청녕재에 잔치하고 시를 지어 군신으로 하여금 화진토록 하였다. 병수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정해에 서리가 내렸다. 계사에 승선 이담의 별서에 행차하였다. 5월 무수 삭에 임진현에 행차하여 강변의 승사에 지숙하고 다음 날 재추 김영윤 서공 이공승 최온과 승선 이담 허홍재 김돈중 등으로 더불어 배를 남강 중류에 띄우고 물결을 따라 오르내리며 종일토록 즐겼다 사간 림종식과 시어 고자사는 늦게사 부름을 받아 잔치에 나갔는데 밤중이 되어 보현원으로 이어하니 시종이 따르지 못하고 자사도 취하여 가지 못하였다. 임인에 이담의 별서에 이어하였다. 무신에 보현원에 이어하였다. 기유에 자효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장단현의 응덕정에 행차하여 배 안에 채붕을 맺고 여락과 잡희를 싣고 강의 중류에 띄우니 무릇 19소였다 모두 채백으로 장식하고 좌우의 행신으로 더불어 연락하였는데 5경에 이르러 이에 서안에 올라 후466)를 펴고 촛불을 그 위에 밝히고 좌우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니 맞히는 자가 없었다 내시 로수순이 아뢰기를 [성인(왕)이 맞히신 뒤라야 신등이 맞추겠나이다]라고 하니 왕이 쏘아 곧 촛불을 맞히는지라 좌우가 만세를 부르고 이담이 따라 쏘아 맞히니 릉라견을 사하였다 이틀동안 머물며 수희를 관람하였다. 정사에 응덕정으로부터 촛불을 잡히고 배에 올라 여러 가지 락을 크게 벌리고 황락정을 지나 주연을 베풀어 밤에 보현원에 이르렀다. 신유에 만춘정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밤에 이담의 별서에 들었다. 임수에 안화사에 입어하였다. 병인에 관북궁에 돌아왔다. 6월 무진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이담의 별서로 행차하였다. 경오에 현화사에 이어하였다 이에 앞서 왕은 성동 사천의 용연사 남쪽에 석벽이 있는데 여러 길이나 깎아세운 듯이 냇물에 임하고 있어 호암이라 하는데 흐르는 물이 모여들고 수목이 울창하다는 말을 듣고 내시 이당주와 배연 등에게 명하여 그 곁에 정자를 짓게 하여 이름을 연복이라 하고 기화이목을 네 모퉁이에 열식케 하였으나 물이 얕아 배를 띄울 수 없으매 제방을 쌓아서 호수를 만들었다 그러나 땅이 휜 모래고 수세가 거센지라 비만 오면 곧 무너지고 무너지면 다시 보수하여 주야로 쉬지 않으니 사람들이 심히 괴로워하였다 이 날 재상과 시신으로 더불어 정상에서 잔치하여 마음껏 환락하다가 파하였다. 경진에 관북궁으로 환어하였다. 추 7월 정유에 귀법사에서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현화사에 거동하여 말을 달려 달령의 다원에 이르니 종신들이 모두 따르지 못하였다. 8월 무신에 귀법사에 이어하였다. 기미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어가가 가돈원에 이르니 광주에서 의위 락부를 갖추어 써 맞이하고 인하여 마 2필 견여 1구 양산 3병을 바쳤다. 9월 을축에 남경에 입어하니 류수관이 례를 갖추어 어가를 맞이하고 양산 2병과 마 2필 우 1두를 바쳤다 이날 밤에 내시와 중방467)에 명하여 활쏘기를 하고 맞힌 자에게는 능견을 사하였다. 기사에 삼각산의 승가 문수 장의 등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군신을 연(정)흥전에서 향연하고 한 사람에게 마 1필씩 사하였다 이 날 남경을 출발하였다. 계유에 파평현의 강에 이르러 군신을 주중에서 향연하니 시신들이 모두 취하여 의절을 잃었는데 추밀원사 이공승은 어가 앞에 거꾸로 실려 갔다. 을해에 왕이 경도에 돌아와 2죄 이하를 사하고 조하여 명산 대천의 작호를 가하고 내외의 80 이상의 독폐병 환과 고독 효순 절의 효제 력전자에게는 모두 물을 사하고 남경으로 행차할 때 수가한 군장 및 예령양전의 시위원장468)과 시학공자에게는 모두 가직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용흥사에 출어하였다. 병오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11월 무진에 행생원에 이어하였다. 례빈소경 최현을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니 전년에 야율성정의 온 것을 보답함이다. 경진에 금이 소부감 이위국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오 22년 춘 정월 갑자 삭에 왕이 관북궁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고 시를 지어 유신에게 보였다. 정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군신을 향연하여 밤을 새우고 이튿날 한낮에사 파하였다. 경진에 흥왕사에 이어하였다. 갑신에 압관강서재에 이어하였다가 병수에 환궁하였다. 을축에 강양백 감의 딸로 태자비를 삼았다. 계사에 왕이 몽중에 지은 시를 군신에게 보이니 그 끝에 글귀(연)에 이르기를 [정사를 펴니 인과 은이 흡족하여 삼한이 태평을 이루었다]라고 하였더니 신료들이 칭축하하였다. 2월 을미에 승 1000명을 선경전에서 공양하였다. 신축에 관북궁에 이어하였다. 정미에 강양백 감을 후로 진봉하였다. 3월 신미에 경명궁에 이어하였다. 정축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그 때에 왕의 동모제인 익양후와 평양후가 자못 중심을 얻은지라 왕이 변이 있을가 의심하여 이어하여 써 이것을 피하려 한 것이다. 경진에 어가가 평주 숭수원 서정에 이르렀을 때 재보와 시신을 불러 주연을 벌리고 작은 배를 남계에 띄워 흐름을 오르내리며 유상하다가 저녁 때가 되어 파하였다. 임오에 황주 통선역에 머물러 벽파정에서 잔치하고 또 배를 남계에 띄워 밤이 되도록 연락하였다 락공과 잡희인들에게 백김 3근을 사하였다. 을유에 서경에 이르렀다. 병수에 태조진전을 배알하였다. 정해에 내전에서 승을 공양하였다. 무자에 관풍전에 거동하여 하교하기를 [짐이 듣건대 호경(서경을 가리킴)은 만세불쇠의 지인지라 뒷 임금이 이곳에 임어하여 신교를 반포하면 국풍이 청명하고 소민이 안태한다 하였으니 짐이 즉정한 이래로 만기가 실로 번거로워 순어할 여가를 가지지 못하였더니 이제 일관의 아뢰는 바에 의하여 이곳에 온 것이니 장차 낡은 것을 고치고 새로운 것을 정하여(혁구정신) 다시 왕화를 복흥코자 하여 고성이 권계한 유훈과 현재 민폐를 구제할 사무를 채택하여 신령을 반포하노라 일 음양을 봉순하라 근래 호령을 내려 실시함이 음양에 어긋남이 있는지라 이러므로 써 한난이 뒤바뀌고 민물이 불안하니 이제부터는 춘 하에 상을 주고 추 동에 형벌을 하여 모든 행사는 한결같이 월령에 의할 것이다 일 불사를 숭중하라 때는 말계469)에 해당하여 불법이 점차로 쇠퇴하니 무릇 조종 때 개창한 비보사사470)와 고래로 정행하여 온 법석사원과 따로 은복을 기도하기 위해서 세운 사사(별기은사사)로서 만약 잔폐한 곳이 있거든 중장관은 곧 수즙하도록 하라 일 사문(승)에게 귀경하라 근래에 승도가 생업을 탐하고 영리를 도모함이 거의 다 그러하니 이제 탁한 것을 막고 청한 것을 들추어 그 폐를 구하고자 하나니 그 청고한 승도로 산림에 자취를 감추고 있는 자는 소재의 관이 찾아내어 천주토록 하라 일 삼보(불 법 승)를 보호하라 그 불사이 진보 미멸 잡물들을 근자에 내시원 및 제사에서 상주하여 비용으로 취하니 승도들이 탄원하고 있는지라 지금으로부터는 헌대에서 널리 효유하여 금단하도록 하라 일 선풍을 준상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행하여져서 이로 말미암아 용천471)이 환열하고 민물이 안녕하였도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로 그 풍을 숭상한지 오래인데 근래 양경의 팔관회에 날로 구격이 감하여져 유풍이 점차로 쇠퇴하여 가노라 지금으로부터 팔관회는 미리 량반으로 가산이 요족한 자를 택하여 선가로 정하고 고풍을 의행하여 인천으로 하여금 모두 환열토록 하라 일 민물을 구휼하라 국가가 특히 동서대비원 및 제위보를 설립하여 써 궁민을 구제하고 있으나 근래에 이 관직에 임명되는 자가 대개 그 적임자가 아니었으므로 혹은 기근이 있어 능히 생존할 수 없는 자와 질병으로 의부할 곳이 없는 자를 능히 수집하여 구휼하지 못하니 과인의 애민하는 마음에 그 어떠하랴 지금으로부터는 리부에서 능히 그 책임에 감당할 자를 뽑아서 맡기도록 하고 헌대로 하여금 그 능부를 규찰하도록 하여 써 권징토록 하라]고 하였다 교서가 내리매 백관이 정축하하였다 이 날에 재추와 근신을 청원루에서 향연하고 서로 더불어 창화함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하 4월 계사에 흥복사에 행차하여 용선을 남포에서 띄우고 재추와 근신을 향연하였다. 정유에 홍복사에 행차하였다가 또 다경루에서 잔치하고 수희인에게 백금 2근을 사하였다. 기해에 선지하기를 [서도는 곧 조종이 순어하시던 땅이다 을묘의 난472)을 겪은 뒤로 국가가 다사하여 루년동안 순어하지 못하였도다 이제 오래 젖어온 구속을 함께 유신하고 또 기업을 연보하려 하여 이 서도에 행차하였으니 어가를 맞이할 때 잘 못하여 유사에게 구집된 자와 공도사장473) 이하 속동징와자474)는 모두 방제하고 또 을묘년란에 연좌되어 남계로 류배된 자도 또한 방환케 할 것이며 제령부 및 삼위군으로 어가를 맞이하는데 공로가 있는 자는 대창 전해고미를 한 사람에게 한 섬씩 주라]고 하였다. 경자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하였다. 임인에 하청절이므로 또 장락전에서 잔치하였다. 갑진에 영명사에 행차하여 배를 대동강에 띄웠다. 을사에 부벽루에 거동하여 신기군의 롱마희를 관람하고 백금 2근을 사하였다. 병오에 또 부벽루에 거동하여 수희를 관람하고 백금 포물을 사하였으며 재추와 시신을 주중에서 향연하여 밤중에야 파하였다. 가을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동 11월 갑수에 금이 완안정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탐라안무사 조동희가 입근하였다 탐라는 험원하여 공전이 미치치 못하는 바이며 토지가 기름져서 경비가 나오는 곳이다 이보다 앞서 공부가 번거럽지 않고 백성들이 생업을 즐길 수 있었는데 근자에 관리들이 불법하매 적수 양수 등이 모반하여 수재를 축출하였다 왕이 동희에게 명하여 부절을 가지고 가서 선유토록 하였더니 적들이 스스로 항복한지라 량수 등 2인 및 그 당 5인을 참하고 여타는 모두 곡식과 포백을 주어서 위무하였다. 이 달에 례빈소경 서추를 금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12월에 사녕소경 진현광을 금에 보내어 하정하고 위위소경 최윤서는 방물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