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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대 순종~제13대 선종~제14대 헌종~제15대 숙종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5:44

제12대 순종(順宗,1083년 재위3개월)

순종은 문종의 장남이자 인예태후(仁睿太后) 이씨(李氏)소생으로 1047년 12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휴(烋),이름은 훈(勳). 자는 의공(義恭)이다. 8세 때인 1053년 2월에 태자에 책봉되었다가 1083년 7월 문종이 죽자 37세의 나이로 고려 제 12대 왕으로 올랐다.

   그는 문종이 죽자 등극하였지만 원래 병약한 몸으로 즉위 3개월만에 임종을 하게 되어 고려 국왕중에 가장 짧은 재위기간의 왕이 되었다.
어려서부터 질환이 있는 데다가 여막에서 슬퍼한 나머지 쇠약하여져 3개월 만에 죽었다. 시호는 선혜(宣惠)이며, 능은 성릉(成陵)으로 개성에 있다.

    순종은 세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을 얻지는 못하였다.제 1비는 평양공 기(平壤公基)의 딸 정의왕후(貞懿王后)왕씨이며, 제 2비는 김양검(金良儉)의 딸 선희왕후(宣禧王后)김씨이며, 제 3비는 이호(李顥)의 딸 장경궁주(長慶宮主)이씨이다.

 

 

 

 제13대 선종(宣宗,1083~1094 재위11년)

 선종은 문종의 둘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1049년 9월 경자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운(運), 자는계천(繼天)이다. 어려서부터 경사(經史)에 밝고 제술(製述)에 뛰어나 1056년 3월 국원후에 책봉된 이래 여러관직을 거쳐 상서령으로 있다가 1083년 7월 순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겸 중서령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해 10월에 순종이 재위 3개월만에 죽자 고려 제 13대 왕에 올랐다. 선종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웠으며, 자라서는 효도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였으나 놀이에 절도가 없고, 사탑(寺塔)을 많이 세워 백성들이 과중한 노역에 대하여 원망이 많았다고 한다.

   선종시대의 정치는 불교와 유교의 균형적인 발전을 토대로 매우 안정되었으며, 외교에서도 거란을 포함한 송, 일본, 여진 등과 광범위한 교역을 추진하며 주도권을 행사하였다. 1084년(선종 1) 승과를 설치하고 불교를 장려하였으며, 변경을 지키는 사졸들에게 저고리와 바지를 하사하였다. 1085년 왕의 아우 의천(義天)이 몰래 송나라에 들어가 2년 동안 불법을 공부하고 돌아오니 그 환영의식이 성대하였다. 의천은 불경과 경서 1,000권을 바쳤고,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으며, 송·요·일본 등지에서 서적을 사들이니 거의 4, 000여권에 달하였는데 모두 간행하게 하였다. 1089년 회경전(會慶殿)에 13층 금탑(金塔)을 세우고, 인예왕후(仁睿王后)의 청에 따라 천태종(天台宗)의 중심사찰인 국청사(國淸寺)를 짓게 하였다.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國學)에 72현(공자의 제자인 顔回 등 72인)의 상을 벽에 그려 붙였는데, 그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르고, 그 복장은 10철(十哲)을 모방하게 하였다. 1094년 2월 열병(閱兵)하고, 재위 10년7개월만에 향년 46세로 숨을 거두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인릉(仁陵)이며, 시호는 사효(思孝)이다.
                                                                                            서문출처:
미르나라

선종 안성사효대왕의 휘는 운이요 자는 계천이며 고휘는 증 또는 기라고 하였다 문종의 제2자요 순종의 동복형제로 문종 3 년 9 월 경자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총명하고 지혜롭더니 자라매 효경하고 공검하며 지견과 도량이 홍원하고 경사를 박람하였으며 더욱이 제술에 능하였다 10년 3월에 책하여 국원후가 되고 누봉하여 상서령이 되었으며 작위가 올라 공이 되었다 37년 7월에 순종이 즉위하매 수태사 겸중서령을 가하고 10월 을미에 순종이 붕어하매 병신에 유조를 받들어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복하고 선정전에서 즉위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았다. 정유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설하였다. 무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복을 입고 선정전에 나아가 제례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백관이 서쪽으로 나아가(예서) 합문에 올라 봉위하고 또 자수전에 진위 하였다. 11월 경신에 친히 임하여 빈전을 열고(계빈) 곡하되 애를 다하고 성릉에 장사지냈다. 정유에 한림원이 주하기를「무릇 내외의 주 부 군 현 사원과 공사문관의 (명)호 및 신료이하의 이름이 어휘를 범하였거니 음이 같은 것은 청컨대 이를 고치게 하옵소서」하니 제하여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사하고 문무관에게 일급씩을 가하였다. 이 달에 시어사 이자인을 요에 보내어 상을 고하였다. 12월 임신에 화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정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 앞 장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를 받고 드디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전월에는 국휼(국상)을 만났으므로 이에 이르러서야 이를 행하였다. 정축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선덕전에 퇴어하였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이정공과 중서시랑 평장사 김량감과 참지정사 왕석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하였다.

갑자 원년 춘 정월 신축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사에 보제사의 승 정쌍 등이 주하기를「구산문 참학하는 승도를 청컨대 진사의 예에 의하여 3년 한번씩 뽑도록 하옵소서」한대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3월 경자 삭에 동여진장군 분나노 등 20인이 와서 말을바쳤다. 하 4월에 요가 칙제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신과 위문사 광주관내관찰사 야율언 등을 보내 와 갑술에 문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천성이 예의의 단을 극하고 체는 중화의 정수를 함양하였다. 왕작의 귀한 자리에 올라 일찍이 청사의 봉을 이어받으니 목신(동방신)은 인자한지라 온전히 동방의 기를 받았도다 몸소 충성을 품어 힘써 행하고 직은 공의를 술하여 해마다 오도다 일광에 주를 이루니(일광치주) 조정은 그 공훈을 힘입었고 천리(방천리의 영토)의 번병이 되니 생민이 그 혜택을 받았다. 바야흐로 공수하고 공을 이루기를 바랐더니 어찌 상천이 남겨 주지 아니할 줄(불유)을 알았으랴 부음을 듣고 슬피 여겨 조회를 거두고 더욱 흐느껴 울었노라. 오호라 세음(세월)은 머물지 않고 인생은 길손(객)과 같도다 일천년의 시운을 만나 오십년간의 군신의 의를 맺아 오더니 벼란간 야학에 배를 감추매(거장야학지주) 동원의 그릇을 숨기(비)기 어렵도다 마땅히 빨리 초차로 윤음(초음)을 보내어 가서 전례를 펴는 것이니 영혼이여 앎이 있거던 이 지극한 뜻을 흠할지어다」고 하였다. 정축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영은 진상(성진)의 순정이요 악독의 수기로서 경사는 세국에 피었고(발) 재질은 왕신으로 되었도다 겨우 연소한 때로부터 이에 총가의 은명을 입고 일역을 무봉하여 천조에 술직하였도다 왕실을 익대하매 근왕의 정성을 다하였으며 바야흐로 비호를 벌려(개장) 치평을 이루었도다 번국 다운 공적이 성하였는데 벼란간에 부친의 상(척호지우)에 엉키게 되었도다 정을 어겨서라도 습작하게 할 것을 의론하고 사행에 명하여(초비)이미 떠나도록 하였는데 역부가 이에 왔음을 듣게 되었도다 다시 어진이의 죽음을 차탄하게 되니 더욱 놀라고 슬퍼하노라 어찌하여 주학이 그대로 있지 못하고 이에 사람과 거문고가 함께 망하였단(인금구망) 말인가 충도를 생각하고 풍구(풍변)를 상상하며 울면서 사행을 보내며 가서 전상을 베풀게 하노니 명신이여 앎이 있거던 나의 하의를 양찰하라」고 하였다. 5월 임술에 고민익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임오에 동여진이 흥해군 모산진 농장을 침구하거늘 술졸이 이를 격패하고 5인을 사로잡았다. 무자에 일본국 축전주의 상객 신통 등이 수은 250근을 바쳤다. 을미에 왕자가 연화궁에서 탄생하였다. 추 8월 임신에 제하기「현종이 남쪽으로 행차하였을 때 문하시중 박성걸이 호종하여 공이 있었으니 삼한후벽상공신 양규 등의 녹권에 같이 등록하여 시행토록 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송이 제전사 좌간의대부 양경략과 부사인 예빈사 왕순봉과 조위사 우간의대부 전협과 부사 서상합문부사 송구 등을 보내 왔다 신묘에 제전사가 승도를 모아 도장을 문종혼전에서 삼주야간 설하고 임진에 또 순종혼당에 설하였다 계사에 문종을 제하니 축문에「오직 왕은 경릉을 이어 받아 후봉을 무유하니 민과 속을 교도하매 예의를 종으로 하였도다 조정에 뜻을 오로지하니 충성이 권권(권권)하고 백자의 책서(백명)로 공수를 닦으니 오래갈수록 더욱 공손하도다 중명(창해)만리에 일엽편주로 써 통하니 정성이 나타난(조) 곳에 풍도(풍파)도 순종하도다 이 중국은 사해가 다 회동하나니 공을 비교하고 덕을 추도함에 누가 왕보다 으뜸이 되리요 마땅히 오래 살아 동방에서 번병이 되리라고 생각하였더니 갑자기 이에 세상을 떠나매 슬픔이 어찌 다하리요 사신을 보내어 제전을 진설하여 써 나의 애충을 표하노라」고 하고 조하기를「부형의 상은 인륜의 큰 슬픔이요 부의를 증하는 예는 조정의 지극한 은전이라 공순하던 번국임을 상기할 제 마땅히 애영의 은전을 입게 할 것이다 특히 사신을 보내어 가서 전의를 이루어 써 권존함을 보이고 호모함을 위로 하노라」고 하였고 그 조위서에는「불의의 민흉으로 문득 부상을 당하고 다시 동기 마저 잇달아 윤망함을 들었도다 통독이 거듭 잇달으니 어떻게 견디고 있는가 내가 들으니 진실로 측은하고 슬프다 경은 부형의 뒤를 이어 본래부터 효우를 지녔도다 바라건대 잘 슬픔을 억제하여 짐의 권존에 잘 맞도록 하라 이제 사신을 보내어 조위하고 겸하여 경에게 조위물품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이르거던 영납하라」고 하였다 갑오에 순종을 제하여 가로되「오직 왕은 자질이 무미하고 효우가 숙성하며 신의를 행하고 공순함을 생각하여 갸륵하게도 덕망과 성예를 누렸도다 분주히 상에 복하니 예의 떳떳함을 얻었고 일국을 무수하니 진실로 민정에 맞았도다 큰 복을 받아서 이러한 안영을 보전하고 병풍(병)이 되고 울정(정간)이 되어(위병위한) 조정을 익대하리라 하였더니 무엇이 불선하여서 벼란간 고질병에 걸렸단 말인가 오직 하늘의 보시는 만물에 맞추어 불형한 것이어늘 누구가 선을 쌓고도 요절하리라고 하였으리요 나의 사신을 신칙하여 행정을 서두르게 하고 변변치 않은 제물을 진설하여서 이 정성을 표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왕의 생일을 천원절이라 하였다. 9월 기해에 송사를 회경전에서 향연하고 임인에 또 향연하고 갑진에 송별연을 베풀고 표문을 부하여 사예하였다

을축 2년 춘 2월 정묘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신미에 김강경도장을 건덕전 7일간 설하였다. 계유에 요가 대안이라 개원하였음을 알려 왔으므로 왕이 유사에게 명하여 대묘와 6 능에 고하게 하였다. 을해에 처음으로 가행할 때는 인왕반약경을 받들고 전도하게 하니 송제를 따름이다. 정축에 대마도 구당관이 사자를 보내어 감귤을 받쳤다. 정해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승려를 공양하였다. 3월 병신에 왕이 문고(문종)의 반혼당에 나아가 한식겸 상사제를 행하고자 하니 유사가 곡위가 없다하여 어렵게 여기거늘 왕이 말씀하기를「예는 마땅히 편의함을 따라야 할 것이다」하고 드디어 법가의 호종을 감하고 갔다. 무술에 송의 밀주에서 제가 붕하고 황태자가 즉위하였음을 알려왔다. 무신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였다. 갑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하 4 월 경오에 왕제 석후가 도망하여 송에 들어갔다. 김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인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지냈다. 경인에 조재로 말미암아 유사에게 명하여 운우경을 임해원에서 7일간 강하게 하고 또 산악에 기도하고 임진에 근신에게 명하여 녹수하고 경계(경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5월 갑인에 금강명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정축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임인에 년 80 이상의 남녀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의대와 예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임자에 문종의 대상임으로 흥왕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8월 신미에 호부상서 김상기와 예부시랑 최사문을 송에 보내어 조위하고 공부상서 임개와 병부시랑 이자인을 보내어 등극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문종의 신어를 경영전에 봉안하고 친히 존례를 행하였다. 무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가 아뢰는 사수를 청단하는데 음락을 정지하고 소선을 올리게 하였다. 9월 기유에 경계을 석방하였다. 임자에 순종의 혼전에 친히 존하였다. 요가 어사중승 이가급을 보내 와 생신을 하하였는데 기일에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를 조롱하여 말하기를「사신의 이름은 가급인데 어찌하여 불급하였는가」라고 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문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을해에 백고좌도장을 회경전에서 3일간 설하여 인왕경을 강하고 승 삼만을 공양하였다. 11월 정유에 순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병오에 요가 낙기부사 고주관내관찰사 야율성을 보내 왔다. 계축에 요가 보정군 절도사 소장과 숭록경 온교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특진검교태사 겸중서령 상주국 식읍일만호 식실봉일천호로 삼고 겸하여 관면 차마 규인 의대 채단 등의 예물을 사하였다. 을미에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병인 3년 춘 정월 을미에 외척인 예부시랑 이예의 처 왕씨 등에게 상궁 이하의 내직을 주어서 왕태후의 궁관을 삼고 녹봉을 차등있게 사하였다. 2월 경신 삭에 수태사 겸중서령 최충과 수태위 문하시중 김원충을 정종묘에 배향하고 수태위 문하시중 최제안과 수태사 겸중서령 이자연과 검교태사 문하시중 왕총지와 수태위 중서령 최유선을 문종묘에 배향하였다. 병인에 왕이 왕태후에게 상책하고 건덕전에 거동하여 중외의 하를 받고 군신에게 향연을 사하였다. 택라 유격장군 가어내 등이 와서 하례하고 방물을 바쳤다. 정묘에 적경궁주가 부여후 수에게 시집 갔다. 무진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였다. 경인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보를 삼고 상안후 수와 부여후 수와 금관후 (#;10-435)와 변한후 음으로 수사도를 삼고 진한후 유로 수사공을 삼았다. 윤월 갑인에 위위소경 최사설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하하고 전중소감 곽상은 방물을 바치고 호부시랑 김사진은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3월 신유에 선왕의 시호를 피하여 시중 최숙의 시호 인효를 고쳐 충의라고 하였다. 기묘에 대마도의 구당관이 사인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을유에 산천에 비를 빌었다. 하 4월 계사에 또 빌었다. 갑오에 노신열로 호부상서를 삼고 문간으로 섭병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위위경을 삼았다. 신축에 유사가 오랫동안 날이 가물므로 저자를 옮겼다. 경술에 친히 대묘에 체하고 태조 이하의 선왕과 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였다. 계축에 이정공으로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최석과 김량감으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홍과 왕석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노단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갑인에 체향으로 곡사하였다. 5월 무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박경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자에 상서예부시랑 최홍사를 요에 보내어 낙기복을 사하고 예빈경 이자지는 하정하고 지중추원사 이자위와 상서좌승 황종각 책명을 사하고 또 고주사로 상서우승 한영을 보냈는데 그때 요가 압록강에서 장차 각장을 일으키려 하므로 이를 파하기를 청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정해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조하기를「짐이 유명을 받들어 외람히 대위(왕위)에 거하였더니 근래에 변괴가 자주 일어나고 한발이 재앙이 되는지라 불신의 음호와 군신의 광보하는 힘을 입어 음양이 순서롭고 상하가 다 화합하여지기를 바라고 내몸을 반성하고 자기를 책망하며 자주 은유를 보였으나 아직껏 비를 얻지 못하였으니 이는 대게 (짐의) 양덕(박덕)의 소치라 하겠다 그러나 아마도 군하의 소행이 혹은 의에 맞지 않거나 명세의 현재 (일세에 뛰어난 현량한 인재)가 등용되지 않아서가 아닌가 한다 오직 너희들 문무 상참관과 치정구덕(관직에서 물러난 연로한 덕망가)과 산임 삼품 이상원(품작만 있고 직책은 없는 삼품이상의 관원)은 금월 26일을 기한하여 각각 봉사를 올려 짐의 과실과 형정의 득실과 민서의 폐막(병폐)을 직언하여 숨기지 말 것이며 또 충직청렴하고 재덕이 있는 자 각 1인과 남녀 승도로서 효순을 독행하였거나 효제치 못한 자와 관직에 있으면서 공도를 지키지 않고 법도를 요란하여 소민을 침해한 자들을 들어서 자세하게 기록하여 아뢰라」고 하였다. 추 7월 병인에 조하기를「짐이 군신이 올린 봉사를 보니 세속이 사치를 숭상하여도 금제(금령)가 없다고 많이 말들을 하고 있으니 소사로 하여금 재신과 제학사와 풍헌장관과 더불어 선왕의 전례에 의거하여 무릇 의복 차마의 품제를 짐작하여 상세히 제정하여 아뢰게 하라」고 하였다. 무인에 덕종후 김씨가 별세하였다. 8월 병술 삭에 형부상서 소태보로 서북면 병마사로 삼고 공부상서 유석으로 동북면 병마사를 삼았다. 계묘에 국노를 선위하여 합문에서 주연을 사하고 구정에 가행하여 친히 서노 남녀를 향연하고 물품을 차등있게 사하였으며 독질 폐질자에게는 따로 주식을 급하였다. 9월 무오에 양경의 무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는데 수개월이 되어서 파하였다. 갑자에 요가 수전중감 사순직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묘에 변한후 음이 졸하였다. 동 10월 갑진에 내외관에 명하여 태후의 생신을 표하하게 하고 또 설날과 지일(동지와 하지를 말함)과 팔관회 때에도 이와 같이 하게 하여 길이 정제를 삼았다. 기유에 기설하였다. 11월 임술에 친히 초제를 지내고 기설하였다. 무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기사의 대회에 눈이 내려 연회에 배석하였던 군신이 다 옷을 적시고 저녁에 돌아오려고 할 제 하늘이 개이고 달이 밝아지므로 왕이 창덕문 밖에 연을 멈추고 제왕에게 명하여 술잔을 받들어 헌수하게 하니 간의 김상기 이자인 보궐 위계정 등이 간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12월 무술에 양경의 문관을 소집하여 동정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정묘 4년 춘 정월 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축에 고주사 비서감 임창개를 요에 보냈다. 기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산천 묘사에 제하여 신병이 싸움을 도와주기를 빌었다. 갑술에 회경전에서 친히 초제를 지냈다. 무인에 동녀진 장군 아노한 등 1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묘에 소태보로 이부상서를 삼았다. 경진에 밀진사 합문인진사 김한충을 요에 보냈다. 2월 경인에 임개로 어사대부를 삼고 고경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최사설로 시어사를 삼았다. 갑오에 개국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정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동여진 장군 괴팔 등 19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계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3월 병진에 구산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기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축하였다. 신유에 서여진 추장 소은두 등 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작을 사하였다. 계해에 최석으로 권판상서이부사를 삼았다. 임신에 일본의 상인 중원 친종 등 32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술에 송의 상인 서전 등 20인이 와서 신주 화엄경판을 바쳤다. 병자에 태일 (천신)을 문덕전에서 친히 초제하고 풍우가 조순하기를 빌었다. 무인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경진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정사를 보살폈는데 문하시랑 평장사 최석 김량감과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하였다. 하 4월 병술에 송의 상인 부고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에 중서시랑 평장사 왕석이 졸하매 3일간 철조하였다. 경자에 귀법사에 행차하여 대장경이 이룩되었음을 경찬하였다. 을사에 금강경 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고 비를 빌었으며 무신에 또 보제사에서 빌었다. 5월 정사에 두번 우제를 지냈다. 정묘에 왕이 흰 난삼을 입고 현릉에 배알하여 죽책을 올렸다. 무인에 인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경오에 경릉에 배알하고 임신에 창릉에 배알하여 모두 죽책을 올렸는데 책문에「선조를 제향하는 엄숙한 의식은 희역에 풍성한 천제(은천)을 숭상하였으며 신을 감동하게 하는 도리는 우서에 지성을 귀히 여겼읍니다 효의 생각이 일어날제 마땅히 비사(신사)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신이 그릇 유충우매한 몸으로 선왕의 가유(연이)를 계승하게 되었사오니 시서에 느껴 슬픈 마음을 이기지 못하와 날을 택하여 배건의 예를 거행하나이다. 백관에게 집사 할 것을 명하여 성대한 의례를 협찬하게 하였사오며 구주의 토산물을 다하여 써 향기로운 제전을 갖추옵고 우러러 영명하신 조감을 바라오니 극경한 마음을 굽혀 받아 들이옵소서 하늘에 계셔서는 영위를 다투어 빛내사 굽혀 대복(순하)을 내리시고 역세에 있어서는 경화(대화)를 침(유의 뜻) 선하사 창기를 보전토록 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갑술에 최석으로 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최사량으로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을해에 김행경으로 문하시랑 동중서평장사를 삼았다. 을묘에 회경전에 친히 초제하고 비를 빌었다. 6월 임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병신에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추 7월 계축에 문황으로 서북로 병마사 겸지중군병마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북면 병마사 겸지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병진에 내정에서 초제하였다. 기사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동남도도부서가 주하기를「일본국 대마도의 원평 등 40인이 와서 진주 수은 보도 우마를 바쳤읍니다」고 하였다. 임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는데 최석 김량감 유홍 최사량이 시정의 득실을 진주 하였다. 8월 계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사형을 청단하였다. 을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숭경궁을 고쳐 보령이라 하고 경흥원을 원희궁이라 하였다. 병오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어사대부 임개로 서북로 병마사를 삼고 사재경 윤익상으로 지동북로 병마사를 삼았다. 9월 경술 삭에 왕이 회교역에 머물었는데 밤에 호위의 군영에서 불이났다. 신해에 시신을 대동강 누선에서 향연하였다. 계축에 장락전에 거동하여 시사하였다. 무오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고혜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자에 최석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최사량으로 검교 태자태사를 삼고 문황으로 검교 태자태부를 삼고 이자위로 검교사공을 삼았다. 계유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경계(경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인에 연등도장을 흥국사에 설하고 또 궁성내외의 거리에 점등하였다. 동 10월 기묘 삭에 흥국사에 거동하였다. 계미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을유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였다. 정해에 왕이 관풍정과 구제궁을 유람하고 드디어 영명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용선을 타고 대동강에 이르렀다가 밤이 되어서 이에 돌아왔다. 임진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루 부계에 거동하여 관락하고 드디어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고주사 예빈소경 유신을 요에 보냈다. 계사에 친왕과 시신을 부계에서 향연하였다. 을미에 흥복 금강의 두 절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홍복 인왕의 두 절에 행차하고 드디어 제년 행차하여 누선을 타고 주연을 베풀고 물 흐름을 따라 대동강에 이르러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 백좌도장을 상경 회경전에 설하고 승 삼만을 구정에서 공양 하였다. 무술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하였다. 11월 을묘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병진에 위위소경 유석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임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전중소감 김덕균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유단으로 분사병부상서 지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종각으로 위위경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정축에 상서우복사 임희열이 졸하매 하루동안 철조하였다. 12월 기묘 삭에 출추사 시어사 최사설을 전 진 나주도에 보내고 상서병부원외랑 이위를 경 상주도에 보내고 합문기후 윤관을 광 충 청주도에 보냈다. 기축에 형부시랑 최저를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경인에 최석으로 수태위 판상서이부사 감수국사를 삼고 김량감으로 수태위를 삼고 유홍으로 수사공을 삼고 최사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문황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자위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김충의로 호부상서를 삼고 박인량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이예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갑오에 경계를 석방하였다.

무진 5년 춘 정월 기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오에 요가 횡선사 어사대부 야율연수를 보내왔다. 2 월 갑오에 요가 각장을 압록강안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므로 중추원 부사 이안을 보내어 장경소향사로 가탁하고 구주에 가서 가만히 변사에 대비하게 하였다. 3월 기유에 중서시랑 평장사 유홍과 우승선 고경에게 명하여 전성에 초제를 베푸니 구례를 수한 것이다. 갑자에 금부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무진에 최사제로 중추원사를 삼았다. 하 4월 병신에 한재가 심하므로 왕이 백요(백관)를 거느리고 남교에 거동하여 다시 우제를 지내고 육사(육개사항)로써 스스로를 책하니 가로되「정사가 한결 같지 않았는가 백성이 직을 잃었는가 궁실이 높아서인가 여알이 성행하였는가. 포저(회뢰)가 행하였는가 참부가 횡행하였는가」라 하고 동남 동녀 각 8인을 시켜 춤추면서 우를 부르게 하며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음악을 거두고 노천에 나와 앉아 정사를 듣고 임인에 또 종묘 사직과 산천에 기도하였다. 5월 신해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나주의 표풍인 양복 등 남녀 23인을 돌려 보냈다. 기미에 요의 동경회례사 검교우산기상시 고덕신이 왔다. 계유에 조기를「짐이 덕에 밝지 못하므로 황천이 견책을 나타내어 석달이나 비가 내리지 않으니 두렵고 송구스럽도다 아마도 중외의 영어(옥)에 잘못이 있는가 보다 그 경수와 박죄는 모두 용서하여 주라」고 하였다. 추 7월에 송 명주가 우리 나라 탐라의 표풍인 용협 등 10인을 돌려 보냈다. 9월에 태복소경 김선석을 요에 보내어 각장을 파하기를 빌었는데 표문에「세 번 앙청하여도 들어주지 않으시니 비록 번거롭게 함이 비례임을 두려워 하나 우리의 원하는 바를 어찌 입을 봉하고 침묵을 지켜 말씀하지 아니할 수가 있겠습니까 더욱이 옛적에는 공물을 드리고(투궤) 글을 올리면 만성이 다 곤난한 호소를 통하게 되고 궁문에 부르짖으며 북을 치면 사총에 등문함을 막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신감의 지공하심을 만나니 어찌 백성의 실정을 다시 주달하지 않으리요 신이 엎드려 살피건대 승천황태후께서 조정에 임하여 칭제하실 때 경계(이)를 사하시고 봉토를 획정하여 주시니 무간은 순문에 이르게 되었고(무간비격어순문) 집옥은 비로소 우회에 참여케 되었나이다(집옥보참어우회) 신절을 장련히 여기시고 예은을 점피하게 하시어서 천황학주의 성으로부터 서으로 피안을 수복하고 일자별교의 수를 한하여서 동쪽은 우리 나라 강토로 분할하여 주셨습니다. 통화 12 갑오년에 입조한 정위 고량이 천보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고려국왕 왕치에게 칙하기를 동경유수 손령이 아뢴 것을 살펴보니 경이 9월 초부터 정부를 발하여 성채를 수축하여 10월 상순에 이르러 공사를 이미 마쳤다고 하니 경은 하늘이 준 재질로써 지략은 시기에 통달하였도다. 즐거이 사대의 정성을 바치고 멀리 내정의 예를 받들었다 때마침 농한기를 이용하여 멀리 정부를 모아서 광야의 도둑을 막으려 먼저 요진에 성루를 쌓으니 보다 조지에 부합하고 깊이 시정에 알맞도다 하물며 저 여진은 일찍 황화에 돌아와 우리 위신에 복종하고 있으니 감히 비위한 일은 하지 않을 것이지만 속히 완수함을 힘써서 진실로 길이 통태함을 기할 것이다. 그 권애함에 있어서 어찌 자나 깨나(매흥) 저버리겠는가고 하시었습니다. 그때 배신 서희가 경계를 맡아 관임하고 유수 손령이 선지를 받들고 상의 하여 각각 양쪽 경계에다 제성을 분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므로 하공진을 안문에 보내어 압록의 구당사를 삼아 낮에는 나가서 동사(동쪽 물가)를 감독하고 밤에는 들어와서 내성에서 숙직하면서 드디어 천위에 의지하여 점차로 좀도둑을 제거하였으므로 이후로는 방비가 없어도 변후가 더욱 한정하여졌습니다. 성종의 칙묵이 아직 마르지 않았고 태후의 인자하신 말씀이 어제와 같사온데 갑인년에 강에 다리를 놓고 배를 만들어 길을 통하여 을묘세에 우리 주성 경내에 들어와 군을 두고 을미에는 궁구를 설하여 역정을 세우더니 병신에는 비답(수두)으로 윤허하여 옥사를 철훼하고 조하기를 자여의 세소한 일은 항규를 지키도록 하라고 하였고 또 임인년에는 매매원을 의선군 남쪽에 설치하려고 하시므로 논신하였던 바 즙수하는 것을 파하더니 갑인세에 비로소 탐수암을 정융성의 북쪽에 배설하고 회보하시기를(탐수암을) 기공한지 여러 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당국은 대대로 충근하고 연년이 공근하여 왔습니다. 몇차례나 사행의 장주를 보냈사오나 암수의 성교를 제거하시지 않고 더욱이 이제와서 신시를 경영하려고 하시니 선조의 유지를 어기고 소국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어여삐 여기시지 않는듯 하옵니다. 수천리에 차마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었는데 90년 동안 공물을 바쳐옴이 공로가 없게 되었습니다. 모든 구설이 탄식을 하고 뭇사람의 마음이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신이 비로소 선대를 이어받아 삼가 외번을 지키게 되매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격앙(격분)으로 쏠리게 되니 어찌 조그마한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을(체구) 것이 있겠습니까 경계가 대초에 연하였으니 환화하여 관과를 본받기를 맹세하였으나 땅이 장사처럼 협소하매 기쁘게 춤추려고 해도 오히려 소매자락을 돌리기 어렵습니다(지협장사 변무상난어회수) 자주 겸주(비단에 쓴 표주문)을 올렸으나 윤허(윤유)를 받지 못하였으니 위로는 하늘을 두려워 하며 아래로는 백성에게 부끄럽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곤신의 횡의를 물리치고 변부의 큰 근심을 생각하시와 전원에 경착함을 그대로 맡기시와 다시 구업을 편안케 하시고 각고의 장옥을 금하여 새로 이룩함이 없도록 하소서 다행이 경소함을 면케하여 주시면 길이 보효하기를 도모하겠나이다」고 하였다. 동 10월 정축에 요가 대상소경 정석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1월 계해에 연화궁의 원자(세자)의 이름을 욱이라 사하고 은기 필단 포곡 안비 노비를 사하였으며 왕이 태후를 모시고 수춘궁에서 향연하였는데 조선 계림 상안 삼공과 부여 금관 이후도 시연하여서 밤이 다하여 파하였다.임신에 금선석이 요에서 돌아오니 회조하기를「여러번 봉장을 올려 각장을 그만둘 것을 청하고 있는데 진실로 사소한 일이어늘 어찌 번다한 말을 빌리리요 근일중에 편의하도록 의처할 것이다 하물며 아직 설치할 것을 기하는 바도 아니니 힘써 마음을 편안히 하여 써 성심을 지극히 할 것이며 깊은 의심을 풀고 나의 지의를 체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12월 경자에 이안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인으로 전중감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이 해에 요가 사신을 보내 와 양 이천구차 이십삼양 마 삼필을 사하였다.

기사 6년 춘 정월 임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해에 신흥창의 곡식을 풀어 경성의 제불사에 포시하여 재를 설하고 복을 빌었다. 무술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2월 신유에 친히 천지 산천을 구정에서 제사하여 써 복을 빌었다. 3월 경인에 능엄경도장을 건덕전에서 7일간 설하였다. 하 4월 신축 삭에 서리가 내렸다. 6월 신축에 종묘와 칠능에 비를 빌었다. 경신에 최사제로 참지정사를 삼고 박인량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고 서정으로 삼사사를 삼고 김상기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추 8월 갑진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서해 등 14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경술에 송의 명주에서 우리 표풍인 이근보 등 24인을 돌려보냈다. 계축에 국학을 수리함으로 의장을 갖추어 문선왕(공자)을 순천관에 이안하였다. 병진에 사형을 청단하였다. 일본국 대재부의 상객이 와서 수은과 진주 궁전 도검을 바쳤다. 9월 을해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양린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정축에 천원절임으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는데 왕이 하성조사(성조를 하하는 사)를 지으니 가론「이슬은 차고 바람은 높아 가을 밤은 맑은데 달빛은 향전 속을 밝게도 비춰 준다 삼경이 되려는데도 노래소리 드높으니 요요한 우리 인생 모두다 환같고나 영화를 탐하지 말고 좋은 술 가져와서 금잔에 가득 부어 즐거운 정 펴어보세」라고 하였다. 동 10월 기해에 송의 상인 양주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송의 상인 서성 등 5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해에 인왕경을 회경전에서 3일간 강하고 승 삼만에게 공양하였다. 무오에 새로 주조한 13층의 황금탑을 회경전에 봉안하고 경찬회를 설하였다. 송의 상인 이주 양보 양준 등 1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유에 왕태후가 국청사 창건을 시작하였다. 11월 정묘 삭에 일식하였다. 동여진의 추장 고사 등 21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에 수사공 유홍의 신제가 낙성되었으므로 왕이 대복경 이자의에게 명하여 조서를 가지고 가서 은기 필단 안마를 사하였다.

경오 7월 춘 정월 정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예빈성이 탁라 구당사의 상신장에 의거하여 주하기를「성주 유격장군 가량잉이 죽었으므로 동복형제인 배융부위 고복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고 부의물은 마땅히 구례에 준하여서 지송하도록 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임진에 보제사의 수륙당에 불이 났다. 이에 앞서 폐인(임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 섭호부랑중 지태사국사 최사겸이 송에 가서 수륙의문을 구득하고 왕에게 청하여 이 당을 짓다가 공역을 채 마치기 전에 불이 난 것이다. 2월 갑인에 동여진의 도령 야사 등 17인이 와서 마를 바치거늘 물품을 사하되 차등이 있게 하였다. 병진에 유홍으로 문하시랑 평장사 판병부사를 삼고 최사제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기미에 동여진의 도령 요어내 등 2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임술에 동여진의 독달 등 34인이 내조하였다. 3월 기사에 송의 상인 서성 등 1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자 야에 크게 벼락과 번개가 쳐서 신흥창에 화재가 일어나매 홍원 국청 양사의 공역을 파하였다. 하 5월 병인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이시하고 이경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그때 경필의 정문(응시문자의 정식)이 격에 맞지 않았으므로 주사를 비방하였다. 6월 경자에 어사대가 주하기를「영원병마록사 우여유가 변민을 침요하여 재물을 취감하니 청컨대 정위에 회부하여 논단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였다. 갑진에 제하기를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시우가 시기를 어기니 내외의 공도사장 이하의 죄를 석방하고 관리사로서 법을 범하여 직에서 파면된 자는 다스려서 사곡이 없거던 고려하여 본품에 서용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계미에 호부상서 이자의와 예부시랑 위계정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겸하여 공물을 바쳤다. 9월 신미에 요가 이주관내관찰사 장사설 등 31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경진에 2차로 요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삼절인으로 하여금 전내에 앉게 하니 좌우의 유사가 주하기를「두 번씩이나 사자를 향연한다는 것은 옛적에 이런 예가 없었사오며 삼절이 전내에 앉는 일도 또한 들어보지 못하였읍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사자가 어제의 천경사 비문을 가지고 왔으니 마땅히 특별한 예우를 가할 것이라」고 하여 청종하지 않았다. 무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어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동 10월 병오에 왕이 태후를 모시고 삼각산에 행차하여 경술에는 승가굴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장의사에 행차하고 계축에 인수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갑인에 대가가 산길에 머물러 있는데 백성의 나이 백세 된 자 한 사람과 팔십된 자 세 사람이 길에서 알현 하거늘 각각 물을 사하고 존문하였다. 무오에 신혈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12월 신유 삭에 삼각산으로부터 돌아와 사하였다. 12월 임진에 눈(설)오기를 빌고 경자에 다시 제신묘에 빌고 임인에 또 빌었다. 요가 횡선사 익주관내관찰사 야율이칭을 보내왔다. 송이 문원영화집을 사하였다.

신미 8월 춘 정월 정묘에 군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고 각각 구마를 사하였다. 2월 계축에 요의 동경지례회사사 예빈부사 오야여가 왔다. 3월 병자에 동여진 영새장군 개다한 등 40인이 와서 탁타(낙타) 및 마를 바쳤다. 하 4월 정미에 중추원부사 이자인이 졸하였다. 계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정유산이 졸하매 정순이라 익하였다. 5월 기미 삭에 일식하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70일간 경천하였다. 을축에 사직에 비를 빌었다.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묘에 비를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6월 갑오에 재차 사직에 빌고 정유에 또 대묘와 칠릉에 빌었다.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왕년에 번적이 창주를 침구하였을 때에 병마록사 안선준 등이 병졸을 거느리고 나와 덕령술에 주둔하고 낭장 고맹 등을 보내어 추포하며 분격하니 적군이 크게 무너지는지라 교위 숭검과 대정 변학 등이 적중에 돌입하니 사졸들이 사기를 높혀 사로잡고 참살한 공이 있사오니 직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시기를 비나이다.」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병오에 이자의 등이 송의로부터 돌아와 주하기를「(송)제가 우리 나라 서적에 호본이 많음을 듣고 관반(접빈사)에게 명하여 구서목록을 써서 주면서 이에 말하기를 비록 권질이 부족한 것이 있더라도 또한 모름지기 전사하여 부쳐 오라고 하였읍니다」고 하였다. (구서목록) 백편상서 순상주역 10권 경방역 10권 정강성주역 9권 육적주주역 14권 우번주주역 9권 동관한기 127권 사승후한서 130권 한시 22권 업준모시 20권 여열자림 7권 고옥편 30권 괄지지 500권 여지지 30권 신서 3권 설원 20권 유향칠록 20권 유흠칠비 7권 왕방경원정초목소 27권 고금록험방 50권 장중경방 15권 원백창화시 1권 심사방황제침경 9권 구허경 9권 소품방 12권 도은거효험방 6권 시자 20권 회남자 21권 공손나문선수경 40권 양우노자 2권 나십노자 2권 종회노자 2권 완효서 7녹 손성진양추 33권 손성위씨춘추 20권 간보진기 22권 십육국춘추 102권 위담후위서 100권 어환위략 유번양전 30권 오균제춘추 30권 원행충위전 60권 심손제기 20권 양웅집 5권 반고집 14권 최인집 10권 급총기년 14권 사영운집 20권 안연년집 41권 삼교주영 1000권 공환문원 100권 유문 370권 문관사림 1000권 중장통창언 사서체론 제갈량집 24권 왕희지소학편 1권 주처풍토기 1권 장읍광아 4권 관현지 4권 왕상찬음악지 채옹월령장구 12권 신도방찬락서 9권 고금악록 13권 공양묵수 15권 곡양폐질 3권 효경유소주 1권 효경위소주 1권 정지 9권 이아도찬 2권 삼창 삼권 비창 3권 위굉궁서 1권 통속문 2권 범장편 1권 재석편 1권 비룡편 1권 성황장 1권 권학편 1권 진중흥서 80권 고사고 25권 복후고금주 8권 삼보황도 1권 한관해고 3권 삼보결록 7권 익부기구전 14권 양양기구전 5권 계강고사전 3권 현안춘추 3권 간보수신기 30권 위명신주 31권 한명신주 29권 금서칠지 10권 세본 4권 신자 2권 수소자 1권 호비자 1권 하승천성원 고사렴씨여지 100권 십삼주지 14권 고려풍속기 1권 고려지 7권 자사자 8권 공손니자 1권 신자 10권 조씨신서 3권 풍속통의 30권 사승지서 3권 영헌도 1권 대연역 병서접요 7권 사마법한도 1권 동군약록 2권 황제대소 30권 명의별록 3권 조식집 30권 사마상여집 2권 환담신론 10권 유곤집 15권 노심집 21권 산공계사 3권 서집 80권 응거 백일시 8권 고금시원영화집 20권 집림 20권 계연자 15권 추 7월 임술에 상서좌복사로 치사한 노단이 졸하니 시호를 광헌이라 하였다. 정축에 김상기로 호부상서 정당문학을 삼고 유석으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8월 정묘에 중서시랑 평장사 최사제가 졸하였다. 제하기를「송인 전성은 서찰을 잘하고 동양은 무예가 있으니 머물러 있기를 간곡히 청하고 또 직질을 가하여 내자를 권장하라」고 하였다. 윤월 기미에 왕이 정전을 피하여 소선하고 책필로 정죄하였다. 갑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여 행향하고 또 시를 지어 써 (불법에) 귀숭의 뜻을 보였다. 9월 경인에 상춘정에 거동하여 계림공 희 부여공 수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 좌복사 소태보 병부상서 서정 상장군 왕국모 직문하성 고경 한림학사 손관 등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변사를 물었다. 계사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고숭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1월 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홍이 졸하였다. 경술에 사직에 눈(설)오기를 빌었다. 12월 계해에 문하시랑 평장사 이안이 졸하니 양신이라 익하였다.

임신 9년 춘 정월 갑신 삭에 우설로 조하를 쉬었다. 기축에 중추원사 형부상서로 치사한 박양단이 졸하니 3일간 철조하였다. 정유에 김상기로 이부상서를 삼고 임개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자에 동여진의 아노한 등 2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기묘의 동여진의 회화장군 삼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탐라성주 의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정원장군을 가하고 의대를 사하였다. 임오에 선마하여 소태보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3월 병진에 시항(시정)의 민가 640호가 불탔다. 이 달에 왕이 만기의 우노로 자못 몸이 편치 못함을 느껴 문덕전에 이어하고 내의에게 명하여 양성방약을 올리게 하더니 문득 느낀 바 있어 고풍장편을 지으니 그 끝에 일으기를「약효를 얻고 못얻고를 어찌 구태어 염려하랴 부생이 처음이 있으니 어찌 끝이 없으리오 오직 뻑뻑히 삼가 정성껏 모든 선을 닦아서 정역(서방정토)에 뛰어올라 범웅(석가여래)께 예하리라」고 하였다. 왕의 춘추가 한참(정성)인데 이런 시를 지었으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괴이 하게 여겼다. 하 4월 을묘에 참지정사 소태보로 권판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중추원사 서정으로 서북면 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정당문학 김상기로 권판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고 동지중추원사 임개로 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무오에 궁인 이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제하여 금관후 #에게 수태위 겸중서령을 가하였다. 병인에 금관후 (#10-457)가 졸하였다. 무진에 요의 동경지례사 고량경이 왔다. 신사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금성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기미에 유석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이예로 동지중추원사를 삼았다. 경신에 조하기를「짐이 일찍이 일자 최사겸이 아뢰는 것을 듣고 경릉의 허결한 곳을 수보하였더니 요즈음 사천소감 황충현 등의 봉사를 보건대 사겸의 수보는 도리어 지기를 압양하여 장차 선령으로 하여금 현침에 안타하시지 못하게 된다 하니 형부로 하여금 사겸을 가두고 국문하라」고 하였다. 을축에 정당문학 김상기로 수국사를 삼았다. 병인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임신에 왕태후가 백주 견불사에서 천태종예참법을 장기간(약일만일) 동안 설하였다. 을해에 서정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추 7월 을유에 참지정사 최사량이 졸하였다. 8월 을축에 이자위로 상서우복사 권지문하성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처음에 자위가 재상감교로서 송에 가서 표주할 때 그릇 요의 연호를 냵으므로 송묘에서 그 표문을 각축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문책을 당하여 파면되었는데 수월이 못되어 내폐에 간알하여 이 직에 배명되었으므로 시인이 그를 기롱하였다. 무진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기사에 최사겸을 선산도에 추방하였다. 9월 임오에 왕태후가 서경에서 별세하였다. 을유에 요가 왕정을 보 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동 10월 병자에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자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서 경천하였다. 12월 계해에 동여진의 여라불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지진하였다.

계유 10년 춘 정월 기묘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갑인에 송의 명주보신사 황중이 왔다. 3월 무인에 원자 욱에게 명하여 수춘궁에 입거하게 하고 동지중추원사 유석과 좌간의대부 손관으로 태자좌우첨사를 삼았다. 임오에 서북로 병마사가「북번인 삼인이 모화하여 내투하였다」고 아뢰매 의복 및 전택을 사하였다. 하 4월 기유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문정이 졸하였다. 계축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서 6일간 설하고 왕이 친히 삼보(불 법 승)를 찬하는 시를 지었다. 을묘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풍행종을 보내 와 왕에게 명하여 기복케 하였다. 5월 무술에 소태보로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병부사를 삼고 서정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김상기로 이부상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고 유석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임개로 중추원사 형부상서를 삼고 이예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경자에 홍호사를 성동에 창건하였다. 6월 갑자에 내전에서 친히 초제 하여 써 농사를 빌었다. 추 7월 계미에 서해도 안찰사가 주하기를「안서도호부관할하에 있는 연평도의 순검군이 해선 일소를 나포하였는데 선중에는 송인이 12명 왜인이 19명이었고 궁전 도검 갑주와 수은 진주 유황 법라 등의 물건이 있었으니 반드시 양국의 해적이 함께 우리 나라의 변지를 침범하려던 자들입니다 그 병장 등물은 관가에 수납하고 생포한 해적은 다 영외에 유배하고 그 순포군사에게 상을 내리시기를 청하옵니다.」하니 이를 듣고 그대로 따랐다. 임진에 병부상서 황종각과 공부시랑 유신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8월 임신에 내외의 사형죄수를 감면하여 해도에 유배하였다. 9월 정축에 왕이 인예태후 반혼전에 나아가서 소상제를 행하였다. 임오에 요가 영주관내관찰사 대귀인을 보내 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12월 갑자에 요가 횡선사 안주관내관찰사 야율괄 보내왔다.

갑술 11년 춘 정월 계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진에 해곁에 혜성이 있었다. 2월 병오에 자주 천변이 있으므로 사하였다. 무신에 왕이 장차 열병할새 어사대가 주하기를「병은 금이라 목을 이기는 것입니다 바야흐로 봄이 짙어 덕이 목에 있으니 열병함은 생기를 거슬림입니다.」고 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았다. 3월 갑술에 왕이 인예왕후를 반혼전에서 제하였다. 갑신에 국자제주 한검이 세차례나 표문을 올려 청로함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장군 잉우 등이 와서 말 9필을 바쳤다. 정해에 구정에서 초제 하였다. 갑오에 정극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윤 4월 임진에 왕이 병이 났으므로 갑오에 재신 추밀 및 종실이 연영전 북문에 나아가서 기거하였다. 5월 임인에 왕이 연영전 내침에서 붕어하니 곧 그날로 빈을 선덕전에 옮겼다.수는 46이요 재위는 11년이라 시호를 사효라 하고 묘호를 선종이라 하였으며 성의 동쪽에 장사지내고 능을 인릉이라 하였다. 인종 18년 관인이라 가시하고 고종 40년 현순을 가하였다.

이제현의 찬에「시라는 것은 뜻의 향하는 바이니 마음에 있으면 뜻이 되고 말로 발하면 시가 된다 선종의 문덕전 이약시를 보면 조맹의 시음척일이란 시와 비슷하니 어찌하여서 인가 조맹은 열국의 경임에도 그 말이 구차하므로 군자가 오히려 비방하였거늘 하물며 왕자임에랴 선종의 총명호학으로써 성현의 서가 아니면 읽지 않고 구차한 뜻만 없었더라면 명량갱재의 노래는 아직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대풍강개의 작품쯤이야 어찌 거연히 미치지 못하랴 3년이 다 못되어 드디어 군신을 버리고 갔으니 슬프도다」고 하였다.


 

 

제14대 헌종(獻宗 1094~1095 재위1년)

 헌종은 선종의 장남이자 제2비 사숙왕후 소생으로 1084년 6월 을미일에 태어났으며,이름은 욱(昱)이다. 1094년 5월 선종이 서거하자 그 유언에 따라 중관전에서 11세의 어린 나이로 고려 제14대왕에 올랐다. 선종의 사망시 나이가 11세였던 헌종은 유아시절부터 당뇨병에 시달려 매우 병약했으며,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이때문에 대부분의 대신들은 왕권이 선종의 동생들 중에 한명에게 넘어갈 것으로 생각했다.즉위초에는 어리고 병약하였으므로 태후가 청정(聽政)하여 군국대사(軍國大事)를 모두 처결하였다.

 1095년(헌종 1) 정월 초하루에 해 옆에 혜성(慧星)이 나타났는데 태사(太史)가 아뢰기를 “해의 곁에 혜성이 있음은 근신(近臣)의 난이 있을 징조이니, 제후 중에 반(反)하려는 자가 있겠습니다.”라고 하였다. 타고난 천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지만 나이가 어려 수성(修省)할 줄 모르고, 다만 내의(內醫) 3, 4명을 불러들여 방서(方書)를 토론하고, 혹은 서화를 익힐 뿐이었다.
같은해 7월에 과연 이자의(李資義)가 반란을 꾀하였으나, 오히려 주살되고 난은 진압되었다. 당시 사람들이 “선종은 총명한 아우가 5명이나 있었는데도 어린 아들에게 왕위를 전하였으므로 이런 반란이 일어났다.”고 애석해하였다. 난적(亂賊)을 토벌한 공으로 소태보(邵台輔)는 권판이부사(權判吏部事), 왕국모(王國#모42)는 권판병부사(權判兵部事)가 되었다.
같은해 8월에 계림공 희(鷄林公 熙:뒤의 숙종)가 중서령으로 임명되더니 그해 10월에 어린 조카를 폐하고 왕위에 올랐다. 헌종이 제서(制書)를 내려 선위(禪位)할 때 근신 김덕균(金德均)을 보내어 계림공 희를 종저(宗邸)에서 맞이하고, 자신은 후궁으로 물러났다. 왕위를 물러난 헌종은 1097년 2월 흥성궁에서 14세의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병명은 당뇨병이었지만 그의 죽음을 재촉한 것은 왕위를 찬탈한 숙종에 대한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시호는 회상(懷觴), 예종 때 공상(恭觴)으로 바꾸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온릉(穩陵)이다.
                                                                   출처:
미르나라

헌종 공상대왕의 휘는 욱이니 선종의 원자요 어머니는 숙태후 이씨로 선종 원년 6월 을미에 탄생하였다. 천성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9세에 서화를 좋아하여 무릇 견문한 바는 일찍이 잊어버리지 않았다. 11년 5월 임인에 선종이 붕어하매 유명을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갑인에 선종을 인릉에 장사지냈다. 6월 경오 삭에 모후를 높여서 태후라 하였다. 갑신에 소태보 이자위로 모두 문하시랑 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유석으로 상서좌복사 주국을 삼고 임개로 참지정사를 삼고 이자의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동지중추원사 좌산기상시를 삼았다. 을유에 문종의 비 숭화궁주 김씨가 별세하였다. 무자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대사하였다. 송의 도강 서우 등 69인과 탁라 고적 등 194인이 와서 즉위를 축하하고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조선공 도와 계림공 희로 수태사를 삼고 상안공 수와 부여공 수로 수태보를 삼았으며 진한후 유와 한산후 윤과 낙랑백 영으로 수사도를 삼았다. 추 7월 정묘에 송의 도강 서의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오 삭에 조하기를「정주 선덕진경내에 황충의 재해가 있다하니 군신으로 하여금 각기 봉사를 올리게 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송의 도강 구보 유급 양보 등 64인이 왔다. 동 11월 임자에 나이 80 이상 되는 자들을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12월에 요의 내제사 숙준열 부사 양조술 위문사 숙치 기복사 곽인문 등이 왔다. 을유에 내제사가 반혼당에 나아가 선종을 제하니 왕이 조서를 맞이하여 조제하였다. 조서에「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양절을 보전하여 장차 편번의 총을 입히려 하였더니 갑자기 기약없는 먼 길(죽음)을 떠나(오만지유) 영혼이 요요하게 되었구나 마땅이 우악한 은총을 미치게 할 것이므로 제뢰(#;10-463)를 유진하여 권고의 정을 표하노라 이제 영주관내 관찰사 소준열과 위위소경 양조술을 보내어 칙제사와 부사로 삼고 제소의 여러 가지 제물은 별록과 같이 갖추노라」고 하고 제문에는 오직 영은 기범은 깊고 영특하며 자신이 수매하매 다행하게도 풍운의 기회를 만나 공순하게 일월의 정화에 의지하고 조업의 여경을 받아 왕번의 다스림을 이어 맡게 되니 표해의 구토를 쫓아 다스리고 천조에 조공함이 근성을 다하였도다. 진실로 부훈(의방)을 받아 충절을 다하여 왔음으로 장차 총상을 가하고자 하였더니 홀연히 세상을 떠나니 부음이 주달된 이래로 은포의 미치지 못함을 슬퍼하노라 특히 사신을 달려 보내어 가서 전상을 진설케 하나니 생각건대 정혼은 진실로 깊은 뜻을 양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제가 끝나고 왕이 환궁하매 위문사가 조서를 건덕전에서 전하니 조에「아뢴 바를 살펴 보니 고려국왕이 훙서한 일을 자세히 알겠다. 짐이 생각건대 선신은 동해의 사표로써 바야흐로 광부의 업적을 힘입으려 하였더니 갑자기 훙거하였다.(운월지재)는 비보를 듣게 되었도다. 살펴보건대 그대는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은 흉변을 당하였으니 마땅히 길이 뒤를 이어나갈 일을 생각하고 조금 애최에 절제를 하여 예문에 따라 여의 멀리서 염려하는 마음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광주방어사 숙치를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위문하게 하고 아울러 부증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라」고 하였다. 병술에 기복사가 건덕전에서 조서를 전달하니 조에「왕은 마침 가간을 만나서 이에 세사를 이어 받았다. 괴(괴#)점은 예제로 되어 있으나 그러나 유모로써 정을 모으고(유모이종정) 금혁의 권변을 따라 굳이 견복하여 정사에 나아가게 하노라 애영의 지극함을 양지하고 힘써 권고위명의 깊은 뜻에 부응하도록 하라 이제 숭록경 곽인문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기복 고칙 각 일통씩을 사하노라」고 하였고 관고에는「효를 이룸은 오직 어버이 때문인 것이니 저마에 있어서는 예를 마땅히 슬픔으로 마칠 것이요 충을 나라로 옮겨 금혁에 순응할진대 의는 권에 따름을 귀히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양자는 발명에 의하여 싸움(융사)에 나아갔고 백금은 유위함을 인하여 섭사를 하였던 것이다 짐이 고전을 상고하여 크게 여러 나라를 위무하는데 청사(동토)의 명봉을 돌아보면 이는 황가의 큰 번병이로다. 상제가 어여삐 여기지 않아(상제불은) 국왕(열후)이 붕어하니 영사에 부탁하여 이룸이 있게 할 것이므로 마땅히 구토를 계승하게 하노라 좋은 강일(강길지단)을 가려서 곧 견복의 문을 상고하니 첨의가 다 좋다 하는지라 총장을 내리는 바이다. 고려국왕의 사자 왕욱은 경운이 융성한 세적으로서 재질이 아름답고 인품이 영준하여 용성에 칠숙의 정기가 올라서 일찌기 그 슬기로움이 모였고 목신(동방신)은 오행(금목수화토)의 수기의 으뜸이 되니 나(생)면서 인에 부하도다 이에 묘령에 있음에도 일찍 준수한 그릇으로 추중되어 바야흐로 가업을 계승하는 일을 맡았더니 갑자기 부상(척점지간)을 당하게 되었도다 부음이 주달되어 옴에 상심됨이 지극하도다 그러나 비통함이 점괴에 얽혀서 3연이라도 참아 그 정을 빼았을 수 있으리오마는 책임이 번탄(번병)에 무거우니 하루인들 그 지킴을 비우지 못할 것이다. 이러므로 특히 윤지를 내려보내어 하여금 시묵의 경을 쫓게 하고 타뉴의 숭권을 부여하며 봉지의 준질에 올려서 검계를 우사하고 훈읍을 겸신하여 국봉을 승습케 함으로써 인망을 위무하고자 하노라 아아 처음 그대의 열조가 우리 조정에 신사 하였을 때 태산을 두고 맹세를 하고 동해의 의표가 되어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여 여유가 있었고 손에 남기(이)고 자를 길러(익)써 휴경을 이었도다 돌이켜 생각건대 팔세의 막대한 번영(팔세지막경)은 일유의 소사에서 얻었던 것이라 그대는 오직 선대의 유훈을 답습하여 길이 좋은 계책을 생각하라 근검으로 가히 백성을 보전할 것이요 신의로 가히 정사를 행할 것이니 이 밝은 훈계를 쫓아 지금부터 흠봉 할 것이며 가히 기복할 지어다. 표기대장군 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700호로 하고 인하여 소사로 하여금 택일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토록 하나니 주관자는 시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무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해(일)곁에 혜성이 있었다. 왕이 어려서 수성할 줄 모르매 다만 내의 3·4인을 데리고 방술서를 토문(토론)하며 혹은 서화를 익혔다. 경술에 왕국모로 권상서 병부사를 삼았다. 2월 경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소라 등 28인이와서 마를 바쳤다. 정해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두문 등 48인이 와서 마를 바치니 왕이 선정전에 거동하여 알현을 사하고 근신 최홍사에게 명하여 변방의 형편을 묻게 하고 주식 의대 포백을 사하였다. 신묘에 송의 상인 황충 등 31인이 자은종 승 혜진과 같이 오니 왕은 근신 문익에게 명하여 헌개를 갖추어 혜진을 맞이하여 보제사에 안치 하였다. 진은 항상 말하기를 보타락산의 성굴을 보려고 왔다 하며 가 보기를 청하였으나 조의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3월 신축에 상안공 수가 졸하였다. 하 4월 기묘에 유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병신에 태후가 현화사에 행차하여 선종의 소상재를 설하였다. 기유에 유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이예로 정당문학 형부상서를 삼고 이자의로 중추원사를 삼고 손관으로 지중추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계축에 요의 동경회례사 고수가 와서 드디어 사적으로 능라채단을 심히 많이 바치거늘 왕이 건덕전에 거동하여 인견하고 근신에게 명하여 (동경)유수의 안부를 묻고 주식과 의대를 사하였다. 6월 기묘에 왕이 목차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무술에 요의 수창연호를 행하였다. 병오에 대묘에 향제하였다. 왕이 양음중(상중)에 있으면서도 원구 방택 종묘 사직 및 무릇 기전에 실린 것은 거행하지 않음이 없었다. 계축에 탁라 (탐라)의 고물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신에 이자의가 반란을 꾀하다가 복주하였다. 계해에 소태보로 권판이부사를 삼고 왕국모로 권판병부사를 삼았다. 8월 갑자 삭에 황중보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을축에 대숙 계림공 희로 중서령을 삼으매 백관이 저택에 나아가서 축하하였다. 갑술에 송의 상인 진의와 황의 등 6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미에 손관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최사추로 이부상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갑신에 명하여 동경 황룡사탑을 수리케 하였다. 9월 을미에 소태보로 특진수사도 판이부사를 삼고 김상기와 유석으로 모두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임개로 수사공 상서좌복사 판호부사를 삼고 왕국모으로 우복사 참지정사 판병부사 주국을 삼고 황종각으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병신에 이자의의 도당인 병부원외랑 김덕충을 원지에 추방하였다. 무술에 조하기를「지난 번에 권세 있는 간신이 난을 꾀하다가 복주하였으니 이는 실로 장상들이 진력한 효과라고 하겠다. 비록 이미 화란은 뽑았으나 더욱 부지런히 수성하여야 할 것이니 무릇 모든 원옥은 모두 관대하게 용서할 것이며 내외에 동으로 속할 수 있는 소죄는 다 면제를 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자에 김선석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왕국모로 판도병마사를 삼았다. 동 10월 기사에 제하기를「짐이 선고의 유업을 계승하여 잘못 대위에 나아가니 나이 어리고 몸도 또한 병약하여 능히 국권을 진무하고 사민의 바람을 채워(새) 주지 못하여 음모와 횡의가 번갈아 권문에서 일어나고 역적과 난신이 여러번 내침에 범간하였다 이는 모두 박덕의 소치이니 항상 임금됨의 어려움을 생각하노라 가만히 보니 대숙 계림공은 역수가 몸에 있고 신인이 손을 빌리니 아아 너희들 유중은 받들어 비도를 잇게 하라 짐은 마땅히 후궁에 퇴거하여 잔명의 보전을 얻으리라」고 하니 이에 근신 김덕균 등에게 명하여 계림공 희를 종저에 맞이하여 선위하고 드디어 후궁에 퇴거하였다. 숙종 2년 윤 2월 갑진에 흥성궁에서 붕어하니 수는 14요 재위 1년이다 시호를 회상이라 하고 성동에 장사지내니 능은 은릉이라고 하였다. 예종이 즉위하자 시호를 고쳐서 공상이라 하고 묘호를 헌종이라 하였으며 고종 40년 정비라고 가익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우임금이 아들에게 전위함은 후세를 걱정함에서이다 유복을 세우려(식) 구군의 구(위구)에 조회하여도 천하가 움직이지 않음은 분한이 본래 정해졌기 때문이다. 현종의 세 아들이 형에서 제로 상전하여 순종에 이르고 순종이 거상에 지나친 슬픔으로써 요절하고 사자가 없음으로 선종에게 전위케 되었는데 선종이 별세함에 태자가 사위하니 이가 헌종이다 나라사람들이 견문에 숙습하여서 이에 말하기를 선종에게 다섯 동생이 있었는데 어린 아들을 세웠다고 하여 이로써 그른 것으로 돌리니 생각하지 못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리오 오직 왕친 중에서 주공과 같은 이를 얻고 신하 중에서 박육과 같은 이를 얻어서 맡겨 정사를 보필케 하지 못하면 그 위난함은 가히 발꿈치를 고이고 기다릴 것이다. 후세에 불행하게도 강보중의 후사에게 중대한 일을 물려 주고 간난한 소임을 맡기는 사람이 있다면 가히 이것으로 써 경계를 삼을 것이다」고 하였다.

 

 

 

제15대 숙종(肅宗,1095~1105 재위10년)


숙종은 문종의 셋째아들이자 인예왕후 이씨 소생으로 순종, 선종의 동복아우다. 1054년 7월에 태어났으며 초명은 희(熙), 이름은 옹, 자는 천상(天常)이다. 부지런하고 검소하며 과단성이 있고, 오경(五經)·제자서(諸子書)·사서(史 書)등에 해박하였다. 문종의 큰 기대를받아 [뒷날에 왕실을 부흥시킬 자는 너다.]라고 하여 문종 때 계림공에 봉하여졌으며, 선종3년(1086)에는 수태보 벼슬을 받았다. 1094년 조카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수태사 겸 상서령에 올랐다.

   숙종은 1094년 10월 측근세력이 전혀 없는 어린 헌종을 밀어내고 왕위를 찬탈함으로서 고려 제15대왕에 올랐다. 이때의 그의 나이42세였다. 숙종은 왕권을 장악하자 곧 반대세력을 완전히 숙청하고, 왕위에 오른던 날에도 이자의의 누이동생 원신궁주 이씨와 그녀의 아들 한산후 그리고 나머지 두 아들까지 모두 경원군으로 귀양을 보냈다.

 1096년 6촌 이내의 혼인을 금하였으나 백성들이나 귀족들에게 별로 지켜지지 못했다. 1097년에는 주전관(鑄錢官)을 두고 주화를 만들어 통용하게 하였으며, 1101년에는 본국의 지형을 본떠서 은병[闊口]을 주조하고 이듬해에는 고주법(鼓鑄法:돈 만드는 법)을 제정하여 해동통보(海東通寶) 1만5000관을 만들어 문무양반과 군인들에게분배하였다. 1099년 김위제의 주장에 따라 남경을 중시하고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을 두어 궁궐을 조영하게 하였다. 1102년에 예부에서 (우리나라가 예의로 교화하기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 되었으니, 원컨대 그 분묘를 찾고, 사당을 세워 제사하십시오.)라고 아뢰니 이에 따라 서경에 기자사(箕子祠)를 세웠다.

 1103년 동여진의 추장 영가(盈歌)가 사신을 보내어 내조하였으나, 추장이 되면서 고려에 침입하였다. 같은해 2월에 임간(林幹)이 정주에서 패하였고, 3월에는 윤관(尹瓘)이 여진정벌을 꾀하였으나, 역시 이기지 못하고 화약을 체결하고 돌아왔다.
이에 따라 윤관의 주장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처음 설치하였다. 윤관은 "신이 여진에게 패한 것은 저들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므로 대적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아뢰니 드디어 기병으로 구성된 신기군(神騎 軍), 보병으로 구성된 신보군(神步軍), 승도(僧徒)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 軍)을 두어 별무반이라 칭하고, 여진정벌을 준비하게 하였다.

 1105년 서경에 순행하여 동명왕묘(東明王廟)에 제사하고, 병이 들어 개경으로 돌아오다가 10월에 수레 안에서 죽으니 태자[우]가 유조를 받들어 즉위하였다. 능은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판문리에 있는 영릉(英陵)이며, 시호는 명효(明孝)이다.
                                                                 출처:
미르나라

  

 

 숙종 명효대왕의 휘는 옹 이요 자는 천상이며 고휘는 희이다. 문종의 제 삼자로 순종의 동복형제이며 문종 팔년 갑오 칠월 기축에 탄생하였다. 어려서 총혜하더니 장성하매 미쳐 효경 근검하고 웅의 과단하며 오경과 자(제자) 사를 보지 아니한 것이 없었으므로 문종이 그를 사랑하여 일찍 말하기를「후일 왕실을 부흥할 자는 너일까 하노라」고 하였다. 십구년(문종) 이월에 계림후로 책봉하고 삼십일년 삼월에 진봉(進封: 왕세자·세손·후·비·빈의 봉작을 더하는 것) 하여 공을 삼고 선종 삼년 이월에 수태보를 가하고 구년에 서경으로 왕의 어가를 수종(隨從) 할새 자운이 공의 장막 위에 어리니 이 기운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왕자될 징조라고 하였다. 헌종이 즉위하매 수태사 겸상서령에 올리고  명년 팔월에 중서령을 삼고 십월 기사에 헌종이 제(영)를 내려 선위(禪位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는 것) 하니 왕이 재삼 겸양하다가 경오에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이 날 원신궁주 이씨와 및 그 아들 한산후 형제 이인을 경원군에 유배하였다.

신미에 좌사랑중 윤 관 형부시랑 임의를 요(遼)에 보내니 전왕(헌종)의 표문에「엎드려 생각컨대 임금을 위하는 도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진술하여야 하므로 감히 봉장을 갖추어 부의에 올리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신이 연령이 어리고 성질이 어리석습니다  부왕의 견언을 어기지 못하여  가업을 망녕되히  계승하매 웅번의 극무에 힘써 길이 충근함을 다하려 하였더니 일찍 소갈증에 걸리게 되어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심하게 되었습니다  의는 십전의 묘술이 없으니 진찰을 다할 수가 없고 약은 백품의 영종이 핍하였으니 역시 제병의 효(명현)가 없음에 어찌하오리까 운명이 조석으로 다가와 더할 뿐이오 나음이 없습니다. 폐담이 타고 형해가 말라빠져 두 무릎이 이에 힘이 없고 두 눈이 이에 어둡습니다. 행보조차 어려우니 어찌 대경의 장리를 잡고 나서며 보아도 보이지 않으니 어찌 사면의 석계를 분별하리오 다만 금상에 엎드려 누었기만 하니 군국의 감임에 막혀져 있읍니다.  미구를 헤아려보니 이 때가 더욱 심히 위태로우며 받은 소임이 가벼웁지 않으니  관수함을 잠시라도 비우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금월 팔일에 신부 선신의 제 희로써  번무를 권수케하고 특히 배신을 보내어  애오라지 황정에 상달하나이다.」고 하였으며  왕의 표문에는「가만히 생각건대 고명의 간절한 바에 천이도 통할 수 있을 것이므로 감히 신자의 정성을 베풀어  우러러 군친의 조감하심을 번거롭게 하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신은 후번의 끝 아들이오  성역의 빈신으로 나서 유도의 성대를 만나 않아서 무위의 덕화를 즐기고 있었더니 전자에 국왕 신 욱이 일찍이 가벼운 병에 걸려 근자에는 심중함에 이르렀습니다  비록 다방으로 복약하여 보았으나 아직 조금도 낳는(전추) 효과를 보지 못하였으므로 금월 팔일에 신에게 번무를 권수케 하였습니다  신이 이 부탁함을 보고 승문하려고 생각하였으나 한스럽게도 궐정이 멀어서 곧 간독한 정성을 상신하지 못하였음에 어찌하오리까 문득 졸렬한 자로서 종사를 가수하자니 이에 계처할 겨를조차 없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전경)이 쌓이어 더욱 심하매 이에 봉진을 달려 보내어 신엄(황위)에 상고하나이다.」고  하였다.  무인에 소태보로 수태위 문하시중을 삼고  김상기로 수사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유석으로 수사공을 삼고 임개로 중서시랑평장사 판형부사를 삼고 왕국모로 수사도를 삼고 손관으로 상서우복사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사공 추밀원사 한림학사 승지를 삼고 김선석으로 지추밀원사를 삼았다. 경진에 제하여  조선국공 도에게 식읍 오천호 식실봉 오백호를 부여공 수(? 4쪽)에게 수태전를 가하고 진한후 유로 상서령을 삼고 낙랑백 영으로 낙랑후를 삼고 황중보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윤신걸로 용호군상장군 병부상서를 삼고 황유현을 공부상서를 삼고 최적으로 김오위상장군 섭형부상서를 삼고  그 외 등급을 뛰어 천관한 자가 수백인이요  공 상 조예(천역)에도 현직을 초수한 자가 있으되  유사가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병술에 참지정사 왕국모가 졸하였다.  십일월 계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참죄교죄 이하의 죄를 사하고 명산 대천에 모두 덕호를 가하고 민 년 팔십 이상 및 독폐질자와 의부 절부 효자 순손 환과 고독에게 찬을 사하고 물을 분여하기를 차등 있게 하고 각종 군인에게도 또한 미와 포를 사하되 차등 있게 사하였다. 병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중외의 하례를 받고 드디어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계축에 최유거를 요에 보내어 (공물)을 진봉하였다. 갑인에 최용규를 보내어 신정을 하하고 동팽재로 천안절(거란제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기미에 요가 유직을 보내와서 전왕의 생신을 하하거늘 왕이 건덕전에서 대신 맞이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경은 일역(동토)에 봉작을 이어받아 천조에 술직하였다  마침 수월의 처음에 당하여 때맞춰 현호의 아침이 되었으니 마땅히 경석(경하의 선물)을 펴(신) 써 권회함을 보일 것이다 이제 태주관내관찰사 유직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경에게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노니 이르거든 영수하라」고 하였다. 십이월 기사에 유직이 돌아가는데 표문을 부쳐 보내니 전왕의 표문에「권고하심이 엄신에서 나오매 성은이 잔명에까지 미치나이다  총영이 분에 넘쳐 기쁨과 두려움이 아울러 사귀옵니다 신은 원래 병약한 체질로서 중한 기탁을 망녕되히 받았습니다 비복의 부름(속―소)으로 그 병이 점점 깊이 들어가게 되어 보고 듣기가 어렵고 거동이 마음대로 되지 못하여 골친에게 미루어 번무를 권수케 하고 가신을 달려 보내어 천총에 앙고하였더니 의외에도 이번에 외람히 예자하심을 입어 특히 사절을 보내시니 조지의 위회하심이 돈독하고 보폐의 나누어 주심이 더욱 두텁습니다 몸이 약하고 기운이 허하여 일어나지 못함에 어찌하오리까 대신 수령케 하와 더욱 송구합니다 맹서코 백번이나 살아서 조금이라도 큰 뇌사에 보답하오리다」고 하였다  왕의 표문에는「국왕 신 욱이 오래 고질에 처해 있어 시립할 수가 없사온데 갑자기 총애하신 혜택을 입게 되오니 몸소 맞이할 도리가 없는데 어찌하오리까 신이 번국을 권수하여 대신 큰 은사를 받았나이다 그 받은 바 조서와 별록과 제물은 모두 이미 (국왕에게) 전부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병술에 최사추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김선석으로 추밀원사를 삼고 황종각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황옥으로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았다 이날에 황주목부사 이위로 상서우사원외랑을 삼으니 왕이 위의 청근 휼민함을 가상하게 여겨 아직 품질이 차지 아니하였는데 소환하여 이 직을 제수한 것이다.  경인에 임의가 요에서 돌아오니 회조에 이르기를「청사(동번)를 돌아보매 자총(황실)을 정성껏 받들어서 대대로 충성된 뜻을 다하고 때때로 공품을 닦았다 전일에 욱이 이미 표장에서 부진하였거니와 오랜 병에 신음한다더니 경이 다시 궐정에 신주하여 중무를 권지한다 하니 힘써 근순함을 생각하라 우선 써 윤종하노라」고 하였다.

병자 원년 춘 정월 무술에 동여진의 아부한 고란곤 두문 등 일백칠십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공부상서 삼사사 유석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상서좌승 최#(7쪽)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갑인에 교하기를「짐이 선왕을 우러러 본받아 검덕을 행하고자 음식을 절감하고 기욕을 마음대로 하지 않았는데 근일 듣건대 내(경)외의 시속이 사치를 좋아하여 그침이 없고 음식할 즈음에 배반이 너무 많아서 풍교를 상우고 습속을 패케 한다 하니  심히 통심할 일이로다  자금이후로는 마땅히 (음식에 있어서) 등급을 정하라」하고 이어 어사대로 하여금 규찰케 하였다. 정사에 황유현으로 응양군상장군 호부상서를 삼고 최적으로 신호위상장군 형부상서를 삼고  왕유열로 김오위상장군 공부상서를 삼고 오맹으로 전중감을 삼았다.  무오에 (왕의) 생신으로써 대원절을 삼았다. 이월 갑자에 사은 겸고주사 우원령을 요에 보내니 표에 이르기를「거년 십일월에 태주관내관찰사 유직이 이르러 조서와 별록 각 일도식을 받들어 전해 왔는데 전왕의 생일이므로 의대 은기 필단 궁전 안마 등을 특사하시고 전왕의 병으로 인하여 신으로 하여금 대수하라는 것이었읍니다 권고하심이 제의 충정에서 나와 혜택이 하역에 미치니 받아 전함에 있어  송구함이 병증하였나이다  엎드려 생각컨대 황제폐하께서는 도가 발라(정) 중총을 지키고 덕화가 천하를 덮으사 번신의 생일을 기억하시고 사신을 보내어 은혜를 베푸셨나이다  총명이 이미 닿았으니 의리상 마땅해 몸소 배수할 것이오나 병신이 더욱 쇠약하여 마침내 친영함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일방을 권수하는지라 대신 큰 뇌사를 받았으며 받은 바 조서와 별록은 이미 일찍 전부하였나이다」하고 하였고 전왕의 표에는 이르기를「호천의 도는 비자의 소리를 들음에 막힘이 없나니 군박한 정성은 반드시 모름지기 위에 호소하여야 할 것이므로 이에 삭독(표문)을 빌려 곧 엄 혼(제정)을 두드립니다 신이 일찍이 중병에 걸려 치료를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번선(번병)의 소임의 극무는 진실로 잠시라도 비우지 못할 것이오 공헌의 상규는 혹시라도 궐하지 못할 것이므로 감히 숙부에게 미루어 이에 국권을 부속하였습니다 신은 세록을 포기하고 별제에 퇴거하여 병약한 몸은 스스로 장빈에 장와하여  황홀한 혼은 단지 대악에 여유하나이다 이미 위태함이 깊으니 어찌 낫기를 헤아리오리까 근자에 공첩이 갑자기 왔음을 듣고 제언이 내렸음을 알았습니다 낙기복의 특예와 봉책의 성의를 행함을 아울러 모두 견제하여 주심은 원망에 맞게 되었사오며 또 생일의 명과 별사의 은을 베풀고자  미리 먼저 유시하시오나 잔천(장차 죽는것)를 헤아리매 별로히 편효도 없는데 이 때에 이르러 어찌 (후한) 사은을 받으리오 엎드려 비옵건대 간곡해 인련하심은 베푸사 (신의) 간고를 굽어 살피시고 유지를 돌리어 사신 보냄을 그치시고 마침내 병든 신으로 하여금 길이 중한 직책에 거함을 면케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을축에 전왕이 흥성궁에 출거하기를 청하거늘 왕이 이를 청종하니 이 궁은 선종의 잠구이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경진에 서여진의 아나화 등 사십팔인이 내조하였다. 삼월 신축에 서여진의 하부환 등이 내조하였다. 기유에 지예사 고민시호를 요의 동경에 보내었다. 무오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김보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사월 임술 삭에 서리가 내리고 계해에 또 서리와 우박이 내렸다. 계유에 선덕전에 거동하여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청조(조정을 들음)하였다.  중서성이 주하기를「만물의 성장할 때를 당하였는데 삼월 이래로 시령(절후)이 어기어져서 물이 응결하여 어름이 되고 서리가 내려 물을 상해하고 밤에 우박이 쏟아졌습니다 홍범오행전에 이르기를 우박은 음이 양을 협박하는 상이라고 하였고 경방역전에 이르기를 주벌함이 이에 벗어나면 그 재로 서리가 내린다」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위에 있는 이가 어느 한쪽 말만 듣게 되면 하정이 막히는 것이니 능히 이해를 생각하지 못하고 실수(실)가 엄급한데 있으면 그 벌로 향상 추워(한)진다」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병사를 일으켜 주륙을 망녕되게 하면 이를 망법이라 하는 것으로서 그 재로 서리가 내려 여름에 오곡을 죽인다」고 하였습니다  근자에 유군이 병환으로 누어 청단함이 불명하고 모후가 섭정하여 심혹함이 도를 잃어 흉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틈을 타서 난을 괴하게 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크게 주륙을 행하여 당류를 남기지 않고 일에 정상을 밝히지 아니하였으니 수계된 자 중에는 반드시 무죄한 자가 있어서 원기가 천지에 가득하매 화기가 변하여 재앙이 되었습니다 엎드려 생각건대 성상께서 천명에 응하여 대통을 이으셨으니 만기를 싸잡아 바르게 하소서 비옵건대 어사대와 상서형부로 하여금 무릇 의옥에 시비가 미정한 것은 독촉하여 공정히 판결케하여 원왕함이 없게 하고 그 고발한 바가 사실이 아닌 것은 모두 반좌(고발한 자가 도리어 죄받는 것)케하여 써 천계에 답하신다면 곧 인정이 서로 기뻐하여 재가 변하여 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를 청납(聽納)하였다. 기묘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을유에 경릉에 배알하였다.

 오월 병신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기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계묘에 또 낮에 나타났다. 갑진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해가 기울어지기까지 청정하였다. 정미에 경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무신에 금강경도장을 건덕전에 설하고 도우하였다. 무오에 요 동경지예사 예빈부사 고량정이 왔다. 유월 신유에 경종의 신주를 영능에 옮기고 선종을 대묘에 부(조선에 합제함)하고 경성왕후 김씨의 (신)주를 질릉에 맞이하여 덕종묘실에 부 하였다. 갑술에 진명도부서사 문주방어판관 이순혜 등이 해적과 싸워 이를 부수이 십칠급을 베었다. 정축에 동여진의 영손 등 십칠인이 내조하였다. 계미에 왕이 연덕궁주 유씨 및 원자로 더불어 동지에 배를 띄우고 술을 베풀어 시중 소태보 복사 황중보 지추밀원사황영 형부상서 최적 지주사 전중감 최홍사 직문하성 이오 우승선 급사중 유신을 불러 시연케 하고 서로 더불어 시를 지어 야반에 이르렀느데 뇌우로 파하고 말았다. 추 칠월 경인 삭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역대에 비장한 문서를 열람하고 그 중에 부질이 완전한 것을 택하여 문덕전과 장령전의 어서방 비서각에 분장하고 남은 것은 양부의 재신 및 고원사한과 내시문신에게 차등있게 사하였다. 정미에 문종의 기진도장으로 흥왕사에 거동하여 행향하였다.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팔월 경신 삭에 국노(대신급으로서 치사한 자)를 동합에서 서노(서민의 연노자)를 좌우동락정에서 향연할새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히 권주하고 인하여 의복 폐백 사선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병자에 동여진의 와돌을 고마요 등이 오거늘 중광전에서 인견하여 번사를 묻고 주식과 금견을 사하였다. 임오에 지추밀원사 호부상서 황종각이 졸하니 조위의 교서 및 뇌서를 사하고 시호를 개숙이라 하였다. 구월 기축 삭에 우복사 참지정사 박인량이 졸하였다. 경인에 왕이 인예태후의 기진도장으로 국청사에 거동하여 행향하고 겸하여 진전(영전)에 제하고 이것을 항식으로 삼았다.  경자에 탁(탐)나성주가 사람을 보내와 즉위를 가하였다.  정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송의 승 혜진을 인견하고 한림원에서 사식하였다.  무신에 송의 승 성총과 혜진으로 각각 명오삼중대사를 삼았다. 계축에 인왕선약경을 회경전에서 삼일간 강하고 친히 승 일만을 공양하였다. 동 십월 정축에 도장을 건덕전에서 삼일간 설하고 인예태후의 원성한 화엄경을 전독하였다. 무인에 송의 상인 홍보 등 삼십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을유에 오연총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소충을 요에 보내어 공물을 진봉하고 무신에 백가신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십이월 정사에 요가 이유신을 보내와 전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축정 이년 춘 정월 임인에 요가 횡선사 해주방어사 야율괄을 보내와 전왕에게 칙서를 사하니 이르기를「경은 일찍이 번봉을 진무하고 직공(조공)을 공수하였다  마침 질병에 걸리어 조이(섭양)하기를 청하므로 유사가 이에 전이를 참고하여 간세에 은사를 나누어 존념함을 보여 주노니 마땅해 (나의) 권고하는 생각을 알지어다. 이제 경에게 의대 필단 안마 궁전 등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나니 이르거든 영수하라」고 하였다. 이월 기사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였다. 임신에 동여진의 와돌 등이 내조하였다. 국청사가 낙성하여 무인에 친히 경찬도장을 설하고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이정공과 양부의 재신을 불러 잔치하여 면대하여 상주고 어제한 경찬시를 선시하여 유신으로 하여금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윤월 갑진에 전왕이 붕어하였다. 기사에 동여진의 와영 등 칠인이 내조하였다. 삼월 경신에 전왕을 은능에 장하고 요의 동경병마도부서에게 이첩하기를「전왕이 별저에 퇴거한 이래 병세가 일증하여 윤월 십구일에 훙서했으므로 이제 이미 장례를 마쳤습니다. 전왕의 유명에 이르기를 지난번에 기무에서 해면하여 주시기를 빌었더니 다행히 조서로서 허낙함을 입어 물러가 잔체를 요양하던 바 근래에 병이 심하여 도저히 소생할 도리가 없다 식종(상장의 일)에 관한 모든 일은 마땅히 검약을 따를 것이며 고주해서 대조를 번독하는 일은 모름지기 하지 말지어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전왕의 유명에 따라 구태어 사신을 보내어 고애하지 아니합니다」라고 하였다. 계해에 최사추로 중서시랑 평장사 판형부사 겸서경유수사를 삼고 김선석으로 좌복사 판호부사를 삼고 황영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임간으로 지#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예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사고 이오로 예빈경추밀원부사를 삼았다. 하 사월 병술에 상춘정에 거동하여 어제한 금정상화시를 선시하고 관각근시의 문신으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하여 친히 고하를 매겨 견을 차등 있게 상사하였다. 갑진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임원통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오월 정묘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육월 갑신에 왕이 봉은사에 거동하였다. 무자에 문하시중 이정공이 선지를 받들어 흥왕사의 비문을 지어 올리니 왕이 조를 내리어 장유하고 겸하여 필단 은기 차포 안마 등물을 사하였다. 송상 신환 등 삼십육인이 왔다. 갑오에 송이 우리의 표풍인 자신 등 삼인을 돌려 보냈다 처음 탐라민 이십인이 배를 타고 표풍을 만나 나국에 들어가 다 피살되고 오직 이 삼인만이 탈출함을 얻어 송에 투입하였다가 이때에 이르러 돌아온 것이다. 추 칠월 신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신에 동여진의 적선 십 소가 진명현에 침구하매 동북면병마사 금한충이 판관 강증을 보내어 그들과 싸워 이겨 배 삼소를 얻고 사십팔급을 베었다. 팔월 정해에 김선석으로 중서시랑 평장사를 삼고 임간으로 추밀원사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경인에 동여진의 미응 등 이십사인이 내조하였다. 무술에 홍호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혜성이 저성과 방성 사이에 나타나니 그 광망이 천시원에 뻗쳤다. 구월 갑인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동여진의 사호나 등 이십삼인이 내조하였다. 을해에 백고좌를 회경전에 설하여 인왕경을 강하고 승일만을 공양하였다. 추 십월 신사 삭에 동여진의 영파 등 이십오인이 내조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아부 등 이십오인이 내조하였다. 갑진에 안인감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유택을 보내어 횡선을 사하였다. 십일월 기미에 유유우를 요에 보내어 전왕의 생신축하를 사하고 무진에 필공찬을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또 임유문을 보내어 하정하였다. 갑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계사에 요가 야율사제와 이상을 보내와 옥책 규인 관면 차로 장복 안마 필단 등물을 사하고 책문에 이르기를 일짐(요 도종)이 호창(하늘)의 권우와 조종의 남긴 규범으로 천하를 통치한지 사십삼년인지라 (그동안) 밖으로 백성을 평강케 하고 안으로 제후를 회무하여 모두 도에 이르게 하였도다  해우에 사를 세우게 하니 북은 용천에 닿고 서는 압록강에 이르렀도다 삼가 정삭을 받들고 침신(조공)을 바쳐오더니 지난번에 선신(선종)이 서거하매 적사(헌종)가 슬픔을 머금고 고괴에 나아간채 모토(봉토)를 계승케 하였더니 거듭 장주를 올려 간절히 병임을 일컫고 제부(숙부 즉 숙종)에게 돌려 숭구(국정 또는 왕위)를 담당케 함을 원하므로 곧 그 간청에 의해 권리를 맡겼던 바 능히 충절을 다하여 대국을 섬기고 정성을 피력하여 상에게 공순하였오다 더욱이 일방의 지위를 생각하여 이미 천승의 이름으로 높였도다 마땅히 반드시 이름을 바르게 하여야 할 터이므로 이에 전례를 행하여 특히 책명을 하노라 아아 그대 권지고려국왕사 희는 이의(음양)의 간기를 닮았고 오행의 순열한 기운을 머금었도다 구류의 예와 술을 묵식으로 통하였고 칠웅의 세수(대세와 운수)를 정론으로 판단하였도다 정치의 권병을 잡음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시무를 재결하였도다 정간이 서매 종실이 평안하고 유악이 깊으매 백도가 정하였도다 비록 형제가 지란과 같이 변포에 총생하고 자손이 기기와 같이 진야에 경치할지라도 그 조상의 제사를 맡을 자는 그대가 아니고 누구이랴 이에 귀협(복서)에 따르고 헌물을 강구하여 금실(질)권단서로 대려의 맹약을 굳게 하고 금인자수로 차복의 은영을 베푸노라 이로써 정사 임해군절도사 검교태전 겸어사중승 야율사제와 부사 대복경 소문관직학사 이상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특진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일천호 식실봉 칠백호로 하노라 아아 우리 태조로부터 나에게 이에 미치기까지 공을 쌓고 덕을 거듭하며 부절을 나누고 강토를 사하였도다 번(번병)과 선(선창)에는 가세에 유법이 있고 조와 회(조공과 내조)에는 세시에 상제가 있나니 (그대는) 길이 동하(동방)(주십)의 의표가 되어 (우리) 요와 더불어 무궁하리라 오직 경건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이 남교에서 책명을 받았다.

무인 삼년 춘 정월 병인에 조하기를「과인이 조업을 이어 바야흐로 대위에 거하게 되매 대요가 사신을 보내어 특히 봉숭함을 보이니 마땅해 경사를 반포하여 위로 천자의 명에 보답할 것이니 그 수책하던 날에 조서를 접수한 이하로 승단집예한 내외 모든 부서의 원요 및 객사 접반한 관리에게 작 일급을 사하고 위범함이 있어 죄에 처할 자는 면하여 주고 지휘군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갑술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이월 갑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찰하였다. 기축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창곤 등이 내조하였다. 정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삼월 갑인에 창릉에 배알하고 신유에 대릉에 배알하였다. 계해에 교하기를 「과인이 망녕되이 양덕으로써 원량(원자)을 두었으니 마땅히 진위에 올릴 것이라」고 하고 유사에게 특명하여 태자를 세우고 첨사부 좌춘방 연경궁사 등의 관을 갖추고 조예(신복) 변읍(식읍)을 다 이에 예속케 하였으며 소태보로 태사를 삼고 김상기로 태전를 삼고 최사추로 태보를 삼고 김선석으로 소사를 삼고 임간으로 소보를 삼고 위계정 이#(20쪽) 조린충 곽상으로 모두 빈객을 삼고 김한충 홍기로 좌우서자를 삼고 유신 김경용으로 좌우유덕을 삼고 윤관으로 동궁시강학사를 삼고 최공후으로 가령을 삼고 문익고령신으로 좌우찬선대부를 삼고 우원령으로 중사인을 삼고 이위로 전내를 삼고 장령으로 세마를 삼고 유재로 시독을 삼고 강증으로 중윤을 삼고 유인무로 동의랑을 삼고 장경으로 약장랑을 삼고 최인필로 궁문랑을 삼고 이후로 솔경을 삼고 황유현으로 시위를 삼고 오손경 최유정으로 좌우청도 솔부솔을 삼고 나준 궁제로 좌우감문을 삼고 최정으로 우위를 삼고 최현으로 여분중랑장을 삼았다. 을축에 백관이 표를 올려 태자부 세움을 축하하였다. 병인에 동여진의 요진 등이 내조하였다. 하 사월에 동여진의 고두 등이 내조하였다. 기축에 이덕윤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정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여 승 삼천에게 공양하였다. 기해에 오(사의 오?)해의 신에게 비를 빌었다. 오월 임자에 우박이 내렸다. 신유에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육월 무인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추 칠월 무신에 송악신사에서 비 개이기를 빌었다. 기미에 윤관과 조규를 송에 보내어 사위함을 고하고 방물을 올리니 그 표에 이르기를「군부의 인자하심이 유황에까지 흡족하니 이미 박애하심이 나타났도다  신자된 마음은 충효에 있으니 어찌 망년되히 진술하리까 감히 정성을 피로하여 문득 황제 전에 청하나이다 신이 가만이 생각하옵건대 본국은 조고와 자손이 다 대를 이어 봉작을 승습하고 멀리 인풍을 향하여 술직해 왔나이다 지난번에 신의 형 운(선종)이 후복을 이어 받아 황조를 섬기매 누대의 이모를 준수하여 더욱 지절을 굳게 하고 원방의 분기를 관리하여 힘껏 경륜(공납)를 행하였습니다 더욱이 선후께서 홀연히 모의를 사함으로부터 망형(선종)은 바야흐로 해모하는 마음이 깊어 곧 사자를 보내어 위장을 받들려 하였으나 수를 누리지 못하고 문득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음을 어찌하오리까 신의 형 자인 선신 욱(헌종)이 폐읍(폐방)을 이어 권수하였다니 뒤이어 중병에 걸려 마침내 구요하여도 낫지 않고 점점 파리함이 심하여지매 이에 을해년 십월 팔일에 간독하게 번무를 미루어 신으로 하여금 주지케 하였습니다 그 부탁의 근간함을 돌아 볼 때에 감히 사양해 피하지 못하고 망녕되히 고치(고막)한 몸으로서 종팽을 가수하게 되었나이다 따라서 기구가 새로워지고 찬승의 시초인만큼 일방에 일이 많음으로 인하여 이제 수년이 되도록 일찍이 배신을 보내어 봉주를 앙신한 겨를을 얻지 못하였나이다 비록 성청이 널리 사무쳐 먼 곳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신다 하여도 가난이 거듭 이르므로 드디어 인순한 허물을 저지르게 되었나이다 예가 실로 궐함이 있으니 죄를 어찌 감히 도피하리요 이제야 고함이 늦어진 사유를 갖추어 (황제의) 지명하신 감조를 더럽히나이다 정위가 멀지 않으니 어름을 밟는 조심스러운 마음이 더욱 깊나이다」라고 하였다. 병인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팔월 병신에 유사에게 명하여 형옥(형벌)을 감케 하였다.  구월 기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추 십월 갑신에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대묘에 협향하고 돌아와 신봉문에 거동하여 참교 이죄 이하를 사하여 참죄와 교죄에 해당한 자는 섬에 유배하고 앞서 섬에 유배되었던 자는 출륙케 하고 출륙자는 귀향케 하고 귀향자는 상경케 하고 상경자는 조견을 허통하고 이미 조견한 자는 서용케 하고 각산 대천의 모든 신지에게 호를 가하고 또 (대묘의) 배향 공신에게도 (호를) 가증하고 제향을 도운 모든 집사와 대묘 구릉의 시위원장 등에게 작 일급씩을 사하고 묘정락부의 공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진사과 명경과를 치룬 자로서 군대에 떨어져 있는 자는 면제케 하였다. 무자에 지중추원사 김용과 예부시랑 조양휴를 요에 보내어 봉책함을 사하였다. 신축에 상서형부가 옥에 죄수가 비었다는 것을 상주하니 재상 소태보 등이 표로서 하예하매 왕이 하교하여 답유하기를「짐이 망녕되히 선대의 유업을 이어 받아 하민을 다스리고자 날로 만기를 살피니 다만 근노하는 생각만이 쌓여졌는데 지금 모든 옥이 비어 있음은 실로 협찬을 잘하였음에 녹유한 것이다 어찌 나에게 미를 돌리므로써 마음을 다하여 갑지기 표장을 올려 전하함인고 정성됨을 생각할 때에 진실로 가탄함이 간절하도다」라고 하니 재(신) 보(신)들이 또 표사하였다. 임인에 김약충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경술에 송상 홍보 등 이십인이 왔다. 무오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왕하와 윤계형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장영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병술에 요가 좌간의대부 내고부를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묘에 아들 필을 봉하여 검교태보 수태위 겸상서령을 삼았다. 계사에 내고부가 돌아갈새 왕이 표를 부쳐 사예하였다. 경자에 김경용으로 상서리부시랑 지어사대사를 삼고 이계용으로 상서형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문익으로 급사중을 삼고 고령신으로 이부랑중 추밀원우승선을 삼고 오연총으로 기거랑을 삼고 왕하로 병부원외랑 추밀원우승선을 삼았다. 병신에 예부에게 송조의 개보정예 일부를 사하였다.

묘기 사년 춘 정월 병진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신중원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을축에 조선공 도가 졸하였다. 이월 정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기해에 김상기로 수태전를 삼고  황옥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를 삼고 조린충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이오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송제가 조하여 (고려의) 거자의 빈공과(응시)를 허하였다. 삼월 을사에 연덕궁주 유씨를 책하여 비를 삼았다. 임자에 왕륜사에 행차하여 나한재를 설하였다. 하 사월 신사에 사루에 거동하여 사신들을 소집하여 중광전의 옥치괴화시를 짓게 하고 품제를 나누어 견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정해에 요가 횡선사영주관내관찰사 소랑을 보내오고 겸하여 장경을 사하였다. 경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오백라한재를 설하였다. 임진에 연영전에 거동하여 어장한 문서를 검열하였다. 무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임성개로 공부상서를 삼고 동팽재로 지상서병부사를 삼았다. 경자에 임의로 좌간의대부를 삼고 윤관으로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중서성이 주하기를 「윤관과 임의는 인척간이므로 간원에 같이 있음이 마땅치 못하오니 청컨대 윤관의 직을 해면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오월 을사에 여러 신사에서 비를 빌었다. 을축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퇴관)한 이정공이 졸하니 조위의 뇌서를 사하였다. 육월 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큰 우박이 내렸다. 계미에 윤관 등이 송에서 돌아올새 송제가 칙서를 부치니 이르기를「올린바 표문을 살펴 잘 알겠도다 경은 대대로 삼한을 진무하고 땅은 오부의 번이로다 능히 선대의 모유를 계승할 것을 생각하고 신절의 수행을 경건히 하여 해로로 사신을 보내어 만정의 공물을 받들었으니 진실로 이 수방의 시초에 있어 공극의 충성을 이루었도다 봉주를 상세히 읽고 사의를 음미하니 왕위전수를 늦게 알리게 됨을 서하고 봉위함이 때가 늦었음을 술하였다 근성함을 권념할 때 이에 이미 자세히 알았노라 바야흐로 새로이 (조업을) 계승하였으매 마땅히 (백성을) 후하게 무휼하고 잘 너그러은 수령을 펴어 아속(주이)을 편안케 하고 우리 중국을 보필하여 길이 동번이 될지어다」라고 하였다. 무술에 여러 신사와 박연천상에서 비를 빌었다. 추 칠월 신해에 연친전에서 소연을 베풀었다. 신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송이 우리 탐나의 실반석인 조섬 등 육인을 돌려 보냈다 팔월 병자에 기청하였다. 구월에 재신 일관 등으로 하여금 양주에 남경을 건설할 것을 의론케 하였다. 계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사에 지예사소사석이 요의 동경에 갔다. 임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삼백라한재를 설하였다. 정묘에 왕이 왕비 원자 양부의 군요 및 우세 승통을 거느리고 삼각산에 행차하여 윤월 임신에 상자사에 들리고 갑술에 승가굴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인하여 은향완 수료 각 일좌 금강자 수정념주 각 일관 금대 일요 병 금화과수번 차향 의대 금기를 시사하고 을해에 양주에 들려 도성 세을 땅을 상보고 경진에 인수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왕자 상당후 필이 졸하였다. 신묘에 문관을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임진에 신혈사에 행차하였다. 추 십월 경자에 이수를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한 것을 사하였다. 계묘에 삼각산에서 돌아와 약사원에 들려 사를 베풀었다. 신해에 고주겸밀진사 문익이 요에 가 원자에게 책명을 사하도록 청하였다. 회경전에서 초제하였다. 병진에 동여진의 아노화 등 이십육인이 내조하였다. 한이가 요에 가 방물을 바치고 조신준은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신미에 왕제 부여공 #(27쪽)가 죄로서 경산부 약목군에 유배되었다. 임신에 진한후 유가 졸하였다. 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십이월 임인에 요가 대숙을 보내어 생신을 축하하였다 신해에 요 동경지예회사사 대의가 왔다. 계해에 유석으로 상서우복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오수증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한영으로 병형상서를 삼고 조공선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김원유와 녹숭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경진 오년 춘 정월 경진에 요의 사신 소랑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사예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장군 표어내 등 육십인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을미에 장자 우를 책하여 왕태자를 삼았다. 이월 을사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이죄(참죄 교죄)이하를 사하고 각산대천에 신호를 가하고 양경의 문무백관에게 작 일급씩을 가하고 첨사부 춘방원에겐 이급씩을 가하고 산관(상임이 없는 한직) 칠품과 승조(정부 재직) 이십년인 자에게는 의복을 사하고 동서의 번장에겐 무관의 산계(산질의 직계)를 가하고 환과 노병 효자 순손에겐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신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삼월 을유에 중서성이 주하기를「현행력서가 착오된 점이 있으니 청컨대 역서찬자의 직을 삭제하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사에 최사추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았다. 하 사월 정유 삭에 일식하였다. 기해에 (장원정에서) 환궁하였다. 임자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한숙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오월 신사에 송의 명주에서 철종황제가 붕하고 황제 단왕 길이 즉위하였음을 첩보하거늘 왕이 철종을 위해 대안사에서 명복을 빌고자 하다가 간관이 불가하다 하매 이에 중지하였다. 임오에 요가 장신언을 보내와 원자를 책명할 것을 유시하거늘 왕이 의장을 갖추어 태초문 안에서 맞이 하였다. 그 칙서에 이르기를 「경은 후방에 노력을 다하고 왕실에 충성을 바쳤도다 비장(비#(28쪽)에게 부쳐 보낸 서장)으로 상주하여 연상하여 은전을 추급하여 주기를 원하였도다 이에 (경의) 성의를 살펴 소청에 따름이 마땅하도다 인하여 엄상을 그려(도) 더욱 공의를 신칙(칙)하며 특히 총사함을 표시하여 써 우권함을 밝히리라 이미 소사로 하여금 날을 가리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려고 지금 비서소감 장신언을 보내어 그 곳에 가서 보유케 하고 따로이 경에게 의착 필단 은 견 등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사하며 또 불경 이함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경인에 장신언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회사하였다. 육월 정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대묘 팔능 및 송악의 동신사에 비를 빌었다. 을축에 상서 임의와 시랑 백가신을 송에 보내어 (철종상을) 조위하였다 추 칠월 정축에 상서 왕하와 시랑 오연총을 송에 보내어 (휘종의) 등극을 축하하였다. 을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오일간 설하였다. 팔월 정유에 복령사에 행차하였다. 경자에 홍호사에 행차하였다. 기미에 궁남루와 교동랑 및 사점관과 장생사의 이서에서 화재가 일어나 민호 수백이 연소되었다. 구월 정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병술에 이재를 요에 보내어 조유를 사하였다. 무자에 송의 도강 이기 등 삼십인이 왔다. 추 십월 병신에 중서문하성에 현덕창의 미 일백#(30쪽)을 사하였다. 임자에 요가 소호고와 고사영을 보내와 왕태자를 책봉하니 칙에 이르기를「경은 조업을 이어 받아 멀리 해표의 구역을 다스리니 장차 후계의 원자를 세우려고 경건하게 천조의 명령을 기다렸도다 마침 그대의 소청에 따라 이미 짐의 말씀을 유시하고 특히 사신을 파견하여 공작을 총가케하여 진실로 우우함을 밝혀 써 권회를 표시하노라 이제 고주관내관찰사 소호고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고 그 곳에 가서 경의 장자 우를 책명하여 삼한국공을 삼고 그 인수 간책 차로과 아울러 별사하는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노라」고 하였고 책에는 이르기를「짐이 칠성의 큰 경륜(비도)을 부하하고 백왕의 정통을 소승하였도다 일역(동번)을 권고하매 천조를 협보하였도다 비록 그대의 세봉을 이어 이미 구강을 다스린다 할지라도 이 나라의 계승자를 총애함에 있어서는 아직 상예를 갖추지 않았으므로 유사에게 신칙하여 고사를 따라 닦아 좋은 때에 (장〈장〉진) 복봉에 순응하여 특예를 이에 펴노라 아아 너 고려국왕 희의 장자 우는 나면서 천지의 정기를 타고나고 어려서 훌륭한 재기를 이루었도다 학에 나아감에 능히 민첩하여 시서와 예악의 근원을 연구하였고 덕에 따라 어긋남이 없으매 부자와 군신의 대의에 합치하였도다 조선 이래로 충렬을 상승하여 길이 (황실을) 존장한 공노가 있으니 진실로 사속의 경사가 있을 것이어늘 하물며 (우는) 적자에다 아름다은 성문조차 성하고 사리(사방)의 사이에는 (너에게) 일심이 매어 있는 바이랴(일심소계) 그러므로 정사 고주관내 관찰사 소호고와 부사 수위위경 고사영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 삭 무 등 주 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전 동중서문하평장사사 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삼천호 식실봉 오백호를 삼노라 아아 태산과 황하를 두고 맹서하여 신을 전하노니 너는 이미 그 휴명을 함께 보유하였도다 동궁과 노월을 주어 써 진무하고 정토하게 하노니 너는 또한 함께 그 힘을 다할 것이다 오직 효하고 경하여야 가히 써 천성에 협화할 것이오 오직 겸하고 화하여야 가히 써 물정에 순응할 것이니 경계하고 삼가하여 짐의 가명을 저바림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을묘에 왕이 태자와 더불어 남교에 나아가 책명을 받았다. 기미에 태자가 요의 사신을 문하성에서 향연하였다. 신유에 박호를 요에 보내어 천안절을 축하하였다. 십일월 을축에 요사 소호고 등이 돌아갈새 왕이 표문을 부쳐 써 회사하였다. 김후선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병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송의 상인과 탐라 여진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신사에 금귀년을 요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병술에 혁운정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최선위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십이월 계사 삭에 요가 대복경 왕집중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진에 왕집중이 돌아갈세 왕이 표문을 부쳐 써 회사하였다. 병진에 이위로서 급사중을 삼고 이제로 시어사를 삼고 소태간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유의 이덕우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신사 육년 춘 정월 정묘에 제하여 구경 자(제자) 사 각 일본씩을 대성과 추밀원에 분치케 하였다. 태자의 생신으로 창영절을 삼았다. 기사에 천제석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경오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계유에 동여진의 여라불 사온 등 칠십오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자에 예부상서 최홍사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상서좌승 김덕진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요 동경지예사 예빈부사 고극소가 왔다. 경진에 송인 소규 육정준 유급이 내투하거늘 왕이 문덕전에 불러 시험하여 모두 팔품관을 사하고 정준에게 이름을 정걸이라 사하였다. 신사에 병부상서 한영과 대장군 장홍점을 보내어 중서시랑 김선석에게 관고(사령서)와 예물을 사하였다. 계미에 주부 이경택의 처 김씨가 부의 계모를 죽이려고 가만히 여비로 하여금 독을 식물에 넣어서 드리게 하였더니 계모가 이것을 알고 어사대에 고하니 김씨가 불복하므로 어사대가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매 왕이 이르기를 범상이 이미 명백하니 마땅히 곧 논죄하여 결정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김씨가 선조의 외척이므로 사형을 감하여 안산현에 유배하고 경택은 옥중에서 죽었다. 을유에 형부가 주하기를 「주부동정 조준명이 부의 사망한지 사년동안에 그 모를 봉양하지 않고 그 제를 우애하지 아니하여 그들로 하여금 모두 의지할 바를 잃게 하였으니 청컨대 법과 같이 논죄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짐이 정사를 하배 효와 제를 앞세우거늘 이러한 사람이 있느냐」라 하고 그 주함을 가타 하였다. 신묘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사일간 설하였다. 이월 임진 삭에 조유회사사 공목관 이복을 폄관하고 아울러 회사사 이재를 면직시켰다. 계사에 녹수(#(33쪽)수)하였다. 갑오에 사자를 보내어 산천에 망질하였다. 계묘에 동여진 내파지촌 귀덕장군 보마궁한이홀촌 도령 마포 광탄촌 장군 골부 등 오십오인이 입조하기를 청하거늘 이를 허하였다. 을사에 동여진 이위촌 도령 괴부 등 삼십인이 내조하였다. 병오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참지정사로 치사한 신수가 졸하니 사자를 보내어 조제 하고 익호를 공헌이라 하였다. 수는 송인인데 자못 학식이 있고 더욱이 의술에 정통하였다. 기유에 검교태사 수사공 자가 졸하였다. 임자에 조하기를「역신 이자의에 따라 좌죄된 자는 다 양이하라」고 하였다. 을묘에 또 조하기를「역당의 죄가 의심스러운 자는 이미 사하였으니 그 시어사 왕태소 주부 전총 판관 이자 위위소경 김의영의 처 이씨 등은 허해 환경케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홍원사에 행차하여 대장당 및 구조당을 낙성하였다. 무오에 중광전에 거동하여 서적을 열람하였다. 삼월 무진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홍호사에 행차하여 시를 어제하고 내시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임신에 제하여 비서성에 문적의 판본이 쌓이고 쌓이여 훼손되므로 포를 국자감에 두어 이것을 옮겨 장치케 하고 써 넓리 모인케 하였다. 병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경찬시를 어제하였다. 기묘에 왕이 요제의 혐명을 기피하여 이름을 옹이라 고치고 대묘와 팔릉에 고하니 군신이 표하하였다. 경진에 반약도장을 건덕전에서 설하였다. 요가 검교우산기상시 야율곡을 보내와 도종이 붕거하고 황태손 연국공 연희(천조제)가 사위함을 고하였다. 광명사의 승 광기 주부 손필 진사 이진광이 음양서를 사조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그들을 장유하였다. 병술에 오역신을 제하였다. 경인에 조하기를「기묘년 삼각산에 행차하였을 때 지나간 곳의 명산대천의 신호에 각각 인성 이자를 가하고 그 산천의 소재 주현으로 하여금 제고케 하라」고 하였다. 하 사월 신묘 삭에 일식하였다. 계사에 육십일자와 이십일현을 문선왕(공자)묘에 종사(배정)케 하였다. 어사대가 주하기를「요의 고애사가 전명한 후에 검은 적삼과 검은 사모로 연회에 나아감은 예가 아니니 청컨대 영송이원을 죄하소서」라고 하거늘 왕이 가로되 「이는 사자의 과실이니 영송이원이 무슨 상관이 있으리오」라 하고 듣지 아니하였다 또 주하기를 「사천복정 유록춘이 일식의 시각을 오주하였으니 청컨대 법과 같이 논죄하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한재로 천지 종묘 산천에 기우하였다. 을미에 추밀원사 오수증으로 서북면병마사 지중군병마사사를 삼았다. 병신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마리지천도장을 설하였다. 경자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신축에 평주의 요승 각진이 음양을 허망되게 말하여 중인을 현혹케 하거늘 조하여 곡주에 유배시켰다. 임인에 홍기로 공부상서를 삼아 사관의 수찬관에 충당시켰다. 계묘에 녹수하였다. 대부소경 왕공윤과 합문사 노작공을 요에 보내어 조위하고 회장케 하였다. 동로주진에 눈이 일촌(?)이나 깊이 내렸다. 갑진에 태일(천신)을 초제하고 기우하였다.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한림원이 주하기를「어명과 동운인 자는 청컨대 비서성으로 하여금 판에 새겨 영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피휘할 바를 알게 하소서」한대 제하여 가타 하고 옹(숙종의 휘옹과 동운)화전을 고쳐 상화전이라 하였다. 을사에 폭무하여 기우하였다. 군신이 상언하기를 「송충이 번식하여 압양하여도 효험이 없습니다 신 등이 삼가 살피옵건대 경방이의 비후조에 이르기를「식록하는 자가 임금의 치화를 보익하지 못하면 하늘이 이에 충재를 나타낸다 」고 하였습니다 신 등이 무상하여 써 성상께 근심을 끼쳤사오니 원컨대 현자를 등용하고 불초자를 물리쳐 천견에 답하시옵소서」라고 한대 회보하지 아니하였다. 용왕도장을 임해원에 설하여 기우하였다. 무신에 기묘년 행차하였을 때 지나간 곳의 명산 대천의 신지를 개성부와 양주에서 합제하였다. 일월사에 행차하여 금자로 쓴 묘법연화경이 이룩됨을 경축하고 그것이 끝나매 후비와 태자로 더물어 절 뒷 언덕에 올라 주연을 베풀어 즐기고자 하니 어사대가 주하기를「때는 바야흐로 성농절에 한발의 재앙이 있거늘 만약 여기에서 연락을 한다면 백성이 누가 전하께서 백성의 근심을 근심한다 하오리까」라고 하니 왕이 이에 중지하고 환궁함에 미쳐 느낌이 있어 시를 지으니 말구에 이르기를「연궁(불사)를 찾아 전원을 이루었고 겸하여 시우를 빌어 지극한 마음을 표하였도다」라고 하였다. 기유에 천지와 종묘에 기우하였다. 신해에 경미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갑인에 조하기를「바야흐로 이제 농절인데 하늘이 오래 비를 내리지 않으니 주군의 관리가 나의 뜻을 본받지 않고 덕음의 본 뜻을 어겨 조세를 감면케 해 준 혜택을 백성으로 하여금 입지 못하게 하였거나 혹은 원왕한 옥사로 체수되어 오래도록 판결되지 않았거나 아사한 사람의 들어난 해골을 버려 두고 매장하지 않았거나 또 공사의 수세가 심히 무거워 민원을 일으켜 화기를 상케하여 그러한 것인가 유사는 덕혜를 펴고 비법을 금하고 신문을 공평히하여 구옥하고 뼈를 가리우고 살을 묻어 빨리 천견에 답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크게 우제(기우제)하였다. 인왕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주전도감이 주하기를「국인이 비로소 용전의 이를 알아 편하다 하오니 청컨대 종묘에 고하옵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무오에 여진 전공 고사모 등 육인이 내투하거늘 밭과 짐을 주어 편호에 채워 넣었다. 경신에 평로진 관내의 추자전을 분할하여 농민에게 주어 경작케 하였다. 오월 임오에 비를 빌새 부채를 금하고 저자를 옮겼다. 갑신에 임의와 백가신이 송에서 돌아옴에 송제가「신의보구방」을 사하였다. 왕이 선정전에서 수조하였다. 제히기를「금추에 역부 육천오백인으로 홍호사를 수영하라」고 하였다. 육월 신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왕하 오연총이 송에서 돌아오는데 송제가 왕에게 대평어현 일천권을 사하였다. 기해에 임의로 어사대부를 삼고 윤관으로 추밀원지주사를 삼았다. 경자에 임간으로 판상서형부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판한임원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삼사사를 삼고 왕하로 추밀원좌승선을 삼고 조규로 우부승선을 삼았다. 신축에 정주장 금남이 관고의 질(#:38쪽)갑 필부를 도적하여 동여진에게 팔아먹었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복주하였다. 갑진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조하여 양경 군졸이 불급한 역사를 면제케 하였다. 내부(궁중의 부고)의 문서를 나누어 추밀원에 장치하였다. 무오에 대부경 금한충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어사중승 고령신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추 칠월 신유에 제하여 역부 일천구백인으로 국청사를 수영케 하였다. 기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팔월 계사에 조하기를「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인데 비기와 익호가 없어 그 덕이 들어나지 않는지라 짐이 이를 심히 애석하게 여기노니 원효에게는 대성화정국사를 의상에게는 대성원교국사를 증하고 유사는 그 거주하던 것에 나아가 비석을 세워 덕을 기록하여 영원히 전케 하라」고 하였다. 을사에 조하기를 「짐이 신기를 통어함으로부터 항상 조심하여 북으로 대요와 사귀며 남으로 대송을 섬기는데 또 여진이 있어 동에서 강성하니 군국의 급무는 백성을 편안케 하는데 있나니 마땅해 불급의 역사를 파하여 이 백성을 평안케 하라」고 하였다. 도병마사가 주하기를「지금 요의 동경병마도부서가 글을 보내어 정주관내의 군영을 파하도록 청합니다 앞서 대안(요 도종의 연호)연간에 있어 요가 압록강에 정자와 교(#:39쪽)장(무역장소)을 두고자 하므로 아조가 사자를 보내어 파하기를 청하였던 바 요제가 이를 청허하였으니 금반에는 (우리가) 또한 마땅히 그 청을 청종하여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구월 임술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무인에 동지추밀원사 곽상과 상서좌승 허경을 요에 보내어 즉위를 축하하였다. 서여진 고시모가 내투하거늘 밭과 집을 주었다. 갑신에 총지사에 행차하여 동복형제인 승 후의 병을 위문하였다. 인왕경도장을 회경전과 구정 및 외산의 제사에 설하고 승 삼만을 공양(반)하였다. 이달에 남경개창도감을 두고 문하시랑평장사 최사추와 어사대부 임의와 지주사 윤관과 소부감으로 치사한 문상과 춘관정 음덕전과 추관정 최자호에게 명하여 (남경지세를) 상보게 하였다. 추 십월 임진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경기의 포적군사가 임의로 민호에 노략질하여 해됨이 (도적보다) 도리어 심하오니 청컨대 이를 파하소서 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을미에 모나(탐나)의 신성주 배융부위 구대로 유계장군을 삼았다. 최사추 등이 돌아와 주하기를「신 등이 노원역 해촌 용산 등처에 나아가 산수를 살펴보매 건도에 불합하되 오직 삼각산면옥의 남쪽은 산형과 수세가 고문(구지리설)에 부합하오니 청컨대 주간의 중심되는 대맥에 임좌병향으로 형세를 따라 건도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병신에 비로소 남경을 창건하므로써 종묘 사직 산천에 고하였다. 십이월 무진에 나준으로 좌우위상장군 섭형부상서를 삼고 최정으로 김오위상장군 공부상서를 삼았다. 신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송상 탐나 동북번추장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십이월 병오에 요가 고주관내관찰사 고덕신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위계정으로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주국을 삼고 이오로 참지정사주국을 삼고 오수증으로 상서좌복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유신으로 예부상서 동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김경용으로 병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한영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최홍사로 이부상서를 삼고 백가신으로 병부시랑좌간의대부를 삼고 고령신으로 형부시랑우간의대부를 삼고 강증으로 고공랑중 어사잡단을 삼고 노충근으로 시어사를 삼고 김지화로 우보궐을 삼고 김준과 장기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기유에 요가 숭록경 오전을 보내와 도종이 남긴 의대 필단 등물을 전치하였다.
임오 칠년 춘 정월 신미에 좌산기상시 유록숭으로 지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소부감 이계응으로 지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이월 병진에 태자에게 명하여 삼계의 백신을 구정에서 초제케 하였다. 정유에 서여진 고사 등 십팔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미에 서여진 아호라 등 십오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술에 동여진 안단분 나노 등 십팔인이 내조하였다. 을묘에 평장사 김선석이 삼차에 걸쳐 표문을 올려 노퇴함을 청하거늘 이를 청허하였다. 삼월 정사에 신중원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였다. 경신에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이오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곽상으로 좌복사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를 삼았다. 을해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려 할새 때마침 비가 오는지라 간관이 간하여 이를 중지케 하였다. 정축에 경미한 죄수를 석방하였다. 윤관과 이굉에게 명하여 진사를 순천관에서 시험하고 전전부승지 양신영을 보내어 송조의 세필 일천이백관을 진사에게 사하였다. 기묘에 어사대가 주하기를「사문진사 이제노는 맹승 법종의 자이니 과거에 응함이 합당치 못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이르기를「공자가 중궁에게 일러 말하되 이오의 새끼라도 모색이 붉고 또 뿔이 바르면 비록 제물로 쓰지 않으랴한들 산천의 신이야 어찌 이를 버리리오」라고 하였다 과목은 그것으로써 현자를 구하는 것이니 제노가 진실로 재학이 있을진대 어찌 부의 녹고로써 폐기하리요 하여금 과거에 응케 하여야 할 것이다」고 하였다. 경진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중서문하가 주하기를「새로이 남경을 건조하매 땅을 잼(도)이 반드시 넓어져 많이 민전을 빼앗게 될 것이오니 청컨대 경위령의 소설에 의거하여 산을 의하여 세를 취하고 혹은 물을 따라 형을 표하되 먼저 안에서 산수의 형세를 따라 동으로 대봉에 이르고 남으로 사리에 이르며 서로 기봉에 이르고 북으로 면악에 이르기까지 경계를 삼으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정종비 연흥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하 사월 정유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진사를 복시하고 태자 및 재신 추신 양제의 사신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춘풍선미화」라고 시제를 선포하여 태자 및 사신으로 하여금 각각 육운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강척 등에게 급제를 사함과 아울러 투화한 송진사 장침을 불러 시험하고 별두급제를 사하였다. 갑진에 동여진추장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내조하였다. 영가는 즉 금의 목종이다. 오월 병인에 현화사에 행차하여 은으로 쓴 유가현양론을 경찬하였다. 정묘에 유록숭으로 추밀원사 겸태자빈객을 삼았다. 무진에 수사공 상서우복사 황중보가 졸하였다. 육월 을유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정해에 조하기를「송충이 태안 이년 병인에 비로소 서산에서 발생하여 백주와 토산에 연급하고 근래에 더욱 성하니 이는 반드시 형정이 잘못된 까닭이라 자나 깨나 근신하고 송구하여 군신과 더불어 허물을 끌어 자신을 꾸짖고 오월 계유로부터 을해에 이르기까지 하늘에 초제하여 고사하고 형을 너그럽게 하며 죄를 용서하므로써 천견에 상답코자 하노라 금일 이전의 내외의 공도사장 이하의 잡죄를 방면하노니 추밀원으로 하여금 시행케 하라」고 하였다. 무술에 송상 황주 등 오십이인이 왔다. 갑진에 직문하성 문익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대복경 김덕진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고 최저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계응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유재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병오에 선사일의 시연임으로 평장사임간 위계정과 참지정사 곽상에게 마 각 일필씩을 사하고 신급제 장침에게 장사랑 예빈주부동정을 제수하였다. 윤월 갑인 삭에 송상 서수 등 삼인이 왔다. 병자에 송상 주보 등 사십여인이 왔다. 추 칠월 신묘에 소재도장을 회경전에서 삼일간 설하였다. 경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예부가 주하기를「삼가 상서(서경)의 소를 상고하건대 왕자가 순수를 행하는 바는 제후들이 각기 자국을 스스로 전제하여 위복이 자신에 있으매 그가 왕명을 옹폐하여 혜택이 하민에 미치지 아니할까 두려워 하는 것임으로 왕이 친히 순수함은 백성을 위하여 폐해를 제거하려 함이오니 마땅히 서경유수 및 선배한 안찰사에게 명하여 먼저 민간의 질고를 찾아 (공과부담을)면제하여 무휼하고 또 전에 내린 사은이 아직 다 봉행되지 아니한 것은 유사에게 부쳐 시행케 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팔월 계축 삭에 행재의 신요들이 표문을 받들어 삭일을 축하하였다. 정사에 대동강에 이르러 용선에 타고 태자와 호종신요 및 서경의 문무량반을 향연하며 수희와 잡지를 관람하고 저녁 때에 이르러 파하여 장락전에 입어하였다. 무오에 태조의 영전에 배알하였다. 경신에 미화정에서 소연을 베풀고 정액을 고쳐「유미」라 하고 친히 시 일절을 지어 양경의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계해에 집상전에 이어하여 직사 관 홍관에게 명하여 전문의 액을 쓰게 하였다. 갑자에 흥복 영명 양사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고 드디어 구제궁에 거동하여 영명사 부벽루 구제궁의 시를 각 일수씩 유제하고 양경의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하여 올리게 하고 드디어 용선에 거동하여 군신을 향연하였다. 경신에 왕이 제연의 언덕에 이르러 헤엄 잘 치는 금군 오인에게 명하여 옛 사다리(제) 터의 돌(구제궁기)를 찾게 하니 오인이 주하기를「땅과의 거이 십척되는 곳에 옛 사다리 터의 돌(석)이 있읍니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홍복사에 행차하여 금향을 행하고 절 남쪽 강안에 거동하여 사예를 사열하고 인하여 명하여 술을 베푸니 태자 및 신요들이 시연하였다 친히 추일유호경남하개연시 사운을 지어 선시하니 양경 유신이 화답해 올리었다. 저녁 때(포)에 이르러 환궁하였다. 을해에 중흥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새로히 신호사를 수리하였다. 무인에 서경유수관 참지정사 곽상 등이 왕을 장락전에서 향연할새 양경군신이 시연하였다. 구월 병술에 왕이 인예태후의 기진도장으로 장경사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였다. 무자에 관풍전에 행차하였다가 회복루에 환어하여 견#(46쪽)관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였다. 갑오에 제하기를「짐이 오랫동안 지방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이번 서경에 왔으니 형을 너그럽게 하고 죄를 용코자 하는 바 어하가 출동한 이래로부터 수행한 선배사 및 당지 서경유수의 상주한 바 경죄를 범한 자는 모두 방면케 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흥복사의 십왕당이 낙성되었거늘 태자에게 명하여 분향을 행하게 하고 무술에 왕이 후비 태자 제왕으로 더불어 이 절에 행차하여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신축에 금강사에 행차하여 중들을 공양(반)하고 드디어 구복루에 거동하여 사예를 사열하였다. 송상 임백순 등 이십인이 왔다. 을사에 사예를 사열하였다. 병오에 장경사에 행차하여 기사를 사열하였다. 부유수 최공후 등에게 명하여 유수의 창고내에 있는 서적을 검토하여 올리게 하였다. 기유에 신호사에 행차하여 대장회를 베풀어 낙성식을 행할새 대궐의 뜰에서 절에 이르기까지 도로의 양측에 점등한 것이 수만이었다. 경술에 또 이 절에 행차하여 분향을 행하였다. 추 십월 정사에 흥복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풍문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예를 받고 드디어 흥국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장락전에 거동하여 양경의 문무현관과 신료들을 향연하고 폐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임신에 안자공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요제생신)을 축하하였다. 갑술에 어하가 서경을 출발하였다. 경진에 왕이 북숭산 신호사에 행차하여 오백나한재를 설하였다. 십(일의 자가 탈락)월 임오 삭에 왕이 우타천에 이르렀을 때 들에 범이 있어 갑자기 뛰어 나오는지라 시봉하는 군사에게 명하여 이를 쫓게하니 견#(47쪽)교위 송종소가 이를 쳐 죽이거늘 종소에게 의 일습을 사하였다. 정해에 임패역에 이르러 덕음(임금의 말씀)을 내려 지난 바 명산 대천의 신지에게 덕호를 가하고 연도 주 현의 관리에게 경죄를 용서하고 (무죄한 관리에게는)직 일급씩을 가하고 제사의 장고와 제위의 기두에게는 초직을 사하였다. 왕이 경도에 돌아왔다. 계사에 동여진 상곤 등 삼십인이 와서 말(마)을 바쳤다. 갑오에 양신부를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하였음을 사하였다. 을미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임인에 곽준목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갑진에 윤관으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김택선을 요에 보내어 신정을 축하하였다. 정미에 동여진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은기 만드는 공장을 청하거늘 이를 허하였다. 십이월 임자에 요가 횡선사 귀주관내관찰사 소가를 보내오고 계축에 또 중서사인 맹초를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진에 대묘에서 기설하였다. 신미에 유신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윤관으로 어사대부를 삼고 최홍사로 상서우복사 겸삼사사를 삼고 임의로 예부상서 겸사관수찬을 삼았다. 임신에 동여진추장 고나골 등 삼십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을해에 적홍이 관일하였다. 경진에 임간으로 판서북면병마사 겸중군병마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동북면 병마사 겸행영병마사를 삼고 유신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았다.

계미 8년 춘 정월 계미에 왕원으로 검교사도 수사공 상주국을 삼았다.  기축에 동여진 고라골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신묘에 서여진 망간 등 24인이 내조하였다.  2월 병진에 동여진 장군 두문소 등 30인이 토물을 바쳤다.  동여진 장군 고대노 등 3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기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유에 소태보로 수태전 판호부 서경류수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태위 판리부사를 삼고 임간으로 수사도 판병부사를 삼고 위계정으로 수사도 판례부사를 삼고 이오로 검교사도 수사공 판형부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김경용으로 지추밀원사 삼았다.  임술에 곽상으로 수사공을 삼아 인해 치사케 하였다.  기사에 송 명주 교련사 장종민 허종 등이 강수 양소 등 38인으로 더불어 내조하였다.  동여진 두문회팔 등 90인이 내조하였다.  을해에 오수증으로 수사공을 삼고 유신으로 검교사공을 삼고 경록숭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윤관으로 이부상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왕하로 추밀원부사를 삼았다.  3월 기축에 직사관 홍관에게 명하여 무일편을 회경전의 병풍에 쓰게 하였다.  하 4월 정사에 적홍이 해를 범하였다.  경신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사에 김한충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임의로 병부상서를 삼고 김경용으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6월 을유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임자에 송이 국신사 호부시랑 유규와 급사중 오식을 보내와서 왕에게 의대 필단 금옥기 궁시 안마 등물을 사하거늘 갑인에 왕이 조서를 회경전에 맞이하니 조에 이르기를 [경은 대대로 왕봉을 소승하고 땅은 동방의 강역을 나누어 받았도다.  상주하는 서함이 자주 도달하니 항상 제궐을 사모하는 마음을 품었고 공비가 거듭 풍성하매 멀리 제정에 진열하는 공물을 올렸도다(여정지실).  이에 그 양절을 가상히 여겨 특히 융숭한 은혜를 베풀고자 시종의 근신을 가려서 특별한 반사를 가져가게 하노라.  일은 비록 구례를 인용하였으나 예는 이 상례에 배됨이니 마땅히 권우하는 사정을 받아 더욱 충근의 보답에 힘 쓸 지어다.]고 하였고 아울러 의관 모개의 여병 진이유 범지재 등 4인을 다 보내오니 표청했던 바를 청종한 것이다.  병인에 요가 보책사 변당영을 보내오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팔성의 큰 경사와 천년의 큰 조명을 이어받아 길이 통어할 것을 생각하매 감히 편안할 수가 없노라.  그런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하늘이 주 이 땅(요)은 모두 태평을 이루었도다.  돌아보건대 여러 왕후들이 소장을 받들어 (짐의) 공열을 잇달아 진술하고 아름다운 칭호로써 덕이 적은 나를 추숭하기를 청원함으로 굳이 사양할 겨를이 없어 그 근실한 성의에 마지못해 따르기로 하고 이미 금년 겨울에 책예를 행하기로 결정하였노라.  경은 경사스러히 후번을 누려 충성으로 왕실을 도왔으니 이 성예 닦음을 들으면 진실로 많은 기쁨을 가지리라.]고 하였다.  정묘에 이오로 서경유수사를 삼고 오수증으로 판상서호부사를 삼고 유신으로 좌복사 정당문학을 삼고 최홍사로 추밀원사 겸태자빈객을 삼고 윤관으로 지추밀원사 겸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최저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계응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문익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추 7월 신묘에 송 국신사 유규 등이 돌아가는데 왕이 표문을 부쳐 회사하고 겸하여 개명하였음을 고하였다.  송 의관 모개 등이 흥성궁에 거처하면서 의생들을 교훈하였다.  을미에 동여진추장 곤두가 사람을 보내어 황모 1만조를 바쳤다.  정유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동여진 태사 영가가 사자를 보내어 내조하였다.  본국(고려)의 의자로 (동여진의) 완안부에 거주하는 자가 있어 병을 자 치료하는지라 그 때 영가의 척속이 병이 있으매 영가가 의자에게 말하기를 [너가 능히 이 사람의 병을 고치면 내가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너를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리라.]고 하였더니 그 사람이 과연 나았는지라 영가가 약동과 같이 사람을 시켜 국경위에까지 보내어 이르렀다.  의자가 와서 왕에게 아뢰기를 [흑수에 살고 있는 여진은 부족이 날로 강성하고 병사가 더욱 정용합니다.]라고 하거늘 왕이 이에 비로소 사자를 통하여 이로 부터 왕래가 막히지 아니하였다.  영가가 이미 소해리를 격파하고 전승을 우리에게 보고하거늘 우리도 또한 사람을 보내어 이를 축하하였다.  영가가 그 족제 사갈을 보내어 보빙하매 왕이 이를 심히 후하게 대우하였다.  8월 경술에 헌관이 형서(형법의 조문)를 주평하였다.  대장군 고문개 장홍점 이궁제와 장군 이자진 등이 가만히 역모를 품거늘 경신에 어사대에 명하여 이들을 잡아 남방변지에 유배하였다.  9월 경진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미에 내시 및 시종문신을 중광전에 불러 시제를 명하여 시를 짓게 하고 술을 주었다.  임인에 이계응과 박경작을 요에 보내어 존호를 가상한 것을 축하하였다.  을사에 최사추로 문하시중을 삼고 임간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오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았다.  병오에 승 1만을 공양하였다.  동 10월 정미 삭에 제하여 벽상공신의 직호를 고쳐 기록하게 하였다.  갑인에 최홍사로 서북면병마사 겸랑중군병마사를 삼았다.  병진에 송제의 천녕절이므로 태자에게 명하여 제를 봉은사에 설하였는데 의관 모개(송인) 등이 와서 참관하거늘 모개 등에게 주와 폐백를 사하였다.  경신에 요의 동경회예사 예빈부사 고유옥 등이 왔다.  송림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경오에 조하여 무등산의 처사 은원충을 징소하였다.  임신에 동지에 행차하여 궁사를 사열하고 정곡을 마친 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갑술에 김국진을 요에 보내어 횡선을 사하였다.  11월 을유에 최계방을 요에 보내어 생신 하함을 사하였다.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경성에 지진하였다.  병신에 동여진 대사 영가가 고주 율부 아노 등을 보내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유에 조경을 요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침후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12월무신에 요가 오흥경을 보내와서 생신을 축하하였다.  무오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북향장군 종곤 아노 등 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신 9년 춘 정월 신사에 동여진 남녀 1천7백53인이 내투하였다.  동여진추장 조아속이 별부 부내노와 틈이 생겨 공형 지조를 보내어 군사를 발하여 이를 칠제 기병이 와서 정주관외에 주둔하는지라 계미에 왕이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으로 판동북면행영병마사를 삼아 선정전에 거동하여 부월을 주어 가서 이에 대비케 하였으며 또 직문하생 이위로 서북면행영병마사를 삼고 위위경 김덕진으로 동북면행영병마사를 삼았다.  무자에 서여진 종곤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신에 송 의관 모개 등이 돌아갔다.  임자에 임간이 여진으로 더불어 정주성밖에서 싸워 패북하니 유사가 임간 및 병마사 좌복사 황유현과 부사 대장군 송충과 호부시랑 왕공윤과 좌승선 조규의 패북한 죄를 탄핵하여 아뢰니 파면시켰다.  을묘에 서여진 거라불 마포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신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을축에 추밀원사 윤관으로 동북면행영병마부통을 삼고 중광전에 거동하여 부월을 주어 보내었다.  3월 병자에 이오로 수사공 상서우복사를삼았다.  정축에 윤관이 여진과 싸워 30여 수급을 베니 아군의 사상 함몰된 자도 반이 넘었다.  기묘에 인왕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 1만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진에 전주목사 오연총을 불러 추밀원좌승선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태자에게 명하여 진사를 건덕전에서 복시하고 갑신에 송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술에 유 와 문관으로 좌우간의대부를 삼았다.  기축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하 4월 갑자에 요가 야율가모와 하자목을 보내와서 왕을 책하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존호를 추천받고 유제도 이룩되었으므로 제후를 조근하여 의례를 베풀고 많은 나라들이 경사를 같이 하였도다.  경은 백모로 사를 쌓고 현토에 강토를 열어 여산에 수국의 공을 새기고 항해에 내정의 관을 바쳤도다.  마침 풍성한 은택을 균첨시키매 이에 (경을) 증봉키로 의정하였으니 마땅히 지극한 은혜를 체득하여 길이 (짐의) 깊은 권고에 부합토록 할지어다.  이제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서 책명하노니 그 간책 차로와 아울러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주노라.]고 하였고 책문에 이르기를 [헌원(황제)이 제후를 세워 비로소 만국을 나누고 한(고조)이 손성공신을 봉하여 비로소 팔왕을 세웠도다.  짐이 조선의 유모에 정성껏 따라 왕통을 이어 높였더니 근자에 중망을 따라 하는 수 없이 큰 이름을 받았도다.  정삭을 같이 하는 곳에 있어서는 혜택을 넓히어 이미 미치게 하였다.  일역(동방 즉 고려)을 권고할 때 천조를 경건하게 받들어  봉강은 칠웅보다 넓고 공열은 오패보다 높았도다.  마땅히 경사를 같이하고자 특히 봉책 나누기를 의논하고 거듭 양진을 택하여 크게 휴명(미명)을 펴노라.  아아 그대 특진검교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색 7천호 왕옹은 일찌기 간기를 받아 나면서부터  지의 정기를 품수하였고 문무의 장재를 갖추어 군신의 대체를 알았도다.  십지의 약목은 삼삼하여 해를 받드는 표적이 높이 솟았고 구곡의 홍하는 호호하여 조종의 세를 여기에 (우리) 도종조 이래로 경사롭게 왕번을 승습하여 더욱 표해의 충근을 공손히하여 여산의 맹서를 상실함이 없었도다.  일국이 치평한지 간금 7연이라 마침 모절 의례를 이룩하매 마땅히 요소의 은택을 입히리다.  이러므로 정사 안원군절도사 야율가모와 부사 이주관내관찰사 하자목 등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충근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위 겸중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천호 식실봉 7백호를 삼노라.  아아 (짐이 베푸는) 은혜가 구석에 융숭하니 그대에게는 이미 영봉이 넓었고 공업은 일광 성하니 마땅히 그대는 더욱 협보에 근실할 것이다.  이 큰 훈계를 힘써 복응하여 길이 복을 누릴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이 교단에서 책을 받으니 군신이 표로서 축하하였다.  경오에 야율사전 장직이 와서 태자를 책봉하거늘 왕이 태자로 더불어 남교에 행차하여 왕이 먼저 조서를 받았다.  조에 이르기를 [짐이 왕통을 이어 열어 널리 다방(만국)을 어거하매 굽혀 군정에 순응하여 마지못해 현호를 응수하였으니 안으로는 백관의 대소가 모두 넉넉한 은혜를 입었고 밖으로는 구복의 공후에게 다 후한 명위를 가하였다.  경은 조선의 터전을 이어받고 황조를 높여 도왔으니 이 누대의 충근을 가상히 여겨 그 대의 가계를 이을 적자를 총애하여 특히 초어(사신)을 보내어 가서 책봉의 의례를 행케 하고 나의 지극한 회포를 유시하여 써 특별한 권애를 밝히노라.  이제 야율사전 등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 경의 장자를 삼한국공으로 책명하노라.]고 하였다.  태자가 단에 올라 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 [짐이 크게 준명을 받고 경건히 큰 유모를 이었도다.  보책을 받음으로서 의례를 베풀어 번방과 더불어 경사를 나누노라.  경은 가문의 적덕을 이룩하고 나라의 분봉을 체득하여 도와서 (황조를) 존장하는 노고를 이룩하고 깊이 (제실에) 충근하는 힘을 다 하였도다.  마침 우악한 은혜를 넓히매 거듭 이장을 밝히노라.  마땅히 나의 지극한 정회에 맞추어 써 특수한 권총을 밝히노라.  이제 태주관내관찰사 야율사전 등을 보내 예를 갖추어 그곳에 가 책명하노니 그 간책과 차로와 아울어 따로히 주는 의대 필단 안마 궁전 제물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주노라.]고 하였고 책에 이르기를 [짐이 천지의 영복을 부하하고 조종의 큰 터전에 앉아 마지못해 군청을 받아들여 바야흐로 존호를 듣고자 하매 서방으로 더불어 이 큰 경사를 두루 같이 하려고 생각하노라.  그런데 동방의 해표를 돌아보건대 황조를 협보하였도다.  누대의 선노한데 대해서는 영예로움을 왕작으로 나누었고 (그대) 일방의 술직에 황제의 유모를 정성껏 복응하였도다.  이에 (그대) 적자의 현량함을 생각하매 일찍 상공의 귀에 거함직하도다.  (그러므로) 전성의 교훈을 상고하여 정상의 의례를 펴서 밝히노라 아아 너 순의군절도 삭무등 주관찰처치등사 숭록대부 검교태전 동중서문하평장사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 왕 우는 도량이 깊고 넓으며 풍도와 유모가 화하고 순수하도다.  어려서 정덕에 밝았으매 효경을 근본삼아 군친을 받들었고 일찌기 좋은 뜻을 품었으매 문무의 권을 잡아 군국을 도왔도다.  가범을 잘 계승하므로 말미암아 경사롭게 국봉을 승습케 하리라.  모단의 절제권을 잡고 괴부의 평장의 임을 같이 하였도다.  마침 조회의 위차(속절)로서 예의를 높이매 마따히 은택을 펴(급소) 은혜를 입히리라.  그러므로 정사 태주관내관찰사 야율사전와 부사 홍려경 장직 등을 보내어 절부를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순의군절도 삭무등주관찰처치등사 특진검교태위 겸시중 사지절삭주제군사 행삭주자사 상주국 삼한국공 식읍 3천호 식실봉 5백호를 삼노라.  아아 누죽니금(죽간에 새기고 금가루로 쓴 서첩)은 권고를 우흡하게 더함을 표함이오 약대여려(황하가 띠와같이 되고 태산이 숫돌과 같이 되로록 변함이 없는 맹서)는 마땅히 함께 안영을 보재할 것이니 그대는 그 충순함으로써 몸을 가시고 자화함으로써 대중을 무안하여 짐의 가명에 부응하도록하라.  오직 힘쓸지어다.]라고 하였다.  5월 을유에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소태보로 수태사를 삼았다.  갑오에 우박이 내렸다.  남경의 궁궐이 이룩되었다.  6월 계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진에 오연총으로 상서좌승 한림시강학사를 삼고 허경으로 급사중 추밀원우부승선을 삼았다.  갑인에 동북면병마도통이 주하기를 [여진이 스스로 장 (국경의 성책)를 헐고 공형 지조 등 68인이 관문을 뚜드리며 화친하기를 비나이다.]고 하였다.  추 7월 신사에 좌복사 정당문학 유신이 졸하였다.  신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이오로 중서시랑평장사 판삼사사 태자소보를 삼고 윤관으로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태자빈객을 삼았다.  추밀원사 최홍사와 비서감 정문을 송에 보내어 사은하고 방물을 바쳤다.  무술에 남경에 행차할새 평장사 이오 참지정사 오수증 권지추밀원부사 오연총 판어사대사 임의 등이 호종하였다.  신축에 왕가가 봉성현(파주)에 머물을제 관전를 내어 군신들과 군사들에게 차등있게 주었다.  8월 을사에 촌부들과 야노들이 과과를 길에서 다투어 올리거늘 각각 포백을 사하고 또 내부(내고)의 다향과 의친을 내어 노방의 불사에 시주하였다.  병오에 왕가가 상자원에 머물을제 시어사 최위를 보내어 어의와 다향을 가지고 삼각산 승가굴에서 비를 빌게 하였다.  신해에 왕가가 남경에 이르니 모든 일이 일관(점후, 복서를 맡은자)의 아뢴 바에 의함이라 예제에 부합되지 아니하였으나 유사가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임자에 왕이 내중으로 더불어 누대 정자와 원유에 유람하였다.  갑인에 연흥전에 거동하여 중외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을묘에 반약도장을 연흥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정사에 송 도강 주송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미에 군신을 연흥전에서 향연하고 폐물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신유에 최홍사로 참지정사를 삼고 임의로 동지추밀원사를 삼고 오연총으로 추밀원부사 한림학사를 삼고 육조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계해에 차가가 남경을 출발하여 내중으로 더불어 승가굴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친의를 시납하였다.  9월 신미 삭에 산예역에 머물렀다가 갑술에 드디어 국청사에 행차하였다.  을해에 덕음(임금의 말씀)을 반포하고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기묘에 왕이 중구(음력 9월 9일 즉 중양)시를 지어 유신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동 10월 신해에 왕이 환궁하였다.  경오에 요의 동경대왕 야율순이 사자를 보내와 빙문하였다.  지총연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요제의 탄일)을 하하고 문관은 봉책을 하한 것을 사하고 최선은 생신을 하한 것을 사하고 김한공은 (공물을) 진봉하고 최덕개는 신정을 축하하였다.  11월 계유에 종묘와 사직에 눈 오기를 빌었다.  갑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김선석이 졸하니 왕이 조제하고 시호를 충간이라 사하였다.  선석은 청렴하고 강의하며 사재가 있어 산업을 일삼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나이 바야흐로 사직할 때가 되었는데도 오히려 미련을 품고 용퇴하지 아니하니 그때 사람들이 이를 기롱(기)하였다.  이 달에 밀진사 김고를 요에 보냈다.  12월 임인에 위계정으로 문하시랑평장사를 삼고 최사추로 수태보를 삼고 이오로 태자소보를 삼고 왕 로 삼사사를 삼고 이계응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최공익으로 섭공부상서를 삼았다.  병진에 요가 마직온을 보내와 생신을 축하하였다.
 
을유 10년 춘 정월 계축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태자에게 명하여 삼계의 영기를 구정에서 초제케 하였다.  윤월 정축에 중서시랑평장사 오수증이 치사하였다.  이위로 비서감 지상서리부사를 삼고 문관으로 소부감 지어사대사 겸태자좌서자를 삼고 허경으로 이부시랑 추밀원좌승선을 삼았다.  3월 계묘에 왕이 국청사에 행차하여 인예태후가 발원하여 이룩한 금탑을 안치하였다.  갑진에 조린충으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한영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하 4월 기사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대내 법운사에 행차하여 인왕도장을 설하였다.  6월 정묘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술에 위계정으로 태자태전을 삼고 최홍사로 검교태위 수사도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겸태자태보 판상서예부사 수국사를 삼고 윤관으로 태자소보 판상서병부 한림원사를 삼고 이오로 수사도 태자소사 겸서경류수사를 삼고 정문으로 형부상서 정당문학 겸태자빈객을 삼고 임의로 추밀원사 이부상서를 삼고 왕 로 지추밀원사 병부상서를 삼고 오연총으로 동지추밀원사 비서감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김경용으로 판상서공부사를 삼고 이위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추 7월 을묘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8월 정묘에 구산사에 행차하였다.  경오에 불정도장을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을해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임오에 태조의 진영을 감진전에서 배알하고 드디어 오성전에 배알하고 인하여 장악전에 거동하여 백관의 조하를 받았다.  을유에 제하여 합주수 고민익이 백성을 침탈하므로 옥에 내려 신문토록하였다.  무자에 홍복사에 행차하여 재를 설하고 드디어 남안의 장전에 거동하여 술을 갖추고 태자 및 재신 추신과 양경 문무대신이 시연할새 왕이 시 4운를 지어 선시하였다.  기축에 사를 창화문에서 사열하고 경인에 또한 이와같이 하였는데 태자가 과녁(적)을 맞히니 군신들이 다 하례하였다.  계사에 경계(가벼운 죄수)를 석방하였다.  9월 무술에 인예태후의 휘진도장으로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계묘에 요의 상구가 내투하였다.  임자에 영작원문에 거동하여 무사의 사어를 사열하였다.  병진에 왕이 불예(병환)하여 정사에 서경을 출발하였다.  동 10월 을축에 왕의 병이 위독하여 김교역에 모무르고 병인 야반에 김교를 출발하여 장평문밖에 이르러 연중에서 붕어하니 밤이 밝을 무렵 서화문에 도착하여 발상할새 태자와 군신들이 울고 몸부림치며 (영구를) 받들어 영영전에 들갔다가 즉일에 선덕전으로 옮겨 빈소를 정하였다.  유조에 이르기를 [짐이 박덕으로써 대업 사수하여 길이 만사의 통리를 생각하고 1일도 평안할 겨를이 없이 몸소 서정을 총람하여 소간에 이른지 10여년이 되었도다.  중외의 신민들과 함께 인수의 경성에 오르기를 원하였더니 우로로 병을 이루어 드디어 중태에 이르렀음을 어찌하리오.  천명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수명) 장단의 분한에 맡기려니와 방기는 지극히 중한 것이니 감히 고속하는 말을 잊을 수 없을쏘냐.  왕태자의 인의하고 효우함은 생지(생이지지)에 근원하고 온자하고 혜화함은 민망에 부합함이니 마땅히 구전에서 곧 즉위토록 하고 무릇 군국의 대사는 일절 사군의 처분을 품수할 것이며 방진(지방의 진수) 주목은 다만 임지에서 거애하여 함부로 치소를 떠나지 말게 하고 상복의 제도는 일수로써 월수에 대신케 하고 산릉의 제도는 힘써 검약에 따르게 하라.  아아 시종의 시기를 깨닳으면 가는 자는 이로써 유감이 없을 것이요.  장구의 계책을 강구 하면 남아 있는 자는 가히 생을 해하지 아니하리니 더욱 믿노니 고굉대신(수족과 같은 보좌의 대신)과 백벽(백관) 경사(경대부사)들은 함께 충력을 바쳐 왕실을 도와서 우리 국조로 하여금 무궁하게 이어 나가도록 한다면 짐은 비록 눈을 감을지라도 마음은 만족할 것이니 국내에 포고하여 짐의 소회를 밝게 알릴지어다.]라고 하였다.  왕의 수는 52요 재위하기 10년이며 시호를 명효라 하고 묘호를 숙종이라 하며 송림현에 장사지내니 능을 영릉이라 하였다.  인종 18년에 시호를 문혜라 가하고 고종 40년에 강정이라 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