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대 목종(穆宗,997~1009 재위12년)
***강조의 정변: 고려 제7대 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였으므로 모후인 천추태후(千秋太后)가 섭정을 하게 되자, 귀양보냈던 천추태후의 정부(情夫) 김치양(金致陽)을 다시 불러들였다. 목종은 20세가 넘도록 후사를 얻지 못하였는데, 1003년(목종 6) 갑자기 병석에 눕게 되었다. 이 때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그들 사이에서 난 자식으로 목종의 뒤를 잇게 할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이 음모를 안 목종은 당숙 욱(郁)의 아들 대량군(大良君)에게 자기의 뒤를 잇게 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나라 안에는 온갖 뜬 소문이 유포되었는데,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하여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고, 김치양 일파는 임금이 병중에 있음을 기화로 왕위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였다.
3월에 강주재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임자에 대묘에 알하고 성종을 부제하여 시중 최승로와 대사 최량으로써 배향시키고 사하였다. 왕의 생일을 장녕절이라 하였다. 이 달에 거란은 전왕이 돌아갔으므로 칙명하여 납폐물을 돌려 보내었다.
5월 무오에 유사에게 교하기를 [태조와 황고의 기재에는 각기 오일간 분수하고 일일간 철조하도록 하며 혜종 정종 광종 대종 성종의 기재에는 각기 일일간 분수함을 상식으로 정하라]고 하였다.
추 7월 경오에 태보 내사령(내사령) 서희가 졸하였다. 계미에 서경을 고쳐 호경이라 하였다.
기해 2년 추 7월에 진관사를 성남에 지어 태후의 원찰로 삼았다.
동 10월에 호경에 행차하여 재제를 올리고 사하였으며 기로를 존문하여 사물하고 양경의 제진군으로 년 팔십 이상의 유직자는 증급하고 무직자는 배융교위를 제수하고 호가한 팔품이하의 원리와 군인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거란이 우상시 유적을 보내와 왕을 상서령으로 가책하였다. 일본국인 도요미도 등 이십호가 내투하였으므로 이천군에 살게하여 편호하였다. 이부시랑 주인소를 송에 보냈다. 송제가 특히 소견하거늘 인소가 스스로 국인이 화풍을 사모하나 거란에게 겁제되어 있는 정상을 진술하였다. 제가 조서를 주매 가지고 돌아왔다.
경자 3년 동 10월에 숭경사를 세워 원찰로 삼았다. 이 해에 송굉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 4년 동 11월에 중원부에 행차하여 풍속을 두루 살피고 군신을 향연하고 사하였으며 호종관과 순력한 주 군의 관원에게는 일계를 가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임인 5년 하 4월 임신에 친히 대묘에 제하고 선왕 선후에게 휘호를 가상하였다.
5월에 교하기를 [내가 어린 나이로써 욕되게 보위(왕위)에 올라 조선의 기업을 계승하고 방국의 흥안을 생각하니 공은 백배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이는 천배가 아니면 힘쓰지 않아 반드시 사직을 연장하고 생령을 개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에 전년으로부터 근일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하고 싶은 바가 때에 행함직한 것인가를 헤아리지 아니하였으며 혹은 편안한데 거하여 위태함을 생각함이 심년 다다르고 박빙을 밟음같이 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널리 토목으로 징발하고 군부를 노역하여 높은 대를 쌓고 깊은 못을 파서 유상의 자를 삼았으며 인호를 사역하여 불사를 지어 함부로 경영함이 있었다. 이것은 비록 다 집주함에 따라서 시행한 것이나 어찌 나 한 사람의 실덕이 아니리오. 다만 군중의 원독이 될뿐 아니라 또한 우내의 간난이 될 것이다. 만약 민중을 훈련하고 군사를 연습함에 있던지 또 적(피)이 침입하고 내가 공벌함이 있을 때 장차 무엇으로 용사를 부르며 장차 무엇으로 사람을 얻을가보냐. 이 어찌 날개를 꺾고서 높이 날고자 함이나 주즙을 버리고 큰 물을 건너고자 함과 다르랴. 고사에 이르기를 [향기로운 미끼 밑에는 반드시 고기가 걸리고 후하게 상주는 조정에는 반드시 용사가 있다]고 하였으니 옛적도 오히려 이러하거든 이젠들 어찌 그렇지 아니하리오. 기왕의 잘못된 것을 막고 더욱 장래의 권징에 힘쓰고자 하나니 특히 짐의 뜻을 선전하여 군행에 보이고 마땅히 소사로 하여금 각기 육위군영을 이룩하여 직원 장수를 비치하고 그 군사로 하여금 잡역을 면제토록 하라]고 하였다.
추 8월 갑자에 박원휘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묘계 6년 춘 정월에 교하기를 [옛적에 우리 태조께서 이미 간과를 쉬고 크게 상서(학교)를 열어서 왕실의 종지가 경서를 옆에 끼고 도를 묻게 되었으며 항간(봉노)의 천자도 책을 지고 스승을 따르게 되니 누조 이래로 재사가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릇되게 어린 몸으로써 어렵고 큰 일을 이어(사) 지키게 되니 진유의 도를 넓혀 써 왕성의 가유를 숭상하고자 하노라. 다만 가르침에 게으르지 않는 자가 많지 못하고 옛 것을 좋아하여 민첩하게 구하는 자가 적도다. 주 향의 안과 횡교 가운데에 혹은 소리로 인하여 혹은 이단을 쫓아 사장의 교수가 점차로 기울어지고 후학의 공업이 이루어지지 못하는지라 이제 어진 이를 용납할 문을 크게 열고 진선의 길을 넓히고자 하나니 삼경(개경,서경,동경) 십도의 군료서관들은 짐의 유언을 체득하여 예업을 권장하고 문 유 의 복의 무리로 하여금 경명박달한 스승에게 취학하게 하고 박사 사장으로서 생도를 장권함에 근로한 자가 있으면 녹명하여 아뢰어라]고 하였다.
2월 신유에 교하기를 [당요는 팔원으로써 다스리고 주는 십란으로 인하여 일어났으니 나라를 다스리는데 자뢰할 바는 오직 어진 이뿐이다. 나는 어려서 부모의 가르침을 잃고 자라서 사훈이 없으므로 조정에 임하여 일에 다다르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왔는데 어찌됨인지 거년 이래로 자주 건곤의 변괴가 나타나고 또 변경의 근심이 많아지니 다만 자책하는 마음이 깊을 뿐이어늘 어찌 감히 남을 허물할 생각이 있으랴. 돌이켜 전대를 생각하며 혹은 책서를 읽어보면 송공이 착한 말을 하매 요성이 물러 갔고 수주가 덕정을 닦으매 인구가 침병하였다고 하였으니 이에 소선도 또한 능히 하늘을 움직이고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음을 알겠도다. 사욕을 이기기에 스스로 부지런할 것이어늘 어찌 감히 그릇된 것을 꾸며대고 간함을 막으리오. 지금 보아하니 위로는 태보(재상)에서 아래로는 서료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직간(건악지언)하는 말을 하는 이가 없고 다만 아첨하는 말만 있도다. 아아 말해도 쓰이어지지 않았다면 내가 마땅히 스스로 부끄러워할 바이나 위태함에도 붙들지 않음은 누가 그 허물을 질 것이냐. 경관 오품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 모두 낙석되는 말을 베풀어 주어 다같이 방가의 일을 협찬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태후 황보씨가 김치양으로 더불어 통하여 아들을 낳아 왕의 후계자로 삽고자 꾀하고 대량군 순을 핍박하여 중을 만들었다. 갑진 7년 춘 3월에 과거법을 개정하였다.
하 4월에 황주량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 기미에 문하시중 한언공이 졸하였다.
동 11월 갑인에 호경(서경)에 행차하여 재제를 올리고 장죄 이하를 사하였으며 기로를 양휼하고 방악과 주진의 신기에 훈호를 가하였다.
을사 8년 춘 정월에 동여진이 등주(안변)에 입구하여 주진부락을 삼십여소나 불태웠으므로 장수를 보내어 막게 하였다.
3월 기유에 외관을 도태하였다.
하 4월 계유에 최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해에 송의 온주문사 주저가 내투하매 예빈주부를 제수하였다. 병오 9년 6월 무술에 천성전 치문에 벽력이 치매 왕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스스로를 책하고 사를 베풀며 효자 순손과 의부 절부에게는 모두 은상을 가하고 국내신기에 훈호를 가하였으며 문무 삼품 이상은 가훈하고 사품 이하는 일급을 더하고 구품 이상으로 입사한지 만 이십년된 자는 개복케 하였으며 선교승도는 대덕 이상에게 법호를 가하고 년 육십 이상의 자는 가직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이 해에 혜성이 나타났다.
정미 10년 춘 2월에 거란이 야율연귀를 보내와 왕을 가책하여 수의보방추성봉성 신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겸 정사령 상주국 식읍 칠천호 식실봉 칠백호로 하였다. 진관사 구층탑을 창건하였다.
하 6월에 조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무인에 평장사 한린경을 양주에 유배하고 이부시랑 김낙을 해도에 유배하였다.
동 10월 무신에 호경에 행차하여 재제를 올리고 유죄이하를 사하고 국내신기에 훈호를 가하였다. 이 해에 호경에 지진이 있었다.
무신 11년 춘 3월에 손원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동 10월에 호경에 행차하여 재제를 올렸다.
유기 12년 춘 정월 경오에 숭경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는 중로에서 폭풍이 산개의 자루를 부질렀다. 임신에 상정전에 거동하여 관등하는데 대부의 유고에서 불이 나 천추전으로 연소되었다. 왕이 전우(殿宇=전당 殿堂)와 부고가 외신됨을 보고 비탄하여 병을 일으켜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왕사와 국사 이승과 대의 기정업 대복 진함조 대사 반희악 재신 참지정사 유진 중추원사 최항 급사중 채충순 등이 은대에 직숙하고 지은대사 이주정과 우승선 이작인 폐신 좌사랑중 유충정 합문사인 유행간 등은 궐내에 직숙하고 친종장군 유방과 중랑장 유종 탁사정 하공진은 근전문에 상직하고 형부상서 진적도 또한 입내하여 직숙하고 호부시랑 최사위는 대정문 별감이 되어 모든 궁문을 폐쇄하고 계엄하였는데 다만 장춘 대정문만 열었다. 인하여 구명도장을 장춘 건화 이전에 베풀었다. 왕은 여러 날 불예하여 항상 내전에 있어 군신을 만나는 것을 싫어하니 재신들이 송구하여 침전에 들어가서 문질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왕은 채충순 최항 등과 입사할 것을 밀의하고 황보유의를 보내어 대량원군을 신혈사(삼각산에 있었음)에 맞이하도록 하였다. 서경도순검사 강조가 군졸을 거느리고 와서 드디어 폐립(廢立 임금을 폐하고 새로 다른 임금을 맞아 세우는 것)을 꾀하였다.
2월 무자에 왕을 청하여 용흥(황주)의 귀법사에 출어하게 하였다. 기축에 햇빛이 붉은 장막을 친듯 하였다. 강조의 병이 궁문에 난입하매 왕이 면치 못할 것을 알고 태후와 더불어 호읍(號泣 목놓아 소리 높여 우는 것)하며 법왕사에 출어하였다. 이윽고 황보유의 등이 대량원군을 받들고 이르러 드디어 즉위케 하였다. 강조는 왕을 폐하여 양국공을 삼고 병졸을 보내어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 등 칠인을 죽였다. 왕이 선인문으로부터 나올새 시신들이 처음 도보로 따르다가 이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타고 따르는 자가 있었다. 귀법사에 이르러 어의를 풀고 어식을 바꾸어서 올렸다. 강조가 최항 등을 소환하여 공직(公直 사사롭거나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정직하게)하게 하니 왕이 항에게 말하기를 [저번에 부고가 불타고 변이 소홀히 한 데에서 일어난 것은 다 나의 부덕에서 녹유됨이니 다시 무엇을 원망하리오. 다만 원하는 바는 시골에 귀로하고자 하니 경은 신군에게 이 뜻을 상주하고 또 잘 보좌하도록 하라]하고 드디어 충주로 향하였다. 태후가 식사하고자 하면 왕이 친히 반우를 받들고 태후가 말을 타고자 하면 왕이 친히 말 고삐를 잡았다. 적성현에 이르렀을 때 강조는 사람을 보내어 시해하고 왕이 자문
(自刎 스스로 목을 찌르는 것)하였다고 보고케 하였다. 문짝을 취하여 관으로 삼고 객관에 권조하였다. 왕의 재위는 십이년이요 수는 삼십이니 천성이 침의하여 어려서부터 인군의 풍도가 있었으며 활쏘기 말타기를 잘하고 술을 좋아하고 사냥을 즐기며 정사에 뜻을 두지않았으며 폐행을 믿고 가까이 하여 화를 미치게 되었다. 달을 지나 현의 남쪽에서 화장하였다. 능을 공능이라 하고 시호는 선령이라 하며 묘호는 민종이라고 하니 모두 강조가 찬정한 바이다. 신민이 통분하지 않음이 없었으나 현종은 이것을 알지 못하였다가 거란이 문죄함에 이르러 비로소 알게 되었다. 현종 3년 성동에 이장하고 능을 고쳐 의릉이라 하고 시호를 선양이라고 하였으며 묘호를 목종이라 하였다. 5년 효사를 가시하고 18년 위혜를 가하고 문종 10년 극영을 가하고 고종 40년 정공을 가하였다. 이재현의 찬에 이르기를 [경부가 노에서 예를 범하고 불위가 진에서 화를 전가하니 제환공이 강씨를 죽이고 진시황이 애씨를 거열한들 어찌 만세의 치욕을 구할 수 있으랴. 목종이 복거의 전철을 경계하여 처음에 방지하지 못하고 자모가 함께 그 재앙에 걸려 사직을 거의 망침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목종(선양)의 불행이 또한 불행이 아니로다]고 하였다.
제8대 현종(顯宗,1009~1031 재위22년)
자 안세(安世). 휘(諱) 순(詢). 시호 원문(元文). 태조의 여덟째 아들 안종(安宗) 욱(郁)의 아들. 어머니는 경종의 둘째 비(妃)인 헌정왕후(獻貞王后:孝肅太后). 비는 성종의 두 딸 원정왕후(元貞王后)와 원화왕후(元和王后), 시중(侍中) 김은부(金殷傅)의 딸 원성왕후(元成王后), 대종(戴宗:追尊王)의 손녀 원용왕후(元容王后)이다. 처음에 대량원군(大良院君)에 봉해졌으나, 12세 때 천추태후(千秋太后:경종비 헌애왕후)의 강요로 숭경사(崇敬寺)에 들어갔다. 1006년(목종 9) 삼각산 신혈사(神穴寺)로 옮겨졌으며, 1009년 서북면도순검사(西北面都巡檢使) 강조(康兆)의 옹립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해 강조가 목종을 살해한 데 대하여 문책한다는 구실로 거란의 성종(聖宗)이 군사 40만을 거느리고 쳐들어오자, 강조로 하여금 이를 방어하게 하였으나 참패하고, 다음해 개경(開京)이 함락되어 남으로 피난하였다. 이어 왕이 친조(親朝)할 것을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어 거란군은 물러갔으나 끝내 친조를 하지 않았고, 또 6성(城)을 요구해 온 것도 거절하였다. 1018년 거란의 장군 소배압(蕭排押)이 6성을 빼앗고자 침입하였으나, 상원수(上元帥) 강감찬(姜邯贊)의 뛰어난 전술로 구주(龜州)에서 섬멸하여 물리쳤다(龜州大捷). 다음해부터 거란과 국교를 열어 평화정책으로 일관하여 우호관계를 회복하고, 모든 사치와 호화로운 의식 ·제도를 폐지하고 승려의 횡포를 엄금하는 한편, 기민(飢民)의 구제에 만전을 기하였다. 불교와 유교의 발전을 도모하여 폐지된 연등회(燃燈會)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키고, 선유(先儒)를 존숭하는 뜻에서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등을 추봉(追封)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여, 한국 최초로 문묘종사의 선례를 만들었다. 또한, 거란군의 침략을 불력(佛力)으로 물리치기 위하여 대장경(大藏經)의 제작에 착수, 6천 권의 대부분을 완성하게 하였다. 지방 관제를 합리적으로 조절하기 위하여 12주의 절도사(節度使)를 폐하고, 5도호부(都護府) 75도(道)에 안무사(按撫使)를 두었다가, 다시 이를 폐하여 4도호부 ·8목(牧) ·56지주(知州) ·56군사(郡事) ·18진장(鎭將) ·20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사심관(事審官)의 선출을 엄격히 하였다. 능은 경기 개풍군의 선릉(宣陵)이다. |
현종 원문대왕의 휘는 순이며 자는 안세니 안종(추존)의 아들이요 모는 효숙왕후 황보씨이다. 성종 11년 임진 7월 임진에 탄생하여 조금 자람에 대량원군으로 봉했다.
나이 12에 천추태후가 꺼려하고 핍박하여 축발(머리를 깍고 중이 되는 것)케 하니 처음에 숭교사에 우거(寓居 남의 집에서 임시로 몸을 부쳐 사는 것)하였다. 한 중이 꿈을 꾸니 큰 별이 절 뜰에 떨어져서는 변하여 용이 되었다가 또 변하여 사람이 되니 곧 왕이었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여러사람이 퍽 기이하게 생각하였다. 목종 9년 삼각산 신혈사에 이우하였던 바 태후가 자주 사람을 보내어 모해하고자 하였으나 절에 노승이 있어 방밑에 구멍을 파 숨겨두고 그 위에 와탑을 두어 불측의 변을 막았다. 하루는 왕이 우연히 계수를 두고 시를 지어 「한가닥 유수가 백운봉으로부터 흘러나니 만리창명으로 갈 길이 통했도다 졸졸 흘러 바위 밑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얼마 지나지 않아 용궁에 이를 것이다」고 하고 소사를 두고 읊어 「작고 작은 배암이 약란에 감도니 온 몸에 붉은 비단이 저절로 아롱지도다 길이 꽃숲풀 밑에만 있으리라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로다」고 하였다. 또 꿈에 닭 소리와 다듬이 소리를 들고 술사에게 물으니 방언으로써 해석하여 말하기를 「닭 소리는 고귀위(고귀위)하고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이니 이것은 즉위할 징조라」고 하였다. 12년 2월 기축에 봉앙되어 연총전에서 즉위하였다. 경인에 강조로 중대사를 삼고 이현운으로 중대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직중대를 삼고 윤여로 상서우승겸 직중대를 삼았다. 이 달에 사농경 왕일경을 거란에 보내어 애를 고하고 사위하였음을 알렸다. 교방을 파하고 궁녀 백여명을 놓아 주었으며 낭원정을 헐고 진기한 새와 짐승이며 거북 고기 유를 산과 못에 풀어 놓아 주었다. 3월에 유윤부로 문하시중을 삼고 유방헌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강조로 이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진적로 형부상서참지정사를 삼고 유진과 왕동영으로 상서 좌우복사를 삼고 최항과 김심언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이부시랑 좌간의대부를 삼고 김려로 병부상서를 삼고 문인위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이 달에 개경의 나성(외성)을 쌓기를 논의하였다. 4월 병술 삭에 차공부시랑 이유항을 거란에 보내어 태후의 생진을 축하하였다. 갑오에 고비(부모)의 시호를 추상하였다. 무술에 사하고 늙고 병든 이를 양호하며 조조를 못바친 자를 놓아주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공신을 상주고 현사를 표창하며 훈구를 녹용하고 여악을 제거하며 군량을 마련하고 군망과 신기에게 훈호를 가하며 문무의 관작을 더하였다. 5월 무진에 영화관을 고쳐서 회동관이라고 하였다. 을해에 연흥궁주의 딸 김씨를 납하여 비로 삼았다. 무인에 도죄 이하를 사하고 문무의 관계를 1급씩 올리고 만기된 자는 질을 더하며 경군에게는 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남도의 민호로서 동북변진을 메꾸었던 자는 전리로 돌려보냈다. 이 달에 안창영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6월에 동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7월 계유에 교하되 「문관으로 상참 이상은 각기 봉사를 올려서 시정의 득실을 극언하라」고 하였다. 신사에 구정에 나아가 민인 남녀 년 80이상과 독질자 635인을 모으고 주식 포백 다약을 차등 있게 사하였다. 한림학사 최항을 사부로 삼았다. 8월 갑오에 문하시랑 평장사 유방헌이 졸하였다. 10월 임오에 위수여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진적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12월 병신에 교하기를 「짐이 욕되게 조업을 물려 받고 삼가히 비기를 이어 현토 봉강을 거느리게 되고 황천의 권명을 받들었도다 백성을 사랑하여 기르메 감히 편한 겨를을 가지지 못하였다. 한가지 덕이라도 신실치 못할까 혹은 이윤이 패하여질까 염려하여 매양 몸소 정사를 청단함에 부지런하고 태평으로 순치하고자 바랐는데 요사이에 바야흐로 가을철에 미쳐 요무가 거두어지지 않고 음양이 교착하여 기후가 어긋나도다. 이에 탕여(수성)의 정성을 더하고 책궁의 계를 간절히 하여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늦게 먹고 일찍 일어나 마음과 입으로 빌었더니 과연 감통을 입어 문득 청화함을 이루었도다. 능히 공경하면 재가 없어지고 화를 돌려서 복이 된다고 이름(위)직 하도다. 진실로 더욱 외경함을 생각하여서 우러러 하늘(고명)에 부응하고 다시 나라에 근휼하여 더욱 정사에 힘을 다하고자 한다. 그러나 만기의 일을 혼자 다스리기는 어려운 것이니 진실로 신하의 공을 힘입어 다같이 건곤의 도에 맞도록 할 것이다. 바야흐로 경구을 인하여 이에 잠언을 이노라. 형축의 직사는 실로 이것이 백성들의 첨앙는 자리인지라 마땅히 궐루 *윤하고 모명을 헌납하며 교화의 근원을 짐작하여 왕업을 도울 것이며 전재의 직과 선사의 권은 초택을 찾아서 어진 이가 버려짐이 없도록 할 것이며 공평함을 힘써서 아부하는 무리를 쫓지 말 것이며 혹은 과를 괘시하고 법을 설하여 옥을 단정하고 형을 심리하매 마땅히 애긍을 다할 것이며 가혹하게 행하지 아니하면 족히 화기를 부를 것이니 침원이 없도록 할 것이다. 모든 집사에 이르러서는 정성것 관년 처하고 삼가 직무를 지켜 맑음을 들추어내고 탁함을 제척함으로써 본보기로 하고 공을 등지고 사에 향하는가를 살필지어다. 목수의 관에 미쳐서는 각기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물건을 사랑하는 뜻을 잊지 말 것이며 진변장수에 이르러서는 수려를 훈련정제하고 효웅을 길러 힘써 불처오에 대비하고 무도함을 경계할 것이다. 아아 너희들 중외의 경사는 마땅히 숙야로 게을리하지 말고 종시 변하지 말지어다 희라 하늘의 조람하심이 멀지 않아 이미 경계함을 나렸으며 내 마음이 게으르지 아니하여 이미 감통함을 이루었도다. 다시 석상의 성을 더하여 일신의 경을 힘입을까 하나니 그러므로 함께 다스림을 구하여 장래를 보전하고자 하노라」고 하였다.
경무 원년 춘 정월 을축에 상원도장을 폐하였다. 윤 2월 갑오에 연등회를 복구하였다. 하 4월 계축에 친히 대묘에 사하였다. 기미에 서숭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갑신에 상서좌사랑중 하공진과 화주방어랑중 유종을 원도에 유배하였다. 공진이 일찍이 동여진을 치다가 패하매 종이 한을 품었더니 때마침 여진인 95명이 내조하려고 화주관에 이르거늘 종이 이들을 모두 죽여버린 때문에 같이 유배되었다. 여진이 계란에게 호소하니 계란주가 군신에게 말하기를 「고려 강조는 임금을 죽였으니 대역인지라 마땅히 군사를 일으켜서 죄를 물을 것이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 삭에 계란이 급사중 양병과 대장군 나율윤을 보내와 전왕의 연고를 물었다. 8월 정미 삭에 내사시랑 평장사 진적과 직중대상서우승 윤여를 계란에 보냈다. 9월 좌사원외랑 김연보를 계란에 보내어 추계문후를 하고 좌사랑중 왕좌섬과 장작승 백일승을 계란 동경에 보내어 수호하였다. 동 10월 병오 삭에 참지정사 강조로 행영도통사를 삼고 검교상서 우복사 상장군 안소광으로 행영도병마사를 삼고 소부감 최현민으로 좌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시랑 이방으로 우군병마사를 삼고 예빈경 박충숙으로 중군병마사를 삼고 형부상서 최사위로 통군사를 삼아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에 진처 계란에 대비하였다. 계축에 계란이 급사중 고정과 합문인진사 한기를 보내와 군사를 일으켰다고 알렸다. 참지정사 이예균과 우복사 왕동영을 계란에 보내어 화를 청하였다. 11월 병자 삭에 기거랑 강주재를 계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하였다. 계란주가 장군 소웅을 보내와 친정한다는 것을 고하였다. 경인 팔관회를 복구하고 왕이 위봉루에 거동하여 관악하였다. 신묘에 계란주가 스스로 보기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서 흥화진을 포위하였으나 양규 이수화 등이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았다. 기해에 강조가 계란과 통주에서 싸워 패전하여 사로잡혔다. 경술에 계란병이 곽주를 함락하였다. 임자에 계란병이 청수강(청천강)에 이르니 안북도호부사 공부시랑 박섬은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주민이 모두 흩어졌다. 계축에 계란병이 서경에 이르러 중흥사탑을 불태웠다. 갑인에 숙주를 함락하였다. 경신에 큰 유성이 곽주에 떨어졌다. 신유에 계란주가 서경을 쳐 빼지 못하매 포위를 풀고 동으로 향하였다. 계해에 서경신사에 선풍이 홀연히 일어나 계란의 군마가 모두 쓸어졌다. 하공진과 유종을 소환하여 그 작을 복구시켰다. 임신 야에 왕과 후비가 계란병을 피하여 남쪽으로 행차하였다. 갑술에 양주에 도착하여 하공진과 호부원외랑 고영기를 보내어 표를 받들고 계란영에 가서 화를 청케 하였다.
신해 2년 춘 정월 을해 삭에 계란주가 경성에 들어와 대묘와 궁궐과 민옥를 불태워서 남김이 없었다. 이 날에 왕은 광주에 이르렀다. 정축에 시종한 제신들이 하공진 등이 붙잡혔음을 듣고 모두 놀라고 두려워하여 흩어져 달아나고 오직 시랑 충숙과 장연우 채충순 주저 유종 김응인이 떠나가지 않았다. 무인에 왕이 광주를 출발하여 비노역에 이르렀다. 임오에 장곡역에 이르렀다. 을유에 계란병이 물러갔다. 병술에 왕이 인의현을 지나 수다역에 이르렀다. 정해에 노령을 넘어서 나주에 들어갔다. 을미에 왕이 회하하여 복룡역에 이르렀으며 무술에 고부군에 이르고 기해에 금구현에 이르렀다가 경자에 전주에 이르러 7일동안 머물었다. 임인에 양규와 김숙흥이 계란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계묘에 계란주가 압록강을 건너 퇴거하였다. 채충순을 비서감으로 삼고 박섬을 사재경으로 삼고 주저를 예부시랑 중추원직학사로 삼고 한창필을 합문통사사인으로 삼았다. 박섬이 안북으로부터 도망하여 서울에 돌아와 가족을 데리고 그 고향인 무안현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차가(임금이 탄 수레)를 만나 따라서 나주에 이르렀다가 이내 사귀하더니 계란병이 물러갔다 함을 듣고는 와서 알견함으로 이에 이러한 임명이 있었는데 그때 여론은 이것을 비방하였다. 2월 정미에 전주를 출발하여 여양현(여산)에 이르고 무신에 공주에 이르러 6일동안 머물으며 김은부의 장녀를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경술에 김계부를 병부시랑으로 삼고 이단을 이부원외랑으로 삼았다. 정사에 청주에 이르렀다. 기미에 연등회를 행궁에 설하니 이 뒤로 의례히 2월 망일(15일)에 행하게 되었다. 경신에 청주를 출발하여 정묘에 서울로 돌아와 수창궁에 들었다. 기사에 형부가 주하기를 유언경은 대대로 국은을 받고도 보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앞서서 적에 강복하였으니 청컨대 처자를 유배하소서 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3월 무자에 탁사정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신축에 유진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조지린 최사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하 4월 정미에 탁사정으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오래 가물므로 종묘에 비를 빌고 시사를 옮기고 도살을 금하고 산선을 끊고 원옥을 다스리고 궁핍한 자를 구휼하였다. 기유에 황보유의와 최창으로 모두 시어사를 삼고 유소로 전중시어사를 삼았으며 김종현과 박종검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임자에 전몰한 중승 노정에게 예빈경을 증하였다. 병진에 전몰한 대장군 채온겸 신영한과 낭장 원태 별장 최원 습유 승리인 태사승 유인택의 집에 미포를 차등있게 사하였다. 정사에 유사에게 명하여 중외의 전사자의 해골을 거두어 묻고 제사 지내게 하였다. 재상에서 교하기를 「논어에 위태함에도 붙잡아 주지 않고 엎어짐에도 붙들어 주지 않는다면 장차 그러한 재상을 어데다 쓸 것이냐고 하였고 경서에 오직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바르게 되고 임근은 간언을 따르면 슬기롭게 된다고 하였으니 군신의 의에 어찌 마음을 다하여 광구하지 않을까 보냐. 짐이 외람되게 왕위를 이른 뒤로부터 어렵고 위태함을 두루 겪고 숙야로 조심하고 부끄러워하여 그 허물을 면할 것을 생각하나니 경등은 힘써 부족함을 보필하고 또 면종함이 없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정 최보성으로 상서좌우승을 삼았다. 신유에 송옥에서 기우하니 큰 비가 왔다. 을축에 공부랑중 왕첨을 계란에 보내어 회군함을 사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이 계란에 사신을 보내려해서 태사에게 명하여 점(서)쳤더니 건괘의 고을 얻고 아뢰기를 「건은 군이 되고 부가 되나니 건이 건하면 통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구오효사에 비룡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이견할 것이다고 하였고 고의 괘된 것이 존자는 위에 있고 비자는 아래에 있는 것이니 이것도 또한 아래 사람이 윗 사람을 섬기는 괘상이니 길하다」고 하였다. 정묘에 영빈 회선 2관을 두어 제국사신을 접대케 하였다. 5월 을해에 동북여진 추장 조을두가 그 족속 70인을 거느리고 와 방물을 올림으로 각기 의복과 은명을 사하였다. 무인에 유방으로 병부상서겸상장군을 삼고 최현민으로 공부상서를 삼았으며 김심언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최충으로 우습유를 삼았다. 정해에 평양의 목멱 교연 도지암 동명왕 등 신에게 훈호를 가증하였다. 정유에 박승으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6월 계묘 삭에 강감찬으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정묘에 이정으로 전중감을 삼고 손몽주로 상서좌승을 삼았다. 추 7월 계유에 최사위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고 장연우 채충순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았다. 갑신에 형부가 주하기를 낭중 백행린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서울에 머물러 있어 자칭 어사중승이라 하고 이인례 거정 등으로 더불어 도노들을 소모하여 군사를 삼아 적을 보고는 싸우지 않고 무너졌으니 청컨대 제명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임진에 교하기를 「거년에 계란이 서경을 포위하였을 때 사문 법언은 의를 보고 용기를 드날려 삶을 잊고 나라에 죽었으니 가히 수좌를 증직하라」고 하였다. 8월 계묘에 형부가 주하기를 「조용겸 유승건 이재 최집 최성의 임탁은 남으로 행차하실 때 행궁을 경동하였사오니 청컨대 제명하고 유배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갑진에 양진으로 어사중승를 삼았다. 을사에 문인위로 우복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경술에 장연우로 판어사태사를 삼았다. 병진에 강조당을 논죄하여 탁사정 박승 최창 위종정 강은을 해도에 유배하였다. 정사에 황보유의로 이부랑중을 삼고 유소로 시어사를 삼고 조자기 이택성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을축에 호부시랑 최원신을 계란에 보냈다. 병인에 관인전문에 거동하여 망노 고독 독질자를 향응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참지정사 최사위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이 달에 송옥성을 증수하였다. 서경에 황성을 쌓았다. 동여진이 100여소의 배로 경주에 침구하였다. 9월 병자에 좌복사 참지정사 조지린이 졸하였다. 최사위로 이부상서를 삼고 박섬으로 장작감을 삼고 강의로 상서우승을 삼고 박종검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을유에 탐라가 주 군의 예에 의하여 주기를 사할 것을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임진에 이방으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동 10월 경자 삭에 병부상서 유방으로 참지정사 서경유수겸 서북면행영도병마사를 삼았다. 을축에 도관랑중 김숭의를 계란에 보내어 동지를 하하였다. 상서 장연제에게 명하여 궁궐을 수영하였다. 11월 임오에 형부시랑 김은부를 계란에 보내어 생진을 하하였다. 12월 기유에 문인위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이 달에 계란이 하공진을 죽였다.
임자 3년 춘 2월 갑진에 여진추장 마시저가 30성 부락의 자제를 거느리고 와서 토마를 바쳤다. 30성이란 아간돈 이홀 이방고 문질노 불차리 거질아 점한일 이질아 야라다 요게라 요열일 울언 오림대 몽골예 훈저헌 도태 야을일 나을신 나을안 동골일 지도일 어슬은 마을일 도몰니 운돌리 곤한이 노일이 배문이 불서일 만윤이이다. 을묘에 교하기를 「논어에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족할 것이냐라고 하였는데 요사이 전쟁으로 인하여 백성이 농사를 잃고 길에 굶주려 죽은 자가 서로 잇대었다. 백성들의 이와 같음을 생각할 때 어찌 군부가 홀로 편하리오. 상식대관으로 하여금 상선을 감성케 하라」고 하였다. 무오에 위수여로 시중을 삼고 유진으로 문하시랑을 삼고 최사위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최항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박충숙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3월 경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임신에 송인 왕복 전화 양태 섭청 왕노 이태 임석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계해에 문하시중 위수여가 졸하였다. 이 달에 서리가 왔다. 계란이 왕에게 조하여 친조하라 하였다. 5월 기사에 동여진이 청하 영일 장기현에 침구하니 도부서의 문연 강민첨 이인택 조자기를 보내어 주군병을 독려하여 격주시켰다. 경주의 조유궁을 철수하여 그 재목으로 황룡사탑을 수리하였다. 을유에 원릉에 배알하였다. 병술에 승을 내전에 모으고 인왕반야경을 강하였다. 6월 갑진에 시어의 궁정이 옹색(추애)함으로 상참관으로 하여금 5월에 한 번씩 입견케 하였다. 을사에 이수화를 좌습유로 삼았다. 경술에 송인 섭거전 임덕 왕호가 내투하였다. 계축에 예관이 청하기를 「중외로 하여금 생진을 진하하도록 하소서」하니 교하기를 「모인이 일찍 민흉을 당하여 길이 공양을 저버렸다. 매양 구로하신 날을 당하면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거늘 어찌 슬픔을 참고 도리어 경하를 받으리요. 지금부터는 양경과 제도의 진하를 일절 금지하고 다만 축수도장만 두도록 하되 이것을 길이 항식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감찰어사 이인택과 동북면 행영병마사 강감찬이 서로 틈이 생겨 논소하기를 말지 않거늘 인택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가뭄으로 써 유사에게 명하여 원옥을 다스리고 경죄는 방면하고 산천에 도사케 하였다. 갑자에 형부시랑 전공지를 계란에 보내어 하계문후를 하고 또 왕이 병으로 친조할 수 없다고 고하니 난주가 노하여 조하기를 「흥화 통주 용주 철주 곽주 구주 등 6성을 취한다」고 하였다. 추 7월 무인에 교하기를 「짐이 사수(사천)에 있을 적에 언효와 효질 두 사람이 좌우에 시종(부지)하여 일찍이 근로를 나타내었으니 양전을 주어 그 수고를 포상하라」고 하였다. 8월 병신 삭에 일식하였다. 무술에 일본국의 반다 등 35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탐라인이 와 대선 2소를 바쳤다. 동북주진에 풍년이 들었다. 9월 기사에 서두공봉관 문유령을 계란의 내원성에 보냈다. 동 10월 병오에 남초인 육세령 등이 와 방물을 바쳤다. 윤월에 여진의 모일라와 조을두가 부락의 30성을 거느리고 화주에 와 맹약하기를 간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경오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과 예부시랑 유징필을 계란에 보냈다. 계미에 계란의 사신 대위 한빈이 왔다. 12월 정축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교하기를 「옛날 진조에서는 대실이 화재를 당하매 두예와 사곤 등이 가덕문을 수리하여 임시로 신주를 모시고 제예를 행할 것을 아뢰었다. 이제 과인의 부덕으로 청묘에까지 재화를 미치게하여 슬픈 마음이 비록 깊으나 일으켜 지을 겨를이 없으니 이에 먼저 신주를 만들어 재방에 모시고자 하노니 예관으로 하여금 의의하여 주문케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장영이 계란의 인진사 이연홍과 같이 왔다. 이 달에 서경 목멱사 신상을 만들었다. 중광사를 창건하였다.
계축 4년 춘 정월 정유에 예빈소경장박를 계란에 보냈다. 경술에 송의 민인 대익이 내투하니 유림랑수궁령을 제수하고 의물과 전장을 사하였다. 신유에 김작빈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한창필로 우보궐을 삼고 황주량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임오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계미에 교하기를 「짐이 미약한 몸으로 외람되게 원수가 되어서 허물과 잘못이 쌓이게 되어 변이가 서로 잇대었다. 재앙은 헛되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매 이것을 근심하고 두려워하노라. 유사로 하여금 재앙을 가시는 길을 강구하여 써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중추원사 채충순을 계란에 보냈다. 3월 신축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무신에 계란사신 좌감문위대장군 야율행평이 와 흥화 등 6성을 토삭하였다. 하 4월 을축에 우상시 전보인이 글을 올려 치사(해임)하기를 빌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병자에 서리가 내려 풀이 말랐다. 계미에 공부상서 참지정사 장영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정묘에 계란이 와 통화(연호)를 개태로 고쳤다고 고하였다. 임인에 여진이 계란병을 인도하고 장차 압록강을 건느려 하거늘 대장군 김승위 등이 쳐 물리쳤다. 계묘에 경장태자의 딸을 맞이하여 비로 삼았다. 6월 정묘에 차상서우승 김작빈을 계란에 보내어 개원함을 하하였다. 계유에 송옥이 무너졌다. 추 7월 무신에 계란사신 야율행평이 다시 와 6성을 토색(토색)하였다. 8월 을해에 의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9월 병오에 과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임유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교하기를 「보국대장군 송능 표기대장군 유손은 태조에게 체사하여 종군에 공로가 있었고 지금도 아직 무양하여 이미 기(90세) 신(100세)에 이르렀으니 각기 대광을 가자하라」고 하였다. 병진에 이부상서 참지정사 최항으로 감수국사를 삼고 예부상서 김심언으로 수국사를 삼고 예부시랑 주저와 내사사인 윤징고와 시어사 황주량과 우습유 최충으로 모두 수찬관을 삼았다. 동 10월에 공신당을 수리하였다. 11월 정미에 금주에 지진하였다. 12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병술에 금 경 2주에 지진하였다.
갑인 5년 춘 정월 갑오에 궁궐이 낙성되었다. 임자에 혜성이 오차(방위)에 나타났다. 2월 경신에 혜성이 대릉(방위)에 들어갔다. 갑자에 신궐에 입어하였다.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의 만두를 보내어 와 마 및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병자에 교하기를 「백성의 나이 70 이상으로서 관작이 없는 자에게는 모두 정위급을 가하라」고 하였다. 갑신에 광휴 양일 거정을 모두 낭장으로 삼아 써 전공을 상주었다. 3월 경인에 백홍이 관일하였다. 신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임자에 교하기를 「조고를 추존하여 공훈을 밝힘은 인자의 뜻이다. 짐이 내월에는 비궁에 향사하고자 하나니 소사에게 위촉하여 의정하라」하니 예관이 선왕 선후의 존시호를 가상할 것을 아뢰었다. 하 4월 갑술에 치사한 문하시중 유윤부에게 내사령을 가하였다. 병자에 친히 재방에 체하였는데 처음으로 목종을 부제하고 유형 이하를 사하였다. 유진으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사위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김심언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우현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신묘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병오에 중추원부사 전공지가 졸하였다. 6월 경신에 교하기를 「방수군으로 도중에서 죽은 자는 관에서 감구를 주어 그 유골을 담아 본가에 역송하고 상여로 죽어 성명과 본관을 알 수 없는 자는 소재의 관사가 임시로 매장하고 그 노장 형모를 기록하여 의오가 없도록 함을 영식으로 하라」고 하였다. 이 달에 진적과 이예균을 가관하여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왕동영은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윤여는 사재경을 삼고 왕좌섬은 장작소감을 삼으니 이것은 계란에 봉사하였다가 붙들려서 돌아오지 못한 때문이다. 추 7월 경인에 사직단을 수리하였다. 8월 갑자에 내사사인 윤징고를 송에 보내어 금선직성 용봉안복과 수용봉안복 각 두벌과 양마 22필을 진상하고 인하여 옛날과 같이 귀부하기를 청하니 송제는 등주에 조하여 「해안(해차)에 관사를 고 대접하라」고 하였다. 기사에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병자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기묘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으로 서경유수를 삼고 노전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미에 양진으로 이부시랑 중추부사를 삼았다. 9월 을유에 손몽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를 삼았다. 병신에 계란이 장군 이송무를 보내어 또 6성을 토색하였다. 동 10월 기미에 계란이 국구상온 소적열을 보내와 통주에 침입하거늘 흥화진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이 쳐 패북시켜 700여급을 참하니 강에 빠져 죽는 자도 심히 많았다. 11월 계미 삭에 상장군 김훈과 최질 등이 여러 위군을 거느리고 난을 일으키니 중추원사 장연우와 일직 황보유의를 유배시켰다. 을유에 김훈 등이 청하기를 「무관으로 상참 이상은 모두 문관을 겸하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경인에 와언이 돌아 북산제사의 중이 군사를 이끌고 온다 하니 서울이 크게 놀라매 계엄하였다. 12월 정사에 유죄 이하를 사하고 모든 사죄을 감하여 장류하고 황보유의와 장연우 및 상사불면자를 제외한 모든 유배인은 모두 양이를 베풀었다. 그리고 해독과 산천의 신기에 각기 훈호를 가하였다. 경중인호에 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효자 순손 의부 절부에게도 차등있게 분물을 주고 문관 7품이상으로 입사한지 20년 되는 자에게는 복장을 갈게 하고 도관은 차제의 직을 가하였다.
을묘 6년 춘 정월에 계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를 끼고서 동서로 성을 쌓거늘 장수를 보내어 공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계묘에 계란병이 흥화진을 포위하거늘 장군 고적여와 조익 등이 쳐 물리쳤으나 갑진에 또 통주에 침구하였다. 3월 계미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갑오에 군신을 장락궁에서 향연하고 김훈과 최질 등 19인을 베었다. 기해에 계란이 용주에 침구하였다. 여진이 배 20소로 구두포에 침구하므로 진명도도부서가 이를 격패하였다. 하 4월 경신에 계란사신 장군 야율행평이 와 또 6성을 토색하매 포류하고 보내지 않았다. 이 달에 왕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왔다. 5월 신축에 큰 유성이 서남에 떨어졌다. 계묘에 김은부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6월 기유 삭에 일식하였다. 윤월 갑진에 이주헌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장연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송의 천주인 구양징이 내투하였다. 추 7월 경신에 무관이 청건하였던 관호를 혁파하였다.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정신용과 임영함 및 군사 1만5천5백인은 다 변공이 있으니 청컨대 급을 더하여 써 상주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8월 을미에 내사령 유윤부가 졸하니 3일간 철조하고 시호를 경안이라 하였다. 9월 갑인에 계란사신 감문장군 이송무가 와 6성을 토색하였다. 기미에 계란이 통주를 내공하였다. 계해에 흥화진대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 산원 임억 교위 양춘 대의승 손간 태사승 강승영 등이 군사를 이끌고 계란군의 뒤로 나가서 700여명을 쳐 죽였으나 신용 등 6인이 전사하였다. 정묘에 계란이 영주성을 공격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물러갔다. 경오에 대장군 고적여와 장군 소충현 고연적 산원 김극 별장 광참 등이 추격하다가 전사하였으며 단병이 병마판관 왕좌와 녹사 노현좌를 사로잡아 갔다. 11월 기사에 호부상서 장연우가 졸하였다. 갑술에 경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계란이 선화 정원 12진을 취하여 성을 쌓았다. 민관시랑 곽원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인하여 계란이 해마다 내침함을 고하였는데 그 표에 「성위를 빌리시고 예략을 보이셔서 혹 위태할 때에 이르면 미리 구급의 은을 베푸소서」라고 하였다.
병진 7년 춘 정월 경술에 계란의 야율세량과 소굴열이 곽주를 침공하니 아군이 싸워서 죽은 자가 수만명이 되었으며 치중을 노획하여 돌아갔다. 갑인에 계란사 10인이 압록강에 이르거늘 받아들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정신용에게 상서우복사 상주국을 주년게 장군을 임억에게 중랑장을 양춘에게 낭장을 손간에게 상약봉어를 강승영에게 태사령을 증직하고 신용의 아들 균백으로 낭장겸 상승봉어를 제수하였다. 무오에 강민첨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임술에 병부가 주하기를 「낭장 진명 유고가 강효 등 74인에게 청컨대 작 1급씩 더하여 변공을 상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병인에 고장군 고연적이 국사에 죽었으므로 그 집에 쌀 50석과 보리 30석과 포 100필을 부사하였다. 정묘에 김은부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수화 최충으로 좌우보궐을 삼고 이작충 구양징으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무진에 윤징고로 중추원부사를 삼았다. 기사에 장영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채충순으로 다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신에 태조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반장하였는데 경술년 난 때 재궁을 부아산(삼각산) 향림사에 옮겼다가 이에 이르러 환장한 것이다. 곽원이 송으로부터 돌아왔다. 송제가 조하기를 「짐은 사목하는 자리에 있어 뜻을 안민에 두노라. 비록 지역은 나누어져서 각기 다름이 있으나 오직 정성을 밀어(추) 간연(간연)함이 없다. 경의 본도(본국)를 생각할 때 진실로 마음에 깊이 걱정되는 바이나 저 이웃나라(계란)를 돌아보건대 또한 맹호를 쫓은지 오랜지라 바라는 바는 서로 화목하여 써 백성들을 평안하게 함에 있다」고 하였다. 2월 기묘에 김노현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경진에 병부가 주하기를 「중랑장 채굉과 이강 등 119인은 다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작 1급씩을 올리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임오에 계란의 왕미 연상 등 7인이 내분하였다. 갑신에 김훈 등의 부모 처 자매 조손 숙백으로 녹좌된 자는 모두 방면하고 아들과 동복형제는 본관에 돌려 보내어 상사에는 유죄치 않도록 하였다. 기축에 수창궁에 괴이가 자주 나타나므로 명복궁으로 이어하였다. 신축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황호맹 등 36인은 모두 전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직 1급을 가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갑진에 계란의 조은 고홀 등 6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갑신에 이응보로 섭사헌대부를 삼고 서눌로 중승을 삼고 유소로 잡단을 삼고 조자기로 시어사헌을 삼고 김우보 이원공으로 전중시어사헌을 삼고 안재균 이원수 유현좌 이회 곽신 이주좌로 감찰을 삼았다. 사헌대 뜰의 백자 나무가 말라 죽은지 몇 년 만에 이에 이르러 다시 살아났다. 5월 을사에 궁인 김씨가 왕자를 낳으니 이름을 흠이라고 사하고 인하여 연경원에 금은기 필은 전장 노비 염분 어량을 사하였다. 신해에 계란의 마아 보량 왕보 가신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을축에 상서성이 주하기를 「구주군의 귤선과 영몽이 모반하였으므로 참하였나이다」고 하였다. 계란의 요두 등 3인이 내투하였다. 6월 병자에 김은부로 중추사상호군을 삼고 곽원으로 형부시랑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유의로 급사중을 삼고 김맹으로 중추직학사를 삼았다. 무인에 계란의 지보 등 3인이 내투하였다. 경진에 왕자가 항춘전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수라고 사하였다. 을유에 계란의 장렬 공현 신두 유아 왕충 등 30호가 내투하였다. 추 7월 갑진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장군 고적여와 중랑장 서긍과 낭장 수암 등 3108인은 일찍이 통주의 싸움에서 살호이 심히 많았으니 청컨대 생존 사몰에 상관없이 직 1급을 더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신해에 명복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김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경술에 이주헌으로 상서우복사를 삼았다. 정사에 계란의 유도 고종 등 9인이 내투하였다. 경신에 교하기를 「요사이 듣건대 추곡이 장차 익어가는데 비황이 해를 끼친다하니 아마도 형정이 혹은 잘못되어 재앙을 그처럼 함인가 하노니 내외의 인도로서 유죄 이하는 보증을 받고 출옥시키고 소리할 것은 빨리 판결하라」고 하였다. 8월에 계란의 주간 종도 등 8인이 내투하였다. 9월 기유에 교하기를 「남계의 주 현에 황해와 한해가 중첩 였다 하나 기민을 생각할 때 어찌 나를 책함이 없으리요.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할 것이며 모든 관원에서는 술마시고 풍악 잡힘을 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계란의 나간 등 5인이 내투하였다. 갑인에 이주헌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인에 손몽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계란의 봉대 고리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1월 신축 삭에 정신용 집에 양전 20결을 사하였다. 계축에 최항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형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병진 군망에 눈오기를 빌었다. 계란의 광예아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12월 신사에 원우를 공부상서로 삼고 지채문으로 우상시를 삼으니 모두 무직으로써 겸임하였다. 을미에 계란의 슬불달 등 6인이 내투하였다. 이 해에 다시 송의 대중상부연호를 행하였다.
정사 8년 춘 정월 정미에 검교대위 좌산기상시 참지정사 장영이 상표하여 퇴직하기를 빌었다. 3월 갑진에 정배걸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오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정사에 이단으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하 4월에 문하평장사 최항과 중추부사 윤징고를 사주에 보내어 안종의 재궁을 봉천하였는데 왕은 법가를 갖추어 동교에서 맞이하였다. 5월 무신에 이공으로 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자에 중추사 호부상서 김은부가 졸하였다. 을축에 고비의 존익을 가상하였다. 6월에 명이 있었다. 추 7월 무술에 계란의 광정 등 7호가 내투하였다. 경자에 병부가 주하기를 「정보 이용봉과 정조 임술광 등 30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청컨대 향직 1급을 가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신축에 송의 천주인 임인복 등 4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기유에 여진의 말갈목사가 부락을 이끌고 내조하매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계란의 매슬 다을 정신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형부시랑 서눌을 송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무오에 상장군 상서우복사 안소광이 졸하였다. 8월 계유에 계란의 과허이 등 3호가 내투하였다. 을해에 건릉에 배알하였다. 을해에 동여진의 개다불 등 4인이 내투하여 변공에 힘 쓸 것을 청하거늘 허락하고 우예하여 물을 사하였다. 임진에 서여진의 개신이 계란의 동경 숭성사 승 도준을 사로잡아 왔다. 계사에 계란의 소합탁이 흥화진을 포위하여 공격하기 9일에 이기지 못하였다. 장군 견일 홍광 고의가 나아가 싸워 크게 패북시켜 참획이 심히 많았다. 갑오에 흑수말갈 아리불 등 6인이 내투하였으므로 나누어 강남의 주 현에 살게 하였다. 9월 갑진에 계란의 군기곤기와 여진의 고저 등 10호가 내투하였다. 기유에 병부상서 김징우가 상표하여 치사하였다. 임자에 계란의 오두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오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열병하였다. 이 달에 가물고 황이 있어 왕은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였다. 동 10월 임신에 현릉을 수보하였다. 11월 병신에 이원으로 용호군상장군겸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해에 태백(성)이 경천하였다. 12월 병인에 채충순으로 좌산기상시 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현릉에 배알하고 사하였다. 이 달에 교하기를 「고구려 신라 백제왕의 능묘는 다 소재의 주 현으로 하여금 수치케 하고 초채를 금하며 지나는 자는 하마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오 9년 춘 정월 을미 삭에 사신을 서경에 보내어 성용전에서 태조를 제하였는데 초상을 중신한 까닭이었다. 병신에 서여진의 미알달 등 7인이 와 갑주와 마를 바쳤다. 정안국인 골수가 내분(분)하였다. 경자에 재신이 백관을 거느리고 상표하여 정전에 돌아오고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임자에 동여진의 서율불과 서여진의 아주 등 40여인이 와 마와 갑주 기치며 초서 청서피를 바쳤다. 무오에 군신이 여러번 상선을 회복하기를 청하거늘 허락하였다. 2월 무진에 해 노 2군의 교위 선두 이하에게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기사에 서여진의 능거 거이 등이 와 피물 철갑 및 마를 바쳤다. 을해에 교하기를 「예기에 계춘의 달에는 영어(옥)을 살피고 질곡을 풀라고 하였으니 내외의 법사는 월령을 쫓아 양화를 유도함으로써 항식을 삼으라」고 하였다. 노전으로 중추부사 상호군을 삼았다. 기묘에 동여진의 노어가 부락을 거느리고 와서 마 및 초피를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갑신에 문하성이 주하기를 「용천교위 박명금이 변공으로 받은 바 계직을 그 아비에게 대수하여 주시기를 원한다」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을유에 국내 산천의 신기에 훈호를 가하였다. 서여진의 마문 마알달 등이 와서 토마를 바치매 화물을 사하였다. 병술에 계란의 장정 등 4인이 내투하였다. 3월 갑오 삭에 계란의 송광공 이개 등 10여인이 내투하였다. 계묘에 교외에서 굶주려 죽은 사람의 해골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갑진에 정충절 김승위로 모두 병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의 아리고와 서여진의 능거 등 1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치므로 모두 작을 사하고 또 필단을 사하였다. 경신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하 4월 무진에 왕후 김씨가 현덕궁에서 훙하였다. 경오에 황무가 사방에 자욱한지 무릇 4일에 서울에는 장역을 앓는 이가 많았으므로 왕이 의원을 나누어 보내어 치료하게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구타라와 서여진의 거일 등 20여인이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치므로 의대와 화물을 사하였다. 서여진의 목사 목개 등 2백호가 내투하였다. 윤월 무술에 동여진의 추장 아로대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계묘에 송의 강남인 왕숙자 등 24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개국사탑을 수리하여 사리를 봉안하고 거란을 설하여 3200여 승을 득도(도승)시쳤다. 5월 을축에 계란의 사부가 내투하였다. 무인에 10만의 승을 공양(반승)하였다. 동여진의 우나특 오이불 등 30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므로 모두 작과 의물을 사하였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서경유수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양진으로 예부상서겸 중추사를 삼고 이공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서눌로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경진에 좌윤 강윤봉 등 19인에게 전공으로 직 1급을 더하였다. 서북계에 명이 있었다. 임오에 교하기를 「을묘년에 계란이 입구할 때 여러 주 진의 장졸로서 공적이 있는 자는 증급하고 죽은 자는 부증을 우가하라」고 하였다. 계미에 황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신에 서여진의 타억 실불 등 10인이 와서 마 및 갑주를 바치므로 모두 증직하고 물을 사하였다. 6월 을미에 채충순으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술에 서북여진의 가을불 등 30인이 와서 마 및 병장을 바쳤다. 기해에 이공과 주저로 좌우상시를 삼았다. 무신에 처음으로 대자은현화사를 창건하여 써 고비의 명복에 이바지하였다. 경술에 혜성이 나타나니 길이가 4장여나 되었다. 계축에 동여진의 이골이 와 서여진의 제모 등이 내조하였다. 경신에 병부가 주하기를 「장군 양악과 중랑장 함진 등 449인은 모두 변공이 있사오니 직 1급을 더하여 주옵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을해에 구정에서 대초를 지내었다. 정축에 왕자가 연경원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형이라 사하고 원을 고쳐서 궁이라하고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제위원을 수리하였다. 동여진의 오두주 등 3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치므로 의물을 사하였다. 8월 임진에 진함조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9월 무인에 주덕명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정해에 내사시랑 평장사 김심언이 졸하였다. 동여진의 이우불이 내조하매 향직을 증수하였다. 윤징고로 중추사를 삼았다. 교하기를 「사죄을 범한 자는 사죄을 면하여 먼 곳에 장류하고 유죄 이하는 사하라」고 하였다. 동 12월 병오에 우복사 김노현이 졸하였다. (노현은) 일에 근간함으로써 알려져 매양 영조가 있을 때에는 반드시 감독하게 하였다. 정미에 구주의 여진 목사 등 34인에게 견 주 포 50여필을 사하여 포적한 공을 상주었다. 무신에 내사시랑 평장사 강감찬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신해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동서여진의 추장 염지거이나 서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 및 갑주 병장을 바치매 모두 의물을 사하였다. 이 달에 예빈소경 원영을 계란에 보내어 청화하였다. 송의 천희년호를 행하였다. 11월 계해에 보신이 혜성이 이미 멸하였으므로 상표하여 정전에 나아가고 상선을 복구하도록 청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병인에 전인보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한빈경으로 시강학사를 삼았다. 우산국이 동북여진의 침구를 입어 농업을 폐하므로 이원구를 보내어 농기를 사하였다. 12월 신묘에 동북여진의 아차오 을불 소손녕이 군사 10만으로 내침하매 왕은 평장사 강감찬으로 상원수를 삼고 대장군 강민첨으로 부원수를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흥화진에 이르러 크게 패북시키니 손녕이 군사를 이끌고 바로 서울로 나아가려 하거늘 민첨이 자주에 추급하여 또 크게 패북시켰다. 신해에 태조의 재궁을 받들어 부아산의 향림사에 옮겨 모셨다. 갑인에 서울을 계엄하였다. 병진에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정사에 혜성이 나타났다.
기미 10년 춘 정월 신유에 소손녕이 신은현에 이르니 서울을 상거하기 백리라 왕이 명하여 성외의 민호를 거두어 성내로 들어오게 하고 들을 비워(청야)서 기다리게 하니 손녕이 야율호덕을 보내어 서장을 가지고 통덕문에 이르러 회군한다고 고하고 가만히 척후병 200여기를 보내어 금교역에 이르거늘 우리 측에서는 군사 100명을 보내어 밤을 타 엄살하였다. 병자에 동여진의 추장 우나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기축 삭에 난병이 구주를 통과할 새 감찬 등이 맞어 싸워 크게 패북시키니 생환자가 겨우 수천인이었다. 임진에 우복사 전보인이 졸하였다. (보인은) 명경출신으로 여러번 학관에 제수되니 시인이 숙유라고 칭하였으나 성품이 경조하였다. 갑오에 강감찬이 개선하니 왕이 친히 영파역에서 맞이하였다. 임자에 장수를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아울러 3군을 위로하였다. 3월 무오 삭에 일식하였다. 신유에 상서좌복사 문인위가 졸하였다. 계해에 통주도부서 유백부 등 173인이 역전하다가 전사하였으므로 관을 추증하고 그 집에 미맥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라고 명하였다. 갑자에 이응보로 우복사를 삼고 강민첨으로 응양상장군주국을 삼고 유참으로 예빈경을 삼고 김종현으로 예부원외랑을 삼았다. 무진에 철리국주 나사의 사인 아로태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갑신에 여수하고 경죄(경계)는 소결(소통정리)하였다. 하 4월 계묘에 신사에 비를 빌었다. 병진에 진명선병도부서 장위남 등이 해적 8소를 잡아 적이 약취한 일본 생구 남녀 259인은 공역령 정자량을 보내어 그 나라에 압송토록 하였다. 5월 병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진에 계란 동경의 문적원소감 오장공이 와서 알견하였다. 신사에 가뭄으로 여수하였다. 임오에 사신을 철리국에 보내어 보빙하였다. 6월 병술 삭에 동여진의 추장 나사불 등이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무자에 나민으로 상서예부시랑겸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추 7월 신유에 이응보 이원으로 좌우복사를 삼았다. 기사에 송 천주의 진문궤 등 10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오에 서여진의 추장 아라불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마를 바쳤다. 임신에 송 복주의 우선 등 100여인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기묘에 우산국 민호로서 일찍이 여진에게 노략이 되어 내분한 자를 모두 돌아가게 하였다. 8월 기축에 예빈경 최원신과 이수화를 송에 보내어 하정하였다. 신묘에 계란의 동경사 공부소경 고응수가 왔다. 을미에 고공원외랑 이인택을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을사에 문하시중 유진이 졸하였다. 임자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니 계직을 더 주었다. 9월 갑인 삭에 태사가 일식을 주하였으나 음운으로 보이지 않았다. 을묘에 수창궁으로 이어하였다. 임술에 중양절(9월9일)이므로 송 및 탐라 흑수 제국인에게 저관에서 사연하였다. 동 10월 갑신 삭에 유소로 사헌중승을 삼았다. 갑오에 양절(중국의 절동 절서)의 망난 등 60인이 왔다 11월 계축 삭에 강감찬으로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를 삼았다. 경신에 강남 주 현의 정호를 옮겨 써 상산 이천 수안 신은 협계 우봉 등 현을 채웠다. 신사에 태조 재궁을 받들어 다시 현릉에 장사하였다. 12월 계미 삭에 왕자가 안복궁에서 나매 이름을 서라 사하고 궁호를 고쳐 연덕이라 하였으며 인하여 예물을 사하였다. 경인에 동흑수국 추장 구돌라가 와서 토마와 병장을 바쳤다. 임진에 대한이므로 옥수을 소결하였다. 정유에 최사위로 청하현 개국남을 삼았다. 무술에강민첨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갑진에 유방으로 천승현 개국남을 삼고 채충순으로 제양현 개국남을 삼았다. 병오에 현릉에 배알하였다. 신해에 혜성이 나타났다.
경신 11년 춘 정월 계해에 진함조로 우복사겸 도정사를 삼고 최원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이가도로 상서우승을 삼고 이수화로 기거랑을 삼고 최충으로 기거사인을 삼고 이작충으로 우보궐을 삼았다. 병인에 흑수말갈 알시경 고지문 등 24인이 와서 토물(방물)을 바쳤다. 신미에 박유인 김가로 좌우습유를 삼았다. 서여진의 추장 고두화가 와서 방물을 바쳤다. 2월 무자에 수안현의 대정 혁연과 군사 이증과 군사 시음달이 전사하였으므로 처자에게 화물을 우사하였다. 기축에 전고부령인 사유한과 그 아들이 번인에게 납치되었다가 도망쳐 돌아왔으므로 왕이 그 노고를 생각하여 특히 관직을 가하고 의량을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의 검불라 등 7인이 와서 계란관인 1과와 토마를 바쳤다. 갑진에 문하시랑 진적 이예균과 내사시랑 왕동영과 사재경 윤여와 장작소감 왕좌섬과 소부승 김덕화와 장작주부 김징호와 인의감 김득굉이 계란에 억류되었으므로 그들의 처에게 각기 미곡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좌섬의 처는 개성군군을 봉하고 아들 이보에게는 예부주사를 제수하였다. 기유에 송의 천주인 회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이 달에 이작인을 보내어 표를 받들고 계란에 가 번을 칭하고 공바치기를 종전대로 할 것을 청하게 하고 또 구금한 사람 지자리를 돌려보내었는데 지자리는 억류된지 무릇 6연이 되었다. 3월 계축에 계란사신 야율행평을 돌려보내었다. 기미에 계란사신 검교사도 한소옹이 왔다. 신유에 강민첨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갑자에 여진의 귀덕장군 불나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정묘에 장군 팽홍패 등 10인은 변공이 있음으로 모두 1급을 더하였다. 특히 고장군 정신용 집에 곡 300석을 사하였다. 하 4월 경자에 왕이 임간하여 문하시랑 최사위와 지중추사 강민첨을 보내어 아들 흠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수사도겸 내사령 상주국 숭인광효보운공신을 삼고 연경군으로 봉하였다. 계묘에 문무상참 이상관을 명복전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예부상서 양진과 형부시랑 한거화를 계란에 보내어 왕자 책봉함을 고하고자 할 새 재신 유방 등이 간지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기유에 동여진의 추장 달노가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번미 300석을 바쳤다. 5월 신해 삭에 사자좌 100을 내정에 설하고 인왕경을 3일동안 강하였다. 정사에 윤징고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에 명복전에 복시하고 이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흑수말갈의 오두나 등 7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경진에 최원신 이수화가 봉사에 오욕이 있으므로 모두 귀양보냈다. 안홍점으로 사헌잡단을 삼았다. 6월에 서북계에 황이 있었다. 계사에 지서사 차사재소경 노집중을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기해에 불나국 추장 사가문이 여진의 노울달을 보내어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을축에 오래 가물음으로 여수하니 계유에 큰 비가 왔다. 8월 병술에 왕이 안서도 둔전 1240결을 현화사에 시납하매 양성이 재삼 논박하였으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해에 신라 집사성시랑 최치원을 내사령으로 추증하여 선성의 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경자에 대내를 중수하므로 수창궁에 이어하였다. 9월 정사에 군신을 관인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가서 친히 새로 만든 종을 치고 또 군료들로 하여금 치게 하고 각기 의물과 필단을 희사하게 하였다. 동 10월 기축에 현화사 승 법경으로 왕사를 삼았다. 윤 12월 경술에 이현재로 전중시어사헌을 삼았다. 계해에 연주에 지진하였다. 이 해에 최제안을 계란에 보내어 천령절을 하하고 김맹을 송에 보냈다.
신유 12년 춘 정월 경진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기축에 계란 동경사 좌상시 왕도충이 와서 그 임금이 장차 책례를 받는다고 고하였다. 을사에 자신전을 고쳐 경덕전이라 하고 토양궁을 정양궁이라 하고 좌우조천문을 조종이라 하고 유원문을 숭복이라고 하였다. 이 달에 흑수말갈 추장 아두타불 등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2월 정미에 계란의 검교사공 어사대부 요거신이 내빙하였다. 신해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계유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마저개가 무리를 거느리고 내조하였다. 갑술에 서울의 남녀 90세 이상된 자에게 주식 다약 포백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3월 임오에 유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주덕명으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김현섭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박눌암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서눌로 국자제주 지리부사를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의 모일라 나홀라 등이 와서 토마와 초서피를 바쳤다. 계사에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어 전과 같이 귀부할 것을 표청하였다. 을미에 계란 동경사 검교산기상시 장징악이 내빙하였다. 병신에 현화사 북산이 무너져 옥박이 출토되었다. 문공전을 고쳐 문덕전이라고 하였다. 하 4월 기사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3일간 강하였다. 경오에 비를 빌었다. 5월 경진에 토룡을 남성 뜰에 만들고 무격을 모아 비를 빌었다. 병술에 여수하였다. 무자에 상서좌승 이가도에게 명하여 경주에 가서 고선사 금라가사와 불정골과 창림사의 불아를 가져오게하여 모두 내전에 두었다. 무인에 비가 왔다. 6월 정묘에 장영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주저로 한림학사승지를 삼았다. 한조를 송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추 7월 갑술 삭에 일식하였다. 병자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계사에 동여진의 흑수 추장 거울마두개가 왔다. 계묘에 명경전을 고쳐 선정이라 하고 영은전을 명경이라 하고 경덕전을 연영이라고 하였다. 8월 신해에 김인위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기미에 왕이 현화사에 나아가서 친히 비액을 전하였는데 일찍이 한림학사 주저에게 비문을 짓게 하고 참지정사 채충순에게 비음을 짓게 하고 아울러 글씨를 쓰게 하였던 것이다. 무진에 왕자가 연덕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기라고 사하였다. 신미에 왕자 흠에게 호국공신호를 가사하고 최사위로 검교태사 수문하시중을 삼고 최항으로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고 유방으로 검교태보를 삼고 채충순 윤징고로 모두 검교태위를 삼았다. 임신에 관인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의 실빈 아리고가 내조하였다. 9월 계유 삭에 이공으로 중추사 검교사공을 삼았다. 을미에 흑수말갈의 소물개 고지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중추사 이공과 병부시랑 유종을 계란에 보내어 수책을 하하였다. 동 10월 기유에 이주헌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묘에 동서여진의 추장 아로대와 아개 등이 내조하였다. 11월 계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강민첨이 졸하였다. 12월 을사에 중추사 우산기상시 윤징고가 졸하였다. 무오에 최사위로 판상서이부사를 삼고 김맹으로 이부시랑을 삼았다.
임술 13년 춘 정월 정축에 곽원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작인으로 동지중추사를 삼고 김맹으로 권지중추사를 삼았다. 정해에 흑수 추장 사일라와 만투불 등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신라 한림 설청을 홍유후로 추증하고 선성묘정에 종사하게 하였다. 정유에 유징필로 한림학사비서감을 삼았다. 2월 신축 삭에 서여진의 저라가 와 인구(생구)와 방물을 바쳤다. 임인에 이공으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군기소감 김인유를 계란에 보내어 춘계간후를 하였다. 임자에 계란의 맹유 연거 등 4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궁성동북랑 150여간이 불탔다. 정묘에 참지정사 박충숙과 국자 사업 이경을 계란에 보냈다. 3월 계유에 이가도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을해에 상서우복사 이주헌이 졸하였다. 하 4월에 계란이 어사대부 상장군 소회례 등을 보내 와 왕을 책하여 개부의동삼사 수상서령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1만호 식실봉 1천호로 하고 인하여 차복 의물을 사하니 이로부터 다시 계란의 연호를 행하였다. 정묘에 채충순으로 내사시랑 평장사겸 서경유수를 삼았다. 5월 경오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해에 명주에서 상언하기를 은광이 정선현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병자에 한조가 송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송제가 성혜방 음양2택서 건흥력 석전1장을 사하였다. 계사에 아들 연경군 흠을 책하여 왕태자로 삼았다. 흑수말갈의 소의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6월 경자에 아들 형을 책하여 평양군을 삼았다. 계묘에 아들 서를 책하여 악랑군을 삼았다. 을사에 유방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았다. 임자에 동궁 관속을 두었다. 무진에 연덕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추 7월 병자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우산국민으로 여진의 노략을 입어 도망하여온 자는 예주에 두고 관에서 자량을 급여하여 아주 편호를 삼으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동서여진 아라대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경자에 계란 동경의 지례사 이극방이 와서 말하기를 「지금으로부터 춘하계문후사를 한 번씩만 보내되 천령절하례사와 정단사와 동행하도록 하고 추동계문후사도 한 번씩 보내되 태후생진하례사와 동행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송의 복주인 진상중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철리국의 수령 나사가 흑수의 아부한을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신유에 광남인 진문수 등이 와서 향약을 바쳤다. 갑자에 국자제주 서눌의 딸을 맞이하여 숙비를 삼았다. 9월 기사에 서울에 남녀의 나이 80 이상된 자와 독 폐질자에게 주식과 다포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계란 동경사 왕수영이 왔다. 계미에 도관랑중 윤종원을 계란에 보내어 태후생진을 하하였다. 정해에 좌산기상시 곽원과 상서우승 왕서를 계란에 보냈다. 무자에 계란의 수우매 오어을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동 10월 경술에 여수하였다. 을묘에 연경궁주 김씨를 책하여 왕비를 삼았다. 임우가 그치지 않으므로 군망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기미에 서눌로 중추사 우산기상시를 삼고 이가도로 중추사 국자제주를 삼고 한조와 유소로 좌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유에 주저로 예부상서를 삼고 이작인으로 사헌대부를 삼고 김맹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11월 을유에 계란의 동경사 고장윤이 왔다. 12월 신축에 계란의 불대 등 11인이 내투하였다. 계축에 서여진의 어니저가 와 고하기를 「고모가 일찍 투화인 매나를 따라 와서 대국의 서울에 산지 이미 수년이 지났으나 고향(본번)을 생각하고 있사오니 토마로써 속바지 하고자 하나니다」고 하거늘 곧 돌려 보내도록 명하고 그 말(마)도 돌려 주었다. 기미에 동여진의 수령 사빈이 와서 마 및 궁시를 바쳤다.
계해 14년 춘 정월 임신에 재추(재상 추상)를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을해에 채충순으로 태자소사를 삼고 서눌로 참지정사를 삼고 곽원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축에 유방으로 서북면 행영도통사를 삼았다. 무인에 계란인 초복 등 11호가 내투하였다. 임오에 진함조와 주덕명으로 상서좌우복사를 삼았다. 이 달에 흑수말갈의 오사불 등 80인이 와서 마와 방물을 바치거늘 각각 포백을 사하였다. 2월 무술에 이공으로 서경유수를 삼았다. 병오에 최치원을 추봉하여 문창후라 하였다. 동여진 추장 아로불과 서여진의 나알개가 내투하였다. 3월 정묘에 비서감 유징필을 계란에 보냈다. 하 4월 경자에 계란이 좌산기상시 무백 야율극공 등을 보내와 태자 흠을 책봉하여 보국대장군 검교태사 수태보겸 시중 고려국공으로 삼았다. 이 달에 여진 말갈 군두 등 7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5월 병인에 계란의 동경지서사 노지상이 왔다. 을해에 금주에 지진하였는데 처음으로 지진이 일어난 곳에 해괴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정축에 계란 마허저 등 13호가 내투하였다. 무자에 문무참내의 군료들을 천복전에서 향연하고 사람마다 말 한 필씩 사하였다. 임진에 계란의 대세노 제화나 등 8인이 내투하였다. 여진의 이우불이 내투하였다. 6월 무술에 한재로 말미암아 여수하였다. 을사에 천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장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추 7월 계해 삭에 계란이 태보 황신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기묘에 이부가 주하기를 [전대상재랑 전언이 모상을 추복하여 효로써 알려졌으니 청컨대 차제직을 가하여 장래를 권장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8월 임자에 본궁으로 돌아왔다. 9월 기사에 말갈수령 아령주가 내조하였다. 계유에 구정에서 크게 초제하였다. 병자에 최보성으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기축에 노전으로 삼사사를 삼았다. 윤월 경자에 계란사신 율수상이 내조하였다. 임인에 계란의 동경사 고인수가 왔다. 동 10월 신미에 이주좌로 시어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허원으로 좌습유를 삼았다. 11월 병신에 흑수 추장 야힐라 등이 내조하였다. 송의 천주인 진억이 내투하였다. 12월 정축에 입춘절이므로 재추와 상장군을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묘에 유방으로 태자태보를 삼고 이공으로 내사시랑 평장사 감수국사를 삼고 이원으로 검교태자태보를 삼았다.
갑자 15년 춘 정월 갑인 삭에 곽원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유징필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계란의 마사도 등 3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사에 경흥원주 김씨를 책하여 덕비라 하였다. 3월 신묘에 이자연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오에 서여진의 고두노와 동여진의 슬불달 등 90인이 내투하였다. 신축에 왕희걸로 서경부유수를 삼았다. 하 4월 기묘에 군묘에 비를 빌었다. 임오에 흑수말갈의 고도매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정해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계사에 비가 왔다. 봄부터 가뭄이 심하매 백성들이 모여 하늘에 부르짖어 기도하더니 이날 새벽에 왕께서 일어나 그 소리를 듣고 곧 식사를 거두고 목욕재계하고 분향하며 전정에 서서 하늘을 우러러 빌기를 [과인에게 허물이 있거든 청컨대 곧 벌을 나리시고 백성에게 잘못이 있다 하더라도 과인이 또한 당하겠사오니 바라건대 은택을 나리사 백성을 구하여 주시옵소서]하더니 크게 비가 내렸다. 경자에 동여진의 회화장군 아알나가 내조하였다. 경술에 예부상서 주저가 졸하였다. 6월 신유에 문하시랑 평장사 최항이 졸하였다. 추 7월 병술 삭에 계란이 검교사도 고수를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임진에 서여진 추장 도라와 동여진의 노을견 등이 와서 말을 바쳤다. 을사에 서눌로 서북면 행영도통을 삼고 곽원으로 그 부(부도통)를 삼았다. 임자에 탐라 추장 주물과 아들 고몰로 모두 운휘대장군 호군을 삼았다. 9월 을미에 김인위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인하여 치사하게 하였다. 갑인에 흑수말갈의 아리고가 왔다. 이 달에 대식국(아라비아제국)의 열라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대식국은 서역에 있음) 동 10월 병진에 계란이 검교좌복사 이정윤을 보내왔다. 11월 을유 삭에 태사국이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경인에 이공으로 상서좌복사 동내사문하 평장사를 삼았다. 병오에 이가도로 호부상서를 삼았다. 기유에 상주에 지진하였다. 12월 임신에 황주량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최충으로 중추직학사를 삼고 이인택으로 시어사를 삼고 최상여로 전중시어사를 삼았다.
을축 16년 춘 정월 경인에 여진회화장군 야고가와 귀덕장군 아골타로 등이 내조하매 각각 작위와 의류를 사하였다. 을미에 유방으로 판상서 병부사를 삼고 채충순으로 판상서 예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피위종 등 6인을 사하여 복작하게 하였다. 처음에 위종이 병부랑중으로 있었을 때 요외에 순행하다가 계란장군 야율살할의 사냥함을 보고 예빈주부 정민의 등 5인과 더불어 달려가 죽이고 돌아와서 그것으로써 공상을 받을려고 하매 소사가 병사를 함부로 움직여 새에 나갔다는 이유로 원방에 유배하였던 것인데 이에 이르러 방환된 것이다. 신해에 여진 추장 모일라가 내조하매 변경에 공로가 있으므로 대광을 가수고 의물을 우사하였다. 2월 무진에 곽원으로 추성문리공신 상주국을 삼고 이가도로 치성공신을 삼고 김맹으로 선춘현 개국남을 삼고 나민으로 치군문덕공신을 삼고 유소로 동지중추사를 삼았다. 임오에 한식으로써 문무상참 이상관을 내전에서 향연하였다. 3월 기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경인에 모든 영작을 정지하고 농민들을 방환하였다. 갑인에 연경궁주 김씨가 졸하였다. 하 4월 갑자에 교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한참인 때에 가물음이 심하여 백성의 식량이 핍절될까 하노니 나의 소우의 걱정이로다. 마땅히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며 도재를 금하고 악현을 거두며 원옥을 심사하고 군망에 기도할 것이다. 이는 오직 과인만이 깊이 책궁해야 할 일이 아니라 모든 백관들도 또한 마땅히 스스로 힘 쓸 지어다]라고 하였다. 신미에 영남도의 광평 하빈 등 10현에 지진하였고 임신 을해에 또 지진하였다. 6월 갑인에 궁인 유씨로 귀비를 삼았다. 기미에 교하기를 [하늘에 본받고 때에 순응한 연후에 가히 재앙을 막고 화평을 이룩할 것이어늘 이제 내사문하성 및 제관사들의 주행하는 바가 시정에 어그러짐이 많으니 음양의 조화를 바람이 어찌 그릇됨이 아닐까. 마땅히 각자가 마음을 다하여 힘써 월령을 지켜 써 나의 듯에 맞도록 하라]고 하였다. 추 7월 신사 삭에 계란이 감문위대장군 한순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을유에 한수량으로 시어사를 삼고 김충찬 유백인으로 모두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석지 한연조 최연가 김영기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정해에 경상 청주 안동 밀성에 지진하였다. 정미에 유소로 태자빈객을 삼았다. 9월 신사에 대식만의 하선 나자 등 10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기묘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 [마땅히 일식할 것인데 하지 않았다]고 하니 군신이 표하하였다. 12월 무오에 최충으로 한림학사 내사사인 지제선를 삼았다. 교하기를 [무릇 범죄로 직전을 압수 당한 자에게 사를 입게 하되 진도 및 공사문서를 위조한 자 재물을 받고 법을 굽힌 자 감임하면서 자신이 도둑질한 자 첨곡간아한 자의 범죄를 제한 외에는 다 직전의 환급을 허하라]고 하였다.
병인 17년 춘 정월 정해에 이단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임진에 동여진 귀덕장군 거려울 등이 내조하였다. 2월 계해에 계란이 태빙 이지순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을축에 백기가 관일하였다. 3월 경인에 최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경오에 지채문으로 우복사를 삼았다. 윤 5월 임자에 동서여진 추장이 각각 부락자제들을 거느리고 와서 토마와 궁노를 바쳤다. 갑자에 계란이 어원판관 야율골타를 보내와 길을 빌려 장차 동북여진으로 가기를 청하거늘 허낙하지 아니하였다. 6월 무인에 이단으로 우상시지중추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추 7월 갑인 삭에 계란이 감문위대장군 왕문간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미에 큰 비가 4일간 내리니 경성민가의 표훼된 자가 심히 많았다. 8월 임오에 송 광남인 이문통 등 3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갑자에 해주 신광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계유 삭에 일식하였다. 임오에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에 황주량으로 태자소첨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중윤을 삼았다.
정묘 18년 춘 정월 신해에 최사위로 태자태사를 삼고 채충순 이공으로 모두 문하시랑을 삼고 서눌로 내사시랑을 삼고 곽원 이가도로 모두 참지정사를 삼고 이단 김맹으로 모두 중추사를 삼고 양진으로 좌복사를 삼고 최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임자에 동여진 추장 창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병인에 문하시랑 유방이 표를 올려 걸해하거늘 허락하고 특진문하시중을 가하였다. 무진에 계란이 이정윤을 보내왔다. 2월 무자에 대묘를 수리하고 다시 신주를 봉안하였다. 갑오에 흑수말갈 귀덕대장군 아골아가가 와서 토마와 기장을 바쳤다. 3월 을묘에 여진 수령 슬불달 등 100인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오에 대묘에 배알하고 선왕선후에게 존호를 가상하고 배현경 홍유 복지겸 신숭겸 유검필 최응을 태조에 배향하고 박술희 김견술을 혜종에 배향하고 왕식렴을 정종에 배향하고 유신성 서필을 광종에 배향하고 최지몽 박량유를 경종에 배향하고 최승로 최량 이지백 서희 이몽유를 성종에 배향하고 한언공 김승조 최숙을 목종에 배향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였다. 5월 경자 삭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갑인에 한재로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감하고 옥수를 소결하였다. 을묘에 두 번째 우제(기우제)를 지냈다. 정사에 공주에 서리가 내려 묘를 살하였다. 경신에 왕자 형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겸 내사령으로 삼고 서를 개부의동삼사 검교태부겸 상서령으로 삼았다. 병인에 비가 내렸다. 6월 기묘에 황주량으로 형부시랑을 삼고 이주좌로 기거사인을 삼고 허원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유량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응년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미에 양주가 주하기를 [장의 삼천 청연 등의 사승들이 금을 범하여 양주한 쌀이 합계 360여석이오니 청컨대 의율 단죄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갑신에 교하기를 [전 공부시랑 유품렴 등 143인이 비록 첨곡간사의 죄를 범하였으나 이미 누차의 사를 거쳤으니 모두 죄명을 삭제하고 서용할 것이다]고 하였다. 탐라(제주)가 방물을 바쳤다. 신묘에 동여진 추장 모일라 등 20여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해 삭에 계란이 태부 이광일 야율호도곤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경자에 영광군에서 산호수를 바치니 높이는 8척이요 가지는 81이었다. 계해에 송악이 무너졌다. 8월 무진에 계란의 동경사 고연이 왔다. 정해에 송의 강남인 이문통 등이 와서 서책을 바치니 무릇 597권이었다. 9월 무술 삭에 혜일중광사를 창건할 것을 명하고 인부와 공장을 징발하게 하니 보신 간관들이 모두 주하기를 [백성들이 노폐하니 공사를 이르킴이 적선치 못하오이다]고 하였으나 좌승선 이괴가 홀로 주하기를 [부처님을 위하여 절을 지으면 공덕이 무량한 것이오니 백성들을 수고롭게 한들 무엇이 해로우리까]라고 하였다. 임술에 곽숭원 이능봉이 연고자임으로 모두 장군을 삼았다. 동 10월 임오에 인왕경을 구정에서 강하였다.
무진 19년 춘 정월 무술에 임유간으로 우습유제고겸 동궁시독학사를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귀덕장군 고두 등 70여인이 내조하고 또 골부가 부락 500호를 거느리고 내부하였다. 2월 신미에 검교우복사 김경렴이 졸하였다. 경렴은 큰 글씨 잘 쓰기로 당대에 유명하였다. 갑술에 예부원외랑 김가를 계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해에 경계(경죄의 옥수)를 방면하였다. 계사에 대부경 김작빈을 계란에 보냈다. 3월 기해에 경계를 방면하였다. 기미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정재원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유에 계란이 장군 야율소와 방주방어사 양연미 등을 보내어 내빙하였다. 이 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골이 왔다. 하 4월 신미에 우박이 내렸다. 5월 신축에 여진이 평해군을 침공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는데 적선 4척을 추포하여 모두 죽였다. 6월 기사에 비가 심하므로 군묘에 비 개이기를 빌었다. 윤월 갑인에 북번 추장 아홀 등 57인이 내부하였다. 추 7월 을미에 계란이 심주자사 소경과 박주자사 부용원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쾌발부락 300여호가 내부하였다. 을묘에 왕비 김씨가 훙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추장 이오불 두로개 등 20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8월에 서북계에 황해가 있었다. 9월 병신에 송의 천주인 이선 등 3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신에 좌사랑중 임복을 계란에 보내어 황후의 생진을 하하였다. 동 10월 계유에 상서우승 정장을 계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정해에 동여진 적선 15척이 고성에 입구하고 기축에 용진진을 침공하여 중랑장 박흥언 등 70여인이 사로잡혔다. 11월 계묘에 대복경 왕희걸 전중시어사 이유량을 계란에 보내어 생진을 하하였다. 12월 임진에 동여진 사일라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기사 20년 춘 정월 계사에 천추태후 황보씨가 숭덕궁에서 훙하였다. 2월 경진에 궁인 한씨의 부빈경으로 태자빈객 동지중추사 주국을 겸하게 하였다. 정해에 왕의 이름(순)과 상근한 음을 피휘하여 순성을 고쳐 손으로 하였다. 윤월 기해에 여진의 적선 30여척이 동비에 내침하거늘 선병도부서판관 조윤정이 쳐서 쫓아버렸다. 이 달에 동서여진 아홀사 일라골개 등 100여인이 와서 토마와 병기를 바치거늘 작 1급씩을 더하였다. 3월 경오에 오관산이 무너졌다. 경진에 동여진 적선 10소가 명주에 입구하거늘 병마판관 김후가 쳐서 물리쳤다. 하 4월 무술에 왕자 형에게 곡2000석 전 300결 장획(노비) 30구를 사하였다. 경자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10000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경술에 계란이 대장군 야율연 영해북주자사 장령의를 보내어 내빙하였다. 계란인 조기이 가족을 거느리고 내분하여 왔다. 을묘에 왕이 대묘의 변두를 증설할 것을 의논할새 예부가 왕제의 [풍년에 사치하지 않고 흉년에 검약하지 않는다.]는 뜻에 의거하여 굳이 불가하다 하므로 이를 중지하였다. 5월 을축에 동여진 400여인이 동산현에 침구하였다. 6월 계축에 탐라세자 고오노가 내조하거늘 유격장군을 제수하고 포 1습을 사하였다. 광주 산수에 도적이 일어났으므로 을묘에 용호군 장교를 보내어 잡게 하였다. 병진에 유처승을 징발하여 중광사 역도에 충당하였다. 추 7월 무오 삭에 계란이 장군 야율관녕과 숭록소경 이가봉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문희현에서 수정과 옥박 40000여매가 나왔다. 을유에 탐라인 정일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처음 정일 등 21인이 항해중 바람에 밀리어 동남 극원도에 표착하니 도인들은 장대하고 전신에 털이 나고 언어가 다른데 7개월동안 억류를 당하였다. 정일 등 7인이 가만히 소선을 타고 동북으로 일본 나사부(장기)에 이르렀다가 이에 생환하게 된 것이다. 8월 정해 삭에 일식하였다. 을미에 동여진 대상 쾌발이 그 족속 300여호를 거느리고 내투하거늘 발해의 고성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기해에 송 광남인 장문보 등 8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묘에 왕이 서으로 순행할새 경술에 평주에 이르고 갑인에 백주에 이르렀다. 이 달에 개경 나성이 이룩되니 무릇 21연만에 준공하였다. 9월 무오에 계란의 동경장군 대연림이 대부승 고길덕을 보내와 건국을 고하고 겸하여 구원을 청하였다. 연림은 발해 시조 대조영의 7대손으로서 계란에 배반하여 국호를 흥료라 하고 건원하여 천흥이라고 하였다. 갑자에 염주로 옮겨 행차할새 노상에서 중양영국시 1수를 지어 한림학사 이하에게 선시하고 곧 화진토록 하였다. 정묘에 드디어 해주에 행차할새 지나는 바 주 현의 기노(60이상의 노인)와 독질자에게 주식 포화를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장리에게는 직 1급을 가하였다. 을해에 교하기를 [근간 들으매 궁원 소속의 장호에 요역이 번중하여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다 하니 전중성은 조사하여 구휼하라]하였다. 정축에 호종문무상참관 이상에게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동 10월 갑오에 왕이 해주로부터 돌아왔다. 11월 경신에 박종검을 예빈경좌간의대부로 삼았다. 병인에 개경라성 및 중광사조성도감원리에게 직 1급을 사하였다. 평장사 서눌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상서좌복사 이단으로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국자제주 한림학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이작충으로 급사중을 삼았다. 정묘에 이가도로 검교대위행이부상서겸 태자소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진에 형부상서 참지정사 곽원이 졸하였다. 경오에 광종의 궁인 김씨에게 현비를 증하였다. 갑신에 동여진의 구두 등 30여인이 내조하였다. 12월 경인에 뇌진하였다. 흥료국 대사 대연정이 동북여진을 끌고 계란과 서로 싸울새 사자를 보내 구수을 빌거늘 왕이 허락하지 아니하였더니 이로부터 길이 막혀 계란과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임진에 서북면 판병마사 유소를 명하여 진에 나아가 써 흥료에 대비하게 하였다.
경오 21년 춘 정월 정사에 동여진 오을나 등 5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병인에 흥료국이 또 수부원외랑 고길덕을 보내어 상표하고 군사를 청하였다. 2월 병술에 채충순으로 판서경유수사를 삼고 이작인으로 참지정사를 삼고 유소로 중추사를 삼았다. 갑오에 교주 익령동산현에 지진하였다. 을미에 동여진의 모일라가 와서 토마를 바쳤다. 신축에 적경궁주가 졸하거늘 익을 효혜라 하고 평릉에 장하였다. 3월 계유에 곽신으로 우승선을 삼고 최연수로 고공랑중겸 어사잡단을 삼고 유운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하 4월 을유에 교하기를 [상년 12월이 송력에는 대진(30일)이 되어 있는데 아국태사의 올린 역에는 소진(29일)이 되어 있고 또 금년 정월 15일에는 주하기를 일식하리라고 하였는데 마침내 하지 않았다. 이는 반드시 술가가 미정한 소치이니 어사대는 추국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무자에 동여진의 만투 등 60여인이 와서 과선 4소와 고시 117600개를 바쳤다. 갑오에 문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최유선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기해에 철리국주 나사가 여진 계타한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치고 역일을 청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5월 갑인에 김맹으로 태자소부를 삼고 유징필로 태자빈객을 삼고 황주량으로 태자우서자를 삼고 최충으로 태자우론덕을 삼았다. 을묘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소물개 등이 와서 마 9필 과선 3소 고시 58600개와 기장을 바쳤다. 을축에 계란의 수군지휘사 호기위 대도 이경 등 6인이 내투하니 이로부터 계란 발해인의 내투함이 심히 많아졌다. 신미에 강감찬에게 문하시중을 가하였다. 6월 신묘에 수사 2죄를 특사하여 먼 곳에 유배하고 그 나머지는 다 면죄하게 하였다. 나성을 쌓고 중광사를 경영한 원리 승속공장에게는 모두 관계 직위를 가하고 부역자에게는 금년의 조포를 감하고 모든 주 군 현의 포흠된 세금은 무진년에 한해서 면제하게 하고 인주 위원 정융진에 성을 쌓은 자 및 서순에 호종하여 공로가 있는 자에게는 차제직을 가하고 백신 에게는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추 7월 갑자에 적경공주가 졸하였다. 을축에 흥료국 행영도부서 유충정이 영주자사 대경한을 보내어 표문을 가지고 와 수조를 빌었다. 기사에 송의 천주인 노준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무인에 내사시랑 진함조가 졸하였다. 함조는 술수를 닦아 매양 국가 유사시에는 문득 도참으로써 질정하여 드디어 대용에 이르렀으므로 시론이 이를 경히 여겼다. 8월 무신에 왕가도로 내사시랑 판삼사사를 삼고 이주좌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9월 신해 삭에 탐라가 방물을 바쳤다. 병진에 흥료국 영주자사 이광록이 와서 급함을 고하였는데 이윽고 나라가 멸망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머물러 돌아가지 아니하였다. 갑술에 김가를 계란에 보내어 동경의 수복을 하하였다. 을해에 계란이 천우장군 나한노를 보내오니 조에 말하기를 [요사이 사인들이 왕래하지 않음은 응당 길이 막힌 까닭이리라. 이제는 발해의 투주(위주)가 다 위폐를 당하여 이미 귀강하였으니 마땅히 배신을 보내어 속히 부국케 하면 반드시 염려는 없으리라]고 하였다. 동 10월 신사 삭에 한조를 지서경유수사로 삼았다. 이 달에 계란의 해가와 발해인 500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주군에 살게 하였다. 11월 을축에 서여진의 만투 등 27호가 내부하거늘 동계에 살게 하였다. 계유에 어사잡단 최연수가 탄주하기를 [참지정사 이작인이 태조공신의 후예라고 사칭하고 그 아들에게 음직을 내리게 하였으니 관직을 파면시키소서]라고 하였다. 12월 신묘에 서눌로 문하시랑 동평장사 판상서 이부사를 삼았다. 정유에 중추사 김맹이 졸하였다. 계묘에 최제안으로 중추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이 달에 동여진 영새장군 목사아골 유원장군 알나 귀덕장군 아개주가 와서 마 및 철갑 호시를 바쳤다. 경성에 역질이 돌아 사람이 많이 죽었다.
신미 22년 춘 정월 신유에 동여진의 이우불이 와서 마 및 기장을 바쳤다. 을해에 적전을 친경하고 유죄 이하를 사하고 원구와 방택에 승단집례하는 이원 및 효자 순손 의부 절부 기노 독질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병자에 좌복사 양진으로 동경유수사를 삼았다. 2월 기묘에 문무상참관 이상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기축에 왕자 기를 수태위겸 상서령 개성국공으로 책봉하였다. 이 달에 동서여진 8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갑인에 궁인 한씨로 상궁을 삼고 김씨로 상침을 함고 한씨로 상식을 삼고 서씨로 상침을 삼았다. 이 달에 여진의 사일라 등 40여인이 와서 토마를 바쳤다. 계란 발해민 40여인이 내투하였다. 하 4월 정해에 서리가 내렸다. 무자에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사에 왕이 불예하였다. 좌복사 이단으로 참지정사를 삼았다. 5월 임자에 유소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중추사를 삼았다. 정사에 최사위로 내사령을 삼아 인하여 치사하게 하고 이공으로 사공좌복사 판동경유수사를 삼았다. 무오에 공죄로서의 도형 이하를 사하였다. 정묘에 왕림으로 검교우복사 나주목사를 삼았다. 신미에 왕의 병환이 위독하매 태자 흠을 불러 후사를 부탁하고 이윽고 중광전에서 붕어하니 수가 40이요 재위 22년이었다. 왕이 어려서 총오 인혜하더니 장성함에 미쳐 학문에 민첩하고 서도에 정묘하고 사한을 좋아하여 무릇 한 번 듣고 본 것은 다시 잊지 않았다. 시호를 원문이라 하고 묘호를 현종이라 하고 송옥의 서록에 장하여 능을 선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대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덕위를 가하고 고종 40년 달사를 가하였다.
사신 최충이 찬하기를 [전에 일컫기를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라 하였거니와 천추태후가 제마음대로 음황하여 가만이 경탈을 도모하매 목종께서 백성의 촉망을 알아차려 천추의 악당을 배제하고 멀리 사명을 달려 써 신기를 전수하여 근본과 기엽을 굳게 하였으니 이른바 하늘이 장차 일어나게 함에 뉘 능히 이것을 폐하리요 라는 말을 어찌 믿지 아니하랴. 그러나 고모의 끼친 화근으로 말미암아 융신(강조)이 반역을 꾸미고 강린이 틈을 타게 되매 경궐이 다 재가 되고 승여가 파천하여 간난비운이 극도에 달하였도다. 반정한 후에 융장과 화호하여 병혁을 쉬고 문덕을 닦으며 부세를 엷게 하고 요역을 가볍게 하며 준량한 인재를 등용하고 정사를 수행함이 공평하여 백성을 안도하게 하니 내외가 안정되고 농상이 자주 등풍하여 주의 성왕 강왕과 한의 문제 경제에 비하여도 또한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제현이 말하기를 [최충의 말은 세상에서 이른바 천명이라 하는 것이다. 구천 은 상담하여 회계의 치욕을 씻었고 소백은 거의 고난을 잊었기 때문에 화를 제인에게 남기었다. 인군이 천명 만 믿고 욕심을 함부로 하고 법도를 어기면 비록 얻었을지라도 반드시 잃는 것이니 이러므로 군자는 치세에도 난을 생각하고 평안할 때에도 위태함을 생각하며 끝을 조심함을 처음과 같이하여 써 천휴를 기다리는 것이니 현종과 같은 이는 이른바 나는 간연함이 없다하리라]고 하였다.
제9대 덕종 (德宗,1031~1034)
자 원량(元良). 시호 경강(敬康). 이름 흠(欽). 현종(顯宗)의 장남으로 모후는 원성태후(元成太后) 김씨(金氏)이다. 1022년(현종 13) 태자로 책봉되고, 1031년에 즉위하였다. 그후 거란(契丹)에 사신을 보내어 거란이 압록강에 가설한 부교(浮橋) 및 보성(保城)을 파괴할 것과 고려인의 송환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자 하정사(賀正使)의 파견을 중지하였다. 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삭주(朔州) ·영인진(寧仁鎭) ·파천(派川)에 축성하였다. 이듬해 8월 평장사(平章事) 유소(柳韶)에게 명하여 압록강구로부터 영원(永遠) 등 14성을 거쳐 동해안의 도련포(都連浦)까지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축성하게 하자 동여진인(東汝眞人)과 거란인들의 투항이 속출하였다. 처음으로 국자감시(國子監試)를 실시하고, 왕가도를 감수국사(監修國史)로, 황주량을 수국사(修國史)로 삼아 현종 때 시작한 국사편찬사업을 완성하였다. 능은 숙릉(肅陵)으로 개성(開城)에 있다. |
덕종 경강대왕의 휘는 흠요 자는 원량이니 현종의 장자로 모는 원성태후 김씨이다. 현종 7년 병진 5월 을사에 탄생하여 21년 연경군에 피봉되고 13년 태자가 되었으며 명년에 거란이 고려국공으로 책봉하고 22년 5월 신미에 현종이 붕어하니 중광전에서 즉위하여 익실(翼室 본채의 좌우 양편에 달린 방)에 기거하면서 조석으로 애임하다가 갑술에 군신을 거느리고 성복(成服 초상이 났을 때 처음으로 상복을 입는 일)하였다.
6월 정축 삭에 서눌로 검교태사를 삼았다. 기묘에 강감찬으로 검교태사시중을 삼았다. 을유에 서여진 영새대장군 아지대 등 27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을미에 동여진장군 대완 사이라 등 58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철리국주 무나사가 약오자 등을 보내와 초서피를 바쳤다. 송의 태주 상객 진유지 등 64인이 왔다. 병신에 현종을 선릉에 장사지냈다. 무술에 왕이 상복을 벗었다. 경자에 경령전에 알현하고 즉위함을 고하였다. 계묘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계간을 구정에 걸고 사를 베풀었다. 추 7월 무신에 보신에게 제도의 진상마를 사하였다. 기유에 유소로 중군병마원사를 삼았다. 경술에 장극맹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홍빈으로 형부상서를 삼고 이유섬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김종현으로 우간의대부를 삼고 황보영으로 어사잡단을 삼고 문사명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손위로 전중승을 삼고 박의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기미에 거란 보애사 공부랑중 남승안이 와서 성종의 죽음을 보고하거늘 조를 현종의 반혼당에서 선포하였다. 신유에 왕이 거란의 보애사를 인접하여 내전에서 거애하였다. 병인에 정유원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정유에 발해의 감문군대도 행랑 등 14인이 내투하였다. 기사에 발해제군판관 고진상 공목 왕광록이 거란으로부터 첩문을 가지고 내투하였다. 거란의 하선왕생진사 야율온덕 조상현이 오매 임신에 반혼당에 전명하였다. 8월 정축에 동여진장군 고어부 등 3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갑신에 제하기를 여진장군 아두한 등 340호가 내투하매 가 철 2주의 땅에 늑유하였으나 아두한은 본래 동번자 항사의 족속이니 마땅히 동번에 견치할지어다]라고 하였다. 임진에 왕가도가 비를 맞이할 것을 청하였다. 계사에 이단으로 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았다. 을미에 시중으로 치사한 강감찬이 졸하였다. 신축에 검교태보 박눌암과 좌복사 주덕명이 졸하매 하룻동안 철조하였다.
9월 병오 삭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유에 황보영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영기로 시어사를 삼고 이자연으로 우보궐을 삼아 비어를 사하고 문재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이경응으로 감찰어사를 삼아 금어를 사하였다. 경술에 노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공부상서를 삼고 허원으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병진에 진현석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오어나 개로 등 6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인에 밀직학사 비서소감 박유인으로 권지좌승선을 삼았다. 기사에 비를 추존하여 왕태후로 삼았다. 신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을해 삭에 서눌로 문하시중을 삼고 왕가도 유소로 모두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정축에 거란의 왕수남 등 19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무인에 재보가 상선회복을 표청하거늘 허락하였다. 경진에 국노를 구정에서 향연할제 악기는 달기만하고 주악은 하지 않았다. 신사에 왕가도의 여를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공부랑중 유교를 거란에 보내어 회장하게 하고 낭중 김행공은 즉위를 하하게 하고 압록강의 성교를 헐고 피유된 우리 사신들을 돌려 보내도록 표청하였다. 을유에 동여진 원보 개로 등 46인이 내조하거늘 작을 더하고 물을 사하였다. 헌대가 주하기를 [상서좌복사판동경유수사 이공이 재물을 횡감하고 또 가노로 하여금 역마를 차승하였으니 법대로 논단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정유에 구정에 행차하여 승 3만을 공양하였다. 계묘에 좌복사 이응보에게 수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수사공을 가하였다. 윤월 기유에 비로소 국간감시를 설하였다. 기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임술에 용흥사에 행차하였다. 갑자에 왕씨를 봉하여 현비로 삼았다. 11월 을해에 동경유수사 호부상서 이작인이 졸하였다. 경인에 유사에게 명하여 제국 내투인에게 의복과 면서를 사하였다. 임인에 동여진장군 모이라가 와서 마를 바치고 또 말하기를 [번지가 벽원하여 회장에 불내하였으니 원컨대 능침을 배알케하여 주소서]하거늘 허락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오두내 등 40여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신축에 김행공이 회보하기를 [거란이 우리의 주한 바를 쫓지 아니하나이다]고 하거늘 드디어 하정사를 정지하고 성종의 태평년호를 그대로 썼다.
임신 원년 춘 정월 신사에 어사대가 탄핵하기를 [대부경 왕희걸 우사랑중 유백인 예부랑중 최복규 원외랑 이응년이 서경에 분사하여 전지를 구하고 재화를 증식하니 청컨대 출면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갑신에 임유간으로 우승선이부랑중을 삼고 김자를 사하였다. 을유에 거란의 유류사가 내원성에 오거늘 받아들이지 않고 드디어 삭주 영인진 파천 등 현에 성을 쌓아 이에 대비하였다. 정해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기축에 왕의 생일인 인수절을 고쳐 응천절이라고 하였다. 정유에 서여진 자곤 등 8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제하기를 [좌복사 이응보에게 사도를 가하고 우복사 김여탁에게 사공을 가하니 그 반열이 참지정사의 하요 중추사의 상에 있는지라 아울러 봉록을 가하라]고 하였다. 발해의 사지 명동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2월 임인 삭에 통주의 진위부위 호장 김거와 별장 수견은 경술(연) 거란병의 내침에 당하여 견벽고수하였고 또 그 대부 마수를 사로잡았으므로 김거에게는 낭장을 가하고 수견에게는 낭장을 증하였다. 정미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발해의 사통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철리국이 사신을 보내와 수호하였다. 임자에 황보유의로 참지정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중추사를 삼았다. 을묘에 연등으로 왕륜사에 행차하였다. 3월 임신 삭에 백가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유에 거란의 전직 고선오와 전전 고진성 등 15인과 좌상도지휘사 대광 보주회화군사판관 최운부 향공진사 이운형 등이 내분하였다. 을해에 박유인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잡단을 삼았다. 계사에 왕가도로 감수국사를 삼고 이단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수국사를 삼고 유징필로 상서좌복사를 삼고 나민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갑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무술에 경술년 이래 전사자의 공을 논하여 반희악에게 소부감을 김연경에게 군기감을 전인영에게 예빈소경을 유백부에게 위위소경을 김양좌에게 소부소감을 양백에게 전중승을 증하였다. 경자에 한재로 말미암아 봉은 중광 양사의 역부들을 놓아 보냈다. 하 4월 임인 삭에 정전을 피하고 상선을 멸하고 도살을 금하고 경계죄인을 역방하였다. 정미에 동여진의 원윤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신에 거란 해가의 내을고 등 28인이 내투하였다. 신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를 행하고 비를 빌었다. 5월 임신에 양음으로 응천절 축하를 정지하였다. 정축에 발해의 살오덕 등 15인이 내투하였다. 계미에 상선을 회복하고 정전에 거동하여 조회를 보았다. 정유에 왕이 황고의 휘진도장으로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신축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오에 경복이므로 써 경죄를 역방하였다. 기유에 서여진 회화장군 이동 등 8인이 내조하거늘 작1급을 더하였다. 신해에 발해의 우음약기 등 12인이 내투하였다. 임자에 동여진 귀덕장군 야어포 등 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인에 왕이 보살계를 응건전에서 받았다. 을묘에 발해의 소을사 등 17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임신에 이예균 등 8인이 거란에 사행하였다가 피유되어 돌아오지 못하였으므로 그 처자에게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을해에 서여진 대상
) 야반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동여진 정조 가이로 회화장군 야반 귀덕장군 개로 원보 고도화 등 91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왕이 황비의 휘진이므로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발해의 고성 등 20인이 내투하였다. 무술에 김종현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8월 임인에 대상 주오가 어미를 구타하였으므로 기시(시장에서 죽이는 것)하였다. 경술에 유종으로 좌산기상시를 삼고 황보영으로 상서우승 지어사대사를 삼고 진현석으로 어사중승을 삼았다. 계축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을묘에 동여진 정보 두어보 등 2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사에 이단으로 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이부상서 참지정사를 삼았다. 무오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승 법경으로 국사를 삼았다. 경신에 동여진의 보윤 대유 등 3인이 내조하였다. 9월 계유에 동여진 대상 야을한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내외죄인를 심사하여 도죄(노역의 형) 이하를 역방하였다. 경인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내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외제역원에 행차하였다. 동 10월 병오에 발해 압사관 이남송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신해에 상주계 10여현에 지진하였다. 임자에 거란 주부 유신사 등 5인이 내분하였다. 병인에 거란의 제을남 등 10인이 내분하였다. 11월 병자에 우릉(울능)성주가 그 아들 부어잉다랑을 보내와 토물을 바쳤다. 서여진 정조 대포 고지문 등 14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신축에 이작충으로 좌간의대부를 삼고 노우 박양명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갑진에 거란의 나골 등 10인이 내투하였다.
계유 2년 춘 정월 신미에 동여진장군 개다한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철리국이 사자를 보내와 양마 초서피를 바치거늘 왕이 갸륵하다하여 회사함을 심히 후하게 하였다. 을해에 송의 유수금 등 14인이 내분하였다. 기묘에 황주량으로 판어사대사를 삼고 최충으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민가거로 예부상서를 삼고 유종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주좌로 우간의대부를 삼았다. 신사에 동여진장군 보기 아어내 등 11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예부상서 나민이 표를 올려 퇴관을 빌었다. 을미에 거란의 구내 등 18인이 내분하였다. 좌우위맹교위 오행 이황 신선입 등이 거란의 병사 7인을 초략하였으므로 직1급씩을 사하였다. 2월 임인에 서여진의 지인 고음파 및 거란의 대사 고성환 등 11인이 와서 토물과 병장을 바쳤다. 기유에 동여진 회화장군 거어울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을묘에 김충찬으로 예빈경지중추원사를 삼았다. 3월 신미에 서여진 장군 이우불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해적이 간성현 백석포에 침구하매 50인을 사로잡아 바쳐왔다. 최희목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거란 해가의 고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강남에 살게 하였다. 하 4월 무술에 발해 수을분 등 18인이 내투하였다. 기해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어부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발해 가수 등 3인이 내투하였다. 임술에 해적이 삼척현에 침구하거늘 40여인을 사로잡았다. 5월 무자에 서여진 정위사어하 등 3인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발해 감문대정 기질화 등 19인이 내투하였다. 6월 신축에 발해 선송 등 7인이 내투하였다. 임인에 안동부 합주에 지진하였다. 갑진에 서여진 회화대장군 거이라 등 24인이 내조하였다. 송의 신유 등 12인이 내분하였다. 병진에 동여진 대상 고
지문 등 41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서여진 중윤 고사 등 6인이 내투하고 고모한 등 25인은 와서 방물을 바쳤다. 추 7월 임진에 동여진 좌윤 아포 등 4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8월 갑오 삭에 송의 천주상 도강 임애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무오에 현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평장사 유소에 명하여 북경에 관성을 창치하게 하였다. 9월 계해 삭에 날빛이 혜성과 같았다. 유종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한빈경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임유간으로 어사중승을 삼고 이자연으로 이부랑중 어사잡단 우승선을 삼고 염현으로 우보궐을 삼고 이유도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동 10월 계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요빈과 유원장군 고지문 등 37인이 내조하였다. 기해에 서여진 대사(여진 추장의 직) 아각팔 등 14인과 동여진 원보 오두나 등 63인이 내조하였다. 황주량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민가거로 형부상서를 삼았다. 갑진에 선대의 공신 최응에게 사도를 유신성에게 태부를 최승노에게 대광을 최량에게 3중대광을 서희에게 태사를 이지백에게 대광을 이몽유에게 사공을 한언공에게 태부를 김승조에게 사공을 최숙에게 태사를 강감찬에게 대승을 최항에게 정광을 증가하였다. 정미에 거란이 정주(평북의주)를 침범하였다. 기유에 교하기를 [짐이 망녕되게 선조의 업을 이어 받아 3한을 통어하매 뜻은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평안하게 함에 돈독하고 마음은 선조를 받들고 효도를 생각함에 간절하다. 이제 협향(선조의 합동향*)의 해를 당하여 잘 친행의 예를 갖추었다 수은을 널리 베풀어서 내외가 즐거움을 같이 하고자 하노니 국내에 대사하되 불충 불효 수회 간도는 제외하고 유죄 이하는 다 사하고 참죄 교죄는 유인도에 유배하고 일찍 유죄에 처해 있는 자는 재량하여 옮기고 수속자는 면방하라]하였다. 11월 계해 삭에 원영으로 서경부유수 지분사호부사를 삼았다. 신묘에 서여진 우화 등 156인이 관성을 개척할 때에 모두 공노가 있었으므로 작1급씩 가하였다. 12월 신축에 서여진 보윤 보실 등 3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진에 문사명 문재선으로 시어사를 삼고 이신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임사행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발해 기질화 등 11인이 내투하거늘 남지에 살게 하였다.
갑술 3년 춘 정월 정묘에 왕의 자씨를 책하여 연경궁장공주를 삼았다. 신미에 교하기를 [검약절용함은 민생을 풍족하게 하는 길인즉 상의국에게 어의를 염색하는 홍지초를 1연간 지용할 것만을 계정하고 그 외에는 더 많이 취하지 말라]고 하였다. 병술에 동여진 정조 다노한 등 5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해에 황주량으로 정당문학 판한림원사를 삼았다. 무자에 황보영으로 중추부사를 삼고 임유간으로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2월 임진 삭에 동여진 유원대장군 주달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해에 경흥원 장녀 김씨를 맞이하여 후를 삼았다. 동여진 좌윤 아도한 등 4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3월 정축에 김정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장극맹으로 상서우복야를 삼고 이유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어사대부지한림원사를 삼고 이주좌로 국자제주 좌간의대부를 삼고 진현석으로 중추직학사 지제고를 삼고 노우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원정 김경화 박정고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무인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도한 등 3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진에 교하기를 [농상은 의식의 근본이니 제도 주 현의 관리들은 힘써 조지(정부의 *지)에 따라 3시(춘하추)를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하어 써 만성을 편안하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정해에 군신을 문덕전에서 향연하였다. 하 4월 병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이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유에 이단에게 추충좌리공신 상주국을 사하였다. 5월 경신 삭에 동여진 귀덕장군 골보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축에 문하시랑 평장사 왕가도가 졸하였다. 갑신에 한림학사 박유인으로 평양군문학을 삼고 중추원직학사 진현석으로 낙랑군문학을 삼았다. 병술에 최보성으로 상서좌복사를 삼았다. 6월 기축 삭에 황성 주작문랑옥에 벼락쳤다. 임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이구도 등 3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추 7월 경인에 서여진 원윤 모오 등 22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민가거와 유징필로 상서좌우복사를 삼고 김정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장윤함과 임간으로 모두 공부상서를 삼았다. 신해에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최제안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유지성 으로 예부상서를 삼았다. 임자에 원태진으로 시어사를 삼았다. 계축에 최충으로 형부상서 중추사를 삼고 김충찬으로 우산기상시를 삼았다. 9월 계묘에 왕의 병이 중하매 고명하기를 [짐의 병이 낫지 않고 이미 위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애제 평양군 형으로 보위를 계승토록 하라]고 하고 드디어 연영전에서 붕어하니 선덕전에 빈소를 모셨다. 재위 3년이요 수는 19이었다. 왕은 나서부터 숙성하여 집성이 강직과단하였고 이미 장성하매 벽돌을 밟으면 문득 깨어지니 사람들이 덕이 무거운 까닭이라고 하였다. 시호를 경강이라 하고 묘호를 덕종이라 하며 북교에 장하니 능을 숙릉이라 하였다. 문종 10년 시호를 선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강명을 가하고 고종 40년 광장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경릉(충열왕 능호)조에 두타산인 이승휴가 선진한 제왕운기에 덕이 어찌 4년만 그쳤는지 봉오도 와서 상서를 나타냈도다고 한 것이 보인다. 그러나 실록을 상고하건대 그런 기사는 보이지 않고 다만 속담에 서로 전해 말하기를 봉오가 위봉문에 와서 용의를 보이매 군오가 따라 지저귀니 봉이 날아간지라 국인이 가마귀를 미워하여 소년과 장년들이 활을 가지고 쏘았던 바 덕종 1대에는 경성에 가마귀가 없어졌다고 한다. 대저 봉이란 우족의 장이어늘 군오에게 쫓긴바 되었으니 어찌 봉이라 하리오. 대개 운기의 말은 근거없는 것이다. 덕종이 상에 거하매 능히 아들된 효성을 극진히 하였고 정치를 하매 부도를 고치지 아니하여 구신 서눌 왕가도 최충 황주량과 같은 이를 임용하니 조정에는 기만은폐함이 없고 백성은 그 생을 편안하게 하였도다. 비록 봉오가 아니라 하더라도 존호를 덕이라 함이 또한 마땅하지 아니한가]라고 하였다.
제10대 정종(靖宗,1034~1046 재위12년)
자 신조(申照). 휘(諱) 형(亨). 시호 용혜(容惠). 현종(顯宗)의 둘째 아들. 덕종(德宗)의 동생. 어머니는 원성왕후(元成王后) 김씨(金氏). 비(妃)는 용신왕후(容信王后) 한씨(韓氏), 용의왕후(容懿王后) 한씨, 용목왕후(容穆王后) 이씨(李氏). 1022년(현종 13) 내사령(內史令)에 올라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1027년 개부의동삼사 ·검교태사 겸 내사령이 되었다. 1034년(덕종 3) 덕종이 죽자 즉위하여 명주성(溟州城)을 수축, 이듬해 북계(北界) 송령(松嶺) 동쪽에 장성을 수축하고, 또 창주(昌州:平北 昌城)에도 성을 쌓았다. 1036년 각 도의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고 여러 위(衛)의 군인 중 경전이 부족한 자에게는 공전(公田)을 더 주었다. 1037년 거란(契丹)의 침입을 받고 다음해부터 그 연호를 사용하였다. 이후 북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1044년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완성시켰다. 또 예성강(禮成江)의 병선(兵船) 180척으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여 서북계 주진(州鎭)의 창고에 보관하게 하는 등 국방정책에 힘을 기울였다. 이듬해 비서성(書省)으로 하여금 《예기정의(禮記正義)》 《모시정의(毛詩正義)》 등을 간행하게 하였고, 1046년 장자상속과 적서(嫡庶)의 구별을 법으로 정하였다. 능은 개성(開城)의 주릉(周陵)이다. |
정종 홍효안의강헌용혜대왕의 휘는 형이요 자는 신조이니 덕종의 모제로 현종 9년 7월 무인 탄생하였다 숙성하고 명민하여 5세에 내사령 평양군에 봉케 되었으며 덕종 3년 9월 계묘에 고명을 받아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동 10월 정사 삭에 대묘에 삭을 고하였다. 경오에 덕종을 숙릉에 장하였다. 보신을 보내어 서경에 팔관회를 베풀고 2일간 크게 잔치하였다. 12월 경인에 신봉루에 거동하여 크게 사하고 중외군신들의 하례를 받았다.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이 각기 방물을 바쳤다. 경자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백관들에게 잔치를 베풀고 저녁에는 법왕사에 행차하였다가 익일의 대회에 또한 잔치를 베풀고 관락하니 동서 2경 동북양로의 병마사 4도호 8목이 각기 표를 올려 진하하였으며 송의 상객과 동서번과 탐라국도 또한 방물을 바치매 좌석을 사하여 관례하게 하니 이후로는 상례로 삼았다. 10월 기사에 왕제 서로 수태사겸 내사령을 삼고 기(왕제)로 수태보를 삼고 황주량으로 예부상서 참지정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이부상서를 삼고 유지성으로 공부상서를 삼고 이진으로 호부상서를 삼고 곽신으로 전중감을 삼고 금령기로 어사중승을 삼고 김충찬과 이작충으로 좌우산기상시를 삼았다.
을해 원년 춘 정월 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임인에 최충으로 중추사형부상서를 삼았다. 동여진 회화장군 모이라 등 57인이 내조하니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였다. 정미에 유창으로 전중승을 삼고 유운으로 기거랑을 삼고 김연준으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정배걸과 김현으로 좌우습유지제고를 삼고 풍순지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신해에 왕자가 연흥궁에서 탄생하니 이름을 동이라고 사하였다. 2월 기유에 서여진 추장 가아고 등 12인이 내조 하였다. 신사에 동여진의 봉국장군 고지문 등 35인이 내조 하였다. 3월 을유에 이단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황보유의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았다. 병술에 김무체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계묘에 연흥궁주 한씨를 책봉하여 혜비로 삼고 익일에 도죄 이하를 사하였다. 하 4월 갑인에 국로로서 80세 이상 남녀를 구정에서 친히 향연하였다. 정사에 예부가 주하기를 [경성의 명산에는 초채를 금하고 두루 수목을 심게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5월 갑진에 천상에 비개이기를 빌었다. 거란의 내원성사 검교우산기상시 안서가 흥화진에 통첩하기를 [사사로이 생각컨대 당군은 가장 귀국에 가까우므로 조금이라도 편의한 일이 있으면 곧 알려 드렸던 것입니다 생각컨대 귀국은 원래 부용국이라 선제께서 매양 우대함을 베풀었으므로 적년간에 조공함을 게을리 하지 않더니 지난번 벌죄한 해를 계기로하여 내정의 예가 막혀졌습니다.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하여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수년이 넘도록 구호를 계속하지 않고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 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고자 합니까 촉나라 가운데 따로이 석우의 길이 있음을 알지 못하시는지 이렇고야 금후 깊이 질책을 당하리다. 이제 황상께서 열성의 기업을 계승하여 8방의 국계를 통합하매 남하의 제왕이 길이 의를 사모하여 교환을 통하고 서토의 제왕들이 길이 풍화를 향모하여 성의를 바치는데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으니 혹시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들을 안녕하게 하리오. 바라건대 이 뜻을 어기느냐 또는 쫓느냐 하는 것은 스스로 변통이 있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6월 병진에 경성에 지진하였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계해에 치사한 형연기로 검교상서 우복사를 삼고 이징좌로 상서병부시랑을 삼으니 노인을 우대함을 보인 것이다. 신미에 동여진 오어고 등 27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영덕진이 거란 내원성에 회첩하기를 [사사로히 생각컨대 공문이 이에 이르니 친절하심을 잘 알겠나이다마는 책유가 매우 많으므로 모름지기 상세히 해명하여야 할 것이오나 생략하여 요지만을 말하고 다변에 이르지 않도록 하겠나이다. 그 내시에 이르기를 과반 벌죄한 해를 계기로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하고 이미 흉역이 제거되었으니 마땅히 공수를 계속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사사로히 생각컨대 우리 나라로 보면 연림이 난을 일으키던 초기에는 즉 대국이 흥병할 무렵이라 도로가 어렵고 막혀서 사신이 정지되었다가 그 뒤 내사사인 김가경이 동도에 통사를 다시 하였고 호부시랑 이수화가 계속하여 나아가 그 방물을 바쳤으며 선대왕께서 별세하시매 합문사 채충현이 왕명을 받들고 종명을 고하였으며 선황제께서 승하하시매 상서좌승 유교가 빨리 가서 회장하였고 금황제께서 황통을 계승하시매 급사중 김행공이 전마를 타고 가서 조하하였습니다. 그런즉 흥요를 평정한 이래로 사행(취일)이 계속하였는데 어찌 내정의 예가 막혀졌다고 하오리까 또 말하기를 석성을 쌓아 대로를 차단하려하고 목채를 세워 기병을 방해하려 한다고 하였지마는 희효에도 험요에 설비함은 국토를 보유하는 상규라 하였고 노국이 관소를 철폐함은 통인의 깊은 경계가 되었나이다. 그러므로 이 성채를 나열하여 우리의 영지를 방비함은 대개 변민의 안도를 도모함이요 황화를 배반하랴는 것은 아닙니다. 또 말하기를 오직 홀로 동명의 지역만이 북극의 존전에 내빈하지 않는다고 하였는데 전자에 입공한 여섯 사신이 상국중에 늑유당해 잇고 선 정 양성을 우리 제봉(강토)내에 들어와 쌓아 놓고 아직 돌려 보내지도 않으므로 지금 간절히(돌려주시기를)빌고 있는 터이외다. 다행히 황제폐하께서 유신의 운을 열어 백성으로 더불어 갱신하는 때를 만나니 황제(천상)의 혜택이 사방에 흡족하며 일변의 장주를 거듭 올려서 행인(입공육사)을 석방함과 동시에 앗아간 땅을 돌려 달라고 빌(걸)고 싶으나 청할 길이 없어 오늘에 이르었습니다. 혹시 이 간곡한 성의 가 용납된다면 감히 낙수의 예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다만 은명이 있을 따름이니 어찌 책언을 번거로이 할 것이야 있겠습니까 또 말하기를 혹 뇌정같은 격노에 부딪치게 되면 어찌 백성을 안녕하게 하리오라고 하였는데 엎드려 생가컨대 금황제께서는 소국을 애휼하시는 정이 깊고 비자의 말을 들으시는 길이 넓으시니 이에 인빈의 지역을 돌아보시사 반드시 추치의 은을 더하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죄과가 없거늘 무엇을 빙자하여 노여워 하시리오 내회를 자세히 살피건대 희언인 듯 하나이다.]고 하였다. 추 7월 정해에 김충찬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회로 삼사사를 삼고 이유도로 전중시어사를 삼고 김현과 조패로 좌우습유를 삼고 이공현과 은백으로 모두 감찰어사를 삼았다. 계묘에 상서이부가 주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일찍이 오욕의 죄를 범하였지마는 누차 사유를 거쳤사오니 청컨대 그 직을 회복하소서]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가 어사대가 탄핵하므로 미구에 파면하였다. 갑오에 황보영으로 중추사겸 어사대부를 삼았다. 왕의 생일로 장령절을 삼았다. 경술에 제하기를 [선왕의 우복을 마치지 못하였으니 참죄를 범한 자는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를 범한 자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8월 경신에 이자연으로 급사중을 삼고 김령기로 내사사인을 삼았다. 계해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신미에 경성에 지진하니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갑술에 서여진 대장군 이간불 등 44인이 내조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대완 개다한 등 52인이 내조하였다. 9월 무자에 동번 귀덕장군 오다 등 23인이 내조하였다. 계묘에 경주 등처 19주에 지진하였다. 이 달에 서북로 송령 이동에 걸쳐 장성을 쌓아 변구의 요충을 공제하였다. 동 10월 신유에 동여진 수령 어불로 등 6인이 내조하였다. 임술에 임종한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병인에 식목도감이 주하기를 [황주 등 10주 군의 승관인을 거두도록 하소서]라고 하였다. 11월 계미에 동여진 추장 아노간 등 65인이 내조하였다. 12월 임자에 동번 대완 고도화 등 30인이 내조하였다.
병자 2년 춘 정월 경진 삭에 조하를 쉬었다. 을유에 동번 회화장군 사라 등 83삼인이 내조하였다. 갑오에 공도로서 사장 이하를 범한 것과 및 모든 징속자는 다 면사하게 하였다. 2월 경술 삭에 방택에 유사하였다. 임자에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고 백관에게 녹패를 사하였다. 유소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으로 상서좌복사 중추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를 삼았다. 제하기를 [대위 상서좌복사 이응보가 연만퇴직하였으나 공이 사직에 있는지라 내 감히 잊지 못하나니 그 자손으로 관직이 없는 자에게는 초직을 양수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동번 수령 대신 등이 와서 낙타를 바쳤다. 기미에 동번 영새장군 아골 등 135인이 내조하였다. 기사에 동번 장군 개로 등 71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경오에 이주좌로 우산기상시를 삼고 진현석으로 위위경 좌간의대부를 삼고 원태진으로 기거랑을 삼고 한연조로 시어사를 삼았다. 신미에 동번 적선이 삼척현 동진술에 입구하여 인민을 노략하거늘 수장이 풀 숲에 복병하여 적의 돌아옴을 기다려 북을 울리고 고함을 지르며 엄격하여 40여급을 부참하였다. 임신에 문사명을 어사중승으로 삼았다. 3월 계미에 황보유의를 문하시랑 동내사문하 평장사로 삼고 유징필을 참지정사 겸서경유수사로 삼았다. 무자에 삼각산에 행차하시였다가 계사에 환궁하였다. 무신에 동번 추장 귀정 등 92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하 4월 임자에 입하절임으로 얼음을 진상하거늘 제하기를 [금년은 일찍 덥지 않으니 5월을 기다려 얼음을 진상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해가 북륙에 있을 때 얼음을 저장하고 서륙에 있을 때 내는 것이온데 낼 때는 새끼 염소를 바쳐 제사하고 문을 여는 것입니다. 얼음 저장을 주밀히 하고 씀을 고르게 하면 건복강고의 재앙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얼음을 사용하는 법은 춘분에서부터 입추까지에 마치게 되는 것이오니 만약 5월에 비로소 진상하게 되면 고법에 어김이 있어 음양을 순조롭게 하는 바가 아니옵니다. 청컨대 입하절로 써 진상케 하옵소서]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축에 우박이 내렸다. 경신에 동여진 추장 오부하 등 86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서리가 내렸다. 을축에 동북여진의 수령 태사 아도한 등 58인이 내조하니 유사가 말하기를 [태사는 거란의 직명인 바 아도한이 이제 이미 귀화하였으니 청컨대 태사를 고쳐 정보를 제수하소서]한대 이를 청종하였다. 문하시랑 평장사로서 치사한 채충순이 졸하였다. 계묘에 기우제를 지냈다. 정축에 제하기를 [전상서좌복사 이공이 비록 두 번째 탄주를 당하였으나 선조의 재상으로 오랫동안 문한의 임에 있었으니 그 관작을 회복하고 인하여 치사(은퇴)케 함이 가하다]고 하였다. 정월 기묘에 내외의 명산에 초채(수목벌채)함을 금하였다. 신묘에 제하기를 [무릇 사자를 둔 사람은 일자의 출가를 허하노니 영통 숭법 보원 동화 등 사의 거란에서 소업의 경률을 시험토록 하라]고 하였다. 유사가 주하기를 [봄부터 비가 적으니 청컨대 고전에 의하여 원옥을 심리하고 궁핍을 진휼혈하고 들어난 해골을 덮어주고 썩은 살을 묻어주며 먼저 북교에서 악진(산악신) 해독(해신)과 모든 산천의 운우를 일으킬만한 것에 빌고 다음에는 종묘에 빌되 매 7일 일차식 빌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다시 악진 해독으로부터 처음과 같이 할 것이며 가뭄이 심하거던 우제를 행하고 시장을 옮기며 산선을 꺾고 도살을 금하며 관마에 곡식을 먹이지 말게 하옵소서] 하거늘 왕이 이를 청종하고 정전을 피하며 상선을 감하였다. 기해에 우박이 내렸다. 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5일간 기우하였다. 6월 을묘에 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축에 친히 초제하니 이에 비가 내렸다. 병인에 보신이 상언하기를 [옛날 성제 명왕이 다 재변을 면치 못하였으되 오직 능히 덕을 닦고 정치를 잘 행하였기 때문에 재가 변하여 복이되었습니다. 이제 봄으로부터 가뭄이 더욱 심해져서 성상께서는 전을 피하고 선을 감하며 주야 걱정하시고 노력하시며 몸을 꾸짖고 스스로 반성하시매 시우가 응기하여 넓게 전야를 적시어 풍년을 기약하게 되었사오니 청컨대 정전에 나아가시고 상선을 회복하시고 전과 같이 일을 보시옵소서]라고 하니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하여 이같은 한재가 생겼으니 이제 비록 비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오히려 후일의 염려가 있다. 그러나 대신의 청도 어기지 못할 것이라]고 하고 이를 청종하였다. 무진에 경성 및 동경 상 광 2주 안변부 등 관내 주 현에 지진하여 가옥을 많이 무너뜨렸는데 동경은 3일만에 그치었다. 임신에 유사가 주하기를 [문하시중으로 치사한 유방 등 17인에게는 청컨대 입추절까지 한하여 매 10일에 1회씩 사빙하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무인에 중추원이 주하기를[제지에 인삼 300근을 올리라 하였사오나 근일에 올린 1,000근만 하여도 족히 어용에 공할 것입니다. 국부의 공물은 다 인민의 고혈이오니 함부로 감출함이 불가하나이다 청컨대 다시 올리지 말게 하옵서서]라고 하니 왕이 좋아하지 않는지라 문하성이 반박하여 주하기를 [옛 제왕이 기욕을 절제하여 사치를 버리며 자기를 공손히하여 몸을 닦으며 마음을 비워 간언을 용납함은 민서를 기르고 태평을 이룩하는 소이었습니다. 이제 재변이 자주 일어나니 마땅히 마음을 정제하고 몸을 꾸짖으셔야 할 것이어늘 어찌 가히 무익한데 낭비하여 백성의 고혈을 손모하오리까 바라건대 중추원의 상주한 바를 쫓으소서]라고 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신사에 송상 진량 등 67인이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근자에 천지가 괴이함을 나타내어 부덕함을 경계하니 날마다 근신하여 감히 편안할 겨를이 없다. 군공과 서요들도 휴가와 철조를 제한 외에는 시무에 게으름이 없게하여 써 재변을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지중추사 병부상서 김충찬이 졸하니 시호를 공정이라 하였다. 임진에 제하기를 [을묘년에 거란이 변경을 침범하였을 때 대사승 강승영이 선봉이 되어 전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하도다. 군기소감을 추증하고 그 아들 화에게는 초직을 제수하라]고 하였다. 일본국이 우리의 표류인 겸준 등 11인을 돌려보냈다. 경자에 혜비 한씨가 훙하였다. 이 달에 진봉겸 고주사 상서우승 김원충이 송에 가다가 옹진에 이르러 파선되어 돌아왔다. 8월 임술에 황보영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이작충으로 중추원사를 삼고 곽신으로 어사대부를 삼았다. 계해에 승 만명을 구정에서 공양하였다. 병인에 제하기를 [전일에 형부가 주한 바 참 교 이죄를 범한 것을 보았다. 짐이 바야흐로 복중에 있으며 누차 변괴를 이르게 하였다. 호생의 덕을 베풀어 서 휼민하는 마음을 표시하고자 하나니 그 참 교 이죄를 범한 자는 형을 감제하여 무인도에 유배하고 비록 참 교 이죄를 범하였다 할지라도 정장에 가긍한 점이 있는 자는 유인도에 유배하라]고 하니 이에 사형을 면한 자가 116인이었다. 무진에 진현석으로 직문하성을 삼고 김령기와 임유간으로 좌우간의를 삼고 박양명으로 시어사를 삼고 서유걸으로 상서좌사랑중우승선을 삼았다. 동경관내 주 현 및 김주 밀성에 지진하였는데 소리가 우뢰와 같았다. 9월 정축에 동여진 장군 아골 등 1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동 10월 정묘에 동여진 봉국장군 요야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11월 기축에 팔관회를 설하였는데 송상 및 동여진 탐라가 각기 방물을 바쳤다. 정유에 동여진 장군 오을나 등 78인이 내조하였다. 12월 무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을도 등 74인이 내조하였다. 신유에 덕종을 대묘에 부제하였다.
정축 3년 춘 정월 갑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2월 병진에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한 박충숙이 졸하니 시호를 정신이라 하였다. 기미에 서북로병마사가 동여진으로 거란과 교통하는 자 사이라 등 55인을 잡아 서경에 보냈다. 계축에 혜성이 다섯이나 나타나니 길이가 각각 5∼6척이 되었다. 3월 기해에 노연패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하 4월 정묘에 친히 대묘에 체제하고 사하였다. 서번(서여진) 추장 사온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윤월 임진에 동여진 정보 아도한 등 53인이 내조하였다. 5월 계축에 동여진 귀덕장군 이구두 등 57인에게 직 일급씩 사하였다. 을축에 왕이 현화등에 행차하였다. 6월 기유에 친히 국로를 구정에서 향연하였다. 추 7월 임술에 모후의 휘진이므로 백관이 표를 올려 진위하였다. 을축에 건덕전에 거동하고 선마하여 유징필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서경유수사를 삼고 황주량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를 삼고 최제안선으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 중추사를 삼고 최충으로 참지정사 수국사를 삼았다. 8월 을해에 제 약랑군 서를 수태사겸 내사령으로 책봉하고 임오에 제 개성국공 기를 수태보로 책봉하였다. 을유에 송의 상인 주여옥 등 20인이 내조하였다. 정해에 송의 상인 임윤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9월 기유에 귀 삭 박 태 등 주와 위원진에 지진하였다. 병인에 왕이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이 달에 거란 내원성이 황제의 선지를 받들고 영덕진]에 첩하기를 [고려가 일찍이 조공에 힘쓰더니 근년에 와서 점차 체궐한다고 들린다. 곧 직공을 닦으려면 마땅히 먼저 표문을 올릴 것이다. 진실로 성실함이 보이면 별도로 유명을 내릴 것이다]고 하였으므로 문하시중 서눌 등 14인이 협의하여 주하기를 [마땅히 사자를 보내어 고주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동 10월 경오에 동여진 장군 아유대 등 59인이 내조하였다. 병자에 서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거란이 선병으로 압록강을 침략하나이다]고 하였다. 11월 계축에 공장죄 이하를 유면하였다. 12월 정해에 전중소감 최연하를 거란에 보내어 주하기를 [본국이 엎드려 생각건대 전황태후 성제께서 책명을 내려서 선지를 반포하고 토봉을 나누어 직분을 정함으로부터 다만 이 동역은 북진(거란황제)을 앙대하여 해마다 근왕함을 끊지 않고 대대로 전해서 술직하여 왔나이다. 근자에 선신 망형(덕종)이 조업을 찬승하여 황조에 귀부할새 일덕(순일의 덕)의 군주가 임위하여 새로이 경사로운 은택을 반포하심을 듣고 양조의 공사를 가지고 오로지 신총에 상주하였던 바 아직 윤허하시는 은혜를 내리시지 않으니 도리어 지의한 생각이 쌓여집니다. 그 해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비록 해가 자주 바뀌어 왔으나 아직 그대로 조공이 정지되어 있습니다. 근자에 예지를 받자오니 자못 저의 소회에 부합한지라 삼가 마땅히 태후의 유언을 준수하여 굳게 번병이 되며 소방의 폐속을 존무하여 삼가 궐정(황조)을 받들고자 하나이다. 다시 문궤에 따라 정성을 바치어 길이 제항에 힘써 예를 펴겠나이다]고 하였다. 을미에 현덕궁주 김씨에게 만령궁을 사하였다.
무인 4년 춘 정월 무술 삭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왔다. 신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이 내조하거늘 회화장군으로 개수하고 수종원들에게도 다 직을 제수하였다. 2월 계미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여 태조의 진영을 알현하고 연등하는 밤에는 반드시 친히 진전(영전)에 행향함을 상례로 삼았다. 3월 신해에 최연하가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에 이르기를 [주상한 바를 살펴보니 조공 바침을 원한다는 일을 상세히 알겠다.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김은 열국의 통규요 낡은 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도모함은 제후의 격훈이다. 경은 본래 대대로 성삭을 받고 해마다 조공을 받들어 왔다. 선국공이 바야흐로 번국을 계승할 때 드디어 임토(책봉의 의)함이 지체되었다. 시후는 회관이 여러번 바뀌어도 천조는 아직 사정을 잘 알지 못하였더니 근일에 상주한 글을 보고 성의가 간절함을 자세히 알았노라. 동이의 풍속을 따라 거듭 고요를 바치던 의식(욕솔대궁지속 천진고요지의)을 베풀겠다 하니 그 정성기우림 생각하매 진실로 애대하는 바가 되었도다. (조공을) 윤허 함은 물론 가탄할 바 실로 많도다 힘써 영도를 생각하여 술직함을 공결치 말지어다]고 하였다. 경신에 동여진의 귀덕장군 구지라 등 32인이 그 소속 회팔 등 30인을 유도하여 내조하였다. 하 4월 정묘 삭에 궁인 한씨를 책봉하여 여비를 삼았다. 무진에 평장사 유소가 졸하였다. 이 달에 상서좌승 김원충을 거란에 보내어 문안 사은하고 인하여 연호를 청하였다. 6월 을유에 시중 유방이 졸하였다. 추 7월 신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무신에 상서형부가 주하기를 [경외의 참 교 이죄인이 103인이로소이다]고 하니 제하기를 [참죄는 내려(강) 무인도에 장배하고 교죄는 유인도에 장배하라]고 하였다. 갑인에 김원충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올린 표문을 살피고 하계문안한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방략에 뛰어나 세봉을 잘 진무하여 동한에서 애대함을 받고 북궐에 정성기우림을 다하였도다. 증염의 절후에 글월을 보내어 문안하니 가찬한 마음 매양 더욱 간절하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상표한 바를 살피고 조공케한 것을 사은함과 아울러 김흡병 은약병 복두 사정포 공평포뇌원다 대지 세묵 용수등석 등을 진정한 일도 자세히 알았노라 경은 국토를 권사하여 조정(황조)을 흠봉하고 이번에는 사신을 보내어 멀리 충성을 베풀어 누대로 공납을 바쳐온 절의를 존 준수하고 근년의 격조된 이유를 주달하며 거듭 조공에 힘 쓸 것을 빌어 길이 심병될 것을 원하였도다 그 공순함을 보아 이어 윤종함을 표시하였더니 번거로이 감사의 글월을 보내고 인하여 공물의 상자를 베풀었도다. 이것을 고열할 제 괴탄함이 진실로 깊도다]고 하였다. 또 조하기를 [주한 바를 살펴보고 이미 중희 연호를 사용하고 있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다. 경이 지난번 조공바침을 빌거늘 곧 받아들어 시행함을 허락하였더니 사자가 돌아옴에 우리 연호을 서문상에 사용하였음을 알고 그 사대하는 지성을 보았도다 성람한 나머지 가탄하여 마음에 잊혀지지 못하겠도다]고 하였다. 8월 을축 삭에 비로소 거란의 중희 연호을 사용하였다. 장마비가 화곡을 손상하므로 제도에 추역군의 징발을 정지하였다. 병인에 동번 회화장군 아두 등 49인이 내조하였다. 정묘에 지예사합문기후 김화언을 거란의 동경에 보냈다. 정축에 사북번 귀덕장군 야반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무자에 송의 명주상인 진량과 태주상인 진유속 등 1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0월 신묘에 거란이 마보업을 보내 와서 조하기를 [경은 인정에 맞추어 국무를 분장하도다. 전일에 표문를 보내어 멀리 궐정에 주달하여 조절한 녹유를 진술하고 공수하려는 간독한 정성을 나타내었기에 비록 이미 고주한대로 청종하였으나 마땅히 수존함을 특시하나니 생각함이 깊은 것을 마음에 잊지 못하겠노라 이제 동상합문사 좌천우위대장군 마보업을 그곳에 보내어 안무케 하노라]고 하였다. 11월 갑인에 황주량으로 문하시랑 평장사를 삼고 이작충으로 참지정사 주국을 삼았다. 을묘에 거란 동경회예사 의용군 도지휘 강덕영이 왔다. 기미에 최충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갑술에 동여진 귀덕장군 고지문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계미에 내사문하성이 말하기를 [동지의 백학 아압 산양유에 날마다 벼와 기장을 먹여 소비됨이 많습니다. 전전에 말하기를 개와 말은 그 토성이 아니면 기르지 않고 진금과 기수는 나라에서 기르지 않는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조수 곤충은 각기 그 본성대로 살게 할 것이라 하였으니 대개 완호의 목적으로 써 물성을 상해하지 말라는 것이니 빌건대 해도에 놓아 주도록 하소서]한데 이를 청종하였다.
기묘 5년 춘 오월 신축에 우사(우신)를 제하였다. 병오에 공부상서 원영으로 춘하번서북로병마사를 삼고 대부소경 양대춘으로 부사를 삼고 우산기상시 진현석으로 동로병마사를 삼고 전중시어사 임종한과 왕이보로 부사를 삼았다. 2월 임술 삭에 전중감 이성공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치고 정묘에 호부랑중 유선을 보내어 안무함을 사례하고 인하여 압록강 동편에 성보를 가축하는 것을 파하도록 청하였다. 을해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고 병자에 중광전에 거동하여 관락하였다. 임오에 노인성을 남교에서 제하였다. 신묘에 황항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3월 신축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 [여진 제번의 자제 등 60인이 예물을 가지고 입조함을 청한다]고 하거늘 이를 허락하였다. 하 4월 신유 삭에 유선이 거란에서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고주한 바를 살펴보고 압록강 동편의 성벽이 경작과 착정에 방해된다는 일을 자세히 알았노라 이제 돌이켜 보건대 연성은 선묘 때에 쌓은 것이라 대개 변방의 상비이니 강토에 있어서 무엇이 손상되리오 짐은 성규를 지키기에 힘쓰노니 때를 따라 고치기가 어렵도다. 선신 흠(덕종)은 일찍이 고주함을 번잡하게 생각하여 조공함을 끊었는데 경이 습작한 처음에 공장이 겨우 이르렀다 바라는 바는 마땅히 종전대로 준수할 것이요 정성은 다시 공근함을 힘쓸 것이다. 이것이 영구한 계책인 것이며 겸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합함이니 그대로 개간 증식을 하도록 하고 경소함이 생길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다. 거란이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 와 왕을 책봉하고 조하기를 [땅은 동성을 걸치고 별은 북진을 둘렀도다. 더욱 봉상하는 마음을 견고하 하니 책훈의 전례를 거행함이 마땅하도다 멀리 사신을 달려 보내어 왕의 봉역을 계행케 하노라. 이것을 은영이라 하는 것이니 마땅히 공손히 받들지어다. 이제 대리경 한보형을 보내어 그곳에 가서 경에게 관고 일통과 내첩 일도를 사하노니 도착하거던 공손히 받을지어다]고 하고 관고에 말하기를 [짐은 하늘을 법받아 널리 덮고 고래의 통규를 참작하여 안으로는 황가의 회원하는 성의를 미루어 밖으로 왕국의 전정하는 권병(전정지병)을 부여하노니 선잔에 경솔하게 들어오지 말 것이며 차서는 망녕되히 동일하게 하지 말 것(차서불가이망동)이니 바라건대 군웅과 더불어 길이 대의를 보전하라. 헌원이 호시를 익히고(헌습호시) 하우가 간척(간과)을 베푸는 것보다 주가 번병을 분치하고(주분번병) 한이 산하에 맹서함(한서산하)만 같은 것이 있으리요 그대는 공업이 환문보다 무겁고 덕망이 진 변(진한변한)에 높았도다. 선조의 국토를 계승한 시초에 선왕(덕종)의 불공함을 고쳐서 강토를 바치어 나의 영토를 넓게 하고 옥폐를 바침이 여러나라에 앞섰도다 안화를 돌이킴에 힘쓰고 충숙함으로 용의를 삼았으니 마땅히 이장을 들어 특히 총수를 베푸리라 권지고려국왕은 기특한 자태가 옥과 같이 맑고 위대한 도량이 못과 같이 깊도다. 오구는 바다에 다리 놓는 웅자로 솟아서 널리 수발한 기를 모았고 용숙은 하늘에 빛나는 광채를 드날려 아래로 정영을 내렸도다. 스스로 명구를 지키고 크게 패부를 열었도다. 동정은 먼저 전칙에 따르고 매흥은 능히 교긍을 제하였도다. 천리의 전기에 먼저 당서함을 이룩하였고 일방의 민속이 다 은영을 입었도다. 누대의 영명을 이루고 전방의 이략을 얻었도다. 이러므로 오로지 비비(사신의 의)를 달려서 멀리 용륜(조칙)을 내리나니 현토의 전봉에 은영이 일자(왕)에 가하였(영가어일자)으며 따뜻한 초■와 높은 질품은 삼사를 겸시하였도다. 귀는 숭계에 올랐고 공은 의호로 포창하였다. 널리 정부를 나누어서 크게 충적을 포장하노라 아아 성진이 공북의 궤도에 있어야(성진재공북지전) 곧 도수에 합하고 강한이 조종의 길을 얻어(강한득조종지로)야 이에 순류하나니 힘써 이말에 따라서 상훈을 번란케 하지 말라 개부의동삼사 수대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를 제수하고 인하여 수충보의봉국육자공신을 사하노라]고 하였다. 5월 경자에 일본민 남녀 26인이 내투하였다. 추 7월에 거란이 소부감 진매를 보내와서 생진을 하하였다. 우산기상시 임유간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경신 삭에 송상 유적 등 5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신봉루에 거동하여 포를 사하고 법왕사에 행차하였다. 12월 정사 삭에 호부시랑 송융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제하기를 [절후가 대한이 되어 풍운이 엄응하도다 빈궁한 사람을 생각하매 반드시 얼고 굶주릴 것이니 그 외국 투화인 및 번인에게 잡혀 갔다가 도망해온 사람들 남녀 합 80여인에게 유사는 그 노유를 헤아리어 각기 면포를 사하라]고 하였다. 윤월 정해 삭에 거란 동경회예사 대견제 등 9인이 왔다.
경진 6년 춘 정월 병진 삭에 일식하였다. 최연하로 서경부유사를 삼았다. 신유에 동여진 봉국대장군 요어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신에 우산기상시 진현석을 거란에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병자에 안산군대군 김씨가 그 아들 이공협이 불효하다고 고발하거늘 기시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수원장군 파걸 등 40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신에 서북여진 귀덕장군 고두 등 46인이 와서 마와 토물을 바쳤다. 2월 경인에 승평문랑옥 수백간이 불타고 어사대가 연소하였다. 정유에 이부원외랑 김연준으로 권지승선을 삼았다. 무신에 동여진 회화장군 요두 등 48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임자에 유사에게 명하여 권형(저울)을 일정하게 하고 두량을 균평케 하였다. 갑인에 여비 한씨를 책하여 왕후를 삼고 익일에 대묘에 고하니 백관이 하례하였다. 3월 신유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골등 33인이 와서 마 15필을 바쳤다. 임술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잉보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술에 서북여진의 추거 고사문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임오에 제하기를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세족으로 여경을 이어 문한으로 써 누대의 조연을 보좌하여 그 공이 가히 기록할만하니 그 아들 작에게 공부서령사를 제수하라]고 하였다. 하 4월 병술에 거란 동경민 무의로 오지걸 등 20여인이 내투하거늘 물품 및 전택을 사하여 영남에 거주케 하였다. 신축에 거란 횡선사 진주방어사 마세장 등이 왔다. 정미에 임해원에서 비를 빌었다. 임자에 동여진 추거 오타로 도령장군을 삼았다. 갑인에 서북여진 봉국장군 아이화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5월 을묘 삭에 북악에 비를 빌었다. 신유에 회경전에서 초제를 지내어 비를 빌었다. 임술에 큰 비가 와 한달동안 계속하였다. 이령간으로 사관수찬을 삼고 이상선으로 감찰어사를 삼았다. 6월 을사에 상서우승 유백인을 거란에 보내어 사은하였다. 동여진 영새장군 모이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축에 새북 해가 적을구 등이 내투하였다. 추 7월 을축에 의춘루에 벼락쳤다. 숭화궁 왕비가 졸하였다. 거란이 하주 관찰사 조안인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무진에 상서좌복사로서 치사한 양전진이 졸하였다. 8월 을유에 형부상서 판어사대사 이주좌가 졸하였다. 공부시랑 유창을 거란에 보내어 황태후의 생진을 하하였다. 계사에 동여진 고도달 등 53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을묘에 이회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원영으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서북여진 장군 야반 등이 와서 준마를 30필을 바쳤다. 정사에 이자연으로 지중추원사를 삼고 왕총지로 중추원지주사를 삼았다. 경신에 거란 동경회예사 도지휘사 고유한이왔다. 임신에 북여진 장군 이우화 골보가 내투하거늘 전택을 사하여 기내에 살게 하였다. 동 10월 갑신에 서북여진 잉화로 등 13인이 내투하거늘 명하여 과호에 채워 넣었다(충위). 을유에 서북여진 정조 부거 등 100여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경인에 지중추원사 김원충의 딸을 맞이하여 비를 삼았다. 계묘에 동녀진 장군 사이라와 서북여진 장군 동화노가 각 200여인의 민중을 거느리고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달에 유창이 거란으로부터 돌아왔는데 조하기를 [근자에 여러 사람들이 의론하여 휘호를 올리려고 하는 것을 비록 여러번 받자 하지 아니하였으나 궐문에 부루짖음(규혼)을 물리칠 수 없도다. 그 간곡함을 가긍히 여기고 묵과키 어려워 윤허하였다. 번국과 동경할 것을 권념하니 조함을 총석(사)함직 하도다. 이제 이미 12월 상순에 예책을 대행키로 정하였기에 이에 조시하노라]고 하였다. 11월 병인에 대식국 객상 보나합 등이 와서 수은 용치 고성향 몰락 대소목 등물을 바치거늘 유사에게 명하여 후하게 관대하고 돌아갈 때에 금백을 후사하였다. 신미에 공부시랑 이인정을 거란에 보내어 영수절을 하하고 겸하여 하정하였다. 12월 정유에 동여진 원윤 아두간 등 50인이 와서 마 35필을 바쳤다. 거란의 동경민 2,000여호가 내투하였다.
신사 7년 춘 정월 경술 삭에 조하를 쉬었다. 병진에 서여진 대승 고지지 등 15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2월 경진 삭에 상서공부가 주하기를 [송악산의 동서산록에 식송하여 써 궁궐을 장엄하게 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을축에 유창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임인에 서여진 봉국장군 이우대 등 18인이 와서 명마를 바쳤다. 3월 경술 삭에 동여진 중윤 야사로 등이 내조하였다. 하 4월 기묘에 동여진 추장 대상 이개 등이 내조하였다. 계사에 장경도장을 회경전에 설하였다. 춘추 이계절에는 정예적으로 이 회를 설하는데 봄에는 6일간 가을에는 7일간이었다. 5월 을묘에 현릉에 배알하고 병진에는 선릉에 배알하였다. 제하기를 [성조께서 삼한을 통일할 때에 호종하던 신료의 자손으로 노복이나 서민에 전락되어 입사의 자격을 가지지 못한 자는 유사가 불러 문무재예를 시험하여 다 등사함을 허하라]고 하고 인하여 상호군 홍빈 윤수기 대장군 위정 김탁마 석충 양포질 하흥휴 지맹 오금보 한소보 부창 감찰어사 김경에게 마를 각각 1필씩 사하였다. 경오에 금강명경도장을 문덕전에 설하고 기우하였다. 을해에 비가 내렸다. 6월 을유에 동여진 정보 오부 등 26인이 내조하였다. 추 7월 기미에 서여진 귀덕장군 소지라 들이 내조하엿다. 신유에 거란이 위위소경 경치군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8월 을미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50인이 내조하였다. 이 달에 혜성이 동방에 나타나니 길이가 30척 가량이며 20여일만에 소멸하였다. 9월 정미 삭에 상서병부가 주하기를 [선군별감의 문무반 7품 이상원의 자제를 선취하여 글을 익혀 과거를 보는 자를 제하고는 모두 군오에 충당하게 하니 이는 비록 평안할 때에도 위태로움을 잊지 아니한다는 생각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다 누대 훈구의 자손인 고로 조종 이래로 병역에 참여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물며 갑자년과 병자년간에 있어 이미 금제가 있었으니 (이제와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은) 다만 그 선대의 공을 잊어버리는 것이 될뿐만 아니라 또한 구제에도 어긋나는 것이니 청컨대 대오에 충당치 마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동 10월에 호경(서경)에 행차하였다. 길이가 30척 가량되는 혜성이 동방에서 10여일간 나타났다. 신사에 어가가 대동강에 이르니 유수사 참지정사 황보영이 강두에서 봉영하는지라 왕이 용선에 나아가 보신들에게 연을 사하고 장군 승개 등에게 명하여 활을 쏘게 하니 우습유 금상빈이 나와 간하거늘 이에 그치고 선은관에 들어갔다. 을축에 팔관회를 설하고 영봉문에 거동하여 백관의 하례을 받고 주연을 사하고 흥국사에 행차하여 행향하고 장락궁으로 이어하였다. 기해에 최충으로 내사시랑 평장사를 삼고 황보영으로 수사공좌복사를 삼았다. 11월 병오 삭에 호경으로부터 돌아왔다. 서눌 홍빈 유섬 안보 고열 등에게 중대광을 가하였다. 기미에 송상 왕락 등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영새장군 야어개 등 62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신사에 동지 귀령각에서 활쏘는 것을 사열하였다. 임오에 동여진 봉국장군 아가주 등 5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이 해에 한림학사 승지 박유인과 우승 이유형을 거란에 보내어 책례(6년 12월 대행예정이던 책례)를 하하고 판위위사 유삼은 방물울 바쳤다.
임오 8년 춘 정월 병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유에 동여진 수령 곤두 등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갑인에 김오위상장군 형부상서 안보가 표문를 올려 연로치사를 청하거늘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경신에 서북로병마사가 압록강 이동의 청새진에 이르는 관하의 입석촌에 있는 번호를 입적시켰다고 아?다. 기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간 등 49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인에 동여진 유원장군 고지문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거늘 직을 제배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무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서여진 추장 고지지 등 12인이 와서 토물을 바치매 예빈성이 주하기를 [고지지 등은 왕년 평로와 영원 양성을 개탁할 때에 자못 공노가 있었으니 예물을 우사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기해에 동경부유수 최호 판관 나지설 사록 윤렴 장서기 정공간 등이 제령을 받들어 양한서(전한서 후한서)와 당서를 신간하여 진상하거늘 모두 작을 사하였다. 3월 을사에 내사문하가 주청하기를 [정전에 거동하여 시조하는 날에는 백관으로 하여금 각각 스스로 주대케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병진에 서북여진 영새장군 야어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자에 장군 이우불 등 4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하 4월 병술에 서리가 내렸다. 임인에 동여진 대상 오어달이 경우를 청하거늘 이에 동로둔전사의 소 10두를 사하였다. 5월 기사에 왕이 현화사에 행차하였다. 6월 을해에 왕이 태조의 휘진도장으로 개국사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제하기를 [농사가 바야흐로 성할 때에 비가 내리지 아니하니 무릇 구한할 수 있는 것을 유사는 상세히 주문하라]고 하였다. 경진에 종묘와 산천에 비를 빌었다. 갑신에 내사령 서눌이 졸하였다. 병술에 도병마사가 주하기를 [동로 열산현 영파술 대정 간홍이 적과 싸울제 중과불적으로 화살이 떨어지(진)고 힘이 다하여 죽었사오니 청컨대 직상을 추가하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동여진 귀덕장군 야이불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을미에 내사시랑 평장사 유징필이 졸하였다. 추 7월 을사에 연창궁비가 졸하였다. 을묘에 거란이 이부랑중 풍립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8월 무인에 이자연으로 중추부사를 삼았다. 경진에 동여진 유원장군 사이라 등 68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갑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형부의 주상하는 옥발미(죄옥의 평의)를 청단하였다. 9월 정유 정사에 동여진 귀덕장군 아개 등 58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을축에 서북여진 유원장군 고두로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신묘에 거란이 검교예부상서겸 어사 왕영언을 보내 와 조하기를 [짐이 관남십현은 아국의 구기임으로 장차 군사를 일으켜 강토를 회복하려 논의하였더니 송조가 누차 전사를 보내어 거듭 간곡한 말로 약정하기를 구공인 은 30만양 견 30만필 이외에 매년 금과 회의 진물을 별도로 바쳐서 부여의 물품에 대하겠다기에 재차 맹약을 논의하여 영구히 화호함을 복정하였다. 그 제도의 병마 등은 급여를 후히 하고 부조를 면제하는 동시에 이미 본부에 방환기켰으니 그 어찌 내 미세한 몸으로 이러한 성사를 이룩할 수 있었던가 이제 문무백관과 내외제관들이 누차 봉서를 올리고 전고를 상고하여 내가 원공 대략을 지녔다 하고 나에게 아름다운 칭호와 큰 이름을 가상하고자 하므로 굳이 사양하지 못하여 힘써 군청에 따르기로 하였노라 이미 11월 3일을 선정하여 양궁이 함께 대례를 거행하게 되었으니 경은 번병을 일컫고 상국을 섬기며 궁궐을 향하여 충성을 바쳤으니 멀리 생각건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반드시 경열함을 더할 것이다. 이제 예부상서 왕영언을 보내어 조서를 가지고 그곳에 가서 논시케 하노라]고 하였다. 정유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 등이 와서 마를 바쳤다. 12월 계묘에 치사한 문하시랑 평장사 황보유의가 졸하였다. 갑인에 이령간으로 비서소감겸 한림시강학사를 삼았다.
계미 9년 춘 정월 경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경진에 황주량으로 수태보겸 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상주국을 삼았다. 갑신에 서여진 귀덕장군 골개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임인에 최제안으로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상주국을 삼고 이작충으로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례부사를 삼고 김정준과 고숙성으로 좌우승선을 삼았다. 임자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3월 병자에 서여진 추장 고두로 등 4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기축에 백좌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승려 1만을 공양하였다. 임진에 동여진 장군 개로 등 40인이 와서 마를 바쳤다. 하 4월 무술에 동북로병마사가 주하기를「여진 유원장군 사이라가 수륙의 적수 나불 등 494인을 유치하여 화주관에 와서 입조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하매 유사가 의주하기를「이 무리들은 인면 수심이니 마땅히 병마사로 하여금 인수를 멸하고 차례로 나누어 입조하게 하소서」하니 이를 청종하였다. 임인에 제하기를「비가 시기를 어기니 농사가 염려된다 어찌 형벌이 공정치 못하여 민원이 있음인가 유사는 유죄 이하를 심사하여 모두 석방하게 하라」고 하였다. 계묘에 동여진 장군 이다불 등이 내조하였다. 5월 정유 삭에 일식하였다. 제하기를 「과인이 부덕함으로 이러한 한건을 이루고 누차 재변이 있으니 마땅히 상식국으로 하여금 응요군을 놓아 보내고 또 ■호로써 고기 잡는 것을 금하라」고 하였다. 갑술에 사사하였다. 무인에 정전을 피하였다. 기유에 비가 내렸다. 을미에 비가 내리거늘 백관들이 건덕전에 나가 표하하였다. 6월 병오에 김령기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정사에 동여진 추장 유불달 등 25인이 내조하였다. 동북로 병마사가 주하기를「연해분도판관 황보경이 홀로 전함을 거느리고 대양에 멀리 들어가 수적을 분격하여 사로잡고 벤 것이 심히 많사오니 청컨데 포상을 행하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추 7월 정묘에 거란이 시어사 요거선을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정축에 동여진 추장 아두간 등 66인이 내조 하였다. 8월 기미에 내외의 사형을 결정하고 정전을 피하며 소선하고 악을 철하였다. 9월 임신에 친히 구정에서 초제하였다. 정축에 유사가 주하기를「중광사의 성조도감사인 정장이 사서인 승적으로 더불어 감림의 물건을 도적질 하였으니 법에 준하여 장배하기를 청합니다」고 하거늘 제하여 경전에 따르라 하였는데 어사대가 형률대로 처단하기를 논청하니 이를 윤허하였다. 경진에 동여진 영새장군 동불로와 유원장군 사이라 등이 화외여진 80인을 거느리고 내조하여 주하기를「화외인이 난폭한 마음을 망녕되게 품고 일직 변경을 요란케 하였으나 관대히 길러 주심을 입음에 미쳐 완전히 전죄를 고쳤습니다. 이제 수륙번장을 인솔하여 궐문에 나와 맹세를 들이고 변민되기를 원하오며 금후 항시 인구의 동정을 살펴서 보고하리다」고 하거늘 왕이 이를 가상히 여겨 특히 김백을 사하고 관등을 가하였다. 동 십월 임인에 동여진 영새장군 야사개 등 80인이 와서 방물을 바쳤다. 11월 무인에 동경회례사 검교좌복사 장창령이 왔다. 신사에 거란이 책봉사 소신미 부사 한소문 도부서 이천관내 관찰유후 유일행과 압책사 전중감 마지유와 독책 장작소감 서화흡과 선전 검교좌산기상시 한이손 등 130인을 보내왔다. 정해에 왕이 단을 설하고 책명을 받으니 조에 이르기를「짐이 외람되게 부덕한 몸으로 제업을 이어 받으니 6성의 드리우신 경사를 힘 입어서 팔방이 두루 태평함을 이루었도다 요즈음 여러 사람의 간청에 따라 삼가 큰 이름을 받게 되니 무릇 조림 있어 경상을 두루 균등하게 할 것이다. 경은 대대로 성삭을 흠수하였고 강역은 토모를 이어 받았다. 심해를 항행하여 술직의 의를 극진히 하였고 대국을 섬겨서 신하된 절개를 다하였도다 마침 대례를 베풀게 되매 곧 이장을 들어 특히 질록을 올리는 은혜를 추급하고 아울러 공적에 보답하는 예(수)를 성하게 하노라 이제 사신 좌감문위상장군 소신미와 부사 상서예부시랑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책명하며 아울러 차복 관검 인수 및 국신물(양국교환의 선물) 등을 별록과 같이 갖추어 보내니 도착하거든 삼가 받을지어다」고 하였고 책문에는「짐이 하늘의 기탁을 받아 조종의 기업을 소승하니 4방이 인덕에 귀화하므로 영기를 쉬어 패업을 정하고 백관들이 예문을 상고하여 보책에 새겨 써 존호를 가하였다. 멀리 제신(경)을 권고컨데 국사를 천개하여 항해(조공)의 성을 게을리 하지 않고 대하의 맹서를 더욱 굳게 하였다. 바야흐로 경사를 널리 베풀 때이니 마땅히 은혜를 펴서 원방에까지 미치게 할 것이다. 휘전에 따라 특히 총장을 보내노라 아아 그대 수충보의 봉국공신 개부의동삼사 수태보겸 시중 상주국 고려국왕 식읍 7,000호 식실봉 1,000호 왕형은 영철함이 당대에 드물며 인자하여 나라를 계승하였도다 강토를 확장하매 일역(동방)에 걸쳐서 경역을 나누고 천조를 존숭하매 황궁을 우러러 정성을 바쳤도다 순임금을 받들어 필성의 업을 세우고(대순 수필성지업) 주나라를 바로 잡아 협보의 훈을 도모하도록 하라(광주 규협보지훈) 덕화는 천애에까지 미치고 성교는 청견(동방)에 펴졌도다 짐이 지난 번에 엄가를 갖추러 경기를 순무할 제 방백(방윤)에게는 알현의 예의를 펴게하고 도인들에게는 내소(임금이 오니 백성들이 소생하다는 의)의 희망에 계합하도록 하였다. 간과를 쓰지 않고 재판(옥시)을 공평하게 하니 여러 지방이 의를 사모하고 풍화에 향하여 옥백을 서로 보내오고 인국은 위엄을 두려워하고 덕을 회앙하여 금겸을 증납하였도다 이에 태평이 상승된 시기에 이르러 마침 허명의 보책을 받았도다 이에 은택을 베풀음에 있어 먼저 왕번(고려)에 미치게 하노라 절석의 숭자에 나아가게 하고 전차의 준질을 바르게 하니 원전으로 부세를 더하고 미호로 공을 포하노라 이에 사신 소신미와 부사 한소문을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그대를 책명하여 수태전겸 중서령을 삼고 식읍 3,000호 식실봉 300호를 가하여 인하여 동덕치리의 사자공신(호)을 사하고 산관훈작은 본래대로 하노라 아아 군자국을 지켜 제후왕에 으뜸이로다 도를 논하여 주의 태사가 될지며 공훈을 드날려 한의 승상에 오를지어다 신절을 굳건히하여 황가에 보답할 것이며 창성할 때에 부귀를 향수하고 공명을 길이 세상에 전하여 청사(죽소)에 그 빛이 흐齪 것이니 길이 공경할 지어다] 고 하였다. 병인에 동번적이 선 팔소로 서곡현에 입구하여 40여인을 사로잡아 가거늘 방비에 불근한 소치로 그 장졸들을 죄주었다. 12월 경신에 탁(탐)나국 성주 유격장군 가리가 주하기를 [왕자 두라가 요새 졸하였는데 일일이라도 후사자가 없어서는 아니될 것이오니 청컨대 호잉으로써 왕자를 삼으소서]하고 인하여 방물을 바쳤다.
갑신 10년 하 4월 경술에 동여진 1,045인이 예물을 바치고 맹약을 청하거늘 각각 의복과 은기를 사하였다. 금원현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5월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라 등 25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6월 을사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추 7월 계묘에 거란이 검교태보 유종정을 보내와 생진을 하하였다. 우복사 이괴와 상사봉어 최희정을 거란에 보내어 책봉을 사하였다. 8월 계묘에 동여진 장군 아도한 등 4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9월 신유에 동여진 장군 사이라 등 6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계해에 동여진 장군 포기 등 59인과 서여진 대장군 고두로 등 27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정묘에 동여진 장군 구니도 등 2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 11월 을해에 병마사 김령기가 주하기를 [이제 장 정 이주 및 원흥진에 성을 쌓아 불일내에 필역케 되었사오니 노고가 심히 많았습니다 그 독역한 주 진의 관리에게 1과의 7품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8품 이하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차제계직을 가하고 2과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계직을 가하소서 또 이 3성의 지대는 원시 적의 소굴이라 침요될까 염려되오니 병마군사를 요해의 곳에 나누어 주둔시켜 수륙으로 막아 적으로 하여금 접근함을 얻지 못하게 하고 그 군사로서 1과의 별장 이상에게는 정직 1급을 초배하여 부모에게도 봉작하고 대정 이상에게는 정직 1급과 아울러 향직을 초배하고 군인에게는 향직 1급을 초배하도록 하옵고 2과의 대정 이상 및 선두에게는 정 향직 1급을 가하고 군인 및 초공(사공) 수수(수부)에게는 향직을 가하고 또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시고 축성시를 당해서 출전하여 공이 있는 1과의 섭병부상서 고열 등 10인과 차 1과의 소부감 유교 등 5인과 2과의 대락승 정패 등 5인에게 또한 포상을 가하여 써 장래를 권장하소서]라고 하니 제하여 가타 하였다. 계미에 동녀진 장군 오을달 등 남녀 144인이 와서 준마를 바치고 주하기를 [우리들이 귀국과 접경하여 살며 왕화를 모앙하여 신복한지 오래오나 항상 추로가 내침할까 염려되어 정주함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 3성을 쌓아 써 적의 통로를 막게 되었기 때문에 내조하여 사은하나이다]고 하거늘 왕이 상을 넉넉하게 주어 돌려 보냈다.
을유 11년 춘 정월 무오 삭에 조하를 쉬었다. 정축에 동북교에서 풍사(풍신)를 제하였다. 동여진 귀덕장군 아두주 등 5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2월 무자 삭에 임진강의 과교원에 호를 사하여 자제사라고 하였다. 앞서 이 나루터에 선교가 없어 행인이 다투러 건느다가 물어 빠지게 되는 일이 많더니 유사에게 명하여 부교를 반든 이후로는 인마가 평지와 같이 밟게 되었다. 갑오에 동여진 유원장군 파을달 등 610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3월 기사에 동여진 회원장군 염한 등 75인이 내조하였다. 경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병자에 곡우절인데 서리가 내리었으므로 녹수하였다. 하 4월 정해 삭에 태사가 주하기를[마땅히 일식하여야 할 것인데 음운으로 보이지 않나이다]고 하니 군신들이 표하하였다. 무술에 동여진 수령 사어두 등 35인이 와서 준마를 바쳤다. 기해에 동여진 장군 요어나 등 70인이 와서 양마를 바쳤다. 경자에 영새장군 고도화 등 70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병오에 서북로 병마판관감찰어사 이춘이 주하기를[번적 100여인이 영원진 장평술에 침입하여 군사 30여인을 노략하여 갔으니 청컨대 장교가 능히 수어하지 못한 죄를 다스리옵소서]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무신에 뇌사(뇌신)를 서남교에서 제하였다. 기유에 비서성이 신간한 예기정의 70본과 모시정의 40본을 올리거늘 명하여 1본은 어서각에 장치하고 여분은 문신들에게 사하였다. 5월 경신에 제하기를 [소서가 장차 닥쳐오니 중한 죄수는 정하고(죄수을 뽑아내어 관대하게 다루는 것) 경죄는 석방하라]고 하였다. 병인에 대송 천주 상인 임희 등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동로군사로써 번적과 싸워 전승한 자에게 각각 내구의 마를 사하였다. 윤월 신축에 오랜 비로 말미암아 여수하고 경죄를 석방하였다 6월 기묘에 거란 횡선사 검교태부 판3반원사 야율선이 왔다. 경진에 영성(가색을 맡은 별의 이름)을 제하였다. 추 칠월 정유에 거란이 검교상서우복사 고유기를 보내 와 생진을 하하였다. 9월 경인에 동여진 장군 고지문 등 45인이 내조하였다. 동 12월 경인에 혹한이므로 경한 죄수를 석방하고 급하지 않는 역사를 정지하였다. 동여진 고차 등 36인이 와서 토물을 바쳤다. 12월 임자에 여수하였다.
병술 12년 춘 2월 병인에 연등으로 포를 사하였다. 임신에 마조를 제하였다. 3월 신사 삭에 일식하거늘 왕이 정전을 피하고 소란을 입고 구일(구식)하였다. 신묘에 이인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신축에 시중 최제안에게 명하여 구정에 나아가 행향하고 가구의 경행을 배송케 하였는데 경성가구를 나누어 3도로 하고 (길마다) 채루자로써 선약경을 메고 앞서 가게 하고 승도들이 법복을 갖추어 걸어가면서 경을 독송하고 감압관도 또한 공복을 입고 도보로 따라가면서 가구를 순행하며 백성을 위하여 복을 비는 것이니 이름하여 경행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상례를 삼았다. 하 4월 신해에 중농을 제하였다. 정묘에 왕이 병환으로 산호전에 이어하였다가 정축에 대내법운사로 이어하였다. 병술에 백관들이 불사에 기도하였다. 5월 을미에 이부가 주하기를 [위위경 지대(태)사국사 서웅이 질환으로 청고(사가를 청함)한지 이미 180여일이 경과하였습니다. 국제에 무릇 현재관으로 걸가하여 만백일이 된 자는 파직하게 되어 있사오니 청컨대 서웅의 직을 해직하소서]하거늘 제하기를 [서웅이 그 업에 정려하여 일관의 장이 되었으니 특별히 200일을 사고하라]고 하였다. 정유에 왕의 병환이 더하였으므로 왕제 낙랑군 휘를 불러 병석에 들어오게 하고 명하여 국사를 권총하게 하며 조하기를 [짐이 선왕의 말명(임종시의 유명)을 받고 열성의 비도를 계승한지 12년 동안에 하늘의 휴징을 힘입어 국내가 평안하더니 춘하 이래로 우노가 화기를 잃게 하매 약석이 무효하여 드디어 위독함에 이르렀으니 신기를 유덕자에게 돌리고자 하노라 내사령 낙랑군 휘는 짐의 애제라 인효 공검함이 인국에까지 들렸으니 마땅히 대보를 전하여 써 경광을 나타내게 하리라]하고 이날 훙거하니 수는 33이요 재위 12연이라 빈전을 선덕전에 옮기었다 왕은 관인 효우하고 식견과 도량이 홍원하며 영무 과단하여 소절에 구애되지 아니하였다. 익하여 용혜라 하고 묘호를 정종이라 하고 북교에 장하여 능을 주릉이라 하였다. 유사가 유명을 받들어 산릉제도를 다 검약하게 하였다. 문종 10년 익을 홍효라 가하고 인종 18년 영렬을 가하고 고종 40년 문경을 가하였다.
이제현이 찬하기를 [거란이 탐모하여 족히 신을 보전할 수 없으므로 태조가 깊이 경계하였다 그러나 그 일재(대연림의 난)를 다행으로 삼아 구호를 버리는 것도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하매 미쳐 여가를 가지지 못하였고 덕종은 방강한 나이에 미달하였으니 더욱 쟁투함을 경계하여야 하였으므로 왕가도의 화친을 끊자는 의론은 황보유의의 화호를 이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의론만 같지 못하였다. 정종은 사위한지 3연만에 우리의 대부 최연하가 거란에 갔고 4년 거란의 사신 마보업이 오니 이로부터 다시 환맹을 잇게 되었다. 감동시킴이 지성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반드시 기책이 있었을 것이다. 이러므로 군자는 [선계선술함으로써 그 나라를 보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高 麗'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16대 예종(睿宗,1105~1122 재위17년) (0) | 2009.03.29 |
---|---|
제12대 순종~제13대 선종~제14대 헌종~제15대 숙종 (0) | 2009.03.29 |
제11대 문종(文宗,1046~1083 재위37년) (0) | 2009.03.29 |
제2대 혜종~제3대 정종~제4대 광종~제5대 경종~제6대 성종 (0) | 2009.03.29 |
태조 왕건(太祖王建, 918~943 재위25년) (0) | 2009.03.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