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 麗

제16대 예종(睿宗,1105~1122 재위17년)

吾心竹--오심죽-- 2009. 3. 29. 15:47

제16대 예종(睿宗,1105~1122 재위17년)

예종은 숙종과 명의왕후 유씨의 맏아들로서 1079년 정월 정축일에 태어났으며 이름은 우. 자는 세민(世民)이다. 일찍부터 뜻이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넓었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094년에 검교사공 주국으로 임명되어 처음으로 벼슬을 받았으며, 여러번 승진하여 태위에 올랐다가 아버지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5년만인 1100년에 왕태자에 책봉되었다. 숙종이 동명성왕능에 참배갔다 오다가 죽음을 맞이한후 제16대왕으로 등극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 17세이였다.

   예종은 즉위후 한달여만에 조정을 개편하였는데 그 이유는 여진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였다. 여진은 그의추장 아골타의 영도아래 급속하게 성장하였기 때문이다. 부왕인 숙종의 여진정벌에 대한 서소(誓疏:맹세하는 축원문)를 간직하고 즉위한 뒤 군법을 정비하고 신기군을 사열하는 등 여진정벌에 힘써 1107년(예종 2)에 윤관(尹瓘),오연총(吳延寵)등으로 하여금 여진을 쳐서 대파하고 이듬 해에는 함흥평야 일대에 9성(城)을 설치하게 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여진족의 침입, 9성방비의 어려움, 또 윤관의 공을 시기하는 자들의 책동으로 1년 만에 9성을 철폐하고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1109년 국학(國學)에 학과별 전문강좌인 칠재(七齋)를 설치하여 관학(官學)의 진흥을 꾀하였다. 1112년 혜민국(惠民局)을 설치하여 빈민들의 시약을 담당하게 하였고, 이듬해에는 예의상정소(禮儀詳定所)를 설치하였다. 1115년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금(金)이라 칭하자, 요(遼)나라에서 금나라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이렇듯 중립정책으로 변방을 안정시키고 동시에 영토확장의 행운도 얻은 예종은 변방의 안정을 꾀하면서도 꾸준히 문화정책과 민심안정책을실시했다.
1116년 청연각과 보문각(寶文閣)을 짓고 학사(學士)를 두어 경적(經籍)을 토론하게 함으로써 유학을 크게 일으켰으며, 송나라에서 대성악(大晟樂)을 들여왔는데, 이것이 아악(雅樂)이라는 궁중음악이다.
1117년 금나라에서 “형인 대여진금국황제(大女眞金國皇帝)가 아우인 고려 국왕에게 글을 보낸다.”는 글로써 화친하기를 청하였으나, 조정의 반대로 회답하지 않았다. 1119년 양현고(養賢庫)라는 장학재단을 국학에 설립하였다.
이때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학사(學舍)를 널리 설치하고, 국학 칠재의 정원을 유학 60인과 무학 17인으로 하며,명유를 뽑아 학관(學官)으로 삼아 가르치게 하니 문풍이 크게 진작되었다. 1120년 팔관회를 열고 태조의 공신인신숭겸(申崇謙)·김락(金樂)을 추도하여 도이장가를 지었다.
1122년 3월에 그의 등에 자그마한 종기가 하나 발견되는데, 그후로 병상에 눕더니 한달만에 4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으니, 재위17년 만의 일이었다. 능은 개성에 있는 유릉 (裕陵)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
미르나라

  예종 문효대왕의 휘는 우(?)요 자는 세민이니 숙종의 장자로 모는 명의태후 유씨이며 문종 33년 정월 정축에 탄생하였다.  속이 깊고 침착하여 도량이 있었으며 유학을 좋아하였다.  선종 11년에 검교사공 주국을 수하고 누승하여 태위가 되었다가 숙종 5년에 책립하여 왕태자를 삼으니 책문에 이르기를 [짐이 조종을 이어받아 백성을 다스리게 되어 사해(천하)에 임함이 더욱 넓고 만기를 돌봄이 실로 번다하도다.  원량의 찬을 얻어 왕업의 창흥을 연장하도록 바라노라.  아아 너 장자는 하늘이 낸 영자로서 영문이 날로 높았도다.  덕행은 안으로 민첩하고 위혜는 밖으로 폈도다.  온 나라가 이로써 마음을 두고 군의가 이로써 아름다움을 돌리도다.  종묘를 이어 받고 신기를 지킬 사람이 네가 아니고 누구이랴.  이러므로 궁정(소 극)에 다음가는 의례를 갖추어 동궁이라는 총위의 등급에 앉히노니 시는 구서(복서)에 따르고 명은 용륜(조칙)으로 내리노라.  이제 사자를 보내어 절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아아 시선하고 문안함은 어찌 홀로 옛날 세상에만 일컬었으리오.  무군하고 감국함은 족히 이때에 보일 것이로다.  이에 처음과 끝을 잘 하여서 근생하여 게으르고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  진실 육전로서 규범을 삼고 상산 사공으로 좌우(좌우)를 삼아 교사를 물리쳐 멀리하고 학문에 근면정려할 것이며 극히 존귀함으로서 자신을 시뢰하지 말고 스스로 현명함으로 남에게 오만하지 말 것이다.  내가 간고하는 바 있거든 성약(침술과 약방)으로서 가료하며 내가 불법함이 있거든 준 (규칙)으로서 시행하라.  사부의 교훈을 명심하여 경계함을 싫어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9년에 요가 사신을 보내어 책하여 삼한국공을 삼았고 10년 10월 병인에 숙종이 붕어하매 유조를 받들어 중광전에서 즉위하였다.  

을해에 유사가 주하기를 [어휘御諱 (우,?)와 음운이 같은 ?(우)?(우)자는 청컨데 고쳐서 피휘케 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갑신에 숙종을 영릉에 장사지냈다.  무자에 중서사인 김록을 요에 보내서 고애하였다.  경인에 일반사민이 내관(환관 또는 여관)과 교통하고 간구(청탁) 알현함을 금하였다.  계사에 형부시랑 최위를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축하하였다.  왕모 유씨를 높여 왕태후를 삼았다.  수녕궁을 고쳐 대녕이라 하고 장경궁을 숭덕이라 하고 연평궁을 안수라 하였다.  갑오에 장공주에게 대녕궁을 이공주에게 숭덕궁을 삼공주에게 안수궁을 사하였다.  11월 무술에 종실 영으로써 수태위를 삼고 원으로 검교태위 수사도를 삼고 위계정으로 수태위 문하시중 상주국을 삼고 최홍사와 이오로 모두 문하시랑 동평장사를 삼고 윤관으로 중서시랑 동평장사를 삼고 임의로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정문으로 검교사공 예부상서를 삼고 김경용으로 태자태사 수사공을 삼고 왕 로 이부상서 추밀원사를 삼고 오연총으로 지추밀원사 어사대부를 삼고 이위로 형부상서 지제고를 삼고 고령신으로 비서감 직문하생을 삼고 강극으로 지어사대사를 삼았다.  기해에 최정으로써 상서우복사 응양군상장군을 삼고 최유정으로 병부상서를 삼고 고의화로 용호군상장군 형부상서를 삼고 황유현으로 흥위위상장군 호부상서를 삼았다.  경자에 필광찬으로 검교태자태사 상호군을 삼고 혁련정으로 장악전학사 판제학원사를 삼았다.  신축에 제를 내려 동궁에 있을 때와 즉위일에 시위하였던 장교 원리 승도로서 공로 있는 자에게 특히 작과 상을 가하게 하였다.  임인에 신봉문에 거동하여 (죄수를) 사하였다.  갑진에 조하기를 [짐이 듣건대 민간의 매매에 쓰이는 곡미 및 은품이 심히  악한 고로 전대 이래로 법을 엄하게하여 이를 금하였는데 지금까지 아직 그 징계자를 보지 못하였다.  대개 간악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법금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다만 이익만을 구하여 모래와 흙을 쌀에 섞고 동과 철을 은에 섞어서 우민들을 현혹케 하니 심히 천지신명의 뜻이 아니로다.  백성의 빈곤이 실로 이에 말미암는 것이니 이것을 법으로써 징치함이 가하다.  그러나 요와 순은 의관만 그려 놓아도 백성이 법을 범하지 아니하매 형을 버리고 쓰지 아니하여도 집을 연하여 (비옥) 가히 봉함직하게 되었다  하니 짐이 심히 이를 사 하노라.  원컨대 내외의 군민들과 공상의 잡류들이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선에 옮기고 죄를 멀리한다면 자연 형벌이 맑아지고 덕교가 흡족하리니 부수의 업과 태평의 풍을 어찌 이룩함이 어려우랴.  만일 이 뜻을 인식하지 못하고 고의로 위범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반드시 벌하여 용사함이 없으리라.]고 하였다.  병오에 어사대가 주하기를 [형을 놓아두고(조) 쓰지 아니함은 제왕의 성덕이외다.  이제 영어가 비었사오니 청컨대 [옥공] 이자를 써서 법사의 남가에 써 성조의 형을 놓아둔(조) 미덕을 표시하소서.]라고 하니 재상이 표하하였다.  때에 옥이 근자의 대사를 겪고 죄인들이 다 석방되었는데 어사는 표방할 것으로써 청하고 재상은 옥공으로써 하하니 식자들이 이를 나무랬다.  무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구정에 행차하여 음악을 관상하였다.  정사에 왕 로서 서북면병마사 겸지중군병마사를 삼고 오연총으로 동북면병마사 겸지행영병마사를 삼았다.  임술에 내시기후 지록연 주부동정 은원충 사천소감 허신경 최자호 등을 보내어 동계의 산천을 순시하였다.  이 달에 회상대왕의 시호를 고쳐 공상이라 하고 묘호를 헌종이라 하였다.  12월 병인에 정당문학 정문이 졸하였다.  무진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 경천하였다.  선대의 유물을 제왕과 재신 추신에게 분사하였다.  임신에 우산기상시 유자유로서 동계가발병마사를 삼고 내시기후 최홍정으로 판관을 삼았다.  을해에 재신 추신을 건명전에 불러 동계의 변방 사태를 물었다.  기묘에 오연총으로서 동계행영병마사를 삼고 김기감으로 지병마사를 삼고 임신행으로 병마부사를 삼고 임언으로 별감을 삼고 김준으로 판관을 삼고 지록연과 김인석으로 장주분도를 삼고 곽경심으로 선덕분도를 삼고 유익과 탁준경과 유영약으로 병마록사를 삼고 최자호와 박성정으로 군후를 삼았다.  임오에 대녕궁에서 화재가 났다.  갑신에 교하기를 [생각컨대 우리 조종이 초매에 경륜하여 비로소 방가를 이룩하고 누대의 성군이 가지고 지켜 과인에 이르렀는데 지금 제도 주군의 사목으로서 청렴하여 백성을 우휼하는 자 10에 1, 2도 없고 이를 쫓고 명을 낚기만하여 (백성을 다스리는)큰  통을 해하며 뇌물을 좋아하고 사리를 꾀하여 생민을 잔해하므로 백성이 유산하고 도망하는 자가 서로 이어 10호에 9호가 비게 되니 짐은 심히 이를 슬퍼하노라.  이는 실로 전최가 제대로 행하여지지 아니하므로 말미암아 사람들에게 권선징악이 없기 때문이니 마땅히 명신을 보내어 군현을 순시하고 수령들의 성적을 매겨(전최) 알리도록 하라.  짐이 바야흐로 상벌을 힘써 밝히고자 하나니 그 추밀대신은 다 짐의 마음을 체득하고 조종이 법전을 추검하여 백관을 깨우침으로서 정식(법식)을 삼으라.]고 하였다.  신묘에 현화사의 승 덕창으로서 왕사를 삼았다.
병술 원년 춘 정월 갑오 삭에 왕이 양음으로 조하를 받지 않고 재상이 육찬을 들기 청하되 허락하지 않았다가 네번째 표를 올려 이를 청하매 이에 허하였다.  정유에 혜성이 서남방에서 나타나 월여만에 없어졌다.  무술에 예부가 주하기를 [양계 삼경 삼도호 팔목이 매양 원정 동지 및 지원절을 당할 때마다 곤성전에 표하하는 것으로써 항식을 삼으소서.]라고 하거늘 제하여 가타 하였다.  왕의 생신으로 함녕절을 삼았다.  갑진에 백일재를 문덕전에서 설하였다.  요가 제전사 야율연 좌기궁을 보내왔다.  병오에 요가 조위사 야율충 유기상을 보내 오고 또 유정신을 보내어 왕의 기복을 명하였다.  신해에 동번의 공아 등 10인이 내조하거늘 왕이 선정전에서 인견하고 주식과 예물을 사하였다.  처음 임간이 출사하였을 때 추장 연개가 지훈 등으로 하여금 영격케하여 아군이 패하였더니 이제 이르러 지훈이 공아를 보내어 내조한 것이다.  왕이 왕전에서 예를 갖추어 이를 대접코자 하였더니 잡단 최위 등이 주하기를 [자고로 노인(호인)이 왔을 때 일찍이 왕전에서 인견하지 아니하였사오니 청컨대 구제에 의거하여 변전에서 대접하옵소서.]라고 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축에 요의 제전조위사가 숙종의 우궁에서 제하였는데 왕이 표의를 입고 제전를 도왔다.  무오에 요의 사신을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다.  2월 갑자 삭에 요의 횡선사가 왔다.  을축에 제 보로 검교태위 수사도 겸상서령을 삼고  로 검교태보 수사도 겸상서령을 삼고  와 교로 모두 검교상서령 수사공을 삼았다.  재상이 표를 올려 납비하기를 청하거늘 왕이 아직 상제를 마치지 못하였으므로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신미에 공부상서 최공익으로 서북


을미 십년 춘 정월 임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유에 요의 횡선사를 건덕전에서 항연하였다. 을해에 낙기부사를 건덕전에서 항연하였다. 병자에 요가관찰사 고경순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무인에 요의 생신사를 건덕전에서 향연하였다. 무자에 제 ( )를 책명하여 검교태보 수태위로 삼았다. 기축에 상서이수와 시랑황군상을 요에 보내어 황선을 사하였다. 경인에 제 교를책명하여 검교태보 수태위로 삼았다. 시월에 생녀진 완안부의 아골타가 황제를 일컫고 이름을 민이라 고치고 국호를 금이라 하였다. 그 풍속이 흉노족과 같이 모든 부락이 성곽은 없고 산야에 나누어져 살며 문자는 없고 언어와 결승으로써 약속을 삼으며 토지는 저와 우 마가 풍요하고 말은 준마가많아 혹 일일에 천리나 가는 것이 있으며 그 사람들이 날새고 용맹하여 아시부터 능히 활을 당겨 새와 쥐를 쏘다가 장년이되면 활 시위를 당기면서 말을 달려 싸움을 익히어 강병이 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제부가 각각 서로 웅장을 다투어 잘 통일되지 못하였다. 그 땅이 서로는 거란에 접하고 남으로는 우리 경역에 접한 고로 일찌기 거란과 우리 조정에 신사하여 내조할때마다 부금초피량마를 폐백으로 삼았고 우리 조정에서도 또한 후하게 은폐를 주어 해마다 항상 이와 같이 하였다. 혹은 말하기를  옛적 우리 평주 승금준이 여진에 도망해 들어가 아지고촌에 거주하였으니 이가 금의 선조이다. 라고 하며 혹은 말하기를   평주 승 금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에 여진의 아지부촌에 들어가 여진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을 낳으니 고을태사라 하고 고을이 활라태사를 낳고 활라가 아들이 많아 장자를  핵리발이라 하고 계자를 영가라하였는대 영가가 가장 웅걸이어서 중심을 얻었다.  영가가 죽자 핵리발의 장자 오아속이 위를 이었고 오아속이 졸아매 아우 아골타가 섰다.고 한다.  이월 계묘에 아들 구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으니 그 글에 이르기를  옛 철왕이 방하를  무유함에 반드시 저이를 세워 천서를 있게 함은 감히 친애의 사이에 사사로움이 아니라 장차 인심을 매어 국본을 굳건히함이로다. 짐이 왕업을 이음에 옛 철왕의 큰 유모에 따라 상사의 현량함을 돌아볼 때 오래 중명의 상에 합하였도다. 그러므로 귀서를 상고해 따르며백관에게 물어 헤아리고 좋은 날을 거듭 가리어 이에 크게 휴명을 발양 하노라. 아아 너 원자 구는 중화 정기를 받았고 기억한 자질이 빼어낫도다. 인의 효우의 성은 천성에서 발하였고 독실 희광한 덕은 신명에 통하였도다. 비록 연소한 터이지만 일찍이 완전한 의범을 보이어 말을 내면 법도에 합하고 발을 들면 규법에 맞아 유락을 일삼지 않고 선도에 따르기를 즐기어 종시 학문을 일삼아 좌우에 그 자원을 만나 시서 예악의 문물을 연구하고 부자 군신의 의리에 밝았으니 주의 창이 왕계를 섬기고 한의 영이 고황을 받듬과 다름이 없도다. 그러므로 마땅히 앞에 든 말씀에 의거하여 동궁의 위를 바으게 하여 비창을 주관함으로써 조종에 배케(대월) 하리라. 이러므로 사자를 보내어 부절을 가지고 너를 책명하여 왕태자를 삼노라.  아아 오직 공손하여야 가히 써 능히 마음을 다할 있고 오직 근신하여야 가히 써 길이 귀를 지키리니 너는 사전의 교훈을 엄수하고 연안의 오락을 경계할 것이며 정인이 아니어든 친하지 말고 정언이 아니어든 듣지 말어 써 삼선의 풍교를 떨치고 만방의 민심을 바르게 한다면 짐의 아들 둠이 옛 철왕에 부끄러움이 없으리니 바라노니 이 유모를 깊이 간직하여 길이 다복을 누릴지어다라고 하였다. 무오에 별례의 연등을 행할새 왕이 중광전에 거동하여 음악을 관람하다가 중서령으로 치사한 최사추의 죽음을 듣고 연회를 라(#,2-143)하였다. 정묘에 승려를 모아 불경을 내전에서 오일간 읽었다. 삼월 임신에 왕태자를 책봉하였으므로 신봉문에 거동하여 사하였다. 임오에 군신을 건덕전에서 항연할새 만년사를 지어 좌우에 선종하였다. 계미에 내전에서 곡연하였다. 무자에 구정에서 친히 초제하였다. 무술에 왕비 연덕궁주의 생신이므로 내전에서 곡연하였다. 하 사월 임인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이수 등이 요에서 돌아오니 회소에 이르기를 근자에 변신이 방비를 게을리하여 소적이 변민들을 어지럽게 하므로 방금 문죄의 주벌을 행하려하여 여기에 일부대의 병력(편사)의 출동을 의논하고 있노라. 그런데 경은 땅이 적경에 이웃하고 직책이 후번을 지키는 터임으로 특히 선유하여 군사를 정비해 폭도주를 구축케 하기 바랐더니 경이 사신을 보내 달려와 사장을 봉진하니 이에 종명의 신으로 그 충절을 극진이 함을 양찰하겠도다. 때마침 춘사를 당하여 농경에 방해될 염려가있으니 아직 연수에 힘쓰고 별도로 진취를 기하라고 하였다. 계축에 제왕 재추신을 당춘정에 불러 술을 베풀어 환락을 극히하고 사 이장을 지어 좌우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니 양부 재추신이 표를 올려 사양하거늘 윤허하지 아니하였다. 갑인에 왕자지와  문공미가 장차 송에 가게 되니 성시신 추밀원 승제 등이  순천관 낙빈정에서 전송하는지라. 왕이 내시 임경청을 보내 어제시 일수를 선시하고 겸하여 쇄과를 사하였다. 을묘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승을 공양하였다. 오월 무인에 우박이 내렸다. 기묘에 귀산사에 행차하엿다. 정해에 조중장 등에게 명하여 진사를 시취케 하였도니 그 합격자의 대책(책문에 대한 답안)이 자못 전인의 것을 도습하였으므로 낙제자가 이를 호사하거늘 경인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시 부의 제를 내어 복시케 하고 제왕 재추 시신에게 조하여 전상에 앉게 하고 고굉(보좌의 신)이 어지면 여러 일이 안강하다(고굉량서사강)라는 시제를 주어 사신에게 명하여 시를 지어 올리게 하고 왕이 또한 지었다. 육월 기해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김정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병진에 여수하였다. 신유에 내전에서 곡연하였다. 병인 중서시랑평장사 이자겸으로 수태위를 삼았다. 추 칠월 무진 삭에 일식하였다. 경진에 왕이 명의태후의 기진이므로 개국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무자에 이부상서 왕자지와 호부시랑 문공미를 보내어 송에 가서 사은하고 겸해 공물을 올리게 하고 인하여 진사 김단 견유저 조석 강취정 권적 등 오인을 보내어 대학에 부케 할새 그 표에 이르기를 인민을 교화하여 양속을 이룩함은 대학의 풍에 말미암는 것이요. 중하로써 만이를 변화시킴(용하변이)은 저 선왕의 교에 의지함이로다 그런 고로 호한이 아들을 한실에 보냈고 토번이 당에 서적을 청하였던 것은 일은 비록 동일하지 않지마는 뜻인즉 다름이 없도다. 엎드려 생각건대 대송이 흥함에 있어 천년의(시작되는) 아침에 즈음하여 일통이 천운에 당하였고 대도의 근원을 발양하여 적년의 폐해를 소탕하였도다. 학은 삼사로 나누고 교는 육경을 근본하였거늘 하물며 또한 벽수를 열어 강사를 찿고 명당을 세워 성대한 의전(상의)을 부흥시켰도다. 공이 이루어지고 다스림이 정해지니 제작은 백년에 새롭고 인이 흡족하고 도가 풍성하니 거서가 만국에 동일함에 있어서랴. 도리켜 생가컨대 폐국이 일찍이 화풍을 사모하여 개보의 시대에서 신종의 세에 이르기까지 매양 사신을 달리고 생도를 함께 보내어 하여금 관주함으로써 변로함을 기대하였더니 그후 우연히 중간에 폐지되어 오래 이전에 닦아오던 일을 궐하였기 때문에 전문승습(전에 듣고 이어 익힘)이 이미 멀어지고  광기비언(넓은 기록과 자세한 말씀)이 태반이나 타락되어 선비는 정론이 없고 학문은 (#)노가 많아 혼탁한 말류에 (학풍의) 숙료함이 몇해던고 하물며 법도헌장의 언저리(제)와 성명문물의 의표 혹은 역대의 유경과 혹은 제가의  이설에 있어 진실로 유식자에게 질의하지 아니한다면 어찌 능히 법도를 장래에 이룩할 수 있으리오 매양 말을 낼 때마다 구사(구관)에 따르기를 생각하였더니 이제 좋은 때를 만나 본지를 펼 수 있겠기에 삼가 학생 오인을 보내어 입조자에 따라 부궐케 하나이다. 생각하옵건대 이 제생들은 모두 수재가 아니어서 눈으로 교양(궁학)의 예를 보지 못하였고 귀로는 아송의 성을 듣지 못하여 더불어 말하기 어려움이  호향의 동과 유사함이 있을지라도 일찍이 가르치지 아니한 적이 없어(미상무회) 대저 궐리(공문)의 인이 짙어 있는 바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폐하께서는 이 깊은 애정을 가련하게 여기사 옛 일을 추명하여 특히 국자감에 내리시거나 혹은 벽옹에 수관하여 하여금 학업의 편의에 나아가게 하시면 제생의 말석에 자취를 들여놓고 박사의 앞에 의를 구하게 하여 우리에게 덕음을  주어 거의 ( )명의 변화를 보게하고 교목에 날라 옮아(천우교목) 격설과 같은 완악함을 면케하여 혹 상 오도로 하여금 써 동방에 행케하여 주시면(오도이동행) 길이 대명의 하촉하심을 감하하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병신에 문하시랑평장사로서 치사한 허경이 졸하였다. 팔월 경자에 선정전 남랑에 거동하여 내외의 중형수를 처결하였다. 요가 장차 여진을 치려하여 사자를 보내와 원병을 청하거늘 을사에 재추 시신 도병마판관 제위대장군 이상을 불러 물음이 재삼차 이르렀으되 마침내 정의가 없었다. 임자에 장  (#)전에서 곡연하였다. 계축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을묘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무오에 묘통사에 행차하여 불사를 행하였다. 경신에 친히 서민의 노자를 구정에서 향연하고 물을 사하되 차등있게 하고 또 국노인 평장사로 치사한 오수증 등을 합문에서 향연하였다. 서북면병마사 박경작이 뜰에서 하직하거늘 이름을 경인이라 고쳐 주고 다와 악을 사하였다. 갑자에 보제사에 행차사였다. 을축에 우박이 내렸다. 구월 정묘에 근신을 어원에 소집하여 궁술을 사열하고 상춘정에서 곡연하였다. 신미에 왕이 달밤을 타 미복으로 잠행하여 처사 곽여의 거처는 순복전 청심대에 행차하여 주연을 베풀고 근신과 더불어 글을 논하다가 새벽에 이르러 이에 패하였다. 임신에 여수하였다. 병술에 무사를 동지에서 친선하고 정해에 수희를 관람하였다. 동 십월 기해에 왕이 숙종의 기진이므로 개국사에 행차하여 행향하였다. 갑진에 백좌인왕도장을 회경전에서 삼일간 베풀어 승 일만을 궐정에서 재식케 하고 이만을 주부에서 재식케 하였다. 정미에 친히 육도의 신( )장사를 동지에서 사열하였다. 경술에 중서시랑평장사 금록 등에 명하여 동교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신해에 하원 순복전에서 친히 초제하였다. 계축에 시어사 윤언순을 요에 보내어 천흥절을 하하였다. 친히 서경장사를 동지에서 선발하였다. 십일월 임신에 묘건전에서 곡연하였다. 낭중 김인관을 요에 보내어 낙기복을 사하였다. 경신에 팔관회를 설하고 왕이 구정에서 돌아와 궐문 앞에 이르러 주( )하고 오랫동안 창화다가 광대에게 명하여 호위하는 대열내에서 가무케하여 거의 삼경에 이르니 어사대부 최(#)와 잡단 허재가 간하거늘 왕이 이를 가납하였다. 임오에 내전에서 곡연하였다. 갑신에 요에 이주관내관찰사 야율의와 대리소경 손량오를 보내와 발병을 독촉하니 소에 이르기를 요전에 여진에 불공하므로 왕사(천자의 군사)가 문죄키로 하고 거년 겨울부터 소서를 내려 길을 나누어 진공케 하였노라. 비록 군사를 정제하였다지마는 아직 구적을 섬멸치 못하였더니 이제는 제군이 모두 모여 적경을 두드리며 전진하고 있노라 하물며 그대의 군병은 일찍이 점열을 겪었으니 문득 즉시로 선출할 것이오 혹시라도 우리 군대와 상응함에 때를 늦게 하지말 것이다.  인하여 사자를 신칙하여 아나가 진발함을 보게 하노니 힘써 충효를 도모함에는 오직 경종함에 있는 것이다. 인하여 단필제물을 사하노라고하였다. 경인에 북로병마사가 마를 달려 보하기를 요 동경의 통첩에 엊그제 칙지를 받들건대 고려의 보낸 바 생신 횡선 낙기복의 삼사사가 요새 변경의 다고로 말미암아 아직 국경에 들어옴을 얻지 못하므로 이미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노라고 하였더이다라고 하였다. 신묘에 야율의 등이 궁문에 나아와 하직하려 하였지마는 출병의 논의가 오래도록 결정되지 아니하므로 예를 이루지 못하고 물러나갔다가 익일에 하직하였다. 십이월 경자에 여수하였다. 임인에 요 동경류수가 회사의 대례사 예빈부사 고효순을 보내왔다. 병신 십일년 춘 정월 병인 삭에 조하를 쉬었다. 무진에 요가 대리경 장길중을 보내와 생신을 하하였다. 임오에 편전에 거동하여 제왕을 항연할새 밤이되어 패(#,2-151)하였다. 경인에 천수사에 행차하여 새로 이룩하는 당전을 순시하고 공장에게 상사하기를 차등있게 하였다.  임진에 상서호부 시랑 이소영으로 서북면병마부사를 삼고 차호부시랑 이유인으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삼았다. 윤월 경자에 송수로 공부상서를 삼았다. 임인에 보제사에 행차하여 국사 담진의 설선을 듣고 사시하기를 후히 하였다. 경술에 비서교서랑 정량직을 보내어 안북도호부 아전이라 일컫고 통첩을 가지고 요의 동경에 가서 절일사 윤언순 진봉사 서( ) 하정사 이덕윤 등의 계류된 일을 탐지케 하였다. 갑자에 삼계를 병전에서 초제하였다. 이월 병인에 일본국이 감자를 바쳤다. 계유에 요의 동경인 고위가 내투하였다. 경진에 연등으로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갑신에 별례 연등을 행하고 중광전에 거동하여 친왕 재추 시신을 향연할새 밤이 되어 이에 패하였다. 병술에 삼지정사로 치사한 고령신이 졸하였다.  삼월 을미 삭에 왕이 요의 내원 파주 이성이 여진의 공격한 바 되어 성중에 식량이 다 하였음을 듣고 도병마록사 소억을 파견하여 양미 일천석을 보내니 내원통군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기해에 숙종 및 명의태후의 조상을 천수사에 봉안하였다. 임인에 정량직이 요의 동경에서 돌아왔다. 그때에 동경의 발해인이 난을 일으켜 유수 소보선을 죽이고 공봉관 고영창을 세워 황제라 참칭하고 국호를 대원을 올려 신이라 칭하고 국가가 동경류수에게 주는 토산물을 고영창에게 증여하고 후한 보수를 얻었다. 돌아옴에 미쳐 사실을 숨기고 아뢰지 아니하다가 일이 발각되매 유사가 옥에 내려 치죄하기를 청하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계묘에 왕이 천수사에 행차하여 재를 베풀어 낙성을 행하니 채붕과 기락이 도로에 삼일간 연단하였다. 갑진에 군신을 사문외 향연할새 새벽에 이르러 이에 패하였다. 을사에 환궁하여 (죄수)를 사하고 감독관사 공장역주(#,2-153)에게 상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고 도역 시가에 어가를 멈추니 제왕 재추신이 술잔을 올려 헌수하거늘 왕이 김경용의 손을 잡고 말이 선왕태후에 미치매 눈물이 떨어져 옷깃을 적시니 좌우가 흐느껴 울먹거렸다. 임자에 오연총으로 수태위를 삼았다. 을묘에 서경에 행차할새 이경  와 김록으로 판행종사를 삼고 이자겸과 조중경으로 판류수사를 삼았다. 지나는 곳의 공급은 힘써 성약케 하고 노박와 의장은 다 간편하게 하였다.  연로의 전지로서 개간되지 아니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수령을 불러 문책하였다. 기미에 지나는 곳의 사우에 도우하였다. 하 사월 갑자 삭에 서경에 이르러 대동강의 선상에 주연을 베푸니 호종한 제왕 재추 시신 서경류수 분사 삼품 이상이 시연할새 바람이 맑고 일기가 화창한지라.  왕이 즐겨하여 시신들과 시를 창화하였다. 을축에 태조의 영전을 배알하였다.  병인에 처사 곽여를 불러 보고 상안전후 화단에 좌석을 주고 친히 주식을 사하였다. 그 때 문득 보니 동남방에 백운 수편이 떠 있고 그 가운데 쌍학이 배회하는지라 인하여 (곽)여에게 명하여 시를 짓게 하고 왕도 또한 이를 화답하였다. 정묘에 유사에게 명하여 대조에 상제하고 김상(#,2-154)를 선종조에 최사수(#,2-154)를 숙종조에 배향하였다. 장경사에 행차하였다.  산천 제사에 도우하였다. 무진에 제왕 및 곽여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왕이 시 삼편을 지어 (곽)여에게 명하여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기사에 구월산에서 도우하였다. 경오에 금강 흥복 양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와 영명사에 이르러 누선에 거동하여 제왕 재추 시신과 향연할새 또 어제한 선려주(#,2-154)의 임강선 삼수를 신료에게 선시하였다. 금주 아골타가 아지를 보내왔다.  신미에 중서문하가 요가 여진의 침략한 바 되어 위망의 형세가 보이니 요로부터 받은 바 정삭은 행할 것이 못됩니다. 이제부터 공사의 문자에는 마땅히 천경년호를 제거하고 다만 갑자만을 사용할 것입니다고 아뢰거늘 이를 청종하였다.  임신에 삼계를 장락전에서 초제하였다. 계유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향연할새 인하여 어제한 시 일절(절구)을 선시하였다. 병자에 관풍전에 행차하여 태조의 행재소를 순시하고 드디어 구제궁에 거동하였다가 늦게야 영명사 동열에 이어하여 제왕 및 곽여를 불러 주연을 베풀고 시를 창화하였다.  무인에 구제궁에 행차하였다. 요의 내원 포주 이성의 유민이 양 마 수백을 몰고 내투하였다. 기묘에 용덕궁에 이어하였다.  요의 유민 남녀 이십여인이 내투하여 양 이백여구를 바쳤다. 경진에 건원전에 거동하여 조하를 받고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짐이 조종의 쌓아온 서업을 이어 삼한을 보유하매 사람과 신의 소망에 맞지 않을까 두려워 자나 깨나 걱정하고 노심하여 감히 영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번에 일관의 소청으로 서도에 사어하매 새로운 교령을 영포하므로써 장차 만물과 더불어 갱신하고 백성으로 하여금 돌아갈 바를 알게하여 써 선왕의 구업을 흥복코자 하노라. 또한 저 성현의 훈계와 여러 도참의 언에 이르기를 음양을 봉순하고 불타를 존숭하며 형벌을 명신히 하고 유명을 출척하며 삼보이 재를 망녕되게 허비하지 않을 것이요. 사선의 적은 마당히 영광을 가하여야 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좇아 이를 행하여 감히 어기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원구 대조 사직 적전 및 여러 원릉은 국가가 공경하고 중히 여기는 곳이니 그 관리하는 이원이 때때로 수즙하여 하여금 폐읍됨이 없게 할 것이오. 소위 국선의 일은 근래 사환의 길이 문이 많으므로 조금도 이를 구하는 자가 없으니 마땅히 대궁의 자손으로 하여금 이를 행하게 할 것이오. 문무량학은 국가교화의 근원이라 일찍이 지휘를 내려 하여금 그 양학을 세워 제생을 양육하여 써 장래의 장수와 재상의 거용에 대비코자 하지마는 유사들이 각각 이론을 고집하여 아직 정의를 가지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속히 아뢰어 결정해 시행할 것이오. 또 국가의 풍습은 그것을 검박하게 하고자하나 현금 조정과 사서의 의복이 화려 사치하여 존비가 등분이 없으니 마땅히 예의상정소로 하여금 조종 때의 식례와 연혁에 의거해서 제정하여 아뢸것이다고 하였다. 또 중외의 관제를 개정하였다. 신사에 건원전에서 곡연하였다. 임오에 홍복사에 행차하였다가 당포고성의 문루에 이어하여 주연을 베풀어 즐겁게 관상하고 문루를 이름하여 다경이라 하고 어제를 유제하여 사신에게 명해 화답하여 올리게 하였다. 계미에 지서경류수사 호부상서 김약온에게 명하여 호종케 하고 조령구로 섭분사 호부상서 지류수사를 삼았다. 갑신에 어가가 서경을 출발할새 노상에 노구가 있어 곤주를 올리거늘 왕이 그 성의를 어여삐 여기어 한 번 맛보고 인하여 시 한 절을 지었다. 정해에 어가가 (#)영역에 이르니 송의 도강인 양명 등이 도로에서 배알하였다. 신묘에 왕이 경도에 돌아와 죄수를 사하고 제하기를 순수의 예는 지방을 시찰하고 교화를 베푸는 것이다.  짐이 외람하게 비기를 이어 대업을 이루고자 태사관의 청에 부종하여 선왕의 순유를 본받기를 원하였노라. 그리하여 거가를 구도에 옮겨 신궐을 낙성하니 비록 많은 폐단은 없앴다 할지라도 어찌 소요됨이 없었으리요. 마땅히 관대한 은혜를 펴 써 원근의 소망을 위로하려 하노니 그 서경 및 수가원 장수 군졸 및 연로 주 부 군 현의 장리로 범한 바 있으면 수계를 정지하고 마땅히 공주(#,2-156)사장 이하의 죄를 받게 할 것이오. 상경의 유수 백관이 거가의 출발한 후 무릇 징 속 등 여러 가지 경죄가 있거든 모두 사제할 것이다. 산천 신지에게 각각 호를 가하고 연로 주 부 군 현에 나이 구십 이상자 및 효자 순손 의부 절부 환고
경자 15년 춘 2월 병신에 남경에 행차하였다. 하 4월 계유에 남경에서 돌아왔다.  5월 신해에 건덕전에 거동하여 복시하고 정사에 이지저 등에게 급제를 사하였다. 갑자에 산천 사직에 비를 밀였다. 을축에 왕사 덕연을 불러 금강경을 강케 하고 승을 공양하였다. 무진에 불골을 금중에 맞아들였다. 처음 왕자지가 사신갔다가 돌아올 때 송제가 금함에 불아두골을 암아서 주었음으로 외제석원에 두었더니 이 때에 이르러 산호정에 안치하였다. 6월 경오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신미에 우제(기우제)하였다. 갑술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박승중에게 명하여 서경의 홍범편을 강케 하였다. 병자에 김준으로 중서시랑평장사를 삼고 이궤로 수사공 좌복사 참지정사를 삼고 임유문으로 우복사 지문하성사를 삼고 박경인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한안인으로 예부상서를 삼고 최홍재로 형부상서를 삼고 윤유지로 상서우복사를 삼고 송수로 병부상서를 삼았다. 기묘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국자제주 정극영에게 명하여 예기의 월령편을 강케 하였다. 갑신에 왕이 보살계를 건덕전에서 받았다. 병술에 여수하였다. 정해에 친히 복원궁에서 초제하고 드디어 안화사의 순덕왕후 진당에 행차하여 술잔을 드리고 눈물을 흘렸다. 신묘에 송상 임청 등이 화목을 바쳤다. 정유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금록에게 명하여 서경의 태갑편을 강케 하였다. 추 7월 갑진에 요가 낙원부사 소준례를 보내오니 조에 이르기를 올린 바 표문을 살피어 상세히 알았노라. 경은 동방에 나라를 세우고 북궐(북쪽의 제거 즉 스스로 요를 말한 것)의 번병을 일컬었도다. 그런데 이얼의 병사가 일어남으로부터 그쪽과의 길이 막히어 지난번에 사자 세우기를 기원하였지마는 아직 책봉을 행치 못하였노라 요사이 그대의 근왕을 살폈고 또 적개를 겪었도다.  매양 생각함이 이에 이르매 이미 무연함이 많도다. 다시 기의타기를 기다려 곧 구적을 소탕할 것을 도모하리라.  저번에 밀조를 보내어 이 회포를 유시케 하였더니 통로가 마침 다난하여 사람이 함께 가기 어려우므로 혹은 주즙을 위로 돌이켜(남하하지 못한 것) 봉함(밀조함)은 전달치 못하고 사폐만 은밀히 통하여 겨우 뜻만을 보내어 보였더니 회사의 소장을 문득 받게 되매 더욱 정성바침을 증험하였으며 더구나 그 말이 충정에서 나오고 마음이 위(상)에 보답함을 기하였으니 이미 강기(#,2-183)한 회포만 하였으니 모름지기 등청(소탕)함을 일삼음에는 진실로 구적을 같이함에 있는 것이 이것이 큰 순리가 되리로다. 우두커니 서서 그 실공(실효)을 바라보며 이어 오는 회신을 기다려 다시 영선(선지)을 보이리니 다만 따라 이해할 것을 생각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경술에 원구 조사 군망에 비를 빌었다. 을묘에 천화사에 행차하였다. 지록연으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이란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임술에 송이 승신랑 허립진 무교위 임대용 등을 보내왔다. 을축에 중서시랑평장사로 치사한 강증이 졸하였다. 8월에 여름으로부터 비가 오지않아 이 달에 이르렀으매 오곡이 여물지 않고 전염병이 크게 일어났다.  신미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여 오부에 명하여 반약경을 3일간 읽어서 역병을 가시게 하였다. 갑술에 여수하였다. 불정(#,2-183)도장을 문덕전에서 칠일간 설하였다. 무인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형수를 처결하였다. 경진에 안화사의 순덕왕후 진당에 행차하여 흐느껴 슬퍼하심을 오래 하니 좌우에서 눈물 흘리는 자 있었다. 신사 좌정언 홍약이가 상(#)하여 시정의 득실을 논하거늘 그 말을 가납하였다.  을유에 서경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수성이 나타났다. 정유 흥복 영명사에 행차하여 관조하였다.  무술에 대동강에 행차하여 배에 올라 관어하였다. 7월 기해 삭에 영명사에 행차하여 관조하였다. 계묘에 순덕왕후의 대상이므로 승을 상안전에서 공양하였다. 을사에 소재도장을 장락전에 설하였다. 무신에 제하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로 두차레 서경(부경의 뜻이니 여기서는 서경을 말한 것임)을 순수하였는데 옛날은 잠시 갔다 곧 돌아왔으나 지금은 오래 머무르되 환난이 없도다.그러므로 적은 은혜를 펴 써 세상 인정을 위로할까 하노니 8월 을유일 이후 잘못 범한 바 있어 유사의 논핵이 된 것 및 동과 와로 속바칠 정도의 것(경범의 뜻)은 모두 이를 면제하라고 하였다. 계축에 군신을 장락전에서 잔치할제 친히 수성명사를 지어 악공으로 하여금 이를 노래하게 하였다. 을묘에 여수하였다. 계해에 추밀원사로 치사한 김한충이 졸하였다. 동 10월 무진 삭에 일식하였다. 신사에 팔관회를 설하고 왕이 잡희를 보는데 국초의 공신인 김락 신숭겸의 우상이 있으매 왕이 감탄하여 시를 지었다.  11월 임인에 왕이 서경으로부터 돌아와 사하였다. 갑신에 (#)수하였다. 계해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김부일에게 명하여 시경의 반수편을 강케 하였다. 12월 정묘 삭에 왕이 순덕왕후의 상이 끝났으므로 태자와 평장사 이자겸 지주사 이자량 등을 불러 주연을 베풀어 환락을 다하고 은사가 심히 후 하였다. 갑신에 친히 복원궁에서 초제하고 드디어 안화사에 행차하였다. 신묘에 연으로 검교사주 수사공 진강백을 삼고 시(#,2-185)으로 검교사주 수사공을 삼고 박경인으로 수사공 상서좌복사 참지정사를 삼아 인하여 치사케 하였다. 신축 16년 춘 정월 정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기해에 제하기를 남녀의 제도는 가장중대한 윤이니 제왕의 일어남에도 또한 그 내조에 힘입는 것이다. 가인의 위를 바르게 하려 할진대 관(#)의 좋은 배우가 필요한 것이다. 이제 장차 진한공의 장녀와 대경 최용의 계녀로써 내직에 갖추고자 하노니 유사는 마땅히 예전에 준거하여 이름(직명)을 정하여 아뢰라 고 하니 예사라 왕씨로 귀비를 삼고 최씨로 숙비를 삼기를 청하거늘 조하여 가타 하였다. 신해에 왕태자가 원복을 수춘궁에서 가하니 백관이 표하하였다.  계축에 함녕절이므로 건덕전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고 군신에게 사연하였다. 을묘에 귀비를 맞아들이고 갑자에 숙비를 맞아들었다. 2월 임자에 중서사인 한충을 좌천시켜 서경부류수를 삼고 좌정언 임원준으로 전중내급사를 삼았다. 3월 무술에 참(#,2-186)신사에 행차하여 미행으로 유릉에 이르렀다. 왕이 장차 (유릉에) 행차하려 하였을 때 간관이 아뢰기를 과거에 군왕이 친히 후비의 능침에 가신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예전을 참고하여도 또한 그런 글이 없나이다. 현궁이 오랫동안 엄폐되어 묵은 풀이 거칠게 덮였사오니 지존께서 굽어 임하시면 어찌 비감함이 없사오리까. 신자의 마음에 공구함을 이기지 못하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예로써 스스로 앙제하사 인망에 부종하옵소서라고 하였지마는 청종하지 아니하였다. 을사에 송이 조(#,2-186)희를 보내왔다. 임자에 외제석원에 행차하였다. 갑인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한림학사 박승중에게 명하여 예기의 월령편을 강케 하고 기거주 김부식에게 서경의 설명편을 강케 하였다. 하 4월 을축 삭에 보제사에 행차하였다. 무진에 여수하였다. 을해에 묘통사에 행차하였다. 무자에 안화사에 행차하였다가 돌아오다가 이자겸의 산재에 이르러 주연을 베풀었다. 기축에 이자겸으로 소성군개국백을 삼앗다. 5월 정유에 여수하였다. 갑인에 소재도장을 상춘정 및 일월 왕륜 고봉 극락사에서 삼칠(21일)일간 설하였다. 을묘에 여수하였다.  계해에 백관이 흥국사에서 5일간 비를 빌었다. 윤월 갑자 삭에 왕이 봉은사에 행차하였다. 병인에 여수하였다. 정묘에 왕사 덕연을 불러 건덕전서 오일간 비를 빌고 또 불우 신사(#,2-187)에도 빌었다.  신미에 무녀를 모아 비를 빌고 임신에 다시 덕연을 불러 산호정에서 빌었다. 을해에 제하기를 천시가 순조롭지 못하여 가뭄이 재앙을 이루었으니 생각컨대 과인의 부덕함이 앙화를 내리게하여 민망스럽게도 백성이 죄 없이 생명을 떨어뜨리게 되는데 기도하여도 반응이 없으니 공구(#,2-187)하여 어찌할 줄 모르겠노라. 은혜를 미루어 써 화기를 부르고자 하노니 무릇 옥수에 있어 참 교 이죄를 제외하고는 모두 유면하여 주고 혹 관리가 공법을 인연하여 각박하게 폐단을 짓거나 혹 썩은 곡식을 강제로 주어 이식을 취하거나 혹 묵은 밭에 조세를 징수하거나 혹 급하지 않은 역역을 일으키는 자는 중외의 유사로 하여금 일절 금치하게 하라 고하였다. 병자에 친히 순복전에서 초제하여 비를 빌고 승을 모아 또 산호정 및 불우에서 빌었다. 경진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박승중에게 명해 서경의 공(#,2-188)범편을 강케 하였다. 임오에 법운사에서 비를 빌었다. 신묘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기거사인 임존에게 명하여 시경의 운한편을 강케 하였다. 6월 계사 삭에 장령전에 거동하여 박승중에게 명하여 예기의 월령편을 강케 하였다. 을미에 도장을 문덕전에서 3일간 설하였다. 기해에 재차 우제하였다. 경자에 백관에게 명하여 나한재를 설하고 비를 빌게 하였다. 병오에 비가 크게 내렸다. 신유에 좌복사 참지정사로 치사한 박경인이 졸하였다. 추 7월 기묘에 천화사에 행차하였다. 신사에 이수로 서북면병마사를 삼고 최자성으로 동북면병마사를 삼았다. 임오에 왕이 흥왕사에 행차하였다. 8월 무술에 선정전에 거동하여 중형수을 재결하였다. 임인에 왕이 보제사레 행차하였다. 정미에 영 숭 이릉을 알현하고 돌아오다가 인효원에 이르러 오언시 일수를 짓고 시종문신으로 하여금 화답해 올리게 하였다. 을묘에 장원정에 행차하였다. 9월 정축에 환궁하였다. 신묘에 (#)인 하였다. 동 10월 을미에 왕이 천수사에 행차하였다. 병신에 백좌도장을 회경전에 설하고 중외로 하여금 승 3만을 재식케 하였다. 임자에 홍원사에 행차하였다. 태백이 낮에 나타나 30여일간 경천하였다. 12월 임진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송제의 사한 서화 등물을 재추시 신에게 선시하였다. 신축에 복원궁에 행차하였다가 드디어 구산 안화 이사에 행차하고 옥잠정에 거동하여 수종관을 향연하였다. 경신에 여수하였다. 임인 12년 춘 정월 신유 삭에 조하를 쉬었다. 계해에 대원공 효로 태보를 삼고 제안후 서로 작을 올려 공을 삼았다. 신 미에 신중원에 행차하였다. 정축에 함녕절이므로 건덕전에 거동하여 하례를 받고 군신들에게 사연하였다. 기묘에 허재로 서복면병마사를 삼고 이자덕으로 동북면병마부사를 삼았다. 병술에 청연각에 거동하여 중서사인 김부식에게 명하여 주역의 건괘를 강케 하였다. 2월 경인 삭에 일식하였다. 기해에 문하시랑평장사로 치사한 최홍사가 졸하였다. 3월 경오에 김준으로 수사주 판례부사를 삼고 한안인으로 참지정사 판형부사를 삼고 왕자지로 이부상서 참지정사 판호부사를 삼고 한안인으로 참지정사 판공부사를 삼고 최홍재로 추밀원사 판삼사사를 삼고 김약온으로 지추밀원사를 삼고 이자량으로 추밀원부사를 삼고 박승중으로 한림학사승지를 삼고 정극영으로 한림학사를 삼고 이영으로 지어사대사 보문각학사를 삼고 문공미로 예빈소경 추밀원지주사를 삼고 척준경으로 위위경 직문하성을 삼고 김인규로 좌간의대부를 삼았다. 병자에 여수하였다. 정축에 사루에 거동하여 문신56인을 불러 각촉하고 명하여 목단시 6음을 짓게 하니 첨사부주부 안보린이 제일이 되거늘 견을 사하되 차등 있게 하였다. 이 때 강일용이 태시로 울리는지라 왕이 그 짓는 모습을 서서 보니 각촉이 장차 다할 무렵에 (강)일용이 겨우 일련의 시를 얻었는데 이르기를 머리가 흰 취옹은 전후에서 보고 눈 밝은 유로는 한변에 비겼도다 라고 쓰다가 그 초고를 수중에 넣고 어원의 도랑 가운데 엎드리거늘 왕이 소황문에게 명하여 이를 가져다 보고 (#)상함을 마지아니하며 이르기를 이것이 고인이 이른 바 구두에 화전이 만면하여도 서시의 반화장만 못하다 라고 함이로다 라 하고 (강일용을) 위유하여 보내었다. 기묘에 친히 궐정에서 초제하였다. 임오에 순천관에 행차하여 접빈하는 일을 점검하고 재추신을 향림정에서 향연할새 문득 등에 경미한 중(#,2-190)기 있음을 깨닫고 어가를 재촉하여 환궁하였더니 계미에 왕이 병환이 나매 사람을 분견(#,2-190)하여 산천 신지에 기도하였다. 참지정사 왕자지가 졸하였다. 을유에 승 일만을 제사에서 공양하였다. 병술에 여수하였다. 정축에 소재도장을 건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무자에 승 1만을 재식시켰다. 하 4월 기축 삭에 도장을 문덕전과 연친전에서 각각 5일간 설하였다. 제하기를 과인이 삼가 천명을 받들어 외람히 큰 업적을 이어 받아 집과 나라를 통어하기 많은 성상을 열력하였도다.  그런데 일에 임하여 선처함에 있어 그 방법을 알지 못하므로 음양이 순서를 잃게 되어 천지에 변괴가 일어나고 더욱이 질병이 침중하니 더욱 우구(#,2-190)하여 스스로 분려하노라. 왕명(환한)을 펴 써 귀신과 사람에게 사코자 하노니 무릇 명산 대천의 신격이 제전에 있는 것은 각각 칭호를 가하고 모든 유죄자에 있어서는 참죄 교죄를 제한 외에는 모두 사면하여 주고 유배한 자는 근처로 이배(양이)토록 하라고 하였다. 경인에 도장을 선정전에서 5일간 설하였다. 계사에 문하시랑평장사 이자겸 등이 순복전에 나아가 하늘에 고하여 빌기를 옛날 주의 무왕이 병이 나매 주공이 지성으로 하늘에 연명을 청하여 그 병이 이에 나았도다. 이에 신등이 다 우매불초로 빈 자리를 이어 관원에 충비된 바 정술이 백성을 평안케 하지 못하며 덕행이 신지를 기껍게 하지 못하고 다만 탐비 불도로 국가이 큰 좀이 되니 하늘이 내린 재앙이 위로 군부에까지 미치게 되었나이다. 오직 하늘은 총명하사 마땅히 질병의 화를 신 등의 몸에 내리시고 원수로 하여금 오랫동안 숙아에 곤고함이 없도록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하였다. 을미에 왕의 질환이 위독하매 부축되어 앉아 재추신을 보고 이르기를 짐이 부덕하므로 재앙을 내려 병이 낫지 아니히니 장차 어찌 신민의 위에 처하여 군국의 일을 총람하리오. 태자가 비록 유소하나 덕행이 일찍 이루어졌으니 제공은 동심 협보하여 조상의 터전을 떨어트림이 없게 할지어다 라고 하니 군신이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말한 바를 알지 못하는지라.  왕이 태자를 불러 말씀하기를 나의 병이 심히 위중하여 병세가 다시 낫지 아니하리니 이에 중한 소임을 놓아 너에게 전해 돌리노라. 내가 나의 평생소행을 추사할 때 득은 적고 실은 많았으니 삼가 나를 본받지 말고 오로지 마땅히 성인의 도를 배우고 우리 태조의 교훈을 받들어 직위에 게으르지 말고 길이 백성을 평안케 할지어다 라고 하니 태자가 머리를 숙여 울며 능히 일어나지 못하거늘 왕이 한안인에게 명하여 국(#)를 취해주고 유조하기를 짐이 천지의 대명을 받고 조종의 유업을 받들어 삼한을 엄유한지 18년에 그동안 쇠함을 붙들고 폐해를 구하여 만민으로 더불어 경사를 같이하려고 소의간식하여 일찍이 하루 잠시도 안일하지 못아였노라 그러므로 걱정 근심이 생각에 쌓이고 병이 때가 넘도록 더하기만 하고 낫지는 아니하여 드디어 중태애 이르렀도다. 권국사 해는 슬기롭게 현철한 성품은 하늘로부터 점지되었고 원량한 자질은 인망이 무성하니 마땅히 유명을 이어 써 왕위에 나아갈지어다.  무릇 군국의 중대사는 모두 사군의 처분을 받게하고 상복은 날로 달을 바꾸고 산능제도는 힘써 검약에 따를 것이며 방진 주목은 다만 본처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여 함부로 치소를 이탈하지 못하게 하고 성복은 3일만에 벗게 하라. 아아 사생은 상도이니 사람의 도피하기 어려운 바이라. 시종이 마땅함을 얻었으니 짐이 또한 무엇이 유감스러우리오. 오히려 종묘 사직에 쌓인 복지에 힘입으려 하노라. 신료들은 마음을 합하여 다같이 사군을 도와 길이 왕실을 평안케하여 우리 국운으로 하여금 무궁히 드리우게 하라 아아 너희 여러 신민들은 마땅히 나의 뜻을 체득할지어다 라고 하였다. 병신에 붕어(#,2-193)하니 선정전에 빈하였다. 수는 45요 재위 17년이었다. 시호를 문효라 하고 묘호를 예종이라 하고 성남에 장사지내니 능을 유능이라 하였다. 인종 18년에 시호를 명렬이라 가하고 고종 40년에 제순이라 가하였다. 사신의 찬에 이르기를 예종은 천자가 명철하여 일찍이 태자로 있을 때 현사를 예접하고 효제를 돈행하더니 즉위함에 미쳐 소간(소의간식)으로 걱정하고 부지런하며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림을 구하였도다. 그런데 다만 뜻을 국경개척에 두고 변공을 요행으로 바라고 적과의 틈이 가시지 아니하였거늘 중화의 풍습을 흠모하고 호종단을 신용하여 자못 그 말에 미혹되어 소실이 있음을 면치 못하였도다. 그러나 용병의 어려움을 알아 원한을 버리고 화호를 닦아 인경으로 하여금 감동사모하여 와 복종케 하였고 환과를 어여삐 여기고 노인을 기르며 학교를 개설하여 생원을 교양하고 청연(#,2-194) 보문의 양각을 두어 날마다 문신으로 더부어 육경을 강론하고 무를 눕히고 문을 닦아 예악으로 풍속을 이룩코자 하였도다. 그런고로 한안인이 말하기를 17년의 사업은 가히 후세에 끼침직하도다 하였으니 믿음직한 말인저 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