考古學

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吾心竹--오심죽-- 2009. 3. 28. 19:32
경향신문

[한국사 미스테리](1)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기본 문헌의 부족은 한국사, 특히 우리 고대사를 숱한 논쟁거리로 만드는 요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일제 식민사학의 뿌리마저 워낙 깊고 재야사학의 이설(異說)까지 우후죽순처럼 나타나는 등 올바른 한국사의 기틀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경향신문은 지난 30년간 무령왕릉을 비롯, 천마총·황남대총·안압지·경주 월성해자·감은사지 등 현장발굴을 주도한 고고학자 조유전 선생(전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본 한국사 미스터리’를 장기 시리즈로 기획했습니다. 월 3회씩 펼쳐지는 조유전 선생의 역사기행은 풍부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수천년간 잠들어있던 한곳 한곳의 유적, 한점 한점의 유물을 단서로 펼칠 흥미로운 여행이 될 것입니다. 〈편집자주〉

1974년 11월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로 주변의 논밭에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작업은 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서둘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연못 준설작업하던중 발견-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발굴조사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목제의 양물 즉 남근 모조품이 있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안압지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곤란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인데 한자 다섯치였다 하니 40㎝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인데 여덟치였다고 하니 20㎝가 넘어 랭킹 2위인 셈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남근은 17㎝가 넘었으니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로서는 랭킹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언이다. 아무튼 이 양물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어언 3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이 남근 모조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된 모습을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이나 다름없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남근숭배·놀이기구說등 용도 분분-

남근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岩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儀式)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불교 도입전 신라 성문화 개방적-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 역시 신앙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 속해있는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 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 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이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고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 신라시대 유물에 나타난 성행위의 토우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이 국가종교로 공인하고 있는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의 성기나 성행위의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기로 봐서 ‘內室 자위용’ 유력-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이 성행했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 모럴이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은 분명 실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 고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하게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 모조품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궁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조유전씨 약력

▲1942년 경남 마산생 ▲66년 서울대 고고학과 졸업 ▲69년 국립문화재연구소 촉탁(임시직) ▲71년 무령왕릉 발굴 ▲77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장 시절 안압지·황룡사지·감은사지·월성·황남대총·천마총 등 주요 발굴 조사 주도한 뒤 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장·유적조사연구실장을 지냄 ▲98년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취임, 2002년 정년퇴직 ▲현 문화재위원 3·6분과 위원 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