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미스터리](3)하남 춘궁동 二聖山城
경기 하남 춘궁동 한강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성산성(二聖山城)에 서면 왜 이곳이 요충지인지를 알 수 있다. 서북쪽으로 그 유명한 아차산과 함께 한강이 잡힐 듯 한눈에 들어오고 동남쪽으로는 하남시의 평지가 코앞에 보인다. 1,500~2,000년전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유역을 둘러싸고 피를 말리는 싸움을 벌인 곳. 정상에 서면 아직도 그 함성이 들리는 듯하다. 그러면 이 산성은 누가 쌓았고 누가 사용했을까. 1986년 지대한 관심 속에 첫 발굴을 시작했으나 17년이 지난 지금에도 초축국(初築國)이 어디냐는 처절한 ‘3국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수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후손들에 의한 ‘삼국 대리전’이 쉼없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1986년 첫 발굴후 ‘初築國 논쟁’-
◇삼국의 치열한 각축지=표고 209.8m, 총둘레 1,925m, 내부면적 4만7천2백평인 이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쌓은 석축성이다. 이 성을 두고 조선 후기 학자인 홍경모는 온조 고성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실학파의 거두 다산 정약용과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의 태두라고 할 수 있는 이병도가 현재의 하남시 춘궁동 일대와 교산동 일대를 백제초기 한성백제의 도읍지인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으로 비정함으로써 고대사학계에서는 대부분 이 설을 따라왔다.
더구나 ‘이성(二聖)’이란 백제시조인 온조, 미추홀에서 나라를 세웠다는 비류(秘流) 두 임금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초기 백제의 도읍과 관련되어 한성백제는 AD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백제가 수도를 웅진, 즉 지금의 충남 공주(公州)로 비운의 천도를 함으로써 수도를 잃었다. 고구려에 일시 점령당했던 백제의 도성은 그 후 553년 신라 진흥왕 때 지금의 한강이 신라수중으로 들어가면서 한강 쟁탈전은 최후로 신라의 차지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서 본다면 하남시 중심에 해당하는 춘궁동과 교산동 등이 백제의 도읍지가 되고 평지를 감싸고 한강변에 연한 이성산성 역시 한성백제 때 축조된 산성으로 보는 것이 일견 매우 타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것이다.
-정약용·이병도 "백제 하남위례성" -
◇“어! 왜 신라 유물만 나오지?”=영락한 이성산성의 옛터는 1980년대 들어 다시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경기 하남시가 향토 사학자들의 열정을 등에 업고 산성의 정확한 성격을 파악, 백제문화를 규명키로 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86년 이성산성에 대한 학술발굴조사가 하남시의 주선으로 한양대박물관 주관으로 처음 실시되었다. 그때만 해도 이 산성이 백제성임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발굴결과 출토되는 유물이 대부분 신라시대 유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기대했던 백제시대의 유구와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후 지금까지 10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지만 발굴 담당자보다 오히려 발굴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논란만 증폭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백제가 쌓은 백제산성이라는 주장에 고구려가 쌓은 고구려 산성이라는 주장도 함께 제기되어 결국 고구려·신라·백제 성이라는 주장들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각기 나름의 논리를 앞세우고 있어 어느 주장이 바른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형편이 되었다.
한 지역의 고고학적인 학술발굴을 10여차례나 계속하고도 계속 논란중인 발굴현장은 아마 이 이성산성이 처음일 것이다. 이제 지금까지 조사를 통해 얻어진 고고학적 자료의 정리를 통해 나름의 결론을 도출하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소모적인 논쟁을 끝낼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백제 아닌 신라·고구려 유물 발굴-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백제=98년까지 6차례의 발굴조사를 진행한 결과 산성내의 각종 건물터와 연못 등의 규모가 확인되고 아울러 출토되는 유물 가운데 토기 등이 지금까지 알려진 6~7세기 신라시대 유물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글자가 쓰인 목간에 戊辰(무진)이란 간지(干支)가 608년으로 신라시대 목간임이 밝혀져 이성산성은 신라시대의 산성으로 자리매김되어 갔다.
그런데 99년 제7차 조사에서 중국 당나라에서 사용한 자(唐尺)가 출토됨으로써 축성에 사용된 길이 계측 도구가 밝혀지는 성과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신라성 주장을 뒤엎을 자료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이듬해 8차 조사에서 고구려에서 사용된 고구려자(高句麗尺)와 고구려 관직인 욕살(褥薩)이 쓰인 목간이 출토되었다고 발굴단이 공개함으로써 이 산성이 고구려와 관계있는 고구려 산성일 가능성으로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산성의 진정한 축조세력은 과연 어디에 두어야 하느냐가 또다시 뜨거운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2001년 제9차 발굴조사에서는 동문터와 성벽 일부가 조사되었다. 가파른 위치에 마련된 동벽과 동문터의 규모가 밝혀졌으나 백제유물은 1점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이때 현장지도회의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발굴지도위원의 한 사람인 모 대학 교수가 “백제산성이 분명한데 발굴을 잘못해 엉터리 발굴이 되었고 출토된 백제유물은 공개하지 않고 숨겼으니 앞으로 이 대학에 발굴조사를 맡겨서는 안된다”고 공식 회의석상에서 폭언을 퍼부은 것이다. 이른바 ‘백제파’의 강한 반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해 제10차 조사때 성벽의 동벽과 동문지 일대를 추가 조사하였으나 역시 백제유구나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현단계 발굴로선 "신라 것" 유력-
◇“이성산성은 결국 신라가 축조했다”=현재 발굴을 통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현재 남아있는 이성산성은 신라시대 축조되어 사용되었던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우선 백제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유구와 유물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출토유물 가운데 명백하게 시대를 알 수 없는 경우 삼국시대로 표기한 예는 있다. 그런데 이는 백제도, 신라도 될 수 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 해석에 따라 백제유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몇몇의 백제유물이 수습되었다고 바로 백제시대로 속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성벽조사에서 수습된 선사시대 유물인 돌로 만든 홈자귀(有構石斧)나 돌도끼(磨製石斧)가 출토되었다고 선사시대 산성으로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이성산성은 마지막 배수의 진이 아닌, 한강을 넘어 남으로 접근하는 상대를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임이 분명하다. 향토 사학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줄기차게 주장해온 교산동의 이른바 ‘백제 왕궁터’ 역시 발굴 결과 백제시대의 유적이 아닌 통일신라 후기에서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존속되었던 건물터로 밝혀진 것을 주목해야 한다.
이제 한차원 높게 생각해보자. 즉, 현존하는 산성을 누가 쌓았는가에 초점을 맞추자는 것이다. 아전인수격인 주장은 역사왜곡의 전주곡임을 알아야 한다.
고고학은 소설이 아니다. 머릿속의 상상만으로 해석해서는 잘못 역사왜곡의 주범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발굴조사는 어디까지나 정확한 발굴을 통해 정확한 자료를 학계에 제공하는 것이 가장 큰 덕목이다. 그 유적의 성격은 발굴담당자가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다. 학자는 그 자료를 가지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논문으로 남기면 된다. 선학들이 남긴 논문을 후학들이 분석하고 비판함으로써 한 단계 학문이 성숙되고 발전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국 고고학도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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